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한 학회에서 발표한 글을 옮겨놓는다. 번역비평과 관련한 발표를 제안받았었는데, 그동안 썼던 글들을 정리해서 '쿤데라의 문학과 번역 문제'의 시론 정도에 해당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언젠가 본론까지 쓰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참을 수 없는 번역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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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존재의 대한 성찰로 새롭게 해석한다. 영원회귀가 무거운 짐’(니체)이라면 일회적인 삶은 너무도 가벼운 것이 될 것이다. 즉 영원회귀적인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일회적인 삶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삶이다. 과연 이 두 가지 삶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쿤데라가 던지는 질문이다. 사실 그런 저울질의 첫 저작권을 갖고 있는 파르메니데스는 간명한 답을 제시했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은 부정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쿤데라는 파르메니데스를 인용하면서도 그의 답변은 수용하지 않는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어느 쪽이 긍정적이고, 어느 쪽이 부정적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쿤데라는 작품에서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 등 네 명의 주요 인물을 등장시켜서 한번 따져보고자 한다(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에 아주 잘 부합한다). 네 인물은 가벼움에서 무거움에 이르는 스펙트럼 상에 대략 이렇게 위치시킬 수 있다. (가벼움)사비나-토마시-테레자-프란츠(무거움)

 

쿤데라의 이러한 성찰을 존재론 대신에 번역론에 대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흔히 번역의 방법론으로 직역론과 의역론이 제시된다. 원문(출발어)에 충실한 번역이 직역이라면, 도착어에 충실하고자 한 번역이 의역이다. 조르주 무냉의 비유를 가져오자면, 의역은 부정한 미녀이고, 반면에 직역은 정숙한 추녀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 유형을 조금 확장하여 스펙트럼화한다면, 번역의 양태는 정숙한 미녀-부정한 미녀-정숙한 추녀-부정한 추녀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번역으로서의 정숙한 미녀는 최상의 번역이자 필연적인 번역이다. 그것을 다르게 영원회귀적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원회귀적 번역은 임의성을 허용하지 않는 번역이다. 그것은 운명적인 번역이면서 대체불가능한 번역이다. 그래서 가장 무거운 번역이다. 반면에 그 대척점에는 깃털처럼 가벼운, 우연에 내맡겨진 번역이 있다. 다시 반복될 수 없고 반복하기도 어려운 번역이다. 심지어 원문에서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한 이 번역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번역이다. 더없이 무거운 번역과 더없이 가벼운 번역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서양문학 고전의 대명사 가운데 하나인 <햄릿>의 번역을 잠시 살펴본다. 알려진 대로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고 12장에서야 등장한다. 죽은 부왕의 유령이 등장하는 11장에 이어지는 이 궁중 장면에서다. 덴마크의 새 국왕 클로디어스는 선왕의 죽음을 추모하고 형수였던 거트루드를 왕비로 삼는 데 동의해준 신하들을 치하한다. 그리고는 여러 국사를 처리하고 재상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의 유학을 허락하는 일까지 마무리한 뒤에야 햄릿을 찾는다. “그건 그렇고, , 나의 조카 햄릿, 이젠 나의 아들-(But now, my cousin Hamlet, and my son,-)”이 햄릿을 부르는 그의 대사다. 그리고 그 부름에 답하는 햄릿의 방백이 우리가 이 연극에서 듣게 되는 햄릿의 첫 대사다.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대사로 처리되기도 하고 방백으로 처리되기도 하는 이 문장이 내가 여러 종의 <햄릿> 번역본을 들춰볼 때마다, 그리고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한번쯤 확인해보는 대목이다. 다수의 번역본이 있는 만큼 이미 다양한 번역이 제시되었다. 아니 다양하게 연주되었다. “숙질 이상의 관계가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부자 취급은 싫습니다.”(김재남) “조카보다야 가깝지, 하지만 부자취급은 어림없어.”(여석기) “핏줄은 통한다마는 마음은 구만리 밖이라.”(신정옥)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최종철)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덜 친한.”(김정환) “조카보다 가깝지만 살갑지는 않군요.”(이상섭) 등이 그 사례다. 클로디어스는 아버지의 동생이니 햄릿에게는 숙부가 되지만 어머니와 결혼하였으니 새 아버지(계부)이기도 하다. 클로디어스에게 햄릿이 조카이자 아들인 것처럼. 하지만 이 병행적이면서도 이행적인 관계를 햄릿은 선뜻 수용하지 못한다. 햄릿의 kin/kind는 클로디어스의 cousin/son만큼 자연스럽게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정체성은 불확실하며 불확정적이다. 한 노래 가사를 비틀어서 말하자면 숙질도 아닌, 그렇게 부자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관계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몇 가지 번역 사례를 평해 보자면, 김재남역은 숙질부자를 대비시킴으로써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좀 투박하다. 원문의 간결한 리듬을 살리지 못한 탓이다. 여석기역은 조카부자를 대비시키고 리듬감도 살렸지만 어림없어란 말이 좀 걸린다. 왠지 유약하다기보다는 강인한 햄릿이 연상돼서다. 신정옥역은 의역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핏줄마음의 대비는 정체성에 대한 햄릿의 고민을 전달하지 못한다. 최종철역의 동족동류는 거꾸로 직역의 최대치를 보여주지만 역시나 햄릿의 고민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김정환역은 두루 만족시키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불완전하게 끝난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자식간이란 말은 쓸 수 없기에 친척자식도 정확한 대비는 아니다. 김정환은 클로디어스의 대사에서도 ‘cousin’친척이라고 옮겼는데, 원래의 의미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좀 부자연스럽다. 이상섭의 번역은 ‘less than kind’살갑지는 않은관계로 풀었다. 햄릿의 대사를 촌수 문제보다는 친소 문제에 대한 언급으로 읽게끔 한다.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벼운 번역일까. 물론 이런 촌평은 주관적인 것이고 독자로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연주를 고르면 될 터이다.

 

자신의 취향과 기대에 맞는 번역을 만날 때의 즐거움은 원작을 읽는 즐거움과는 사뭇 다르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란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에 해당한다면 번역은 이 자연의 모방이자 재현이다. 단 하나의 정확한 번역, 그래서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번역이 있다면,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번역일 것이다. 반면에 이렇게도 번역될 수 있고, 저렇게도 번역될 수 있는 식이라면, 각각의 번역은 각기 다른 번역은 이 모방재현의 기예를 겨루는 경연이자 모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번역이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상찬은 좋은 번역정도가 될 것이다(반면에 무거운 번역의 이상은 정확한 번역이다).

 

최종적인 번역이 아닌 한에서 가벼운 번역은 열려 있는 번역이다. 그것은 오류/오역에 열려 있으며, 더 좋은 번역의 가능성에도 열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벼운 번역의 장은 경연의 장이기도 하다. <햄릿>22장에서 폴로니어스는 미친 척하는 햄릿의 광기가 자신의 딸 오필리아 때문이 아닌가 떠보기 위해 말을 붙인다. 햄릿은 그에게 딸이 있는가 묻고는 이렇게 충고한다. “Let her not walk in the sun: conception is a blessing: but not as your daughter may conceive. Friend, look to it.”

 

이 대목에 대한 몇 가지 번역을 소개하면 이렇다. “햇볕을 너무 쬐지 않도록 해. 지혜가 부푸는 건 좋지만 배가 부풀면 큰일이니까, 아주 조심해야 하네 친구.”(신정옥) “딸이 태양 아래 걷지 않도록 하게. 머릿속의 착상은 축복이네만, 자네 딸 몸속의 착상은- 친구여, 조심해.”(최종철) “햇빛 속을 걷게 하지 말게. 생각을 잉태하는 건 축복이지. 하지만 자네 딸은 다른 걸 잉태할지 모르잖아. 친구. 조심하게.”(김정환) “햇볕 쬐고 나다니지 못하게 해. 생각을 품는 것은 축복이지만 당신 딸이 무얼 품을지 몰라. 이 친구, 조심해.”(이상섭) 셰익스피어의 원문에서 핵심은 ‘conception(착상)’‘conceive(임신하다)’의 의미연관성이 갖는 말장난이다. 이것을 신정옥역은 지혜가 부푸는 것배가 부푸는 것으로 풀었고, 최종철역은 머릿속의 착상몸속의 착상으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김정환과 이상섭은 각각 이 말장난을 생각의 잉태’/‘생각을 품는 것다른 것의 잉태’/‘무얼 품을지로 변주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연주이며 경연이다. 그러니 <햄릿>은 한번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것도 여러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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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러 번 읽어도 좋을 만한 번역서가 많이 나오고 또 그런 번역서를 독자들이 많이 찾아서 읽는 문화적 풍토가 마련되는 것이다. 번역비평 또한 오역에 관한 시비로 얼룩지기보다는 훌륭한 번역에 대한 품평으로 채워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변역에 판단과 평가의 기준을 재설정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1)무거운 번역: 번역은 무거워한다는 것,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는 쪽에서 보자면, 번역은 맞는 번역 vs 틀린 번역으로 나뉜다(‘정확한 번역이란 표현도 맞는 번역의 유의어로 많이 쓰인다). (2)가벼운 번역: 번역은 필연적으로 원문과 동일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차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것이다(쿤데라식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존재의 무의미성에 대한 승인이라고 하겠다).

 

가벼운 번역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은 좋은 번역 vs 나쁜 번역으로 나뉠 수 있고, 이상적인 것은 좋은 번역 vs 더 좋은 번역의 경합이다. 여기서 좋은 번역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면에서(“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맞는 번역과 대비된다. 반면 나쁜 번역이란 일회적인 번역’, 한없이 가벼운 번역,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번역이다.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심지어 웃음까지도 유발하는 번역이다. 가령 한 번역서의 문장.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 속에 이미 낙관주의가 존재한다.” 원문은 “There is an optimism that consists in saying that things couldn't be better.”이고 보통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말하는 게 낙관주의다.” 정도로 번역될 듯싶다. 흔히 오역이라고 비판하게 되지만, 이 특이한, 일회적인 번역 덕분에 낙관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갖게 되었다는 점도 부인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낙관주의가 바로 (원저자는 상상하지 못했을) 역자가 발명한 새로운 낙관주의다.

 

대별하여 무거운 번역론’(무거움 지향성)가벼운 번역론’(가벼움 불가피성)의 양분이 가능하다면 그 실례도 몇 가지 살펴보면 좋겠다.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구절이다. 청하판 니체전집(최승자 옮김)에서 각각 보라,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그러므로 나 그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에 대해 말하려니, 그것은 곧 최종 인간이다.”라고 옮겨진 대목이다. 여기서 초인최종 인간은 대립적인 개념으로 독일어의 위버멘슈’(Ubermensch)‘der letzte Mensch’를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보통 슈퍼맨/오버맨’(superman/overman)라스트 맨’(last man)으로 옮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라고 말할 때 차라투스트라가 지향으로 삼는 것이 초인이다. 반면에 최종 인간우리는 행복을 만들어냈다!”고 자위하고 현실에 안주함으로써 차라투스트라의 경멸을 사는 인간 유형이다.

 

이 두 단어를 책세상판 니체 전집(정동호 옮김)은 각각 위버멘슈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옮겼다. ‘위버멘슈는 음역한 것이고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의역한 것에 가깝다. ‘초인이란 관례적 번역어가 슈퍼맨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전공자들은 위버멘슈란 음역을 선호하는데(니체의 위버멘슈를 가장 오용한 사례가 나치 독일이었던 걸 고려하면 수긍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사실 이 음역이 번역인가라는 의문을 제거한다면, ‘위버멘슈‘Ubermensch’에 대한 끝장 번역이자 가장 무거운 번역이다(‘위버멘쉬라는 표기상의 차이 정도가 경합할 만하다). ‘초인이나 극복인같은 번역어로는 도저히 대적할 방도가 없다(소위 전공자들은 무거운 번역론의 관점에서 맞는 번역내지 정확한 번역을 선호한다). 반면에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아마도 전례가 없는 번역, 그래서 일회적으로 보이는 지극히 가벼운 번역이다. 전집판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두 핵심 개념어가 한편으로는 너무 무겁게, 또 한편으로는 너무도 가볍게 옮겨져 있는 것이다. 비교해볼 수 있는 사례로, 민음사판(장희창 옮김)에서는 초인말종 인간을 상대어로 골랐고, 펭귄클래식판(홍성광 옮김)에서는 초인최후의 인간으로 짝을 이루게 했다. 다른 번역본을 더 살펴보아도 위버멘슈의 번역은 대략 초인으로 합의가 돼 있지만, ‘der letzte Mensch’는 번역어가 딱히 정착돼 있지 않은 형편이다. 중국의 사례를 참고하면, ‘초인말인'(末人)이라는 짝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인이란 번역어를 루쉰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루쉰의 Q’가 사실 그런 말인이었다). 중국에서도 최후의 인간'(最後的人)으로 번역된 사례가 있는데, ‘초인의 대응어가 되기에는 그 의미가 모호하다. 반면에 말인은 우리에게도 그 의미가 전달되기에 초인의 꽤 적합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또다른 대목. <니체와 철학>(민음사)에서 들뢰즈는 니체의 복수주의(pluralism)를 설명하면서 자기만이 유일신이라는 어느 신의 말을 듣고서 신들이 웃다가 죽었다는 대목을 인용한다("신들은 죽었다. 하지만 자기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어떤 신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웃다 죽었다."). 이게 <니체와 철학>에는 이렇게 옮겨졌다. "신들이 존재하건, 단 하나의 유일신도 존재하지 않건, 소위 그것이 신() 아닌가?"(21) 무슨 말인가? 이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변절자들'에 나오는 것인데, 신들 가운데 한 신, "분노의 수염을 단 늙은 신, 질투의 신""신은 유일하다. 그대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신을 가장 잘 부정하는 말'을 하자 다른 모든 신들이 웃어대더니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친다. "신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신성함이 아닌가?"(펭귄클래식판)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다운 일이 아니겠는가?"(한길사판)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민음사판) 몇몇 번역본들과 대조해보더라도 <니체와 철학>의 번역이 반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번역이란 걸 알 수 있다(이런 경우는 독자에게 헛웃음을 선사한다).

 

시간을 거슬러 잠시 비극의 탄생시점으로 올라가보자. 희랍비극 전집을 완역한 천병희 선생은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그런 취지에서 번역본의 새 개정판을 내기도 했는데, 단국대판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내 이오카스테를 향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여”(950)라고 불렀고, 이것은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아내 이오카스테의 가장 사랑스런 머리여에 가깝다고 한다. 개정판(숲판)은 이 구절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오카스테여라고 의역한다. 이에 대해 고전학자 강대진 박사는 희랍인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래서 이전 번역본이 더 낫다고 평한다. 세대를 달리하는 두 고전 번역자가 번역관에서도 견해차를 내보이는 셈이다. 이오카스테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전령)의 말도 비교해보자면, 천병희 선생은 가장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자면 신과 같은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죽었습니다.”(문예출판사판, 1235)라고 옮겼던 것을 여러분이 빨리 아시도록 가장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오카스테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숲판)라고 고쳤다(‘빨리 아시도록가장 간단히는 중복되는 표현이다). 다른 번역본에서 아주 짧게 말씀드리죠. 왕비 이오카스테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조우현 역)라고 옮겨진 대목이다. 이 경우에도 강대진 박사는 이오카스테의 머리가 죽었습니다를 선호할 듯싶지만, 실제 번역에서는 말하고 듣기에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이야기하자면, 여신 같은 이오카스테께서 돌아가셨습니다.”(민음사판)라고 옮겼다. 참고로, 김기영판(을유문화사)가자 빨리 전하고 알려야 하는 소식은 저 신과 같은 이오카스테가 죽었다는 것이오.”라고 옮겼다. 쿤데라 소설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번역자 역시 매번 가벼움무거움사이에서의 진동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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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가벼움과 무거움, 가벼운 번역과 무거운 번역 사이의 선택은 번역자만의 고심은 아니다. 작가(저자)도 이 고민에서는 면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도 당연히 나뉠 수 있는데, 번역의 가벼움을 용인하는 태도와 무거움을 고집하는 태도로 양분해볼 수 있겠다. 전자를 대표하는 작가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면 밀란 쿤데라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자에 속한다. 마르케스는 번역이 일종의 재창조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한 인터뷰에서 마르케스는 그레고리 라바사라는 미국 번역자를 격찬했는데, 이유가 라바사는 각주를 달기 위해 책의 어떤 부분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유일한 번역가여서다. 라바사의 영어본은 완전히 재창조에 가깝고 그런 면에서 존경할 만하고 덧붙인다. 이와 비교할 때 데뷔작 <농담>의 불어판(1968)을 포함하여 모든 번역을 꼼꼼하게 다시 검토하고 정확하게재번역하고자 했던 쿤데라는 적어도 번역에서만큼은 일회적인 번역이 아닌, 무거운 번역을 지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1946)로 친숙한 작가다. 일찍이 번역가이자 소설가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소개되어 널리 읽혔고 수많은 번역본이 뒤를 이었다. 원작이 그리스어로 쓰인 걸 고려하면 대부분은 영어판에서 옮긴 중역본들이었다. 그뒤에 그리스학 전공자인 유재원 교수의 원전 번역본이 등장했다. ‘원전 번역이 표방하는 것은 원전과의 근접성이고, 그에 수반하는 정확성이다. 원전 번역본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껏 읽어온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는가? 흥미로운 건 영어권에 소개된 <그리스인 조르바>도 사정이 우리와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초에 프랑스어판(1947)을 저본으로 옮긴 중역본이 그간에 읽히다가 2014년에 가서야 그리스어에서 직접 옮긴 새 번역본이 나온다. 카잔차키스 전문가로 대표 평전까지 쓴 피터 빈이 번역자인데 그는 기존 번역본이 많은 누락과 오역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윤기판을 비롯해서 대다수 한국어판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오류였다. 몇 가지 예외가 새로 나온 번역본들인데, 김욱동판(민음사), 이종인판(연암서가)은 피터 빈의 새 영어판을 옮긴 것이고 이재형판(문예출판사)2015년에 나온 새 프랑스어판을 옮긴 것이며 유재원판(문학과지성사)이 그리스어판 번역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둘러싼 번역 전쟁'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보면 어떨까. 소설의 결말에서 나(카잔차키스)가 스스로 자유롭기에 조르바에게 동행할 수 있다고 말하자 조르바는 아직 그렇지 않다고 대꾸한다. 매여 있는 줄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길어서 자유롭다고 생각할 뿐이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그 줄을 잘라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언젠가는 그 줄을 잘라낼 거라고 하자 조르바는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이윤기) 조르바의 말은 카잔차키스가 좋은 머리를 갖고 있기에 계산하다 보면 줄을 잘라낼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같은 대목을 원전 번역은 이렇게 옮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료품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이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유재원)

 

머리'정신'의 차이가 대수롭지 않다면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알뜰한 주부'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전자가 직설적이라면 후자는 반어적이기에 그렇다. 아무려나 카잔차키스 같은 먹물은 줄을 잘라내기 어려울 거라는 게 조르바의 장담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점이 조르바로서는 안타깝다.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이윤기)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유재원) 이 대목에서도 멀건 카밀레 차'맛있는 캐모마일 차'라고 하면 반어적으로 말하는 게 된다.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희석한 캐모마일 차'(김욱동)이 맛도 저 맛도 없는 카밀레 차'(이재형)라고 옮겼다.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판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다. 캐모마일과 럼주의 대조만 확실하게 전달된다면 번역의 임무는 완수된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책상물림과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조르바라면 번역본의 사소한 차이들을 장부에다 적어놓을 것 같지도 않다. 조르바의 가르침에 충실하자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읽을 게 아니라 럼주를 마시며 읽어야 한다. 멀겋게 읽을 것인가 독하게 읽을 것인가.)

 

하지만 조르바와는 다르게, 쿤데라는 번역에 대해 깐깐한 편이다(번역에 있어서 시와 소설 간의 장르적 차이는 따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그는 번역자의 권리보다 작가의 권리를 우선시하는데, 그런 의도를 감안한다면 한국어판 번역은 쿤데라의 기준에 많이 못 미친다. ‘중부유럽의 작가를 자임하는 쿤데라는 체코어판과 프랑스어판을 동시에 정본으로 인정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정본이 둘이다. 독어 중역본(1988)으로 처음 출간된 한국어본도 체코어본, 프랑스어본 번역 등이 추가되어 그간에 네댓 종 이상이 나왔다.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되고 있어서 아쉬운데, 다양한 번역본을 음미하면서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단 복수의 번역본은 번역의 차이와 변화 양상에 주목하게 해준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먼저 주인공들의 이름이 바뀌어왔다. 체코어본 번역에서 토마스테레자라고 표기된 주인공의 이름이 독어본 번역과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토마스테레사가 됐고, 프랑스어본 번역 개정판에서는 토마시테레자가 됐다. ‘테레사테레자가 된 것은 교정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토마스토마시로 바뀐 것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독일작가 토마스 만이 덩달아 토마시 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람둥이의 유형도 달라졌다. 쿤데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한쪽은 서정적유형으로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으려고 애쓰고, 다른 한쪽은 서사적유형으로 수집가적인 열정을 갖고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한다. 전자는 항상 이상 찾기에 실패함으로써 동정을 사기도 하지만, 후자는 항상 만족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산다. 작품에서 토마스는 후자에 속한다. 이 두 유형이 독어본과 체코어본 번역에선 서정적 바람둥이서사적 바람둥이정도로 번역됐지만,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낭만적 호색한바람둥이형 호색한으로 옮겨졌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빚어졌는지 궁금할 법한데,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참고하면 내막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기 소설의 열쇠어중 하나로 서정성을 풀이하면서 그는 서정적인 것서사적인 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들에게는 아주 낯설다는 점이다. 그는 타협책으로 프랑스어판에서 서정적 바람둥이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서글펐다고 그는 덧붙였다. 요컨대 체코어본이나 독어본, 영어본과는 달리 유독 프랑스어본에서는 서정적 바람둥이서사적 바람둥이라는 유형학이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에 따라 프랑스어본을 정본으로 삼은 한국어본은 쿤데라의 서글픔까지도 옮기게 되었다. 곧이곧대로 옮기고자 하는 무거운 번역이 낳은 서글픔이라고 해야 할까(번역본은 쿤데라가 인용하고 있는 독일어 속담을 ‘einmal ist keinmal’이라고 그대로 노출했다. 원문과 일치하는 너무도 정확한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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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23-12-1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와 작품을 알고픕니다
프랑쓴가? 하여튼 19세기에 어느 유럽 남자작가가 쓴 단편소설인데
화자는 어린 사내아이고 아이 삼촌이 돈 벌어 금의환양하겠다며 집 나가서 오래도록 소식 없다가
우연히 아이가 부두 노가다였나 청소부였나를 하는 삼촌을 보지만 서로 모른 척 한다 뭐 이런 내용이예요.
짐작 가세요?
날씨 추운데 건강하세요.

로쟈 2023-12-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파상의 쥘 삼촌이에요

심술 2023-12-1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로쟈님.
 
 전출처 : 로쟈 >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여정

7년 전에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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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문학잡지 <릿터>(44호) 밀란 쿤데라 특집에 실었던 글을 옮겨놓는다. 밀란 쿤데라 작품에서 '정체성'이 내가 맡은 주제였다. 
















릿터(2023년 10/11월) 정체성


정체성은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주제이면서 밀란 쿤데라 소설의 성찰 주제다. 정체성에 대한 쿤데라의 관심은 소설 <정체성>(1998)에 국한되지 않는다. 단순하게는 프랑스로 망명한 체코 작가라는 쿤데라의 이력에서부터 정체성은 질문거리가 된다. 그는 프랑스 작가인가? 체코 작가인가? 1975년에 프랑스로 망명한 쿤데라는 1979년 체코 국적을 박탈당하고 1981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2년간은 무국적 상태였다는 것이 된다). 이후 꽤 오랜 기간 쿤데라는 체코 정부와 불화관계였고, 1989년의 벨벳혁명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2019년에 가서야 쿤데라는 40년만에 체코 국적을 회복하고 다시금 체코 작가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정확히는 체코 작가이자 프랑스 작가.


하지만 체코 작가이자 프랑스 작가라는 이중적 규정은 편의적인 것이다. 쿤데라의 경우에 그것은 체코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작가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 발표한 첫 에세이 <소설의 기술>(1986)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대상이 신이나 조국, 민족, 혹은 개인 따위가 아니라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곧 소설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바꿔 말하면, 쿤데라에게 가장 합당한 정체성은 소설가이고 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과연 그에게 소설이란 무엇이었으며 그는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나는 내 영혼을 증명하러 떠난다.” 죄르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제사로 삼은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구대로 소설(우리말의 모호성 때문에 굳이 밝히자면 여기서 소설근대장편소설을 가리킨다)은 근대적 개인의 자기 발견, 자기 입증의 형식이다. 정체성이란 말을 가져오자면, 소설은 자기 정체성의 서사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자아가(마르트 로베르의 표현을 빌리면, 소설의 주인공은 업둥이이거나 사생아) 안정적인 자기에 이르는 발견과 성장의 서사가 소설의 표준형이다. 하지만 쿤데라에게 소설의 용도는 증명보다는 질문발견에 놓인다. 그의 소설에서 정체성은 결과로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회의와 해체의 대상으로 제시된다. 비유컨대 쿤데라 소설의 여정은 하나의 영혼으로 통합되는 여정이 아니라 불안정한 분열의 상태로 귀결되는 여정이다.


초기 단편집 <우스운 사랑들>(1969)에 실린 <히치하이킹 게임>을 보자. 한 젊은 커플이 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또 질투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순수함을 높이 산다. 그들은 휴가차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히치하이킹 게임을 시작한다. 잠시 남녀가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다른 배역을 연기하면서 몰입한다. 수줍음이 많았던 여자는 히치하이킹하는 대담한 여자를 연기하며 해방감을 맛본다. 여자의 순수함을 숭배했던 남자는 그녀를 창녀로 취급하며 새로운 성적 흥분을 느낀다. 하지만 게임이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면서 여자는 당혹감과 고통을 느낀다. 이야기는 비참한 정사가 끝나고 여자가 나는 나야를 되뇌며 흐느끼는 장면으로 끝난다. 정체성의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주의의 명제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담이다.

















정체성의 혼란과 딜레마는 쿤데라가 즐겨 다루는 소재다. <농담>(1967)에서 제마넥에 대한 루드빅의 복수는 왜 실패로 돌아가는가? 대학생 시절 사소한 농담이 빌미가 돼 당에서 쫓겨날 때 이를 주도했던 제마넥을 루드빅은 15년만에 찾아와 복수하고자 한다. 그는 제마넥의 아내 헬레나를 고의로 유혹하지만 제마넥과 헬레나 커플은 이미 별거중인 상태이고 제마넥에게는 젊은 애인이 따로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루드빅이 간과한 것은 15년간의 세월이다. 쿤데라는 루드빅의 오류를 기억과 영속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고쳐보겠다는 믿음에서 찾는다. 모든 것은 잊혀지며,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을 루드빅은 간과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루드빅은 중년의 제마넥이 더 이상 청년 제마넥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정체성이란 유동적이며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가 보여주는 모습도 이중적 정체성 내지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짧은 결혼생활 끝에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난 토마시는 자유분방한 바람둥이 의사로 살아간다. 그는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해서 에로틱한 우정이상의 관계는 피하고자 한다. 한 여자를 짧은 간격을 두고 만날 때는 세 번 이상 만나서는 안 되며, 수년 동안 길게 만날 때는 최소 삼주 이상씩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3의 법칙이다. 그랬던 그가 한 작은 마을에서 만난 카페 종업원 테레자와 동거하게 되자 토마시의 에로틱한 우정파트너인 사비나는 바람둥이 토마시에게 트리스탄의 모습이 겹쳐 있다고 말한다. 토마시는 바람둥이(돈후안)인가, 충직한 연인(트리스탄)인가? 두 가지 역할 혹은 정체성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시의 모습을 통해서 쿤데라는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환상을 유쾌하게 무너뜨린다.


<느림>(1995)에 이은 두 번째 프랑스어 소설 <정체성>에서 쿤데라는 좀더 직접적으로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을 다룬다. 쿤데라가 보기에 안정적이고 확실한 정체성이란 착각이거나 환상이다. 정체성의 구성조건이 고정돼 있지 않고 변화하는 한, 정체성 또한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의 주인공 샹탈은 남편과 이혼하고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동거중인데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에 상심한다.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샹탈의 정체성 위기다. 그녀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데 있어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연인의 존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소설은 장마르크가 익명의 존재를 가장하여 연인 샹탈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벌어지는 일들로 엮어진다. 가볍게 전개되는 연애편지 소동극이지만 쿤데라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한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혹은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안정적인 자아 이미지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한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반대로 정체성에 대한 고집과 맹신은 우리를 진실에 대한 몰이해와 오류로 이끌 것이다. 쿤데라와 함께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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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공감하고 갑니다.

로쟈 2023-12-17 11:32   좋아요 0 | URL
^^
 

겨울학기에 필립 로스를 읽으며 가방에 넣고 다니는 책이 <왜 쓰는가>이다. 올봄에 번역돼 나온 이 책은 로스(가족들은 ‘필‘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가 절필(2012)한 이후, 그리고 타계(2018)하기 바로 전해에 나왔다. 생전에 펴낸 마지막 책인 것. 에세이와 인터뷰들로 구성돼 있는데 로스의 독자들에게 마지막 선물 같은 책이다.

강의에서 <아버지의 유산>(1991)을 읽으며 로스가 1986년 가을에 토리노의 프리모 레비를 찾아가 인터뷰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인터뷰도 <왜 쓰는가>에 수록돼 있다. 이래저래 작품을 ‘두텁게‘ 읽도록 도와준다고 할까. 로스는 레비의 자택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는데, 2019년봄 이탈리아문학기행 때 토리노를 찾은 기억이 난다. 토리노는 레비 때문에, 그리고 니체 때문에 찾았었다. 당시 일행은 레비가 평생 살았던,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친 아파트 건물 앞까지 갔었다.

레비는 로스와의 인터뷰가 있고 수개월 뒤 자신의 아파트 통로 계단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다. <아버지의 유산>에도 이 사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시기로 봤을 때 로스와의 인터뷰가 레비의 마지막 인터뷰였을 가능성도 있다. 레비가 로스에 대해선 인상이라도 적은 게 있는지 궁금하다.

두 사람의 인터뷰 때 사진을 찾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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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내년부터 금요일 오전에 '인문클럽' 강좌를 진행한다. 주로 홀수주 금요일 오전(10시-12시)에 진행하는 비대면 강좌다. 첫 시즌 강의는 헝가리의 대표적 철학자와 예술사학자, 루카치와 하우저 읽기다(두 사람은 부다페스트 '일요서클'의 멤버들이기도 하다). 주제는 근대예술사와 근대소설론이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유료강의이며 문의 및 신청은 010-9922-3193 정은교).


루카치의 소설론과 하우저의 예술사 


1강 1월 05일_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



2강 1월 19일_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3강 2월 02일_ 루카치, <소설의 이론>(1)



4강 2월 16일_ 루카치, <소설의 이론>(2)



5강 3월 01일_ 루카치, <소설의 이론>(3)



6강 3월 15일_ 루카치, <삶으로서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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