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책을 내가 사서 읽는 일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지는 않다(지금은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이 분야의 책도 30여권은 될 듯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경제/경영 관련서를 구입한 기억이 없다(하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으니!). 물론 바타이유식의 '일반경제'라면 사정은 달라지고 나는 그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관심이 제한되어 있는 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 곧 '제한경제'일 따름이다. 그걸 나는 다리 '속좁은 경제'라고 부르고도 싶다.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쉬운 경제학 입문서'라 이름붙일 만한 책의 리뷰가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얼마전 출간된 <일상의 경제학>(더난출판사, 2006)에 대한 리뷰인데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의 것이다.

문화일보(06. 07. 07) 인생이 무엇이냐고? 경제학을 읽어라!

-일부다처제는 남성에게 천국인가, 지옥인가. 혼잡한 고속도로에서 잘 빠지는 옆 차선으로 옮길 때마다 왜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은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신호인가, 그 반대인가. 스커트 길이와 경기의 상관관계야 경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지만, 여타의 질문들은 경제학과 관계가 없어 보인다. 특히 일부다처제 같은 주제는 효율을 제1원리로 하는 경제학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로 여겨질 만하다. 그럼에도 <일상의 경제학>은 경제학이야말로, 이런 문제에 가장 훌륭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거의 모든 일상의 순간들이 경제학적 상황에 놓여 있고, 경제학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FAZ)’의 경제전문 에디터인 저자 하노 벡 박사는 경제학이 각종 도표와 수식으로 가득한 골치 아픈 학문이며, 일부 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서 책을 시작한다. 경제학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만 기계적으로 따지는 학문이 아니라, 보다 근저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심리학이라는 것이다(*이건 경제학의 확장인가, 자포자기인가?). 현대인의 매 순간이 경제학적 활동의 연속으로, 남녀 간의 연애에서 밀고 당기기를 할 때조차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책에 기대 앞의 문제를 풀어보자. 일부 남성들이 꿈처럼 이야기하는 일부다처제.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1대1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능력있고 잘 생긴 일부 남성들이 여러 여성들을 차지할 경우 나타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다. 평범한 남성들은 일부 빼어난 남성들로 인해 확 줄어든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나마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예전에 일본인 저자가 쓴 <결혼경제학>이란 책도 출간됐었다. 그걸 읽었다고 해서 내가 도움을 받은 바는 하나도 없지만).

-여성을 두고 쟁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뼈 빠지게 돈은 벌어주되 요구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가능하고, 설거지며 빨래, 청소, 육아를 도맡아 하겠다는 전략도 가능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여성을 얻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 시장에 남성은 여전히 넘치기 때문이다. 여성의 요구가 보다 다양해지고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예상과는 다른 남성의 지옥이다.

-혼잡한 도로나 할인마트의 줄에서 머피의 작용이 작용하는 것도, 경제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욕구와 관련돼 있다. 도로에서 한쪽 차선이 잘 빠지면, 필연적으로 차선을 옮겨 타는 차량이 생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우르르 차선을 바꾸다 보니 잘 빠지던 차선이 정체되는 반면, 좀 전의 차선은 멀쩡하게 빠진다.

-그래서 옮겨 타면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도로의 차선이나 할인마트의 줄 같은 것이야 조정이 빨리 이뤄지지만, 조정 사이클이 긴 농산물이나 직업 시장은 상황이 다르다. 고추 파동이며 돼지 파동이 일어나고, 한때 대접깨나 받던 직업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미니스커트의 길이와 경제의 상관관계도 심리학으로 설명한다.

“여성들이 짧은 스커트를 입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뭔가를 감행하고 싶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바로 경기가 호황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분과 같다.”



-이야기는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패션이 화려하고 실험적이라면 경제상황 또한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이 경제학으로 설명하는 일상은 이뿐 아니다. 왜 청바지는 직장의 유니폼이 될 수 없는가, 영화에서 여자 친구를 인질로 잡은 갱의 위협에 굴복해 총을 내려놓는 것은 왜 현실적이지 못한가, 농업보조금이 반경제적인 이유는, 내기는 도박인가 게임인가….

-경제학자인 저자가 이런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경제학이 인간의 욕망해소, 선택과 집중, 계산과 저울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책이 주제별로 배치해 솜씨좋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요와 공급, 기회비용, 가격의 탄력성, 게임이론, 죄수의 딜레마 등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난해한 개념이나 복잡한 수식을 늘어놓는 경제학 전문 서적이나, 전체 경제에 대한 조망없이 말초적으로 돈버는 기술만 전수하는 재테크서와 구별된다. 더불어 일상에 녹아든 경제학의 논리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전한다. 맛깔스러운 번역으로 글만 읽어도 이해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책, 편집자들은 여기에 그림과 만화까지 덧붙여 더러 미소까지 머금으며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언젠가 전공서로서 가령 <맨큐의 경제학> 같은 책을 그 '명성' 때문에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984쪽짜리 경제학서를 읽는 게 과연 내게 '경제적인' 일인지 끝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남들 경제학개론 들을 때 나는 문학개론이나 듣지 않았던가?). 259쪽짜리 <일상의 경제학>이라면 사정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괴짜경제학>이나 <경제학 콘서트> 같은 책들도 취지는 유사하다). 하지만, 가장 '경제적인' 일은 이런 잡스러운 관심들을 잡아매고 팔릴 만한(?) 책을 한권 쓰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06. 07. 12.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6-07-12 23:18   좋아요 0 | URL
경제학원론정도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상의 경제학>이라던가 <쾌도난마 한국경제>등과 같은 책을 읽는다는건 영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영문독해를 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맨큐의 경제학>이나 <경제학원론>같은 책을 한번 통독해보는 것은 그다지 품을 많이 팔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보기에는 그런 초급 경제학전공서을 읽는 것이 본격적인 철학책 한권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로쟈 2006-07-13 00:11   좋아요 0 | URL
일반경제 얘기도 꺼냈지만, 제가 '공학적' 경제학(센이 그렇게 부르더군요)에 대해 갖는 불만은 경제에 작용하는 경제 '외적' 변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이진경식 표현을 쓰자면, '경제학의 외부'를 경제학은 다룰 수 있느냐는 것. 더불어, 그것이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게 왜 '외부'냐는 것). 넓게 보아 '계량적/계산적 합리성'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건지(경제학 개론을 듣던 친구는 시험공부한다고 얼심히 계산문제 풀더군요). 더불어, 기본은 고등학교때 다 배웠다는 '자만'도 있는 거죠(부동산과 주식 투자만 빼고)...

yoonta 2006-07-13 00:39   좋아요 0 | URL
님이 말씀하시는 "일반경제" 혹은 이진경의 "경제학의 외부"와 <경제학원론>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죠. 원론에서는 그런 경제 외적 변수는 고려치 않고 즉 다른 변수들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죠. 그건 어떻게 보면 다른 여타 과학과목과 비슷한 연구방식이죠. 그런 극히 제한되고 공학적이고 조작적인 논리전개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수도 있고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순수과학분야에서는) 경제학과 같은 "일반경제" 혹은 "경제학의 외부"와 같은 외생적 변수들이 내생적 변수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분야에서는 그러한 인위적 제한은 그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자체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회의로서 제기될만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경제학이라고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맑스주의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모습이 그런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죠. 어쨋든 맑스의 자본론과 같은 "(주류)경제학의 외부 "와 경제학의 내부를 구분하려면 적어도 그 내부가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 알아볼 필요는 있단 거죠..^^ 공무원시험이나 고시공부할것 아니면 한 두번정도 읽고 이해하는 수준정도만 봐주면 일반경제와 주류경제학전반을 어느정도 조망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겁니다..^^

로쟈 2006-07-13 00:42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의 주제이기도 한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 데 장애가 없다면 그럴 만한 '투자'의 필요성을 제가 갖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얘기지요.^^

yoonta 2006-07-13 00:45   좋아요 0 | URL
근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데 장애가 옵니다..솔직히..경제학원론을 잘 모르면..-_-
가령 왜 최근들어 GNP를 사용하지 않고 GDP를 사용하느냐하는 것등의 이유는 원론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죠..

로쟈 2006-07-13 00:52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컴퓨터에 대해서도, 자동차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그런 '무지' 때문에 불편하거나 타박을 받곤 합니다. 혹은 부동산 시세에 대한 무지. 요컨대, 모든 공부는 유용하지만 인생은 짧고 벌이는 항상 모자라는지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瑚璉 2006-07-13 11:54   좋아요 0 | URL
경제 원론을 읽는 것은 1) 이른바 '경제학적 마인드'를 접할 수 있고, 2) 경제학의 큰 틀을 조감할 수 있다라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경제쪽이 전공은 아니지만 '맨큐의 경제학'은 한 번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그 정도 노력을 할만한 가치는 있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URL
'원론'적인 문제로 되돌아왔네요.^^
 

 

 

 

 

엊그제 <문학동네>(2006년 여름호)에서 <강산무진>의 작가 김훈과의 대담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오랜만에 '김훈'을 검색하다가 찾은 기사를 옮겨온다. 지난달말 한겨레에 실렸던 모양이다. '전직 한겨레 기자 김훈'과의 인터뷰?

한겨레(06. 06. 30) "<한겨레> 지면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이고선 겸연쩍은 듯 씨익 웃습니다. 2년만 있으면 환갑인데 웃는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 장난꾸러기 같습니다.

-김훈. 2002년 한겨레 사회부 기동팀 기자. ‘하니바람’에 김훈을 쓰면 어떨지를 한겨레 사람들에 물어봤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와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휴머니즘에 가득 찬 김훈 같은 보수주의자를 품을 수 없다면 어찌 한겨레일까요. 고개를 끄떡인 사람이 더 많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달 26일 부슬부슬 비 오던 날. 김훈은 훌쩍 떠난 지 4년 만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겨레가 많이 변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되돌아 온 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라”였습니다.

-2002년 2월 그는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종로경찰서 기자실에 들어섰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에서 경찰기자로 ‘백의종군’한 것이지요. 팀장의 지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던 그는, 반백의 머리카락 휘날리며 ‘현장’을 뛰어다니며 기사를 썼습니다(*나도 그 기사를 즐겨 읽었다).

-한겨레에 오자마자 24시간 맞교대하는 철도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보여줬습니다. 3월에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서도 취재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허원근 일병 의문사에 매달려 강원도로 뛰어다녔고, 그해 겨울에는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대선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기동팀에 있을 때 기억나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월드컵 거리응원’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자랐던 시절하고는 정말로 다르더만 ….”

-그는 한겨레 있으면서 100여편이 넘은 기사를 썼는데, 압권은 ‘거리의 칼럼’이었습니다. 그의 칼럼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원고지 3.5매의 짧은 글안에는 현장을 볼 수 있고, 팩트가 녹여져 있었습니다. 막판 반전은 치밀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김훈의 칼럼은 한겨레 기자뿐 아니라 경쟁지 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때 젊은 기자들 사이에선 김훈의 ‘간결체’와 ‘막판 뒤집기’를 따라하려는 어줍잖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들로부터 판판이 깨졌습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서 기교만 부린다는 것이지요.

-한겨레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지요.”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진보니 보수니 따지는 것에 앞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김훈에게, 한겨레의 존재이유를 물어봤습니다. “한겨레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강자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깊이 박여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박지성 발처럼 못생겼습니다. 김훈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을 보면, 그가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다시 지우개로 지우는 고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수십 번의 이런 과정을 거쳐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겠지요.

-그와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어디에서 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원지는 그의 휴대전화였습니다. 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휴대전화는 ‘왕~왕~왕~’ 울었습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어요. 은둔이나 자폐가 아니죠. 혼자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바쁘고, 가장 재미있어 혼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휴대전화는 방해자일뿐이겠지요.

-뒤풀이로 간 밥집에서 그와 그를 찾아 온 한겨레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도마에 오르고, 북한 작가들의 혁명성과 남한 작가의 퇴폐성이 맞부딪혔습니다. 무지몽매한 젊은 놈들과 글 나부랭이들이 밥상에서 마구 마구 씹혔습니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와 7월1일 문을 여는 'e하니바람'(hanibaram.hani.co.kr)에서 뒤풀이편을 기대하십시오.

그 뒤풀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삶의 구체성과 관련하여 보다 흥미로운 <문학동네>의 대담을 잠시 인용한다. <칼의 노래>에서 도망가는 놈들에 대하여. 

"김학종이라는 놈인데 여자를 싣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는데, 나는 그 도망가는 놈이 인간으로서 존엄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면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잖아요? 나는 일본으로도 안 가고 이순신에게도 안 가고 내가 좋아하는 섬으로 가겠다고 배를 가지고 실천할 줄 아는 젊은이가 그 시대에도 있었던 거야. 그런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입증하는 것이죠. 꼭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한 게 아니잖아... "(*'탈주'라는 게 바로 그런 거잖아? 이 정도 모르고 작가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그때 도망간 놈들은 다 예술가에 준하는 놈들이었을 거예요... 인간이 그럴 수 있어야 맞는 것이지. 조국을 위해서 죽은 많은 선배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개개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조국은 좋지 않은 조국이죠. 도망갈 줄 아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이죠. 그러니까 내가 파시스트가 아니잖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탈을 쓴 예술가인 것이지. 그것이 파시스트냐 아니냐 하는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지. 나는 도망가는 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줄 알아야 인간이지. 그러나 그놈은 잡히면 또 죽어 마땅한 거죠. 사형당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지. 이순신은 도망병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젊은 놈은 애인 데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청소년을 위한 칼의 노래>도 있는 모양인데, 이런 걸 청소년들에게 읽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하다는 대목까지만 읽을 일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도망가는 자들의 존엄성을 안다는 건 작가로서 기본이긴 하지만(그렇다고 기본을 갖춘 작가가 흔한 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아직 '삼인칭 소설'을 못 쓰는 작가이지만, 작가 김훈을 내가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에 맞지 않다면, 나는 김훈을 택하겠다...

06. 07. 12.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6-07-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을 좋아합니다. 저 칼의 노래 읽은 적이 있는데 문장이 상당히 묵직해서 눌리는 기분이었죠.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마침 요즘 불멸의 이순신 다시 재방송 해 주던데 참 좋더군요. 본방 때 못 봤거든요. 텍스트 버전이 김훈과 김탁환거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극작가들은 김탁환 것을 더 많이 참고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거 가져갈게요.^^

로쟈 2006-07-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하도 '안티'가 많아서 누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하는가 봅니다. stella09님의 당당함이 보기에 좋습니다.^^

stella.K 2006-07-1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김훈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게 그냥 취향이 안 맞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님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지 원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로쟈 2006-07-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라기보다는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보아서이고, 작가가 대놓고 '우익'을 자처해서였죠. 이전에 그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 문제에 관한 페이퍼도 쓴 적이 있습니다.

stella.K 2006-07-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저는 김훈의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게 따로 노는 진보쟁이나 보수쟁이는 아닌 거죠...

비자림 2006-07-1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잘 읽고 퍼가옵나이다.^^
 

얼마전 출간된 미술책들 가운데 생각만 해두고 있다가 흘려보낸 책은 브리타 벵케의 <조지아 오키프>(마로니에북스, 2006)이다.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화려한 색채 속에 관능을 숨겨놓은 꽃그림으로 유명한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대표작들을 모아 정리해 보여"주는 책. '스포츠칸'의 연재기사 '미술 속의 에로티시즘'이란 제하의 연재기사 중 오키프를 다룬 기사를 몇몇 이미지들과 함께 옮겨놓는다. 산타페 이야기를 곁들여서.

 

  

 

스포츠칸(06. 04. 09) 꽃에서 풍기는 '은밀한 추상'   

 

-금세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여류화가, 에로틱의 상징 조지아 오키프(1887∼1986). 사람들은 그녀를 디에고 리베라의 프리다 카를로와 비교한다. 그녀의 삶과 예술이 워낙 특별하기 때문이다. 위스콘신 인근의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시카고와 뉴욕에서 공부하고 그래피스트와 강의로 활동했다. 평범했던 그녀의 30대는 사진작가이자 화상인 52살의 스티클리츠(*아래 사진)를 만나면서 역전됐다. 친구가 그녀의 작품을 뉴욕의 화랑 291에 소개한 것이다.



-이때 스티클리츠는 “사진은 예술을 모방할 게 아니라 당당히 예술을 파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등을 소개하는 전위적인 화상이었다. 그는 오키프를 보자마자 한눈에 대단한 여자가 등장했다며 그녀의 광기를 알아보았고, 그의 덕택으로 세계적 거장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유명화가가 되었다.(*아래는 스티클리츠가 찍은 조지아 오키프의 누드, 1919)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즐겨 그렸는데 특이하게 여성의 음부를 닮은 산과 바위, 짐승의 두개골과 뼈, 조개껍데기, 도시에 거대하게 솟아오른 빌딩들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이었다. 이것들은 거대한 남근의 상징으로 불렸지만 그녀의 본격적인 작품은 거대한 꽃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꽃이 있으면 꽃을 꺾었고 조개껍데기, 돌멩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광활한 이 세계의 경탄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여기 ‘검은 붓꽃’처럼 그녀는 “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본 것을 그리겠다. 사람들이 놀라서 그것을 쳐다볼 시간을 갖도록 꽃을 아주 크게 그린다”라며 화폭 전체에 꽃을 그렸다. “사람들은 왜 풍경화에서 사물들을 실제보다 작게 그리느냐고 묻지는 않으면서, 나에게는 꽃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가?”라고 그녀는 되물을 정도였다.



-스스로 “꽃 자체를 그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꽃에서는 어렵지 않게 ‘신비하며 아름다움과 함께 이상하고 음침하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와 생식기의 에로틱한 모습이 연상된다. 빨간 칸나와 함께 이 검은 붓꽃도 꽃의 이미지에 충실하며 여성의 한 부분이 강렬하게 떠올려지는 작품이다.



-그녀는 종종 텍사스의 사막으로 갔지만 남편은 한번도 그곳을 가지 않았다. 그들이 나눈 사랑의 편지는 무려 1만1천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그들의 사랑은 끈끈했다. 스티클리츠가 죽고 오키프가 85세일 때 그녀는 50년 연하의 남자 해밀턴을 만나 13년을 함께 살았다.



-오키프는 젊은 애인에게 재산의 3분의 2를 주었고, 그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녀는 2,000여점의 작품과 65억달러의 유산을 남겼고, 그리하여 그녀는 산타페에 미술관을 가진 미국의 유일한 여류화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산타페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허름한 폐광촌이었던 이곳이 예술인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 덕분. 20세기 미국 미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는 오키프는 1917년 기차여행 때 이곳을 만난 뒤 매년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다 62세 때인 1949년부터는 아예 정착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지난주 기자가 찾은 오키프 미술관(www.okeeffemuseum.org)은 평일인데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1997년 한 독지가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불과 7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매년 여러 나라에서 온 17만여 명이 찾는다고 한다."(동아일보, 05. 09. 27)

 

 

내가 아는 산타페는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사진집 <산타페>(1991)의 산타페와 복잡성과학 연구의 산실 '산타페연구소'의 산타페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그 대모(代母)격인 셈. 가장 관능적인 도시에서 복잡성을 연구한다? 제법 그럴 듯하군...

 

06. 07. 1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6-07-1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프의 그림은 혼자 보면서도 왠지 삐쭉 삐쭉 거리게 된다니까요.ㅎ

로쟈 2006-07-1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좋다는 말씀이신가요?..

드팀전 2006-07-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민망하다는 거죠 ㅎㅎ
 

어제는 태풍을 핑계로 하루종일 집에 죽치고 있다가 저녁 무렵 읽은 게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김용석 교수의 연재칼럼이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이고 청소년들을 타겟으로 한 글이지만, '진화생물학의 마키아벨리즘'이란 제목도 눈에 띄고 도킨스의 책도 한번 더 홍보할 겸 여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7. 10)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년)가 출간된 이후 지난 한 세대 동안 이 책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도킨스 자신도 책의 2판(1989년) 서문에서 “논쟁적인 저서로서의 이 책의 명성은 해가 갈수록 커져 지금에 와서는 과격한 극단주의의 작품으로 널리 간주되고 있다”고 인정한다(*이전에 지적한 바이지만, 국내에는 이 1판과 2판이 모두 번역돼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주장이 ‘보편적 이론’일 수 있음을 확신한다. 또한 이런 확신 때문에 동료 과학자들로부터도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도킨스의 입장이 이해보다는 오해와 곡해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정 부분 그 자신의 수사법에도 기인한다. 그의 수사법이 모호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명확해서라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생존 기계다.” “우리는 로봇 운반자다.”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은 자기 복제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며, 바로 이 간단한 문장들이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이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문장에 현혹될 게 아니라 내용 전체를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으며,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이론은 “유전자의 눈으로 본 다윈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다윈의 이론이지만 다윈이 택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즉 “개개의 생물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유전자의 눈으로” 자연 선택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이는 책에서 도킨스가 지적하는 것도 종의 이해관계나 개체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진화론의 오류들이라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유전자의 이해관계이다.



-한편 과학사회학과 과학철학적 맥락에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 저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저주받은’ 책 <군주론>과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킨스도 인정하듯 엉뚱하고 깜짝 놀랄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비유와 해석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선 도킨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윤리적 성격의 단어, 즉 ‘이기적’이니 ‘이타적’이니 하는 말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에 제동을 건다. 이 말들로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의 구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의 논법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도덕적 논의에서 벗어난 입장을 견지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사는가’의 구별을 전제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도킨스는 자신의 목적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마키아벨리는 다름 아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정치학’을 탐구한다. 그는 정치사의 사례들을 들면서 “이로부터 거의 항상 유효한 일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즉 타인을 강하게 하는 자는 자멸을 자초할 뿐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타주의를 가장할 줄 알라고까지 조언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결코 타자를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주는 것처럼 보일 경우라도 그것은 “겉보기의 이타주의일 뿐”, 결국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이 밖에도 둘 사이의 유사점은 많다(그들이 사용하는 수사법도 그렇고, 일부 주장들은 ‘양면적’으로 독해해야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두 저서에 가해진 비판들도 비슷한 양상을 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두 저서가 공유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둘 모두 ‘현실을 직시하라’는 매우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킨스의 경우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관점’에서 본 한정된 현실이지만, 이런 고전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중요한 관점들을 제시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06. 07. 1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루핀 2006-07-14 03:40   좋아요 0 | URL
"자신을 위한 이타주의"... 저는 <이타적 유전자>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양극화 현상이 전세계적인 흐름이라고 할 때 자신을 위한 이타주의, 즉 타인에 대한 기만이 아닌 자신과 남을 향한 공생적 (win-win) 이타주의에 대한 철학이 너무나 절실하지 않나 싶은 요즘입니다. <이타적 유전자>라는 책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신지..

로쟈 2006-07-14 07:37   좋아요 0 | URL
<이타적 유전자>란 책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아시다시피 원제는 <미덕의 기원>이니까요. 그리고 그때의 미덕은 '이기적 유전자'론으로 다 설명되는 부분입니다(상호 협력(공생)이란 것도 궁극적으론 지극한 이기주의(계산)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다만 개체 차원이 아닌 유전자적 차원에서). 다만, '이기적'이란 게 유전자적 이해관계를 표현한 수식인 만큼 인간적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붉은루핀 2006-07-15 03:12   좋아요 0 | URL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타적, 이기적 이라는 단어 속에는 벗어날 길 없는 도덕적 윤리적 포스가 서려있긴 하지요...ㅎㅎ <이타적 유전자> 경우 제목 자체때문에 조금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혹 대안할만한 좋은 단어가 있을런지요?

로쟈 2006-07-15 19:46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원제가 좋습니다. '미덕의 기원', 혹은 '이타성의 진화' 같은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거 같고요...
 

최근에 본 영화는 지난 5월말에 개봉했던 영화 <가족의 탄생>이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이후에 찍은 김태용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인데, 영화는 기대만큼이었으며 왜 그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두어야 하는지를 '확신'시켜주었다(각본 또한 요즘 씌어지는 웬만한 한국문학을 능가하지 않는가?). '뒷북'이지만 아마도 상반기 최고작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사생결단> 정도를 나는 버금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계속 대여중이어서 아직 못 보고 있지만). 미루어두었던 리뷰 자료들을 몇 개 읽었는데, 일단은 개봉 당시 '필름2.0'에 게재됐던 특집 '우리의 선택 <가족의 탄생>'을 옮겨놓는다. 3명의 평론가가 동원됐으며(기사들에는 당연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다소 비판적인 기사도 포함돼 있다.  


김영진(06. 05. 22), '흥겨운 콩가루 집안 탄생기'

-김태용의 두 번째 영화 <가족의 탄생>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연출한 후 너무 오래 쉰 이 감독의 재능을 관객 입장에서 기대한 보람을 느끼게 한다. ‘가족의 탄생’이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상한 사연을 지닌 두 가족의 얘기를 병렬한다. 처음엔 다소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얘기로 비치겠지만 거기서 건강하고 튼튼하고 낙관적인 인간애를 끌어내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너와 내가 가족인 것은 같은 핏줄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가족주의의 전통적 명제를 이 영화는 부정한다. 지지고 볶으며 사는 일상에서 단련된 어떤 관계로부터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끌어낸다. 그걸 느끼하지 않게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감동의 9부 능선을 넘는다.

-<가족의 탄생>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영화 초반에 학생들 상대로 분식집을 하며 살아가는 미라는 군에서 제대한 후 5년간 기별이 없던 남동생의 연락을 받는다. 설레며 음식을 차리고 그를 기다리는 미라는 곧 닥칠 가족상봉에 가슴 벅차지만 감격적인 재회를 기대하던 미라에게 나타난 동생 형철은 어머니뻘의 여자를 아내라고 소개하며 데리고 들어온다. 염치라고는 없는 동생도 그렇지만 그 곁에 붙어 있는 무신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도 한심스럽다. 마냥 대책 없어 보이는 무신에게서 미라가 조금씩 그늘을 보게 되는 것이 그 두 여자의 우정의 시작이다.

-이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비슷한 경로를 따라 전개되는 두 여자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담하고 분방한 듯이 보이는 관광 가이드 선경은 유부남과 연애에 빠져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엄마가 한심스럽다. 엄마가 찾아와도 아예 상대도 하려 들지 않는다. 엄마의 애인이 찾아와 엄마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줘도 그런 선경의 식은 애정은 점화되지 않는다. 아예 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해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하는 선경은 무슨 심산인지 자꾸 엄마의 옷가게를 찾아가 괜히 이런 저런 트집을 부리며 거듭 싸움을 건다. 그 과정에서 선경도 엄마의 그늘을 전보다 더 많이 보게 된다.



-이 두 단락을 묶어주는 것은 영화 초반에 기차에서 만나 인연을 시작하는 젊은 남녀 경석과 채현의 연애담을 묘사하는 세 번째 단락에 이르러서다. 대충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두 단락을 묶어주는 완결성을 마침내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가벼운 탄성까지 나온다. 구성의 절묘함 탓도 있지만 이게 관객의 시점을 절묘하게 대표하는 경석의 심리상태에서 끌어낸 감정의 서술결과였기 때문이다. 봉태규가 연기하는 경석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신경을 써주는 듯이 보이는 채현의 성격이 늘 눈에 거슬린다. 성격 덕분인지 채현에게는 징징대는 선배들이 많다. 그들에게 채현은 돈도 꿔주고 상갓집에서는 헌신적으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심지어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일까지 발 벗고 나선다. 그런 채현을 경석은 이해할 수 없다.

-경석은 어찌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평범한 인물이다. 그건 경석의 누나 선경(두 번째 에피소드에 나왔던 그 선경이다.)이 그만큼 경석을 곱게 키워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혼자 사는 누나와 달리 경석은 채현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선경에게 지금 연애 중이라고 고백한 경석은 엄마와 누나의 삶이 구질구질하다고 타박한다. 경석에겐 결혼도 하지 않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신을 낳은 엄마나 그런 엄마와 평생 대결했으면서도 결국 엄마처럼 혼자 살고 있는 누나가 구질구질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경석을 굳이 탓하지 않으면서 누나 선경은 가볍게 응수한다.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기 때문이라고.

-경석이 정이 많은 채현과 갈등을 빚는 끝에 도달하는 지점도 그 비슷한 구석이 있다. 경석은 채현을 통해 그가 의식적으로 거부해왔던 ‘다른 삶’의 경계에 당도하게 된다. ‘넌 너무 헤퍼’라고 결별선언을 했던 경석은 채현이 고향에 가는 열차에 동승해 다시 화해를 시도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존댓말로 상대의 마음을 떠보던 경석은 자신을 미친년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채현의 타박에 이렇게 응수한다. “미친년도 좋던데. 개성 있잖아요.”

-봉태규의 소년 같은 인상에서 터져 나오는 온갖 연애의 고뇌와 놀라는 감정을 미세하게 포착하는 카메라는 이 대목 이후로 몇 차례의 웃음을 끌어낸 끝에 ‘개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몸에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연에 공감하게 만든다. 특히 영화 후반에 콩가루 집안의 내력을 지닌 사람들이 불쑥 꺼내는 말들을 들으며 하나도 접수되지 않아 당황하면서도 조금씩 그들의 매력에 끌리는 봉태규의 모습은 관객인 우리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가족의 탄생>은 기존 가족의 개념을 파괴하고 해체하거나 아예 무시했던 종래의 영화에 비해 소박한 대로 다른 가족의 개념을 제시하는 진취성 면에서도 크게 존중받아야 한다. 이 영화는 현재의 대지에 뿌리박고 뭔가 깊이 들여다보려는 창작자의 의식을 절묘한 구성의 대중영화 문법으로 풀어냈다. 대체로 들고 찍기로 일관한 이 영화의 스타일은 좌식 생활이 익숙한 예전의 한국식 주거공간에 효율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점에서도 호감을 갖게 한다(*그러니까 영화는 주제나 스타일 양면에서 대범하며 탁월하다).

-이 영화에서의 등장인물의 움직임은 대체로 작다. 좁은 집안이나 가게에서 크게 움직이며 감정을 드러낼 상황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감독은 용감하게 거기 머무르며 카메라를 움직인다. 변기에 담배꽁초를 버려 막힌다고 불평하는 상황 등에서 오가는 감정을 단순하게 화장실 입구에서 지키고 들여다보며 묘사하는 이런 자세는 언뜻 심상해 보이지만 영화적 스타일을 굉장한 수식으로 오해하는 요즘 세태에선 놀랍도록 침착한 접근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감정적으로 과장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영화에선 그런 지지고 볶는 자잘한 일상을 애초에 다른 범주로 설정해놓고 관객에게 미끼를 던져놓지만 실은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부모 자식 간에, 형제 남매간에, 연인들 간에 오갈 수 있는 숱한 갈등의 다른 버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버릴 수도 주울 수도 없는 이 가족이라는 끈을 어찌할 것인가를 두고 <가족의 탄생>은 착한 마음으로 접수되는 등장인물들의 이심전심을 담는다. 그게 너무 보편적이라고 불평할 수는 있겠지만 대중영화에서 이만큼 한 발자국 나가는 용기도 대단한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훌륭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경의 엄마 매자를 연기한 김혜옥이나 경석 역의 봉태규, 채현 역의 정유미가 돋보인다. 중견의 관록을 보여준 김혜옥이나 아직 연기 영역이 어느 정도까지 넘나들 수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던 봉태규나 정유미의 존재감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한국영화의 스토리 범주가 무진장하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특히 매자 역의 김혜옥이 좁은 옷가게에서 딸 역의 공효진과 조용한 목소리로 언쟁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팩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의 감정 처리 같은 것은 범상한 일상의 공기에 묻혀 있는 우리들의 단절의 기운과 그 단절이 누적돼 폭발하는 순간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것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한국영화는 앞으로도 이 분야의 정서를 좀 더 정형화된 텔레비전 드라마에 아예 내주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가족의 탄생>은 착한 영화지만 멍청하거나 위선을 감춘 영화는 아니다. 번거로워서 피해가는 우리의 가족 일상 공간을 제대로 파고 감정을 집어냈다는 점에서 진정한 테크니션의 영화다.

이상용(06. 05. 23) '가족이라는 형식'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제목 앞에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혈연이 아니라 애증의 관계로 얽힌 인물들의 행동과 사연들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한국의 가족영화는 혈연 중심의 관계가 파괴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작년 한 해만 돌아보더라도 <말아톤> <웰컴 투 동막골> <너는 내 운명>처럼 비평과 흥행에서 고루 상찬을 받은 작품들의 근간은 흔들리는 가족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이들 영화에서 가족은 자폐인 때문에, 전쟁 때문에, AIDS 때문에 위협받는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이름을 제목에 버젓이 내건 <가족의 탄생>은 제목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생각되는 가족의 형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가족을 묶어주는 것은 혈연이 아니라 ‘관계’이며, 새로운 관계의 설정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족을 등장시킬 수 있는 동력임을 보여준다. <가족의 탄생>이 가족영화로서 얼마나 차별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당연히 스포일러적인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세 가지 덩어리로 나뉜 영화의 형식은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주변의 관계들을 보여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누이로 등장하는 문소리를 중심으로 한 사연이다. 떡볶이를 팔며 홀로 살고 있는 미라(문소리)에게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한동안 사라졌던 동생 형철(엄태웅)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탕자 형철은 버젓이 아내까지 대동하고 등장한다. 그것도 스무 살 연상의 여자인 무신(고두심)을 아내라고 소개한 후 미라에게 빌붙어 살기로 작정한 듯 집안을 거덜내고, 두 사람의 정사 소리로 누이의 휴식을 방해한다. 설상가상으로 무신의 전남편의 딸까지 등장하면서 미라의 집은 북새통을 이룬다. 미라와 형철은 핏줄을 나눈 남매 사이지만 이들 사이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 무신과 여자 아이의 등장은 남매의 관계를 흔든다. 결국 화가 난 미라는 이들을 모두 쫓아낸다.

-이러한 갈등의 패턴은 영화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관광 가이드 선경(공효진)은 엄마 매자(김혜옥)와 사이가 좋지 않다. 모녀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매자가 가정이 있는 남자와 줄곧 연애질을 해왔기 때문이다. 선경은 일본으로 도피할 것을 꿈꾸며 여러 곳에 면접을 본다. 일본에 갈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선경은 엄마의 애인 집을 방문한다. 버젓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남자를 향해 선경은 우리 엄마를 진짜 사랑하냐고 묻는다. 그런데 답변이 가관이다. 남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선경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등장한다. 매자가 선경을 닮았다고 하는 사내아이는 선경의 이복동생이다.

-두 에피소드의 사연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 가족이 탄생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혈연으로 맺어진 원래 가족이 있고(그들은 애증 관계로 얽힌 가족이다), 여기에 새로운 인물이(혹은 아이가) 가세하면서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기 위한 갈등이 본격화된다. 이처럼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켰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에피소드를 지켜봐야 한다.

-김태용 감독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짐짓 능청을 떤다. 망난이 동생 때문에 고생하던 미라의 고민이 어떻게 되었을지, 엄마의 장례식 이후 선경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마치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기차에서 만난 한 커플의 연애사를 다룬다. 기차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경석(봉태규)은 채현(정유미)의 성격 문제로 인해 빈번히 다툰다. 채현은 남자친구인 경석과의 약속보다는 주위 남자들의 청을 들어주기에 바쁘다. “넌 너무 헤퍼.” 참다못한 경석은 채현에게 이별을 선언하지만 그녀를 따라 기차에 오른다.

-평범하고 황당하게 끝날 것 같은 <가족의 탄생>이 이야기의 신비로움을 증명하는 것은 경석과 채현의 식구들이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 엄마들이야.”라고 소개할 때 경석 앞에 등장한 것은 나이가 든 미라와 무신의 모습이다. 그녀들은 오랜 만에 들른 딸과 남자 친구를 반갑게 맞이한다. 저녁식사를 하며 이들은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경석의 누이를 보게 된다. TV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의 인물 중에 나이가 든 선경이 보인다.



-시간의 비약은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신비로움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처럼 그들은 이미 자신들만의 가족을 이루고, 벌써 다음 세대의 언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모든 갈등을 풀어주지는 못했겠지만 최소한 그들은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일일이 설명되기보다는 경석과 채연의 연애담을 통해 짐작하게 되는 느낌들에 가깝다.

-경석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선경의 이복동생으로 등장한 아이였고, 채현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무신을 찾아온 전남편의 딸아이였다. 세월이 흘러 그들 사이의 갈등이 누그러지고 주름이 깊어졌을 때 두 가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주 우연히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런 점에서 채현과 경석이 기차에서 만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수많은 우연과 가능성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게 되는 비결인 셈이다.

-이는 전통적인 한국의 가족영화들과는 다른 태도다. 가족을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무엇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은 우연의 관계들 속에서 벌어지는 산물이라는 것이 세 가지 에피소드의 형식을 통해 작고 크게 반복되는 셈이다. 앞의 두 에피소드가 혈연으로 묶인 가족에 새로운 인물들(타자)이 등장하면서(새로운 아이가 가세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타자 대 타자의 관계로 연인이 되는 순간을 잡아내고 있다.

-<가족의 탄생>에 의하면 가족은 혈연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타자들이 등장하면서 위협받고 흔들리면서 변화해가는 무엇이다. “당신들 정말 재수 없어.”라고 항변하는 선경의 말은 가족의 구성원이 느끼는 위기감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위기를 통해 가족은 새롭게 재탄생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셈이다.

-두 편의 에피소드가 다루는 가족들 사이의 갈등이나 마지막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연인 사이의 갈등은 가족 혹은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연인들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위기’일 따름이다. 가족은 언제나 위기를 겪고 있으며, 위기를 통해 자라나고 변화하는 것임을 <가족의 탄생>은 영리한 형식을 통해 증명해보인다. 무관한 듯한 세 편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 수많은 타자들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족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가족의 탄생>은 가족을 이루는 진정한 토대는 ‘혈연’이 아니라 ‘타인’이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수많은 타인들이 자신의 이기심과 오만을 버리고 어떻게 가족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영화다. 물론 그들의 삶은 불행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 <가족의 탄생>은 가족의 행복이 반드시 답변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재수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지만(진정한 타인이지만) 어느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것만큼 신비로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영화의 세 가지 에피소드는 이러한 신비를 드러내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다.

 

최은영(06. 05. 24)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김태용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가족의 탄생>은 많은 화두를 담고 있는 영화다. 거기에는 아주 낡은 소재, 즉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가족’과 ‘연애’는 모든 픽션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오래된 소재다. 이렇듯 낡은 소재로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가장 고전적인 소재일수록 그 소재 자체가 지닌 힘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소재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탄생>에는 그러한 딜레마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가족’과 ‘탄생’이라는 낯익은 단어가 ‘가족의 탄생’이라는 기이한 조합으로 합쳐졌을 때 느껴지는 감각은 이 영화의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이며, 영화의 성패의 지점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낡은 기차 칸에 앉은 두 남녀로부터 시작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이다와 찐 계란의 환상적인 조화에 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중이다. “사이다 없는 찐 계란, 아우, 상상만 해도 막 목이 메지 않아요?” 여기서 또 한 번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조합이 등장한다. 사이다와 찐 계란은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영원한 짝패다.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해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식이, 함께 만나면서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남녀,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다.

-오무신과 이형철, 이름부터가 낯선 조합이다. 하물며 그들의 외양의 조합은 더더욱 낯설다. 분식집을 경영하는 노처녀 미라(문소리)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말썽쟁이 동생 형철(엄태웅)과의 5년 만의 재회의 기쁨은, 형철이 20년 연상의 아내 무신(고두심)을 데리고 등장하면서 산산조각난다. 누나의 집 방 한 칸을 떡 하니 차지하고 밤마다 심란한 소음을 내는 것은 물론, 걸쭉한 입담으로 누나의 일상을 흔들어놓는 기이한 커플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미라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엄마와 아들뻘 되는 남녀가 커플 티를 입고 그 옆에 딸뻘인 여성이 어색하게 서 있는 모양새처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제법 살갑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고궁 투어의 외국인 안내원으로 일하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소녀 선경(공효진)은 짐을 싸들고 찾아온 엄마 매자(김혜옥)를 단칼에 내친다. 마치 가출한 딸을 박대하듯 매몰찬 선경과 쭈뼛거리며 딸의 눈치를 살피는 매자의 모양새 또한 이상하기 짝이 없다. 알고보니 매자는 지나치게 로맨틱한 성정으로 남자를 전전하며 딸을 방치해두었던 모양이다. 매자는 유부남인 동거남과의 사이에 어린 아들을 두고 있으며,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가족도 연애도 모두 엉망인 선경은 외국으로 떠날 날을 받아놓고서도 왠지 자꾸만 엄마의 집을 찾는다.

-<가족의 탄생>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 즉 경석과 채현의 에피소드는 두 개의 다른 에피소드들(미라와 무신과 형철, 그리고 선경과 매자)을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유독 경석과 채현의 에피소드는 늘 어딘가로 향하는 길거리에서 진행된다. 반면 미라와 형철, 무신의 에피소드와 선경, 매자의 에피소드는 일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뉘앙스로 전개된다. 미라가 사는 구옥의 마당, 시골 장터,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이 넓은 분식집은 때로 코믹하기까지 한 관계의 아이러니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서먹하기만 했던 미라와 형철 부부는 마당에서 어린애처럼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암묵적인 화해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 사진을 찍으면서 돈독해진다.

-그러나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선경의 좁은 방, 어두컴컴한 매자의 털실 가게는 선경이 생활하는 또 다른 장소인 고궁이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배다른 동생의 유치원 운동회 장면에도 불구하고 에피소드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선경은 우울한 얼굴로 집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을씨년스러운 엄마의 털실 가게를 찾아가 신경질을 부린다. 병원비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매자와 어린 아들, 동거남은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기 일쑤다. 이러한 분위기의 대조는 두 에피소드 간의 관계가 종국에 서로 만나기 전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에피소드는 진행될수록 점점 서로를 닮아간다. 두 에피소드 모두 클라이맥스를 지나 비슷한 방식으로 일단락되는 것이다. 이는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아이, 아이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 그리고 남겨진 삶 위로 흐르는 시간의 묘사다. 마치 마실 나가듯 훌쩍 떠나버리는 형철과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매자의 장례식은 에피소드들의 급격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침묵 속에 밥을 먹는 미라와 무신의 모습을 전경으로 후경에서 보이는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여자아이의 슬로모션은 매자가 죽은 후 그녀가 남긴 가방을 열어보고 목 놓아 우는 선경의 주변으로 가볍게 떠오르는 선경의 어린 시절을 증거 하는 기념품의 슬로모션과 대구를 이룬다. 무신과 무신의 전남편의 딸이 형철을 기다리다 결국 미라의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미라의 간절한 눈빛은 결국 남겨진 이들이 서로 합칠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출국을 포기하는 전화를 하는 선경의 모습은 더욱 직접적으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마지막 에피소드의 결말뿐이다. 지나치게 남의 일을 챙기는 채현과 이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심약한 경석의 러브스토리는 처음에는 독립된 것처럼 존재하지만 앞선 두 에피소드들이 일단락되면서 두 에피소드의 후일담이라는 또 다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판타지에 가까운 후일담은 앞선 두 에피소드들이 맞이하는 파국의 순간을 넘어서면서 일종의 보상의 쾌락을 안겨준다. 그리고 현실이 착한 판타지로 변모하는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천사처럼 하늘에서 웃고 있는 선경의 이미지, 그리고 다시 찾아온 형철과 그의 두 번째 여자, 에필로그 크레딧 시퀀스는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그들의 기이한 인연을 전 지구적인 삶의 형태로 분산시키는 동시에, 낭만적인 휴머니즘으로 포획하는 것이다.

-<가족의 탄생>은 서로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두 에피소드들이 극적인 만남에 이르는 여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들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다른 뉘앙스로 전개되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한데 모으는 것이 이 영화의 구조적 목적인 셈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 있는 이러한 유비적인 관계의 점진적 조합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매끄럽게 진행되지만, 결국 판타지로 현실을 봉합한다는 또 하나의 딜레마로 귀결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여러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러브스토리로 바라보는 관점이 가능하다면, 이 영화의 전범은 이미 존재한다. <러브 액추얼리>는 때로는 판타스틱하고 때로는 현실적인 러브스토리의 집합체로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고전적인 팝송 가락을 흥얼거리며 사랑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가족의 탄생>이 종국에 귀결되는 지점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현실적인 듯 현실적인 에피소드 속에서 관계의 아픔을 드러내는 영화의 섬세한 이미지의 결이 다소 무뎌지는 것은, ‘어딘가 다른 사랑’이 마치 오래된 옛날 얘기의 마법처럼 ‘어디에나 있는 사랑’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얼마간의 판타지를 다 지워내지 못하고 있지만, <가족의 탄생>이 갖는 미덕은 <러브 액추얼리>를 직접 모작한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허접함과 비교될 수 없다).

06. 07. 11.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요일의마음 2006-07-11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본 몇 안 되는 한국영화 중 두 편이 최고작이라니 수확이 좋네요^^

로쟈 2006-07-11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의견이 그렇지만, 제 의견이란 건 다른 이들의 견해를 참고한 것이므로 제 의견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지지하고 싶은 영화나 소설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고무적이며 즐거운 일이죠.^^

푸른괭이 2006-07-1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영화 각본은 웬만하면 다, 소설(심지어 아주 잘 썼다는!)보다 나은 듯. 인재들은 다 영화판으로 갔나 봐요 --.--

니브리티 2006-07-1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이 영화 웬만한 소설들보다 훨씬 낫죠! 그만큼 서사가 탄탄했고, 적당한 분량의 감동도 좋았구요. 다만 소설=서사인 한에서요..^^

로쟈 2006-07-1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사도 영화에 양보하고 나면 소설은 빛좋은 개살구가 되는 것 아닌가요?^^

니브리티 2006-07-12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빛좋은 개살구죠. 근데 원래 소설은 빛좋은 개살구였지 않나요? 설마 서사인 소설이 뭔가를 할 수 있다거나,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로쟈 2006-07-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는 아니지요. 지난번 고진의 '종언'론에 이어지는 것이지만, 소설이 뭔가를 했던 역사적 시기가 있었고,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그러니까 '뭔가를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말씀하시는 게 '현재'라면 공감하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종언'이지만...

기인 2006-07-1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족의 탄생. 이런 영화는 왜, 보러갈까 하면, 문을 닫는 걸까요. 스크린쿼터가 아니라 소규모영화 쿼터제가 (사실 가족의 탄생도 상업영화지만) 다문화주의를 위해서는 필요할 것 같아요. 쩝.

로쟈 2006-07-1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개봉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게, 오래, 상영하는 방식이 가능할 텐데요... 저도 비디오로 봤으니 크게 할말은 없지만...

니브리티 2006-07-1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분명히 로쟈님과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로쟈님의 밑밥(미끼)이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하여튼 저 같은 잔챙이는 안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