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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학교에 나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아무도 없는 강사실에 앉아 있다. 무심코 즐찾의 알라딘을 클릭했더니 '정상화'돼 있다(아직 100%는 아닌 듯싶다). 오후부터인 것 같다. 내일 아침까지는 '휴무'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에도 '근무'하는 기분이다. 학교처럼 알라딘 마을도 아주 고적하다. 어제 대형서점에 잠깐 들렀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다가("이번주엔 눈에 띄는 책이 없네"라고 중얼거렸다) 언론리뷰를 보고서야 챙긴 책 두 권에 대한 소개기사만 옮겨놓고 다시금 '오프라인'으로 넘어가야겠다. 드미트리 오를로프의 <예고된 붕괴>(궁리, 2010)와 에릭 윌슨의 <멜랑콜리 즐기기>(세종서적,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서울신문(10. 04. 24) 전쟁·경제위기·총·범죄… 붕괴, 미국도 소련처럼?

미국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긍정, 부정 어느 방향이든 한반도의 상황과 운명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들어선 뒤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지만 미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 뒤주에 머물지 않고 철저히 현실에 기반해 미국을 파헤치는 목소리까지 가세했다. 과연 ‘미국 없는 세상’, ‘포스트 미국의 시대’는 일부 진보주의자들의 급진적 전망일 뿐인가. 아니면 냉엄한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인가.

1991년 소련은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의 충격, 각 민족국가의 독립 요구 등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 함께 냉전시대의 한 축을 이뤘던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세계사적인 충격이었다. 오로지 소련만 쳐다보고 의지했던 범 소련권 국가들이 겪은 경제적 혼란, 대량 실업, 정치적 위기 등은 필연적 후과(後果)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상황은? 만약에 미국이 소련처럼 붕괴한다면,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때마다, 미국 이후 시대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절박하게 미국에 매달리게 되곤 한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최근 두 차례의 이라크전쟁의 패배 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등 금융자본 전횡의 후폭풍 등은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보여준다. 



‘예고된 붕괴’(드미트리 오를로프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는 19세기 이후 최대 제국, 미국이 구 소련과 비슷한 양상으로 붕괴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학술적 측면의 접근이 아닌, 현장 중심의 근거들을 갖고 실증적 접근을 통해 이를 예견한다.

1962년 구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스스로 “전문가도, 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목격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냉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인터넷 보안 등까지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로 활동한, 드문 이력을 갖고 있다. 이는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를 직접 목격했음은 물론 미국 자본주의 현장을 구석구석 체험했음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파산하기 전 소련과 현재의 미국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소련이 외채에 시달렸던 만큼, 미국 역시 재정 적자와 달러 가치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냉전 뒤에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국방비 지출을 늘려 왔다. 이는 고스란히 지나친 석유 의존도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 석유 부족으로 경제 위기를 맞았던 소련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미국의 상황이 더욱 우울한 근거로 저자는 “세계 최고의 범죄율과 민간인에게 풀린 수억 자루의 총”을 든다.

책 뒷부분에서는 아예 붕괴를 기정사실화한 뒤 각자의 대처법을 제시한다. 3단계로 나뉜 일종의 ‘생존 가이드라인’이다.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공동체의 힘을 믿고 따르며(완화), 붕괴 이후 석기시대에 준한 세상에 맞춰 불편하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며(적응),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기회)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쉽게 읽히도록 풀어냈다.(박록삼기자)   

 

한국일보(10. 04. 24) 입만 열면 행복 행복… 우울이 창조의 원천인줄 모르시나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에 어디를 가나 보는 것은 가면을 쓴 모습이다. 행복한 얼굴이라는 분칠… 탈출을 감행한 날 욕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다소 슬프고 음울한 표정이다. 당연하다. 행복 나라에서 탈출한 결과 자연스러움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 아름다움이 스민 우리의 얼굴임을 깨닫는다."(121쪽)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묻는 책은 많다.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릴게요, 친절한 안내서도 넘친다. 육탄전을 치르듯 행복을 갈구하지만 좀체 그것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일 터. 이 '행복 쟁탈전'의 패잔병들은 스스로를 우울, 다른 말로 하면 멜랑콜리(melancholy)의 포로로 여기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이 책_원 제목이 'Against Happiness'다_은 이렇게 선언한다. "멜랑콜리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멘토다!" 



미국 웨이크포레스트대 교수인 저자는 문학과 심리학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영문학자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잘 짜인 행복 방정식에 맞춰 항상 방긋거리며 만족의 통념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기성품처럼 표준화된 이런 행복을 욕망하는 것은 진솔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에 깃든 세상과 우주의 두 가지 상반된 요소_고통 혹은 체념이라는 극, 짜릿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다른 극_에 한쪽 눈을 감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오히려 저자는 멜랑콜리가 삶의 필수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인류의 소중한 문화적 원천, 모든 창조와 발명을 가능케 한 귀중한 영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책을 쓴 배경을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우울증 따위는 대패로 밀어버리듯 하며, 그 결과 인류의 창조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멜랑콜리마저도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된" 현실이라고 밝힌다. 다소 격정적인 그의 토로를 그대로 옮겨보자.

"멜랑콜리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떨림 혹은 흔들림에 다름아닌데, 그것이 완전히 멸종된다면 인간이 추구해온 장대한 소망이라는 탑은 어느 날 갑자기 휘청거리며 무너지지 않을까?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함께 교차하는 인간 삶의 교향곡은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리지 않을까? … 이런 움직임은 지구온난화 같은 생태학적 위기, 핵무기 확산 같은 디스토피아적 상황 못지않게 위험하다."(12쪽)

 

저자는 행복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천재들의 사연을 논거로 동원한다. 예컨대 존 레넌. 그는 전쟁, 부모의 이혼, 어머니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성장했다. 상심과 번민에 지친 영혼이었기에, 그의 음악은 깊은 울림을 지닐 수 있었다는 얘기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 낭만피 시인 존 키츠, 심리학자 카를 융 등도 공통적으로 '인공적인 행복'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독과 은둔을 택했다. 저자는 상실감과 슬픔의 정서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이 숨쉬는 삶의 무대라고 거듭해 말한다. 이 책은 그 무대, 곧 창조적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의 초대인 셈이다.(유상호기자)  

10. 04. 24.  

P.S. <예고된 붕괴>는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과 '옮긴이의 말'만 읽어보더라도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오를로프는 '석유 고갈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로 소개되는데, 그가 '미국 붕괴' 전망의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는 것도 석유 고갈 문제다. 원유의 급격한 고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국'이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인 미국은 이에 대처하기 힘들 거라는 점. 세계 5위의 원유 수입국이면서(한국은 일본과 독일보다도 자원 낭비가 심한 나라라고 한다), '미국을 가장 닮은 나라'(강준만)라는 한국도 이러한 전망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석유 고갈 문제라고 하니까 석유정점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로 소개된 리처드 하인버그의 책도 참고해볼 만하다. <파티는 끝났다>(시공사, 2006)과 <미래에서 온 편지>(부키, 2010)가 번역돼 있다.   

한편, 멜랑콜리와 관련해서는 김동규의 <멜랑콜리 미학>(문학동네, 2010)도 신간이다.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랑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예술과 철학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고. <글루미 선데이>에 대한 글도 말미에는 붙어 있는데, 글루미한 날에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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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hema 2010-04-24 15:06   좋아요 0 | URL
존 레논은 마약과 환각제 상습 복용자였고, 오컬트에 깊이 빠졌었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했었던 비정상적인 인간이었지요.

로쟈 2010-04-24 21:1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분보단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mediocris 2010-04-25 00:07   좋아요 0 | URL
어떤 자의 입 방정 때문에 자살한 사람의 죽음에 대고 자살세를 거론하여 비아냥거렸지만 정작 그 어떤 자의 자살에는 침묵한 미학자에게 많은 책을 읽은 아까운 자긍심을 봉헌하는 영혼보다는 서울을 봉헌한다는 자의 영혼이 그나마 때가 덜 묻지 않았을까? 세습 왕조의 봉헌 의식은 외면한 채 줄기차게 한쪽만 비판하는 균형 감각으로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anathema 2010-04-25 00:38   좋아요 0 | URL
아니죠. 둘 다 비정상이라고 해야죠.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

Joule 2010-04-25 14:03   좋아요 0 | URL
명박아에게 존 레논 같다고 하면 그닥 기분 나빠할 것 같지 않은데, 존 레논에게 명박아 같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할 것 같은데요.

픽션들 2010-04-25 18:11   좋아요 0 | URL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말에, 한 인간으로서 일말의 자괴감이 일지 않나요?
행복찾기의 '게임'에서 길을 잃고 개인의 순수노동을 권력에 헌납하며 살아가는 것이 덜 때묻은 것일까요?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를 단지 마약이나 과도한 자기애 등과 같은 것으로 추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위대한 영화감독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쑤셔넣어야 하니까요. 거기다가 베르베르나 보통 같은 작가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당연히 들어갈 겁니다.

로쟈 2010-04-26 20:12   좋아요 0 | URL
존 레논과 함께 천국을 상상해볼 순 있지만 MB와는 도저히...
 
체호프와 바냐 아저씨의 해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

안톤 체호프 원작의 <숲귀신>이 이번주 일요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여유가 없다 보니 관람기회는 놓쳤는데, 그래도 리뷰는 챙겨놓는다. 드디어 내달초에 찾아오는 러시아 말리극단의 <바냐 아저씨>공연 안내와 함께.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지만 도진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뉴스컬처(10. 04. 19) 121년 만에 빛을 본 연극 [숲귀신]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숨겨진 명작 [숲귀신](연출 전훈)이 무대화됐다. 국내 초연된 이번 공연은 1889년 당시와 같이 소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며, 전훈 연출은 노컷, 노어레인지로 연출해 작품의 초기 모습 그대로를 무대에서 보여줬다.

연극 [숲귀신]은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의 전신(前身)으로, 체호프가 발표한 세 번째 장막극이다. 초연 당시 참담한 실패를 기록했는데, 공연은 물론 희곡 자체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었다. 이에 체호프는 죽기 전까지 [숲귀신]의 출판 및 공연을 불허하고 작품을 봉인했다.

121년 만에 봉인이 해제돼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 중인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졌다. 퇴임한 교수 세레브랴코프, 그의 젊은 둘째 아냐 옐레나 그리고 딸 소냐가 두 작품에서 똑같이 등장한다. 옐레나를 짝사랑하는 바냐는 본디 이고르였으며, 숲 속에서 살던 의사 아스토르프는 ‘숲귀신’이라는 별명으로 의사 일보다는 숲을 지키는 일에 더 열성적인 흐루쇼프였다.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보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3시간 동안 공연되는 희곡 또한 방대하다. 무대는 나무와 식탁, 창틀, 의자 등을 이용해 대저택의 정원과 식당, 응접실 그리고 숲 속 물레방앗간을 보여준다. 1막이 2명으로 시작해 2명으로 끝나는 등 인물 등장과 구성이 구조적이며, 전개는 다소 산만한 듯 나열된다.

그러나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보단 한결 가볍다. 종종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키스를 퍼붓는다. 특히, 4막만 봐서는 체호프의 작품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쉽게 말해 ‘바냐 아저씨’의 로맨틱코미디 버전이자 100년 뒤 시대를 내다본 트랜디 드라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숲귀신]의 주인공은 옐레나를 사랑하는 이고르가 아닌 흐루쇼프다. 그는 실리를 위해 숲을 벌목하는 것을 반대하며, 후세를 위해 숲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숲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는 거침없지만 소냐를 향한 사랑의 마음 앞에서는 소극적이고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소냐와 흐루쇼프의 엇갈리는 마음은 극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숲귀신]이 그 옛날 혹평을 받았고, ‘바냐 아저씨’보다 가벼워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체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함없다. 이고르의 권총자살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시작의 발을 내디딘다. 떠나지 않았던 옐레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던 교수는 “일을 합시다”라고 말한다. 좌절하더라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바냐 아저씨’의 주제가 약하게 나마 드러난다.

사실 안톤 체호프는 초기 희곡에서 큰 난항을 겪었는데, 희곡 자체의 문제 말고도 그에게는 작품을 이해하는 연출과 배우가 없었다. 당시 [숲귀신]은 “훌륭하게 각색된 소설이지 드라마는 아니다”라는 혹평을 들었을 정도. 이후 다행히도 체호프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해준 연출가 단첸코와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체호프는 혹평으로 인해 ‘숲귀신’을 봉인시켰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개작에 착수, 10년 뒤 ‘바냐 아저씨’를 발표했다. ‘바냐 아저씨’는 1899년 10월 스타니슬랍스키 연출로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는 5월, 연극 ‘바냐 아저씨’가 세계적 명성의 레프 도진 연출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이 스타니슬랍스키의 어법을 바탕으로 공연할 예정이다(5/5~5/8, LG아트센터). 전신인 [숲귀신]과 개작 후 명작이 된 ‘바냐 아저씨’를 비교해 볼 만하겠다.(양훼영기자)    

한국일보(10. 04. 21) 3시간 짜리 대하연극 "이것이 인생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말리 극단은 무대를 삶의 축도로 만든다. 2001년의 '가우데아무스', 2006년의 '형제 자매들' 등 두 차례 내한 공연에서 그들은 무대가 곧 삶의 현장을 그대로 모사한 것일 수도 있음을 실증했다. 객석에게는 무대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의 무대는 뚜렷한 방향을 갖고 생생한 삶을 그렸다. '대하(大河)'라는 말이 연극 무대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웅변했다.

그들이 다시 온다. 이번에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작은 실험극단으로 출발했던 이 극단을 23년의 세월과 함께 세계적 극단으로 키워낸 연출가 레프 도진(66)의 이번 무대도 상연 시간이 3시간여다. '전원 생활의 정경'이란 원래 희곡의 부제대로 시골을 배경으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세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대하가 흐르듯 유장하게 진행되는 도진의 무대는 연극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사실적 수법에 의지해 최대한으로 확장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다.

도진은 이 무대를 "체호프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정수"로 꼽는다. 20여년 간 무대 구상만 하다 2003년에야 첫 상연한 데에는 그 같은 경외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무대는 또 연극을 유흥이 아니라 계몽과 학습의 장으로 여기는 러시아 특유의 연극관이 빚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진의 배우들은 테크닉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심성과 감각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훈련을 거친다. 대연출가 피터 브룩이 "말리 극장은 세계 최고의 앙상블"이라 감탄했던 그 진면목을 확인할 기회다. 5월 5~8일, LG아트센터. (02)2005-0114 (장병욱기자)  

10. 04. 22.   

P.S. '3시간짜리 연극'은 러시아에서 통상적인데, '대하연극'이라고까지 한 것은 다소 과장이다. 연출가 전훈의 체호프 공연 대본은 <안똔 체홉 4대 장막전>(제이앤북, 2005)으로 나왔었지만 현재는 품절상태다(<숲귀신>까지 포함해서 다시 나오면 좋겠다). 레프 도진과 말리극단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세프초바의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동인, 2010)이 매우 요긴한 참고문헌이다. <숲귀신>과 <바냐 아저씨> 등에 대한 국내 연구는 김규종 교수의 <극작가 체호프의 희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신아사, 2009)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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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주간한국에서 경계적 지식인을 다룬 커버스토리를 옮겨놓는다. 다큐영화 <경계도시2>가 빌미가 돼 한국사회에서 경계적 지식인의 문제를 살폈다.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지목돼 나도 인터뷰에 응했고, 몇 가지 언급이 기사화됐다. '경계'라는 말이 다의적인 만큼 '경계적 지식인'도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내 경우엔 학계와 대중 사이를 오간다는 의미다. 그런 역할도 그다지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주간한국(10. 04. 20) <경계도시2> 경계인을 생각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를 보고 난 관객들의 뜨거운 응원소리가 전해진다. 개봉한 지 한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칼럼니스트, 변호사, 소설가, 가수, 대학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지식인 인사들의 자발적 지지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릴레이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 자유롭게 영화를 본 소감을 얘기하거나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유명 인사들만이 아니다. 영화를 관람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가정주부들도 리뷰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최다 관객리뷰를 기록할 정도다. 이 같은 반향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그것은 이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성찰의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그러면 단지 이념 논쟁에 대한 성찰일까? 



영화는 2003년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귀국을 둘러싼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은 여전한 레드 콤플렉스뿐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한 사상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의 부재, 그리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선의 결핍과 심각한 쏠림 현상이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 살기 힘든 한국적 사회현실에 대해 '경계도시2'는 냉정하게 렌즈를 들이댄다. 



왜 경계인 생존이 힘든 사회인가
송두율 교수는 스스로를 경계인으로 규정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배타적인 두 경계를 허물기 위해 그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인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하라고 윽박지른다. 경계인 송두율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혹한 희생양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기 어려운 것이 송 교수뿐일까? 영화는 보다 포괄적으로 경계인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작품을 만든 홍형숙 감독은 전화 인터뷰에서 "분단이나 레드 콤플렉스 저변의 중요한 문화코드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했다"고 답했다. 집단적인 선택과 요구가 강요되고, 개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갖기 쉽지 않은 문화를 지적했다. 그는 "그러한 문화 속에서 새로운 시선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 역시 이념논쟁을 비롯한 어떤 '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사실 경계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경계인은 일반적으로 진보와 보수, 좌와 우, 학계와 대중 등 분리와 극단의 경계선상에서 양쪽과의 소통과 통섭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또, 주류에 반기를 드는 재야 지식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도 포함된다.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 사회가 경계인의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뭘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를 근거로 삼은 출세주의가 한 이유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치열한 내부경쟁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다.

한국인들은 극렬한 경쟁에 치를 떨면서도 경쟁만이 살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패거리를 중심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 우리는 그런 투쟁을 곧잘 이념투쟁이나 지역투쟁으로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이익투쟁이다. (2009년 12월27일 한겨레신문)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은 학교나 고향 출신이라는 연고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는 경계인이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대학의 붕괴를 거론한다. 지성의 영역이어야 할 대학이 사라지고 상업적 성과를 중시하는 이상한 풍토가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지식인을 멸종시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빨리 연구하고, 빨리 성과를 내는 기업적인 연구문화가 만연하게 됐고요. 또,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은 연구논문들 가운데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학문적인 분야가 너무 많아요. 비정상적인 지식 연구 패턴이 대학, 그리고 더 나아가 지식인을 없애고, 제도권에 대한 지식의 종속을 심화 시키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경계도시2'를 통해 심각한 지식의 종속을 발견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진보인사들조차 여론몰이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지식의 종속을 반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이자 대중적인 인문교양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펴낸 이현우 박사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출판 시장을 경계인으로 살기 힘든 환경으로 꼽는다. 그는 인터넷에서 인기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는 등 학계와 대중 사이를 오가는 경계적 지식인이다.

"영어권 국가나 일본 등과 달리, 우리나라는 출판시장이 작고 열악해서 지식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대학이나 기업, 혹은 국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제 책의 경우에도 1만 부가 팔려 인문학서적으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저자가 받는 인세는 1500만원도 안 됩니다. 학진(학술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를 하면 1년에 논문 한 편을 써서 3000만원 정도를 받아요. 그러다 보니 제도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지식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매우 드물게 되고, 지식이 국가 등 기득권에 예속 되는 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봐야겠죠."

경계인이 필요한 이유
하지만 경계인이 자생하기 힘든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경계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경계인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소통의 문제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저서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우리사회가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승자독식주의, 서울 중심의 초강력 중앙집권주의, 다른 이념에 대해 약간의 신축성도 보이지 않는 이념의 사유화 등을 꼽았다. 그리고 소통의 조건으로 이 같은 무리의식과 이해관계가 그어놓은 경계에서 벗어날 것을 제시한다.

여기서 좌파와 우파를 비롯해 소통 불가능한 경계를 넘나들며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경계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한국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발행인 성일권 씨는 경계인이 많아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제,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 활약 중인 몇몇 국내 경계적 지식인을 거론하며 "제도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주류 지식에 편입되지 않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계인이 많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유롭게 주류세력을 비판할 수 있는 경계적 지식인이 많은 프랑스를 예로 들었다. 프랑스는 주류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 즉 경계인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큰 나라다. 이들은 사회 주류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사회기류는 기존의 주류 문화와 제도에 반기를 들었던 '68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68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학교육의 모순과 관리사회에서의 인간소외, 사회적 모순 등에 반대해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해 벌인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이다.

"68혁명으로 인해 비록 기존의 체제와 문화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랑제꼴 중심에서 대학으로 교육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대중문화를 당당히 문화의 주류 반열에 올리는 데 성공했지요. 이후 주류문화에 도전하는 지성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사회의 변화와 견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경계적 지식인은 지식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이현우 박사는 "대학의 도제제도나 파벌주의, 업적주의 그리고 국가, 기업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경계적 지식인이 없는 한 세계를 보는 눈을 바꿔 놓는 지식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왜 론 처노와 같은 전문 저술가가 나올 수 없는지 반문한다. 시사 평론가이자 금융전문 작가인 처노는 '금융제국 J.P. 모건'이나 '부의 제국 록펠러'를 통해 미화되고 은폐되기 쉬운 거대 기업가의 숨은 면모를 낱낱이 파헤쳐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또 '과학의 탄생'이나 '16세기 문화혁명' 같은 세계적인 저작이 과연 국내의 재야 지식인에게서도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든다고 덧붙였다.(전세화 기자) 

10. 04. 21.  

P.S. 참고로, 우리의 '출판시장' 혹은 '지식시장'의 현실과 관련해서 내가 답변한 내용은 이렇다.

'지식시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동정 없는 세상'이죠.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훈련'받지 않은 터라 생존확률이 그만큼 떨어진다고 봅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어서 국내 인문학자 가운데서는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요. 분야는 다르지만, <금융제국 J.P모건>이나 <부의 제국 록펠러> 등을 쓴 론 처노 같은 '전문 저술가'가 국내에서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고요, <과학의 탄생>과 <16세기 문화혁명> 같은 저작이 역시 국내의 재야 지식인에게서 나올 수 있을지 회의가 듭니다. 개개인의 역량 이전에 사회문화적 여건의 문제이고, 학문적 온축의 문제이기 때문에요. 20-30년 후라면 좀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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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1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녁이 다 돼서야 편의점에 가 신문을 사들고 왔다. 즐겨 마시는 카페오레를 사러 간 길이었다. 북리뷰란은 이미 인터넷으로 훑어보았기에 관심을 갖고 읽어본 건 칼럼란이다. 마침 어제 <김예슬 선언>(느린걸음, 2010)도 읽은 김에 두 고대생과 오늘날 대학 문제를 짚어본 칼럼을 옮겨놓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학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룬 책으론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에서 엮은 <지식사회 대학을 말한다>(선인, 2010)도 있다.  

 

경향신문(10. 04. 17) 김연아와 김예슬 그리고 대학 

한 대학생이 자신의 대학을 '방문'했다. 그 학생은 등교하자마자 총장실로 직행해 총장, 부총장, 학생처장 등과 '환담'을 나눈다. 총장은 그 학생에게 미래를 위해 외국어도 공부하라고 권유하고 학과장은 어떤 책을 원서에 번역서까지 선물한다. 그리고 그 학생은 학장의 안내로 학과건물을 시찰(?)한 후 강의실로 들어갔다. 9시에 시작한 수업에 1시간 40분이나 늦게 들어간 그는 다음 약속 때문에 10분만 앉았다가 나왔다. 그 학생의 측근(?)은 그가 언제 다시 학교에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2학년에 재학 중인 이 학생은 1학년 때도 딱 한 번 학교에 갔다. 그때도 총장 등 보직 교수들과 차를 마시며 환담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졸업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요즘 이 학생의 근황을 듣는다. '은퇴'를 고민 중이란다. 학생이 무슨 은퇴? 도대체 그 학생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다니지도 않을 학교를 도대체 왜 들어갔나.

자본주의 사회의 ‘초극강 상품’
누구의 이야기인지 다들 아실 것이다. 바로 김연아다. 그는 귀국 후 광고계약을 맺은 한 의류매장에 가기도 하고 '삼성 애니콜과 함께하는 스마트 데이트'라는, 재벌기업의 브랜드명으로 뒤범벅인 팬미팅 행사에 나타나기도 했다. 김연아는 그러나 분명 대학생임에도 학생으로서의 신분이나 그에 따르는 의무에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결국 '학벌'만을 위해 대학에 간 것인가. 어쨌든 학생이 학교를 외면하는 모습, 학교가 학생을 모시는 모습, 수업을 안 들어와도 학교 광고만 되면 그게 '장땡'이라는 모습은 이 시대 대학의 굴욕이다. 



이러한 모습 위에 겹쳐지는 또 다른 기억은 나를 더욱 씁쓸하게 한다. 지난 달 김연아와 같은 대학의 김예슬이라는 학생은 자퇴를 선언했다. 그는 '자격증 브로커' 또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에서 재벌기업이 원하는 상품이 되어 간택되기를 열망하기보단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자퇴한다고 했다. 또 그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리는 것을 기뻐"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비정하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을 개탄했다. 그래서 김연아가 택한 학벌을 그는 버렸다.

김연아와 김예슬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경쟁'이 아닌가 싶다. 한쪽은 세계챔피언이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1등 인간'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미디어시대 자본주의사회의 '초극강 상품'이다. 그래서 그 대학이 모셔갔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거대한 자본의 탑에서 돌멩이에 불과한 인간이다. 그 끝없는 경쟁의 트랙을 질주하다가 결국 방황하는 젊은이다.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상품이 되기를 거부한 그가 택한 것은 자퇴였다. 이렇듯 완벽하게 대비되는 두 젊은이가 '고려대'라는 공간 안에서 뒤범벅이 되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대학마저 요지경이 되는 것인가. 대학이 보도자료까지 뿌려가며 김연아의 등교를 광고한다. 김예슬은 뒷문에 학교를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인다. 대학이 '완제품' 김연아를 모셔와 '광고모델'로 활용한다. 그러는 사이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한 평범한 학생 김예슬은 방황하다 자퇴한다. 오직 경쟁능력에 따라 한 학생은 대접 받고 다른 학생은 자퇴의 길을 택한다. 가르치고 길러내는 곳이 대학일 터인데 '완제품'은 대접받고 '방황하는 청춘'은 설 곳이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대학의 모습이어야만 하는가. 한국사회 대학은 과연 '大學'다울 수 있을 것인가.

상품화 거부 ‘방황하는 청춘’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대학에게도 최소한의 자존심과 지조는 있어야 한다. 마침 고려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의 와세다대에서 날아온 소식이 눈을 끈다. 이 대학 3년생인 후쿠하라 아이는 국가대표 탁구선수면서 CF를 찍을 정도의 인기 스타다. 현재 세계랭킹 8위인 그는 런던올림픽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학교 출석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올림픽 메달을 노리는 스타학생에게 와세다대는 어떤 배려를 했을까. 학교는 안 와도 좋으니 메달만 따라고? 그래서 학교의 명예를 빛내라고? 천만에. 학교가 제시하는 출석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된 후쿠하라는 지난 달 자퇴해야 했다.(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10. 04. 17. 

P.S. 칼럼의 요지에 동감하지만 "대학이 '완제품' 김연아를 모셔와 '광고모델'로 활용한다. 그러는 사이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한 평범한 학생 김예슬은 방황하다 자퇴한다. 오직 경쟁능력에 따라 한 학생은 대접 받고 다른 학생은 자퇴의 길을 택한다."라고 한 대목은 오해의 소지도 있는데, 김예슬은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해' 방황하다 자퇴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말을 빌리면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현재 한국 대학의 현실에 절망하여 자퇴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진리'는 학점에 팔아넘겼다. '자유'는 두려움에 팔아 넘겼다.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겼다. 나를 가슴 벅차게 했던 그 세 단어를 나 스스로 팔아 넘기면서, 그것들이 모두 침묵 속에 팔아 넘겨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려대학교는 '삼성'과 '글로벌'과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고려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 순수한 영혼과 진리와 자유와 비판과 정의와 저항의 대학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진리 탐구의 전당과 대학문화라는 벽이 무너지면서, 세상 모든 대학이 자본과 시장의 탐욕에 활짝 열려 버렸다.(35쪽)  

천안함 사건에 묻힌 감이 있지만, '특별한 대학생' 김연아를 '환대'한 이기수 고려대 총장은 며칠 전 대교협 신임 회장에 취임하면서 기여입학제 도입 찬성 등의 발언을 토해내 한번 더 구설수에 올랐다(지난 1월에 한국 대학의 등록금이 너무 싸다고 발언한 장본인이다). 자퇴생 한 명 정도는 안중에는 없는 듯하다. 사설 하나를 옮겨놓는다.   

국민일보(10. 04. 15) 혼란만 키운 대교협 회장 발언 

대학들을 대표하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신임 회장이, 그것도 취임식 날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사회적 중론을 모아 정리된 대학입시 기준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을 했으니 입시생과 학부모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기수 대교협 신임 회장은 13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학이 입학사정관 전형 공통기준을 어기더라도 가급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겨도 불이익 없는 기준은 있으나마나한 셈이니 결국 공통기준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대교협은 지난 7일 공통기준을 발표하면서 어기는 대학을 제재할 것이라고 했었는데 며칠 사이에 이렇게 오락가락하니 고교들은 입시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게 됐다. 논란이 일자 대교협이 내놓은 해명자료가 더 가관이다. “자율 규제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인데, 안 지켜도 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 회장은 또 “우수한 외국어 학교라면 필요한 자격을 갖춘 학생에게 가산점을 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시행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회장이 총장으로 있는 고려대는 2009 수시전형에서 고교등급제를 시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이제 고교등급제가 전체 대학으로 확산되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했지만 “100억원 정도 들여 건물을 지어주는 사람의 2, 3세가 수학능력 검증을 거쳐 정원 외 1% 정도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는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기여입학제를 옹호했다. 기여입학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부정적 여론이 많아 당분간 도입하지 않기로 한 상황에서 대교협 회장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는 얼마 전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교육의 질에 비해 싼 편”이라고 말해 비난을 받았었다.

이 회장의 가벼운 입도 문제려니와 입학사정관제 공통기준이 과연 지켜질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입시생들은 공인 어학시험이나 경시대회를 챙겨야 하는 것인지 필요가 없는 것인지 더 헷갈리게 됐다. 이런 것도 정리하지 못해 국민을 골탕 먹이는 교육과학기술부라면 차라리 해체하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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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4-18 09:59   좋아요 0 | URL
젋은이 들보다 더 많이 살아온 어른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숭례문을 태워 버리지 않나, 강의 모양을 확 바뀌버리지 않나 등 그 만큼 사회적 능력이 많아서 겠지만요. 고교때 종교의 자유를 외첬던 대학생, 입학여 대학의 행태에 실망하여 자퇴하게된 여대생 등이 우리 사회의 소금이 될거라 믿습니다.

로쟈 2010-04-18 22:24   좋아요 0 | URL
소금을 배격하지 않는 사회가 먼저 돼야겠지요...

paul 2010-04-18 11:38   좋아요 0 | URL
첫번째 글을 읽으며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김연아와 김예슬 양의 단순한 대비), 역시 로쟈님이 찝어주신 대목을 보니, 보다 명쾌해지는군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회 속에서 대학의 세례가 갖는 힘을 알기에, 부끄러움과 답답함이 동시에 드는군요....

로쟈 2010-04-18 22:22   좋아요 0 | URL
대졸자 주류 사회란 표현을 쓰는데, 이미 졸업장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죠. 그런 시대에 등록금만 올라가고 있다는 건 넌센스입니다...

비로그인 2010-04-18 22:46   좋아요 0 | URL
진정한 의미(?)의 대학은 다른 의미에서 '잃어버린 10년'의 귀결(작년 강내희씨 칼럼에 대한 댓글에서 몇 마디 늘어놨던 것이 떠오릅니다)을 어떻게 감당하며 만회할 것인지, 저도 '사실상' 대학에 절망한 지 오래된 한 사람으로서 답답함을 느낍니다. 2007년부터 저에게 대학 역할을 해준 이가 강유원씨, 로쟈님 등이었죠...

로쟈 2010-04-18 22:56   좋아요 0 | URL
양다리(?) 걸치고 있는 저도 헷갈립니다. 갱신이 필요한 건지, 종언이 필요한 건지...

비로그인 2010-04-20 12:10   좋아요 0 | URL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도 의심스러웠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학문화'나 '대학공동체'란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현장 분위기를 도통 모르겠네요. 대학교가 그저 캠퍼스가 '큰 학교', 대학원이 그저 '큰 학원'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로쟈 2010-04-22 00:34   좋아요 0 | URL
요즘 대학 분위기는 저도 잘 모릅니다. 강의실만 들락거려서요.^^;

mirror 2010-04-19 02:53   좋아요 0 | URL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점을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신자유주의 환원론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대학들의 말도 안 되는 행태가 신자유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를 발명한 미국과 영국의 대학들이 한국과 같은가요? 그들 대학은 한국 대학과 같은 미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들의 이 행태는 신자유주의와 무관합니다. 미국 대학들에는 학원스포츠가 한국보다 더 발달해 있지만, 운동선수들도 다른 학생들처럼 공부하고 학점을 따야 졸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박함과 반지성주의, 한국 사회의 본질적이지 않은 영역에서의 극도의 경쟁은 신자유주의와 무관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의 원인이 신자유주의라면, 신자유주의의 종주국들도 똑같은 문제들을 보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안 그렇지 않습니까? 4대강 사업의 원인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처럼, 한국 대학의 문제들을 야기한 원인도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김예슬이도 그렇습니다.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는 교육을 반대하다고 했죠? 김예슬이 다닌 학과가 경영학과입니다. 만약 김예슬이 노어노문학과나 역사학과 철학과 또는 사회학과를 다녔다면, 기업의 사원이 되는 교육만을 받았을까요? 고려대 정도의 역사학과나 국문학과에서 취업교육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김예슬은 자신이 학과를 잘못 선택하고 적응하지 못한채 엉뚱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경영학과에서 기업의 사원이 되는 교육을 시키지 도대체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나요? 경영학과에서 지젝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까? 고려대 경영학과는 교수가 100명이나 되는 좋은 학과입니다. 이 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죠. 김예슬은 예초부터 이 학과에 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엉뚱한 학과 선택이 이 엉뚱한 짓의 원인인 것이죠. 어린 학생의 치기어린 행동에 이토록 환호하는 것 또한 아주 우스운 일이 아닐까요.
현대사회에서 대학이 국가나 사회 경쟁력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해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과대학, 경영대학은 모두 기업의 사원을 기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학과죠. 이런 학과들이 한국 대학들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은 상당부분 자본주의의 사원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한국의 대학들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합니다. 김연아가 대학생이라고 적을 두는 것 자체가 대학들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이죠.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것은 문제점에 눈감은 것과 같습니다.

로쟈 2010-04-19 08:21   좋아요 0 | URL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한국대학의 행태는 신자유주의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로 정리하겠습니다. 한데, '신자유주의'란 말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기원적 의미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도입한 이들의 용례에 어긋나는 건 아닙니다. CEO총장이 유행했듯이, 기본 바탕은 대학을 '제품'을 생산해내는 '기업'으로 본다는 것이죠. 이건 '학과 선택'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인문학과들이 축소되거나 폐과되는 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입니다. 고작 '대학 부적응' 학생의 자퇴선언에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한국대학의 문제점들을 응집시켜놓은 '컨테이너'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사실 <김예슬 선언>을 읽어보니 단순한 대학 거부가 아니라 "비즈니스 문명, 도시기계문명, 자본권력의 세계체제'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그래서 '유나바머 선언'을 떠올렸구요. 그런데, 그건 또 문제의 확산이자 다른 맥락이어서 초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의미있는 문제를 제기한 거라면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하겠지요. 두고볼 일입니다...

2010-04-19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9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 나온 책 가운데 제목만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관심도서 1위는 자오팅양의 <천하체계>(길, 2010)이다. '21세기 중국의 세계인식'이란 부제가 붙었다. 분량이 좀 얇은 편이어서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직 주문을 넣진 않았지만, 이런 소개문구는 나 같은 독자에게 '딱'이다('나 같은 독자'가 많지는 않은 모양인지 언론리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미국을 제치고 21세기 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철학은 무엇일까. 현재의 주목할 만한 중국철학자 자오팅양은 전통의 문제와 21세기 중국이 처한 세계사적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사상적 편린을 펼쳐 보이고 있는지를 이 책에서 명쾌하게 제시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이 난세에 처한 것은 '세계'는 있지만 '천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하'란 바로 고대중국의 철인들이 갖고 있던 관념으로 천하를 얻는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서양적 의미에서의 제국[패권] 개념과는 대립되는 중국 전통의 관념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세계 VS 천하', '세계체계 VS 천하체계'를 비교의 범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단지 '서양의 패권주의에서 중국의 시대로'라는 시사적 구호를 그럴 듯한 이념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란 의혹을 사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그럴 듯함'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천하' 관념을 통해 새롭게 세계 정치 제도를 평화롭게 이끌고 갈 구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제국의 논리가 아닌지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책소개에는 이미 이런 경계심도 미리 적어두고 있지만, 배울 건 배우고 취할 건 취할 수 있으리라. 1961년생이므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저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국철학계에서 "Trouble Maker"로 일컬어지고 있는 저자는 "하나밖에 없는 현대 중국의 진정한 철학자"이자 "사유가 정밀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이라거나 '가장 창조적인' 같은 수식어구는 무시해도 좋겠다. 다만 'Trouble Maker'라면 그가 일으킨 'Trouble'이 어떤 것들인지 읽어봤으면 싶다('옮긴이의 말'에 들어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소개보다는 그가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말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저자 자오팅양(趙汀陽, 1961~ )은 리쩌허우(李澤厚)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둘의 영향, 즉 중국 고전을 통한 문제의식과 비트겐슈타인을 탐독하여 얻은 방법론적 가르침을 종합하여 저자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방법론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관점이 없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책의 역자도 리쩌허우의 <학설>(들녘, 2005)를 옮긴 노승현 박사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개다. 저자의 이미지를 찾으니 '中國哲學新星'이란 문구도 뜨는군(문득 우리는 '한국철학신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계체계' 대신에 중국 전통의 '천하체계'를 내세운 만큼 자부심이 없지 않겠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다.

오로지 중국의 세계관만이 등급에서 '국가'보다 높고/큰 분석의 각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치에 관한 문제에서 중국의 세계관, 즉 천하 이론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세계 질서와 세계 제도의 이론을 고려했다. 따라서 중국이 세계를 책임지고 세계를 위한 이념을 어떻게 창조하려고 하는지가 우리의 진정한 문제여야만 한다.”

남 잘 났다는 소리니만큼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동양고전이라고 우리가 맨날 읽는 것도 <논어>이고 <맹자>이니 그런 불편함은 약간 기만적이다. '중국의 지혜'는 좋지만, '중국의 세계관'은 안된다는 태도처럼 보이니까. 

여하튼 '천하체계'란 제목 자체가 호방하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만한, 아니 그를 능가하는 스케일을 자랑한다. '中國哲學新星'의 실력을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주의 책'이다...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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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4-17 14:00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대륙은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피부로 느끼게 해주네요..

로쟈 2010-04-18 22:21   좋아요 0 | URL
자연조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7 17:03   좋아요 0 | URL
대국굴기에서 '기'를 힘주어 말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대국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겠죠. 리쩌허우의 대담집인 [고별혁명]을 보면 그가 현실의 중국이 싫어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중국의 패권주의나 대국주의에 대해선 비판적 시각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의 제자는 또 모르겠지만요.
여담이지만 또 다른 망명 지식인인 시인 베이다오를 강연회를 통해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리 중국을 비판하던 그가 미국에 이어 중국이 패권국가가 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거부감이 없더군요. 그 정도 위상은 적어도 동아시아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걸 보고 꽤 놀랐습니다. 동서(東西)라 말하지 않고 중국을 동아시아의 대표라 자처하며 중서(中西)라 말하는 기만이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8 22:20   좋아요 0 | URL
달리 '중국'이 아니지요. 거기에, 인구가 13억이 넘는 나라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paul 2010-04-18 11:42   좋아요 0 | URL
<영웅>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양조위가 모래 사막위에 검으로 쓴 '천하'라는 글귀...ㅎㅎ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사실 아주 친숙한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4-18 15:56   좋아요 0 | URL
간단히 말해서 중국의 천하관념은 조공-책봉 관계이고 이런 국제관계가 유럽처럼 약육강식하는 살벌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지요. 약소국이 다소 숨쉴 여력도 만들어 주고...우리나라 사학자들도 사대주의가 중국에 종속된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일명 '사대주의 정당화학파'가 꽤 세력이 있지요.그런데 현실적으로 21세기의 천하질서는 음...동북공정이나 서남공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동북공정 같은 건 속좁은 '제국주의'의 행태죠. 천하체계는 소위 '제국'의 논리에 더 가까울 듯해요. 읽어봐야 알겠지만.

mirror 2010-04-19 02:37   좋아요 0 | URL
시민 또는 국민을 백성으로 보는 것만 해도 전근대적인 관점이 아닐까요?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홉스와 로크, 루소의 정치철학에 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것을 대체할 이념은 새로 등장하지 않았고요. 현재의 중국의 국가체제를 용인하면서 천하를 운운하다니요. 허황된 중국 지식인의 전형을 보는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위한 참고로서 이런 책이 번역되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 중국 유학생들이 그런 생각인지는 의문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이거나 유학한 나라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의 후광에 힘입어 행세하려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의 학자들 행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갔다온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중국유학출신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적 지적 전통은 현대사회의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해왔고, 지금까지는 미래의 가능성도 보여준 적 없습니다.
'관점이 없는 견해'란 표현은 다른 데서 베낀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에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Thomas Nagel의 저서 이름이 'View from nowhere'입니다.

로쟈 2010-04-19 23:29   좋아요 0 | URL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이념은 등장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몰락이 '역사의 종언'이라고 믿는 입장에서라면 코웃음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많은 문제점을 지닌 나라이므로 중국 지식인의 생각이 허황하다고 보는 것은 미국이 이상사회가 아니므로 미국 지식인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로선 '세계체계'라는 걸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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