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 일정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발표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을 따라갈 수 있다. 아이티의 지도자 아리스티드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지젝은 바로 아리스티드를 꼽은 바 있다. 왜 그런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읽을 수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주석은 따로 붙여볼 작정이다. 발표문에서는 '지젝과 민주주의'란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책의 실린 제목을 붙여둔다.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아이티의 혁명과 수난의 역사 혁명,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개관은 177-180쪽을 참조할 수 있고, 아래는 186-196쪽의 발췌이다.

 

[이제 아이티로 가보면] 라발라스[당]의 투쟁은 원칙주의적인 영웅주의, 그리고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의 틈새로 물러나 거기서 ‘저항’하지 않고 영웅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또한 탈근대적 좌파의 모든 경향이 자신들에게 맞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리할 상황에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수적인 구조조정’을 법제화하기 위해 미국과 IMF에 의해 부과한 조치들에 제약당하면서도 아리스티드는 몇가지 정확하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정책(학교와 병원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대중들의 폭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군부 패거리들에 맞섰다.  



아리스티드는 간혹 ‘페르 르 브뢴’(대중이 행하는 일종의 자기방어로서,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걸어둬 경찰의 암살자나 정보원을 죽이는 행위이다. 얄궂게도 이것은 포르토프랭스의 타이어 판매업자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든 대중의 폭력행사 형태를 뜻하게 됐다)을 묵과하기도 했다.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안으로 인해 아리스티드는 센데로루미노소나 폴포트와 동급 취급을 당했다. 1991년 8월 4일 연설에서 아리스티드는 열광하는 군중에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폭력을 사용할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라발라스의 대중적인 자경단 조직(키메라Chimeres)과 악명 높은 뒤발리에 독재정권의 암살조직(통통마쿠트tonton macoutes)를 비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좌파와 우파를 ‘근본주의자’라고 동급 취급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하지만] 아리스티드는 이 자경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키메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경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각한 위험상태에서,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조적 불의, 체계적인 사회폭력의 희생자들이죠... 그들이 언제나 이 동일한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사람들에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 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 역시 이와 동일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기성의 사회질서)가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실체적 내용과 인정을 찾게 만드는 궁극의 공간이 되는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주관적 자유가 보편적인 윤리의 질서의 합리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강조할 때, 헤겔은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사태의 이면, 즉 이런 인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봉기할 권리 역시 갖는다는 사실을 암시했던 것이다. 만일 일군의 사람들에게서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권리, 인격적 존엄성이 박탈당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또한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니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그것은 우리가 맞서 싸우던 적과 우리를 똑같게 만든다)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형태는 우리가 알듯이 여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다. 이때 우리는 레닌의 <국가의 혁명>이 주는 교훈을 당당하게 되풀이해야 한다. 즉, 혁명의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그 교훈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필연적) 모순어법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는 국가형태도 아니다. 민중의 새로운 참여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숙청으로 사회의 전체 구조가 풍비박산 난 스탈린주의의 절정기에 새로운 헌법이 소비에트 권력의 ‘계급적’ 성격이 끝났음을 선포하고(과거에 배제됐던 계급 구성원들에게 다시 투표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정권들이 ‘인민민주주의’(이로써 사회주의 정권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다)라고 불렸던 사실이 꼭 위선이었던 것만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피대표자에 대한 대표의 구성적 과잉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는 소외를 최소화할 것을 전제로 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과 민중 사이에 재-현을 위한 공간이 최소화될 때에만 민중에게 책임을 질 수 있다. ‘전체주의’에서는 이 거리가 제거되고, 지도자가 민중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론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민중은 훨씬 더 그들의 지도자에게서 소외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결코 민주주의를 위하는, 그리고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단순한 이유를 시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는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간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사회적 내용’)이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 있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히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아돌프 히틀러 또한 어느 정도는 자유선거로 집권한 것이었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 선거로 집권한 급진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그에 따라야 한다.  

10. 05. 01. 

P.S. 아이티 혁명에 관한 책이 더 출간되면 좋겠다. 현재 소개된 건 <블랙 자코뱅>(필맥, 2007) 정도다. 아리스티드의 책도 더 나오면 좋겠고, 수잔 벅 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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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5-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 자코뱅의 저자인 제임스에 대해서는 앨릭스 갤리니코스<트로츠키주의의 역사>에 나오니 한번 참고하십시오.제임스 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로쟈 2010-05-02 23: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덧붙여, 아리스티드가 해제를 쓴 투생의 혁명론까지 '레볼루션' 시리즈에서 나왔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2024-04-04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첫 평론집 <눈먼 자의 초상>(문학동네, 2010)이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추천사도 썼기에 인연이 없지 않다(물론 책보다 저자와의 인연이 먼저다). 이렇게 적었다.   

평론가 복도훈 하면 떠오르는 건 비평고원, 쌍수대인, 안면도, 백민석 등이다. 그리고 종로. 아마도 종로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고, 그에게 처음 들은 말은 라캉이었다. 그는 문학평론가로 등단했고, 나는 가끔 그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놀랐다. 평론가 복도훈은 내가 아는 섬사람 복도훈과 달랐다. 복도훈이라는 비평기계 속에는 혹 꼽추 난쟁이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현대 철학과 이론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독해로 무장한 이 난쟁이는 그의 비평적 쟁투를 언제나 승리로 이끈다. 종언 이후의 문학, ‘산주검(undead)’으로서의 문학, 좀비로서의 문학과의 대결은 끝이 없을 것이기에, 그의 승리 또한 이제부터다. 

겸사겸사 몇 권의 평론집을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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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4-30 01:36   좋아요 0 | URL
...'거인의 무등에 올라탄 난장이'이기 때문에 '꼽추 난장이'인가요? 다른 의미가 있으신지 여쭤보고 갑니다. 잘 지내시죠?^^

로쟈 2010-04-30 01:43   좋아요 0 | URL
아,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나오는 난쟁이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30 10:59   좋아요 0 | URL
저는 개인적으로 문학평론 중에서는 권명아 선생님 글을 좋아한답니다.^^ 예전에 문화사회학 시간에 과제로 '문학권력논쟁'(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듯한..단어 쿨럭) 준비할 때, 몇 권의 책을 사서 읽었는데..그 이후론 도통 문학평론집을 못 읽어봤네요. 장바구니에 몇 권 담아봐야겠다는. 추천 고맙습니다.

anathema 2010-05-01 00:20   좋아요 0 | URL
'문학권력논쟁'에서 비논리적인 설득력 없는 주장을 했던 집단이 바로 위의 책을 발행한 문학동네였지요.

2010-04-30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1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장 얘기가 나온 김에 오래전에 쓴 자작시를 한 편 옮겨놓는다. 공장에 대한 기억은 오지 않을 미래처럼 아득하고 아련했다. 꽃나무 공장들, 그런 얘기를 써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꽃나무에 꽃이 핀다
동정 없는 세상에 굴뚝같은 마음으로 꽃이 핀다 

공장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그것들은 단단한 벽돌로 세워졌다
낮에도 밤에도 공장으로 가는 길은 복잡하다 공장으로 가는 길은 막다른  
골목이다 비둘기들은 한쪽 눈을 가리고 공장으로 간다
한때는 나도 공장에 가고 싶었다 

꽃잎이 눈처럼 쌓인다 폐차장에 버려지는 낡은 타이어처럼
꽃잎이 눈처럼 쌓인다 주인 없는 사진 속 시간의 먼지처럼

공장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연기에 가려 희끄무레하다
아버지는 내게 기름때 묻은 행복을 가르쳤다 너는 물위에 뜬 기름이다 너는  
이 세상 아름다운 빛이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그후 간간이 내겐 희끄무레한 일들이 일어났다

공장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어렴풋이 공장들만 보인다
아름드리 벚꽃나무 아래에서 네모 반듯하게 나는 반생을 살았다
이젠 고백한다 곧게 뻗은 전깃줄만 보면 나는 자꾸 매달리고 싶어진다
그때마다 감정의 소켓에서 전구를 갈아끼운다

한때는 나도 공장에 가고 싶었다……

꽃나무에 꽃이 핀다 굴뚝같은 마음으로 꽃이 핀다
낮에도 밤에도 공장으로 가는 길은 복잡하다 공장으로 가는 마음은   
막다른 마음이다 비둘기들은 오늘도 절뚝거리며 공장으로 간다  



10.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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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30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30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4-30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비바람 지나가는 봄날밤, 비장하고도 비장한 시로군요...
로쟈님의 서재에서 많은 도움 받으면서, 새롭게 정신의 긴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겁고 단조로운 북소리에 맞춰 꽃들이 굴뚝들로 세워지는 밤의 시대...


로쟈 2010-04-30 08:19   좋아요 0 | URL
너무 비장하게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온새벽 2010-04-30 0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사진의 공장(?)은 어디있는건가요?

로쟈 2010-04-30 08:17   좋아요 0 | URL
Abandoned Mill, Ripley, Michigan 1997, photo by Bill Schwab. 입니다.

펠릭스 2010-05-01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다른 마음','절뚝거리며','비둘기'->'공장'은 대량생산(공급),속도, 닫힌 공간,,,,낮은 산에 올라보면 강줄기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강둑 주위 논에 비닐하우스(식물공장,도시인에게 공급)가 많아 들판이 물에 잠긴듯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전자제품 생산라인을 견학적이 있었는데, 쉴틈이 없었습니다. 소음하며 일정한 작업시간 등 개인의 생각은 없는듯 했습니다.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꼈지요. 대량생산용 공장이 없던 시대의 지식인들이 조금은 이해되던데요. 시어중에 '막다른 마음'이 제게 들어옵니다.

로쟈 2010-05-01 10:07   좋아요 0 | URL
생산(production)공장과 생식(reproduction)공장을 둘다 암시하기 위해서 '꽃나무'와 '공장'을 병치시켰습니다. '막다른 마음'은 공통적이지요.^^;
 

새로 나온 책 가운데 '학출'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낚아놓는다. 오하나 지음, <학출>(이매진, 2010). 학출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을 가리키던 은어다. 목차를 보니 내가 대학에 들어올 때쯤은 '지식인 비판과 학생 출신 노동자 운동의 위축'이란 제목으로 정리돼 있는데, 내 기억에도 그렇다. 나는 '학출 이후' 세대다. 물론 지금은 학출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대가 됐지만. 내겐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와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때문에 가끔씩 떠올리게 되는 단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매진, 2006)와 함께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됨직하다.

한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학출’이라는 은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80년대는 대학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하던 시대였지만,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 안락함을 내팽개치고 은밀히 공장행을 택했다. 이 사람들이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바로 ‘학출’이다. 그때 그 대학생들을 이끈 동력은 사회의 모순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큰 ‘양심의 가책’과 시대의식, 그리고 투철한 신념과 의지였다. 그런데 그 많던 학출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저자의 문제의식인 듯싶고, 책의 의의는 이렇게 정리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후반 인텔리겐치아의 '브나로드운동'(과 그 실패)과 견주어볼 만하다('실패'라곤 하지만 학출 가운데는 현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가 된 이들도 있다).   

공장에 들어간 학출들은 신분을 숨기려고 ‘먹물’의 흔적을 없애는 데 집착한 나머지, 노조 결성 등 현장에서 하려고 한 계획들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채 한 명의 평범한 노동자가 되는 데 그치거나, 공장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거나 여기저기 떠도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가방끈 긴 ‘학삐리’들은 노동현장과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학출들이 노동자의 위에 서려 하거나 노동운동 경험을 정계에 진출하는 경력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학출이 노사 협상이나 파업을 이끄는 지도자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단순히 실무자로서 자기 활동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 결과 현재 노동운동에서는, 학출이라는 말이 저평가되어 ‘진짜 노동자’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학출들의 생성 요인에서 그 사람들이 가진 고민들과 사후 평가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한 뒤 노동운동의 반지성주의 경향도 지적하고 있는 <학출 ―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은, 학출과 80년대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요즘은 대학생이 아니라 기자들이 공장에 간다. 한겨레21의 '노동OTL' 기사를 묶어낸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은 네 명의 기자가 시급 4천원 노동 현장을 한달씩 체험하고 쓴 '노동일기'이다. 작년에 나온 <일어나라! 인권OTL>(한겨레출판, 2009)의 속편격이다. 책에 추천의 글을 쓴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출판, 2008)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단행본에 덧붙여진 맺음말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책 전체에서 소개되는 가슴 먹먹한 사연에, 가슴 답답한 현실에 “왜 이렇게 날 불편하게 하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이 뭐냐”라고 되묻는 독자들도 있다. 불편하고 막막하기는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재 이후, 임인택 기자는 말수가 줄었다. 임지선 기자는 식당 아줌마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는다. 전종휘 기자는 엄지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산재를 입고 수염이 덥수룩해져 돌아왔고, 안수찬 기자는 아직도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된 취재 끝에 얻은 작은 성과라면 이제 통계수치나 정책의 대상이 아닌 체온이 있는 ‘사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적힌 노동은 숫자가 아니다. 복잡한 정책도 아니다. 강력한 구호는 더구나 아니다. 다만 글로 옮기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은 왜 가난한 노동자인가. 그들은 왜 아무 말 없이 감정과 의견도 숨기고 닫힌 세계를 인내하는가. 노동의 문제를 구조와 제도로 치환하지 않고, 정책적 대안을 공연히 병렬하지도 않고, 오직 그들의 감정과 경험과 일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만 애를 썼다.

연재기사를 찾아 한창 읽고 있는 중이다... 

10.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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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4-29 12:57   좋아요 0 | URL
비슷한 범주의 책인,김원 선생님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전희경 선생님의 <오빠는 필요없다>을 소장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두 권 다 읽으면서 불끈불끈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을 줄 것 같네요. 한윤형이나 박가분 같은 친구들이 '활동가 시대의 종언'에 대한 의견을 넌지시 내놓은 걸 봤는데, 알라디너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주제를 던져줄 수 있는 책인 것 같아, 조용히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로쟈 2010-04-30 00:32   좋아요 0 | URL
<오빠는 필요없다>는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2010-04-29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3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4-29 19:00   좋아요 0 | URL
학출... 오랜만이네요.
활동가들이라고 모두 훌륭한 인생을 산 건 아니죠.
그 당시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를 이용해 한나라당에서 열라 뛰는 아그들 보면... 학출의 쪽팔림이 전해집니다. 이재오, 김문수... 그리고 박종철이 죽어가면서 지켰던 이름의 개새끼...

로쟈 2010-04-30 00:3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여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죠...

루체오페르 2010-04-30 00:36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가...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정말 대안은 뭘까요. 특별히 없는것 같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고 이미 개인의 의지,노력 차원은 떠난것 같거든요. 그래도 살아야지 이거인것 같습니다.

ps ; 뜬금없지만 로쟈님은 혹시 속독법 같은것 배우신적 있으신가요? 읽어내시는 책,기사 합해 텍스트의 양이 어마어마한것 같은데 그걸 다 읽고 이해해서 출력하실려며 상당히 빨라야 할것 같거든요. 요즘 글 읽는 속도와 양에 대한 생각이 좀 들어서 궁금합니다.^^;

로쟈 2010-04-30 00:40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때 조금 독학하다가 말았습니다. 속독'법'은 아니고, 피치못할 때 발췌독은 하지요. 그래도 허겁지겁 읽는 것보다는 느리게 읽는 걸 선호합니다. 그리고 서평기사를 읽는 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작성해볼 필요가 있는 '차가 현상서'(<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를 보니 '집을 임대해 들어가고 나올 때 집의 상태를 점검하는 보고서'를 뜻한다고 한다)에 또 하나 기입되어야 할 항목은 '부동산'이다. 문제의 윤곽을 그려주고 있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실상은 '손낙구의 세상공부'(http://blog.ohmynews.com/balbadak/)도 참고할 수 있다...  

경향신문(10. 04. 29) 부동산 정치와 자산 계급사회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두고 또 ‘집’이 세간의 화제다. 집 문제는 정치적으로 복잡하다. 집값이 오르길 바라는 계층, 내리길 바라는 계층이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모양이다.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고 무주택자의 환심을 사는 것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보금자리주택으로 수도권의 무주택 중산층을 현혹하고, 다른 한편으론 다양한 거래활성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 정책들엔 공통분모가 있다. 부동산에 대한 욕망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정치’다. 대략 2006년부터 부동산 정치는 수도권 중산층, 나아가 한국정치 전반을 보수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삶 좌우하는 ‘집’의 힘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은 주거, 자산, 자본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사적 자산과 자본의 성격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집’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부동산 불평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걸까? 룩셈부르크 부(富) 연구 그룹(LW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계자산 중 실물자산 비중은 이탈리아(85%), 핀란드(84%) 등이 한국(80% 내외)보다 높고 캐나다(78%)나 스웨덴(72%)도 꽤 높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금융자산 비중이 40%나 되는 나라의 사례를 일반화할 수 없다. 나아가 많은 선진국에서도 자산 불평등도는 1980년대 이래 상승 추세라서 한국보다 불평등도가 높거나 비슷한 수준의 나라도 많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집’에 웃고 울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임금소득과 사회보장, 각종 공적 인프라에 의해 인간다운 삶의 ‘기본’이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는 한국보다 소득분배가 훨씬 더 평등하다. 또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적 사회보장 지출의 비중을 보면, 한국은 5% 수준인데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은 24%에 이른다.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많은 나라에서 전체 주택 중 공공임대주택의 비중은 20~40%나 된다. 한국은 겨우 5% 수준이라서 사회적 낙인효과까지 있다.

고용과 소득, 사회보장이 삶의 기본을 충족시켜주는 곳에선 누가 궁전에 살든 일반인들이 마음 쓸 바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사정이 다르다. 일자리는 불안하다. 임금 격차도 벌어진다. 퇴직연령은 당겨진다. 자영업은 망하기 일쑤다. 교육비는 감당이 안 된다. 자식의 경제적 독립도 늦어진다. 고령화로 살기는 오래 산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공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어디선가 ‘돈’이 나와야 한다. 어디서 나올 것인가? 자산이다. 



유럽 공공임대주택 비중 20~40%
그래서 중산층은 온 힘을 다해 집을 사고 주식·펀드로 돈을 불리려 하지만, 부채나 금융시장 리스크를 떠안고 산다. 불안이다. 자산 하위계층은 여유자금이 없고, 부채비율도 높은 데다, 공금융기관에 접근할 수도 없어 인생이 제자리걸음이다. 절망이다. 하지만 상위계층은 자본과 정보가 풍부하며, 위기를 견디고 이용할 재력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집과 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이런 자산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의미는 커지고 있다. 실로 ‘자산 계급사회’라고 부를 만하다. 자산 계급사회는 부동산 불평등, 투기적 금융시장, 고용불안과 소득격차, 열악한 사회보장, 투기적 산업구조의 문제가 얽혀 생겨난다.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을 도구화하는 부동산 정치가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을 개혁할 비전과 정치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실패한다면, 부동산투기가 금융투기로 전이될지언정 자산에 따라 삶의 질과 노후, 자식의 계급까지 결정되는 잔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신진욱 | 중앙대 교수·사회학

10. 04. 29. 

P.S. "대략 2006년부터 부동산 정치는 수도권 중산층, 나아가 한국정치 전반을 보수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진단과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을 도구화하는 부동산 정치가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을 개혁할 비전과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처방에 모두 공감한다. "거기에 실패한다면, 부동산투기가 금융투기로 전이될지언정 자산에 따라 삶의 질과 노후, 자식의 계급까지 결정되는 잔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선거 이후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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