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쇼와기의 여성작가 하야시 후미코(1903-1951)의 대표작 <방랑기>를 강의에서 읽었다. 1928-29년에 잡지에 연재되었다가 193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돼 6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는 화제작이다(지금 기준으로는 밀리언셀러를 거뜬히 넘어선 작품).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소재로 한(혹은 작가의 일기 자체를 편집한) 이 작품에 카페 여급(요즘식으로는 유흥업소의 여종업원) 경험담도 포함된 게 화제가 된 성싶은데, 아무튼 1930년대 최대 베스트셀러가 아닌가 싶다.

창비판은 3부로 구성돼 있는데 1930년판은 2부 구성이고 3부는 1946년에 잡지에 연재되었다가 49년에야 통합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작품의 연대가 좀 복잡한 편. 배경이 된 시기는 주로 1922-26년까지다. 작가이자 화자인 후미코가 1922년 시골에서 도쿄에 상경하여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작중에서는 시와 동화를 쓰고(일부는 발표된다) 소설을 준비해나가는데, 후미코가 쓰는 소설 ‘풍금과 물고기마을‘(‘어촌‘이란 말 대신에 의도적으로 ‘물고기마을‘이라 쓴 건지는 잘 모르겠다)은 1931년에 발표된다.

<방랑기>는 그 과정을 담고 있어서 ‘소설이전‘ 소설이면서 ‘소설준비‘ 소설, ‘소설수련‘ 소설이다. 요컨대 소설이 아니라 소설의 재료를 나열하고 있는 기록인 것. 때문에 ‘풋내기 소설가‘라는 당대의 혹평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나로서도 궁금한 건 그 이후의 작품들인데, <청빈의 서>(1933)부터 일본영화의 거장 나루세 미키오가 영화화한 일련의 소설들이 그에 해당한다. 영화는 <번개><만국><처><뜬 구름><밥>에다 <방랑기>(1962)를 포함해 여섯 편이다(이 가운데 <뜬 구름>이 최고작으로 꼽힌다. 영화출시명은 <부운>).

단편 <만국>은 ‘철 늦은 국화‘로 번역돼 있지만 <번개><처><밥>에다 <청빈의 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요는 <방랑기>만으로는 작가로서 후미코의 성취를 말하기에 부족하다는 것. <뜬 구름>은 일단 중고본으로 주문했는데 세계문학전집판으로 제대로 나오면 좋겠다. 일본근대문학의 최대 여성작가라는 평판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에 준하는 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나루세의 영화들도 볼 수 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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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4-1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나루세 미키오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종종 상영하더라고요. 요즘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언급하신 작품들은 아닙니다만) 중이니 참고하세요.

로쟈 2018-04-1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날 잡아서 찾아가야 되는군요.^^

two0sun 2018-04-1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편정도는 dvd로도 나와 있네요.

로쟈 2018-04-17 12:35   좋아요 0 | URL
감독베스트컬렉션을 중고로구입.~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가운데 ‘로빈 던바‘도 내가 기억하는 이름이다. 리처드 도킨스만큼 널리 알려진 학자는 아니지만 사회성의 진화를 다룬 그의 책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고 더 소개되어도 좋다고 본다(대표적으로 <털 고르기, 뒷담화, 그리고 언어의 진화>가 내가 고대하는 책이다). 던바의 과학에세이 <던바의 수>(아르테)도 ‘묻지마 구매‘를 한 이유다.

이번 책의 부제는 ‘진화심리학이 밝히는 관계의 메커니즘‘이다. ˝인류 조상에 대한 논쟁에서부터 성 선택론과 같은 진화론의 핵심 주제를 알기 쉽게 서술하는 한편, ‘던바의 법칙(던바의 수)’, ‘3배수의 법칙’, ‘사회적 뇌 가설’ 등 로빈 던바의 독창적인 연구 성과도 생생한 사례와 함께 보여 준다.˝ 과학교양 지수를 한껏 높여줄 수 있는 책. 제목의 ‘던바의 수‘는 무얼 가리키는가?

˝이따금 우리는 경이로운 인류 문화에 눈이 멀어 인간의 행동 양식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진화의 산물인지 간과하곤 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믿고, 감정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사람 수는 최대 150명이다. 그리고 이 수를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고 한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이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인간의 뇌가 그 이상은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아직 어떤 다른 종에 못지않게 진화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마케팅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에 오는 사람을 대략 200명으로 어림하는데, 이 또한 던바의 수에 해당한다. 150-200명이 인간관계의 상한선이라는 것. 가끔 강의에서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한데, 만약 그 이상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특별한 직종 종사자라고 봐야겠다(영업사원 같은). 물론 요즘은 SNS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지만 어느 규모 이상이 되면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점도 ‘던바의 수‘를 무시할 수 없게끔 한다. 우리의 진화적 본성 혹은 잔재가 궁금하다면 필독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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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도서를 모두 읽을 수는 없는 형편이라 소위 대기표를 나눠주는 수밖에 없는데, 지난달에 나온 책 가운데 비교적 앞순번에 해당하는 책이 자크 랑시에르의 <모던타임스>(현실문화A)다. 원저는 지난해에 나온 랑시에르의 최신간이어서 놀라기도 했는데 자그레브(크로아티아)에서 나온 영어판이라 알라딘에서는 구매할 수 없다(통상 랑시에르의 책은 영어판도 같이 구입하고는 했는데 이 책은 예외가 되었다).

책의 부제는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이고 네 편의 글로 구성돼 있다. 역자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진행된 랑시에르의 예술-정치 연구를 축도˝한 책이다. 그 연구를 구성하는 책들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감성의 분할>, 2000)을 포함하여 여러 권이 소개되었다. <영화 우화>(2001), <이미지의 운명>(2003), <미학 안의 불편함>(2004), <문학의 정치>(2007), <해방된 관객>(2008) 등이고 <아이스테시스>(2011)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초기작 <프롤레타리아들의 밤>(1981)과 함께 번역출간을 고대하는 책이다).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책이 <모던타임스>라는 것.

개인적인 관심은 랑시에르의 미학이나 영화론보다 문학론에 있는 편이라 <모던타임스>의 독서도 일단 보류한 상태다. 원저를 구하게 되면 일정이 당겨질지도. 혹은 랑시에르의 영화론에 관심을 갖게 되면 역시 생각보다 일찍 책을 손에 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같은 이유에서 미뤄놓은 다른 책들까지도 한꺼번에 손을 봐주어야 할지도. 아, 그 책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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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대표 극작가이자 소설가 루이지 피란델로(1867-1936)의 마지막 소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1926)이 개정 번역판으로 다시 나왔다.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희곡선집이 번역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별로 읽히지 않는 작가다. 대표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이 간혹 무대에 오르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갑작스레 피란델로의 소설이 눈에 띈 건, 현대문학에서 분신 테마와 군중 테마에 요즘 관심을 두게 되어서다(문학에서 군중과 대중, 인민과 다중 등 집단성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표상되는지가 관심거리다). <아무도 아니>은 제목부터 이러한 테마에 딱 맞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당대의 환경 속에 내던져져 사물과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뿐만 아니라 스스로로부터도 소외된 채 불안에 떨며 분열증적 상황에 노출된 사람들의 존재모순성이 탁월하게 형상화되는 것을 본다. 난해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변적이고 장황한 부분들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는 피란델로가 부러 현학적인 말놀이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근대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삶 자체가 분열증적이고 불안정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분열증적 서사의 계보를 작성할 때 필히 자리를 표시해야 할 작품이다. 그 전후에 어떤 작품들을 배치할 수 있을지 좀더 고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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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이진아도서관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카프카 강의에 이어서 5월 8일부터 7월 3일까지 8회에 걸쳐서(매주 화요일 저녁 7시) 19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이전에 진행했던 ‘톨스토이 깊이 읽기‘와 ‘도스토예프스키 깊이 읽기‘를 마무리짓는 강좌로 새로 번역본이 나온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문학동네)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문학동네, 근간)을 자세히 읽는 강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의 구체적인 일정을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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