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처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 만에 대해 강의하면서 가장 많이 다룬 작품은 중편 <토니오 크뢰거>(1903)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만큼 특별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매번 다룰 때마다 작품의 문제성에 감탄하게 된다. 만의 작품세계와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가성비도 만점인 작품. 만의 작품세계에 한정하면 앞서 발표한 장편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이 어떤 작가에 의해 쓰였는지 알게 해준다. 토마스 만의 자기소개서 역할을 한다고 할까.

그렇지만 다른 작품이 그렇듯이 얼마든지 다른 문맥에도 위치시킬 수 있다. 가령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1897),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와 나란하게 놓인 <토니오 크뢰거>도 있는 것. 세 작품이 나란히 호명된 건 대학 1학년 때 읽은 김윤식 선생의 <한국근대문학의 이해>란 책에서였다. 별도의 출처가 없다면 이 카테고리의 저작권은 김윤식 선생에게 있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막연한 동경과 경탄을 불러일으킨, 이 세 작품에 대해서 나대로의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난해에야 오랜만에 <말테의 수기>를 다시 읽고서 강의했기 때문. 세 작품을 아우르는 시야를 갖게 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이 된다. 스무살 때의 느낌이 개념적 인식으로 구성되기까지 소요된 시간이다.

통시적으로 이 세 작품은 세기 전환기 유럽의 교양계급 혹은 문화귀족의 세계 인식과 감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시대사적 의미를 제쳐놓고 좀더 보편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내게 세 작품은 ‘28세의 의미‘를 다룬 작품들로서 의미가 있다. 지드와 만, 릴케는 비슷한 연배로 같은 세대에 속하는데 1869년생인 지드가 1875년생 동갑내기인 만과 릴케보다 여섯 살 많은 정도다. 그리고 <지상의 양식>과 <토니오 크뢰거>는 두 작가가 각각 28세에 발표한 작품이고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35살에 발표한 작품이지만 28세 때인 1903년 파리 체류시에 쓴 소설로 주인공 말테의 나이가 28세다.

산술적인 나이로 28세가 특별한 나이는 아닐 테지만 어림해서 28세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다(대학을 졸업하면서 진로가 정해질 때쯤의 나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마찬가지겠다). 인생의 진로를 처음 정하는 나이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중간점검과 진로의 변경이 모색될 수 있는 나이다. 작품에 적합한 나이가 있다면 이 세 작품은 28세에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내가 <말테의 수기>를 두번째 읽은 게 그 나이 때였다).

당신이 다시 스물여덟 살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아무도 묻지 않기에 자문자답하자면 나는 이 세 작품을 다시 읽고 싶다. 그곳이 아프리카건, 파리건, 덴마크 해변이건, 어느 곳이든지 간에. 무정형이었다가 마침내 어떤 꼴이 되어가고 있는 인생의 남은 진로에 대해서 숙고하고 싶다. 그 숙고가 결국은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스물여덟은 그 정도 기분은 낼 수 있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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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3-2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이라는 숫자로 시작하는 말들은 참 아련한 느낌을 지니나 봅니다 그것도 스물셋이나 다섯이 아닌 스물 여덟이라고 하시니 이번에는 쓰린 느낌이 쏴하니 전해오네요 쌤덕분에(?) 오늘밤 저에게도 질문 한번 던져봐야겠습니다~다시 스물여덟이 된다면?

로쟈 2019-03-30 13:13   좋아요 0 | URL
어젯밤에 던져보셨나요?^^

2019-03-29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제트50 2019-03-3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동기였다가 고등학교를 다르게
가면서 편지왕래를 시작한 친구가
있었죠. 첫 3년간 우린 딱 한 번 만났고 전화통화도 없이 편지만 오고 갔지요.
저는 이과반, 교내에서 열공분위기로
유명한 반이었고 그 애는 문과반.
학교생활이 매일매일 재밌다고 했지요. 그 때 그 애 편지에 적힌
많은 작가와 작품들. 그 속에 <지상의 양식> <토니오 크뢰거> <말테의 수기>도 있었죠.
지금도 기억하는 귀절.
‘ ...‘지상의 양식‘ 한 권을 들고서 나는
이상한 감동을 느끼고 있어...‘
그 시절의 떨림과 감동으로 어떤 책에
몰두하는 일이 요즘 아이들에겐 있을까요?
나의 28세. 삶의 변화가 일어난 때. 그러고 보면 그 후 10년 주기로
삶의 변화, 이동이 일어났네요,
제 의지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 때
저를 지켜준 책은 없었지요...

로쟈 2019-03-30 13:15   좋아요 0 | URL
한 세대의 기억이네요. 지금은 사라진...

2019-03-30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intin2506 2019-04-08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살이지만 늦기 전에 세 작품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김훈 선생의 새 산문집이 나왔다. <라면을 끓이며>에 뒤이은 <연필로 쓰기>(문학동네)다. 소설 <공터에서>(해냄)와 함께 묶은 것은 프로필에 같이 언급되어서이기도 하지만 표지 색깔 때문이기도 하다. 출판사가 다름에도 같은 흙색(항토색)인 것은 저자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라면을 끓이며>를 책상 가까이에 두고서도 헤아려 보니 3년 반 동안 일부러 읽지 않았는데 딴은 이런 날을 위해서였다. 남들이 미리 먹어치울 때 쟁여놓은 걸 이제 꺼내서 맛보려는 것과 같은 심사다(라면과 달리 유통기한이 없는 걸로 한다면). 그래서 내게는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쓰기‘의 조합이 말 그대로 가능한 것. 그에 합당한 배경을 고르자면 역시나 이번 산문집에도 바탕에 깔려 있는 ‘적막강산‘이어야 하리라. ‘적막강산에서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쓰기‘가 김훈의 세계다.

‘알림‘이란 제목을 단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이 정직한 토로에서 알 수 있지만 그의 산문을 읽는 것은 그가 어렵사리 확보해낸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읽고 음미하는 것이다. 이 질감과 구체성은 때로는 느낌, 때로는 데이터의 형태를 취한다.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고 직접 자료를 뒤적여야 한다. ‘연필로 쓴다‘는 말은 그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글이 쓰이는 과정 자체에 대한 현상적 기술이다. 아마도 ‘손으로 쓰기‘도 가능할 터이나 의미론적으로 중복이기에 ‘연필로 쓰기‘가 되었겠다.

연필을 손에 쥘 때 김훈은 구석기 사내가 주먹도끼를 쥐거나 대장장이가 망치를, 뱃사공이 노를 손에 쥘 때의 엄숙함을 재연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김훈의 ‘지겨움‘은 ‘엄숙함‘이란 뜻으로도 새길 수 있다. 김훈의 산문은 한반도의 적막한 산하에서 밥벌이에 시종하며 일생을 살아온 사내의 느낌과 생각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표본이다. 그것이 한국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쓸 수 있는 최대치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다음달의 끼니는 김훈의 산문집 두 권으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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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중국문학 강의에서 바진(1904-2005)의 <휴식의 정원>(1944)을 읽었다. 바진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장편 <차가운 밤>(1947)을 몇년 전에 읽었고, 이번이 두번째다. 대표작 <가>(1931-32년에 발표되고 단행본은 1933년에 나온다)를 다루려다가 미래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가>는 바진의 초기작이면서 대표작의 위상을 갖고 있는데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이 비교거리가 될 만한 작품이고 강의에서도 그렇게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가족사 소설로는 펄 벅의 <대지>(1931-35)가 비교거리인데 그렇게 비교한 논문을 보지 못했다(중국에는 있을지도).

<휴식의 정원>은 중편으로 <가>를 필두로 한 30년대의 ‘격류 3부작‘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중년(마흔)이 된 작가 바진이 변화된 창작관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작중 화자가 작가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 인물의 것으로 봐야 할지 작가(바진)의 것으로 봐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소설에서 화자가 완성하는 소설의 제목도 친구의 저택 이름인 ‘휴식의 정원‘이고 바진의 소설 제목도 ‘휴식의 정원‘이다. 자연스레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작품의 한 주제가 된다.

다른 주제는 이 저택 ‘휴식의 정원‘의 전주인과 현주인이 갖는 문제성이다. 전주인 양씨 가문은 몰락해가는 봉건지주 집안으로 특히 셋째 나리는 가산을 탕진하고 무력하게 몰락해가는 구시대의 대표격으로 나온다. 포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편에 속하지만 의지박약한 생활무능력자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봉건지주계급의 습속이다. 아무일도 할 필요가 없었던 계급은 아무일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를 낳는다.

반면 ‘휴식의 정원‘의 현주인은 대학까지 나와 교수 노릇까지 한 지식계급이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뒤 고향에 내려와 ‘휴식의 정원‘ 주인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재혼으로 얻은 젊은 아내가 있고(소설을 좋아하며 현명한 여성이지만 집안에서 발언권은 작다) 전처 소생의 아들이 있다. 십대에 접어든 아들이 외할머니의 비호하에 버릇없이 커 가지만 방임한다. 이 아들은 소설 말미에서 부주의한 행동으로 익사한다.

결국 바진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휴식의 정원 전주인과 현주인 집안의 비극이다. 이 비극을 바진은 유한계급의 습속 때문에 빚어지는 걸로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는 <가>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진의 번역된 작품이 제한적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정도까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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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2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 강의에서 다룬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에 대해서 적었다. 유고작으로 나란히 나온 <노생거 사원>과 <설득>을 이번에 읽었는데, 모두 기대에 값한다. 오스틴 문학의 매력과 현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작품들이다. 
















주간경향(19. 04. 01) 작가 오스틴의 소설에 대한 예찬


소설은 왜 읽는가. 제인 오스틴의 유고작 가운데 하나인 <노생거 사원>은 그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등장인물이 아닌 작가 오스틴의 견해인데, 소설이란 “정신의 위대한 힘이 드러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인간 본성의 변화에 대한 가장 행복한 묘사, 위트와 유머의 생생한 발현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선별된 언어로 전달되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소설에 대한 최대치의 예찬 아닌가. 오스틴이 이렇게까지 소설을 옹호하고 나선 것은 당대에 소설에 대한 평판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성 독자들은 대개 소설을 깎아내리고 우습게 봤다.

<노생거 사원>의 등장인물은 소설을 읽는 부류와 안 읽는 부류로 나뉜다. 주인공 캐서린도 “신사든 숙녀든, 좋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형편없이 지루한 사람일걸요”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끌린다. 그렇게 캐서린과 헨리의 관계가 시작된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유돌포의 비밀> 같은 당대의 고딕소설이었다. 대저택에 여자를 감금한 악한이 등장하는 것이 고딕소설의 특징이었다. 

캐서린은 헨리의 아버지 틸니 장군의 초대를 받아 노생거 사원으로 가면서 짜릿한 흥분을 느낀다. 과거 수도원이었던 노생거 사원은 틸니가의 저택으로 쓰이는 곳이다. 캐서린은 고딕소설의 배경인 노생거 사원에서 소설적 공상에 빠진다. 세상을 떠난 헨리의 어머니가 실제로는 남편 틸니 장군에 의해 감금돼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저택을 수색하기까지 한다. 그녀의 터무니없는 의심과 추측은 헨리의 비판을 받고서야 깨지게 되며 캐서린은 비로소 현실감을 갖게 된다. 잉글랜드 한복판에서는 그녀가 상상한 것과 같은 소설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일차적인 깨달음이다. 

고딕소설에 대한 패러디로 읽을 수 있는 장면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다. 캐서린 집안의 재산이 변변찮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틸니 장군은 아주 야박하게 캐서린을 저택에서 내보낸다. 이를 사과하러 찾아온 헨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캐서린은 자신이 틸니 장군에 대해 상상했던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아내를 죽이거나 감금하는 것 못지않은 잔혹함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공포가 고딕소설의 공포와 맞먹는다는 것이 캐서린의 또 다른 깨달음이다. 

소설의 결말은 전형적인 오스틴 소설이다. 강압적인 아버지 틸니 장군에 맞서 헨리는 가출하지만 그의 누이동생이 명망 있는 귀족과 결혼하게 되어 모든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된다. 기분이 누그러진 장군의 허락하에 헨리는 캐서린과 결혼한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장군의 부당한 방해가 두 사람의 결합을 더 공고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분위기는 부모의 독재를 권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식의 반항을 보상해주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한편으로 이러한 결말은 틸니 장군 같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고딕소설에서 헨리 같은 부드러운 주인공이 등장하는 오스틴 소설로의 이행을 감지하게 한다. 캐서린과 같은 여성 입장에서 보면 ‘호통치는 남자’에서 ‘가르치는 남자’로의 이행이다. 그것이 오스틴의 시대 여성에게 결혼이 갖는 의미였을까.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오늘날 특히 여성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 오스틴의 소설은 같은 질문을 다시 묻게 한다. 


19. 0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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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공자들이나 관심을 가질 법한 책이지만 내가 거기에 속하기에 <데리다와 문학>(문예출판사)에도 눈길이 간다. 번역서가 아니라 국내서인데 저자는 오랫동안 데리다에 천착해온 영문학자다. <데리다 입문>(문예출판사)과 함께 <데리다와 문학>은 그 천착의 결과로 읽힌다. 다른 책으로는 데리다 번역서 <해체>(문예출판사)도 있었다(만족스러운 번역본은 아니었다). 데리다 수용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영문학자 그룹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하다.

‘데리다와 문학‘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데리다 자신의 책 <문학의 행위>(문학과지성사)가 필수적인 책이다. 영여권 편자가 데리다의 문학에 관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작가와 관련해서 나의 관심사는 그의 카프카론이었고(‘법 앞에서‘), 이제 이번 학기에 다룰 예정이라 조이스론을 읽어볼 참이다. 구체적으로는 ‘율리시스‘론이다. <데리다와 문학>의 한 장이 바로 데리다의 율리시스론에 할애돼 있다. 조만간 두 텍스트 모두 읽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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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7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제트50 2019-03-2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덩달아 율리시즈를 읽어볼까요?^^ 이번 주말 그
검은 표지의 책을 일터에
갖다 놓을까봐요~~ 그나저나
카프카는 문학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가인가 봅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루는 걸로 봐서요@@

로쟈 2019-03-27 09:12   좋아요 0 | URL
기본 작가죠.^^

2019-03-27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7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