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평계의 두 고수, 고명섭 기자와 로쟈 이현우를 함께 만나다

지난달 언젠가 알라딘과 사계절출판사의 주선으로 <즐거운 지식>(사계절출판사, 2011)의 저자인 고명섭 기자와 대담을 나눈 바 있다. 알라딘 인문MD님이 대담을 정리해서 올려주셨는데, '서평'에 관해 내가 몇 마디 거든 내용을 발췌해놓는다.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많이 쓰셨잖아요. 논란을 예상하면서도 굳이 그런 글을 쓰시는 거죠?

이현우 : 예상까지 한 건 아니고요, 예상 밖으로 논란이 생긴 경우가 있었지요. 서평의 경우는 아니고 오역 문제였는데, 사실 제가 번역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도 오역이 조금 있어요. 쇄를 더 찍을 때 수정을 해야 합니다. 표현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론서나 철학서는 많이 나가는 책이 아니라서 한 번 나오고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이게 교정되지 않고 남는 건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손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달랑 정오표만 올려놓으면 재미도 없고 해서 오역을 지적할 땐 동기부여 차원에서 ‘내러티브’를 부여하는데 이런 게 필화 사건이 된 경우도 있지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경우도 있고요.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오역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한마디 적었다가 강서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나중에 학위증명서도 검사실에 팩스로 보내고 했었죠. 작년에 강유원씨 공역서 관련으로 문제가 된 일도 기억이 나네요. 의외였거든요. 신뢰받는 출판사에서 그렇게 책이 나왔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요. 그 이전에는 주로 지젝 책 관련한 이야기들이 있었고요. 

사회 : 대개 학자 사회에서는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상례 아닌가요?

이현우 : 저는 이게 품앗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번역비평학회 일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 보면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어떤 책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대개 알아요. 그런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한국사회의 안면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각자 알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공유되지 않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교정되지 않는 지식, 이건 지적 냉소주의라고 생각해요. 이런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보고요. 그 과정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이 있더라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한 이론서의 역자를 만났는데 저 때문에 한 번 더 보게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이런 것도 저 나름대로는 기여라고 생각되네요. 



사회 : 제가 인문사회 출판사 분들을 만날 때 이 책은 이현우 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시겠구나, 고명섭 기자가 한겨레에서 서평을 쓰겠구나 하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두 분께서 요즘 벤또의 주재료로 삼는 주제가 있을까요? 

이현우 : 저는 조금 잡다한데. 블로그를 하다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책 말고도 그 책에 대한 정보나 서평이 공유되면 좋겠다 싶은 걸 많이 다루거든요. 블로그에 기사를 스크랩해두지만 정작 제가 관심을 덜 갖는 책도 있거든요. 그래도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 정도만 알아도 좋겠다 싶을 때가 있는 거죠. 책이란 건 읽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다수가 읽는 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내가 지금 못 읽어도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읽는다는 사실. 커다란 독서공동체 비슷한 걸 생각하는 거지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문학 전공이다 보니 철학이건 문학이건 생각을 자극하거나 충격을 주는 책들이 좋아요, 통념을 뒤집어보는 도전적인 책이요. 이런 게 철학이나 이론서가 갖는 강점이죠. 독서공동체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너무 어려운 책을 눈높이에 적절하게 맞춰주는 부분도 중요하죠. 블로그에서 이런 작업을 해왔어요. 지젝을 재미나게 같이 읽을 수 있도록 미끼를 던지는 일 같은 거요. 서평도 그런 중개의 역할이고요. 책을 당장 읽지 않을 사람에게도 책의 정보나 중심 맥락, 흥밋거리를 던져줄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라도 관심 가질 수 있겠죠. 그런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은 사실 서평보다는 비평 쪽인데, 이게 만족도가 더 높아요. 서평은 분량이 제한적이고 자기 주관을 드러낼 여지가 적으니까요. 조금 여유를 두고 진행할 생각이에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서평은 어떤 걸까요? 

이현우 : 저는 좋은 서평의 조건보다는 효과 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저는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이 제일 좋아요. 돈과 시간을 절약하게 하거든요. 별 하나짜리 서평을 설득력 있게 쓰는 거죠. 본인은 불만이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유익하니까요. 별 다섯 개짜리 서평보다 오히려 하나짜리 좋은 서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마존에서 서평을 볼 때 별 하나짜리와 다섯 개짜리를 보는데, 하나짜리도 짧은 거는 특별히 새길 게 없어요. 그런데 길게 차근차근 왜 이 책이 별 하나인가를 알려주는 서평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으로 좋은 서평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돈과 시간을 요구하는 서평이죠. (웃음) 사서 꽂아두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부추기는 글 말이에요. 세 번째는 잘 정리해주는 서평인데,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지만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이죠. 어디 가서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서평이요. 고명섭 선생님께서 이런 서평을 많이 써주시죠.  

사회 : 이번 주에 에코의 <책의 우주>가 나왔는데. 에코의 장서가 5만 권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지인들이 찾아와서 다 읽은 거냐고 자주 묻는다고 해요. 그럼 에코는 다음 주부터 읽을 책들이다, 고 대답을 하고, 책을 언제 읽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유쾌하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두 분께서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고 사시는지요. 

이현우 : 저는 책의 용도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종류에 따라 다른 독서법인 거죠. 문학 전공이다 보니 느리게 천천히 자세히 읽는 걸 훈련받았고 그런 걸 좋아해요. 시집을 한 시간에 다 읽었다, 이런 건 별 의미는 없잖아요. 잘 읽기 위해서 쓴다는 관점에서 ‘자기화’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게 제가 좋아하는 독서이고 권장하는 독서인데, 시간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만 읽을 수는 없다는 거죠. 때로는 속독을 필요로 하는 책들도 있거든요. 최근 원자력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는데 깊이 있는 독서를 필요로 하는 책은 많지 않거든요. 시사적인 책들의 경우에는 빨리 읽으면서 필요한 내용을 습득하는 독서를 요구하기도 하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요. 그에 반해 정독을 요구하는 책은 다시 읽는 걸 요구하죠. 두 번, 세 번 말이죠. 문학 강의를 하다 보니까 어떤 책은 매 학기, 일 년에 두세 번 이상 읽는데 그래도 재미있는 건 그때마다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이해가 달라지고 추가되고 교정된다는 거죠.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동의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책에서 <특성없는 남자>에 나오는 도서관 사서를 예로 드는데, 모든 책을 읽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기로 선택한 자기희생 정신이 투철한 사서예요. 사서가 책에 몰입해 읽게 되면 자기 역할을 다 할 수가 없는 거죠. 서평가도 부분적으로 그런 운명을 갖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정독하면 좋겠지만 한 권의 책을 정독하기 위해서 열 권의 책을 거들떠 볼 수도 없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열 권의 책을 보기 위해서 책을 정독하면 안 되는 처지도 있죠. 전자가 더 나은 운명이긴 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소수일 듯하고요. 후자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추천해주고 계시지만, 그래도 부탁을 드립니다.

이현우 : 읽은 책이라고 하면, 요즘 강의 때문에 읽은 책밖에 없어서.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이란 책이 최근 나왔는데, 전공서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교양서거든요. 서양 중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좀 읽는데 다른 문화권에 대해서는 잘 읽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스나 중세 문화는 교양서이고 러시아나 일본에 대한 책은 학술서로 분류가 되거든요. 관심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어요. 형편에 맞게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11.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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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5-1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 짜리 서평이야말로 정말 공들여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로쟈 2011-05-15 13:50   좋아요 0 | URL
'헌신'하는 것이죠.^^;

비로그인 2011-05-15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인문MD방에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명섭 기자의 서평은 주로 로쟈님의 페이퍼를 통해 보게 돼서 그런지 꼭 그분이 로쟈님 블로그에 초대돼서 대담을 나누는 것 같던데요^^

로쟈 2011-05-16 14:26   좋아요 0 | URL
^^
 

경제학자 우석훈의 자칭 '명랑좌파'란 말이 나름 신선하다고 생각했으나 문화사적으로 짚어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명랑'조차도 일제하의 강요된 프로젝트의 산물이라니 말이다. <백석의 맛>(프로네시스, 2009)의 저자 소래섭 교수의 신작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웅진지식하우스, 2011)가 전해주는 바가 그렇다. '명랑사회' 건설이 국가 이데올로기였다면 우울은 그에 대한 저항이었겠다(우울이 불온하다면 명랑은 불순하다?). 금지곡이었던 송창식의 '왜 불러' 같은 노래가 문득 떠오른다... 

  

서울신문(11. 05. 14) 식민지 조선의 강요된 ‘명랑화 운동’

대략 2년 전쯤의 일이다. 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는 1930년대 작가인 박태원과 김기림의 작품 속에 ‘명랑’(明朗)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 교수는 이후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를 탐색해 ‘명랑’의 문화사적 의미 변화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명랑’의 끝자락에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유쾌하고 활발하다.’는 뜻의 평범한 단어 하나에 놀라운 역사적 역설이 숨겨져 있었던 것.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명랑이란 단어에 주목해 우울한 근대를 읽어낸다. 총독부와 근대 자본주의가 강요한 명랑의 홍수 속에서 1930년대는 웃음이 넘쳐난 시대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다수 지식인과 예술가, 학생, 노동자들은 우울에 젖어갔다.

저자는 일제가 당시 조선에선 잘 쓰이지 않던 ‘명랑’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앞세우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총독부가 벌인 ‘대경성 명랑화 프로젝트’가 단적인 예다. 경성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보건 위생과 치안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자, 총독부는 이를 바로잡겠다며 도시 명랑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고 체제순응형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경성에 ‘명랑’이란 감정이 이식되기 시작했다. 학교는 ‘언행일치의 명랑한 인격’을 양성하라는 지침에 따라 ‘모범 인간’ 양성에 나섰고, 주류 언론들은 퇴폐적이고 저속한 유행가 대신 명랑한 유행가를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산책 즐기는 남자를 부축해주는 ‘스틱 걸’과 당구장에서 손님과 함께 게임을 하는 ‘빌리어드 걸’, 주유소의 ‘가솔린 걸’ 등 화려한 용모와 미소로 명랑을 꽃피우는 온갖 ‘걸’들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강요된 명랑’의 잔재는 ‘명랑화 운동’이나 ‘사회 명랑화 캠페인’ 등을 통해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명랑화’라는 말은 자취를 감췄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순응만을 강요하는 명랑화는 ‘행복화’나 ‘쿨’ 등의 레토릭으로 대체된 채 여전히 살아있다고 꼬집는다. 88만원 세대의 ‘쿨’ 또한 1930년대 ‘명랑 가면’의 21세기 버전에 불과하다는 것.

저자는 만화 명랑소녀 캔디를 통해 ‘외로워도 슬퍼도’식 명랑화로부터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진정한 명랑이란 자신의 진실한 감정과 대면하고 슬픔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니,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며 쿨한 척 애쓰지 말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되라.”고 말이다.(손원천기자) 

11.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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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블로그에 올라온 박노자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영어논문이 일종의 사회적 '위신재'라는 걸 지적하면서 영어논문 물신주의를 꼬집고 있다. 비록 다들 알면서도 내놓고 애기하지 않는 문제의 핵심을 짚어주는 글이다. <만감일기2>가 나온다면 묶일 만하다... 

  

한겨레(11. 05 13) ‘영어논문’이라는 물신과 ‘강남족 태평성대’

고고학이나 고대사 연구에서 ‘위신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위신재는 통치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그러나 실용성이 별로 없는 사치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고등학교 국사 수업에서 들으셨을 것 같은 ‘세형동검’은 국가 형성 직전 시대의 전형적인 추장층의 위신재이었습니다. 통치자의 성격이 바뀌는 데에 따라서 위신재의 모양도 당연히 바뀝니다. 계급사회가 발달할수록 통치자에게 내재화돼 있는 문화자본의 축약적 표현물이 위신재 노릇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집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문민 통치자들의 한시나 사군자 그림은 그랬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치계층들이 일단 분화되고 다양해졌기에, 그들에게는 꼭 획일적인 위신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급관료나 기업임원의 위신을 골프 솜씨가 잘 나타내겠지만, ‘일부’ 명문대 교수는 골프를 안 치거나 못 칠 수도 있습니다. 명문대든 어디든 간에 일단 교수가 되어서 중·고위층 관료나 대기업 임원들이 속한 ‘주류’ (즉, 중산층 상층부)에 편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골프보다 더 중요한 위신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위 ‘SSCI 영어논문’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사회과학 인용색인’ 정도가 됩니다. 단, 한국의 ‘명문대 교수’들은 이미 한국어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미국현지화’된 까닭에 ‘SSCI’라는 이름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세검과 금관(金冠), 한시, 사군자그림이나 일본강점기의 웅변대회에서의 일본어 연설 등 한반도적 위신재의 전통을 이어, 이 ‘SSCI 영어논문’은 이제 대한민국 학자 사회에서 하나의 물신(物神)이 된 셈입니다. 마당쇠의 피땀을 빨아 마당쇠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한시를 지었던 양반들처럼, ‘명문대’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인문한국’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서민들이 낸 혈세를 받아내, 그 혈세로 정상적인 국민은 읽을 수도 없고 읽을 가치도 별로 없는 글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과거의 모든 부조리와 폐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또 새로운 정신병적인 유행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과거 폐단 이어받아 새로운 폐단 만들기 
한 가지 오해를 미리 막고자 합니다. 지구 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로 학문적인 글을 써서 해외 학술지에 게재해 외국 동료가 볼 수 있도록 하는 일 자체는 그 어떤 범죄행위도 아니고 학자, 즉 지식노동자가 해야 하는 노동행위 중 하나입니다. 한시를 예쁘게 짓는 것 자체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예창작활동인 것처럼 말이죠. 저만 해도 영어로 논문을 꾸준히 써왔습니다. 저로서는 국내 국사학계의 논문작성 기준에 일부러 맞추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노동행위의 일종을 물신화(物神化)하느냐는 것이죠. 한시 이외에도 기(記)부터 제문(祭文)까지 수많은 장르가 있었듯이 지식노동자의 일에도 수많은 종류의 작업들이 있습니다. 학술강연, 대중강연, 일반수업, 지도학생상담, 대중학술서, 일반학술서, 고전번역서…. 남들의 혈세로 살 수밖에 없는 인문학자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나 글 등으로 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도 아주 고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종류의 작업들이 대중과의 소통 방법이라면 논문은 동료와의 소통 방법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어려울까요? 원고 1매당 투입되는 시간으로 봐서는 후자는 더 시간집약적 작업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열정이 필요하고, 특히 강연의 경우 일종의 ‘무대 기술’과 준비된 내공, 많은 고민도 필요하기 때문에 난이도를 가리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 저 같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대중들과의 소통도 서로 지식을 나누면서 더불어살이해야 하는 동료와의 소통도 포기할 수 없으니 뚜렷한 우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화되어버린 한국의 ‘학자 사회’에서는 논문 이외의 그 어떤 장르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며, 논문 중에서도 ‘영어논문’을 최고로 칩니다. 소통할 동료가 어느 언어권에 속해있는지,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는지에 따라서 더 고귀하고 덜 고귀한 분들을 가리는 모양입니다.

미시마 유키오 주제 논문도 영어로 써야 인정받아  
진정한 의미의 ‘실용’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대민행정을 맡아야 할 관료들에게 한시 작성이나 맹자 해석을 요구했던 과거제처럼 아주 비실용적인 일입니다. 예컨대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를 연구하는 학자가, 미시마 연구의 주류인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관련 논문을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본어로 논문을 써도 소통해야 할 동료, 즉 (당연히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전세계 미시마 연구자들이 다 읽을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아니면, (거의 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한국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을 <황성신문>의 유교관(儒敎觀)에 대한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어가 편한 구미인들이 본인이 편한 대로 영어로 논문을 쓴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죽을 만큼 영어가 불편한 사람들까지 본업인 연구사업을 다 제쳐놓고 영어 학술논문 작성법을 익히느라 근무시간을 다 보내고 결국 읽기가 너무나 불편한 딱딱하고 인위적인 영어로 몇 쪽을 쓰느라고 수개월을 낭비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실용’입니까?

이건 학술과도 실용과도 아무 관계없는 행위입니다. 한시 작성 능력은 조선시대 고급사회로의 ‘통문’이었듯이, 한국 사회귀족의 언어인 영어로 (‘이공계 전공자’가 아닌) 사회지도층 구성원이 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학계 ‘주류’로 들어와도 좋다는 일종의 ‘출입증’인 셈이죠. 차라리 ‘신분증’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태생적으로 ‘신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이 신분증의 획득은 훨씬 쉬울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강남족들은 아예 일찍 도미 유학 가서 내면까지 ‘황민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체로 한국어로 작성한 뒤에 사람이나 사서 얼마든지 ‘퍼펙트 영어’로 옮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뒷전으로 
그러면 출신성분도 나쁘고, 영어권 국가로 떠날 비행기삯도 학비도 없고, 그렇다고 대필자나 대역자(代譯者)를 고용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대중과의 소통도 공부도 연구도 다 깨끗이 잊은 채, 오로지 영어의 완벽한 구사와 ‘SSCI 학술지’ 심사자들의 기호에 대한 심층적 연구에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몰입해봐야 상당수는 계속 밀리고 밀리겠지만,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영어논문’에 몰입하는 분위기가 유지되기만 해도 권력을 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달성된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정신병원’이나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재벌왕국에서 ‘저항의 길’을 가르칠 수도 있는 ‘지식분자’들이 대중과 무관한 일에 매달려 있어야만 ‘강남족들의 태평성대’가 위협받지 않을테니까요.

영어논문들을 수천 개 단위로 작성해 휴대폰처럼 마구 수출해도, 점차 일본과 같은 침체의 길로 가다가 중대 위기를 맞이할 대한민국을 절대로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쓸모없는 짓에 매달려야 하는 수많은 국내 동료 분들, 정말로 적극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저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계시리라고 믿고 싶습니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11.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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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jpolitics 2011-05-18 08:29   좋아요 0 | URL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SSCI라는 단어를 적어도 미국에 와서는 들어본 적이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제 기억이 맞다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학과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저널 에디터십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구요.. 괜찮은 저널에 발표되면 굉장히 좋아하는 수준이고, peered review journal에 실리면, 좋아라 하는 것 같은데...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SSCI가 모든 것의 기준인 것 같더군요.

로쟈 2011-05-18 08:38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 내부의 차별화를 위한 것이니, 미국에서 어떻다든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죠...

2011-05-20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는 철학분야의 반가운 책이 여럿 출간됐다. 제임스 포웰의 <데리다 평전>(인간사랑, 2011)이나 지젝과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 독일 관념론의 주체성>(인간사랑, 2011)은 기다리던 책이고, 랑시에르의 <역사의 이름들>(울력, 2011)은 스티븐 내들러의 평전 <스피노자>(텍스트, 2011), 신칸트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주저 <상징형식의 철학 제1권: 언어>(아카넷, 2011) 등은 예기치 않은 책이다(3권짜리 방대한 분량의 <상징형식의 철학>은 완간될 예정이라고). '철학자들'이란 이름으로 묶어놓는다. 당장은 <데리다 평전>부터 읽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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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5-13 23:25   좋아요 0 | URL
페이퍼 보니까 너무 기뻐요^^ <데리다 평전>과 <스피노자 평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겠는데요. (지난 달 지출이 이미 초과고, 이번 달 아내님께 받은 책 용돈을 이미 써 버린 상태라 눈물을 머금고 비상금을....^^;;;)

로쟈 2011-05-14 10:08   좋아요 0 | URL
고대하시는 아렌트는 6월초에 나온다고 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1-05-14 13: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푸른바다 2011-05-14 08:1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지젝이 데리다의 전기를 썼나 했습니다.^^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의 출판사 책소개가 <데리다 평전>과 같네요. 알라딘의 착오인 듯 합니다. 지젝은 책을 써내는게 거의 프린터 수준인 것 같습니다. 읽기만도 벅찬 분량들을 줄기차게 써대는 그가 참 놀랍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번역자로 알고 있던 임규정 교수가 지젝 번역에 나선 것도 흥미롭네요. 암튼<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은 대충 주제가 어떤 건가요?^^

데리다 평전도 관심이 가는군요. 데리다는 현대 철학자 중 가장 신비로운 이미지에 싸여 있는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어렸을 때 읽었던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에서 볼테르/칸트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철학자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 박영사 문고본 <에티카>를 구매해서 읽었었지요. 완독은 못했지만... 이제 새로운 한국어 번역본과 영역본 2종 그리고 그 두터운 마트롱의 해설서까지 갖추고 있으니 언젠가 재도전에 나서려고 합니다.

로쟈 2011-05-14 10:11   좋아요 0 | URL
네, 잘못 올라와 있더군요. <데리다 평전>은 프랑스 지성사를 겸하고 있어서 구조주의 강의를 해야 하는 저에겐 유익하네요. 몇년 전에 사놓은 원서와 같이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가끔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오타로 나가는데 이번주도 그렇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1850)에 대한 간단한 독후감을 적었다. 개인적으론 멜빌의 <모비딕>(1851)과 함께 이번 학기 교양강좌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품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게 특기할 만하다.  

  

한겨레(11. 05. 14) 누가 주홍글자를 음란하다 했나

“미국인의 상상력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소설”(D. H. 로런스)이라고 하면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다. 과거 그의 단편 <큰 바위 얼굴>이 국어교과서에도 실렸었기에 마크 트웨인만큼 친숙한 작가이지만 <주홍글자>를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일단 주홍글자 ‘A’가 ‘Adultery’(간통)의 첫 글자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까. 실제로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이 작품을 필독서로 지정할 것이냐를 놓고 적잖은 분란이 있어왔다고 한다. 도색적이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면 몰라도 <주홍글자>에서 도색성과 음란성을 색출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7세기 미국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간통을 범한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에게 치욕의 징표로 주홍글자를 달아준 사람들조차 나중에는 ‘A’가 무슨 뜻인지 헷갈려한다. 헤스터가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걸 보고 그것이 ‘Able’(능력)을 뜻하는 걸로 해석하기도 하고, 밤하늘에 나타난 주홍글자를 보고선 ‘Angel’(천사)을 떠올리기도 한다. ‘A’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극적으로는 모호하며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신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의 역설에도 새겨져 있다. 그들은 인간의 미덕과 행복에 가득 찬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감옥과 묘지라는 걸 알았다. 삶을 가두고 매장하는 일이 지상천국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간통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주홍글자>의 이야기는 ‘감옥 문’에서 시작한다. ‘간통소설’이 아니라 ‘감옥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공동체의 질서를 문란하게 만든 혐의로 갇혔다가 젖먹이 아이를 안고 가슴에는 주홍글자를 달고서 감옥에서 나오는 헤스터는 처음부터 타고난 위엄과 강인함을 가진 여성으로 소개된다. “이 키가 큰 젊은 여자는 몸매가 이를 데 없이 우아했다. 검고 풍성한 머리채는 너무나 윤기가 흘러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녀는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늙은 학자와 결혼하고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온다. 그러고는 젊은 목사 딤스데일과의 순간적인 사랑으로 딸을 낳는다. 딸아이는 그녀에게 신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주홍글자’였다. 헤스터는 혼자서 딸을 키우며 오랜 소외와 인내의 삶을 살아간다. 과연 다른 삶을 살 기회가 그녀에겐 주어질 수 없는 것일까.

호손은 이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장에서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숲에서 7년 만에 재회하도록 한다. 똑같이 죄를 범했지만 처벌받지 않은 탓에 오히려 더 큰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딤스데일을 헤스터는 위로하며 그는 잠시 기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내게 기쁨의 씨앗은 벌써 시들어 버린 줄 알았는데! 오, 헤스터, 당신은 내 더없이 훌륭한 천사요!”

햇살이 흘러넘치는 대자연 속에서 두 사람이 다시금 맛본 삶의 기쁨은, 하지만 마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함께 새로운 삶을 꾸리자는 헤스터의 제안을 받고서도 딤스데일은 결국 죄의식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호손은 냉정하게도 두 사람의 행복은 세상이 성숙하여 좀더 밝은 시대가 올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본 듯싶다. 비록 실현되진 않았지만 “사회조직을 모두 깨부수어 새로이 세워야 한다”는 게 헤스터의 ‘새로운 생각’이자 신념이었다. <주홍글자>는 음란하다기보다는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다.  

11. 05. 13.  

P.S. 번역은 주로 민음사판으로 읽었지만 을유문화사판과 펭귄클래식판도 참고했다, 서숙 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주홍글자>(이화여대출판부, 2005)도 유익한 참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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