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들을 강의에서 다루다가 같이 읽게 된 작가가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 묶여서 일본의 3대 여성작가로 불리는 야마다 에이미다. 바나나와 가오리가 ‘여자 하루키‘로 불린다면 에이미는 ‘여자 무라카미 류‘로 비교되기도 한다. 세 작가의 개성이 제각각인데, 작품집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학교 문제를 다룬 에이미의 소설들에 눈길이 간다. 특히 일본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려다 심의에서 문제가 돼 빠졌다는 ‘나는 공부를 못해‘가 인상적이다. 주인공 도키다 히데미의 모습에는 공부를 못했던 작가 에이미 자신의 모습도 투영돼 있는 듯하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작가의 탄생기이다(더불어 그녀는 그때의 담임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적는다. ˝지금은, 나는 공부를 못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의 담임선생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물리 시험에서 두 번이나 0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물리 선생이었다.
˝댁의 따님은 수업 태도도 나쁘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도 듣지 않고, 수업 중에 소설책이나 보고 있고, 방과 후에는 남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론가 갑니다.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따님처럼 자기 세계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 학생은 나중에 작가라도 되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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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플의 밑줄긋기를 처음 해본다. 서프라이즈! 사진이 텍스트로 이렇게 쉽게 변환되다니. 예전에(10년쯤 전에) 피디에프 파일을 한글파일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을 써본 적은 있지만 사진도 이렇게 쉽게 전환되는 줄은 몰랐다. 아무튼 밑줄긋기 해본 대목은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 가운데 후반부 한 대목이다.

 혹시 있다 해도, 끝나는 지점에서 생명을 막으려 기다리지 않는다.
 죽음은 생명이 나타나는 순간 죽는다.

 모든 것은 앞으로 밖으로 나아가며, 꺾이는 것은 없노라.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죽음은 오히려 복된 것이로다.(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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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성작가들의 책과 그에 관한 논문들을 읽다가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한겨레출판)을 찾으니 또 눈에 띄지 않는다. 행방을 찾아 여러 곳을 탐문했으나 결국 ‘개똥‘으로 잠정 분류하게 생겼다. 책을 본 게 한달쯤 전인 것 같지만 사실 한달 전이면 내게는 백년 전과 같다. 과장을 덜면 반년쯤 전에 본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곳의 지형지세가 그 모양이다. 책들이 숨어 있기에 딱 좋은.

허탕을 치고 퇴각하다가 월트 휘트먼 시선 <오 캡틴! 마이 캡틴!>(아티초크)을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서 빼왔다. 20세기 미국시에 대해서 과문한 편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시인은 휘트먼이다. <풀잎> 같은 필생의 시집이자 기념비적인 작품 때문인데 물론 압권에 해당하는 것은 ‘나 자신의 노래‘다. 휘트먼의 <풀잎>은 소로의 <월든>, 그리고 멜빌의 <모비딕>과 함께 19세기 중반 미국문학의 최대치라고 생각한다(미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다. 이들은 모두 초절주의의 주창자 랄프 에머슨의 직간접적인 자장안에 있다. 미국문학 바깥에서는 니체가 그러하다).

‘나 자신의 노래‘를 읽자면 자연스레 미소를 머금게 되는데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짓게 되는 미소와 견줄 만하다. 안 그래도 침대에는 최근에 나온 헌정 산문집 <시는 나의 닻이다>(창비)와 시 해설집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민음사)가 놓여 있다. 김수영에 대해서는 각각 시선집을 낸 바 있는 두 출판사가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인가, 문득 궁금해진다.

시 해설집은 총 116편에 짧은 해설을 붙이고 있는데 대표시들을 망라하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하지만 역시 분량이 너무 짧다. 다른 선택지는 더 적은 시에 대해서 더 자세한 분석과 해석을 붙이는 것이리라. 그런 해설집도 나옴직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더 유익한 읽을거리는 헌 정 산문집이다. 백낙청, 염무웅 선생의 특별대담을 필두로 하여 19명의 문인들(주로 평론가와 시인들)이 김수영과의 인연을 풀어놓았다. 직접적인 인연에서 책으로 만난 인연까지. 화보 사진에는 김수영이 외국잡지와 책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보여주는 사진도 수록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도 숙독했지만 나는 휘트먼의 시도 열심히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시정신의 상통함을 느낄 수 있어서다.

여하튼 김수영의 책들 위에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올러놓으니 흡족한 마음이 생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덕분에 널리 알려진 시이지만(휘트먼의 시는 링컨의 암살을 애도하는 시다) 오늘밤에는 죽어도 살아있는 시인들에 대한 예찬으로 들린다...

여기까지 적으니 또 딱국질이 시작되었다. 오전부터였으니 오늘은 최장시간 딱국질을 한 날로 개인 기네스북에 올려야겠다. 이 무슨 패러디란 말인가. 오 딸꾹! 마이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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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강의할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터>(문학동네)를 보다가 ‘도시문학으로서 모더니즘‘을 별도의 주제로 다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문학에서 이 주제의 출발점이 되는 건 역시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1914)이다. 그리고 러시아 소설로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6)가 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1925), 프랑스문학에선 얼마전에 번역돼 나온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1926)가 뒤를 잇는다. 
















내가 다루고 싶은 건 독일작가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1929)까지다. 모두가 거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더블린이 그중 작은 축에 속하겠지만). 파리-페테르부르크-베를린-뉴욕-더블린, 모두 문학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문학의 특징은 ‘사회 속의 개인‘과 그 개인의 투쟁이 약화된다는 점에 있다. 거대도시는 그 규모 자체로 개인의 존재를 압도하며 소외시키기 십상이다. 자연스럽게 도시문학에서는 주인공이 복수화되며 서사는 파편화되거나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된다. 















나는 이것이 1830년대에 발자크와 함께 시직된 근대문학의 2기 형태라고 생각한다(발자크 패러다임의 리얼리즘 소설이 1기 근대문학이라면 모더니즘은 2기 근대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근대문학의 전개양상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강의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도시문학을 주제로 하여 좀더 심화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경우 박태원의 <천변풍경>(1936)도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다루게 된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그에 견줄 만한 한국문학 작품은 무엇일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거대도시로서 서울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이 있던가?..

19.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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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1-0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세계문학 시리즈는 이상하게 제 눈에는 표지 디자인이 뭔가 세련되게 보입니다. 디자인팀 열일 하나 보네요 ^^

로쟈 2019-01-02 01:41   좋아요 0 | URL
그런가 봅니다.^^
 

한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게 전업강사이자 서평가의 일상인데 거기에 독서가의 욕심까지 보태지면 읽는 책은 수십 권으로 불어난다. 책상과 식탁, 그리고 침대에 쌓여 있는 책이 그렇게 수십 권이다. 물론 책장과 방바닥에 있는 책들도 언제든 눈에 띄는 대로 소환된다. 손택의 일기와 노트를 묶은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이후)는 방바닥에 쌓여 있다가 소환된 책. 지난주엔가 주문했던 원서를 받은 참이라 생각이 나서 펴보았다. 첫 문장에서 깼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머니는 자서전을 쓸까, 하는 생각을 열없이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손택의 말이 아니라 엮은이인 아들 데이비드 리프의 말이다(아들이 상속자이자 편집자이니 작가의 운명으로는 나쁘지 않다). ‘깨작거리기 시작했다‘가 무얼 옮긴 것인지 찾아보니 ‘toyed‘를 옮긴 것이다. ‘열없이 깨작거리기‘는 toyed desultorily‘란 옮긴 것이고. 의미야 다의적이어서 번역에는 선택지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말 ‘깨작거리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만 갖고 있는데 아들이 어머니에게 쓸 수 있는 말인가.

‘toy‘는 동사로는 ‘만지작거리다‘의 뜻을 갖고 있고 ‘desultorily‘는 ‘산만하게‘‘띄엄띄엄‘ 등이 사전적 의미다. 내가 옮긴다면 그냥 ˝자서전을 써볼까란 생각을 이따금 내비치셨다˝라고 했겠다. ˝열없이 깨작거리기 시작했다˝는 너무 강한 문체적 표현이고 뉘앙스도 너무 부정적이다. 이런 번역은 역자를 의식하게 된다. 번역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으면 역자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닌가 원문을 찾아보게 되는 것. 번역자의 존재를 드러내느냐 마느냐는 번역론의 유구한 문제지만 나는 필요할 때 드러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물러나 있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 입장이다. 번역자의 처세술이다.

손택이 깨작거렸다는 문장에 놀라 급하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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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9-01-01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의 깨작거리기‘라는 제목에 놀라 급하게 읽고 생각없이 좋아요 했다가 급하게 좋아요취소 했습니다. 내용은 공감하지만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공개적으로 번역자를 까대시는 것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서재의달인답지 않은 처세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댓글을 남기는 것도 저답지않은 처세입니다만.

로쟈 2019-01-01 20:46   좋아요 2 | URL
네 요즘은 번역에 대해 자주 시비하지 않는데 역자의 선택이 의외여서 다른 의견을 적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아침부터‘는 피했습니다.

카키모카 2019-01-0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좋은 지적 같네요. 안지는 별로 안됐지만 서재 잘 보고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19-01-03 22:2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분홍돌고래 2019-01-1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어 선택에 대한 의견 제시는 번역자를 ‘까대는‘ 것과는 층위가 다른 일이라 봅니다. ‘깨작거리다‘는 보통 부모나 선생 등 연장자의 행위를 묘사하거나 설명할 때 쓰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