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 이후에 한동안 뜸하던, 일본 사상계의 거물('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이 이번주에 출간됐다. <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휴머니스트, 2011). 제목 그대로 전쟁을 사이에 두고 20여 년간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내친 김에 '마루야마 마사오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는다.   

 

참고로, 책의 의의에 대해서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렇게 정리해준다.  

이 책에는 마루야마 자신이 ‘본점’이라고 표현했던 정치사상사를 다룬 글들과 그가 ‘야점’이라고 표현했던, 사회 현실에 대한 발언을 담은 글들이 시간 순서대로 실려 있다. 또 문학·영화·음악과 같은 교양 일반에 대한 마루야마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글들도 있다. 글의 형식도 다양하다. 전형적인 논문형 글에서부터 서평·단상·대화문·강연문·일기문까지 여러 형식의 글들이 망라돼 있다. 이 책에 묶인 글들이 모두 수집된 것은 1957년이었는데, 1976년에야 세상의 빛을 보았다. 잡다한 형식과 내용 때문에 선뜻 내지 못했던 것인데, 출간 이듬해에 제4회 오사라기 지로상을 받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생각의 깊이와 식견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엄격한 학술논문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글쓴이 사유의 현장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적 구조물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재들이 널려 있는 건축 현장의 마루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루야마가 사상사 연구자를 “다양한 성격으로 분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배우의 작업”이라고 말하는 짧은 글이 그런 경우다. 사상이라는 것은 개념이나 논리만으로는 알 수 없으며 사상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 사상을 낳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내면을 추체험해야 한다는 얘기다. 배우의 자세로 사상가들의 내적 삶을 생생하게 살아보는 것이 마루야마의 사상 이해 방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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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 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의 기원과 사유의 근원을 읽는다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2월
35,000원 → 31,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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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마루야마 마사오.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김석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9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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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총력전 체제와 전후 민주주의 사상
나카노 도시오 지음, 서민교.정애영 옮김 / 삼인 / 2005년 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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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번역과 일본의 근대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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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3-06 11:56   좋아요 0 | URL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읽고 깜놀했습니다. ㅠㅜ
일본놈이라고 놀릴 놈들이 아니더군요. 200년 전에 그들의 번역 열풍은 지금의 인문학적 토양을 만들었던 거겠죠. 한국에선 번역 따위 대필자가 해주고 유명인이 이름붙이는 놀이인데 말입니다.

로쟈 2011-03-06 14:35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부분에선 왜 우리가 '경쟁의식'을 안 느끼는지 의문이에요...
 

온라인에서는 주로 '서평블로거'로 지칭되지만, 요즘 들어서 점점 블로거 노릇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물론 시간 부족에, 여유 부족이다. 쏟아지는 책에 견주어 책을 읽을 시간과 순수한 블로깅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에, 이런저런 상념과 블로깅 아이템은 줄지 않거나 심지어 늘기까지 한다. 그 사이가 벌어지고 있기에 어려운 것이고, 엄살을 조금 보태면 '죽을 맛'이다. 게다가 언제까지 '블로거 노릇'을 할 거냐는 내면의 투정도 가끔은 '경고'로 들린다.   

예전 같으면 오늘 같은 주말에 약간은 여유를 내서 좀 '재미있는' 글도 올려놓고 하는 것이 기분전환 거리였지만 지금은 손도 굳었을 뿐더러 의욕도 예전 같지 않다. 어제 이번주 <시사IN> 출판면의 '아까운 걸작' 란에서 프랑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 2003)에 관한 얘기를 읽다가 '품절된 책'들에 대한 페이퍼를 써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에너지'가 딸린다. 마치 사진 속의 보노보의 표정을 거울로 보는 듯하다.   

새물결의 조형준 주간은 이 책을 두고 "왠지 대단한 물건이 될 것이라는 나의 직감이 여지없이 빗나간 몇 권 되지 않는 책"이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검색해보니 이미 품절이다. 다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첫 운명을 다한 책인 것. 돌이켜보니 나도 출간 당시에 서점에서 들춰본 기억이 있는데, 너무 고가의 사진집이어서 엄두를 못낸 기억이 난다(당시에 35,000원이었으면 지금 체감으론 50,000원 이상이다). 그래도 예전보단 지금 자금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니 중고로라도 구해둘까 생각중이다.  

<보노보>란 책이 꼬투리가 돼 떠올린 책은 나폴레옹 샤농의 <야노마모>(파스칼북스, 2003)이다. 아마존 오지의 아노마모족에 대한 책이다. 이 또한 관심도서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로 구입하진 않았고 그래서 주저하는 사이에 품절된 책이다. 아예 출판사가 문을 닫은 듯하다. 다행이 이번에 찾으니 알라딘 중고샵에 책이 나와 있길래 바로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중고샵에서라도 구하려는 책의 하나는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생태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다. 저자의 책은 이후에도 여러 권 나왔는데, 하필 이 책만 품절 상태다(출판사의 사정이 어려운 것 같다는 인상은 든다). 아무튼 그때 그때 챙겨놓지 않으면 이렇듯 나중에 아쉬운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어떤 책이 있을까?

    

현재 가장 많은 뉴스를 쏟아내고 있는 지역이라면 중동일 텐데, 그런 시사적인 관심에서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아자르 나피시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한숲출판사, 2003)이다.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어디에 둔 줄 모르고 있으니 절반은 실종도서이고, 다시 구하려고 해도 이미 절판된 책이다(중고샵에는 나와 있다). 이란의 격동기에 테헤란에서 처음엔 대학에서, 나중엔 은밀하게 영미문학을 가르쳤던 저자의 체험담을 담고 있다.  

중동과 이슬람 지역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서 오늘 당일 배송으로 주문해 받은 책은 제럴딘 브룩스의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뜨인돌, 2010)과 하이다 모기시의 <이슬람과 페미니즘>(프로네시스, 2009)이다. 물론 이 두 권은 따끈따끈하거나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책들이다. 하지만 5년 뒤를 장담할 수 있을까?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보태자면, 이슬람, 조금 좁혀서는 이란의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새만화책, 2009[2005])부터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하기야 이미 널리 알려진 만화이고 많이 읽힌 책이니 나 혼자 '뒷북'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만화책을 선호하지 않는 탓에 안 읽고 있다가 이번 이슬람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읽게 됐는데, 기대 이상이어서 아예 저자의 <바느질 수다>(휴머니스트, 2011)까지 손에 넣었다...   

음, 써놓고 보니 '컬렉터의 일기' 같은 느낌도 주기에 '로쟈의 컬렉션'으로 분류해놓는다. 하긴 오늘 오전엔 지난 달에 모스크바에서 부친 책이 도착하기도 했다(절반 가량인 60권은 들고 들어왔었다). 보름이 걸린 셈인데, 5킬로짜리 여섯 꾸러미에 나눠 포장된 책 49권이다(대략 30만원 가량의 발송비용이 들었다). 꽂아놓을 곳이 없어서 방바닥에 쌓아두긴 했지만 마음은 그런대로 흡족하다. 이 책들에 대한 얘기도 늘어놓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힘에 부친다. 볕이 더 좋은 날을 기다려봐야겠다... 

11.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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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님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
    from 빵가게 재습격의 책꽂이 2011-03-05 23:16 
    요 몇 년간 매일진행되었던 행사(?)를 꼽으면 로쟈님 서재에 들리는 것이었다.내 서재엔 들어오지 않아도 로쟈님 서재는 하루에 한 번 꼭 들려본다. 나만 유별난 건 아닐거다. 알라딘 마을엔 저공비행에 '중독된 사람'들이 꽤 많을테니.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던 때를 되돌려보면 로쟈님이 유난히 바빠진 게 사실이다. 연재하는 글도 늘었다. 강연 소식도 늘었고 때때로 등장하는 책이나 번역물도 자주 눈에띈다. 좋은 일인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바쁜 일정때문에 생기
 
 
달담이와Anne 2011-03-05 22:45   좋아요 0 | URL
로쟈 선생님의 애환이 느껴져요. 음, 왠지 저도 함께 씁쓸하네요!
외딴섬에서 살아가는 저에게 선생님 블로그는 오아시스인데요.헤
빠이팅하십시오!아자!

로쟈 2011-03-06 10:08   좋아요 0 | URL
누구나 모든 일에서 겪는 피로와 푸념이지요.^^;

비로그인 2011-03-05 23:15   좋아요 0 | URL
음, 아, 저, 그.... 요즘 말할 때마다 이러고 있습니다 제가 ㅋㅋ
'보노보' 사진을 보니 정말 심난해지는군요.
'죽을 맛'이라시니 더 심난해지구요.
저야 저 만화의 여성처럼 꽥 소리라도 지르면 어느 정도 풀릴 일이지만
로쟈님의 상황은 그렇지 못한 듯싶어 또 심난해지네요... 에휴~

로쟈 2011-03-06 10:08   좋아요 0 | URL
그게, 음, 저, 엉덩이의 문제이기도 하군요.^^;
 

동네 도서관에 가는 길에 우편함에서 꺼내든 잡지는 <대산문화>(39호). '우리 안의 세계문학을 보다'란 기획특집의 한 꼭지를 맡은 인연으로 받은 것이다. 원고는 현재 붐을 이루고 있는 세계문학전집(혹은 세계문학총서)의 출간 현황과 그 특징을 살펴달라는 '무리한'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몇 가지 자료를 참고하여 '작문'한 글이었다. 마감을 한참 넘겨 보낸 것이라 퇴고도 못했는데, 지면에 실린 글에 맞추어 몇가지 교정해놓는다.    

대산문화(11년 봄호) 2011년 '세계문학 전쟁'  

바야흐로 출판계에는 ‘세계문학전집’ 붐이 일고 있다. 1998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세계문학전집’은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한번 지나간 유행의 반복처럼 보였다. ‘새 문학전집을 펴내면서’라는 간행사에서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는 세대론적 주장을 앞세운 것도 되짚어보면 ‘엊그제’ 전집과의 차별화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엊그제’에 해당하는 시기가 1960-70년대이다. 소위 ‘1차 세계문학전집 붐’이다. 1959년에 정음사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발간하면서 시작된 세계문학 전집 ‘바람’은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신구문화사, 삼중당, 범우사, 학원사, 일신서적, 동화출판공사, 삼성출판사 등 유수의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세계사상전집류와 함께 세계문학전집을 기획․출간했다.  

1960-70년대는 한국사회가 정치적으론 개발독재체제가 강고하게 구축되고 경제적으론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농업사회에서 수출 중심의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이농과 도시빈민이 양산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중산층과 소비문화가 형성되었다. 바로 이 중산층의 교양수요를 충족시켜줄 만한 ‘전집’의 수요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60년대에 새롭게 한국사회의 주역이 된 4.19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은 한글세대여서 일본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의 ‘수혜’를 받을 수 없었다. 우리말로 옮겨진 새로운 세계문학전집이 필요했던 이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시기의 전집은 기본적인 작품목록 구성을 일본판 세계문학전집에 의존했고, 번역인력이 한정돼 있어서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일역본에서의 중역도 많았다.  

19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고 연대였다. ‘80년 5월’ 이후 군부독재하의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문학 독서보다는 사회과학서적의 독서가 시대의 요구처럼 여겨졌다. 동시에 제1세계 서구문학에 편중돼 있던 ‘세계문학’ 목록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었고, 제3세계 문학과 제2세계 사회주의권 문학에 대한 관심이 불거졌다. 제3세계문학전집과 소련동구문학전집, 중국현대문학전집 등이 1980년대 말에 출간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이어진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한반도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고, 전집류 시장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때문에 90년대 말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이것이 한 마리 제비가 되어 세계문학전집의 새로운 ‘봄’을 가져오리라 점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출간 12년만인 2010년 6월 250권을 돌파하고 현재는 260종 이상이 출간되었다. 민음사 전집은 양적으로 풍성할 뿐 아니라 출판사 집계로도 700만부 이상 판매돼 상업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전집 시리즈로 평가된다. 비록 100권을 출간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 전집은 ‘세계문학’에 대한 한국독자들의 잠재적 수요를 일깨우고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뒤이은 전집 기획에 참고가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2차 세계문학전집 붐’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집’이라고는 돼 있지만 작품 목록이나 규모가 확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총서’ 형태라는 점도 이후에 나온 다른 세계문학전집들과 공통되는 면모이다.    

과거 세계문학전집 수록 ‘단골’ 작가들의 작품도 다수 들어 있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는 동시대의 거장들, 그리고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이 포함돼 있다. 2006년 오르한 파무크(파묵)부터 2007년 도리스 레싱, 2008년 르 클레지오까지 3년 연속으로 이 전집에 속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모두 40여 종의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며, 그중에는 1946년 수상자인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 가장 많다. 민음사에서 헤세 전집을 기획․출간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밖에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과거 세계문학전집이 외국문학작품으로만 채워졌던 데 반해서 한국문학작품도 간간히 포함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간행사에서 “<두시언해>가 단순한 번역문학이 아니고 당당한 우리의  문학 고전이듯이 우리말로 옮겨놓은 모든 번역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고 선언한 것에서도 시사된다. <삼국유사>와 <금오신화>, 그리고 <춘향전>과 <홍길동전> 같은 고전 외에도 이광수의 <무정>과 김승옥의 <무진기행>, 그리고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등 현대작가의 작품이 세계의 명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작품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라고 하는데, 35만부 이상 판매된 걸로 알려진다. 그밖에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숄로호프의 <인간의 운명>(<숄로호프 단편선>),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불멸> 등 다수 현대 작가의 작품들이 국내에서는 ‘정본’ 번역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복 번역돼 있는 고전 작품들보다는 다른 전집들에서는 읽을 수 없는 이런 현대 작품들이 각 세계문학전집의 특징과 성격을 더 분명히 해줄 것이다.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가 펴내는 대산세계문학총서는 2001년 18세기 영국작가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를 시작으로 그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10년만인 2010년 말 이탈리아의 문호 루이지 피란델로의 <나는 고故 마티아 파스칼이오>을 출간함으로써 통권 100권을 돌파했다. 대중적인 고전작품들의 목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민음사 전집과는 달리 대산총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명작들을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상업성보다는 문학적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인데, 프랑스 중세 작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발칸의 작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 터키 작가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동독 출신 작가 잉고 슐체의 <새로운 인생> 등 다양한 언어권의 문제작들이 망라돼 있다.   

중복 번역을 가급적 배제하여 90% 가량이 국내 초역 작품이라는 점이 대산총서의 최대 강점이자 의의이다. 더불어, 괴테의 <서동시집>과 하이네의 <노래의 책>, <로만체로>,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말라르메의 <시집>,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여성시인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 등 다수의 시집과 실러의 <돈 카를로스>, 크리스토퍼 말로의 <탬벌레인 대왕 외>,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외> 등의 희곡집은 소설 편중으로 구성돼 있는 다른 전집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중국문학의 고전 <서유기>(전10권)를 가장 권위 있는 판본으로 읽을 수 있고,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 살티코프 셰드린의 <골로블료프가의 사람들>, 그리고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 등의 러시아문학 고전들은 오직 대산총서를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의 매력이다.    

 

2002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은 이름 그대로 문고본 총서이다. 기간에 비해서는 40여 권의 분량이 다소 왜소해 보이는데, 각 언어권별 안배를 통해서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점은 눈에 띈다. 첫 권이 한국작가 장용학의 작품집 <요한 시집 외>라는 점도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통념에 견주어 상당한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중국 청나라 시대의 소설 <부생육기>와 스페인의 극작가 칼데론의 희곡집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외>,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 미국의 포스트모던 작가 도널드 바셀미의 <백설공주>, 동유럽 작가 다닐로 키슈의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프랑스 현대시인 프랑시스 퐁주의 <테이블> 등 다른 전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작품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러시아문학작품이 여러 편이 애호가들의 눈길을 끄는데, 러시아 혁명의 목청 노릇을 했던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시선집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상징주의 작가 솔로구프의 <작은 악마>도 필독할 만한 작품이고, 특히 20세기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의 희곡집 <조야의 아파트/질주>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집 <귀향 외>는 러시아 최고 수준의 희곡과 단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책세상 전집만의 특징은 말미에 부록으로 수록된 ‘작가와의 가상 인터뷰’인데, 건조한 해설 대신 인터뷰 형식을 취한 것은 보기 드문 흥미로운 시도이다.   

작품 해설만으로 평점을 주자면 가장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전집이 ‘펭귄클래식’ 시리즈이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펭귄북스사와 합작하여 출범한 이 전집은 2008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로 첫걸음 내딛은 이후 2010년 12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단기간에 100권을 돌파했다. 펭귄북스사와는 작품 및 작가 선정, 편집 원칙, 디자인, 마케팅 전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용을 공유한다고 하는데, 전 세계 펭귄클래식 시리즈와 함께 언어의 장벽을 넘어 공통의 독서 장으로 초대받는다고 할 수 있다. 특별판으로 나온 <시학>을 예로 들자면, 프랑스의 쇠이유출판사판을 대본으로 삼았는데 본문의 몇 배에 이르는 자세한 주해가 붙어 있어서 일반 독자뿐 아니라 전공자에게도 좋은 참조가 되도록 해놓았다. 이미 국내에 희랍어 원전 번역본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펭귄클래식판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점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작품들에서도 두드러지는데,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모두 권위 있는 전공자들의 작품 해제를 포함하고 있어서 독자로선 작품 번역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작품 해설’도 읽는 기회를 갖게 된다. 또 다른 특징으론 다양한 독자층에 대한 배려를 들 수 있는데, 어린이와 청소년이 읽을 수 있는 작품에서부터 성인 독자를 위한 작품까지 다양한 목록의 작품들이 망라돼 있으며, 영화와 뮤지컬의 원작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군주론>과 <자유론>, <논어> 등 인문고전들도 시리즈 목록을 채우고 있는 것 또한 펭귄클래식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한국문학 출판의 강자인 문학동네는 다소 뒤늦게 세계문학전집 출간에 나섰다. 장기간에 준비 끝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머리로 하여 1차분을 내놓은 것이 2009년 12월이었고, 2011년 2월 현재 60여권의 책이 선보였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조지 오웰의 <1984> 등 세계문학전집의 ‘단골 레퍼토리’도 포함돼 있지만, 발자크의 <나귀가죽>이나 <루이 랑베르>,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등 거장들의 초역 작품도 다수 포함돼 있는 것이 문학동네 전집의 특징이다. 또한 르 클레지오, 엘프리데 옐리네크, 오에 겐자부로, 헤르타 뮐러, 바르가스 요사 등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다수와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 등 동시대 거장들의 작품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환상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이즈미 교카의 <고야산 스님 외>와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 사샤 소콜로프의 대표작 <바보들을 위한 학교> 등은 앞으로도 계속 누적될 문학동네 전집의 목록을 궁금하게 만든다.    

세계문학 ‘전문’ 출판사 열린책들의 세계문학전집은 새롭게 시작됐다기보다는 새롭게 재구성됐다. 2006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미스터노 세계문학’ 시리즈를 2009년 말 ‘열린책들 세계문학’으로 확장․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이후 1년 남짓 동안 160권의 목록을 채우는 ‘저력’을 선보였다. 열린책들의 ‘간판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러시아작가 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 쿤데라가 격찬한 오스트리아 작가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등은 열린책들 전집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필두로 출간돼 40권의 목록을 채우고 있는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은 진중한 작품목록과 점잖은 격조가 장점이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같은 작품이 이 시리즈이 ‘서프라이즈’이다.  

그밖에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으로 출발한 시공사의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는 아직 적은 권수이지만 나름대로의 빛깔을 조금씩 펼쳐 보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인문서를 주로 내온 새물결에서도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작가 토머스 핀천의 문제작 <중력의 무지개>를 필두로 중량감 있는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정도면 가히 ‘세계문학 전쟁’이라 할 만한데, 다행스럽게도 독자로선 즐거운 전쟁이다!  

11.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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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5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전집의 역사네요.민음사 책세상 문학동네 순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양과 비교하니까 재미있어요.

로쟈 2011-03-06 10:10   좋아요 0 | URL
분량상 급하게 마무리한 글이었습니다. 재미있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Mephistopheles 2011-03-05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코 샀던 책들 중에 전집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더 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갈등을 제공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지르진 않았고요..^^)

로쟈 2011-03-06 10:11   좋아요 0 | URL
저도 안 갖고 있는 책이 부지기수입니다.^^;

비로그인 2011-03-0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아놓고 보니 정말 많군요! 게다가 미처 몰랐던 각각의 특장까지 짚어주시니 저 많은 책이 한눈에 들어오는 기분인걸요 ㅎㅎ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다시 나왔군요. 예전에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서 봤었죠 아마. 즐거운 전쟁! 맞네요 ㅎㅎ^^

로쟈 2011-03-06 10:1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저도 기다렸던 작품 중의 하나였어요. 그래서 나오자 마자 사들었죠.^^

cyrus 2011-03-0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의 특징에 대해서 한눈에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덕분에 새물결에서 토머스 핀천의 소설이 나온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11-03-09 07:41   좋아요 0 | URL
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는 올봄에 나오지 않을까 싶고,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3-0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를 위시해 편집위원 대부분이 서구문학 전공자인 걸 보면 전집들이 지나치게 서구문학만 담고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저는 중문학과 일문학을 좋아하는데 그나마 대산세계문학총서에 작품들이 끼어 있어 아까가며 읽어가고 있습니다. 민음사 전집에 현대 중문학은 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 한 권 뿐이네요. 그가 노벨상을 받았기에 그나마 끼었겠죠?
일목요연한 정리 잘 봤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 <창작과비평> 봄호에서도 세계문학에 대해 대담하셨던데 그 대담도 의미깊게 읽었습니다.

로쟈 2011-03-09 07:44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서구문학 편향은 세계문학전집의 '고질'이죠. 그래도 문학동네 전집엔 일본문학이 심심찮게 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번역자 풀이 문제인데, 제3세계라면 모를까 일문학/중문학쪽은 앞으론 갈증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3-09 14:55   좋아요 0 | URL
<창작과비평> 대담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중국현대문학은 '대표급'만 번역되니 전집에 끼기도 전에 번역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옥석 가리기야 독자들 몫이니 다종다양한 중국문학을 읽어보고 싶네요^^

지구별여행자 2011-05-05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출판사와 달리, '동서문화사'는 웬만한 작품은 한 권으로 펴낸 데다 가격까지 싸더군요. 외려 가격이 싸니, 완성도에서 떨어질 거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람 마음이란...

로쟈 2011-05-05 19:04   좋아요 0 | URL
예전판을 다시 찍어내서 그런데, 그러면서 값을 2배 이상 올려놓은 출판사도 있으니까 그래도 저로선 다행이라 여기는 편입니다...
 

20대 때 비평집을 즐겨 읽던 관성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가끔씩은 챙겨두곤 한다. 가장 최근에 챙긴 건 김영찬의 <비평의 우울>(문예중앙, 2011). 첫 비평집 <비평극장의 유령들>(창비, 2006)로 화려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던 저자의 두번째 비평집이다(제목과 달리 비평가는 유령이 아니었다!). 표제가 된 비평문이 따로 없으므로 '비평의 우울'은 책을 내면서 붙여진 것이겠다. 비평의 우울이 '비평가의 우울'로도 전염되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던 비평집을 읽는 일은 전혀 우울하지 않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강, 2010)에 대한 마지막 글의 제목을 따자면 '세속비평의 즐거움' 그대로이다. 좀 희한한 일인가?..

한국일보(11. 02. 26) 불화와 대결의 자의식이 타오르는 순간 희망은 되살아나리… 

"요즘 한국 문학에 현실적 주제를 치열하고 역동적으로 그린, 수준 높은 장편소설이 없다"는 소리는 문단 바깥의 푸념만은 아니다. 장편소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근대문학이 아예 끝났다는, 가리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최근 수년간 문학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희망을 잃고 떠난 이도, 실천적 관심을 잃은 작가의 역량을 탓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겠는가, 우리 사회가 치열하고 수준 높지 못한 걸. 소설이란 불가피하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문학평론가 김영찬(46ㆍ사진) 계명대 교수가 새 비평집 <비평의 우울>에서 전하는 얘기가 그렇다. "지금 한국 소설은 그렇게 한국 사회의 '정상적 실패'의 증거로서 그 자신의 실패를 음미함으로써, 제 각각의 우울을 앓는다"(7쪽)는 것이다.

<비평의 우울>은 2006년 <비평극장의 유령들>로 현대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동시에 받았던 김 교수가 5년 만에 내놓은 비평집. 2000년대 후반 한국 문학, 특히 근대문학의 핵심 장르인 장편소설이 부딪힌 막다른 길을 진단하고 있는 그의 시선을 요약하면 '직시(直視)의 비관'이다.

그는 한국 소설이 세계와의 대결 의지를 잃고, 심지어 자본과 제도의 알리바이로도 기능하면서 현실과의 긴장을 놓친 자기 충족적 세계에 갇혀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극히 비관적이다. 소설 내적으로 봐도 "인물은 단면적이고 세계는 협소하며 의식은 추상적이다"(41쪽). 요즘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그의 평가도 인색하다.

그러나 이를 작가의 역량 탓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물로 본다는 점에서 냉정하다.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한국 사회 자체가 근대문학의 정신적 동력인 '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린 데서 장편소설의 사망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근대문학의 죽음을 인정하며 그 뒤의 문학을 모색하고 있지만 김 교수가 젊은 작가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여전히'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로서 대결의 자의식'이다. 그는 "최근 신인들의 소설에서 한국 소설이 잊었던 불화와 대결의 자의식이 조금씩 힘겹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한국 소설에 대한 조심스런 낙관을 그래도 놓지 않아야 할 이유"라며 한 가닥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의 부활을 염원하면서 죽은 근대문학의 유령을 호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선상에서 책은 강영숙 편혜영 권여선 김사과 천명관 박민규 김애란 전성태씨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피며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짚고 있다. 

11. 03. 04.  

P.S. 저자는 지난해 복간된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문예중앙>(2011년 봄호)의 특집은 '문학이란 何오'(1916년 이광수가 묻고 답했던 질문이다)이다. 11명의 필자가 이 질문에 응했는데, 나도 그 중 하나다('문학들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을 달았다). 권여선, 박민규 두 작가의 대담과 함께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시네마 노트'도 첫회분이 실렸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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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평의 우울과 비평가의 과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2 00:10 
    며칠 전 올해 팔봉 비평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됐다. 오래만에 갖고 있는 비평집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 김영찬의 <비평의 우울>(문예중앙, 2011)이 그것이다. 최종심에서 같이 거론된 평론집은 조강석의 <겸험주의자의 시계>(문학동네, 2010)와 소영현의 <분열하는 감각들>(문학과지성사, 2010)이었다.수상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1. 05. 09)"비평의 질 심화와 문학교사 역할 병행이 과제""비평이
 
 
달담이와Anne 2011-03-0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은 단면적이고 세계는 협소하며 의식은 추상적이다."
꼭 저를 말하는 듯 하네요. 음.

로쟈 2011-03-06 10:09   좋아요 0 | URL
음, 소설적인 삶인데요.^^
 

건축전문잡지 '공간'(520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김동일의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갈무리, 2010)을 읽은 인상을 적었다. 모스크바에서 쓴 리뷰 중의 하나로 기억에 남는다. 책은 주로 딱딱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어서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란 제목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걸 서두로 삼았다.    

 

공간(11년 3월호)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사회 속의 예술(art in society)’을 다루는 책의 제목으로는 특이하다. 김동일의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 주는 첫인상이다. 저자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가를 유혹하는 것은 이제 사회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예술보다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이다.”이라고 서두에서 미끼를 던지는데, 정작 그렇다면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인 사회가 예술보다도 더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예술과 사회란 이분법을 지양하자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제안이고 보면 제목만으론 초점이 모호하다.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란 부제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저자가 동원하는 핵심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책의 구성은 광범위한 ‘문화읽기’보다는 ‘미술읽기’에 한정된다. 미술과 미술사, 미술관, 미술시장 등을 폭넓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책은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의 결과이므로 자연스레 ‘예술사회학’으로 분류된다. 예술 속에 사회가 어떻게 반영돼 있는가를 묻기도 하고,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소통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저자는 이 가운데 특별히 ‘스타일의 사회학’을 주창하며 강조한다. 왜 그런가. 스타일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토대이자 그 본질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곧 예술이라면, 예술사회학은 달리 스타일의 사회학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스타일을 ‘사회적 실천’과 그 ‘맥락’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며, 이를 설명하는 데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최적이라고 판단한다. 부르디외의 ‘장’이나 ‘아비튀스’ 개념을 적용하면 스타일이 갖는 실천의 논리와 맥락을 정교화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제안이다. 그래서 부르디외의 용어들을 ‘스타일장’과 ‘스타일 아비튀스’이란 말로 새롭게 개념화한다. ‘성향의 체계’를 뜻하는 아비튀스는 스타일 행위의 보편성과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사회적 공간으로서 ‘스타일장’의 지형과 역학은 개별 스타일행위자들에게 가능한 실천의 범위를 제공한다.   

이렇게 정립된 개념들을 예술에 적용하면, 스타일 실천자로서 예술가를 ‘주관적 천재’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공간의 ‘합리적 행위자’로 앉힐 수 있게 된다. 가령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백남준의 미학적 성취 역시 그것이 가능하게 한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발한 걸작을 생산한 광기 어린 전채가 아니라, 정확하게 예술장이라는 사회적 공간 속에서 미학적 실천의 방향성을 설정해 나간 사회적 행위자”라는 것이 백남준에 대한 그의 평가다.  

이러한 이론적 관점을 저자는 미술사, 구체적으론 전후 한국화단의 스타일장에도 적용한다. 그에 따르면 “전후 한국화단에서 벌어진 추상과 구상의 투쟁은 곧 사회공간의 정치적 영향을 스타일장 내의 특수한 내기물을 놓고 벌어진 인정투쟁으로 변환하는 과정인 동시에 결과”였다. 기존의 비평이나 미술사 기술에서는 스타일 투쟁을 소수 선구자의 미학적 성과 정도로 바라보는 데 반해서, 저자는 스타일장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 투쟁이 포괄적 스타일 네트워크 사이의 투쟁이라는 걸 보여준다. 현대미술가협회 같은 단체가 사회 변동에 대응하여 스타일장에서 변환의 주체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군의 비평가들이 추상스타일에 미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옹호했다. 전후 스타일 전쟁이 구상에 대한 추상의 승리로 귀결됐다면, 그것은 “추상 네트워크 내에 수렵되는 자원의 범위와 강도, 효율성이 구상스타일의 그것을 압도했음을 의미”한다. 

스타일과 함께 저자의 예술사회학을 지탱하는 키워드는 ‘일상’이다. 그는 미술을 일상적 실천이자 일상적 놀이로 본다. 이 놀이의 공간은 미술관, 화랑, 작업실, 강의실 등이며, 작가, 큐레이터, 미대 교강사, 문화부 기자, 미술사가, 평론가, 미대재학생, 관객, 독자들이 그 놀이의 참여자들이다. 미술이 곧 일상적 실천이기에 일상과 미술의 구분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이 환영과 일상/예술이라는 이분법이 유지되는 주된 근거로 저자는 미술관의 존재를 든다. 일상과 미술은 원래 한 몸이지만 미술관이 이 한 몸에 작위적인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육체와 두뇌(기획력)을 갖춘 ‘위험한 실천자’로서 미술관은 제도적 권위와 자본주의 논리의 작동을 대리하며 아주 특별한 어떤 것들만 예술로 규정한다. 다분히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상과 미술 사이에 미술관이 쌓은 거북스런 경계를 낮추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술관의 존재 자체를 되묻게 하는 ‘게릴라적인 미술관’이 그의 대안인데, “이건 물론,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정통하면서도, 일상에 투철한 게릴라들이 잔뜩 힘이 들어간 딱딱한 미술관 제도에 틈입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의문이 없는 건 아니다. 일상에 투철하면서도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정통한 ‘일상인’은 가능할까, 라는 것이다. ‘사회학을 유혹하는 예술’에 사회이론으로 대응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독자를 유혹하는 사회학’이려면 일상과 딱딱한 논문 스타일의 경계를 좀 더 낮추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11.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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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307 2011-03-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현우님이 로자였군요..기자님한테 연락받고 <공간>지를 구입해서 잘 보았습니다..보잘 것 없는 책을 자세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로자님에 관한 얘기는 여러사람한테서 듣고 있었습니다..제 책에 대한 몇가지 반응에 대한 반론은 따로 준비하고 있습니다..여기는 제목에 대한 로자님의 지적과 관련해서 몇가지 생각만 적어 볼려구요..



"저자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가를 유혹하는 것은 이제 사회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예술보다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이다.”이라고 서두에서 미끼를 던지는데, 정작 그렇다면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인 사회가 예술보다도 더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예술과 사회란 이분법을 지양하자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제안이고 보면 제목만으론 초점이 모호하다.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란 부제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저자가 동원하는 핵심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책의 구성은 광범위한 ‘문화읽기’보다는 ‘미술읽기’에 한정된다. 미술과 미술사, 미술관, 미술시장 등을 폭넓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첫째는 로자님이 지적하신 '사회' 개념에 관해서인데요..제가 이 책에서 말씀드리려는 '사회'란 두가지입니다..동시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당대 한국의 사회공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만..제가 앞 부분 논고에서 강조한 사회는 사실 부르디외적 관점에서 촛점이 되고 있는 '장'입니다..장은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입니다..'예술장'..'스타일 장'..'장으로서의 예술계'가 그것들입니다..동시대 예술의 상황은 곧 장의 논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그러려면..일단..이 개념부터 규정해야 한다는 판단입니다..물론..한국의 모순적 사회공간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데..이건 참 난해한 일입니다..로자님의 말처럼 사회공간에 작동에 관심을 둔다면..이 책은 그저 사회비평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구요..'사회'를 포괄적인 당대사회공간으로 규정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 실천과 관련하기 위해서는 '장'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될 듯 합니다..



둘째는 '미술읽기'가 더 낫다는 지적과 관련한 것인데요..이 역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지만..제 입장은 '문화읽기'가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사실 '미술'이란 단어는 정체조차 의심스러운데요..영어로 번역하면 art, 혹은 fine art 일텐데..굳이 예술과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그렇다면..굳이 앞서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에 이미 반영된 단어를 중복해서 쓸 이유는 없을 듯 합니다..제가 '미술읽기'보다 '문화읽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첫째는 기존의 미술 개념에 제도는 포함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미술개념이란 좀 더 순수한 예술적 실천과 그 결과물에 한정되어 사용됩니다..대략 미술의 역사란 작품, 작가, 스타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다루는 제도로서의 장의 요소들은 그저 '미술'개념에 한정되기 어렵다는 판단입니다..반면, 문화는 '이념'의 역사이면서 '제도'의 역사라는 점에서 좀더 포괄적인 설명범위를 가지고 있구요..둘째..제가 미술보다 '문화'를 선호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제가 설명하려는 내용들이 직접적으로 예술이라는 좁은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궁극적으로는 장-아비튀스에 대한 분석이 로자님이 전공하시는 문학이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문화사회학이라는 정체성 아래서 예술을 다루지만..예술이 문화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있지 않거든요..



아..마지막으로..문체에 관련한 지적에 관해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이 책은 '논고', '에세이', '작가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로자님의 서평은 주로 '논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반면..에세이나 작가론은 조금 더 쉽게 읽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논고편은 말 그대로 논고로 읽혔으면..합니다..그저 막연한 흥미가 아니라..'스타일' '미술관' '한국현대미술사' '실천' 등 기존 예술학의 지평을 참조하면서 또 다른 설명을 요구하는 문제에 접근할 때 아무래도 논고의 형식이 더 낳지 싶습니다..물론..'논고' 뿐 아니라 '에세이'나 '작가론' 역시 그리 쉽게 읽히는 글쓰기는 아닙니다만..그런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비평의 자율성'이란 에세이 항목에서 미약하지만..조금 피력해 두었습니다..



로자님의 서평을 받은 일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만..제가 이 책을 통해 평가받고 싶은 내용을 다소간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도 다소간 있습니다..특히 서평의 몸통에 해당하는 이 책의 내용에 관해서 정작 아무말씀도 않으셨더라구요..사실..저자로서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이었고..반응을 듣고 싶은 부분들이기도 합니다..혹여 일부러 지적 않하셨을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기회가 되면..그런 점들에 관해 로자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이거 서평을 서평한거 같아 죄송합니다만..저도 앞으로 로자님의 저작들에 관해 관심을 갖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로쟈 2011-03-09 07:39   좋아요 0 | URL
서평 때문에 책까지 구입하셨군요.^^; 제목과 관련해 말씀드렸던 건, '사회 속의 예술'로 충분한데, '예술을 유혹한 사회학'이란 건 좀 모호하다는 거였구요(사회학을 주제로 삼은 예술이란 뜻으로 들리니까요), '문화읽기'에 대한 지적은 부르디외의 방법론이 문학이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겠지만, 책에서는 미술에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포괄적인 부제다 싶었습니다(제목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염두에 둔다면요). 아, 문체에 대한 지적은 단순히 책의 주력이 논고(논문)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교양서라기보다는 학술서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인상을 적은 것이구요, '몸통'에 대해 제가 다루지 못해 죄송합니다.^^; 12매란 분량은 한두 가지 관심사만 다루는 것 정도로도 다 차기 때문에요. 개인적으론 단토와 부르디외를 비교한 장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본격적인 서평은 미술전문잡지나 학술지 등에서 다뤄지길 기대해봅니다...

kdi307 2011-03-1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엥..'사회속의 예술'으로 충분하다뇨..이거 참..'책을 읽을 자유'의 저자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뇨..전 그냥 '로자의 책읽기'보다 낫던데요..제목에 관해서 더 부연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저도 몇군데..서평을 써야할 입장이어서 요즘 좋은 서평이 무엇인지 생각하고있습니다..로쟈님의 작업도 참조하고 있구요..그런데..정말 힘든 일이더군요..저자의 의도에 다가서면서도 어느지점에선가 독자의 입장에서..재구성하고 또다시 의문해야하고..짧은 글일수록 더 많이 고민해야 하고..

로쟈님께도 저자와 독자를 유혹하는 서평 기대해 봅니다..저자는 서평의 가장 중요한 독자 가운데 하나거든요..

좋은 의견 감사드리구요..기회가되면 인사드리고 '단토 대 부르디외'에 의견도 듣고 싶네요..

참..잘 알고 계시겠지만..<공간>은 단순한 건축잡지가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한국 문화예술 분야 최고권위의 전문지입니다..기회가 되시면 메타서평론..혹은 서평의 논리와 윤리에 관한 참조할 만한 전문서를 써 주시면 서평을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을 것 같아요..이 분야에는 아직 실천적인 전문서들이 많지 않은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1-03-11 11:23   좋아요 0 | URL
흠, '사회 속의 예술'은 책의 표지에 영어제목처럼 붙어 있는 'art in SOCIETY'를 옮긴 건데요. 부정확한(불충분한) 번역인가요?

kdi307 2011-03-1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정확한 것은 아니지만..제 의도를 전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냥 카피 정도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사회 속의 예술'에는 SOCIETY를 대문자로 놓고..art를 소문자로 놓은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거든요..공식적인 제목에도 뺐구요..사회란 예술 밖에 있기도하지만(사회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예술 속에 있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예술장이란 의미에서) 사회학은 예술 안과 밖에서 작용하는 사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생각이구요.."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은 생각보다 특이한 제목은 아닙니다..적절하게 괄호치기를 하면..결국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고 결국 "책은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의 결과이므로 자연스레 ‘예술사회학’으로 분류된다"는 로자님의 지적과 일치합니다..다만..그 제목이 기존의 예술학이나 사회학의 지평에서 그닥 설명되지 않았던 지점에 이 책을 두려는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뿐 이죠..유혹이라는 부분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리자면..예술이 더이상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예술학은 사회학적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고..그런 의미에서 예술학 종사자들에게 이 책의 내용이 도움(일종의 유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예컨대 '단토를 부르디외적으로 독해할 때 단토가 단토 자신보다 더 단토스럽게 된다'는 생각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단토에 관심을 갖는 예술학 전공자들에게 단토에 대한 부르디외적 독해는 일종의 유혹이거나 최소한 참조할만한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결국 제목에 대한 비판의 관건은 예술현상에 대한 저의 부르디외적인 독해가 과연 동시대 예술상황을 설명하는데 유익한 것인가의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고..자연스럽게 제목 자체 보다는 내용에 대한 논의와 검토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