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고 생각해보니, 4월 정리를 미처 하지 못했다. 한달에 한 번 쓰는 일상정리인데도, 이렇게 유지하기가 힘이 든다. 너무 헤이해지지 않게 신경쓰자. 라고 썼다가 갑자기 화가 났다. 사실 헤이하긴커녕 엄청나게 바빴다. 



우선 5월 5일 어린이날이 있었다. 봄 내내 책만 붙잡고 사느라 아이들에게 신경못써준것 같아 미안해서 남원으로 놀러갔다. 놀러가는 길에 교통사고. 아이들과 모두 함께 타고 있었기에 깜짝 놀랬지만 다행히 가족 모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5월 내내 가족 모두 물리치료 받으러 다니느라 안그래도 바쁜 시간 쪼개고 쪼개서 살았다. 그렇지만 다치지 않았다는데에 우선 감사를. 그리고 어버이날도 있어서 시댁식구들도 만났다. 



제발 하루만이라도 나를 쉬게 해달라고 혼자 1박 여행을 예약했다가 막판에 취소했다. 아이들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 휴양림에 갔다. 휴양림에서 팀발표를 준비하느라 계속 노트북만 보고 있었다. 석가탄신일에는 절에도 갔다. 그 와중에 회사 일도 계속 했고, 기말 페이퍼 초안도 하나 냈다.   



책을 무지하게 읽었고, 엄청나게 읽으면서 오히려 집중력은 떨어졌다. 눈에 피로도가 쌓이는지 자려고 누우면 눈물이 줄줄 나오고 활자가 안구에 맺혀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이해력과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짐을 느끼고, 동시에 자신감도 뚝 떨어졌다. 아는 것도 잘 이야기하지 못하고, 모르는 것은 왜 모르는지 잘 모르겠다. 암튼 여러모로 상태가 좋지 않다. 



이번달에는 주로 많은 논문을 읽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정리해본다. 



<이주와 젠더>에 있는 앨포크의 논문 <젠더와 재생산>을 읽으며 '재생산가능성'에 따른 여성범주를 나누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버틀러 이후 여성 범주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항상 나를 당황케한다. 생물학적 성조차 사회문화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에 결국 젠더는 우리의 수행성으로 나타난다고 버틀러는 말한다. 즉, 섹스는 없고 젠더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젠더를 수행한다는 그의 말은 마치 그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어떤 젠더라는 이데올로기가 있고, 그것에 우리가 그 부름에 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간다면, 여성학은 왜 필요한가? 여성주의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앨코프는 '재생산가능성'으로 돌파구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이것이 여성의 범주를 생물학적 결정론의 틀로 묶지 않으면서 여성학의 실행들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는데에 나 또한 동의한다. 



<전진하는 페미니즘>에서 <상징계주의에 대한 반론>을 읽었다. 아. 너무 어려웠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몇번이나 읽었는데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저자는 라캉과 크리스테바를 비판하기 위해 이 논문을 썼는데, 나는 라캉과 크리스테바도 잘 모르고, 사실 크리스테바는 작년에 <여성괴물>도 읽었는데 그게 이런 내용이었나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아. 나는 바보인가. 나는 무엇을 읽었던가. 한숨만 나온다. 낸시 프레이저의 다른 논문들은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하아. 슬프다 정말. 









아이리스 영의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억압의 다섯가지 모습>을 읽었다. 오~ 간만에 아주 재미있는 챕터였고, 복잡한 억압의 중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전에 페이퍼로 썼으니 통과~











혹실드의 <감정노동>은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개념이지만 2009년 처음 나왔을때는 엄청 센세이션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그런데 내가 너무 민감해져버렸나? 10년 넘은 시점에 나온 사회학 책들은 개념을 다 알아버려서 그런지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도 당시에는 특별한 책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흔한 일이라,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더욱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은 것 같아 조금 무딘 느낌까지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달라지는 노동의 모습을 포착하고 그것을 '감정노동' '관리된 감정'이라는 개념들로 설명해내었던 것은 대단한 것 같다. 








'여성의 우정'이라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이리도 얄팍하고 재미없게 써내려갈 수 있다니, 정말 화가 난다. 나 같으면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혹은 '여성에게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세간에 널리 퍼져있는 믿음(?) 들이 왜 나오고 어떻게 나왔는지 썼을 것 같다. 


호모포비아와 미소지니로 유지되는 호모소셜한 세계에서 '여성의 우정'따위는 그들에게 신경쓸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우리 여성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제 여성들은 학교에 다니고, 사회활동을 같이 하면서 그들만의 끈끈한 우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실제로 나도 사회생활을 같이 한 직장동료들과 회사를 그만둔지 10년이 넘었건만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우리의 우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게 여성들에게 또 다른 대안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는데, 그러기엔 이 책은 너무나 깊이가 없다 ㅠ.ㅠ



발제때문에 열심히 읽긴 했지만 역시 화가 나는걸 참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내가 요즘 화가 많이 나나 보다 --;; ) 돌봄이 젠더화되어 여성의 발목을 잡고 가격을 후려치고 있는 상태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의 돌봄윤리를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무 유토피아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유토피아적인 것을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현실은 그만큼 더 제약될 것이고, 해방의 아이디어는 더욱더 협소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악용될 여지가 너무나도 많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 현실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할 준비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널리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다;;; 






 사라 아메드의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는 근래 읽은 책중에 가장 충격적인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아주 깊이 우울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싶지도 않고, 그런 삶은 나에게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정동소외자로 살아가기에는 나는 너무 평범하단 말이다. 평생 행복을 찾지 않는 것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그냥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 싶다. 아, 그런데 또 이런 현실에서는 그것조차 마음데로 되지 않는구나. 하아. 괴롭다. 


암튼 그래서 사라 아메드의 생각을 좀더 알고 싶어서 <정동이론>을 읽었다. 괴로워하면서 읽는 나는 무엇인가. 에잇. 






그리고 <아주 친밀한 폭력>을 다시 읽고,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를 읽고 <시간을 묻다>를 아주 조금 읽었다. 

<아주 친밀한 폭력>은 다시 보아도 최고의 책이고 나머지는 글쎄... 지금 우리가 읽기에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

 

 














간신히 5월도 지나갔다. 이제 6월 수업은 2주만 버티면 되고, 기말페이퍼만 정리해서 내면 된다. 어쨌든 시간은 갔다. 주름이 많이 늘긴 했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방학 동안 제대로 공부좀 하고 싶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다. 글쓰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공부때문에 글을 못 쓰고 있다. ㅠㅠ 이러다가 계속 못 쓰게 될까봐 걱정도 된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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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2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네 2018-06-07 22:0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응원글 보니 눈물이 나네요 ㅠ.ㅠ 며칠간 또 자학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지금에야 댓글을 보고 힘을 내어봅니다. 항상 공부하시는 단발머리님도 멀리서나마 응원할께요!! 언제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저도 단발머리님 응원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