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제목이 그렇다. 주디스 버틀러의 <위태로운 삶>(필로소픽)과 알랭 바디우의 <참된 삶>(글항아리). <위태로운 삶>은 앞서 <불확실한 삶>(경성대출판부)으로 번역돼 나왔었다. 이번에 나온 건 새 번역판. ‘애도의 힘과 폭력‘이 부제이고 원저는 2006년에 나왔다.

˝폭력과 혐오가 국경을 넘나드는 지금, 저자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 즉 삶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비폭력적 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특히 저자는 레비나스의 타자와 얼굴 개념을 통해, 의미의 사각지대에 갇힌 인간이 어떻게 통치와 권력에 의해 공적 담론의 장에서 얼굴을 박탈당하고 권리 없는 생명이 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가 뿌리 뽑힌 그들의 삶 앞에서 애도가능성을 무기한 연기하고 무감각해지게 되는지 고찰한다.˝

한편 바디우의 책은 원저가 2016년에 나왔고 나는 지난해에 나온 영어판을 갖고 있다. 한국어판도 빨리 나온 셈. 3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들은 바디우가 프랑스 및 벨기에와 그리스 등지의 고등학교나 교육기관 등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그의 세미나를 계기로 실시된 강연들을 토대로 한다. 일종의 젊음에 관한 강의록 묶음인 셈이다.˝

강의가 이루어진 건 2015년이니 바디우가 일흔아홉일 때다(바디우는 1937년생인데 강의에서 나이를 그렇게 밝힌다). 지금은 여든을 넘긴 나이이고, 게오르크 가다머 같은 장수 철학자의 사례가 있지만 강연과 저술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노 철학자의 ‘마지막‘ 조언으로서도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그 젊은 축에 속하는 건 아니지만 영어본도 구해놓은 김에 나도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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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한겨레에 실은 '책과 생각' 칼럼을 옮겨놓는다. 강의에서 자주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비교하고는 하는데, 마침 어제도 <고리오 영감>에 대해 강의하게 되어 그에 대해 적었다. 엊그제 원고를 쓰느라 세 종의 <고리오 영감> 번역본을 에코백에 넣고 하루종일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원고는 지방강의차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썼다.  



한겨레(18. 09. 14) 라스티냐크와 라스콜니코프라는 갈림길


몇년 전에 프랑스문학을 강의하면서 발자크의 소설과 처음 만났다. 프랑스 소설의 거장을 대학시절에 손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어로 번역했다는 <외제니 그랑데>도 읽다가 덮은 기억이 있다. 발자크 소설의 재미와 의의를 알아보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때문인지, 문학을 보는 안목이 깊어진 덕분인지 정색하고 손에 든 발자크는 매우 흥미로웠다. 근대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발자크는 제시하는 듯 보였다.

 

무엇이 근대인가. 좁은 의미의 근대를 산업혁명(영국)과 시민혁명(프랑스)이라는 이중혁명의 결과로 이해한다면 본격적인 근대는 19세기 이후에 시작된다. 근대의 대표적 문학장르로서 소설의 전성기가 19세기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 전성기에 구간을 설정하자면 발자크부터 도스토옙스키까지다. 작품으로는 <올빼미당원>(1829)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까지인데, 근대소설의 표준으로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1835)를 꼽을 수 있다.

 

작중에서 ‘부성애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고리오 영감을 제목으로 삼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몰락한 시골 귀족의 아들 외젠 라스티냐크다. 그는 출세를 위해 파리로 상경하여 하숙생활을 하며 법과대학에 등록한다. 법조인이 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렇지만 마음을 바꾸게 되는데,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상류사회 귀부인들과의 연줄이나 결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막대한 지참금을 동원하여 자신의 두 딸을 귀족들과 결혼시킨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과 라스티냐크는 가까워진다. 평생 모은 재산을 딸들에게 쏟아부은 고리오 영감은 라스티냐크와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처지다. 그런 아버지를 두 딸과 사위는 체면상 부끄럽게 여기며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사람이 타지 않은 빈 마차만 보낸다. 쓸쓸한 장례식을 치른 라스티냐크가 파리를 향하여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라스티냐크의 투쟁 선언은 그가 사회에 던지는 첫번째 도전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고리오 영감>은 라스티냐크의 탄생기이기도 하며, 이후 발자크 소설에서 라스티냐크는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에게 투쟁은 어떤 의미였던가. 비속한 범죄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는 “사회의 3대 표현”을 본다. 몇 종의 번역본을 참고하면, 복종(순종)과 투쟁, 그리고 반항(저항)이 그것이다. 시골에 있는 가족들의 태도이기도 한 복종은 따분하고, 같은 하숙생이면서 범법자인 보트랭이 대표하는 반항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은 비록 불확실하더라도 세상(사회) 속으로 나아가는 투쟁이다.



<고리오 영감>이 표준적인 소설이라는 말은 라스티냐크의 투쟁이 근대소설의 기본형이라는 뜻이다. 근대소설은 라스티냐크와 같은 청년 주인공이 상경하여 출세를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가 표준일 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1866)이 갖는 특이성이 드러난다. 가난한 법대 휴학생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비범한 존재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사교계의 귀부인들과 아무런 연줄도 없었던 러시아판 라스티냐크다. 신분상승의 경로가 막연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려는 주인공의 시도는 과격한 방식을 취하게 된다. 게다가 고리오 영감과 그의 귀부인 딸이 곁에 있었던 라스티냐크와 달리 라스콜니코프에게는 가난한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와 창녀 소냐가 있었을 따름이다.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의 차이이면서 프랑스 소설과 러시아 소설의 차이다.


18.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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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18-09-1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 깊은 곳에서 교수님의 글을 신문으로 봤어요
신문에도 책의 표지가 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8-09-14 23:17   좋아요 0 | URL
아. 작가 그림이 들어갔네요. 온라인에서는.
 

이번주 주간경향(129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서평 강의에서 다룬 김에 밀의 <여성의 종속>(책세상)에 대해 적었다. 다른 번역본으로는 <여성의 예속>(이대출판부)으로 나와 있다. 이번주에 나온 책 가운데서는 드루드 달레룹의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실패했는가>(현암사)가 <여성의 종속>이 던지는 질문을 검토하는 데 유익한 참고가 될 듯하다... 



주간경향(18. 09. 17) 남녀평등은 얼마나 실현되었나


여성주의 고전으로 꼽히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은 그의 대표작 <자유론>에 견주어 ‘평등론’이라고 불려도 좋을 에세이다. 그 평등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으로, 밀은 사회적 관계에서 남녀 간의 불평등이 인간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이며 “이것은 완전 평등의 원리로 대체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쓰인 <여성의 종속>을 오늘날 다시 읽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과연 밀의 주장이 이후에 얼마만큼 실현되었는지 확인해본다는 의미가 있다. 


먼저 따져볼 것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성의 시대인가, 반이성의 시대인가. 밀은 자신의 확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당대 다수의 견해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토로한다. 그것은 정확하게는 반대되는 의견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릇된 감정과의 싸움이어서다. 그러한 감정은 편견에 대한 검토를 차단하고 비판을 봉쇄한다. 가령, 남성은 명령하고 여성은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여 어떠한 문제제기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밀은 이러한 경향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도 후퇴한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대한 믿음이 밀의 시대에 와서는 본능에 대한 숭배로 대체되었다. 비이성적인 것에 대한 경도와 함께 온갖 거짓 신앙이 판을 친다. 그렇게 귀를 막고 있는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한 어려움과 비교하자면 밀의 남녀평등론은 매우 간명한 논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는 힘의 법칙에 지배되어 왔지만 그것은 도덕의 법칙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도덕의 법칙은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각자가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를 때 인간을 인격체가 아닌 물건으로 대하는 노예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미국의 악명 높은 흑인노예제가 남북전쟁의 결과 폐지된 것은 1865년의 일이고 <여성의 종속>은 1869년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순서는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데, 밀은 노예해방의 바로 다음 단계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해방, 곧 여성해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밀이 보기에 노예제가 힘의 법칙에 따른 정당화였을 뿐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종속도 근거가 없다. 

“인간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정말 중요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밀은 말한다. 이 행복에 대한 접근과 추구의 권리가 인류의 절반에게는 봉쇄되어 있다면 부조리한 일이다. 밀의 문제제기로부터 150년이 지난 오늘날 그러한 부조리는 얼마만큼 제거되었을까. 제도상의 차별 철폐와는 별도로 우리의 관념 속에서 남녀 간의 평등의식은 얼마만큼 확고해졌을까. <여성의 종속>이 던지는 질문이다.


18. 09. 13.



P.S. 한 가지 교정사항을 적어둔다. <여성의 종속> 해제에서 <여성의 종속>이 여성주의 이론사의 출발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1792)의 출간연도가 1702년으로 잘못 적혔다. 오타이긴 한데, 리커버판에서도 교정되지 않은 상태라 눈에 띈다. 이 책도 완역본은 <여권의 옹호>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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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는
안성공도터미널 승차장 바닥에
죽은 듯 붙어 있는 나방 한 마리
죽은 건가 건드려 보려다
내게 무슨 권한이 있나 싶다
그러다 버스에 몸을 실으니
인연도 아니구나
그렇게 죽은 듯 붙어 있는 나방이었으리
죽은 건가 건드려 보려다
인연이 아니구나 떠나갔으리
그대 떠나고 나는 남은 건가 싶다
안성공도터미널 승차장 바닥에
승천을 기다리 듯 나는 숨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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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sdud5789 2018-09-1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께서 직접 쓰신 글인가요? 어제 저녁에 안성에서 쿤데라,농담 강의 들은 공도주민인데 괜히 반갑네요^^ 유익한 강의 너무나 고맙습니다. 다음주가 마지막이라니 너무 아쉽네요

로쟈 2018-09-13 23:13   좋아요 1 | URL
네, 주민이시군요.^^ 다음주에 뵐게요.~
 

문학의 도시는? 사랑의 도시는? 묻는다면 어디를 댈 것인가? 런던과 파리라고 하면 바로 맞히지는 못하더라도 대략 수긍할 수 있겠다. 두 도시를 한꺼번에 다룬 것은 아니고 각각 다룬 책이 나왔다. 엘로이즈 밀러의 <문학의 도시, 런던>(올댓북스)과 데이비드 다우니의 <로맨틱, 파리>(올댓북스)다.

원서도 시리즈인지는 모르겠는데(확인해봐야겠다) 번역본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기획된 것 같다. 당장은 아니지만 내년쯤에 런던, 그리고 후년쯤에 파리를 문학기행차 방문해볼 생각도 있기에 두 권 모두 눈에 띄는 대로 주문했다(<런던>은 이미 구입한 책이고 <파리>는 오늘 주문). 파리 여행기 혹은 체류기는 적잖게 나와 있어서 <로맨틱, 파리>가 어떤 특장이 있는지 궁금하다. 파리 여행의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 흥미롭겠다. 이왕 시리즈로 나온다면 <모스크바> 같은 책도 더해졌으면 싶다.

오늘 아침에 펴본 책인데 ‘유럽여행 마니아‘ 정여울의 <내성적인 여행자>(해냄)도 유럽 여행의 길잡이가 될 만한 책. 다음달에 찾아보게 될 독일의 도시들에 대한 방문기부터 나로선 눈길을 주게 된다. 저자가 제일 먼저 소개하는 건 뉘른베르크인데, 여정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혹 도로 표지라도 보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아, 초등학생 때 읽은 <뉘른베르크의 난로>라는 동화도 기억나는군. 난로와 같이 연상되는 유일한 도시가 뉘른베르크라니, 동화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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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09-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 원해요

로쟈 2018-09-12 07:47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