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출판면의 고참기자 고명섭의 서평집이 출간됐다. <즐거운 지식>(사계절, 2011). 서평집으론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에 이어지는 것으로 저자의 지속적이고도 일관된 책읽기와 관심사를 보여준다. 서평집으로도 앎과 사유의 두께를 만들어낸 경우다.   

  

한겨레(11. 03. 12) 책 읽는 기쁨에 빠져 보세요

‘책 탐닉’이란 말을 그 스스로는 싫어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적 항해’라는 말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770쪽 두툼한 분량에 4년 남짓 까다로운 안목으로 골라 읽은 인문 지식의 첨단이 담겼다. “게걸스럽게 지식을 물어뜯었음”을 자백하고 있거니와, 앎을 향한 그 항해의 나침반은, 세이렌의 유혹을 넘어 난바다를 건넜던 저 오디세우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딸림제목도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가 아닌가.

<즐거운 지식>은 <한겨레> 책 담당 기자로 있는 고명섭씨가 2006년부터 써온 신간 리뷰 기사를 묶은 책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은 “앎의 유혹”이었으니, 그 유혹에 넘어가면 과거와 현재의 지식을 얻을지언정 “그 자신은 미래를 저당잡히고 끝내 삶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지은이는 인지하고 있다. <즐거운 지식>의 항해에 또다른 나침반은 니체다. 니체에게 앎은 “유혹과 위험과 공포 사이를 질주하는” 항해다. 지은이의 주 관심사는 서양 철학, 또는 지금 세계 읽기를 감행하는 정치사상이다. 책은 사상, 인문, 교양 ‘세 바다’로 짜였는데, ‘사상의 바다’로 가는 항구에는 지젝, 네그리, 가라타니 고진, 데리다, 바디우, 랑시에르, 샌델, 아렌트, 칸트, 니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포진해 있다. ‘인문의 바다’에는 괴테, 밀턴, 톨스토이, 베버의 삶과 함께 프로이트와 융의 분투가 넘실댄다. 지은이에게 니체와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여기 실린 187편의 책 리뷰는 ‘지식의 즐거움’에 기꺼이 가닿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든든한 나침반 구실을 해줄 것 같다. 

11. 03. 13. 

P.S. 개인적으론 추천사를 쓰기 위해 책을 미리 읽어봤는데, 이미 지면에서 한번 읽은 글이 많았지만 모아놓으니 한결 '세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책에 관한 책’을 두 권 냈지만,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내게도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심이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두려움을 안긴다.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디쯤 읽고 있는 것일까란 물음에 한번이라도 붙들려본 독자라면 ‘일등 항해사’의 고마움을 알 수 있으리라. 그 바다의 유혹과 폭풍에 맞서 ‘두려움을 모르는 자’ 고명섭 기자는 오랫동안 내게 그런 ‘일등 항해사’였다. 서평을 일삼아 쓰면서도 그는 ‘앎의 기쁨’과 ‘배움의 즐거움’을 항상 누리고자 했고 전달하고자 했다. 덕분에 나도 기쁘고 즐거울 때가 많았다. 『즐거운 지식』은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그러모은 선물 보따리이자 묵직한 도전장이다. 한번 읽어보라고 그가 우리 앞에 던져놓는 ‘프로블레마’다. 이 갑판 위의 씨름이 한 번 더 흥겹고 즐겁다. 문제를 사유하는 자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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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3-17 20:52   좋아요 0 | URL
고명섭기자의 글을 독서의 가이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항상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지식의 발견은 연재당시 즐겨찾기에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고 매기사를 등록시켜 두었을 정도로 관심깊게 보았었습니다. 또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으니 아주 좋으 가이드북이 되겠네요.

로쟈 2011-03-18 11:38   좋아요 0 | URL
네, 가이드북으로 요긴합니다...
 

'올해의 발견' '가장 빛나는 데뷔작' 등의 평판을 듣고 보게 된 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이다. 초저예산으로 이런 완성도의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대사, 연기, 촬영, 모든 것이 뛰어난, 손에 꼽을 만한 데뷔작(이런 영화는 왜 학생단체관람을 하지 않는 걸까?). 두번째 영화가 잔뜩 기대된다. 간단한 리뷰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씨네21(11. 03. 02) 10대 소녀 못지않게 예민한 10대 소년의 관계 <파수꾼>

아들이 자살했다. 자살의 이유를 모르는 아버지(조성하)가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아들의 이름은 기태(이제훈). 학교에서 짱으로 불리던 기태에게는 희준(박정민)과 동윤(서준영)이란 친구가 있었다. 희준은 기태가 죽기 몇주 전 전학을 갔고, 동윤은 기태가 죽은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희준과 동윤이 학교를 떠난 이유가 기태와 관련있다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하지만 희준과 동윤의 기억이 드러내는 것은 기태가 아닌, 그때 자신에게서 터져나온 뜻밖의 잔인함이다.

이러지 말자. 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이제 그만하자고. 뭘 그만해? 소년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핵심적인 정보가 없다. 설명하기도 민망한 사소한 오해가 갈등을 일으킨다. 먼저 화해를 청하는 쪽은 말에 진심을 담는 방법을 모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할 쪽은 상대의 진심을 알려는 태도보다 자존심과 분노를 먼저 앞세운다. 마치 연인들의 싸움과 흡사한 대화의 피로감이 영화가 전하는 비극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파수꾼>은 누군가가 먼저 태도를 달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파수꾼>은 10대 소년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의 관계는 10대 소녀 못지않게 예민하다. 자신을 빼놓고 다른 친구들이 나누는 시선에 분노하고, 본의 아닌 말로 상처를 주고는 후회하며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된다”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엄두가 안 날 고백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파수꾼>과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아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일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이들이 환기하는 것은 그 시절의 소년들에게 있었지만, 잊었거나 지워버렸던 사랑의 단면이다.(강병진)   

한겨레(11. 02. 28) 소년들의 폭력 속 그 무엇

어두운 공터에 슬금슬금 기어든 쥐들처럼 소년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한다. 인정투쟁이 끊이지 않는 작은 왕국. 이 익숙한 풍경이 없는 소년들의 성장담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것은 정작 무엇을 인정받기 위한 폭력일까. 수많은 영화들이 말해준 것처럼, 그저 그건 수컷세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반복되는 것이거나 이유 없는 사춘기의 분노거나, 그도 아니라면 불우한 가정사에 대한 반항일 따름일까. 윤성현의 <파수꾼>을 보며 문득, 폭력에 다쳐가는 소년들에게 지금껏 단 한번도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파수꾼>은 관습화된 답을 밀쳐내며, 영화 전체를 그러한 질문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기태(이제훈),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단짝 친구였다. 기태는 일명 학교 ‘짱’이지만, 동윤과 희준의 관계에서만큼은 그 어떤 권력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기태도 동윤과 희준의 집은 거리낌 없이 드나든다. 그러나 사건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아주 작은 일을 계기로 기태와 희준의 관계가 멀어진다. 단지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짐승의 위계가 들어선다. 삼각형의 한 변이 무너지자, 남은 두 변은 버티지 못한다. 희준은 전학을 가고, 동윤은 기태에게 등을 돌리고, 어느 날 기태는 죽어버린다. 소년의 죽음. 그것은 영화의 엔딩이 아니라, 실은 영화의 시작이다. 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무력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만난다. 



영화는 기태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마다 소년들의 과거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거듭되는 플래시백으로 영화의 구조가 쌓아 올려질수록, 우리는 확신이 아니라, 불확신에 휩싸이게 된다. 그 플래시백들이 살아남은 누군가의 기억인지, 그 기억이 상대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점점 기태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로부터 멀어지고, 이 복잡한 구조의 어디에도 반전이나,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알기 어려운, 애처로운 어긋남들이다. 그러니 <파수꾼>의 형식은 그 자체로 소년들의 관계의 결처럼 보인다.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영화가 그렇게 끝날 무렵, 살아남은 소년이 현재의 문을 열고 과거로 들어가서 죽은 친구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 영화의 본심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절 소년들이 서로에게 애타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그 마음, 집착과 폭력과 애걸로 돌변하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소년들의 잔혹함, 그것은 감정이 없어서도, 넘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도 아니라, 알아봐주는 이가 없어 외롭게 내팽개쳐진 마음이 짐승이 되어 울먹이는 소리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소년들의 폭력을 무심한 오해 속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남다은_영화평론가)  

11.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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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2011-03-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고 싶기도 하고, 보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영화평이 인상적입니다.

로쟈 2011-03-13 22:43   좋아요 0 | URL
영화 자체가 인상적입니다.^^
 

계간 <자음과모음>(봄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김사과의 소설집 <영이>(창비, 2010)를 다루고 있다. 리뷰를 쓰게 된 김에 전작 <미나>(창비, 2008)와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까지 읽는다고 꽤나 시간을 끌다가 결국엔 모스크바에서 쓴 글이다. 얼마 안되는 분량이지만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자음과모음(11년 봄호)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영이’라고 읽지만 ‘02’라고 쓴다. 아니 표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김사과의 첫 소설집 <영이>(창비, 2010)의 표지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의 제목은 <02(영이)>인가? 표제작 「영이」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전체를 뭉뚱그린 제목으로 작가는 ‘02’를 선택한 것인데,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장난을 좋아하는 나의 아이디어”라고 밝혔다. 물론 말장난은 당사자가 직접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때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건 <02>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02’는 ‘영이’란 고유명사에 X선을 투과시켜서 얻은 이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사과는 ‘영이’라는 ‘현실’을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02’라는 어떤 ‘실재’를 투시하려는 작가로 보인다. 그가 포착하고 있는 실재란 어떤 것인가.   

시작은 「영이」였다. 2005년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그렇게 등단한 지 5년만에 낸 창작집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이미 <미나>(2008)와 <풀이 눕는다>(2009), 두 장편소설을 펴낸 경력에 견주면 소설집 출간은 늦은 편이다. 절반 이상은 장편들보다 먼저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장편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02>는 김사과의 전사(前史)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로선 <02>를 계기로 작가의 장편들까지 같이 읽어보게 됐는데, “우리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소설”(김영찬)이란 평에 공감할 수 있었다. ‘죽고 싶어’ ‘죽이고 싶어’란 말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일찍이 없지 않았을까.  

“죽어라, 둘 다 죽어라. 둘 다 죽어버려라! 하고 영이는 생각했다.”(「영이」)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걸 보고서 영이가 갖는 생각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시작의 시작’이다. 이때 ‘영이’는 ‘0이’다. ‘둘’이 ‘2’를 가리킨다면 영이네 가족은 ‘0과 2’가 동거하는 가족이다. 보통은 부모(2)와 아이(1)가 결합하여 가족을 구성하고, 그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애증이 ‘가족 로망스’의 기원이자 소설의 기원이었다. 이 이야기의 기원에는 물론 부친살해에 대한 욕망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오이디푸스가 그러한 욕망의 주체이고 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가족 서사의 모형이었다. 일반적인 가족 서사를 ‘1+2’의 이야기란 의미에서 ‘12’라고 한다면, 김사과의 ‘02’는 ‘0+2’의 이야기이다. 부모 중 한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증오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둘 다를 증오하는 이야기. 따라서 발을 딛고 존재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이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깨진 그릇’의 이야기가 ‘영이’ 혹은 ‘0이’의 이야기다.  

술주정꾼인 영이의 아빠는 아이가 듣는 자리에서 아내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너 같은 에미가 키운 딸년이 어떨지 진짜 걱정된다. 저년도 똑같아. 저 씨발년도 지 에미랑 아주 똑같아.” 해서 아이는 ‘아, 난 이제 더럽혀졌구나.’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느낀다. 작가 화자는 독자 또한 그런 걸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는 게 그의 바람이고,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으니까.”라는 게 그의 경고이다. 우리는 한 ‘더렵혀진’ 아이의 이야기를 읽고 함께 더럽혀졌다고 느껴야 한다. 그것이 김사과 소설의 독법이다.  

평론가의 해설을 빌면, 김사과의 소설은 “한국사회의 현실에 절망적인 분노로써 반응하고 분열증으로써 싸우는 소설”(김영찬)이다. 무엇이 한국사회의 현실인가. 영이의 시각으로 축소해서 말하자면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가 그 ‘현실’이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현실’로 은유되거나 곧바로 등치될 수 있을까. “월세를 내지 못한 조선족과 외국인노동자가 매달 몇명씩 쫓겨나는 다 무너져가는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나의 삶”(「이나의 좁고 긴 방」) 같은 진술이 예외적일 만큼 김사과의 소설에서 ‘현실’의 지표는 왜소하거나 빈약하다. 그것이 ‘어떤’ 현실은 될 수는 있을지언정 ‘한국사회’의 현실로 일반화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이유다(김사과식 가족 서사를 일반화시켜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사과 소설의 인물들이 앓는 분열증의 근원에 ‘한국사회 시스템의 억압성과 폭력성’이 놓여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좀 추상적이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고 질문을 던진 한 인물은 “주위의 모든 것”이 그 분노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셀로판지 같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셀로판지가 되기엔 너무 두껍고 또 인간이 되기엔 너무 얇은 뭔가다.”라고 규정한다. 즉 그는 셀로판지와 인간 사이의 두께를 가진 존재(뭔가)다. 이러한 존재성이 김사과 소설의 모든 인물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아닐까. 그 인물들의 반사적인 의식과 발작적인 행동은 그러한 (보통의 인간보다는) ‘얇은 존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김사과 소설에서 문제적인 것은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유독 그런 분노를 폭발시키는 ‘얇은 인간’의 발명이다. 이 ‘얇은 인간’은 많은 걸 쌓아둘 수 없기에 토해내고 쏟아낸다. 그들에게 분노의 폭발이 잦은 것은 그 때문이다.  

「움직이면」의 ‘나’는 국밥집 여주인을 난데없이 칼을 휘둘러 죽이며, 국밥을 먹으러 온 중학생까지도 맥주병으로 쳐서 죽인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없이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어 인생을 망친다.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다. 알겠냐? 이게 바로 삶이라는 거다.”라는 게 나름대로의 인식이고 자기 행동에 대한 변호다. 요컨대 우리 모두는 살인자이거나 피살자라는 것. 그러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김사과 소설은 생생한 ‘현실’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한 단순화이며 소설은 삶의 중간영역에 대한 탐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미니어처적인 소설세계는 부피와 두께를 더 키울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가 다 똑같이 좆같다고 생각해.”(「나와 b」)는 ‘현실’이 아닌 ‘기분’의 세계다.  

11.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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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1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덜컥 겁이 나요. 그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괴물이 된 것만 같고, 전혀 이해를 못할 것 같으면 이번엔 그들이 괴물처럼 느껴져서요. 정말이지 그 분노는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들이 돌연변이 취급을 당하면 안 될 텐데요...

로쟈 2011-03-11 09:22   좋아요 0 | URL
분노가 힘을 가지려면 리얼리티가 있어야 하고, 축적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발작적 폭력으로 해소되고 마니까요...

Mephistopheles 2011-03-11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아주 뻔한 이야기로 하자면...요즘 세태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쟈 2011-03-11 09:23   좋아요 0 | URL
'세태'의 추상적 반영 같습니다...

달담이와Anne 2011-03-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으니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억압'이군요. 물질적인 환경, 사회적인 환경, 신체적조건의 원인이든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의지'와 '억압'사이에서 분투하는 존재들인것 같아요. 민주주의 사회, 경제적인 요건, 사회적 제도는 향상 되었지만 정신적 빈곤, 체면, 사회적 통념, 악습, 냄비근성, 권위의 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군요. 아니, 모든 세계가 다 그런가요?

로쟈 2011-03-13 22:46   좋아요 0 | URL
음 '억압'도 좀 추상적이긴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 같기도 하구요...
 

격주간 <기획회의>(29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나인호 교수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 2011)를 거리로 삼았다. 주로 개념사의 개념에 대해 정리하려고 했다. 책의 절반은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읽은지라 기억에 남는다. 옮겨오는 김에 오타도 수정해놓는다('1830년대'가 지면엔 '1930년대'라고 나갔다). 

   

기획회의(11. 03. 05) 개념은 역사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개념은 알겠는데, 개념사는 뭐지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라면 바로 펴볼 만한 책이 나인호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이다. “대체 개념사가 뭐예요?”란 질문을 서두에 걸고 ‘개념사의 개념’을 일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개념사란 말에서 혹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란 이름을 바로 떠올리는 독자라면 그래도 개념사에 대해서 좀 들어본 구석이 있는 경우인데(내가 그렇다), 그때도 요긴한 입문서의 출간이 반가울 것이다.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부제)의 자리에 합석하여 챙겨둘 만한 귀동냥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와 언어의 만남? 코젤렉은 아예 이렇게 규정지었다. “모든 언어는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고, 모든 역사는 언어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다.” 그러니까 역사와 언어는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샴쌍둥이처럼 항시적으로 서로 붙어 있다.   

사전적인 정의를 인용하자면, “개념사는 언어와 정치․사회적 실재, 혹은 언어와 역사의 상호 영향을 전제한 채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하는 역사의미론의 한 분야이다.” 역사의미론의 전제는 언어가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가 없다면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시각이지만 서구 역사학계에서 이러한 역사의미론이 ‘언어적 전환’과 함께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해석학의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발전한 것이 바로 개념사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란 이름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다(이미 코젤렉이 편찬한 <역사적 기본개념>이란 방대한 저작의 일부가 국내에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그래서 개념사에 대한 분과학문적 정의는 이렇다. “개념사는 1970년대에 독일에서 체계를 갖춘 이후 전세계적 연구 네트워크와 학술지를 갖춘 실험적 연구 분야로 성장하면서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일반 역사학의 새로운 전문 분과이다.” 특히 코젤렉이 기여한 분야는 ‘사회사적 개념사’이다.  

‘개념사’가 ‘개념들의 역사’를 뜻하는 말이라면 개념사의 기본단위로서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일단 상식을 활용하자면, 개념은 단어이다. 혹은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개념사는 분석 대상을 하나의 개념이나 몇몇 유관 개념들로 한정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 개념사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왜 단어사가 아니고 개념사인가? 심지어 코젤렉도 개념은 “단어에 포박되어” 있다고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유인즉 개념은 단어를 통해 표현되지만 단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단어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모든 단어가 개념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어와 개념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코젤렉의 말을 더 인용하자면, “단어는 사용되면서 명확해질 수 있다. 반면 개념은 개념이 되기 위해 다의적이어야 한다.”  

다의적인 만큼 개념은 해석의 대상이다. 아니 ‘해석의 대상’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의적인 개념을 일의적으로 정의하고자 할 때 논란과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미리부터 이렇게 적어놓고 있는 이유이다. “개념의 정의는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논쟁을 낳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투쟁이 개입되지요. 이처럼 개념은 정치․사회․이데올로기적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개념과 단어의 관계가 정리됐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개념과 실재의 관계이다. “개념은 실재의 지표이자 요소”라는 게 코젤렉의 유명한 명제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개념이 실재의 지표란 말은 거울이란 말과 비슷하다. “개념이 한편으로 정치․사회적 사건이나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때의 그 거울이다. 이건 물론 어렵지 않은 생각이다. 한데, 개념이 실재의 요소란 말은 무슨 뜻인가. “개념은 정치․사회적 사건과 변화의 실제적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즉 현실의 무언가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행동을 조직하고 감정을 표현하므로 개념은 정치․사회․역사적 실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념은 공적 논쟁에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표출하는 정치적․사회적 도구가 되기도 하고, 지배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되기도 하며, 번역을 통해 문화를 전위시키는 문화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미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라고 했는데, 보태자면 개념의 번역 또한 정치적 행위가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것이 “개념사만이 갖는 독특한 공리”이다. 이 ‘독특한 공리’에 따라 개념은 그 자체의 고유한 역사를 갖는다. ‘개념=실재’라는 단순한 등식, 혹은 소박한 실재론이 일면적인 이유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근대 초 유럽에서 확립되었지만 ‘자본주의’ 개념은 1830년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반면에 ‘사회주의’란 용어는 18세기 후반에 벌써 나타나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출현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책은 1부 ‘개념사란 무엇인가?’와 2부 ‘여섯 개의 개념으로 근대 읽기’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 ‘이론과 실제’ 같은 인상을 준다. 개념사의 구체적인 적용과 성과를 엿볼 수 있는 2부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면, 이론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 독자를 유혹하는 것은 1부에서 ‘개념사의 다양성’을 정리해주고 있는 장이다. <키워드>(민음사)의 저자인 ‘현대 문화연구의 아버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도 흥미롭지만, 눈길을 끄는 건 코젤렉의 연구를 더 발전시킨 그의 제자 롤프 라이하르트의 ‘사회사적 의미론’과 브라질의 역사가 호아오 페레스의 ‘비기본개념의 개념사’이다.  

특히 페레스는 코젤렉의 기본개념들이 “언어적 논쟁의 형태로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은 일련의 경험들을 제외시킨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그런 관점에서 페레스의 관심은 지리적으로 비유럽적이고 사회적으로 소수자들의 하위문화적 특수성을 포괄하는 개념사를 지향한다. ‘비서구 사회의 개념사’이면서 ‘아래로부터의 개념사’이다. 국내에서도 한림과학원의 주도로 ‘한국개념사총서’가 나오고 있는 만큼 우리의 개념사 방법론에 대해서도 한번쯤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개념사란 무엇인가>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으론 멜빈 릭터의 입문서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소화)가 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와 함께 챙겨두어야 할 책은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이다.  

11.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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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북리뷰 가운데 뒤늦게 읽은 건 제이슨 델 간디오의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 2011)이다. 제목만으론 정체가 다 드러나지 않는데, 부제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이다. 수사학을 표방한 책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지 않은가 싶은데 실제로 원제 자체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이다. 하종강, 목수정, 안진걸, 노회찬 네 분이 추천 대열에 가담한 것만으로도 책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 오늘 당신의 언어를 수사학으로 새롭게 무장할 필요가 있다(음, 나도 문체를 좀 바꿔야 할지는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봐야겠다)...  

 

한겨레(11. 03. 05) 언어와 몸, 세상을 바꾸는 무기다 

부조리한 현실, 불공정한 사회…. 세상을 바꾸고 싶다. 마음은 불끈 더워지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지를 모아 혁명을 꿈꿔야 할까? 주먹 꼭 쥐고 거리로 뛰쳐나가야 할까? 과연 이 시대 혁명이란 가능한가? 곧 주저앉고 만다. 바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질적 방안이란 없다! 패배주의의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여기저기 속한 크고 작은 그룹 안에서, 변혁의 소망은 쉽게 무너져내린다. 



그러나 바로 여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있다. 정말로? 미국 템플대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실천가로도 활약중인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에서 장담한다. 변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그의 과격한(?) 주장은 2008년 책에 담겨 세상에 나왔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 지구 한쪽에선 혁명의 불길이 드높이 치솟고 있지 않은가.

그는 혁명의 가능성을 ‘수사학’에서 찾는다. 21세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총도 칼도 돌도 화염병도 아닌 ‘수사’라고 힘줘 주장한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곧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뜻이며, 이를 위해서는 설득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달하려는 고귀한 ‘내용’에 치중하느라 전달의 ‘방법’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아프리카·중동에서 부는 혁명의 태풍 뒤에는 소셜 미디어가 자리잡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전세계에 튀지니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불길을 알렸고 세계 시민들의 소통과 연대가 혁명의 불을 당겼다. 선동가의 힘찬 연설과 거대 담론으로 혁명이 이뤄지던 시대는 지나고, 블로그의 포스팅 하나, 트위터의 트위트 한 줄이 논의를 촉발시키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활동가들은 담론과 연설에 매달릴 게 아니라, 소통의 효과적 방식 곧 수사를 연구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힘써야 하는 시대가 됐다. 수사학은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지은이가 강조하는 까닭이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유별나면서도 매력적인 지점은, 단순히 수사의 중요성을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디오는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구체적인 수사 전략까지 제시한다. 한마디로 활동가들을 위한 수사 지침서이자 실용서인 셈이다. 책의 부제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이며 원제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인 것도 그래서다. 



지은이가 수사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데다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항의운동 장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엿본 뒤 본격적인 활동가의 길을 걸으며 현장에서 수사학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68혁명 이후 등장한 신급진주의(소통·수사를 수단으로 변혁을 꾀한다는 생각) 이론을 확장해 실천하는 한편, 집회나 모임에서 소통의 방식을 분석한 결과물로 이 책을 써냈다.

그가 강조하는 혁명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사는 글쓰기와 말하기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두 가지 수단. 활동가의 글쓰기와 말하기의 전략은 치밀해야 한다. 메시지는 무엇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독자나 청중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제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가령 글쓰기와 말하기는 완전히 다르게 준비해야 하는데, 글은 첫문장에 신경을 써야 하고 말은 숫자나 전문용어를 배제한 채 몸짓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

각론으로 들어가면 언어 선택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를 테면 ‘짭새’와 ‘견찰’, ‘미등록 노동자’와 ‘불법 이주민’ 중 어떤 단어 선택이 더욱 효과적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울러 권력을 위해 조작된 언어의 본래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활동가의 몫이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말의 언어를 넘어 몸의 언어도 지은이는 강조한다. 수사와 마찬가지로 몸의 맵시 역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여기서 수많은 활동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혁명가는 외모를 가꾸고 몸에 치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러나 말하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선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의 분위기와 연설가의 외적 효과에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는다. 말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낳는 수사적 효과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속 가능, 윤리적 소비 등을 연상시켜야 할 채식주의자가 뚱뚱하고 기름진 얼굴로 나타난다면 그의 올곧은 주장의 효과도 반감될 공산이 크다. 하다 못해 메시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플래시몹 같은 거리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도 효과적인 수사라고 간디오는 강조한다.(김진철 기자) 

11. 03. 09.   

P.S. 수사학이 본래 연설을 위한 기술이었으므로 '명연설'들을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세계를 뒤흔든' 연설들이라면 더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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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0 15:10   좋아요 0 | URL
주역에 나오는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 는 표현을 긍정으로 바꿔 읽으면 뜻을(생각을) 먼저 세우고자 하면 말을(메를로 퐁티의 개념을 빌리면 세계와 지각을 매개하는 몸의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군요) 바꾸고, 글을 바꿔야 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실천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도 의미있는 방법론이라 생각됩니다. 말이 뜻을 전도하는 원래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요....^^;

로쟈 2011-03-11 09:26   좋아요 0 | URL
전통적으로 수사학과 논리학은 적대적이었는데, 논리학(주장)이 승리를 위해서라도 수사학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걸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해요. 승리할 수 없다면 '공론'이 될 테니까 맞는 말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