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오래, 열심히 일해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월급보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을 못하면 자존심이 상했다. 인정 받고 승진할수록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인간관계는 일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당시 내가 읽던 책들은 피터 드러커의 <프로페셔널의 조건>, <매니지먼트>같은 책들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그의 책을 읽곤 했다.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더이상 내가 원하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육아의 우울증에서 어느 정도 헤어나고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 나는 분명 프롤레타리아인데 맑스의 바램대로 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을까? 왜 나는 좀더 오래, 열심히 일하면서 부르주아의 인정을 받기 원하는걸까? 왜 좀더 바람직한 프롤레타리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걸까? 게다가 일 못하는 사람은 싫어지기까지 하던데? 내가 말없이 열심히 일할수록 나는 노예의 삶을 살 뿐이라는 걸 아는데. 인정, 성취, 성과와 같은 달콤한 말 뒤에는 착취를 합리화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앎에도 왜 나는 거기에 충실히 복무하는가?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왜 나는 모범적 프롤레타리가 되지 못해 안달하지? 어릴 적 채워지지 못한 인정욕구 때문인걸까? 노동의 성과를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체성 심지어 가치와 동일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걸까? 경영학과를 나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나에게 프로페셔널한 노동자상은 너무나 딱 맞는 옷이었던 걸까? 나는 푸코가 말한 탈근대 권력의 자기통치에 너무나 익숙해진 사람일까? 자기계발의 신화에 중독되어 있었던 걸까? 이유를 찾기 위해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자본론 공부>을 읽을 때도 쉽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원래 자본주의 자체가 이런 인간형을 원하는데 나는 너무 잘 적응한 걸까? 어쩌면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상적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노동윤리는 인종화되었을 뿐 아니라 젠더화된 구성체이다. 노동윤리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여성 역시 배제된 타자로서 기능해 왔다. 미국 내에서 역사적으로 노동은 임금노동과 동일시되고, 임금노동은 남성성과 연결되었으며, 무급의 가사노동은 비생산적인 여성의 일로 여겨졌다. 여성의 타자화는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 가능했다. 산업화 초기, 가정 내 무급노동이 비노동의 (자연화되고 여성화된) 모델로 정립되면서 (이제 남성화된) 일의 개념과 대비를 이루며, 그런 일의 개념을 지탱해 주게 되었다. 여성화된 가사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이와 더불어 등장했다. 105



그렇다면 이상적 프롤레타리아란, 누군가 집에서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기에 돌봄에 신경을 쓰지 않고,출퇴근 시간 포함 오전 8시부터 7시 정도까지 회사라는 장소에 꼬박꼬박 나올 수 있으며, 회사가 원하는 성과를 위해 결과를 보여주며 필요하면 회식이든 야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말은 곧 현대의 노동시장은 전업주부가 있는 성인남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 조직, 노동이라는 근대적 사회조직은 젠더와 상관없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세상 같지만 너무나도 젠더차별적인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노동환경은 여성에게만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입장 티켓은 주어졌지만 남성 또한 그곳에서 부르주아를 위한 자기착취를 해야 한다. 그 상황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입장티켓을 달라고, 남성과 같이 인정받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게 다인가? 그것만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가? 이 책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의 저자 케이시 윅스는 노동윤리와 가족윤리에 대해 재고해 볼 것을 권한다. 임금노동 제도, 그리고 사유화된 갖어이 생산과 재생산의 중심 구조로 기능하는 모델. 이 두 가지를 모두 거부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저자는 더 많은 일과 더 나은 일을 요구하는 것에 더해  '더 적은 일' 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낟. 



이제까지 검토했던 세 가지 이론적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변화를 위한 세 가지 다른 처방을 도출할수 있다. 각각 더 많은 일, 더 나은 일, 더 적은 일에 대한 요구이다... 더 많은 일에 대한 요구는 개인이 생계를 해결하는 위한 수단이 일일 때에는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적은 일에 대한 요구 역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168



물론, 이런 그의 말은 일할 수 없는 여성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주자고 하는 운동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이제 필요없다는말도 아니다. 더 적은 일을 요구하는 것이 더 많은 일, 더 나은 일을 요구하는 것과 상충되거나 대립되지 않지만 현실의 정책에서는 얼마든지 상충되거나 대립될 수 있기에, 복잡함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공평하게 배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않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녀수당을 준다거나, 일인당 기본소득 얼마씩을 일괄적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단순한 수준이 아니다. 그 안에는 노동과 젠더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고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 속에 가사노동의 거부가 있다. 



가사노동의 거부는 지금 가사노동이 조직되고 분배되는 방식과 그 도덕화를 함께 거부하는 것뿐 아니라 가족 기반의 재생산 모델의 보편적인 두 가지 대안을 거부하는 것까지 퐘한다. 그 두 가지 대안 중 첫 번째는 가사노동의 상품화이다. 이는 다른 종류의 상화로, 주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기본 해결책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두 번째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로, 보육소, 공공 세탁소와 매점, 지역 식당 등처럼 국가가 부담하는 서비스를 통해 가사노동을 공공화하는 것이다. 이는 몇몇 급진적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대안이다. (...) 델라 코스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매점도, 보육시설과 세탁기, 식기세척기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권을 원하기도 한다." 선택권을 가지려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갖는것'은 적게 일하는 것을 뜻한다."200



1년전 이맘때 쯤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델라 코스타의 글을 처음 읽었었다. 그때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정말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원하는 건가? 그건 누가 주는거지? 얼마나 받아야 하지? 그걸 주면 오히려 가사노동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 혹은 여성들이 정말 다 가사노동만 하려하지 않을까? 이런 복잡한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설정하면 당연히 실패하지 않나? 등등. 이런 나의 의문은 1년 넘게 잠들어 있다가 이 책을 보고 비로소 풀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옹호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했듯이, 가사임금 요구는 그저 요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의 관점으로서 보자면, 요구에 담긴 내용만이 문제가 이날 "우리가 가사임금을 받기를 요구"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즉 요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요구로부터 이끌어질 수 있을 비판적 분석이 문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사임금 요구는 실체적 개혁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사회 내- 임금노동 시스템 내 그리고 그 위성격인 가족 내- 여성의 지위를 가시화하고 또 이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독려할 기회로 여겨졌다. 이 목적에 맞춰 지지자들은 가사임금이 탈신비화의 동력, 탈자연화의 수단, 인지적 배치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4



그리고 저자의 기본소득 주장은 가사노동 임금운동가들이 요구했던 것처럼 하나의 요구이기보다 하나의 관점으로 보여진다. 가사임금 운동가들은 "얻어 낼 만한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겨냥했다." 그들이 소책자로 펴낸 <모든 정부에 보내는 공지>에는 이렇게 가사임금 요구를 이렇게 최종 선포한다. "전부 현금으로, 소급 적용하여, 당장 가져올 것. 한 푼도 빠짐없이." 크아. 완전 멋지지 않은가. 이것에 대해 현실가능성이니, 정치적 실천 여부를 말하며 철부지 어린아이 보듯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가사노동 임금 요구는 그 자체로 '혁명'은 아니지만 '혁명적 전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노동과 가족제도의 급진적 전환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본소득 요구에서 가장 많이 불편을 자아내는 지점은, 그 비용이 아니라 그 요구에 깔린 윤리에 있다고 한다. 기본소득 요구가 노동윤리를 훼손하고, 검약과 저축의 윤리, 양보의 정치, 노동 계약의 이상과 노동을 통한 사회적 상호성의 이상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어찌보면 '유토피아적 요구'로 보일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전통적 이분법을 거부하고 더 발본적 지향성과 수행성을 가질 수 잇다고 믿는다.셀마 제임스의 표현대로 "이기고자 투쟁할 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을 얻게 되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닌 일하기 위해 살고 있는 이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주체로서 남성노동시장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었지만 가족노동시장에서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라는 단어 뒤에 숨는 것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델라 코스타의 표현대로 나는 '선택'을 원한다. 내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그 선택에 따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 무슨 선택을 하든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 그리고 시간주권이 나에게 있는 삶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너무 유토피아적은 아닐까? 이 책의 번역가 제현주 님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게 이런 요구들(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는 조건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주 30시간 노동)은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낭만적인 유토피아주의로 폄훼될지도 모르겠다.(...) 다른 세상은 가능할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짐나 마치 다른 세상이 가능한 듯이 요구하고 행동하는 삶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는 이 책을 옮기면서 그렇게 믿게 되었다."


나도 그렇게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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