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배송된 책과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가방 가득 채워넣고 귀가하면서 우편함에 들어 있는 잡지와 계간지까지 손에 들고 왔다. 계간지는 <문학동네>(가을호)인데,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이란 특집에 짧은 글을 보탠 바 있다. 여기에 옮겨놓는다.  

문학동네(09년 가을호)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모든 질문이 질문의 계기와 질문하는 자리를 갖듯이 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질문과 대답의 자리는 비대칭적이다. 나는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을 묻는 자리의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대답을 마련해야 하는 자에게 질문하는 자는 마치 심문자처럼 언제나 대타자의 자리에 놓인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대타자의 앎에 대한 두려움만이 나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밀알이다. 아니, 자신이 하나의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다.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사례가 된 이 환자는 의사들의 노력으로 겨우 치료가 됐다. 즉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문 밖에 닭 한 마리가 있는 걸 보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즉시 되돌아왔다. 닭이 자신을 먹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잖은가?”라고 의사가 물었다. 환자의 대답은 이랬다. “네, 물론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  

물론 이 사례담은 우스개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처럼 기독교의 신에까지 사안을 고양시키게 되면 이건 ‘진지한 우스개’이자 ‘숭고한 우스개’이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아버지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할 때 신은 그 자신을 잠시 믿지 않는다. G. K. 체스터턴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신이 잠시 동안 무신론자로 보이는 유일한 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젝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야말로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덜 무신론적’이라고 진단한다. 모두가 회의주의자의 포즈를 취하며 냉소적 거리를 유지하고 타인들을 착취하며 윤리적 제한들을 뛰어넘는다. 신의 무지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믿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에도 세 가지가 있는 듯싶다. 한편에는 여전히 문학에 대한 진지한 믿음, 철석같은 믿음을 견지한 문학의 사제와 신도들이 있다. 반면에 마치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문학은 죽었다’라고 공언하는 종말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제도적 관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 의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문학의 생산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문학이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사르트르)이라는 정의 자체를 오늘날의 문학이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 다만 문학의 변신을 새로운 가능성이란 이름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변절로 간주하여 내치느냐에 따라 의견은 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은 문학의 존재/부재를 ‘믿는다’. 결코 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하거나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여기서 문학에 대한 믿음의 과잉과 결핍은 ‘사변적 동일성’으로 묶인다.  

반면에 제3의 입장은 ‘믿음 자체에 대한 믿음’이란 형식을 취한다. 이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자신의 눈을 믿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으며 그래서 속는다. 문학에 속아 넘어간다. 즉, 문학의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을 믿는다. 대타자를 믿는다. 이들은 ‘닭’의 존재를 믿는 ‘낱알’들이다. 지젝은 그 ‘낱알들’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기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안네 프랑크와 함께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견지한 채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든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은 다시 W. B. 예이츠의 시구에서도 식별해볼 수 있다.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제2의 강림 The Second Coming」 중에서


오늘날 ‘최선의 무리’들조차도 문학의 ‘상징적 순수함’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지 못하며 냉소적․회의적 포즈로 물러나 앉는다(대학의 문학 강의실이나 문학인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반면에 ‘최악의 무리’(군중)는 온갖 광신적 행동에 동참한다. 문학이라고 포장된 온갖 것들에 재미를 붙이고 의견을 보탠다. 남은 선택지는 ‘침몰해가는’ ‘순결한 의식’이다. 이 순결함의 사례로 지젝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 등장하는 뉴랜드의 아내를 든다. 그녀는 남편이 오렌스카 백작부인과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사실을 품위 있게 무시하고 그의 충실함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답변인가? 그렇다. 해서 결국 나는 병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나는 질문이 요구하는 답변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했다.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건 말할 수 있다. 나도 이름을 보탠 한 선언이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6.9 작가선언'에서)

내가 보태지 못한 말은, 이 선언이 미처 챙기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가장 예민한 살갗일뿐더러 가장 질긴 살갗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가장 먼저 상처 입지만 가장 늦게까지 아물지 않는다는 것. 가장 빨리 아파하지만 동시에 가장 늦게까지 아파한다는 것. 이제 그런 문학이 ‘존재’하도록 모두가 애써 연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당신의 정절을 믿어요.”  

09. 08. 28.  

P.S. 서두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의 '계기'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마감이 지나 이 원고를 써야 할 시점에서 또 다른 서평을 위해 읽어야 했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다. 달리 대답거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지젝이 언급한 믿음의 문제를 한국문학에 적용해보았다. 인용한 예이츠의 시는 보통 <재림>이라고 옮겨지는데, <시차적 관점>에서 재인용하며 번역된 제목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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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동향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인터넷 연재소설과 문단문학에 대한 대안적 글쓰기론을 소개하는 기사이다. 첫번째 기사는 알라딘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두번째 기사에서 언급된 <실천문학>(가을호)은 아직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듯하다. 계간지들의 판매 실적이 저조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일보(09. 08. 24) 인터넷 소설 연재, 문단에 활력이냐 그들만의 잔치냐  

인터넷 공간은 한국 소설에 활력을 부여하는 새 개척지인가? 최근 몇년간 주요 인터넷 서점과 포털 사이트들이 국내 유명 작가들의 소설을 연재하고, 이를 출판사들이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한국문학에 던져진 질문이다. 활자 텍스트에서 인터넷으로의 '글쓰기 공간'의 변화는 소설의 형식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 댓글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이 독자가 작품에 개입할 여지를 넓힐 것인가, 하는 질문도 잇따른다.

■ 자리잡은 인터넷 소설 연재
이른바 순수소설의 인터넷 연재는 2007년 박범신씨가 네이버 블로그에 '촐라체'를 연재한 것이 시초다. 이 연재는 100만명의 방문자를 끌어들였고 이후 황석영씨도 장편소설 '개밥바라기별' 을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펴냈다. 공지영씨의 '도가니', 박민규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공선옥씨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등도 인터넷 연재 후 책으로 나왔다.

최근에는 '나비', '웹진 뿔' 등 문학 전용 인터넷 사이트도 속속 만들어지면서 작가들의 인터넷 연재는 확산일로다. 신경숙, 김훈, 구효서, 정도상, 김경욱, 김도언, 이기호, 오현종씨 등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한 후 단행본 출간을 기다리고 있거나 연재 중인 작가들은 10여명에 이른다. 



■ 창작공간 확장 vs 출판사ㆍ특정 작가들의 잔치
인터넷 소설 공간의 등장은 일간지의 소설 연재가 크게 축소된 현실에서, 장편소설을 연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아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 작가들의 반응이다. 소설가 이기호씨는 "작품들이 매체의 특성을 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한국소설이 양적으로 풍성해질 것은 분명하다.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무시켜줄 것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조영일씨는 계간 '문학수첩' 가을호에 발표한 '인터넷 문학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글에서 현재 연재되는 인터넷 소설들이 이미 출판사와 출간계약이 된 유명 작가들의 작품 일색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이 공간이 "추가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출판사의, 그리고 그 비용만큼 추가이익이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작가들만의 잔치가 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인터넷 연재소설의 경우 출판사가 포털 사이트(또는 인터넷 서점)와 연재료를 절반씩 부담하거나 출판사가 전액 부담하고 있다.

반면 문학평론가 김명석씨는 같은 잡지에 발표한 '더 리더, 인터넷에서 소설을 읽다'라는 글에서 "인터넷 소설이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작품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프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독자들이 보다 다양하고 수준높은 작품들을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독자 입장에서는 무료로 책 발간 전에 소설을 접할 수 있고, 웹진을 운영하는 출판사나 서점 측에서는 책의 홍보를 통해서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윈윈 효과를 거둔다"고 평가했다.

■ 소설 형식 변화 가져올까
댓글이 활성화된 글쓰기 공간의 변화가 글쓰기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관심거리다. 작가들로서는 여전히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며 댓글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반응(김훈)이 있는가 하면 "연재 내내 백주 대낮에 광장에서 글쓰는 과정이 중개되는 것 같아 힘들었다"는 반응(공지영)까지 다양했다. 댓글을 의식하지만 작품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작가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실제로 댓글의 80~90%가 작품 비평보다는 작품에 대한 칭찬이나 작가에 대한 격려로 나타나고 있다.

매체 변화가 소설 형식의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현재 장편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연재 중인 신경숙씨는 "예전에는 인터넷 언어라는 것이 따로 있어 만일 연재를 한다면 기존에 지면에 발표한 작품보다 경쾌하거나 발랄하게 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해보니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제는 인터넷이 일상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소설 '거대한 속물들'의 연재를 시작한 오현종씨는 "구술로 전달되던 이야기가 기록되면서 형식을 갖췄듯 인터넷 소설은 작가들로 하여금 글쓰기 스타일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라며 "원고지 10매 안팎의 글을 네티즌들을 상대로 매일 연재하는 만큼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갖고 문장의 맛을 살릴 수 있도록 애를 쓴다"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한겨레(09. 08. 22) 낙선작가여, 문단 버리고 세상을 공략하라 

해마다 신문사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 신인상 공모 등에 응모되는 작품은 1만여편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 응모자 중 한 해에 수백명이 문단 ‘신인’으로 등단하지만 그뒤로도 살아남는 작가는 열명 안팎에 불과하다.   

 

어째서 그럴까. 작가적 역량의 문제인가? 통상 돌아오는 답이다. 계간 <실천문학> 가을호 특집 ‘새로운 감각, 게릴라 글쓰기’는 질문을 바꿔보자고 말한다. 이 특집에서 신예 문학평론가 임태훈(31·사진)씨는 기성 문단문학의 폐쇄성을 비판하며, 문단 제도 바깥의 작가들, 다시 말해 미등단 작가(=작가 지망생)들에게 ‘세상을 정면으로 관통하려는 연대’와 그 방식으로서 ‘게릴라의 글쓰기’를 제안한다.

임씨는 우선 문단문학을 두고 ‘대형작가와 당파적 출판사의 배만 불리는 승자독식 문단이자 문학청년의 도살장’이라고 비판한 평론가 조영일씨의 견해에 대체로 공감을 표한다. 하지만 임씨가 보기에, 중요한 건 문학청년들의 진짜 행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구체적인 방법이다. 문단문학의 문제점을 나열하는 데 그친다면, 그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것만으로도 문단문학은 논쟁의 가능성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궁극적 욕망이 독자와의 소통에 있다면, 그 점에서 오늘의 문단문학은 실패하고 있다는 게 임씨의 진단이다. 몇몇 유명 작가들 작품 외에는 문단문학의 독자층은 협소하다. 신인작가의 책은 초판 1천부가 팔리지 않는 일이 허다하고, 문예지의 독자층도 점점 줄고 있다. 문단문학의 큰 폐해는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쓸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 자격증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려 하기에 비슷한 글들이 양산된다. 제도로부터 반복적으로 거절당한 이들은 글을 그 기준에 맞추거나 글쓰기를 그만둔다. 그러니 임씨는 등단이 작가의 출발점이라고 믿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삶의 방식이다. 자신의 역량과 무능을 ‘글쓰기라는 소통’을 통해 경험하는 삶이야말로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본질이라고 말한다. 신춘문예와 신인상 제도로 대표되는 문단 등단의 기준을 통과할 만한 모범답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이 스스로 제도의 바깥에서 재미있는 글쓰기 방식을 찾아나가는 것, 그 모험이 중요하다고 임씨는 말한다. 인터넷 글쓰기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이자 또다른 걸림돌이다. 최근 창간된 인터넷상의 문학 웹진은 문단문학의 매체 확장일 뿐이다. 7개 출판사와 매출 1위 인터넷서점이 공동으로 만든 이 웹진의 주된 필자들은 문단제도권 안에서 선택되고 길러진 작가들이니, 아무나 읽으러 갈 순 있어도 아무나 쓸 수는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창작블로그들이나 창작카페 모임들은 온라인 사이트 안에서만 교류하기 일쑤이며 오프라인 공동체 만들기엔 무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릴라들이 전선 없이 싸우는 것처럼, 글을 꼭 제도권 지면에 쓸 필요는 없으며, 그 바깥에서 마치 게릴라처럼 어디서나 글을 쓰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 게릴라가 민중의 지지 없이는 활동할 수 없듯이, 게릴라식 글쓰기는 어떻게든 독자들과 ‘직접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임씨는 피투피(P2P)를 활용한 글쓰기는 대안 매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극단적인 예로, 연예인 엑스파일이 삽시간에 피투피를 통해 거의 온국민에 노출되었듯이, 피투피를 활용한 글의 유통은 게릴라 글쓰기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는 이들의 연대와 기존 창작블로그나 카페 공동체들의 접속이 필요하다. 글쓰기 공동체와 사이트를 링크해주고 연결해주는 연결망 ‘노드’의 증식이 필요하다고 임씨는 힘주어 말한다.

<실천문학> 가을호 특집은 미등단 작가들의 좌담도 실었는데, 김경년(25)씨는 “대중이 원하는 글과 등단한 이들이 쓰는 글이 다르다”며 “대중과 작가의 불일치 속에서 문학이 사회의 문화적 생산자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잊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교희(25)씨는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10~20년 후 가능성을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틀 안에서 작품을 뽑는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 갇혀 있음에 절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미등단 작가들의 작품들로 특집을 기획한 <실천문학>의 고명철 편집위원은 기획의 말에서 “이들 젊은 문청들의 글은 기성의 목소리들에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며 “이 글들이 새로운 미적 저항의 징후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허미경기자) 

09.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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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소설 시대와 게릴라적 글쓰기"를 "게릴라적 글쓰기와 인터넷소설시대"로 바꾸었더라면 좋았겠다. 기성 작가 때문에 미등단 작가가 눌린 모습이다.

기성 작가와 미등단 작가와 차이는 재미있거나 슬프거나 등이면 읽는다는 것보다 독자가 작가의 삶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미등단 작가의 삶의 궤적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선뜻 다가서기 힘들다.

'신춘문예'등은 작가의 삶이 공개되는 관문이라 생각한다. 무명 작가중에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면 작가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문학은 잘 짜여진 잘된 시스템에 의해서만 탄생되지 않는다. 독자는 인간적인 시행착오와 극복속에 자연스럽게 베어나는 글의 냄새를 맡는다. 배설하고 끝내버리는 일회용 즐거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한비야는 전문 소설가는 아니지만 인류애 실현으로 글을 발표)

젊은 작가들이 인터넷에 글을 많이 올리기를 바라지만, 모니터 화면과 종이는 다르다. 모니터는 업무나 일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만 책은 이동성, 공간성, 시간성을 활용한다.

화면에서 글의 간격이나 분량도 다르다. 매체가 유행이되니까 작가도 변화해야 한다는 어설픈 맹목으로 독자에게 다가 간다는 자부심은 좋지만 오래 지속하면 식상할 가능성이 있다.

기성작가 중에는 독자층이나 검색수에 무관하게 인세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댓글이나 접속수로는 자신의 작품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마음을 싹뚝 잘라야 한다. 책보다 디지털이 영구보존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로쟈 2009-08-28 23:00   좋아요 0 | URL
등단 문인이라 하더라도 작품집을 두 권 이상 내는 경우는 많지 않고, 상업적으로 생존하는 경우는 더욱 드뭅니다. '문학의 도살장'은 등단 작가라고 해서 면제되는 건 아니죠. 다만 우리의 경우엔 몇몇 작가에 대한 편독이 좀 심한 게 아닌가 해요. 200만부 작가보다는 2만부 작가 100명이 문단을 더 화려하게 해줄 텐데요...

펠릭스 2009-08-29 10:35   좋아요 0 | URL
예,,거액의 기부자도 좋지만 소액의 기부자가 많고 일정하면 더 따뜻하고 튼튼하죠.

2009-08-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간 <문학수첩>(가을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조영일의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b,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 받고 쓴 것이다. 10매 분량의 짧은 서평이다.  

  

문학수첩(09년 가을호) 한국 문단문학의 종언

<한국문학과 그 적들>은 가라타니 고진 전문 번역자로 이름을 알린 평론가 조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첫 평론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과는 불과 몇 개월의 시차밖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알 수 있지만 원래는 거의 같은 시기에 쓰였고 함께 출간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곧 작품론 위주로 구성된 세 번째 평론집을 냄으로써 ‘한국문학비판 3부작’을 완결지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제안이기도 한 ‘장편비평의 활성화’를 시범적으로 보여주려는 듯싶다.   

‘한국문학비판’이라는 전체 기획과 제목에서 이미 시사되고 있지만, 그의 평론집을 주로 채우고 있는 것은 현재의 한국문학 시스템에 대한 주저 없는 단언과 비판, 그리고 쓴소리다. 그 비평적 입각점에 해당하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이다. 이른바 그의 ‘종언 테제’에 대해서는 일본보다도 오히려 한국에서 더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고 한다. 주로 가라타니의 주장이 성급하고 일면적이며, 적어도 한국문학의 현실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대세였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의 번역자이기도 한 조영일은 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대변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의 ‘종언 테제’ 수용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지겨운 오해를 위해 확실히 말하지만,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한국문단문학’은 창비, 문사, 문동이 장악하고 또 관리하고 있는 하나의 ‘생산관리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토대는 문예지를 출간하는 출판사와 편집동인들의 ‘아름다운 협력’ 체제이다. “작품이 상품이라면 비평은 화폐”인바, 편집동인 비평가들은 “4․19세대의 위대한 문학적 발명품”인 ‘작품해설’을 통해서 개별 작품에 ‘보편적 교환가능성’을 부여한다. 즉, 문학시장에서 작품이 팔리게 하는(인정받게 하는) 것이 비평의 몫이다. 문제는 문학시장도 시장인 만큼 속성상 ‘과장된 호명(비평적 베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이 “신용의 붕괴 즉 공황(근대문학의 종언)”을 가져온다는 것이 조영일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위기는 문학시스템이 불가피하게 봉착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현상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로 인해서 빚어지는 것이 문학에 대한 불신과 비평 그 자체(이론)에 대한 몰두이며, 한국문학시장에서 일본문학의 부흥은 그러한 문학적 공황의 산물이다. 이러한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당연히 현재의 문학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조영일의 주장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비평권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잡지편집권을 회수하여 출판사의 전문편집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독자의 외면으로 한국문학시스템에서 시장이 위축되자 국가가 문학판에 끼어들었고 이것이 사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는 것이 조영일의 판단이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작가들에게 주는 창작지원금이 문화예술을 보호/육성하기보다는 창작자 개개인의 우울증치료에나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일의 경우에도 문예창작 지원시스템이 잘 갖춰진 이후에는 쓸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덧붙인다. 가난 속에서 단련될 작가의 패기에 더 기대를 거는 것이다. 이후에 그의 관심이 이 문학시스템과 국가지원의 ‘바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일 것이다.   

‘한국문학과 그 적들’에 대한 조영일의 분석과 비판은 분명 논쟁적이며 유익하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과는 초점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에서 요점은 이 시대의 문학이 더 이상 ‘영구혁명’이라는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과제를 떠맡지 않게 됐다는 데 있다. 그러한 역할이 근대문학을 한갓 오락이나 상품과는 구별되도록 만들었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지나간 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문학의 종언’과 ‘한국문단문학의 종언’은 바로 등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영일은 자신만의 ‘종언 테제’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라고 해야겠다.   

09.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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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본 문단의 최대 화제작은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문학동네, 2009)다. 우리에게도 올 최고 선인세를 지불한 작품으로 알려져 '흥행' 유무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어제 잠시 서점 나들이를 갔다가 갓 출간된 1권을 사들고 왔는데, 한때 떠돌던 '한물 간 노장'이라는 소문을 입방정으로 일축하려는 듯한 작가의 기세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관련기사를 챙겨놓는다(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경향신문(09. 08. 27) 하루키 ‘1Q84’ 열풍, 국내서도 불까

출간도 되기 전에 이토록 뜨거운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됐던 책이 또 있을까. 10억원대의 선인세와 일본에서의 뜨거운 인기로 출간 전부터 한국 출판계를 술렁이게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사진)의 신작 장편소설 <1Q84>(문학동네)가 일본에서 출간된 지 3개월 만에 국내에서 출간됐다. 1권이 먼저 나왔고, 2권은 다음달 8일 출간 예정이다.  

  

<1Q84>는 일본에서 숱한 기록을 낳았다. 출간 첫날인 5월29일 하루에만 68만부가 팔려나갔고, 7월 말까지 모두 223만부 이상이 팔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음반과 체호프의 여행기도 함께 인기를 끌어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1Q84>가 ‘빅카드’로 톡톡한 노릇을 해낼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문학동네는 초판만 10만부를 찍었는데 10억원대의 선인세에 대한 손익분기점은 1·2권 합쳐 50만부이다. 출간 초기 반응은 좋은 편이다. 7월31일부터 8월25일까지 예약판매를 진행한 결과 7000여부가 판매됐으며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는 출간 하루 만에 베스트셀러 6위에 올랐다.

<1Q84>는 하루키가 <어둠의 저편>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하루키의 대표작들이 지닌 요소들을 집대성한 장편’이라는 평가답게 현실과 판타지가 기묘하게 뒤섞인 이야기, 신흥종교집단의 내부폭력과 잔인성이라는 사회적 문제, 남녀 주인공의 안타까운 순애보를 복합적으로 담아내면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소설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와 같이 불안정하면서도 기묘한 음향으로 시작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같이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를 교대로 진행시키며 전체 이야기의 얼개를 치밀하고 균형감 있게 맞춰나간다.

여주인공 아오마메는 스물아홉의 스포츠클럽 강사로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직업을 하나 갖고 있다. 여자들을 학대하는 남자들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킬러다. 1984년 4월 어느 오후, 청부살인 현장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그는 고속도로가 꽉 막혀 약속시간에 늦게 되자 도로에서 지하로 연결된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를 둘러싼 세계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어느날 그녀는 밤하늘에서 두 개의 달을 보게 되고, 그날 이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Question에서 Q를 따와 ‘1Q84’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 덴고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어느날 미완성 소설의 문장을 다듬는 임무를 맡게 된다. 소설의 원작자인 여고생 후카에리는 난독증에 걸린 독특한 소녀다. 그는 후카에리의 소설 속으로 빠져들고 후카에리가 일본의 급진적 신흥종교 집단에서 길러졌으며 그와 관련된 비밀스러운 과거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 이야기는 그녀가 직접 겪은 일이라는 것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전혀 연관없어 보이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관계가 서서히, 그러나 속도감 있게 드러난다. 아오마메는 신흥종교에 빠진 부모 아래서 자라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받았고, 딱 한 번 자신을 도와준 덴고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30세가 돼 ‘1Q84’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실의 시대>에서 시작된 하루키의 인기는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는 “하루키는 일상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일상성을 실존적인 문제들과 결부시켜 현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잘 녹여내고 신화적 모티프를 잘 활용한다”며 “일상성·철학성·신화성 세 가지 요소가 하루키 소설의 특성인데 한국 문단에서는 하루키가 표피적으로 읽혀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이영경기자) 

09. 08. 27. 

P.S. 어제 한 일간지 기자에게서 하루키 문학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고 일축하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작가라고 해야 맞다. 20년 전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상륙한 작가로 나는 밀란 쿤데라를 선호했지만 하루키에 대해선 무덤덤했다(나는 <상실의 시대>도 읽지 않았다). 몇 개의 평론을 읽고 안 읽어도 되는 작가로 제쳐놓았던 것. 그러다가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을 읽으면서 카버의 일본어 번역자이자 매니아인 하루키의 단편들도 몇 편 읽어보게 되었고, 몇 권의 관련서도 훑어보았다(<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가 유익했다).   

그러면서 흥미를 갖게 된 주제가 옴진리교 사건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다(신흥종교집단은 <1Q84>에서도 중심적인 모티브로 활용되는 듯하다). 하루키는 1995년 옴진리교도들이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에 충격을 받아 <언더그라운드>(열림원, 1998)라는 넌픽션을 썼는데, 나는 이를 계기로 그의 문학이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물론 그런 '외상' 이후의 문학이다(<언더그라운드>는 하루키의 저작으론 국내에서 가장 안 읽히는 책이다. 절판된 지 오래다).  

 

 

절판된 이 책은 아직 구하지 못했는데(재출간되면 좋겠다),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언더그라운드> 이후의 세 주요 장편소설, 곧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 <1Q84>를 한데 묶어서 다뤄보고 싶다. 그게 내가 쓰고 싶어하는 하루키론이다.   

주인공이 택시에서 듣는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http://www.youtube.com/watch?v=jVN5STjc4ng) 얘기로 시작하는 <1Q84>는 야나체크와 같은 조국의 작가 밀란 쿤데라를 은근히 연상시킨다. 야나체크란 이름을 쿤데라의 소설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하루키가 2006년에 카프카상을 수상한 것이 체코의 작곡가를 등장시킨 계기가 됐을까?). 마치 작곡을 하듯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도 전형적인 쿤데라식이다(원래 하루키식도 그런 것인가). 그런 '쿤데라필'도 하루키에 대한 오랜 무관심을 덜게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1Q84>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체호프의 여행기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한다는 소문을 접하고부터다(이 페이퍼의 제목이 '하루키-루쉰-오웰'이 아니라 '하루키-쿤데라-체호프'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기사에서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음반과 체호프의 여행기도 함께 인기를 끌어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켰다."고 언급되는데, 그 여행기가 바로 <사할린섬>이다. 1890년 서른 살의 체호프가 갑자기 사할린으로의 여행을 감행하여 정치범 수용소가 있던 그곳의 실상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로 발표한 작품. 말하자면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에 상응하는 체호프의 넌픽셕이다(하루키가 그런 맥락에서 <사할린섬>에 주목하지 않았을까라는 게 내 추측이다). 일본에서도 1950년대에 나왔던 이 책은 이번에 하루키 열풍을 타고 부랴부랴 재출간됐다고 한다. 영어본도 2007년에 나왔다. 하지만 한국어로는 아직 읽어볼 수 없다. <1Q84>가 나온다고 하기에 역자를 섭외해놓고 몇 군데 출판사에 <사할린섬>의 출간의사를 타진해봤지만 아쉽게도 '수용소'를 다룬 넌픽션이라고 꺼려했다. 우리는 아직 하루키나 체호프를 읽을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  

09. 08. 27.  

P.S. 아래는 <언더그라운드>의 러시아어본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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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대체 왜 하루키를 안 읽었을까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과 그때의 과도한 유행이 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켰던 것 같아요. 아 근데 로쟈님 글 보니까 한 번쯤은 이 사람글을 읽어야 할 듯한 기분이 드네요.

로쟈 2009-08-27 17:36   좋아요 0 | URL
안 읽긴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후기작들은 생각할 거리를 주(려)는 듯해요...

펠릭스 2009-08-2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기억의 사람을 찾으려는 마음은 굴뚝같습니다.
어쩜 이 사람이 그 오랜 갈망의 그 사람인지 모를인데,,,

로쟈 2009-08-27 17:35   좋아요 0 | URL
흠 소설 한편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8-2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의 사할린 여행기는 저도 읽고 싶습니다.그 여행을 통해서 그의 문학관 철학관이 확고해지면서 톨스토이 류의 도덕주의에서 벗어난 계기가 되었다니까요.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책을 읽었군요.역시 번역은 많이 될수록 좋지요.

로쟈 2009-08-27 17:35   좋아요 0 | URL
네, 하루키가 영문학도 많이 읽었지만 러시아문학도 상당히 읽었습니다. 일본 작가들의 기본 소양인지 모르겠지만요...

2009-08-27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7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8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8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8-27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아주 오래전에 다행히도 [언더그라운드]를 구입해서 가지고 있는데요, 저도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 푹 빠져있어서인지 [언더그라운드]는 가장 안 읽히더군요.

로쟈 2009-08-27 18:00   좋아요 0 | URL
<언더그라운드>를 최고로 치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09-08-27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람되지만, 왜 '외상 이후의 하루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중에 글을 쓰시면 알게되겠지만, 그 '나중'이 언제일지 좀 요원해 보여서요.^^(무척 바쁘신 듯...)

로쟈 2009-08-27 23:47   좋아요 0 | URL
네, 제 생각에도 좀 요원합니다.^^; 저는 <언더그라운드> 이후에 비로소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가 된 거라고 보구요, 자신이 받은 충격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소화내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키의 '사회철학'을 이후의 작품들에서 재구성해보고 싶은 것이죠...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

나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영화 <해운대>의 관객이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예고편에서 받은 인상을 넘어서는 뭔가가 영화에는 있는 모양이다. 더불어 '쓰나미'라는 대재앙과 경제불황에서의 심리가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닌가도 싶고(영화 기획단계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효과일 수도 있겠다). 사실 그런 효과라면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도 누릴 만하지 않은가 싶다. '자본주의 대재앙'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주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에서 김영진 영화평론가도 지적한 것이다.  

경향신문(09. 08. 21) [책읽는 경향]쇼크 독트린 

영화 <해운대>를 보고 천만관객을 동원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편안한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스크린에 그럴 듯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대재앙이 시작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여하튼 그간 묵은 상처를 봉합하고 거듭난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고 정작 현실 속의 우리는 재난을 겪고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늘 사회가 힘들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살아왔고 경제가 어렵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그렇게 해서 수립된 새 정부는 다 바꾸자고 한다. 4대강 사업을 벌이고 땅값은 계속 올려 다 같이 부자가 되자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난이 올 것처럼 말이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재난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추적한 책 <쇼크 독트린>(살림 Biz)에서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라는 말을 쓴다. 기업하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감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그에 준하는 자연재해나 여타 사회적 재난을 핑계 삼아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를 가동시킨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레벨을 민영화하고 정부의 기능을 아웃소싱했다. 그 와중에 사회의 공공성 축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이 체제는 저절로 세계의 주류가 된 게 아니었다. 그 이념적 지주인 시카고 대학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지휘 아래 제자들, 후원기업과 미국 CIA가 세상을 꾸준히 바꾸었다. 정부권력과 기업이 합작해 만들어낸 이 시스템의 파국이 우리에게도 닥쳐왔으나 우리는 여전히 순진한 관객일 뿐이다.(김영진 영화평론가) 

09. 08. 25.  

P.S. 진보적 지식인의 새로운 기대주로서 "30년전의 촘스키와 하워드 진"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도 듣는 나오미 클라인은 이제까지 세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그중 두권이 번역됐다), 벌써 '세계를 뒤흔든 지식인' 반열에 들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와 패턴을 찾아내어 감춰진 진실을 폭로한다. 이 책은 이제껏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탁월하고 중요한 책이다."라는 것이 <쇼크 독트린>에 대한 하워드 진의 평가다.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워서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1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다고 하니 우리의 사회과학서 현실과 비교된다(물론 클라인의 책도 한국시장에서는 한국의 현실을 따르지만). 아시아 금융위기와 IMF 구제금용에 대해서도 클라인은 소략하게 다루고 있는데, 쇼크 독트린의 '한국 버전'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니까. 영화 <해운대> 관객의 1%만 관심을 가져줘도 '대박'이 날 텐데..

지난 연말에 나온 책이지만 만만찮은 두께를 감당할 여유가 없어서 미뤄두다가 나는 어제서야 뒤늦게 책을 구입했다. 시작부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에 대한 공격이 신랄하다(나오미는 이 책을 30대에 썼다). 문제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아니라 밀턴 프리드먼이다?! 생각난 김에 <궁정전투의 국제화>(그린비, 2007), <불경한 삼위일체>(삼인, 2007)와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려나 책이 좀더 많히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 나대로 한번 더 '광고'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말해주는 책은 자주 나오지 않는다.    

 

저자인 클라인은 1970년생으로 나이로만 치자면 나보다 젊다. 앞으로도 '창창한' 동행길이 독자로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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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noxr 2009-08-25 11:08   좋아요 0 | URL
아 쇼크 독트린은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이번 재난은 신종 플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D 그다음은 지구온난화겠죠?

로쟈 2009-08-26 01:05   좋아요 0 | URL
지구온난화는 많이들 다뤄서 신선할 것 같지 않은데요. <쇼크 독트린>의 주기라면 3년뒤쯤 책이 나올 듯합니다...

펠릭스 2009-08-25 21:18   좋아요 0 | URL
남한 인구의 1/5분이 특정 영화를 봤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세월이 겉을 싹~ 훌터버린 지금, 첫번째 우주발사 성공(?),
연애인의 파격적인 결혼 발표 등도 내겐 '쓰나미(-재앙)'다.
'쇼독(SD)'은 '즉사(卽死)'다. 내 또한 순진한 관객이다.
죽고 죽인 것들이 자연이 아닌 어떤 시스템에 의함에 놀랍다.
도착할 미래의 땅에서는 '인공쓰나미'가 나올법도 하다.

로쟈 2009-08-26 01:06   좋아요 0 | URL
네 칼럼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순진한 관객일 뿐이다"란 지적이 아프죠. 재난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사회인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