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래된 새책' 카테고리의 페이퍼를 쓴다. 절판됐다가 다시 나온 책들을 조명하는 카테고리인데, 사실 그런 책이 드문 건 아니기에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무슨 일이건 그렇지만 관심도서에 한정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앨런 재닉과 스티븐 툴민의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필로소픽, 2013)이 다시 나왔다. 먼저 제목은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2005)이었다. 원제는 <비트겐슈타인의 비엔나>.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책으로는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필로소픽, 2012)과 함께 필독서로 꼽을 만한 책인데, <비트겐슈타인 평전>도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문화과학사, 2000)의 재출간본이었다. 평전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은 이전 번역본을 갖고 있지만 화사해진 새 번역본도 반갑다. 역자는 같지만 많은 대목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고도 하고. 역자는 이렇게 적었다.

무엇보다 처음 번역서를 낼 때 혹시 나중에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차 발견될 부족한 부분들을 꼭 수정, 보완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역자로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읽기 편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보니 생각보다 꽤 많은 부분을 고치게 되었다. 아무쪼록 새 옷을 입고 다시 탄생한 이 번역서가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서 위대한 철학자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철학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두번째 책은 바로 20년 전에(!) 카오스 붐을 가져왔던 화제작 제임스 글릭의 <카오스>(동아시아, 2013)다. 처음 번역된 건 <카오스>(동문사, 1993; 누림, 2006)였다. 이번에 나온 건 원서의 20주년 기념판을 새로 번역한 것. 첫 번역본이 나오자마자 읽었던 기억이 새로운데, 20주년 기념판의 새 번역이라니까 감회가 없지 않다.

 

 

광고문구에 따르면 "전 세계인에게 '나비 효과'를 각인시킨 전설의 책"이다. 사실 나도 '나비 효과'란 말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던 듯하다. 지금이야 상식이 됐지만, 당시엔 매우 신선한 발상이었다(내 머리속엔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각인돼 있다).

 

 

 

글릭의 책으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평전 <천재>(승산, 2005)와 <아이작 뉴턴>(승산, 2008)도 번역돼 있는데, 이 중 <천재>는 <리처드 파인만 평전>(동아시아)으로 다시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카오스>의 책날개에 근간 목록으로 올라와 있다).

 

 

철학과 과학 책에 이어서 사회학 책도 '오래된 새책'을 한권 덧붙인다. 바로 C. 리이트 밀스의 <파워 엘리트>(부글북스, 2013)다. 지난해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다시 읽으며 원서와 함께 예전 번역본 <파워 엘리트>(한길사, 1991)를 중고로 구입했었는데, 조금 더 기다려볼 걸 그랬다. 1956년에 발표된 책이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파워 엘리트'란 말은 실감이 줄지 않았다. 세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것인가...

 

13. 06.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심을 먹기 전 막간에 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이번주에도 국내 저자로만 골랐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중견' 저자들이다.

 

 

 

먼저. <오직 독서뿐>(김영사, 2013)을 펴낸 정민 교수.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이 책의 부제다. 다산을 비롯한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 관한 연구와 저서를 계속 펴내온 저자인 만큼 낯설지 않은 테마. 이 주제로 책을 쓰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뻔했다. 어떤 책인가.

허균, 이익, 양응수,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홍석주, 홍길주. 그들은 어떻게 살아 숨 쉬는 독서를 통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정립했을까? 어떻게 의표를 찌르는 글쓰기와 기적 같은 학문적 성취를 완성했을까? 마흔 권이 넘는 책을 쓴 인문학자 정민이 오늘날 독서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옛사람들의 독서법, 내지는 독서 일반론에 관심을 가진 독자로선 필독해볼 만하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베스트셀러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와 <책읽는 소리>(마음산책, 2002)에까지 가 닿을 수 있겠다. 내가 기억하는 정민 교수의 첫 책은 <한시미학산책>(솔출판사, 1996)인데, 음 벌써 17년 전이로군...

 

 

좀 올드한 비유로는 '소문난 책벌레' 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책읽기와 세상읽기를 담은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황금비율, 2013)도 이번에 나온 책이다. 서평집 혹은 북칼럼집으로는 <죽도록 책만 읽는>(연암서가, 2009)과 <책과 배우며 살아가다>(해토, 2005)를 잇는 책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책읽기란 어떤 것인가.

이권우는 책읽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는 책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읽고 비교하며 읽고 비판적으로 읽는다. 그리고는 화내고 지근거리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흐뭇해하면서 소통한다. 이런 소통은 저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치유의 힘을 준다. 책읽기를 통한 소통이 그저 소통으로만 끝나길 바라지 않는다. 소통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소통을 이끌어내길 바라는 책읽기이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최성일, 표정훈과 더불어 2000년대 벽두에 '출판평론가 시대'를 열었던 '3인방' 가운데 현재로선 유일한 현역이다. '지킨다'는 의미는 그런 뜻으로도 다가온다.

 

 

보통 '철학자 탁석산'이라고 소개되는 철학자 겸 저술가 탁석산의 신작도 출간됐다. <행복 스트레스>(창비, 2013). '행복은 어떻게 현대의 신화가 되었나'가 부제. 행복론에 관한 책들이 끊이지 않고 출간돼 한번쯤 검토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저자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요지는 무엇인가.

철학자 탁석산은 <행복 스트레스>에서 맹목적으로 행복에 집착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행복 담론의 실체를 깊이있게 들여다본다.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강요되는 행복 강박증을 ‘행복 스트레스’로 개념화하며, 우리가 종교처럼 떠받드는 행복이 사실 텅 빈 개념일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악용될 수 있으며, 우리 인생을 헛수고로 끝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시도때도 없이 중독자처럼 남용하고 있는 '행복'이란 말의 개념사적 정리도 책으로 나온다면 <행복 스트레스>와 좋은 책이 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 이후 저자의 책은 모두 창비에서 나오고 있는데, <자기만의 철학>(창비, 2011)처럼 주로 청소년 독자를 겨냥한 책들이다(여기서 청소년은 청년과 소년 사이층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청년과 소년을 합산한 것이다). 

 

 

<행복교과서>(주니어김영사, 2013)를 읽은 청소년이라면 <행복 스트레스>도 같이 읽어보는 게 좋겠다. <행복교과서>란 책은 <행복 스트레스>를 읽다가 알게 된 책인데, 무려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에서 펴낸 것이다. 그런 연구센터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는데, '국민행복시대'란 말이 저절로 나온 건 아닌 듯싶다. 나로선 이미 책에다 적은 애기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적인가에 대해선 언제나 회의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인생은 죽음으로 종결될 뿐더러, 그렇게 길지 않은 인생도 행복을 위해서라면 너무 길기 때문이다...

 

13. 06.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 서울국제도서전이 6월 19일-23일 코엑스에서 개최되는데, '인문학아카데미'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http://www.sibf.or.kr/program/index6.htm). 개인적으로는 지난 2010년 <로쟈의 저공비행>(산책자, 2009)의 저자로 참여한 데 이어서 두번째이다(당시 프로그램명은 '인문학카페'였다). 이번 행사의 취지는 아래와 같다.

독자들에게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유명 인사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문학, 역사, 고전,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쉽고 재밌는 강의를 통해 독자들이 인문학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인문학 아카데미 행사에 참여하시는 30명의 독자에게 행사 도서를 증정하며 저자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간단하게는 저자와의 만남 행사다(이벤트홀에서 열린다). 8명의 저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일정과 저자별 테마도서를 간단히 소개한다.

 

1. 6월 19일 13:30-14:30 박웅현, <여덟 단어>

 

 

2. 6월 19일 16:30-17:30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3. 6월 20일 14:00-15:00 고은광순, <고은광순의 힐링>

 

 

4. 6월 20일 15:00-16:00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5. 6월 23일 12:30-13:30 이현우, <아주 사적인 독서>

 

 

6. 6월 23일 13:30-14:30 주현성,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13. 06.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책을 고른다. 날짜로는 오늘부터 여름이다. 당장 뭐가 달라진 건 아니지만, 기분상 기온이 1도는 올라간 것 같다. 올여름도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있을지 살짝 염려된다. 이주의 책 테마는 '역사'와 '독서'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지 않게 역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뉴라이트 사교과서나 왜곡된 역사인식과 관련된 기사들이 주중에 나와서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고른 책들이 한국사 관련서는 아니고 역사 일반론이나 서양사에 관한 것들이다. 먼저 타이틀북은 린 헌트 등이 쓴 <역사가 사라져갈 때>(산책자, 2013)이다. "셰계적인 사학자이며 현대 역사학의 최전선에 있다 할 수 있는 린 헌트, 조이스 애플비, 마거릿 제이컵이 이 불확실한 현대에 새로운 역사의식을 제안한다. 근현대 미국사가 쓰여진 양상을 예시로 삼아, 그 속에서 오갔던 다양한 논쟁과 방법론들을 시대별로 짚어가며 역사의 의미와 역사가의 역할, 미래의 역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통찰한다."

 

 

개인적인 분류로는 앤 커소이스와 존 도커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작가정신, 2013)와 같이 묶을 수 있는 책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현역 역사학자들의 성찰이라고 할까.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이 필요한가'란 부제가 책의 주제와 의의를 말해준다. 두번째 책은 저명한 역사가이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까치, 2006)의 저자 도널드 케이건의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휴머니스트, 2013).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가 부제. 소개에 따르면 "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지만 그의 사후 똑똑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전쟁이 장기화되고 결국 아테나이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이러한 주장은 당대 통용되던 역사적 해석과 다르며, 투퀴디데스는 이러한 당대의 해석을 잘못되었다고 믿고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했음을 밝혀냄으로써 마침내 ‘투퀴디데스는 최초의 수정주의 역사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세번째 책은 폴란드의 저널리스트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의 <헤로도토스와의 여행>(크림슨, 2013)이다. 르포르타주 에세이. 폴란드 통신사의 기자로 50여 년 동안 전 세계 50여 개국을 누비고 다니며 마흔 번 넘게 체포와 구금을 당하고 네 차례 처형 위기까지 겪은 저자의 인생 역정이 헤로토토스의 <역사> 읽기와 병행된다. 작가 살만 루슈디는 카푸시친스키의 작업에 대해 "쓸데없는 눈물이나 환상을 만들어내는 삼류 문인 천 명 보다 카푸시친스키 한 사람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평했다. 카푸시친스키의 또다른 르포 에세이로는 <흑단>(크림슨, 2010)이 번역돼 있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독일의 역사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과 닐스 페테르손이 쓴 <글로벌화의 역사>(에코리브르, 2013). 글로벌화에 대한 간결한 입문서이다. 오스터함멜의 책으론 <식민주의>(역사비평사, 2006)을 읽은 적이 있으니 구면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존 헨리의 <서양과학사상사>(책과함께, 2013). '플라톤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인류사를 움직인 탐구정신의 향연'이 부제. 과학사가 아닌 '과학사상사'라는 게 초점인데, 박성래 교수의 <한국과학사상사>(책과함께, 2012)와 짝이 될 만하다. 5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역시나 입문서로서 원제는 '간략한 과학사상사(A Short History of Scientific Thought)'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역사가 사라져갈 때- 왜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이 필요한가
린 헌트.조이스 애플비.마거릿 제이컵 지음, 김병화 옮김 / 산책자 / 2013년 6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13년 06월 01일에 저장
절판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한정숙 감수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3년 06월 01일에 저장
절판
헤로도토스와의 여행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지음, 최성은 옮김 / 크림슨 / 2013년 5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3년 06월 01일에 저장
절판

글로벌화의 역사
위르겐 오스터함멜 & 닐스 P. 페테르손 지음, 배윤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3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06월 01일에 저장
절판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3인 1책 전격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31173010&section=03).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를 읽고 나눈 수다다. 묵직한 책이어서 오래 묵혔다가 다루게 됐다.

 

 

 

프레시안(13. 05. 31) 일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고, 국가를 전복할 권리!

 

이현우 : 가라타니 고진은 국내에 이미 많은 책이 번역된 저자입니다. 도서출판b에서 나오는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10권 리스트에 이 <세계사의 구조>가 포함되었고, 컬렉션 리스트 외에도 몇 권이 더 나올 예정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푸코나 들뢰즈 등의 유럽 철학자들이 대표적으로 많이 소개되었는데, 동아시아권에서는 고진이 압도적으로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진이 한국에 처음 수용될 때는 국문학 연구자 중심이었습니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이 많은 영향을 끼쳤죠. 2004년 계간지 <문학동네>에 실린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실렸을 때부터 한국문단 안팎으로 큰 논쟁을 불러왔는데, 그걸 확장시킨 책 <근대문학의 종언>(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비평집 중에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알고 있어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해 우호적으로 동의한다기보다 비판적인 견해가 국내 문단에선 더 많은데, 오히려 문단 바깥의 독자들에게는 더 큰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진은 이전까지 자기 자신을 비평가로 칭했는데 <세계사의 구조>는 좀 예외적입니다. 사상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자부심이랄까,(웃음) 그런 게 좀 보이는 책이죠. 대신 고진의 '비평' 역시 좀 특이한 성격을 띱니다. <트랜스크리틱>(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도 썼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내는 게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출발했겠지만, 독특하고 자극적이죠. 지금껏 개별 텍스트를 치밀하게 해설하는 게 비평이라고 여겨졌지만, 그의 발상과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저는 맨 처음 <탐구>(권기돈 옮김, 새물결 펴냄)라는 책을 읽으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경악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 소개된 고진의 모든 책을 읽었죠. 그는 일본 내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한 수준의 비평가이며, 60년대 말의 전공투 세대가 아닌 60년대 초반의 안보 세대로 분류되는 1941년생입니다. 아사다 아키라 등의 '제2의 고진', '제3의 고진' 같은 인물들이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고진은 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입지의 비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사의 구조>의 전작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와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이미 가라타니 고진의 독창적인 교환양식론이 소개됩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하고 사적 유물론을 정립했는데, 고진은 그걸 보완해서 교환양식론으로 보는 세계사를 얘기했지요. 그리고 그 주장을 해명하는 탄탄한 이론적 뒷받침이 바로 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고진 독자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의 독자라든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대안이 막막한 독자들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이게 그냥 읽으면 되는 책인지라…(웃음)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얘기 나누면서 이슈를 찾아가보지요. 먼저 읽은 소감을 한 마디씩 해주신다면요.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의 요약본이 <세계공화국으로>라고 하시니 그걸 읽으셔도 될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이 책은 맨 앞의 서문과 329쪽의 어소시에이셔니즘 파트부터 읽는 것으로도 주요 핵심은 파악됩니다. 다만 꾸준하게 교양적 차원에서 논의됐던 책들을 따라온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그런 사전지식이 없다면 어렵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스의 증여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월러스틴의 근대세계 체제와 칼 폴라니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에요. 그들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고진이 독자적으로 자기 사유를 펼치는 부분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책은 오히려 틈틈이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요, 내리 읽어야 합니다.(웃음)

 

문제의식은 아주 선명하고 탁월해요. 동원되는 이론가들에 대한 이해도 놀랍고. 다만 대안이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찾는 분들에게는 결말 부분이 좀 허탈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현재 협동조합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배적 정의에서 벗어나 교환적 정의, 그러니까 격차를 낳는 시스템의 폐기를 새롭게 얘기하니까요.

 

고진은 칸트를 매우 집중적으로 살피는데, 칸트를 재해석하여 정의론을 펼친 사람이 존 롤스고, 롤스로 상징되는 선진자본주의가 분배적 정의라는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결국 교환의 정의를 새롭게 얘기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진은 교환양식C, 즉 자본주의적 강고한 체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협동주의 방식을 높이 평하고 그에 따라 프루동도 새롭게 재평가하지요.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적 교환양식을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대안이 협동조합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책입니다.

 

김용언 :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는데요. 대학교 3학년 때 이후로 마르크스 관련 이론서를 한 권짜리로 제대로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굉장히 힘든 독서였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도 서지 않고 감히 코멘트를 할 입장이 못 되는 듯합니다. 오늘은 무조건 배우겠다는 자세로 경청하겠습니다.


다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저는 책 후반부의 '네이션'의 구성과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에 가장 관심을 가졌는데요. 고진은 책 304쪽에서 "네이션의 감성적인 기반은 혈연적·지연적·언어적 공동체"라면서 그 공동체 내에서 "가족이나 부족공동체 안의 사랑과는 다른, 오히려 그와 같은 관계로부터 이탈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연대의 감정"이라고 네이션의 감정을 설명하는데요. "호수(互酬, reciprocity)적 교환에서 유래하는 채무감정은 돈으로 변제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경제적으로는 그야말로 '경제합리성'을 결여한 것이다. 네이션이 '감정'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네이션이 국가나 자본과는 다른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430쪽에 이르면 국가연방은 교환양식 C 위에 교환양식A를 회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시스템을 창설"하고 "증여의 호수성"을 회복하기를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고진이 일본 내에서도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라고 하신 게 실감난 건 얼마 전 SNS 상에서 발생한 '아즈마 히로키 사건' 때문입니다.(웃음) 아즈마 히로키는 그동안 국내에서 <일반의지 2.0>(안천 옮김, 현실문화 펴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펴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현실문화연구 펴냄)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평론가입니다.

 

그가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토오루의 위안부 발언에 대해 "'위안부는 필요했다'가 문제발언인가?" "한창 때의 남성을 전장에 밀어 넣고 실컷 사람 죽이라고 시키고, 전투가 끝났으니 상큼하게 일반시민처럼 욕망과 폭력성을 억제하고 살라고 해봤자, 생물적으로 당연히 무리한 일. 그런 무리를 전제로 삼아 논의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등으로 트위터에 글을 써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아즈마 히로키는 1971년생입니다. 이 논쟁을 보면서 젊은 전후세대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의 박약함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일본인 중 일부는 아직도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는 점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담당했던 역할과 아시아 각국에 끼쳤던 악영향에 대해 철저하게 되짚어보고 사죄하고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진 식의 호수적 관계는 바로 이런 실제 역사에 대한 근본적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증여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텐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위험스러울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이 같은 지적 성과도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세계사의 구조>와는 크게 관계없는 부분을 얘기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웃음)

 

이현우 : 여담을 덧붙이자면, 아즈마 히로키가 아까 얘기한 '제3의 고진'이었거든요.(웃음) 20대의 나이에 데리다 철학을 종횡하며 쓴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론적-자크 데리다에 관하여>는 놀라운 책이었는데, 그 이후 철학과 거리를 두고 오타쿠 문화로 비평의 방향을 돌리면서 정치적 의식이 퇴행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70대의 가라타니 고진보다도 노후해 보이죠.

 

고진은 대단히 격렬한 반국가주의 쪽입니다. 국민국가를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그의 자부심 중 하나는 일본 헌법 제9조, 즉 평화헌법입니다. 고진에게는 그게 국민국가를 지양할 수 있는 일종의 모델이에요. 그런데 지금 일본 쪽 극우의 움직임은 그 헌법조항을 폐지하고 소위 '정상국가'로 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

이현우 :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역시 교환양식론입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이걸 들고 나온 사상가는 고진이 처음이었어요. 네 가지 교환양식을 잠깐 설명하자면, A형은 증여와 답례로 이뤄지는, 선물을 교환하고 주고받는 호수입니다. B형은 약탈과 재분배, 국가의 지배적인 교환 양식이지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 교환이 세 번째 C형 교환양식인데, 이게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교환양식입니다.

 

중요한 건 그 사이의 이행입니다. A형이 사라진 다음 B형이 출현하는 게 아니라, 세 가지가 공존하면서 어떤 사회에서는 A형이, B형이, C형이 지배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의 교환양식인 호수가 국가 체제의 교환양식으로 어떻게 넘어갔는가, 또 국가의 교환양식은 어떻게 자본제적 교환양식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나 그 이행과정을 해명하는 것이 '사상가' 고진의 과제였고, 그걸 성취한 책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사실 해명을 제외한 이론적 골자는 이전 책들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해명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를 읽으면서 1980년대 읽은 책들이 많이 기억나더라고요. 사회구성체라는 단어가 참 자주 등장했죠.(웃음) 사회구성체 안에는 여러 요소가 상존하고 있으나 지배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내에도 소작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대신 자본주의 상태에서 좀 다르게 변형된다는 뜻이죠. 사회구성체에 관한 예전 책들을 좀 보신 분들에게는 <세계사의 구조>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현우 선생님이 방금 얘기하신 대로 교환양식 A형에서 증여하고 답례하는 과정만을 되풀이하면 국가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B형에선 국가가 지배만 하는 게 아니라 보호한다는 걸 강조하고요. C형에선 중요한 건, 지금까지 노동자가 자본에 의해 종속되어 생산에만 집중하는 사회계급으로 얘기되었는데, 고진은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도 함께 아우릅니다.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이야말로 D형으로 넘어가는 사회구성체 요소가 되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용어인 국가와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 등에 대한 해설이 없다는 점입니다. 번역자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지만, 네이션이나 스테이트 등이 사전적 의미로서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설을 따로 붙여주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첫 페이지부터 그 용어들에서 멈칫했습니다. 고진 전작을 죽 보아온 사람에게는 이미 자주 보아 익숙한 용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이현우 : 어려운 문제지요. 고진이 '네이션'이라고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역자도 고심했던 걸로 압니다. '네이션'은 한국말에선 어떨 땐 민족이고 어떨 땐 국민이라 번역되는데, 특히 민족의 경우 한국에선 단군 이래 죽 이어져 내려왔다는 표상을 갖고 있고, 고진이 말하는 민족은 근대 이후, 절대 왕정 국가 이후에 탄생한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일대 일로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읽어가면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권우 : 용어 해설까지 있었다면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아쉽네요.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마르크스와 칸트입니다. 특히 예전에 <윤리 21>(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펴냄)을 읽으면서도 칸트에 대한 고진의 해석에 상당히 공감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수용하며 국가를 넘어선 사유를 펼치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이현우 : <트랜스크리틱>에서도 비슷한 횡단 작업을 했습니다. 칸트와 마르크스를 접속시키는 작업, 칸트로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로 칸트를 읽는 게 자신의 비평이며 이론적 작업이라고 했지요. 고진에 자주 비교되는 사람이 지젝인데요. 그는 헤겔과 라캉을 '트랜스크리틱'했지요. 두 저자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 정확하게는 학계 바깥 인문학 독자들과 비평 쪽에 가장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유행이라기보다 이들의 작업이 보여주는 독특한 문제의식과 이론적 상상력이 많이 어필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진이 객원교수로 예일대학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예일학파의 거두였던 폴 드 만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조차 고진의 작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폴 드 만이 격려를 해주었으니 기운을 낼 만했지요. 머리를 올려주었다고 할까요. 고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업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웃음)

 

(...)

 

13. 06.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