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여름방학이 되면 미술관 순례를 위해 유럽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잖다. 한번도 그런 마음을 품어본 적은 없지만 서점이나 도서관 순례라면 한번 더 생각해볼 것 같다. 유럽의 명문서점을 안내하는 책, 라이너 모리츠의 <유럽의 명문서점>(프로네시스, 2011)을 우선은 읽어본 다음에... 

 

한겨레(11. 05. 21) 박물관·미술관 뺨치는 개성만점 ‘명문’ 서점들

“정말 멋진 서점들은 무자비한 도시계획에 밀려나거나 파산하여, 우리 기억 속에만 인상 깊게 남아 있을 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출판계에 오래 몸담아온 라이너 모리츠는 이렇게 적었다. 유럽도 다르지 않은가 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동네책방은 거의 멸종 단계에 접어든 듯하고, 대학가에도 서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입시용 참고서와 문제집, 취업과 자격증을 위한 책들로 연명하는 서점들이 드문드문 남았을 뿐이다. 대신 도시 한복판에는 거대한 서점들이 대형 백화점처럼 좌판을 넓게 펼치고 있다.

그래서 라이너 모리츠의 아쉬움은 우리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그가 유럽의 독특하고 유명한 서점 20곳을 뽑아 소개하는 책 <유럽의 명문서점>은 괜찮은 서점조차 찾기 어려운 우리 독자들에겐 ‘서점의 로망’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아직도 이런 서점들이 버티고 있는데 서점의 몰락을 걱정하다니 말이다. 



책이 소개하는 명문 서점들은 아름다운 인테리어 자체로도 눈길을 끌지만, 서점이 들어선 공간이 독특한 점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곳들이 많다. 화려한 쇼핑가의 한가운데 있는 서점, 퇴근길 전차철로 고가 아래에 자리잡은 서점, 교회 건물을 서점으로 바꾼 서점 등등이 이어진다. 

수십년에서 수백년에 이르는 역사를 지닌 서점들은 첨단 시스템을 갖춘 곳도, 오래 묵은 박물관 같은 곳도 있다. 고서점에선 책에서만 만나온 옛 명사들의 흔적이 가득하고, 미술사에 등장하는 천장화를 감상할 수 있는 서점도 있다. 라이너 모리츠의 말마따나 이 책에서 ‘노스탤지어’만 확인하게 되는 건 아니다. 고객 전용 서가를 제공하는 곳도 있으며, 에코백 유행을 불러일으킨 서점도 있다.  

이런 명문 서점들의 흥미진진한 면모는 텍스트를 넘어 전문 사진작가 두명이 찍은 사진들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유럽 여행 가이드북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책 뒤편에는 스무곳의 주소와 연락처 등 외에 이밖에 더 가볼 만한 서점들을 소개해뒀다. 지도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김진철 기자)  

11. 05. 27. 

 

P.S. 서점 이야기로는 루이스 버즈비의 <노란 불빛의 서점>(문학동네, 2009)도 챙겨놓아야겠다. "이 책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고대 로마, 6세기의 중국 등 역사의 구석구석을 간단없이 누비며 서적판매업이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 상세하고도 매혹적으로 서술해놓았다. ‘관능적인 독서 공간’에 관한 세밀한 고증이자 애정의 기록"인 책. 도서관쪽으로도 책들이 나와 있다.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의 <세계 도서관 기행>(웅진지식하우스, 2010)에서 가보고 싶은 도서관들의 리스트를 얻을 수 있다. 최정태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2011)도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들이 발로 쓴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우리교육, 2009)란 책도 나와 있는 건 이번에 알았다. 도서관에는 다 비치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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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5-27 12:47   좋아요 0 | URL
신문에서 소개기사를 읽고 아쉬어 했습니다. 3년전에 파리(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2년전에 런던을 다녀온 터라 일찍 나왔으면 좋았었을텐데요.
미국에서 별 유명하지 않은 대학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깜짝놀랐습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도서관 모습에 .. 우리로써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서점, 도서관 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로쟈 2011-05-28 07:38   좋아요 0 | URL
관심과 열의만큼의 문화를 갖는 것이죠...

Daniel 2011-05-28 04:37   좋아요 0 | URL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읽고는 유럽 여행을 책마을들 위주로 꼭 한번 가고싶다했는데 더 갈 곳이 많았졌네요^^;;

로쟈 2011-05-28 07:36   좋아요 0 | URL
네, 책마을도 있었지요. 찍을 곳이 너무 많네요.^^;
 

직장인이라면 이제 막 점심메뉴를 골랐거나 골라야 할 시간이겠다. 이번주에 나온 폴 그린버그의 <포 피시>(시공사, 2011)에 눈길이 갔다면 생선구이나 참치 전문점 쪽으로 발길이 가지 않았을까. '포 피시(Four Fish)', 말 그대로 네 종류의 물고기가 주인공인 책이다. 부제는 '네 종류 물고기를 통해 파헤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환경의 미래'. 제목에다 쓴 연어, 농어, 대구, 참치가 우리의 '빅4'다.

   

번역본 표지는 낚시를 연상시키지만, 원저는 생선 시장이나 마트의 생선 코너 분위기다. 아무려나 제목만으로 '오늘의 책'에 값한다(순수한 책벌레의 입장에서 나는 이런 책을 좋아한다. '로쟈의 낚시'에 잘 부합하기도 하고). 저자의 발상이 특별하진 않으면서도 참신한데, 소개는 이렇다.  

작가이자 평생 낚시를 하며 살아온 폴 그린버그는 우리의 식탁을 장악해온 연어, 농어, 대구, 참치의 역사를 탐험하는 여정으로 우리를 인도하면서 이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물고기가 어떤 상태에 처했는지 밝히고 있다.

맘에 드는 책이 나온 만큼 원서의 이미지를 찾아봤다. 실제 크기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키워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연어, 참치, 농어, 대구다. 물론 한국인이 더 좋아하는 고등어나 갈치, 삼치 등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이들이 '빅4'란 얘기다.   

 

책 대신에 생선들을 서재에 올려놓으니(서재의 좌판화?) 날씨따라 궂은 마음이 조금 펴지는 기분이다. 비록 점심메뉴가 생선구이는 아니더라도... 

11. 05. 26.  

P.S. 네 종류 물고기 가운데, 대구는 마크 쿨란스키 덕분에 이미 조명을 받은 바 있다.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미래인, 1998) 정도되면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절판된 책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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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6 14:23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번역본 표지는 좀 덜 싱싱해 보이네요 ㅋㅋ 오늘은 대구탕이 당겨서 그런지 대구가 유독 반가운데요^^

로쟈 2011-05-27 08:33   좋아요 0 | URL
네, 원서의 표지가 훨 싱싱해보이는데 말이죠...

雨香 2011-05-27 12:51   좋아요 0 | URL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구미가 당기는 책입니다. 음식에 관심을 두다 보니 음식이라는 것이 사회,문화,역사,자연을 모두 품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고 있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로쟈 2011-05-28 07:40   좋아요 0 | URL
전 어제 서점에 들렀는데, 허탕치고 왔습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의 새 평론집이 나왔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2011). 기사를 보니 첫 평론집인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과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도 합본호로 재출간됐다. 말 그대로 '백낙청 비평의 어제와 오늘'을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마침 내달에 '문학들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의할 일이 생겼는데, 유용한 참고가 될 듯하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알라딘에는 아직 입고가 안 됐는지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한겨레(11. 05. 26) 문학, ‘촛불’ 앞에 당당할 수 있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2007년 이후 쓴 문학평론들이 제1부에 실렸고, 찰스 디킨스와 토머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 같은 영국 작가들을 다룬 글들이 2부로 묶였다. 이 가운데 표제 평론인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은 ‘촛불과 세계적 경제위기의 2008년을 보내며’라는 부제가 가리키듯 2008년 한국을 뒤흔든 촛불 집회를 지켜보면서 문학이 당대 현실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백 교수는 “평론가들이 자기네끼리만 읽히는 글쓰기로 자족하고 작가들조차 상당수가 그런 평론에 언급되기 위한 작품만 쓰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며, 지금이야말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다시 던져야 하는 때라고 주장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의 구분이다.  

오늘날 평론가들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리얼리즘을 낡은 것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는 ‘자연주의적 모사론’으로서의 사실주의와 이를 극복한 심화된 리얼리즘을 구분하자는 쪽이다. 그가 보기에 리얼리즘은 “여전한 열쇠말”이다. 그는 일부 작가들이 사실주의적 기율을 ‘함부로’ 어기고 자의적인 묘사와 서사를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 대한 예의를 방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인식 위에서 그는 윤영수의 <소설 쓰는 밤>이 지닌 날카로운 현실비판 정신, 그리고 박민규 소설 <핑퐁>의 경쾌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높이 평가한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과 함께 나온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에서는 ‘백낙청표 민족문학론’의 초기 형태를 엿볼 수 있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호 권두논문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민족문학론의 전 단계를 보여주는 ‘시민문학론’, 그리고 “‘민족’이라는 단위로 묶여 있는 인간들의 전부 또는 그 대다수의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문학”이라는, ‘민족문학’에 대한 유명한 정의를 담은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등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에 포함되었다면,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에 묶인 글들은 문학평론이라기보다는 나중에 분단체제론 등으로 발전해 나갈 사회과학적 성격의 논문과 시사 칼럼이 대종을 이룬다. 



책을 내고서 25일 낮 기자들과 만난 백 교수는 “첫 두 책을 개정 출간하느라 30, 40년 전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처음의 문제의식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스스로 자부한다”며 “그러나 ‘민족문학’이 주제목에서 부제로 내려간 데에서 보듯, 지금은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말을 그 전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상대적으로 써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신실하게 계속 하는 일은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긴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이 비평이라면, 그것은 인문교양의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그 중요성은 문명사회의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죠. 평론가란 어디까지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 독자를 위해 자신이 읽은 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11.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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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5-2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이 책이 다시 나왔군요.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는 지금 보니 창비가 아닌 "시인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었네요. 두 권모두 헌책방에서 구했었습니다. 백낙청 선생의 요즘 글들은 읽다보면 좀 고리타분하단 느낌도 들기도 하지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 실린 "시민문학론"은 참으로 포괄적이고 밀도 있는 명문장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다시 출간 된다니 반갑네요. <백낙청 대화록>과 이번에 새로 출간된 평론집을 빼면 백낙청 선생의 저술은 모두 소장하고 있는 셈인데 훨씬 짧은 기간 활동했던 김현 선생에 비해 비교적 저술이 많지 않은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이 아직 입고가 되지 않은 듯 인터넷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네요. 책이 깔리기도 전에 신문에서 다루어지는 건 백낙청 선생의 힘일까요? ㅎㅎ

로쟈 2011-05-26 12:27   좋아요 0 | URL
어제 언론인터뷰를 가졌나 봅니다. 보통 서점보다 언론사에 먼저 뿌리긴 하죠...
 

남미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의 <1492년, 타자의 은폐>(그린비, 2011)가 출간됐다. 부제는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 당초엔 2009년에 출간도서로 예고돼 있었는데, 다소 늦어졌다. <공동체 윤리>(분도출판사, 1990)란 책이 오래전에 나온 바 있으므로 국내에 소개되는 첫 저작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처음'이란 인상을 받는다. 관심도서를 올려놓으면서 한겨레의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시리즈 가운데 '엔리케 두셀' 편을 자료로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2. 27) 식민성의 세계화…해방철학은 ‘진행형’ 

엔리케 두셀은 1934년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태어나 철학을 공부했다. 스페인 콤플루텐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대학에서 인류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던 중 1973년 극우집단의 살해 위협을 받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윤리학, 정치철학, 라틴아메리카사상사 분야의 저술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지금도 건축중인 해방철학의 기본 골격을 마련했다. 카를 오토 아펠, 잔니 바티모, 위르겐 하버마스, 리처드 로티, 에마뉘엘 레비나스 등과 지속적으로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으며 50여권의 저서와 400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해방철학>(1977), <말년의 마르크스(1863~1882)>(1990), <타자의 은닉>(1992), <철학을 넘어서-역사, 마르크시즘, 해방신학>(2003), <정치학에 관한 20개의 명제>(2006), <해방정치학- 비판적 세계사>(2007) 등이 있다.  

혁명 사상에 치명상을 입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인류는 혁명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있지만, 그 후 20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월가의 파산은 혁명 이후를 생각하기에도 너무 성급한 시점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의 범람은 옛것은 사라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시대적 불안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다. 마르크스에게 혁명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면, 베냐민에게 혁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역사를 멈추게 하는 제동장치였다.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는 사회적 불의와 생태계의 파괴는 좌우를 불문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부를 만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베냐민의 새로운 혁명 개념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새로운 혁명 개념은 1960년대 말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 근대성의 본산인 유럽에서는 탈근대적 비판이, 서구 바깥에서는 라나지트 구하를 중심으로 포스트식민주의운동이 태동했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두셀을 중심으로 해방철학이 등장했다. 해방철학 연구자들의 글을 모아 놓은 첫번째 책(1973)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 형식의 글이 실려 있다. “해방철학은 ‘에고’(ego)로부터, ‘나는 정복한다’, ‘나는 생각한다’ 혹은 ‘권력의지로서의 나’로부터 사유하지 않는다.… 해방철학은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변화된 사람의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종속국가의 위치에서 사유한다.… 해방철학은 타자의 외부성으로부터 사유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철학은 레비나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주체와 가치, 진리와 형이상학을 붕괴시키기 위해 고투했던 니체와 현존재(Dasein)를 통해 주체의 주체성을 비판했던 하이데거가 완고한 내부성의 철학의 외부를 탐색하는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면, 레비나스는 이성의 외부가 타자임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레비나스는 외부를 근대적 범주(예컨대 이성의 외부로서의 광기)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푸코의 타자와도 달랐다. 그러나 해방철학은 레비나스가 유럽 내부에서 사유하고 타자에 대한 순수한 윤리적 책임만을 요구하는 지점에서 레비나스와 갈라진다.

두셀은 해방철학이 객관적이고 탈정치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체계의 희생자, 가부장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 황폐화된 지구를 상속받을 미래의 세대 등 가능한 모든 부류의 타자성을 위해 투쟁할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철학은 자기비판적 자세로 주변부에, 서발턴(하위주체)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두셀의 주장에는 비판철학자로서의 결기가 드러난다. “체계 안에서, 체계 앞에 서 있는 타자를 위한 책임은 모든 우선성보다 앞서는 우선성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 능동성이다. 그것은 세상의 시작보다 앞선 시작이고, 세상을 있게 한 시작이며, 세상의 선험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해방의 영웅은 체계의 반(反)영웅이고 위험에 자신의 삶을 던진다. 따라서 (억압받는 타자에 대한) 책임은 최상의 용기이고, 부패하지 않는 요새며, 총체성의 구조를 드러내는 진정한 통찰력이자 지혜다.”

해방철학의 비판적 범주가 근대적 주체성을 겨냥한다면, 비판의 구체적 실천은 역사적 접근으로부터 얻는다. 역사적 접근이란 ‘장기 16세기’에 시작된 세계체제(world-system)를 뜻한다. 해방철학을 (푸코, 데리다, 바티모, 레비나스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데카르트가 163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말하기 훨씬 이전에, 스페인 국왕이 서류에 서명할 때 사용했던 ‘나’는, 코르테스가 1521년에 ‘나는 정복한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했던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프랑스 ‘고전 시대’의 인식론을 탐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난 500년 동안 근대성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체제 분석은 근대성, 식민주의, 세계체제, 자본주의, 아메리카의 발견·정복이 동시적이고 상호구성적 사건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계몽주의 근대성은 15세기 말 식민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성을 은폐하는 근대성의 신화다. 이런 맥락에서 두셀은 근대성의 신화가 독자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유럽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유럽을 마치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메리카의 발견·정복으로 시작된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대성 신화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전지구적인 중심-주변 구도의 출발이었다. 아메리카 정복 초기에 ‘인디오 전쟁의 정당한 명분’을 주장했던 세풀베다가 최초의 옥시덴탈리즘 이데올로그였다면,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했던 라스 카사스는 중심-주변의 구도에서 근대성에 대한 대항담론을 설파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한 현재 진행중인 세계화가 근대·식민 자본주의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식민주의가 종식된 이후에도 ‘권력의 식민성’은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철학이 단지 라틴아메리카사상의 한 가지 양상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면서 동시에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착취 구조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셀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럽중심적 ‘거대서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체계 외부의 타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하기 위해 단지 작은 이야기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리고베르타 멘추, 사파티스타, 아메리카의 흑인, 미국에 거주하는 라티노, 페미니스트, 주변인, 전지구화된 초국적 자본주의의 노동계급 역시 그들의 기억을 재건하고 그들의 ‘인정 투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서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두셀이 경계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환원론적인 방식으로 적용되는 이원론(중심-주변, 발전-저개발, 종속-해방, 총체성-외부성 등)이다. 다시 말해,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전통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전근대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주의자, 포퓰리스트, 파시스트 집단이 추구하는 반근대적 지향도 아니며, 파편화된 순수한 차이만을 긍정하는 탈근대적 비판도 아니라는 점이다. 두셀은 해방철학을 트랜스모던(transmodern)적 기획, 즉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적 해방의 특성을 실재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며 근대성이 저질렀던 희생제의적·신화적 특성을 부정함으로써 은폐되었던 타자성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화→문명화→근대화→세계화’라는 근대성의 신화와 수사학에 가려진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폭력과 불의를 비판할 수 있을 때 칸트가 설파했던 계몽의 이성은 비로소 해방의 원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계몽적 이성을 앞세운 유럽중심주의와 발전주의의 오류가 드러날 때 추상적 보편주의에 가려져 있는 현실의 다채로운 풍경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다. 두셀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완의 기획은 근대성이 아니라 탈식민성이다.(김은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11. 05. 25.  

 

P.S. 두셀의 책은 대학원 시절에 <근대성의 이면>을 구해서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지 못한다. <철학을 넘어서>나 <정치학에 관한 20개의 명제> 같은 책도 눈길을 끄는데, 후자는 번역중이라고 들은 듯싶다. 조만간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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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여민주주의와 해방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8 08:04 
    방한중인 남미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의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라틴아메리카 참여민주주의의 현주소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 그리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정보기술 발전에 따른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눈길을 끈다. 경향신문(11. 06. 07) "남미 참여민주주의는 세계 정치의 새 경험”우리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미국과 유럽 등 서구 학문이 중심이 돼 왔다. 마찬가지로 지난 10년 동안 중도좌파 정권이 들어

부산대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이 출간됐다. 무려 100권이 나올 예정이라는데, 첫 세 권으로 <안중근 평전>(황재문 지음), <이완용 평전>(김윤희 지음), <최남선 평전>(류시현 지음)이 이번주에 선보였다. 출생년도로 치자면 이완용이 가장 앞서야 되겠지만, 시리즈의 순서는 안중근이 먼저 오게 해놓았다. 우리가 다 알 만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앞으로도 윤선도, 조광조, 남효온, 서거정 등 조선의 인물과 신채호, 고종, 명성황후 등 근대 인물, 지소태후, 이매창, 황진이 등 역사 속 여성 등을 다룬 평전이 추가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번 1차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이완용 평전>이다. 안중근 관련서는 그간에 다수 출간됐고 최남선의 경우에도 전기와 연구서들이 좀 나와 있는 편이다. 이완용의 경우엔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중심, 1999)이 거의 유일한 단행본이 아닌가 싶다(지금은 절판된 듯하다). 개인적으론 최학주의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나남, 2011)이 얼마전에 들여다본 책이다(완독하진 않았지만). 안중근의 경우에는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시대의창, 2009)이 정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은데, 어린이용으론 조정래의 <안중근>(문학동네어린이, 2007)도 나와 있다.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책을 통독해봐야 알겠지만 책갈피의 소개를 참고하면, '합리적인 근대인'이라는 게 저자의 '재평가'로 보인다. 이렇게 돼 있다.  

이완용은 기존의 평가처럼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인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관료도 아니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혜택을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 위기 앞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현재를 껴안으려 했던 현실적 인간이었다.  

짐작에 이완용의 행적에 대한 독서는 '우리 안의 이완용'과 대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1.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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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번뇌보이 2011-05-26 16:32   좋아요 0 | URL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박지향 교수가 <윤치호의 협력일기>에서 윤치호를 근대인의 전형이라 평가한 것과 유사한 시각이군요~흥미로울 듯 합니다~

로쟈 2011-05-27 08:34   좋아요 0 | URL
근대, 근대성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보게 될 듯해요...

Daniel 2011-05-28 04:34   좋아요 0 | URL
윤덕한 선생님 책 본 게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합니다만 이완용에 대한 기존의 매국노 정도의 인식에만 있던 제겐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대세를 쫓아서 그리되었다고 윤선생님께선 평하신걸로 기억합니다만...

로쟈 2011-05-28 07:39   좋아요 0 | URL
'대세'주의라면 요즘도 대세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