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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토요일이면 4-5개 각일간지의 북리뷰란을 꼼꼼히 읽는다. 2/3 정도는 같은 책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나머지 1/3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고, 어쩌다 고대하던 책들과 그 리뷰를 만나게 되면 반갑기 그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일간지 북리뷰에서 다루는 책들이란 관심범위가 한정돼 있어서 그냥 지나치게 되는 책들도 적지 않다. 그런 책들은 서점에서 직접 만나봐야 한다! 지난번에 언급한 <향락의 전이> 개역판 같은 것도 일간지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그 출간소식이나 리뷰를 찾을 수 없었다. 뭐든지 발품이 필요한 법이다...

 

 

 



그간에 나온 책들이 많지는 않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책은 역시나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이다. 전체 4권 중에서 그 제2권이 4년만에 출간된 것이다('나오다 만 책들'이란 글에서 다룬 바 있다). 나는 대략 출판사에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동문선 번역의 1/5 정도는 맡아서 하는 걸로 보이는 김웅권의 번역으로 이번에 나온 것. 다루고 있는 시기는 1960년대니까 바야흐로 구조주의의 전성기이다. 이 책이 갖는 강점은 현장감이다. 역사학쪽보다는 저널리즘쪽으로 분류되는 게 타당하다 싶을 정도로, 현장감 넘치는 인터뷰들이 페이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때문에 구조주의가 '숨쉬던 공기'를 느껴보든 데 가장 적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권이 4년만 나왔으니까, 다음 3권은 아마 독일 월드컵때나 구경하게 되는 걸까?(*2003년에 3,4권이 모두 나와 완간되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한국학술협의회의 석학초청 강연으로 이번에 내한했던 다니엘 데넷의 책이 나왔다. 그가 쓴 책이 아니고, 그에 관해 씌여진 논문 모음집 <다니엘 데넷>(몸과마음)이다.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고 있는 이 강연에 작년에는 리처드 로티가 왔었고, 나는 직접 강연회를 찾은 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물론 데넷보다는 로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조선일보가 꼴보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넷의 '환원주의'는 심리철학에서 내가 가장 지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콰인의 제자였던 데넷은 옥스포드에서 길버르 라일(<마음의 개념>의 저자)의 지도로 학위를 받고 이후에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개척한다. 그의 대중적인 대표작은 <설명된 의식>과 <다윈의 위험한 생각> 등인데(후자는 나의 애장서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식현상을 신경생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략 내가 이해하는 그의 입장이다. 심리철학에서는 그런 입장을 강한 환원주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심리철학쪽을 읽은 지가 좀 오래됐다).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가 수반이론을 제시했던 김재권이다. 그의 <수반과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1994)은 쉽게 읽히진 않지만, 상당히 계발적이다. 특히 '비환원적 유물론의 신화' 같은 논문은 아주 파워풀하다.

어쨌든 데넷의 흥미로운 작업은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의 책으론 <마음의 진화>(두산동아, 1996)과 호프스태터와 함께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민음사, 2001, 원제는 '마음의 자아')가 나와 있다(*<마음의 진화>는 올해 재출간됐다.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책세상) 새번역본이 나왔다. 책세상의 고전의 세계 시리즈로 나온 것인데, 이미 최재희, 이규호 등의 번역본이 있는 책이지만, 한글세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장정과 번역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사들었다. 원저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1781)을 쓴 4년 뒤에 나온 것으로 그보다 3년 뒤에 나오는 <실천이성비판>(1788)을 미리 집약해서 보여준다.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유명한 주석가인 허버트 페이튼은 이 책을 분량은 짧지만, 서양윤리학사에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비견될 만한 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뒤쪽에 실린 역자의 해설도 친절하다(152-3쪽에서 선험적 판단을 후험적 판단이라고 잘못 적어놓기는 했지만). 요컨대,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 좀 방대한 <실천이성비판>(백종현 역, 민음사,2002)은 미뤄두더라도. 사실 고진의 <윤리21>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두어야 하는 책이지만, 나중에 읽는다고 해서 고진이 눈쌀을 찌푸리지는 않을 것이다(*알다시피 작년에 <윤리형이상학의 정초>가 백종현 교수의 번역으로 완역돼 나왔다).

 



 

 

김춘수의 마지막 시집 <쉰 한편의 비가>(현대문학사)가 나왔다. 아직 생존 시인이지만(*시인은 재작년에 작고했다), 시인 자신이 아마도 마지막 시집이 될 거란 얘기를 했고, 남은 여생엔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이라 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전집 이후에 묶인 그의 시집은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에 이어 세번째인 듯싶다.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그에게서 릴케의 영향은 압도적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깃발)란 시 구절(제목인지?)도 초기시에 있었고, 그 전에 시인으로서의 입문 자체도 일본의 한 책방에서 발견한 릴케 시집 때문이었다고 하는 시인으로선 마지막 시집을 릴케풍(시인은 패러디라고 말한다)으로 끝내는 것이 자연스러워도 보인다.

한국시사에서 김춘수는 넌센스의 시인이면서 가장 논리적인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때 논리란 것은 그가 시작 못지 않게 시론에 열심이었던 사정과도 연관된다(사실 넌센스란 것은 정확한 논리의 배경하에서만 의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시의 강점은 허튼 감정의 낭비가 없다는 점.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 전부는 김수영의 의미과잉의 시와 김춘수의 의미부재의 시 사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적어도 논리적으론!). 그래서 현대시를 읽겠다면, 먼저 김수영을 읽으라, 그리고 김춘수를 읽으라...

 



 

 

두어 주쯤 됐지만, 고종석의 책들이 나왔다. 한 2년만인데, <자유의 무늬>와 <서얼단상>(개마고원)이 함께 나왔다. <자유의 무늬>가 좀 짧은 글 모음이고, <서얼단상>이 좀 긴 글 모음이다. 그는 워낙에 잘 쓰는 저널리스트이므로 나는 좀 긴 글이 더 좋다. 이제껏 그는 10여권의 단행본을 냈는데, 영어단어공부책 빼고는 나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고 절반 이상을 읽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고종석의 유럽통신>(문학동네)과 <감염된 언어>(개마고원)이다. 아니 사실은 모든 책이 다 좋아할 만하다.

그는 내가 무조건 사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한국어 사랑이 믿음직스럽다. 그의 글은 김훈이나 김규항 같은 칼잡이의 글이 아니어서 부드럽고 유연하다(*나는 세 사람의 문체에 대해서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치밀하면서 오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문필가의 교양이나 상식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표준적인 인물이 고종석이다. 또한 그는 한국 저널리스트(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한 자존심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컨대, 고종석을 읽으라...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기치로 내세우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왔다>에서 <도쿄대생들은 바보가 되었는가>(청어람미디어)까지. 나는 그의 책들을 사지도 않았고 읽지도 않았지만(그의 고양이 빌딩은 부러워한다), 그의 입장들에 절반쯤 공감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돈주고 사서 읽지는 않을 거 같다(*이 말은 절반만 지켜졌다. <뇌를 단련하다>를 샀지만 읽어보지는 않았기에). 사실 그와 무관한 인연은 아닌데, 그의 책을 내는 출판사의 편집장이 절친한 대학 선배였다. 하루는 그 선배로부터 일어로 음역된 지식인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전화가 왔었는데, 내가 확인해준 몇 사람의 이름에는 마샬 맥루한도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왔다>란 책 얘기였다.

그럼, 내가 공감하지 않는 나머지 절반. 그가 자기 전공분야 외에도 과학 분야나 시사 쪽에 상당한 식견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는 데는 공감하지만, 그래서 그가 픽션쪽보다는 넌픽션을 더 강조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도쿄대 철학과 출신이고 서구 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이지만, 문학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실제의 현실은 가능한 현실들의 일부일 따름이다. 첨단과학에 대한 지식이 지식에 깊이를 주는 건 아니다. 다방면의 걸친 그의 박식이 그다지 부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분야가 서로 다른 것을 어쩌겠는가...

200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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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엇지 2007-09-11 14:54   좋아요 0 | URL
분야별 책의 판매량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봐 왔기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과학 분야의 책들은 거의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치바나씨의 안타까움은 이렇게 균형잡히지 않은 독서와 지식의 축적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세상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것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사회는 첨단과학의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고 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지요. 물론 자동차를 움직이는데 있어서 정비와 운전의 분야는 다르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균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 분야가 연결이 되어 시너지를 발휘했으면 하는 것이 아마도 두 분야를 섭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치바나씨의 안타까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첨단과학에 대한 공부가 지식에 깊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와 철학이 空에 대해 고민해 온 것 만큼, 자연과학에서도 도대체 空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해 왔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노벨상 수상분야이기도 한 양자전자기동역학 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사회 전체의 지식 균형을 위해서 극단적으로까지 자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장하는 타치바나씨의 의견이 심히 동감됩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란 연재는 2002년 가을부터 한 카페의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었다(정확하지는 않다). 이번에 인터넷에 떠있는 자료들을 정리하려고 하니까 아무래도 알라딘에 한데 모아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30회부터인가는 동시에 올려놓았었기 때문에, 따로 옮겨오는 것들은 대략 29회분이 아닌가 싶다.

아주 먼 과거는 아닌지만, 3-4년전에 나온 책들을 원래대로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옮겨올 수는 없기에 '에피소드'라는 말을 덧붙이기로 한다(스타워즈 시리즈의 '에피소드'에서 힌트를 얻었다). 말하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의 잃어버린 고리들이다. 말미의 날짜는 글을 최초로 띄운 날짜이다. 옮겨오면서 새롭게 구겨넣은 말들은 (*)를 달았다. 어쨌거나 앞으로 짬짬이 옮겨올 이 글들에서 2-3년 정도의 시간차여행을 해보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닐 듯싶다.그것이 나만의 판단이 아니기를 바랄 뿐...

최근에 무게있는 (교양)학술서들이 몇 권 출간됐다. 관심분야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모든 분야의 책들을 망라할 수는 없지만, 인문사회쪽의 몇몇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이 책들을 읽을 계획이지 아직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지젝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개역판이 나왔다. 나부터도 여러 차례 그 번역 수준에 대해서 비판해왔는데, 이번에 얼마나 교정/개역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궁금하지만 물론 그 책을 다시 사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하드카바로 장정이 바뀌면서 책값은 70%가 뛰었다(2만5천원). 양식있는 출판사라면 초판에 대해서 리콜을 실시해야 마땅하지만(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경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리콜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런 건 전혀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개역을 해서 과연 읽을 만한 책이 됐는가가 궁금할 따름이다(*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역시나 기대를 배반한 책이었다).

역자의 '반성문'적인 개역판의 서문을 읽어봤는데, 그 진의야 누가 의심하겠는가? 다만, 지젝의 판권을 갖고 있는 출판사나 역자가 좀더 세심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책을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개역판 <향락의 전이>를 읽으시는 분은 조만간 서평을 올려주시기 바란다. 인간사랑에서 나온 <환상의 돌림병> 또한 <향락의 전이>보다는 낫지만, 그 번역이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닌데(그런 심증을 갖고 있다) 이번에 원서를 구하게 됐다. 부분적으로라도 조만간 번역의 장단점에 대한 글을 올릴 예정이다(*<향락의 전이>에 대한 리뷰는 예정대로 올렸었다).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가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이미 <정치와 진리>(책세상)이라는 아렌트 해설서를 쓴 이이다. 그 책의 서평 말미에서 나는 아렌트의 다른 저작들보다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의 역간을 기대한다고 썼는데, 생각보다 빨리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무척 반갑다(원서는 도서관에 주문중이다). 내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아렌트는 특이하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전거로 삼아서 그의 정치철학을 재구성해내는데, 이것은 리오타르의 <판단력 비판> 다시 읽기인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와 함께 <판단력 비판>에 대한 20세기 연구/해석 중 가장 중요한 문헌에 속한다. 더불어 3대 비판서 중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온 <판단력 비판>이 재평가되는 데 기여한 책이다. 내 생각에 아렌트의 책은 레오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와 함께 정치철학 분야에서 올해 번역돼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이 번역돼 나왔다. 500쪽 가까운 분량을 최재천 교수를 비롯한 생물학 전공자들이 우리말로 옮겼다. 원저는 1997년에 나온 마이어의 21번째 책이라고 한다. 20세기의 다윈이라 불리는 마이어의 책으론 <진화론 논쟁>(사이언스북스)이 나온 적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는데(후배 다윈주의자들인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제이 굴드와 비교해서), 이번 저작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평소 생물학 교양서를 갖고 싶었는데(킴볼 생물학 같은 책 말고), 마이어의 책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줄 듯하다(주문해놓은 책이라 아직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발굴>이란 책도 저자가 에른스트 마이어로 돼 있는데, 그가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언지 아니면 동명이인의 고고학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김상환 교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됐다. 김교수는 그간에 소위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의 현대철학(푸코의 규정)에 대해서 가장 정통한 이해를 선보여 왔는데, 이번에 그 성과들이 단행본으로 묶였다. 아직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에 대부분의 글들이 이미 발표된 것들이지 싶다. 하지만 아직 묶이지 않은 글들도 많이 있는 걸로 봐서 그의 무게 있는 저작 목록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도 곧 역간될 거라는 소문이 있다(*알다시피 재작년에 역간되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데리다와 라캉에 대한 깊이있는 번역/연구서가 기다려진다. 김교수의 신작과 비슷한 주제(니체 이후의 해석학)를 다룬 책으로 애런 슈리프트의 <니체와 해석의 문제>(푸른숲)가 권할 만하다.

 

 

 



김동식 교수의 <프래그머티즘>(아카넷)이 출간됐다. 김교수는 리처드 로티 전공자로서 이미 <로티의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를 출간한 바 있는 중견학자이다. 흔히 실용주의로 번역돼온 프래그머티즘이 한국에 수입된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대개의 다른 학술분야와 마찬가지로 내놓을 만한 성과가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저작은 조금은 뒤늦게 전공학자들의 '책임'을 반영하고 있다. 분석철학과 함께 현대 미국철학을 대표하는 사조인 프로그머티즘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이번의 저작과 함께 가능해질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덧붙여 말하자면, 국내 연구자에 의한 분석철학 입문서는 아직 없다. 박이문 교수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는 개론서가 있을 뿐이다. 몇 사람이 돌려보는 전문적인 논문보다도 교양 수준의 개론서/입문서들이 많아져야 그 나라의 '학술'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게 개인적인 믿음이다. 연구자들의 책임(밥값!) 의식을 다시금 촉구하게 된다(학문하는 사람이 학문이 뭐 별거냐고 말하는 건 도통한 게 아니라 천박한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별거아닌 학문을 별거인 걸로 만들기 위해 죽어라고 노력해야 된다. 그게 책임이고 윤리이다!).

2002.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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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타 2006-05-03 02:24   좋아요 0 | URL
멋지심돠~

로쟈 2006-05-03 07:18   좋아요 0 | URL
옛날에 쓴 글들을 올린다는 게 좀 멋쩍은 일이긴 합니다...
 

'러시아 문화의 이해'라는 강의시간에 러시아 감독 파벨 룽긴의 <택시 블루스>(1990, 110분)를 보았다. 오늘이 '메이데이'이기도 해서 '영화'를 보는 걸로 기분을 좀 내고자 했지만(러시아는 5월 1일부터 승전기념일인 9일까지 대부분의 직장이 짧은 휴가를 갖는다), 영화의 주조음은 '블루스'여서, 그러니까 어둡고 음울한 영화여서 수강생들이 기대만큼의 '기분'을 내지는 못했을 듯하다. 하지만, 에인젠슈테인의 <10월>(1927)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만일을 대비해서 화질도 좀 떨어지는 <택시 블루스> 외에 <10월>을 나는 여분으로 들고 갔었던 것.   

'파벨 룽긴'이라고 통상 표기되지만(영화잡지나 감독사전들에서도 그렇게 표기되고 있다), 러시아어를 음역한 영어식 표기는 'Pavel Lugin'이며, '파벨 룬긴'이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한데, 감독은 늦깎이 데뷔작이었던 프랑스와 구소련의 합작 영화 <택시 블루스>로 칸느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고는 아예 프랑스로 건너가버린다(그러니까 러시아의 '프랑스통' 감독이다). 그래서 얻게 된 그의 프랑스식 이름은 'Pavel Lounguine'이다. 아마도 이 이름이 다시 우리말로 옮겨지면서 '룬긴'이 '룽긴'으로 탈바꿈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1949년생인 룽긴은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번역가인 어머니와 극작가인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던 언어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극작가였다. 번역가인 어머니와 극작가인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본격적인 영화감독 공부를 하던 중 자작 시나리오 <택시 블루스>로 데뷔, 이제 칸느의 영광과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 되었다."  

"소련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처럼 촛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일갈하며 등장한 룽긴은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기 '소련'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투박하고 거칠며 암울한 현실이 그의 영화 속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영화는 달리는 영업용 택시를 통해 보여지는 모스크바의 어느 변두리 모습으로 시작된다. 택시 안에는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온갖 술주정을 부리는 등 운전수를 귀찮게 한다. 결국 그들은 택시 요금조차 내지 않고 도망가 버리고 그들을 놓쳐버린 택시 운전사 쉴리코프는 그 주동자인 로샤를 찾아내지만 그가 빈털털이인 것을 알고 그의 색소폰을 빼앗는다. 그는 색스폰을 가지고 암시장을 헤맨 끝에 악기가 무척 비싼 것임을 알고 악기를 로샤에게 돌려주는 대신 술주정뱅이인 로샤를 그의 밑에 두고 일을 시키기로 한다.

-결국 로사는 쉴리코프와 기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삶의 가치관이 대조적인 소련인 쉴리코프와 유태인인 로샤는 색다른 우정을 쌓아간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색스폰 연주에 몰두하게 된 로사는 차츰 그 연주의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어느날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든다. 그곳에 순회공연을 온 미국연주단의 눈에 그의 음악성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로샤는 그 미국 연수단의 일원으로 특채되고 함께 연주를 하게 되며 얼마가지 않아 대중에게도 인기있는 뮤지션이 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하지만, 로샤가 유명해지면서 쉴리코프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로사는 결국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뒤늦게 로사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된 쉴리코프에게는 조롱만을 남겨놓은 채.  

 

 

한겨레 신문  2006. 04. 20 유윤성 프로그래머가 추천하는 7편

뿌리 (파벨 룽긴, 러시아)

시종일관 흥겹고 떠들썩한 이 영화는 <택시 블루스>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는 러시아 감독 파벨 룽긴의 최신작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딕은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고향의 친척들을 찾아주는 알선업자다. 그런데 그들이 찾고 있는 고향과 그곳의 사람들은 과거의 끔찍한 사건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이에 에딕은 근처 마을 사람들을 매수하여 가짜 친척 노릇을 하게끔 사기극을 꾸민다. 잠시 동안의 재회로 끝날 것 같았던 가짜 친척들과 의뢰인들 사이에 진짜 애정이 싹트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사회의 가치관 상실 및 도덕적 타락의 상황을 집요하게 파헤쳐왔던 룽긴 감독은 <뿌리>에서 좀더 유연하고 넉넉하며 성숙한 시선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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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교수가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1908-2006). 아마도 내일 아침 신문마다 이 저명한 경제학자의 타계 소식을 전할 듯한데, 강의 계획안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고인의 부고기사와 사소한 추억 거리를 떠올려본다. 기사는 한겨레와 세계일보의 것이다.

한겨레(06. 04. 30) 부의 분배와 같은 논란적인 주제를 연구해 온 세계적인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29일 밤(현지시각)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마운트 오번 병원에서 숨졌다고 <아에프페 통신> 등 외신들이 전했다. 향년 97세.

-1908년 10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갤브레이스는 1934년 이후 하버드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경제학뿐 아니라 경영학·역사학·사회학도 폭넓게 연구했다. <뉴욕타임스>는 “갤브레이스는 복잡하고 재미없는 주제를 학식있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능력을 보임으로써 존경과 질투를 한몸에 받았으며, 때론 장광설로 경멸을 받기도 했다”고 고인을 평가했다. 33권의 저서를 남긴 갤브레이스는 58년 펴낸 <풍요로운 사회>에서 “미국의 경제는 개인의 부를 낳았지만 학교나 고속도로와 같은 공공수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성장 위주의 미국 경제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 동안 미국 정치 무대에서 거물로 통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일하거나 연설문 작성에 관여하는 등 미국 민주당의 방향과 민주당 지도자들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61∼63년에는 인도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베트남전 탓에 린든 존슨 대통령과 결국 결별하기는 했지만,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다. 정부에서 일한 경험 등을 토대로 <트라이엄프>(1968년) 등 소설 세 편을 쓰기도 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그를 “경제학자보다 경제학 외부에 더 영향을 끼친 경제학자”라고 표현한 대로, 그의 업적이 과대포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기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그의 제도경제학이 사회적인 비판에 자주 이용됐지만 실제 그의 이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경제학자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별로 없다”며 “다만 그가 사회적 발언을 많이 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로서 높이 살 만하다”고 평가했다.

-홍 교수는 “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집단간 갈등이 직접적 의사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예컨대 자원배분을 왜곡하는 독점도 시민단체·전문가 집단의 비판, 곧 ‘정치적 대항력’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갤브레이스는 사회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런 정치적 대항력을 들어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세계일보(06. 04. 30)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지난 29일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UPI통신 등 미 언론에 따르면 갤브레이스 교수 가족은 이날 그가 최근 2주 동안 입원해 있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소재의 한 병원에서 고령으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출신 갤브레이스 교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까지 오랜 기간 민주당 정권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동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는 인도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또 1946년과 2000년 각각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메달을 수상했고, 미국 경제학회장을 역임했다.

 

-갤브레이스 교수는 온타리오 농대와 토론토대를 다녔으며,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1934년 하버드대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풍요로운 사회>, <불확실성의 시대>, <대공황> 등의 저서를 통해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1958년 발간된 <풍요로운 사회>는 미국의 모던라이브러리 출판사가 구성한 도서 평가위원회에서 ‘금세기 영어로 된 논픽션 분야 100대 서적’ 가운데 4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차대전 이후 각종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 개입을 지지했다. 저서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그는 “미국 경제가 개인적 부를 창출하고 있지만 학교와 고속도로 등 공공 수요에는 적절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개입을 촉구했다.

-1975년 하버드대 교수에서 은퇴한 그는 자신의 저서와 같은 제목의 영국 TV 시리즈 ‘불확실성의 시대’를 진행해 더욱 명성을 얻었다. 신랄하고 통렬한 풍자로 미국 사회를 비판해온 신장 2m의 거구 갤브레이스 교수는 집필을 위해 버몬트주 산악지역에 있는 별장에서 수개월 동안 칩거하는 등 억척스러운 ‘일벌레’로 알려져 있다.

-1998년에는 소련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슈코프와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공존:고통스런 과거에서 더 나은 가능성으로>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존>(영남대출판부, 1990) 등으로 번역돼 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가장 유명했던 현역 경제학자가 갤브레이스였고, 가장 유명한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그래서 아마 소장하게 된 것이 범우사판 <불확실성의 시대>였을 것이다. 세로읽기여서 다 읽어볼 엄두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산 최초의 경제학 관련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7년의 BBC TV강좌를 토대로 한 만큼 대중적이었던 이 경제사 책은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한다(학원사판 <코스모스>를 나는 고등학교 때 사서 읽었다. 내가 산 최초의 천문학 책). 두 사람 다 소위 '최고의 경제학자나'나 '최고의 천문학자'로 남지는 않겠지만, 가장 친근하고 대중적이었던 경제학자와 천문학자로 기억될 듯하다.  

 

 

 

 

<불확실성의 시대> 이후로도 나는 갤브레이스의 책들을 여러 권 더 샀다. 비교적 두껍지 않은 책들이었지만, <만족의 문화>(동아일보사, 1993) 정도를 빼면 완독한 책은 거의 없다(폴 크루그먼의 책들도 그런 식이다). 그래도 나는 갤브레이스가 '기본'이라고 생각해왔다(이른바 '각인' 행동이란 것. 정신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저자나 책들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더불어 '비판적 거리'를 갖지 못한다).

이번에 부음을 듣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다소 놀라고 실망했는데, 그토록 많이 번역되었건만 제대로 남아있는 책이 한두 권밖에 없었다! 미국 현지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국내에서는 '잊혀질 경제학자'에 속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우리는 '불확실성'이 제거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긴 우리 사회는 '위험사회'요, 우리 시대는 '확실한' 테러리즘의 시대,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비록 그의 업적이 '과대 포장'된 점이 없지 않다고 하나 젊은 날의 '영웅들'을 하나둘 잃어간다는 건 쓸쓸한 일이다. 우리는 아마도, 앞으로 궁극적으로는 '풍요로운 사회'의 '만족의 문화'를 지향하게 될 터인데(그게 대한민국의 꿈인가?), 갤브레이스의 충고쯤은 기억해둠 직하지 않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0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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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dhikr 2006-04-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확성실의 시대를 재밌게 읽었는데, 참 안타깝네요.
거인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는 데 은근한 기쁨도 있긴 하지만요.^^

로쟈 2006-04-3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한 기쁨'의 이면은 이제 '우리'도 나이를 좀 먹었다는 '슬픔'이죠...

maritime 2006-09-0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다큐를 보니 빈국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정책를 꼬집는 고령의 갤브레이스가 나오더군요. 지식인이 걸어가야할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9-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정도 '양심'도 드문 시대인 거 같습니다...
 

 

 

 

 

시, 소설, 비평, 게다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 '토탈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장욱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사실 나온 지는 좀 됐다. 한데,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한지라(저자 사인본을 보내줄 거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 몇 마디 거드는 걸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언론에서도 비교적 비중있는 리뷰들을 싣고 있어서 일단은 한 곳에 모아놓는다(참고로, 인용하는 일간지들의 게재일자는 인터넷상에서 옮겨왔을 경우 실제 게재일과는 하루 정도 차이가 난다). 개인적으로 부탁을 받은 바 없지만 그래도 좀 띄워주는 게 의리가 아닌가란 생각에서. 그리고, 혹 잠재적인 독자가 <정오의 희망곡>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서. 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중앙일보(06. 04. 21) 2월 14일 정오 서울 프레스센터. 창비 40주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거기, 백낙청 선생 옆 자리, 공부 잘하게 생긴 청년 하나 앉아있었다. 농 섞어 질문을 던졌다. "거기 앉아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대답은, 제법 다부졌다. "제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오늘 창비의 모습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장욱. 1968년생이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87학번이다. 94년 시인이 됐고, 여태 평론집 두 권과 시집 한 권, 장편소설 한 권을 발표했다. 처음 썼다는 소설은 지난해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많지도 않은 나이에 시도 짓고 평론도 하고 소설도 쓴다는 얘기다.

 

 

 

 

-그가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을 발표했다. 시는 각오했던 대로 난해하다. 온전히 해석한다는 게 사실 무리다. 그는 평론가 권혁웅이 명명했던 이른바 '미래파'의 핵심 당원. 다시 말해 그의 시는 소통 기능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인칭과 시제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는 갖가지 실험 자체가 그의 시 세계란 뜻이다.(*사실 김소월의 어떤 시들도 상당히 난해하므로 '난해성' 자체가 시의 결함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난해함인가 하는 것.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 

-굳이 참견한다면, 그에게선 지식인 냄새가 난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난무하는 욕설과 흥건한 성적 암시 따위가 그에겐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상의 '오감도'가 연상되는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에서 현대를 사는 도시인의 우울과,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나는 사라지지 않지./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비닐봉지처럼 유연해.'('근하신년' 부분) 같은 대목에서 기존 질서를 거역하는 부정(否定)의 시학이 읽힌다고. 그러면 시인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 맘대로 해. 나는 너를 피해 먼 곳을 돌아갈 테다. 우리 만나지 말자.'('비열한 거리' 부분)

-이장욱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자투리를 제공한다. 그는 진짜로 공부를 잘한다. 아니 열심히 한다. 그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입시생과 나란히 앉아 시를 짓고 소설을 쓴다(이런 시인, 처음 봤다). 그리고 그는 비밀결사 '빨간 바지'의 조직원이다. 권혁웅.김행숙.장석원.여태천.하재연 등 고려대 출신 또래 시인들의 시 합평회 모임이다.

-권혁웅에 따르면 시 두어 편을 두고 몇 시간씩 토론하는 지루하고 밋밋한 모임이다. 여태 외부에 알려진 적 없어 비밀결사란다. 이장욱은 98년부터 암약했다.(*이들이 '빨간 바지' 마피아들이다. 우리 시단의 전복을 꿈꾸고 있는?) 두 달 전 그는 창비의 신임 편집위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필경 뉴스였고 일종의 난센스였다. 그럴 수밖에. 그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최전방 어딘가에 서있기 때문이다.(손민호 기자)

 

한국일보(06. 04. 22) 이장욱씨의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속의 시적 주체들은 엉뚱하다. 너무 엉뚱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는 시인의 시적 자아의 엉뚱함이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그의 시들은 ‘나, 당신, 우리, 그, 그들’ 등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수많은 인물들로 북적거린다. 종잡을 수 없다 함은, 등장인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한 편의 시 속에서도 하나의 캐릭터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표제작)

-‘당신’과 ‘나’의 감쪽 같은 탈바꿈, 혹은 시적 화자의 자리바꿈이 해명되는 유일한 단서라면 ‘우리는 우호적’이라는 아주 느슨한 연대감일 것이다. 그들은 그 느슨한 연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냉소적인 자’들을 어렴풋이 냉소한다. 그 배경 음악은 슬프게도 ‘정오의 희망곡’이다.

-그의 시에서는 시적 주체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역시 엉뚱하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결정’)오고, “10년 후의 1루 베이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10년 후의 야구장’)간다. “여름의 잎새들 사이로 12월의 눈이 내”(‘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리고, "수도관의 저편에서 빙하의 이동이 시작”(‘지진’)된다. 시간과 공간, 주체가 뫼비우스의 띠로 꼬아놓은 새끼줄처럼 그렇게 종잡을 수가 없다. 그 엉뚱한 시공간 속에서 엉뚱한 주체들은 ‘좀비 산책’을 하고, 길을 가다가 펭귄을 만나기도 한다.(‘엉뚱해’)

-세상이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근대의 이성, 그 강박적 질서의식이 세상의 종잡을 수 없음을 정돈해 우리 인식 속에 체계화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 인식은 질서 강박의 거푸집으로 주조된 가짜일 것이다.

-이들 시적 주체들의 종잡을 수 없음은 그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거나, 냉소이거나, 위로이거나, 견딤의 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마치 좀비라도 된 듯 산책도 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펭귄을 만나는 공상도 하고, 코를 맞대는 아프리카식 인사를 해보는 것(‘아프리카 식 인사법’)은 아닐까.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중독’ 부분)

-시집은 엉뚱한 세상을 향한 엉뚱한 저항과 냉소와 위안과 희망으로 풍성하다. 최소 저항으로 그 엉뚱함의 궤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삼차원을 ‘조용한 평면’으로 펴야 할지 모른다.(최윤필 기자)

'정오의 희망곡' 진행자 정선희씨.(라디오를 따로 듣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정오의 희망곡'을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정의 레퀴엠'이나 가끔 들었을까?)

동아일보(06. 04. 27) 

-‘당신은 사랑을 잃고 / 나는 줄넘기를 했다. /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 넘실거리는 음악, /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정오의 희망곡’에서)

-이장욱(38) 씨는 시인이고 소설가이며 평론가다. 등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씨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김민정 황병승 씨 등 젊은 시인들의 실험시가 시단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보다 앞서 쓰인 이 씨의 시도 주목받게 됐다.(*평론가 이장욱은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경향의 시인들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은 그런 실험 정신으로 가득하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언어인데 한 편의 시로 엮이니 낯설게 보이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 조용히 멈출 수 있다.’(‘가을에 만나요’에서) 인형처럼 생각도, 말도 없이 걷던 화자는 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감정을 갖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 나는 전진하였다 / 당신을 향해 / 한 발 한 발.’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시에서 메시지를 찾는 데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 씨도 “내 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면서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한다. 시에 위대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서 언어미를 향유해 달라는 것이다.(김지영 기자)

(*)띄워준다고 해놓고서 시가 난해하다는 리뷰만 나열해놓았으니 이 또한 '수행적 모순'이 아닌가 걱정된다. 걱정을 덜기 위해서 샘플로 올려져 있는 시 '먼지처럼'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먼지처럼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이 시의 퍼즐을 맞춰보기로 하자. 다른 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여기서는 시인 고유의 어휘적, 통사적, 의미적 반복과 패턴을 재구성할 수는 없고, 단지 이 시에 한정하여 '보이는 그대로'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먼저,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이다(원론적으로 말해서 리듬은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지기에 반복은 시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이동하였다', '우리는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가 이 시의 핵심 의미소이다. 묘사되고 있는 나머지 대상들은 이 이동중에 보게 되는 '우리의 배경'이다.   

'우리' 자신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의 시적 세계관은 허무주의이다. 먼지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의 유구한 상징이기에.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기꺼이 코끼리이고 개이고 기린이고 하마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그 '먼지적 세계관'의 허무주의를 부드럽게 허락하고 수용한다. 그건 이를 테면 체념이다. 이 체념적 정서에서 '욕망'이 배태될 리 없다. 화자는 다만 관조할 따름이다. 바람결에 떠도는 먼지 같은 세상과 세월과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먼지처럼' 그냥 "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러한 관조적 허무주의이다(풍경 자체가 허무주의의 산물 아닌가?).

모든 의미가 증발해버릴 만한 의미의 영점, 혹은 '가장 짧은 그림자'를 거느린 정오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일 뿐(이런 시의 계보의 우두머리에 김종삼을 앉힐 수도 있으리라. 중간 보스쯤에는 박상순을)."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포즈를 취하고.

그런데, '피아니스트'로서 이장욱이 연주하는 음악은 지극히 모던해서, 독자의 이지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정서적인 감화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음악이 '정오의 희망곡'이란 표제로 배달되는 것은 또한 지극한 유머이다. 그 유머에 어떤 트라우마가 배어 있는 것인지는 나는 아직 알지/확인하지 못한다. 하니 나는 당분간 그의 시의 배경으로만 남도록 하겠다...

0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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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글로 해서 김행숙을 읽으며, 'too deleuzian'이라고 느꼈습니다. 비평가로서는 이런 작가가 얘기하기 쉽겠다 싶은... 하지만 신형철 문장이 워낙 매력 있어서 ... 이별의정거장을 사서 좀 읽었습니다... 그런 건 있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감성... 이때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만... 저는 추사 세한도에서 그 극적인 예를 봅니다, 그런데 거기엔 충만한 숭고미의 '배면'이 있습니다. 진짜 기교적이죠!... 또 좀 들여다보니 김행숙의 시에서도 숭고미가 느껴집니다. 신형철은 탈숭고라고 해석했지만요... 그런데 중요한 건 '배면'입니다...

미지 2010-07-16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 시는 철학과 음악의 결핍이 겹치는 곳에서 탄생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어의 순서(학)와 감각의 순서(악)가 조성하는 물질적 공허, 육체적 무의미를 달래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을 거라는... 결국 시는 물질적으로 충만하고 육체적으로 의미로운 언어이자 음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자 일종의 요구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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