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관련서들과 함께 이번주 관심도서의 첫 머리에 오는 것은 철학서들이다. 특히 푸코의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문학과지성사, 2013)와 조광제의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그린비, 2013)이 내가 염두에 둔 책이다. 분량이 사뭇 차이가 나긴 하지만(<존재의 충만>은 두 권 합계 1300쪽이 넘어간다) 각기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과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대한 '서설'과 '강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없지도 않다.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에 대해서는 역자가 일러두기에서 자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는데, <광기와 비이성.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국가박사학위논문의 부논문으로 제출한 것이다.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붙인 형태다. 그래서 원제목은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설>이고 프랑스에서도 2008년에야 출간됐다고.

 

 

 

푸코가 번역한 칸트의 책은 국내에서도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울산대출판부, 1998)으로 번역됐었다. 지금은 절판됐는데, 나도 구입해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구하기는 어려운 책. 프랑스에서는 푸코의 번역과 서설이 같이 묶여서 출간됐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랬다면 더 좋을 뻔했다. 현재로선 '기기'도 없는 상태에서 매뉴얼을 읽어야 하는 형편이 됐으니까.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찾아보거나 영역본이라도 구하든가 해야 한다. 그나마 3대 비판서에 비하면 분량이 많지 않은 게 다행. 아무튼 '서설'이란 말에 이끌려서라도, 게다가 칸트와 푸코를 함께 읽는 '일거양득'을 위해서라도 '인덕후'('인문학 덕후(오타쿠)'를 일컫는 말이라고)라면 도전해볼 만하다. 추천사에서 서동욱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이 책은 미셸 푸코가 철학적 문헌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 학자인지를 잘 알려준다. 공격 목표와 방식은 뚜렷하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인간 개념이 영속적이지 않다는 것, 바닷물이 밀려오면 녹아 없어지는 모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상 깊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철학에서 누가 인간 개념을 수립하였는가? 바로 칸트이다. 칸트의 과업을 건드리지 않고는 인간 개념의 해체는 완성을 전망해볼 수 없는 사업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을 분해해나간다. 문헌학자답게 칸트의 방대한 저서들을 순 문헌학적 견지에서 접근하면서, 인간 개념이 얼마나 허약한 조형물인지 세세히 파고든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는 푸코 서설로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과 사물>과 <광기의 역사>를 내처 읽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여력이 있다면 서동욱 교수가 옮긴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김현의 푸코 연구서 <시칠리아의 암소>를 이번에 전집판으로 다시 구입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보고픈 생각에. 그런 '리리딩' 목록에 디디에 에리봉의 평전 <미셸 푸코, 1926-1984>(그린비, 2012)도 집어넣고. 작년에 다 못 읽은 <루이비통이 된 푸코?>(난장, 2012)도 거기에 더 얹고. 인생은 두 번 살지 못하지만, 책은 두 번 읽을 기회가 온다. 독서가 인생보다 맘에 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존재와 무> 강해'에 대해서도 한마디 붙인다. 책은 저자가 철학아카데미에서 2년 동안 진행한 강좌 '사르트르, <존재와 무> 강해'의 강연원고를 묶은 것인데, 교재로 사용한 번역본이 손우성 번역의 삼성출판사판이다. 나도 갖고 있는 책이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 때문에 강해를 따라가려면 도서관에서 빌려보거나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어야 할 듯싶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시절에 해마다 읽어보겠다고 계획만 세우고 완독하지 못했던 책이 <존재와 무>였기 때문에(학부시절 사르트르는 영웅이었다) <강해>가 나온 김에 올해는 읽어봐야겠다는 의욕도 갖게 된다.   

 

 

 

저자가 서문에 적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동안 사르트르 철학에 관한 연구가 미진했다." 다소 기이한 정도로 미진했는데, "국내의 철학계에서 나온 연구서로는 신오현 교수가 써서 1979년에 출간된 <자유와 비극: 사르트르의 인간존재론>(문학과지성사)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국내의 문학계에서는 변광배 선생이 쓴 <장 폴 사르트르: 시선과 타자>(살림출판사, 2004)와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살림출판사, 2005)이 비록 소책자의 형태이긴 하나 일정하게 철학적인 영역을 탐색한 것으로 나와 있다."(22족)

 

단행본으로 치자면 그렇지만, 엔솔로지도 몇 권 있고 또 박이문 선생의 많은 책들이 사르트르의 철학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걸 고려하면 좀 박한 평가다(박이문 선생은 자서전의 제목도 <사물의 언어>(민음사, 1989)라고 붙였다). 지금은 다 절판됐지만 <인식과 실존>(문학과지성사, 1982), <삶에의 태도>(문학과지성사, 1988) 등이 내가 사르트르 철학 '입문서'로도 읽은 책이다. <자유와 비극>은 기억에 저자의 학위논문이고, 학부 2학년 때인가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있다. 박이문 선생의 책들을 한창 읽을 때였지만 역시나 어려운 책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참고로 사르트르의 국내 수용에 대해서는 <실존과 참여>(문학과지성사, 2012)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푸코와 칸트와 사르트르를 읽는 걸로 올해의 철학독서를 시작해봐도 좋겠다는 것. 그럴 여건이 만들어졌으니까...

 

13. 01. 12.

 

 

 

P.S. 혹 더 쉬운 책을 찾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이번주에 나온 책으로는 마이클 켈로그의 <철학의 세가지 질문>(지식의숲, 2012)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저자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원해도 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칸트의 세가지 질문을 소크라테스에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대표적 철학자들에게 던진다. 평이하지만 얕지 않다. 새로운 스타일의 철학 입문서로도 읽힌다. 그리고 잭 보언(보웬)의 <철학의 13가지 질문>(다른, 2012).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철학소설로 전에 <드림위버>(다른, 2009)라고 나왔던 책이 장정을 바꿔서 재출간됐다. "<소피의 세계>보다 성숙하고 철학적인 책"이라고 박이문 교수가 평했다. 보웬의 책으로는 <범퍼스티커로 철학하기>(민음인, 2012)로 시작해도 좋겠다.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 속 짧은 문구에 집약된 의미를 생물.행동.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저명한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사상과 접목시켜 풀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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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2021-07-3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나이로 늦게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교재를 읽다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읽을거리로 소개되어 급 알리딘에서 검색하다 로쟈님의 책소개를 읽었읍니다.철학입문서 소개는 물론이고 ‘책은 두 번 읽을 기회가 와서 인생보다 맘에 든다‘ 는 말씀이 맘에 콕 박히네요..후훗..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이 무더운 여름에 저도 읽을려고 쌓아두기만 했던 철학서적을 탐독할 생각입니다~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당초 푸코의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문학과지성사, 2012)가 출간된 김에 철학책들로 채우려고 했으나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새물결, 2012)가 눈에 띄기에 방향을 틀었다(책은 바로 주문했다). '세계문학' 거장들의 책들을 골라놓는다. 새로 번역돼 나온 포크너와 로렌스, 조이스, 그리고 발자크가 그들이다. 요즘 번역본이 쏟아지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경우는 다음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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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무지개 세트 - 전2권
토머스 핀천 지음, 이상국 옮김 / 새물결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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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분노 (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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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니와 애니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백낙청.황정아 옮김 / 창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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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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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한차례씩 연재하는 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11113847§ion=05 를 참고하시길). 지난 연말에 가진 좌담에서 다룬 책은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이후, 2012)였다.

 

 

 

프레시안(13. 01. 11) 냉동된 지도자의 시체…그는 신이 되려 했다!

 

(...)

 

이권우 :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는 다윈주의 충격에 대한, 과학으로 무장한 세속주의의 대응 같아요. 구체적으로 34쪽을 보면 "인간과 지각 능력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그토록 기나긴 진보의 과정을 기껏 거치고 나서 완전히 소멸할 운명에 이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 영혼의 불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의 소멸이 그리 끔찍한 전망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나오죠. 이 구절이 영국 심령주의자들의 기본적 속성 같아요. 우리 육체가 불멸한다는 게 아니라 영혼이 사후에도 지속된다는 것, 이 사후에 지속하는 영혼이 계속 진화한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19세기 말 고전학자 프레더릭 마이어스는 "과학은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물리적인 재앙으로 중단되지 않고 무한히 먼 목적을 향해 계속 움직여 나가는 도덕의 진화 과정' 상에 있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줄 터"라는 믿음을 가졌지요. 심지어 본인이 죽기 전에 봉인된 편지를 친구에게 남기고, 나중에 유령이 되어 영매를 통해 그 편지와 똑같은 내용의 신호를 보내겠다고 했죠. 결국 같지 않다는 게 드러났지만.(웃음)

 

김용언 : 영국 심령주의자들의 한계는 엘리트라는 데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다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자, 교수, 물리학자, 작가 등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꿈꿨던 사후 세계라는 게, 자신들의 그 좁은 귀족 그룹 이외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잖아요. 상류층 사람들이 그 상류층의 삶을 사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이미 19세기 말에 이르면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어떻게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자신의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불안한 예감도 심령주의 부흥에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권우 : 맞습니다. 101쪽에 보면 유령과의 교차 통신에 '정신적 우생학' 실험이 포함되잖아요. 우생학은 결함을 없애는 걸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심령학자들은 사후 육신에 결함이 없을 거라고 믿었고요. 그러니까 양쪽 모두 과학의 어떤 성과를 받아들이면, 인류가 과거에 발생한 그 어떤 수준보다도 더 높이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거지요. 우생학이 대체로 엘리트 중심이고 지배권력 중심이다 보니까, 심령주의에 빠진 인물들도 엘리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영국인들의 불멸의 꿈은 엘리트 중심 우생학이 심령주의와 얽히면서, 다윈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그에 저항하려 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이현우 : 이 책에선 영국과 러시아의 공통점으로 진보에 대한 관념을 꼽지요. 지금이야 모두들 진보와 진화가 다르다고 얘기하고, 진화의 동력이라는 건 우연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계기에 따라 진행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당시에는 그런 관념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관념 자체를 전부 폐기하지 못했지요.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에선 마르크스적인 진화론을 종교적 관념과 결합시켜요. 부르주아 사회가 폐기된 이후에 새롭게 도래될 사회라는 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이고, 그 사회주의적 인간 자체도 훨씬 더 나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팽배합니다. 흥미로운 건 '더 나은 인간'의 조건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는 겁니다.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도 얘기했지만, 죽음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됐어요.

 

이권우 : 책 53쪽에 보면 그렇게 왜곡된 방향으로 대중화된 진화론에 대해 나옵니다. "진화에 완전함을 향해 가는 경향이 내재"되어 있으며 "진화는 하등한 생명 형태에서 고등한 생명 형태로 가는 과정"이라는 속설 말이죠. 그걸 퍼뜨린 대표적 인물이 허버트 스펜서와 프랑스의 생물학자 라마르크라고 지적합니다.

 

이현우 : 오늘날에도 통속적으로 많이들 그렇게 오해를 하지요. 라마르크 식 유물론, 스펜서 식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요. 보통 우파 이데올로그들도 적자생존이 진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잖아요. 이 라마르크 진화론은 러시아의 스탈린 시대에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수용됩니다. 책에 언급된 유명한 예로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가 나오지요. 사실 다윈 식 진화에는 이념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인간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자연의 유전적 특성을 바꾸면서 개선시키고 발전시킨다는 노력에 라마르크 식 진화설이 잘 들어맞기 때문에, 리센코는 바로 그 라마르크 식 진화론을 채택합니다.

 

다윈주의 진화론을 신봉했던 생물학자들은 리센코의 정적으로 간주되어 전부 숙청당해요. 특히 세계적인 육종학자였던 니콜라이 바빌로프도 그 와중에 희생당하고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심각한 식량난을 해결을 못 했고, 소련의 생물학은 약 30년 동안 퇴보 상태에 머무릅니다. 이념적으로 옳은 것,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기 좋은 것, 실제 과학적 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데, 그 중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큰 재앙의 결과를 맞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러시아 작가 보이노비치의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추어 생물학자인 한 등장인물이 육종 개량 시험을 하는데, 그 프로젝트 이름이 '사회주의로의 길'이에요. 토마토 줄기에 감자 뿌리를 결합시켜 아래는 감자가, 위에는 토마토가 열리게 하는 거죠. 절반의 성공을 거둡니다. 감자 줄기에 토마토 뿌리로.(웃음) 현실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동시에 리센코주의의 비판이기도 해요.

 

이권우 : 방향이 자연스럽게 러시아 쪽으로 넘어왔는데요, 러시아의 불멸의 의지에는 건신주의(建神主義)가 결합되어 있다는 얘기가 나오지요. 건신주의가 정확히 어떤 건가요?

 

이현우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신을 만들어야 한다' 내지는 '우리가 신이다'라는 믿음입니다. 그게 함축하는 바는 '신이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거지요.(웃음) 바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강철 인간' 정도는 돼야죠.

 

러시아 혁명기 때 문화적으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인간'이었어요. 어떻게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인가, 내지는 어떻게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건 니체 식 초인(위버멘쉬)이기도 합니다. 1900년대 초 러시아에서 니체주의가 굉장한 반향을 얻었어요. 그들을 매혹시킨 건 초인 혹은 새로운 인간에 대한 관념이었고, 볼셰비키 역시 모든 인민이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 이후 무자비한 학살 내지는 죽음에 대한 방조가 벌어진 상황의 이념적 배경은 바로 그겁니다. 레닌과 트로츠키, 스탈린 모두 공통적으로 대단히 무자비했습니다. 특히 농민 계급에 대해서요.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 500만 명 이상이 아사했는데 죽어 마땅하다며 일부러 방치했어요.

 

이권우 : 러시아 혁명사를 살펴보면 혁명 이후 농민들이 식량을 안 내놓았잖아요. 그 문제와 관련된 조치였던 건가요?

 

이현우 : 그렇진 않습니다. 농민은 노동자들과 다르게 취급되었어요. 러시아 혁명 자체가 노동자들의 연대 혁명으로 설명됩니다. 깃발에도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잖아요. 망치가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고 낫이 농민 계급을 상징해요. 볼셰비키 혁명가 내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었지만, 국민 전체적으로 봤을 때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어요. 그들만으로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전복할 수 없기 때문에 농민들의 연대가 필요했던 거죠.

 

당시 농민들이 혁명에 동조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런 거예요. 그동안 귀족 계급에 예속되어 자기 땅을 가질 수 없었거든요. 농노 해방 이후에도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을 전전했는데, 세상이 바뀌면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동조했던 겁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에는 상황이 달라져요. 부농을 러시아 어로 '쿨락(kulak)'이라고 하거든요. 주먹을 뜻하는 '쿨락'에서 나온 말이지요. 무얼 쥐고 있는 계급이에요. 바로 농민들의 땅에 대한 기본적인 소유욕을 뜻하는 것이고, 그런 본성으로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가 없다는 주장이 대두됩니다. 결과적으로 농민은 새로운 사회의 적으로 간주되고 치밀하게 척결이 추진됩니다.

 

일단 계급을 나눠요. 부농, 중농, 빈농. 맨 처음엔 부농 척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요. 그런데 기준이 참 애매합니다.(웃음)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 무조건 부농입니다. 작으나마 자기 땅을 가졌거나 말 한 필이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무조건 중농입니다. 빈농은 진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고요. 나중에 빈농 빼고 대부분이 계급의 적으로 타도 대상이 돼 숙청당합니다. 소유욕은 부르주아적 근성이며 이기적 본성이고, 그런 본성을 다 제거해야만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민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권우 : 이 건신주의라는 게 러시아의 전통적 영지주의와 관련 있다고 나오는데요. 여기에는 어떤 배경이 있나요?

 

이현우 : 러시아 종교철학자 중 니콜라이 표도로프(책에는 페도로프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원발음은 표도로프이다.-편집자 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사람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불멸화 위원회> 186쪽에 잘 나오는데, 표도로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임무는 모든 죽은 자들, 우리가 잃은 모든 사람들, 우리의 아버지들과 선조들을 그들의 아들로서, 그들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영국하고 좀 다르게, 영혼만 계속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육신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고 하지요. 이런 러시아 정교가 사회주의와 결합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부활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죠.

 

인간을 극대화하고 과대평가하면 '인간은 신'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잖아요. 인간은 신에 가까워지는 존재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나요. 상대적으로 평균적 인간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생겨나고요. 아이러니합니다.

 

 

자본주의의 강점은 인간에 대한 과소평가입니다. 인간은 다 하찮은 존재들이고 굉장히 속물적이고 천박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관념. 한편 이게 자본주의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죠.(웃음)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현 수준의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고 강철 같은 인간,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 사례가,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노동 영웅 운동이지요. 스타하노프 운동 같은 것이요. 스타하노프는 탄광 노동자였는데 열 몇 명 어치의 일을 혼자 해냈어요. 사회주의에는 인센티브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혼자 대가 없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점 때문에 인민 영웅이 되고 다른 노동자들의 모범이 됐죠. 당신이 스타하노프처럼 탄을 못 캐내는 건 열의가 부족해서고 당성이 부족하고 혁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착취의 방식이죠. 너는 이렇게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존재라면서 거꾸로 인간에 대한 굉장한 억압을 가하는 겁니다.

 

(...)

 

13.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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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4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고른 건 '왕의 초상'이다. 더 좁혀서는 조선시대 어진과 어진화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책&(13년 1월호) 궁중회화의 꽃, 어진

 

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의 초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달에는 전제군주국가에서 권력의 대표적 표상이라고 할 만한 왕의 초상에 대한 궁금증을 몇 권의 책을 통해서 풀어보도록 한다.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왕과 국가의 회화>(돌베개, 2011)다. 조선사와 미술사 전공자들이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이모저모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이에 따르면 왕의 초상 곧 어진(御眞)은 당연하게도 가장 중요한 궁중회화였다. “조선시대 어진은 왕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 그 자체였으며, 어진의 보존은 왕실의 안위와 계승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궁중의 가장 중요한 회화 업무가 어진의 도사 혹은 모사였고, 도화서의 존재이유도 어진의 도사에 있었다.

 


왕의 초상 제작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시대에도 왕의 진영이 제작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영정의 특징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같은 그림이 보여주듯이 왕과 왕후의 영정이 같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고려의 유습은 조선 초기까지 지속돼 태조의 비 신덕왕후나 신의왕후의 초상이 그려져 사당에 봉안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자취를 감춘다. 숙종이 계비의 초상 제작을 명령한 적이 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다.


조선 시대 어진은 ‘터럭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론에 근거해 정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초상화 실력자들을 선발하여 제작했으며 이들 어진은 다른 나라의 초상화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조선 태조, 영조, 익종, 철종, 고종, 순종의 초상이 전부다. 첫 임금 태조에서부터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숫자의 어진이 제작되었음에도 소수만 남은 까닭은 창덕궁의 신선원전에 봉안된 어진들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보관창고의 화재로 그 상당수가 소실됐기 때문이다.

 


조선미의 <왕의 얼굴>(사회평론, 2012)은 한·중·일 3국 군주의 초상화를 비교·소개하는 책인데, 한국 어진의 제작 과정과 현재 보존되고 있는 각 어진의 특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준다. 조선은 국초부터 태조의 진전(眞殿)을 서울과 지방 다섯 곳에 세우는 등 진전제도를 확립했다. 비록 왜란과 호란 때 많이 파손됐지만 어진 봉안 처소로서 진전의 존재는 경시되지 않았다. 어진은 제작과정에 따라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 세 종류로 나뉜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 시에 그리는 것이고, 추사는 사후에 그리는 것으로 가장 어려운 방식이다. 모사는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 진전에 봉안해야 할 때 기존본을 모델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진을 제작할 때는 도감이 설치되며 당대 최고의 화가가 천거나 시험을 통해 선발돼 어진화사를 맡았다. 어진화사에는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집필화사(執筆畵師) 또는 주관화사(主管畵師)가 얼굴 부분을 담당했고, 동참화사(同參畵師)가 몸체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맡았다. 그리고 수종화사(隨從畵師)는 채색을 거들었다. 대략 여섯 명 정도가 제작에 참여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어진화사는 직업화가로선 최고의 영예이지만 최고의 화가라고 하여 모두 어진화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단원 김홍도의 경우 빼어난 그림솜씨로 여러 차례 어진화사에 임명됐지만 한 번도 주관화사를 담당하지는 못했다. 생동감 넘치는 그의 화풍이 개성을 억제하고 묘사의 세밀함을 추구하는 어진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왕의 화가들>(돌베개, 2012)은 어진화사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재주를 시험한다’는 뜻의 시재(試才)를 통해 엄정하게 선발되면 어진화사는 밑그림을 그려서 제출하고 왕과 대신들의 평가를 듣는 봉심(奉審)을 거쳐서 어진을 완성해나간다. 어진이 완성되면 최종평가를 거쳐서 봉안 절차를 밟았다. 흥미로운 것은 중간평가 단계인 봉심인데, 화원들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해 애를 먹었다. 용안을 정면에서 응시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대신들조차도 초본을 보고서 닮음의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의 옆에 어진을 두고 용안과 초본을 비교해가며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봉심에서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면 가필(加筆)과 가채(加採)가 이루어졌다.   


한편 어진화사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17세기 후반에 마련된 기준에 따르면 화원들의 급여는 쌀 12두와 포목 1필로 돼 있는데, 다른 공장인(工匠人)들과 비교하여 훨씬 나은 대우였다고 한다. 급여뿐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는 관직도 주어졌는데, 주관화사에게는 특별한 경우 3품, 기본적으로는 6품 상당의 관직이 하사됐다. 어진화사들은 초상화만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고 산수, 인물, 화조는 물론 궁중 기록화와 장식화, 그리고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통해서 기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13.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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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zone 2020-11-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궁중화에 관심이 생기네요.
 

영화평론가 김경욱의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강, 2013)이 출간됐다. '21세기 한국영화와 시대의 증후'가 부제. 한국영화를 거울로 삼아 우리가 어떤 세월을 지나왔는지 되돌아볼 수 있을 듯싶다. 겸사겸사 한국영화에 관한 책들을 업그레이드 해놓는다. 재작년에 세상을 떠난 'FILM2.0'의 전 편집장 이지훈의 유고집 두 권은 몇달 전에 구입했고(저렴한 가격 때문에라도 '씨네21'보다 'FILM2.0'을 더 자주 읽곤 했다), 강성률의 <감독들12>(이야기쟁이낙타, 2012)와 류상욱의 <익스트림 시네 다이어리>(이숲, 2012)는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은 이번에 같이 주문했다(너무 책이 많이 담겼는지 알라딘 장바구니가 열리지 않아서 결국 다른 서점에 주문했다. 거의 모든 책이 예정일에 배송되지 않고 있어서 알라딘 만족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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