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냐 볼테르냐

오늘 눈에 띈 한권의 책은 박호성의 <루소 사상의 이해>(인간사랑, 2009). 루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편역자가 루소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논문들을 엮고 옮긴 책이다. 김용민 교수의 <루소의 정치철학>(인간사랑, 2004) 이후에 드물게 나온 연구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론 4부에 실린 몇 편의 논문을 기회가 되면 우선적으로 읽어보고 싶다.     

제1부 루소 사상의 시대적 의의
1장: 루소와 현대-----------------------------에이나우디
2장: 루소와 역사------------------------마에가와 테이지로
3장: 루소와 플라톤-----------------------------매스터스

제2부 루소와 자연
4장: 루소와 ‘자연으로 돌아가라’----------------------코반
5장: 루소와 자연법-----------------------------매스터스
6장: 루소와 자연권-----------------------------매스터스
7장: 루소와 인간의 완성능력-----------------------워클러

제3부 루소와 근대사회
8장: 루소의 근대사회 비판-------------------------콜레티
9장: 루소의 근대경제학 비판-----------------------콜레티
10장: 루소의 경제사상----------------------------펠레드
11장: 루소와 근대사회 쟁점--------------------------멜저

제4부 루소와 근대성
12장: 루소와 근대성----------------------------피더스톤
13장: 루소와 근대성의 역설--------------------------버만
14장: 루소와 상상력의 역설--------------------------바버
15장: 루소는 자유의 철학자인가?--------------------쾨르너
16장: 루소의 자유와 공화국------------------------비롤리  

아직 별다른 소개기사가 뜨지 않았고, 실물도 보지 못한지라 목차와 간단한 출판사 소개를 참조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내용이다. "근대의 위대한 사상가 루소는 1712년에 태어나 1778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상세히 소개되겠지만, 루소가 사망한 지 2세기 이상 지났어도 그의 사상은 여전히 살아있다. 특히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날아오른다’는 헤겔의 말처럼, 루소 사상의 참된 가치는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그치지 않고 그의 탄생 300주년을 앞둔 이 시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루소에 관해 참고할 만한 전기는 그의 자서전을 빼면 게오르크 홀름스텐의 <루소>(한길사, 1997)와 루버트 위클러의 <루소>(시공사, 2001) 두 권이다. 특히 홀름스텐의 책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현재로선 둘다 품절된 상태다... 

09. 0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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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21 21:10   좋아요 0 | URL
호기심, 확~ 땅기네요...고교때 루소의 '고백론'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소개된 책을 읽어 봐야겠는데요.

로쟈 2009-07-22 22:36   좋아요 0 | URL
여하튼 읽을 책이 너무 많습니다.--;

바라 2009-07-22 00:51   좋아요 0 | URL
오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예전에 루소에 관한 글을 쓸 때 보니 은근히 루소에 관한 국내 연구서가 거의 없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번역서도 크게 다르진 않아서 위에 목차만 봐도 모리치오 비롤리 정도 외에 사람 외에는 번역 소개된 사람이 없는 거 같고.. 대개의 경우 루소는 정치학이나 불문학의 고전으로만 여겨지는 듯 해서 철학 전공자가 쓴 루소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을 거 같네요.

로쟈 2009-07-22 22:37   좋아요 0 | URL
스타로벵스키의 책 같은 건 저도 기대를 해보는데, 쉽게 나올 거 같진 않네요...
 

재일동포 학자로 한국 현대 사상사의 지도를 그려온 윤건차 교수의 신작이 출간됐다.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창비, 2009). 6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다. 부제는 '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조선인'. 물론 '재일조선인'이라는 독특한 입각점이 사상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어떻게 관련되는가가 포인트겠다. 강상중, 서경식과 함께 '자이니치(在日)' 의식의 또 한 가지 유형을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7. 21) ‘자이니치’ 빼곤 일본 전후사 생각도 못해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자이니치’를 자각한다/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려 움직이는 진자.”(시집 <겨울숲> ‘진자(振子)’ 중에서)

재일동포 2세인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65)의 정신적 궤적은 ‘자이니치(재일·在日)’라는 ‘디아스포라(이산·離散)’ 의식에 다름 아니다. 교육학 전공인 그가 일본·한국·자이니치의 관계사 및 사상·정신의 교착사(交錯史)에 천착하게 된 것도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에 눈 뜨면서다. 

 

최근 국내 출간된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창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자이니치’로서의 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후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재일조선인이 걸어온 발자취를 역사에 각인된 사상체험으로써 더듬어보고자 한” 저서다. 

 

지난 17일 만난 윤 교수는 “사상이라는 게 위대한 철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라며 이번 책에 대해 “사회과학적인 엄격함보다 자기 생각을 많이 쓰려 했다”고 밝혔다. 책과 함께 동시출간하는 시집 <겨울숲>(화남)을 통해 68편의 시를 발표하는 것도 이 때문. “사회과학만으로는 인간 사회를 전부 알 수 없다. 시를 통해 시대상황이나 정신을 반영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한·일 관계는 양국의 역사나 사상의 근간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패전, 헌법, 한국전쟁, 미·일 안보조약 등 전후 일본을 관통한 중요한 사건 뒤에는 모두 ‘조선’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는 식민 지배의 소산인 ‘자이니치’가 있습니다. 그걸 빼곤 일본 전후사를 생각할 수 없어요.”

책을 가로지르는 핵심 사상체험은 “민족문제와 식민지문제에 관한 탈식민지화의 과제”이다. 이는 일본에서 ‘천황제’와 ‘조선’이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일본은 천황제에 대해선 사고정지, 조선·조선인에 대해서는 방치 상태입니다. 전쟁 책임 문제도 모두들 ‘위에서 시켰다’면서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위’의 정점에 있는 천황은 정치에 관여를 안하니까 책임이 없다는 무책임주의가 횡행합니다. ‘평화헌법’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일본 헌법에는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없고 국민만이 있을 뿐입니다.”

윤 교수가 보기에 진보적인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정면에서 대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잡지 <세카이(世界)>에 천황이 한국에 가서 사과하라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 것은 천황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지 진정한 극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탈민족’ ‘탈국가’를 논하고 ‘화해’를 말하는 이들에게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희미한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용서와 화해의 단어를 안일하게 입에 담지 않으며 엷은 껍질을 한장 한장 벗겨내듯이 오로지 노력하는 것이 현재 그리고 앞으로 요구되는 자세”라고 밝혔다. 뉴라이트의 ‘자학사관’ 비판에 대해선 “일본 측의 자학사관 비판이 가해자의 입장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한국 측의 경우는 피해자의 입장을 잊어버리고 탈식민지화의 최대 과제인 남북통일국가의 수립을 소홀히 한 것으로 외세의존의 비주체성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집필에만 5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 아내를 폐암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2000년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당대)에서 ‘지식인 이념 지도’를 그려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윤 교수는 “ ‘자이니치의 정신사’를 정리하는 일이 다음 작업이자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다음 학기 숙명여대에서 강의할 예정이다.(김진우기자) 

09.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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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rin 2009-07-21 01:25   좋아요 0 | URL
강상중의 글을 읽으며 재일에 대한 눈을 떴고, 서경식을 읽으며 또다른 재일을 느끼게 되었는데, 윤건차는 어떨지 매우 궁금합니다. 괜찮은 저자에 대한 소개가 정말 고맙습니다.

펠릭스 2009-07-22 06:0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재일조선인 지성들에게는 공통된 어떤 의식이 잠재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디아스포라)

로쟈 2009-07-22 22:36   좋아요 0 | URL
저는 소개를 '불법적으로' 옮겨놓았을 뿐이고요. 저작권법이 강화된다고 하니까 이런 스크랩도 접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9-07-23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9-07-21 02:40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윤건차 선생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을 본 지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첫 번째 사진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독서에의 욕망에 불타오릅니다.^^

로쟈 2009-07-22 22:35   좋아요 0 | URL
그 욕망들을 좀 식히셔야 할 텐데요.^^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적합한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719134035&section=04). 번역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입에 오르내린 오래전 책인데, 마루야마 마사오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를 다루면서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곱씹어보고 있다. 필자는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프레시안(09. 07. 19) 낯섦의 체험…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공동으로 쓴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병상에 있던 마루야마를 가토가 찾아갔고, 그 둘이 번역의 문제를 놓고 대화한 내용을 가토가 정리해서 나온 책이다. 이 대화가 일본근대사상대계(1988~1992, 이와나미쇼텐 펴냄) 중 <번역의 사상>(1991)을 편집하던 과정에 있었다고 하니 1990년께쯤 될 것 같았다(번역서에는 대화의 시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것을 글로 정리한 가토가 1919년생이라니 당시 70살이 다 되었을 듯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약력을 보니 <일본문학사서설>이라는 대작을 남기기도 한 유명한 전방위 비평가이자 작가란다. 그런 사람이 일일이 찾아가서 질문을 하고 그 대화의 내용을 글로 정리했던 상대방 마루야마는 어떤 사람일까?

평소 일본 문화에 밝은 편이 못 되는 나는 그의 약력을 보고서야 내 처의 장서 중에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식한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일본 정치학계뿐만 아니라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가(그는 1996년에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출간을 못보고 타계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논문 실적보다도 못하게 쳐주는 번역이라는 주제에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들였을까?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런 궁금증들을 품었고, 책장을 덮으면서 어렴풋한 짐작이 또렷한 확신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적어도 일본의 근대는 번역이 곧 학문이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메이지 시대와 일본의 번역주의 

이 책에서 문제 삼는 일본 역사의 시기는 주로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이다. 지은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번역주의라고 요약한다. 이 번역주의의 성립과 내용, 그 공과를 따져보는 것이 두 노학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나눈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번역주의는 19세기 초에 일본 해안에 서양의 배들이 출몰하지만 서양에 대한 정보는 없던 상황에서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의 발발과 중국의 패전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서양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립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인 중화의 몰락과 이에 연이어지는 서양의 쇄도, 아시아의 몰락, 그리고 그에 따른 서양에 대한 추종. 여기까지는 많이 듣던 이야긴데, 다른 아시아와 일본이 사정이 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이들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공교롭게도 서양이 일본을 침략할 시점에서 서양 쪽에 보불전쟁, 남북전쟁, 크림전쟁 등이 벌어져 아시아 침략이 지체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대응이 굉장히 재빨랐다는 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서도 여전히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응이 느렸으나 일본은 몇 차례 서양과 벌인 전투와 중국의 패전을 통해 초반의 쇄국 정책(존왕양이론)에서 재빨리 개국으로 돌아섰고, 그 시기가 서양의 여러 전쟁 시기와 맞물려 운 좋게 근대화를 위한 시간도 확보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위기도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막부 시절부터 각 번(藩)에서 앞다퉈 유학생을 서양으로 보내 서양의 정보를 흡수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런 일본의 발 빠른 대응에는 전사인 무사가 지배 계급이었던 점이 중요하게 작동했다고 본다. 전쟁터에서 전쟁을 수행하듯이 일본의 지배 계급은 서양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당시의 상황을 대부분 군사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군사작전 하듯이 서구화를 진행시켰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메이지 시대의 세계 정세와 일본 정부의 계급 구조로만 번역주의가 내 놓은 성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짧은 시간 내에 상당한 수준의 번역의 질과 양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이전 시대인 에도 시대(1603~1867)의 학문적 성숙이 번역과 맞물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평가다.

예컨대 에도 시대의 오규 소라이(1666~1728) 같은 학자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서 일본의 학문적 근간을 이루던 중국의 유학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취했다고 한다. 중국식 발음을 가급적 원음대로 읽고 그것을 체화시키려 했던 조선과는 달리 음으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는 일본식 한문 독법을 사용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했던 것으로 들었는데, 그 원조가 오규 소라이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낯섦'의 체험으로서 번역의 문제가 발생한다.

추상어를 수입하는 번역
나도 서양 고전 번역을 업으로 알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지만 번역은, 특히 고전 번역은 번역을 하는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그 유명한 '이데아'가 있다. 이 말은 보통 '형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문제는 이 '이데아'가 플라톤 시대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일반 용어이기도 했다는 데 있다. 일반 용어로 '이데아'는 '얼굴', '용모', '보임새' 등의 뜻이 있다.

플라톤은 이 일상어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의미를 길어낸다. 개별적인 사물들이 하나로 묶이는 그 사물 자체, 예컨대 얼굴색과 성별과 나이가 다 다른 사람들을 묶는 사람 그 자체를 '이데아'라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플라톤의 철학은 대화편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을 취한 글에 담겨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철학 용어와 철학적인 사고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 울고 웃기고 분노하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일상의 일과 언어가 들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데아가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사람 자체를 표현하고 좋은 것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다 형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문맥에 따라서 달리 번역해야 하나? 물론 현재의 선택은 문맥에 맞는 번역이다. 그리고 주석을 달게 된다. '이 말이 여기서는 얼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희랍어로는 형상이라고 번역되는 말과 같은 말이다. 플라톤은 이런 일상어를 통해서….' 이렇게 해 놓으면 이해는 되겠지만, 플라톤이 희랍어를 사용하는 언어 대중에게 희랍어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이 느꼈을 짜릿함, 일상적인 감각이 추상적인 세계로 비약하는 상승의 느낌은 강 건너 불구경이 되고 만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바로 이 이데아를 예로 들면서 언어에 대한 감각적 이해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추상적인 의미로 도입된 번역어들이 개념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말을 한다. 이후 피히테는 이런 논의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찬탄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만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피히테의 말을 통해서 현재 우리말이 갖는 처지를 살펴볼 수는 있다.

예컨대 우리말에 '좋다'라는 말은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에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good'을 보면 '도덕적 선'이나 '상품'의 뜻으로 추상화되어 사용된다. 희랍어도 마찬가지여서 희랍어의 'agathos'는 일상적인 '좋다'라는 말에서 '도덕적 좋음' 즉 '선(善)'의 뜻으로 발전하여, 심지어 '좋음의 형상(또는 '선의 이데아')'이라는 표현에도 등장한다.

우리말은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에서 추상적 수준으로 발전해야 할 때, 한문에 치이고 영어에 밀리고 각종 외래어에 자리를 내줘 여전히 일상어의 수준에서만 통용된다. 아직도 우리는 몸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컨디션'이라는 말로 간편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우리말을 골라 쓰지 못하고 있다. 말이 그저 우리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말은 우리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생각 자체가 되고, 생각을 길러내는 창고가 된다는 점에서 고민은 깊어진다.

번역, 낯섦의 체험
그렇다고 번역을 하지 않고 문화 교류를 거부하며 순수한 우리말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런 고립된 문화관이 성립할 수도 없으려니와 문화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고립되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체적인 문화는 낯섦의 체험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두 저자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설명이 더 붙어야 한다. 낯선 것을 낯선 줄 알아야 낯섦의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류에 동화되려고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비주류와 주변적인 것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낯섦의 체험은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 일본 근대를 준비한 오규 소라이의 탁월함이 있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고 하는 조선 유학의 정통성이 갖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오렌지를 오륀쥐라고 발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류추종의 의식을 벗어나야 문화의 주체성이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일본은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에 대한 충격으로 개화를 서둘렀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번역국을 설치해가며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형성해나갔지만, 우리는 중국의 것을 편리하게 가져다 볼 수 있는 한문 식자층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번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듯하다.

일본은 중국보다 개화가 빨랐기 때문에든 또 어떤 이유에서든(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중국과는 독자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문화유산의 토대 위에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번역은 하겠다고 맘먹으면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와 여건이 있어야 한다. 이런 토대와 여건이 없고서는 낯섦의 체험도 체화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번역이 해석이 되는 지점도 여기다.

재미있는 사례를 이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중국은 형이상학이 발달한 나라고, 도리(道理)의 사상이 그 형이상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원리의 탐구가 중요하지 역사는 부차적인 것이라, 유교에서 독서의 순서도 경(經), 자(子), 사(史), 집(集)의 순서로 역사가 세 번째로 온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은 성현의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처지라 경(經)도 물론 중시하지만 그런 경전이 성립한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시되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해 중국은 이(理)를 중시하고 일본은 기(氣)를 중시하여 중국은 변하지 않는 것을, 일본은 변화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19세기 서양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진화론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차이를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옌푸(嚴復)가 1898년에 진화론의 사상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책을 <천연론(天演論)>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진화론을 소개했다. 중국인들은 '하늘이 변한다('천연'의 뜻이 그런 듯하다)'란 사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氣)를 중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일본의 사상가들은 자연을 유기적인 것이 아닌 무기적인 것으로 파악한 뉴턴 역학의 자연관에 더 혁명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의리와 도리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살아남은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란 뜻으로 받아들여 약자의 입장에 서서 해석했고, 일본인들은 강자가 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번역을 갖지 못했다. 조선에 진화론을 소개한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사절단으로 가서 경응의숙(慶應義塾)을 다니며 독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진화론을 나중에 한국에 수입하였다. 여러 이유가 더 있겠지만 개화 사상가의 선두에 있던 유길준은 이렇게 일본의 번역을 통해 일본이 해석한 강자가 살아남아야 하는 제국주의 논리의 진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 번역은 번역 주체를 다시 번역하기도 한다. 본래 철학은 희랍에서 성립하여 그 뜻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었다. 그 말을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가 어원을 잘 살려 '희철학(希哲學)', 즉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란 뜻으로 옮겼다. 이 말이 오늘날 줄어 철학이 되었는데, 본래 동양에는 '철학'이란 학문 분류는 없었다.

물론 서양에서도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철학이 분명한 분과학문은 아니었지만, 서양의 근대를 거쳐 동양에 번역되어 수입된 철학은 동양의 학을 거꾸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자도 도학자도 동양철학자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번역된 말이 서양의 문물을 등에 업고 번역하는 자를 규정하고 말았다. 개화한 지 100년이 넘었어도 아직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살려야 하고,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으나 딱히 우리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우리가 다시 또 번역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낯선 것을 낯선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면 그 낯선 것이 침투해 우리를 우리에게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김주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정암학당 연구원) 

09.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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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9-07-20 11:25 
    낯섦의 체험 - 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by 로쟈
 
 
펠릭스 2009-07-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로쟈 2009-07-22 22:34   좋아요 0 | URL
그건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습니다...

열매 2009-07-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선생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의 학문의 방법으로서의 번역에 대한 선도적 문제제기를 제외한다면, 그 이후 이런 번역문제 관련한 담론 역시 일본에서 수입, 유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적하는 점 역시 하나같이 똑같은지, 꼭 잘못된 석,박사논문을 베낀 석사논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전자도서관에서 '번역'관련해 논문을 검색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문제의식마저 수입하는 시대가 된 것일까요?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 아닌 확신이 듭니다.

로쟈 2009-07-22 22:34   좋아요 0 | URL
일반적인 수입과는 사정이 좀 다른 거 같습니다. 번역 담론 이전에 막대한 번역어 유입이 먼저 있었으니까요...

Sati 2009-07-22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번역 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죠...

로쟈 2009-07-22 22:32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라투르와 근대성의 문제

저녁에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가서 '한겨레21'을 사들고 왔다. 엊그제 퇴고도 못한 원고를 워낙에 황급하게 보낸 탓에 '오류'는 없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를 서평대상으로 삼았지만 코드를 잘 맞추지 못해서 독서에 애를 먹었다. 기사를 확인해보니 크게 '실수'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필자가 담당인 구둘래기자의 이름으로 돼 있다! 타이틀의 '착각'이 그대로 반영된 듯싶다.   

한겨레21(09. 07. 27)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

‘도발성’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면,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는 단연 돋보인다. 저자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과격할 수 있을까.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역사적 시기구분이 ‘근대인’으로서 우리의 ‘상식’이라면, 라투르의 책은 그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어떤 근거에서인가? 

먼저, 라투르가 정의하는 ‘근대’와 ‘근대인’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근대란 새로운 체제와 가속, 파열과 혁명을 가리킨다. 즉, 시간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어떤 시대, 혹은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이며, 이 기준에 미달하는 ‘전(前)근대’는 무엇인가 낡아빠지고 정적인 과거를 지칭한다. 여기에 전제되는 것은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단절과 비대칭성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간은 비가역적이어서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 이 시간의 승부에서 근대는 승자이자 정복자이며 전근대는 패자이자 피정복자이다. 라투르가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비대칭적 이분법이다.  

근대성이라는 문제틀은 전근대인(과거)과 근대인(현재)을 나누고, ‘그들’과 ‘우리’로 분할한다. 그리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즉 ‘전근대 사회’ 혹은 ‘전통사회’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는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신화와 민간과학, 정치형태와 기술, 종교, 예식 등을 모두 뭉뚱그려서 다루지만, ‘근대사회’는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인류학 대신에 자연과학과 사회학, 철학이 동원되며, 이들은 사실과 권력, 담론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라투르가 보기에 근대의 분과적 인식론이 가정하는 '자연/문화' '사실/가치' '문명/야만'의 이분법은 유지되기 어려우며 모든 현상은 혼종적이다. 가령 남극 오존층의 구멍은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적’이며 또 너무나도 ‘담론적’이다. 현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연결망’인 것이다. 저자의 비유를 들자면, 현실은 이란과 이라크, 터키라는 세 나라에 의해 찢겨진 쿠르드족의 처지와 같다. 인위적으로 분할돼 있지만 쿠르드족은 밤이 되면 국경을 넘어가 결혼도 하고 세 나라에서 벗어난 공동의 모국을 꿈꾼다. 이것이 하이브리드적 현실이다.  

라투르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접근법으로 문화와 관습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 곧 인류학적 연구를 주창한다. 소위 ‘근대세계에 관한 인류학’이다. 이때 인류학자는 자연계와 사회세계라는 근대적 분할을 폐기하고 실험실의 과학자와 정치가를 같은 차원에 놓고 조망한다. 지식과 권력과 풍습에 관한 책을 따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모두 연결된 단 한권의 책을 쓰고자 한다. 인식론에 대한 질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질문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철학과 사회학과 정치학과에 따로 배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근대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할 때, 대상으로서 전근대와 근대가 갖는 차이는 무의미하거나 사소해지게 된다.  

사실 근대 세계는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비가역적인 ‘발명품’이었고,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은 그 새로운 세계의 산파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미몽이었다. 라투르가 ‘기적의 해’라고 부른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몰락을 상징할뿐더러 동시에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정복과 완전한 지배에 대한 자본주의적 헛된 희망의 종말을 상징한다. 연결망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에서의 혁신은 급진적인 단절과 비가역적인 운명을 초래한 ‘영웅담’이 더 이상 아니다. 지식순환에서 약간의 가속과 행위자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정도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 라투르의 평가다. 그가 근대의 경기장 대신에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훨씬 더 넓은 비근대적 세계의 장이다. 이 장을 그는 어원적 의미에서의 ‘중국(中國, Middle Kingdom)’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09. 07. 19.  

P.S. 참고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염두에 둔 대목은 "반근대인들은 탈근대인들처럼 그들의 상대방의 경기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경기장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는 비근대적 세계들의 장이다. 그것은 중기 왕국(Middle Kingdom)이며 중국만큼이나 광활하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31쪽)이다. 사전에는 고대 이집트의 '중기 왕국'이라고도 나오지만, 나는 'Middle Kingdom'이 시간보다는 공간에 맞춰져 있는 듯해서, '中國'이 더 적합한 번역이지 않나 싶다. '중국'과 같은 '중앙왕국'. 

독서에 애를 먹은 건 라투르의 독특한 사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반부의 번역도 좀 낯설었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일간지에 실린 남극 오존층 파괴에 관한 기사를 읽어내려가면서 기상학과 화학, 경제, 정치가 뒤섞여 있는 하이브리드적 현실의 사례로 제시하는데, 초반부터 이런 번역문이 나온다.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나는 고층대기를 연구하는 화학자에서 아토켐과 몬산토의 최고경영자로 변신한다.(17쪽) 이 대목의 원문은 "Reading on, I turn from upper-atmosphere chemists to Chief Executive Officers of Atochem and Monsanto (...)"이다. 나는 'turn'이라는 동사가 '시선이 옮겨간다'는 뜻 정도이지 싶은데, 역자는 과격하게도 '변신한다'라고 옮겼다. 불어본에는 그런 뉘앙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읽기에 어색하다.   

일단 한번 '변신'하게 되면 이후의 변신은 좀더 쉬워진다. "몇 문단을 더 읽어 내려가면 나는 주요 선진산업국가의 수장으로서 화학, 냉장고, 에어로졸, 비활성 기체 문제에 휘말려든다."(18쪽)는 대목도 원문은 "A few paragraphs later, I come across heads of state of major industrialized countries who are getting involved with chemistry, refregerators, aerosol and inert gases."이다. 몇 문단 내려가다 보면 이런 환경 문제로 골치가 아픈 선진국 정상들에 관해 읽게 된다는 뜻인데, 여기서도 '수장으로서'라고 옮긴 건 지나친 감정이입이 아닐까. 독서과정 자체가 주체와 대상이 뒤섞이는 하이브리드적 과정이라는 주장을 함축한 게 아니라면 좀더 자연스럽게 옮기는 편이 좋았겠다.   

덧붙여, 67쪽 이하에서 'historian of ideas'는 '이념사가'로 옮겨졌는데, '사상사가'가 더 나을 듯하다(온갖 사상들의 역사를 다루기에). 69쪽 "근대의 비판적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지배적인 장소를 복원한다"에서 '근대의 비판적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지배적인 장소'는 '근대의 비판적 입장의 등장과 함께 상실한 지배적 장소(the dominant place it had lost with the modern critical stance)'이다.  

그리고 조금 의외의 오역. 연결망적 현실에 접근하는 데 '비판의 삼분법'(인식론, 사회학, 해체주의)이 갖는 한계 혹은 딜레마를 라투르는 지적한다. "이것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로서, 인류학은 내가 '자연-문화'라고 부를, 이음새 없이 이어진 직조를 통해서 우리가 차분하고 간단하게 이 딜레마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지 못했다."(32쪽). 번역문만으로도 난센스라서(라투르는 인류학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인류학이 이 딜레마를 다루지 못한다?) 원문을 찾아봤다. "This would be a hopeless dilemma had anthropology not accustomed us to dealing calmly and straightforwardly with the seamless fabric of what I shall call 'nature-culture' (...)"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보기엔 'if가 생략된 가정법' 문장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 인류학이 내가 '자연-문화'라고 부르는, 이음새 없는 직조물을 우리가 차분하고 익숙하게 정면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해결 가능성이 없는 딜레마일 것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투르는 '근대세계에 관한 인류학’, '대칭적 인류학'을 주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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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1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애쓰셨습니다. 읽어 봅니다.

로쟈 2009-07-19 23:01   좋아요 0 | URL
^^

2009-07-19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9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7-1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그렇군요... 자본은 국경을 넘나드는데 책과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네요.

로쟈 2009-07-20 09:16   좋아요 0 | URL
사실 책은 책값보다는 언어의 장벽이 더 높지요.^^;
 

'제국'과 '다중'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의 새 책이 출간됐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그린비, 2009). 지난달에 원서를 구한 책이어서 번역본은 뜻밖이다. 분량이 많지 않은 대담집이라 사회주의 이후의 좌파 운동의 현황과 향방을 훑어보는 데 유용할 듯싶다. 이 저명한 좌파 이론가를 가이드 삼아서(번역본의 표지는 너무 유순한 듯싶다. 마치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일보(09. 07. 18) "사회주의여, 또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라" 

백남준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이름을 떨쳤던 계기는 1984년 전세계에 동시 중계된 위성 라이브 프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탈리아의 좌파 사회학자 안토니오 네그리(76)는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Goodbye Mr. Socialism)라고 외친다.

 

시류에 흔들리는 '대중'도, 혁명적인 '민중'도 아닌 '다중'이라는 탄력적인 개념을 제시했던 그가 이탈리아의 진보적 지식인 라프 발볼라 셀시(52)와 머리를 맞댔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위축된 좌파 운동 혹은 민주주의가 지금 어떤 모색과 변환을 겪고 있는지가 두 지성의 대화 속에 드러난다.

"스페인에는 현재 노동력을 구성하는 35%가 비정규직 형태의 노동에 종사합니다. 프랑스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인턴십이 조직되고 있어요."(131쪽) 유럽이 겪고 있는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한 네그리의 말이다. 노동시장의 국제화에 따른 이주노동자 문제를 두고 네그리가 "노동 발전과 기술 혁신의 진행에서 기업은 이민자를 선호하기"(117쪽) 때문이라고 원인을 짚는 대목은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네트워크의 변혁에 대한 네그리의 강조는 한층 심화됐다. 네그리는 그 같은 경향을 "새로운 관계들과 지식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83쪽)이라며 강하게 긍정한다. 그의 통찰, 예를 들어 "좌파는 쇠락의 형국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40쪽) 또는 "인터넷은 복잡성이 증가할수록 쓰레기로 더 뒤덮인다"(101쪽) 등은 문명비판적이다. 나아가 "1995년 이래로 지구를 장악해 온,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쓰레기"(83쪽), "미국에 대항해서 대안적 세계화의 문을 열어라!"(190쪽)는 등의 표현은 격문이 제격일지 모른다.

그가 기대는 가치는 자유와 민주다. 그는 "자유는 사람들의 두뇌 안에 있는 고정자본"이라며 "상상하고 소통하고 언어를 발전시키는 자유"를 강조한다.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오직 자유뿐"(201쪽)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네트워크에 기반한 혁명적 민주주의"는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인 셈이다. 계급 이익에 골몰하기 일쑤인 유럽 좌파의 행태와 관련, 그가 노동계급의 이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시사적이다.

책을 옮긴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어학과 교수는 "사회주의에 안녕을 고하며 새로운 이성을 꿈꾸는 네그리는 이성의 가능성에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근대주의자"라며 "현실 사회주의와의 결별은 또 다른 가능성의 추구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향한 충동"이라고 말했다.(장병욱 기자) 

09.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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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7-19 22:41   좋아요 0 | URL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드뎌 나왔군요ㅋ 기대됩니다.

로쟈 2009-07-19 23:03   좋아요 0 | URL
네, 책들은 계속 나오는데, 누가 다 읽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