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꼽은 '11월의 읽을 만한 책'을 보니 서두에 "주말에는 써야 할 원고들이 많아서 미리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라고 적어놓았다. 딱 1년이 지났지만 처지는 마찬가지다. 주말에는 할일이 너무 많아서 야밤을 틈타 미리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11월은 2월과 마찬가지로 잘 눈에 띄지 않는 달이지만, 일정을 보니 매주 발표와 강연이 있다. 아마도 정신없이 보내다 12월을 맞을 듯싶다. 벌써 겨울인가?!..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추천한 책은 줌파 라이히의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이다. 이미 지난번에 '9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골라놓았으니 나로선 덧붙일 말도 없다. '그저 좋은 책'이고 나는 그제도 아는 분께 한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나대로 더 고른 책은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민음사, 2009)와 리비아 출신의 작가 히샴 마타르의 <남자들의 나라에서>(현대문학, 2009).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남아공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 쿳시가 200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쿳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소설이라 한다.   

<남자들의 나라에서>는 작가의 데뷔작으로 쿳시로부터 "리비아 정치의 폭력성에 너무 어린 나이에 노출된 아이에 관한 통렬한 스토리"란 평을 들은 작품. 공통점을 더하자면 두 작품 모두 쿳시와 하진의 작품을 주로 옮겨온 왕은철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1979년 리비아, 푸른 지중해와 뜨거운 햇빛으로 둘러싸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아홉 살 소년 술레이만. 그의 어린 시절은 카다피 정권으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 소설의 도입부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듯싶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김진경의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안티쿠스, 2009). 국내서로는 드물게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추천자는 "이 책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적 관점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크게 돋보인다. 노비를 포함해 인구 5만 명 정도의 폴리스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독립적 상태로 존속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하고, 베일 속에 묻혀 있던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현대인의 시야로 끌어올린 최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싣고 있어 흥미진진하다."고 평했다. 아직 손에 들진 못했지만, 나도 바로 구입한 책. 저자의 다른 책으론 <지중해 문명 산책>(지식산업사, 1994/2001), 번역서로 키토의 <그리스 문화사>(탐구당, 1984/2004)가 있다. 정평있는 그리스 입문서인 키토의 책은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갈라파고스, 2008)이라고 따로 번역되기도 했다.   

 

3. 철학 

이달부터는 철학분야의 선정위원이 김형철 교수(연세대 철학과)로 바뀐 듯한데, 첫번째 추천도서는 장근영의 <심리학 오디세이>(예담, 2009)이다. 의외의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저자가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알기 쉽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만화도 직접 그렸다." 분류하자면 교양심리학에 가깝겠다. 철학분야의 책을 고르자면,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9)과 김용석의 <서사철학>(휴머니스트, 2009)을 고르고 싶다. 모두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책으로 이야기란 무엇을 기록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좋은 통찰들을 제공한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고른 정치/사회분야의 책은 김재명의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프로네시스, 2009)이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충실히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다."라고 평하는데, 추천자에 따르면, 이 책의 메시지는 첫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좌절과 분노이고, 둘째,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거둬들이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혈사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 책으로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현대사>(후마니타스, 2009)와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던 만화 <바시르와 왈츠를>(다른, 2009)을 꼽아두도록 한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이몬 버틀러의 <시장경제의 법칙>(시아, 2009). 제목이 눈길을 끄는 건 아닌데, 추천자는 시장에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입문서로 강추하고 있다. "이 책은 시장의 모든 측면을 A부터 Z까지 샅샅이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에서 경제 전문가의 어려운 말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평범한 언어로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을 놀라울 정도로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진정한 대가는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존 맥밀런의 <시장의 탄생>(민음사, 2007)과 시장경제로의 이행 문제를 다룬 조지 스티글리츠의 <시장으로의 길>(한울, 2009)을 골라놓고 싶다. 전자도 "어려운 전문용어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모든 종류의 시장을 살핀다"는 책이다.     

6. 과학 

새로이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최영주 교수(포항공대 수학과)가 추천한 과학책은 콘스탄스 루크의 <존 오듀본>(서해문집, 2009). "책은 미국 조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인 존 오듀본(1785-1851)의 열정과 일 그리고 자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류학의 아버지'라고 하니까 국내에선 가장 널리 알려진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가 생각난다. 찾아보니 <날아라,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마음의숲, 2007)이란 자전적 에세이집이 나와 있다. 오듀본과의 차이라면 그림이 아닌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 소개는 이렇다. "새와 사람 사이에서 대자연이 허락한 만큼 보고 느끼고 깨달았던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의 60년의 삶이 총망라되어 있는 에세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새를 통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날개, 즉 마음속에 있는 식지 않은 열정을 되찾게 하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았다. 지은이가 직접 찍은 다양한 새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임근혜의 <창조의 제국>(지안, 2009). '영국 현대미술의 센세이션'이란 부제를 곁들여야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영국의 현대미술의 메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중계를 통해 전달해주고 있는 책인 듯하다. 소개는 이렇다. "런던을 관광의 메카로 만들며 현대미술의 능력을 보여준 테이트모던 미술관, 시골 탄광촌을 일약 국제적 문화도시로 도약시킨 '북방의 천사', 런던 뒷골목까지 관광객이 찾게 만든 얼굴 없는 거리미술가 뱅크시, 그리고 경매 한 번으로 2천억 원어치 작품을 팔아치우며 피카소를 넘어선 데미언 허스트 등 yBa 아트스타들의 성공 스토리까지…"

 

yBa는 'young British artist'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근 세계미술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고. 잠시 살펴본 작품들이 꽤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유가 뭔지, 어떤 사회적 배경이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예술분야의 나머지 두 권은 개인적인 관심도서로 채운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휴머니스트, 2009)와 조선희의 <클래식 중독>(마음산책, 2009). 전자는 진중권의 그림 이야기이고, 후자는 조선희의 한국영화 이야기이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이다. 12점의 그림 가운데 어째서 이 그림이 책의 제목이 되었는지는 우리가 다 아는 바다. 이런 게 동시대인의 '특권'이라니!..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소 알로이시오의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책으로여는세상, 2009)이다. 제목이 이미 많은 걸 짐작하게 해주는 책인데, 저자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자서전이라 한다. 어떤 분이었나? "1957년 12월 8일 파란 눈의 젊은 미국인 신부가 일본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전쟁이 끝난 지 4년밖에 안 된 한국을 찾았다. 그의 첫 인상. "당시 한국의 모습은 세상의 종말처럼 보였다." 27살의 이 신부는 어릴 때부터 꿈이던 가난한 자,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 했던 소 알로이시오. 루뱅의 신학교에서 유학할 때 알게 된 신부와 평신도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그는 한국과 태국 중에서 한국을 선교지로 골랐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가난한 이들이 많았던 부산교구를 선택했다."  그런 선택 이후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 있다. '소 신부님'은 1992년 루 게릭 병으로 필리핀 소년의 집 근처에서 영면했다고 한다. 저자의 책으론 <굶주린 자와 침묵하는 자>(가톨릭출판사, 2002)도 출간됐었지만, 품절상태다. 알라딘에서는 '카톨릭 에세이'로 분류되는 이 책과 같은 분야의 책으론 고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가 바보들에게>(산호와진주, 2009)도 출간돼 있다.   

  

9. 실용

손주호 국민일보 논설위원이 꼽은 실용분야의 책은 <노년에 인생의 길을 묻다>(궁리, 2009)이다. '노년과 나이듦에 대한 여덟 개의 시선’이 부제. 저자들은 어사연(어르신사랑연구모임) 소속. 노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이 책을 통해서야 '어사연'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이런 곳이다. 

‘노인’과 ‘노인복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어사연(어르신사랑연구모임)’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2000년 겨울 ‘노인복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시작한 소박한 모임이 가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져 9년의 세월을 보냈다. 특히 ‘어사연’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어사연 공부방’ 모임. 2001년 2월 1회 세미나(노인과 운동에 대한 기본 이해/노인 방송 프로그램 모니터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2009년 8월 100회 세미나(노인요양원에 살다 : 노인요양원 생활의 빛과 그늘)까지 노인문제와 관련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노인 복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들을 전하고 있다.(http://cafe.daum.net/gerontology)   

인생에서나 책에서나 '노년'은 '청춘' 이상으로 큰 주제이지만 소홀하게 다뤄진 감이 없지 않은데, 노인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만큼 관련서들이 더 많이 출간되면 좋겠다.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교정해주는 책으로 김열규 교수의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2009)와 프랑스의 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사라는 마리 드 엔젤의 <살맛 나는 나이>(학고재, 2009) 정도는 기억해둠직하다. 마리의 한 마디는 이렇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늙음이 주위 사람들에게 행운의 부적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의 탐험을 인도할 길잡이 끈은 우리 안의 무언가는 늙지 않는다는 신념이다. 나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시들고 메마른 심장이 아니라 사랑하고 갈망하는 능력을 말한다.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힘, 인간 존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이 힘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 불렀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노화의 힘든 시련 한가운데서 버티게 도와줄 수 있는 건 바로 마음이다.

 

10. 알함브라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알함브라'로 정했다. 책상맡에 있는 달력의 11월 사진이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정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찾아보니 워싱턴 어빙의 기담소설 <알함브라>(생각의나무, 2009)가 출간돼 있기도 하다.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생각나고, 시인 로르카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도 떠오른다...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하룻밤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11월의 하룻밤 정도... 

09. 10. 30.  

P.S. 이달의 고전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이다. 학부시절에 건성으로 들춰보았을 뿐 정독하진 않은 책인데, 지난 봄에 함석헌 전집도 개정판이 나온 김에 독서계획을 잡아놓았었다(이달이 그달이다). <함석헌 평전>(삼인, 2001) 등의 관련서도 많이 출간돼 있다. 낙엽이 타는 냄새와 함께 고난에 찬 한국역사의 '뜻'에 대해서 궁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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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30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여기였던가요. 일때문에 외지에 왔는데. '바시르와 왈츠를' 후다닥 읽고 싶네요.

로쟈 2009-10-30 22:37   좋아요 0 | URL
노트북으로 접속하시나 봅니다.^^
 

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이번주에 나온 강상중 교수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이다(원제는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책의 해제를 청탁받고 쓴 덕분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 긴 분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담을 안고 고민하면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강상중의 청춘적 독서'라고 제목을 붙인 해제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강상중 교수와의 첫 만남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 1997)를 통해서였다. 나는 강상중이란 이름보다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주제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속표지엔 날카롭고 이지적인 모습의 일러스트가 저자의 사진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간략한 저자 소개는 그를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동포 지식인’ 정도로 분류하게 했다. 나는 그가 도쿄대학 교수이면서 일본 이름이 아니라 ‘강상중’이란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자의 개인사보다는 ‘근대문화 비판’에 더 관심이 있었고, 베버와 푸코, 그리고 사이드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무관심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이렇게 써놓은 것을 애써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은, 왜 내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근대화의 낙오자로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게 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이다.”  

나는 그의 물음을 나의 물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을 것이다. 사실 저자와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가 여전히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것은 정서적인 한(恨)으로까지 경험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이자 공동체의 아픈 기억이긴 하지만 현실에서의 자기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세대에 무관심했다.   

생각이 조금 달라진 건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을 읽으면서다. 그사이에 강상중과 같은 세대의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책들을 즐겨 읽은 것도 재일 지식인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체로만 분류하자면 유려한 에세이들을 통해서 소개된 서경식이 ‘소프트’했고,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하여 내셔널리즘과 세계화 등 주로 ‘이즘’과 ‘이슈’에 관한 책들이 소개된 강상중은 ‘하드’했다. <고민하는 힘>은 그런 강상중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놓았다. 그건 ‘소프트한’ 강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적 지식인이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친 김에 나는 그의 자서전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까지 찾아서 읽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일본 이름 ‘나가노 데쓰오’ 대신에 ‘강상중’이란 본명을 쓰게 된 사연과 독일 유학시절에 대한 회고 등이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고 한 그의 말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일 2세로서 강상중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란 우리와는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피식민 지배의 굴욕적인 역사는 현실에서 그가 겪는 직접적인 모욕과 소외의 원인이자 원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역사를 낳은 ‘근대화’의 문제를 깊이 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근대화 이론의 태두라 할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대한 연구로 나아간다. 그 방향성을 규정한 것이 ‘개인’ 강상중이 아니라 ‘재일’ 강상중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선택은 동시에 ‘자유로운 선택’이자 ‘필연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강상중에게서 실존적 물음과 학문적 과제는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실존적 물음에 학문의 보편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하고 해명하며 답하고자 했다. 나로선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런 것이 강상중의 학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태도가 강상중에게서 배울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과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태도 말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청춘을 읽는다>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를 다시금 읽는다.   

청춘을 읽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서 출발하여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여정이기도 한 이 책을 손에 들면서 독자들이 제일 처음 던질 법한 질문이다. 한국어본의 부제가 된 책의 원제도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이다. 하지만 이미 <고민하는 힘>을 읽어본 독자라면 ‘청춘은 아름다운가?’란 장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청춘을 읽는다>와 <고민하는 힘>과 서로 짝이 될 만하다. <고민하는 힘>이 ‘고민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이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멘토’로서의 강상중과 만나게 해준다면, <청춘을 읽는다>는 독서노트의 형식을 빌려서 강상중의 성장사와 함께 시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그렇다, 이것은 독서록이면서 자서전이고 동시에 한 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그것을 뭉뚱그려서 강상중은 ‘청춘’이라고 말한다. 대단한 청춘 아닌가! 

강상중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청춘’을 ‘젊음’과는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청춘은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 방황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청춘은 단순히 ‘피부’와 ‘근육’의 문제로 따질 것이 아니다. 강상중이 청춘론이 문제삼는 것은 고민의 함량이고 방황의 진정성이다. ‘고민하는 힘’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청춘이다. 반대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기업에 얼른 취직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친다면, 비록 나이는 청춘이더라도 청춘이 버거운, 이름만 청춘인 경우가 된다.   

<고민하는 힘>에 따르면,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한마디로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젊음이긴 하되 청춘은 아니다. 기껏해야 탈색된 청춘이다. 이런 생각에서 강상중은 심지어 ‘청춘적으로 원숙함’이란 표현까지 쓴다. 나이를 먹더라도 청춘의 문제의식과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원숙함이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강상중은 ‘표층적으로 원숙함’이라고 부른다. 고민 없이 나이만 먹은 경우다. <청춘을 읽는다>는 ‘청춘적 원숙’에 이르기 위한 길잡이이자 ‘청춘적 독서’의 모범적인 사례담이다.   

 

사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시절까지, 곧 ‘청춘기’에 저자가 읽은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하고 또 추천하고 있기도 하므로 ‘청춘’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그 시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청춘’의 의미가 종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청춘을 되새기며 이야기하는 현재의 시간 또한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라는 시간이 그의 청춘 시대와 무척 닮았다고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그가 “나는 지금 제2의 청춘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 것도 일방적인 생각이나 믿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이면서 우리가 되사는 시간으로서의 청춘은 언제 시작되는가? 열일곱이다. 열입곱은 구마모토의 현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강상중이 야구선수의 꿈을 접게 된 나이이면서 ‘은둔형 외톨이’ 시절을 보내며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접한 나이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강상중의 글 「어른으로 향하는 외나무다리, 움츠리지 말고 건너가보자」가 가리키는 나이도 열일곱이다.  

그가 열일곱에 맞닥뜨린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경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인상적인데, 이 걸출한 일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강상중은 이 경구가 마치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선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아쿠다가와의 경구는 인생의 모순, 인생을 고민하는 청춘의 모순을 집약해주고 있다. ‘인생을 너무 소중히 다루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니 ‘인생을 소중히 다루지 말라’는 명제와 ‘인생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곧 ‘인생을 소중히 다루라’는 명제는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이 모순을 두 다리로 삼아서 우리는 깊은 계곡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태도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면, 우리는 그 위태로운 다리를 감히 건너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인생을 함부로 다룬다면, 우리는 신중하지 못하게 다리를 건너다 추락하고 말 것이다. 짐작컨대, 이것이 열입곱 살 강상중의 깨달음이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건 이 깨달음이 이후에 그의 정치적 입장과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전위’가 아닌 ‘후위’에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후위라는 것은 물론 ‘재일’, 곧 ‘자아니치’로서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와 “자신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는 상충적인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강상중 자신의 표현을 빌면, 현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떠한 ‘주의’나 ‘도그마’에도 붙들리지 않는 ‘리버럴’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한 입장을 강상중은 이렇게 요약해놓고 있다.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을 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 아무도 없고 어느새 내가 전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후위라고 생각하거니와 후위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내가 마치 전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라는 사회가 변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상중은 하나의 척도가 될 수도 있겠다. ‘후위’에 놓인 그의 입장이 전위로 보이는 만큼 한국사회도 일본의 변화를 따라잡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척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상중 자신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따라서 ‘청춘의 독서’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에게 ‘일생의 독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사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그의 일생을 결정한 책들과의 만남이었으니까.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를 통해서 우리는 “나는 야구도 못해. 친구도 없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걸까?”라고 묻던 ‘시골뜨기’이자 <산시로>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길 잃은 양’이었던 한 재일 대학생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던진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아나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독자가 읽어나갈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나의 소임인 듯싶지만, 한 가지 감상만은 덧붙이고 싶다. 그가 맺음말에서 이 책이 “청춘 독서노트인 동시에 또 하나의 도쿄, 또 하나의 일본을 모색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적을 때, 우리 또한 자연스레 “또 하나의 서울, 또 하나의 한국”을 모색하는 우리의 ‘청춘 독서노트’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 그럴 때만 우리는 아직 청춘이리라.  

0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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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따리의 책을 싸들고 귀가하면서 이동중에 읽은 책은 조선희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의 <클래식중독>(마음산책, 2009).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마음산책, 2009) 2판의 러시아어 표기 감수를 맡은 덕분에 출판사에서 증정본으로 보내온 것으로, 실상은 내가 먼저 부탁한 책이다(검색해보니 '조선희'란 저자가 여럿이군). 한국영화(사)를 더듬는 김에 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한국영상자료원, 2008)와 이효인의 <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개마고원, 2003)도 조만간 챙겨두어야겠다(그러고 보니 이효인 교수도 영상자료원장을 지냈군).

 

제목만 갖고는 무슨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부제가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이다. 씨네21의 첫 편집장을 역임한 저자가 3년간 영상자료원장으로 지내면서 거둔 소출 가운데 하나. 한국 영화감독론과 작품론도 겸하고 있는 책인데, 이런 유형으론 오래전에 읽은 이효인의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열린책들, 1994)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고전영화' 감독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동시대 감독이었던 이장호, 장선우 감독 이야기를 내가 먼저 읽은 탓이겠다.   

첫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이가 '잊혀진 천재' 이장호 감독인데, 그의 문제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오랜만에 상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학 1학년때 변두리 상영관에서 <바보선언> 등과 함께 보았던 영화로 나대로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가운데 하나. 책에 대한 독후감은 다른 꼭지들도 읽은 후에 고려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얼마전 한겨레에 실린 저자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0. 10) “개봉은 잠깐…아카이브는 영원하죠” 

조선희(49)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최근 3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하루도 에누리 없이 꼬박 3년이다. 그의 재임 기간이 새삼 관심을 끄는 건, 이명박 정부의 ‘전 정권 인사 일괄 퇴출 방침’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으로 3년 동안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라는 조씨를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고대 출신이라서 살려준 것이라는 둥, 여자 티오(할당 인원)라는 둥 턱도 없는 해석들이 많았다”며 “나는 고대 인맥에 구명운동을 한 적이 없으며, 이 정부 들어 양성평등 개념이 크게 후퇴했으니 여자 티오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라서’라는 해석도 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개인적인 판단이었는데, 아무리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영상자료원이 영화진흥위원회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관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업무 성과로만 본다면 그는 연임도 가능했다. 취임 당시 4년째 동결됐던 예산을 2배 이상 늘렸으며, 고전 영화를 대대적으로 발굴·복원했고, 복원한 영화들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3년 연속 진출시켰다. 100여편에 불과했던 독립영화 필름을 1600여편으로 늘려놓았고, 디지털 아카이빙을 시작했다. 각종 회고전과 특별전, 기획전으로 자료원 지하 1층 극장은 아연 활기가 넘쳤고, 인터넷으로 고전 영화를 볼 수 있는 온라인 브이오디(VOD) 서비스는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조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성과를 중시하고 또 즐긴다. 자료원 직원들은 조 원장 재임 시절을 “피곤했지만 행복하게 일했다. 무엇보다 성과가 있어서 신이 났다”고 회고한다. 자료원의 존재감이 가장 높게 부각된 시기라는 평이 다수다.

조씨는 “개봉은 잠깐이고 아카이브는 영원하다”는 말로 자료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최근 한국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열광이 있지만, 그마저도 개봉 1년만 지나면 차갑게 식어버리는 현상, 옛날 영화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으로 관심이 없는 분위기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했다.

퇴임에 맞춰 출간한 <클래식 중독>(마음산책)은 고전 영화의 향기에 취했던 지난 3년의 갈무리다. 그의 개인적 경험과 비평, 감독과의 대화, 스타들의 사생활 등으로 엮은 ‘살아 있는 한국영화사’다. <한겨레> 문화부 기자와 <씨네 21> 편집장, 한국영상자료원장을 거치며 길어올린 인간 조선희의 개인 아카이브를 구경하노라면, 거장 감독을 중심으로 분류한 한국 영화의 근현대사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게 된다.

같은 책 말미에 그는 “기관장 일괄 퇴출 정책은 가까스로 구축한 합리적인 시스템(산하기관장 공모제와 임기제)을 한방에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더 문제”라며 “권력으로 못하는 게 없으면 그것이 파시즘”이라고 썼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침묵할 수 없었다”고 조씨는 덧붙였다. 말이 나온 김에, 퇴임 직전까지 유 장관이 주재하는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그에게 이명박 정부 내부의 풍경을 물었다. 그러나 조씨는 “간첩 짓을 하기는 싫다”며 입을 닫았다.

깃드는 곳마다 족적을 남기는 그의 비결은 단순히 일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의리와 성과를 존중하는 (어찌 보면 보수적인) 태도에 있는 것일까. 다음 인생 행로가 세번째 소설 집필이든, “재밌는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든 그는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말리라.(이재성 기자) 

09. 10. 27.  

P.S. 기사 말미에도 언급이 있지만, 조선희 씨는 소설을 쓰기 위해 19년간의 기자생활을 그만 둔 이력이 있다(<클래식중독>을 읽으면서 언젠가 주워들은 기억을 상기하게 됐지만 소설가 김형경 씨가 저자의 여고 동창이다). <클래식중독>을 읽으며 저자의 두 소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생각의나무, 2002)과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 2006)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로선 '재밌는 사업'보다 '세번째 소설'이 더 기대되는 건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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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를 부탁해(영화), 엄마를 부탁해(소설), 아가씨를 부탁해(드라마),,,
부탁하지 못한 제 성격은 능력없는 욕심쟁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로쟈 2009-10-29 15:12   좋아요 0 | URL
아가씨를 부탁해도 있나 보군요.^^
 
액체근대란 무엇인가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강, 2009)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니 책의 역자가 필자이므로 '역자 후기'라고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바우만은 리차드 세넷과 함께 개인적으론 '올해의 발견'이라고 꼽을 만한 사회학자이지만 아직 <액체근대>는 완독하지 못했다. 정독할 시간이 얼른 생기면 좋겠다(바우만의 <유동적 사랑>도 새물결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이 또한 빨리 출간됐으면 싶고).  

  

교수신문(09. 10. 26) 사회관계와 힘에 관한 엄중하고도 온기있는 통찰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때로 숱한 생각과 느낌을 비워낸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는 행운이 있었다. 책 내용이 무한질주 궤도에 불가피하게 오른 액체근대 세상을 다루니만큼, 멈춰 서서 과연 그러한가를 짚어볼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액체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쇼핑목록을 들고 운동기구, 자동차, 주말여행, 더 나아가 교양, 친분,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구매하고 있어야 제대로 하루를 산다고 느낄 지경이다.

오늘을 사는 개인들의 하루 일과들은 일견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는 나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독한 숙제처럼 비쳐지는 것들도 있다. 연구 작업과 일상의 숙제들이 보편적으로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둘이 동시에 흔쾌하고도 희망에 찬 일정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측면에서인지, 별개의 것처럼 따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하는 계기를 준다는 점에서 『액체근대』가 해독해낸 세상을 접해볼 필요가 있겠다.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액체근대』에는 현대인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게 된 근대의 속성,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리는’ 근대의 징후가 어느 정도까지 관철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 비평이 담겨있다. 집단적 유대와 결속으로 관계를 만들고 노동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며 공간확장과 그를 통한 정치사회적 우위를 다투는 고전적 근대, 고체근대 혹은 무거운 근대는 종말을 고했다. 고체근대를 연 주체라 할 근대시민은 이제, 그 도착과 실현이 불확실한 근대적 이상을 이정표삼아 무한질주를 해야 하는, 고군분투하는 개인으로 탈바꿈했다.

구체제로부터 해방된 개인은 그 모든 과거의 속박과 억압이 무너져 내리면, 과거보다는 훨씬 진보되고 향상된 새 삶이 보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참정권이 각자의 손에 쥐어졌고, 자유경쟁의 원리에 따라 삶의 복지와 안녕을 스스로 일굴 수 있는 세상. 그런데 실감은 더 잘 살게 된 것 같지 않고 문전박대당하는 일은 더 뼈저리다. 이윽고 구시대의 견고했던 신분제와 지배이념이 근대의 힘에 의해 녹아버리던 그 과정을 찬찬히 거슬러 살펴본 결과 그 거스를 수 없는 액화의 힘이 그들의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다른 것들마저 함께 휩쓸어갔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이 삶의 실현을 위한 절박한 쇼핑에 나서는 액체근대 세상에서, 그 쇼핑이 절박한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상품화된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경신되고 그만큼 기회가 무궁무진해지는 만큼이나 개인의 자원이 더욱 더 한정된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자원 중에서 으뜸은 시간이겠다. 고전적 근대, 무거운 근대 세상을 지배한 것이 방대한 규모와 육중함을 자랑하는 생산설비, 공간적 지리적 확장을 통한 시장개척이었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벼운 근대, 액체화된 근대 세상에서는 지리적 영토적 고려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본과 인력에 가장 큰 힘이 실리게 된다. 

액체근대 세상의 공간은 과거 그 안에 거주하는 거주민과의 견고한 결속이 녹아버리고, 수많은 일회적이고 비전통적인 공간들을 양산해냈다. 여기서 저자는 인류학적 통찰을 빌어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이 여타집단을 동화시키거나 퇴출시키는 전략이 액체근대의 주요한 공간지배 전략임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교통수송의 발전과 일일지구촌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액체 근대의 시간확보의 노력은 가히 전대미문의 범위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현대적 공간, 지하철 역사, 공항 대합실, 자본의 위용을 과시하는 고층건물들이 자아내는 공동화된 도심의 공간들, 이들은 모두 액체근대가 벌이고 있는 시간확보의 질주가 파생시킨 非공간들 혹은 빈 공간들이다. 이 공간들을 함께 묶어주는 공통점은 그것이 지극히 일회적이며, 그 안에 잠시 또는 특정기간 거주하는 거주민들과의 어떠한 지속적 유대나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간은 오히려 그 안에서 자본과 노동력의 화합을 조율해내야 하는 비용과 부담을 물린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인 고려대상이 된다. 값싼 노동력과 자본에 우호적인 시장을 창출해줄 국가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은 어디든지 이동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 문제는 그를 위한 이동을 할 때 누가 더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무거운 근대 세상의 전통적 관계와 힘을 녹이고 폐기해 이윤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맹 질주에는 종래의 종신계약이나 평생직장, 혹은 노사간의 인간적 유대와 상호의존 등은 지극히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

담장쌓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
바우만이 일컫는 액체근대는 19세기 계몽주의 근대, 무거운 근대, 고체 근대에서 비롯된 근대의 ‘녹이는 힘’이 점차로 삶의 온갖 영역과 요소를 파고들어 모든 영속적이고 지속하는 힘과 관계를 녹여버린 결과, 모든 사회관계가 일회성과 결속탈피를 특징으로 한다. 다른 대상과 결속할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상황에서 이전 대상과의 우직한 연대나 신뢰는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르는 현실이라는 말이겠다.

액체근대 세상은 결국 근대의 심화, 더 나아가 근대의 편향일로라 부름직하다. 그의 질문의 요체는 이러하다. 액체근대 세상에서 ‘견고한 모든 것들을 녹이는’ 힘이 양날의 칼이라면, 그 칼끝이 과연 어디를 겨냥해왔고 어떻게 고쳐 잡아야 하는가라는 반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해방을 향해 일치단결했던 민주주의의 발전적 동력이 그 또한 액화돼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가, 대문자 역사가 장담해왔던 진보에도 기실 수많은 갈래길이 있어서 힘을 쥔 자의 진보와 그렇지 못한 자의 진보가 그 내용을 달리할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조정할 의사일정을 각 집단들이 활발히 내어놓고 있는가, 동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언어로 결속한 민족공동체의 의식이 여타집단을 뱉어내고 차단하는 단절의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면 이를 감시하는 공공영역과 그 속에서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의 학제를 뛰어넘는 포괄적 영역에 걸쳐 수행될 수 있겠다. 

액체근대의 으뜸가는 속성이 시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권이라는 그의 진단을 돌이켜보자면, 근대의 액화라는 지구촌의 대세가 타고 흐를 물길이 향후 어떠한 굴곡을 지어낼 지에 대한 논의와 조정 역시 조급한 결론을 최대한 지양하고 충분한 시간과 검증노력이 곁들여진 시간과의 끈기 있는 승부라 여겨진다. 바우만의 『액체근대』가 각 연구영역에서 독창적이고도 파생적 질문들을 배양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이에 근거한다.(이일수 용인대·영문학)  

09. 10. 26.  

P.S. '액체근대' 혹은 '유동적 근대'란 다르게 말하면 '가벼운 근대'이기도 하다. 바우만의 책에는 '무거운 근대로부터 가벼운 근대로'란 절제목도 포함돼 있는데, 자연스레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된다(소설의 1부 제목이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개인적으론 이번주에 강의를 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실제로 바우만의 책에도 쿤데라가 두 차례 언급된다. 내달에는 이 두 책을 소재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주제로 한 글을 하나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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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7:19 
    (책) 지그문트 바우만, :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 via 로쟈
 
 
돈케빈 2009-10-27 03:08   좋아요 0 | URL
출간 예정인 <유동적 사랑>은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과 함께 읽으면 좋겠는걸요?

펠릭스 2009-10-27 10:18   좋아요 0 | URL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베르트랑 베르줄리)'도 생각나는데요.
 

밀린 원고를 하나 보내고 다른 일을 또 시작하기 전에 잠시 허리를 펴고 보니 오늘이 10.26이다. 서거 30주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날 아침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비상'이 걸려서 못 나오셨고, 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만 나왔다). 이미 '박정희와 그의 유산'(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3161998)이란 페이퍼를 지난주에 걸어두기도 했으므로 그냥 관련서 몇 권의 리스트만 올려놓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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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6 20:44   좋아요 0 | URL
권총을 심장위에 올리고 선 사내는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조교입니다. 예비고사 마지막 해 였습니다. 기억도 희미하지만 갑자기 정규방송이 꺼지고 온통 까만 TV화면에 무슨 장송곡이 지루하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 다음 해 5월엔 도시의 중심에서 연기가 솟고 빈솥에 콩튀긴 소리처럼 총소리가 연발 했습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생물학적인 원리죠. 우리가 태어나기 전 시대의 기억과 앞으로 올 기억의 실존감이 '딸과 아빠'와 '죽고 죽임'이 되어 어두운 지하실에서 찢기고 쓸어지는 기억으로 계속될 것임에 희망은 달뒤로 숨고, 절망은 해을 쫒지만 기억만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로쟈 2009-10-26 22:38   좋아요 0 | URL
내년은 그렇게 5.18 30주년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