근래 읽었던 책들 중 가장 좋았다'에디톨로지'는 '편집력'이다. 그가 말하는 편집력은 주체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되어 해석가능한 허브지식(메타지식)이다. 여기서 메타지식은 응용, 해석 가능한 지식 자체를 가리키기고 하고, 지식을 분류 체계화하는 방법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는 '편집력'이라는 메타지식으로 근대와 현대를 해체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중간중간 김정운 교수의 이상한 섹드립이 나와 좀 짜증나긴 하지만, 정말 깜짝 놀랐다. 김정운 교수, 시덥잖은 농담이나 지껄이는 이상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대박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의 다른 책과 이 책에서 소개한 다른 책들을 더 많이 찾아 읽고 싶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말하는 것은 데이톨로지가 단순히 짜잡기하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닌, 지식과 지식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메타지식으로서의 유용한 방법론이 '에디톨로지'라는 거다. 그럼으로 그는 '지식과 문화''관점과 장소''마음과 심리학'을 분석한다. 



우선, '지식과 문화'에서는 지식과 문화의 주체가 바뀌었음을 말해주며 도구의 발명이 인간의 의식을 변하게 했다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마우스가 어떻게 링크와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가는 것을 도와주었는지, 그 세상의 발견으로 누구나 지식의 권력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지식권력은 아카데미의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권력을 가진 지배층들에 의해 장려되었다. 그들은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을 나누며, '객관적 지식'이라는 이상을 건설했다. 그렇지만 현재재는 '검색과 발견을 통한 지식의 에디톨로지가 미래의 지식권력을 결정한다.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의 편집 가능성이 지식의 효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103)고 말한다. 개인이 마우스라는 도구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재조직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가  이 이야기를 위해 독일의 카드 방식 공부와 우리나라의 노트 방식 공부법에 대해 비교해주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두 공부법의 결정적 차이는, '편집 가능성'이다. 편집 가능성은 주체적 시선을 필요로 한다. 그 전에 주체적 시선은 대부분 권력을 가진 이들이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면 정부부처를 자신의 지식으로 재배치하고, 경영진이 회사의 팀조직을 재조직하는 것처럼. 클래식음악에서는 카라얀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음악을 재정의했다. 대부분의 마케팅책에서 이것을 '컨셉의 재정의'라고 뭉뚱그리는데 비해 저자는 그 이면을 한발짝 더 파고 들어간다. 



'편집가능성'에서 필요한 주체적 시선은 무엇일까? 주체는 곧 관점을 말한다. 그는 원근법을 시작으로 공간 편집과 우리의 주체의식, 개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발달되어 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원근법의 발견으로 발달된 서구 과학문명이 어ㄸ허게 가능했는지 고찰한다. 2장.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다. 그는 원근법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서구 원근법의 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 소실점에 대칭되는 위치의 시선이다. 바로 이때부터 서구 '객관성의 신화'가 시작된다. 세상을 보는 눈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보는 사람마다 세상이 매번 달라져서는 안 된다. 서구 원근법은 모든 사람의 관점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 관점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려는 시도다. 오늘날 다양성과 상대성을 뜻하는 관점, 즉 퍼스펙티브의 시작은 이렇게 '독점적'이고 '권력적'이었다. 


둘째, 3차원 세상은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2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합리성의 시작이다. 하나뿐인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물체는 '거리의 비례'에 따라 객관적 좌표가 정해진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적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이렇게 원근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서구 객관성과 합리성의 신화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소실점, 즉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준이 철저하게 '자의적'이고 '권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소실점을 누가 찍느냐에 따라 2차워에 투사된 결과물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무지 이 소실점의 위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철저히 권력적이다.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바로 이 권력을 아주 은밀하게 은폐하는 데서 출발한다. 145



그런데 그가 말하듯이 원근법의 발견은, 객관성의 발견이 아니다. 주체의 발견이다. 원근 법 자체가 소실점의 위치를 정확히 산정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의 위치를 은폐한다. '소실점의 위치를 화가 마음대로 정하놓고 모든 관찰자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지점에 소설점을 맞춰야 한다고 우기는 태도는 지극히 권력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말처럼 '권력이 은폐된 소실점을 사람들이 여전히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원근법은 '관점'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관점'은 필연적으로 '권력'의 문제를 낳는다. 시선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시선을 소유한자가 통제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지면 조망권이 좋은 곳에 별장을 사는 것처럼, 그것이 세속적 권력이든, 미학적 권력이든, 우리는 시선의 권력을 추구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에서의 불안함을 상쇄하기 위해, 시간을 분절하여 통제가능한 것인양 만들었고, 3차원의 세상을 2차원의 세상으로 재현하는데 힘을 모았다. 그리고 재현의 시대에 은폐하고 있던 원근법의 권력을 발성하고, 주체의 편집에 따라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편집의 시대'가 온 것이다. 



편집의 개념에서 중요한 건 계몽 담론이 지나고 난 후의 상호주관성이다. 즉 '일리의 해석학'. 네 말도 일리가 있네,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하는 시대가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소실점이 하나가 되어 주체를 은폐한ㅇ ㅝㄴ근법부터 주체의 소멸을 말하는 현대까지 '주체'의 상대성에 대해 말한다. 



3장은 마음과 심리학이다. . 



인간의 의식을 가능케 하는 각종 근대적 개념이 역사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이 에디톨로지적 인식론이다.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역사관과, 역사의 내용은 언제나 편집되고 구성된다는 에디톨로지적 인식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이다. 


역사적 사건은 물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도구, 즉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실중주의적 역사 서술의 근본 전제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방법론이다.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메타적 편집 테크닉은 피셀 푸코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에 이른다. (270)



현대 개인의 탄생이 지극히 현대심리학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한번도 생각치 못했다. 나는 근대 개인의 탄생에만 관심을 집중하며, '개인은 편집된 것'이라는 것을 거듭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내가 몇년째 공부하고 있는 그 수많은 주제들, 미디어, 환경, 근현대사, 문화, 법, 젠더, 현재 하고 있는 철학까지 이 모두를 관통하는 문장이 나왔다. 즉, '각종 근대적 개념은 역사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편집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편집한 주체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그것을 편집했는가? 나는 우리가 사는 근대의 생활문화상을 만든 이들이 '근대 부루주아'의 기획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부루주아의 생각에 동조하고 그 생각을 따라가려 했던 다른 많은 이들의 욕망이 아니었나 싶다. (여기서 현대심리학과의 밀월이 시작되는 것 같다) 부루주아가 평범한 개인이 생득적 계급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욕망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부루주아의 모습을 역할모델로 받아들였고, 그 모델이 '문명화된것'이라는 이미지가 퍼졌다. "서구의 개인이란 '문명화 과정의 개별적 반복' , 즉 발달과 성장의 산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의 시선이란 누군가의 시선을 뜻하기는 하지만, '계몽'이나 '억압적 권력'만으로 사회 전체가 이렇게 거대한 전환을 이룰 수는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근대와 현대의 발전에는 각 주체들의 '상호주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상호주관성의 키워드를 뽑고, 콘텍스트를 고려해 콘텐츠에 의미를 부여해 재가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김정운 교수가 말하는 '에디톨로지'라는 것일 것이다. 그 에티톨로지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채 행했던 수많은 행동들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 함의를 설명해준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합리화하거나 돌아보게 됨으로서 그 행동을 강화하거나 수정 보완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회과학이 해야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아닐까.



메타지식이란 결국, 시간과 공간, 철학과 인간의 삶에 의미(깊이)를 부여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의미란 자기만의 관점, 자기만의 깊이, 자기만의 의미, 죽'주체'를 내세우는 의미부여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제까지 여러 지식을 허겁지겁 습득하는데만 바빴을 뿐 나만의 의미부여, 지식가치, 아니 문제의식이라고 제대로 가지고 있나. 이 책의 마지막은 결국 데이터베이스 관리로 끝난다. '에디톨로지란 결국 자기만의 지식분류체계를 만드는 것'인데, 여기서 '자기'란 무엇인가(관점과 주체), 무엇을 키워드로 분류할 것인가(마음과 심리학), 어떻게 분류한 내용을 채울 것인가?(지식과 문화) 그리고 이런 에디톨로지는 어느 시대에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 그는 이 책 한 권에 '에디톨로지'라는 메타지식을 이용하여 계층적 네트워크적 지식을 그만의 키워드로 잘 정리해놓았다. 어찌 부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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