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읽을 만한 책' 포스팅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자연스레 발을 빼는 과정일 수도 있는데, 몇 걸음(몇 달) 더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겠다. 아무튼 낙엽이 거의 진 뒤에야 '11월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른다. 아직 수도권에는 첫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 아주 늦지는 않았다고 자위하면서...



1. 문학예술


<채식주의자> 이후의 현상으로 보이지만, 맨부커상 수상작들이 더 많이, 더 빨리 소개되고 있다.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문학동네)이 이달에 번역돼 나왔고, 번역작품에 주어지는 인터내셔널 상 수상작으로 다비드 그로스만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문학동네)는 이미 지난봄에 소개되었다. 둘다 전문번역가 정영목 교수의 번역이다. 그리고 2004년 수상작으로 다소 뒤늦게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창비)도 이번에 번역돼 나왔다. 그 사이 수상작들도 상당수 번역되었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맨부커상' 투어를 해보아도 좋겠다. 



올해 한국독자들이 선정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작품들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작가가 새로 손질을 했다는데, 얼마만큼의 변화/변형이 있는지 모르겠다(자세히 비교하는 건 연구자들의 몫이겠지만). 독자들의 충성도(혹은 애정지수) 테스트 같기도 하다.



예술 분야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관한 책들을 고른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나온 김성현의 <모차르트>(아르테)는 "모차르트 내면의 인간적 고뇌, 작곡가로서의 성장 과정을 되짚기 위해 탄생지 잘츠부르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빈은 물론 뮌헨과 만하임, 아우크스부르크, 런던과 파리, 밀라노, 프라하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에 걸친 모차르트의 행적을 낱낱이 뒤쫓았다." 얀 카이에르스의 평전 <베토벤>(길)은 아마도 당분간은 '이 한권의 평전'이 될 듯. 독문학 전공자이면서 클래식 해설가 나성인의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한길사)은 베토벤 교향곡에 대한 해설이면서 동시에 유용한 입문서 역할을 해줄 듯하다. 



2. 인문학


알튀세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책이 이달에 몇 권 나오거나 나올 예정인데,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검은 소>(생각의힘)라는 책은 과문한 나로서는 존재 자체도 몰랐던 책이다. 그간에 출간되었던 알튀세르의 많은 책들이 절판된 상황에서('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포함한 책들이 모두 절판되었다) 새로운 불씨가 될지 궁금하다. 



역사 분야에서는 '자본조의의 새로운 역사'를 표방한 스벤 베커트의 <면화의 제국>(휴머니스트)를 고른다. "이 책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면화라는 작물이 어떻게 제국의 상품으로 변모하여 자본주의의 기원을 이루며 성장을 뒷받침하는지 추적한다. '면화'는 유럽의 상인과 정치인 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제국의 확장과 노예노동, 그리고 새로운 기계와 임금노동자를 결합시켜 글로벌 자본주의를 탄생시키고 재편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핵심에 노예제와 원주민 약탈, 제국의 팽창, 무력을 동원한 교역이라는 '전쟁자본주의'가 있었다." 자본주의 역사뿐 아니라 그와 연동된 근대문학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통찰을 제시하는 책이다. 


중국사학자 티모시 브룩의 <셀던의 중국지도>(너머북스)는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 장의 지도를 실마리로 17세기 중국과 유럽의 역사를 흥미롭게 조명한 책이다. "브룩 교수는 17세기의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들과 갈등이 이후 도래한 제국의 시대, 그리고 오늘날의 국가 지원 기업들이 연합하는 시대의 전조였다며, 현재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로베르토 비조키의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서해문집)는 18세기 이탈리아 귀족사회의 특이한 풍속을 다룬 책이다.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이 부제. "계몽주의와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예법이 확산되던 18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계급은 '치치스베오'라는 독특한 관습 혹은 현상을 만들어낸다. 이 특이한 사회적 페르소나는 대개 연하의 귀족청년에게 맡겨지는데, 그는 자신이 시중드는 귀부인의 집에서 환담과 오락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외출할 때는 항상 옆에서 보좌한다. 이 관습을 지극히 이탈리아식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의 존재가 귀부인의 남편이 공인하는 '공적'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년 봄 이탈리아 문학기행을 떠나기 전에 필히 읽어볼 참이다. 



3. 사회과학 


자본주의 해부와 비판에 관한 책들로 골랐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리시올)은 근간 예정으로 얇은 책이지만 지난해 생을 마감한 영국 비평가의 명민한 분석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유일하게 유지 가능한 체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모순과 비일관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아포리아가 특히 두드러지는 현장으로 '새로운 관료주의'와 '개인화된 정신 건강'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집합적 주체의 출현을 요청한다."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볼프강 슈트렉의 <조종의 울린다>(여문책)는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 속에서 한데 뭉친 어울리지 않는 파트너들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자본주의라는 난파선에 관하여'가 부제. 그리고 구소련 출신의 이론가 드미트리 오를로프의 <붕괴의 다섯 단계>(궁리)는 전작 <예고된 붕괴>(2010)에 이어서 붕괴의 일반 이론을 제시한다. 저자는 "붕괴 과정을 1단계 금융 붕괴, 2단계 상업 붕괴, 3단계 정치 붕괴, 4단계 사회 붕괴, 5단계 문화 붕괴, 이렇게 다섯 단계로 정의하고, 우리가 각각의 단계에 얼마나 준비되어 있으며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이정표로 삼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4. 과학


'알쓸신잡' 출연과 함께 스타 과학자로 등극한 물리학자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동아시아)는 굳이 소개가 필요 없는 책이겠다('알쓸신잡 베스트셀러'를 따로 집계해도 되겠다. 벌써 그렇게 하고 있는 건지?). 전작들인 <김상욱의 과학공부>와 <김상욱의 양자공부>도 마찬가지. 젊은 학생들이 많이 읽어봄직하다. 



역시나 알쓸신잡에 출연한 뇌과학자 장동선의 <뇌는 춤추고 싶다>와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아르테) 등도 이 참에 읽어볼 만하다. 한권 더 보탠다면, 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프 드뢰서의 <알고리즘이 당신에게 이것을 추천합니다>(해나무)는 알고리즘 만능시대에 알아두어야 할 필수 지식을 제공한다. "저자는 알고리즘에 대한 터무니없는 낙관과 지나친 비관 양쪽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알고리즘의 권력에 맞서서 우리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알고리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5. 책읽기/글쓰기


글쓰기에 관한 책으로는 '강준만의 글쓰기 특강'(강준만식 글쓰기 특강?) <글쓰기가 뭐라고>(인물과사상사)와 서민 교수의 <밥보다 일기>(책밥상)를 고른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글쓰기도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한번 더 일깨워준다. 그리고 위화의 에세이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푸른숲). '위화의 모든 책'이기도 하거니와 내년 봄 중국문학 강의에서 위화의 작품을 다시 되짚어볼 예정이라 내게도 퍽 유익한 책이 이번에 나왔다. 


18. 11. 19.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으로는 '앙리 마티스 에디션'이 나온 김에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고른다. 문예출판사와 민음사에서 나온 선집이 있고, 완역본으로는 민음사판(윤영애 역)과 아티초크판(공진호 역) 등이 있다. 보들레르의 의도를 감안하여 시집 전체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좋지만 개별 시편들에 대한 감상이라면 선집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한두 편의 시와 친해질 수만 있어도 시집 번역은 용도를 충분히 다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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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18-11-1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후면 교수님을 뵙겠네요~
회원들은 열심히 책공부를 했답니다.
여기 단풍은 이번주까지는 괜찮을거 같아요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나봐요~^^
한강의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상징성은
대단한것 같아요
방금 아름다움의 선 주문했답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의 책은 읽었는데 올해는
노벨문학상의
부재?로 이 책으로 대신해야겠네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로쟈 2018-11-20 06:52   좋아요 0 | URL
네, 김해에 계시나요? 곧 뵙겠습니다.~
 

스위스 태생으로 현재는 런던대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저명한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가 번역돼 나왔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과 함께 도이힐러 한국학을 대표하게 될 책. 국내에 소개된 한국학자(한국사 전공)로는 미국의 제임스 팔레와 브루스 커밍스, 그리고 일본의 미야지마 히로시와 함께 도이힐러는 그저 놀랍다고 여겨지는 학자다.

이번 책도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신선한 시각으로 한국사 내지 한국인의 역사를 들여다 본다(한편으론 ‘조상의 눈 아래에서‘란 제목이 그렇듯 매우 친숙한 시각이기도 하다).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이 부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50년 동안의 열정을 다한 한국사 공부를 집대성한 <조상의 눈 아래에서>. 신라시대 초기에 생겨나 가장 대표적인 사회 단위로 뿌리내린 한국 고유의 출계집단(씨족 또는 족, 겨레라 불리는)에 초점을 두고, 신라 초기(4~5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다. 

도이힐러 교수는 신유학의 변혁능력을 강조한 기존 한국사의 관점은 토착적인 친족 이데올로기의 지속성을 간과했다고 한다. 경상도의 안동과 전라도의 남원을 선택하여 그들이 만들고 다진 촘촘하게 짜인 사회구성을 들여다보고,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 책이 있었는지는 저자가 참고한 자료목록을 봐야 알겠지만 희소하지 않았을까. 이런 수준의 연구를 기획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안목과 역량이 놀랍다고 할 수밖에. 우리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한국사에 대해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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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만에 일정이 없는 주말을 맞았다.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자긴 했지만 아마도 잠을 더 보충하게 될 듯하다. 게다가 이발도 해야 하고 프린터 토너도 구하러 나가봐야 한다(인터넷에서 최저가로 재생토너를 구입했더니 호환이 안된다. 호환기종이라고 돼 있었음에도. 비지떡 토너였던 것).

어제는 전주의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강의가 있었는데(그렇게 큰 규모의 건물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강의해본 장소들 가운데서는 세종 정부청사 다음으로 컸다) 강의 전에 전주천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한옥마을의 향교와 남부시장 등을 둘러보았다. 만추여서 향교의 명물 은행나무 낙엽이 거의 진 상태였다(두주쯤 전이 피크였을까?). 남부시장으로 갈 때는 전주천변을 따라 걸었는데 생태보전에 성공한 하천답게 억새풀이 무성했고 물새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전주에는 2년만에 가본 듯싶은데(세보면 강의차 대여섯 차례 내려간 듯하다) 내년에도 갈 기회가 생기면 좀더 따듯할 때 1박2일 일정으로 더 둘러볼 수 있으면 좋겠다. 전주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와 하룻밤 묵은 적이 있는 한옥마을 정도만 내게는 구면이다. 향교의 은행나무와 전주천, 그리고 남부시장에 새로 생긴 청년몰(도쿄의 오다이바의 작은 가게들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을 기념으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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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8-11-1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웠습니다!
알라딘에서만 만나다가 전주에서 로쟈님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즐거웠습니다.
1시간 30분 강의가 제게는 정리가되는 느낌으로 새로웠습니다.
피곤하신 모습이었지만 제게 로쟈님의 강의는 새로운 지식으로의 재밌는 여행이었습니다.
아직 이나이에도 누군가를 만난다는 설레임이 있다는게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전주에서^^

PS: 위 전주 향교에 있는 은행나무는 전주에서 백미입니다. 예전에는 요즘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서 고적한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조금 아쉽습니다.
조용한 산사처럼....향교 뒷쪽에 대나무의 바람소리를 들어야 되는 데....

로쟈 2018-11-18 11:17   좋아요 0 | URL
네, 향교 은행나무는 장관이겠더군요. 다음엔 때맞춰서 한번 더 와야겠습니다. 대나무 바람소리도 들으려면..^^

루루로로 2018-11-1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주에 오셨군요... 몰랐어요. 아쉽다...

로쟈 2018-11-18 11:17   좋아요 0 | URL
아, 또 기회가 있겠지요.~

카스피 2018-11-1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부시장 청년몰에 다녀오셨네요.근데 낮에 가셨는지 사진속에 사람들이 거의 없네요.저는 토요일 저녁에 가서인지 사람들한테 치어서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기억이 납니다.
 

오늘자 한겨레 실린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를 옮겨놓는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이달에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중인 <인형의 집>을 본 것이 희곡을 다시 들춰본 계기다. 번역본으로는 열린책들판(독어판 번역)과 민음사판(노르웨이어판 번역)을 참고했다. 



한겨레(18. 11. 16) 노라는 왜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가


1879년 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초연된 연극 한 편이 세계사를 바꾸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 바로 그 작품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노라'라고도 불리는 이 문제작은 우리에게도 일찌감치 소개된 편인데 1925년 처음 공연된 이래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알려진 대로 주인공 노라의 가출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 이 작품의 문제성은 어디에 있으며 그 의의는 여전히 유효한가. 공연으로 작품을 보게 되거나 다시 읽을 때마다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결혼 8년 차의 주부 노라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남편 헬메르의 충실한 내조자다. 남편은 그녀를 ‘종달새'나 ‘다람쥐'라고 부르며 노라 또한 그런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남편은 노라가 돈을 너무 흥청망청 쓴다고 생각한다. 노라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린데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첫 아이가 갓 태어났을 무렵 남편이 중병에 걸려 절대 요양생활이 필요했다. 요양에는 거금이 필요했지만 돈에 관해서라면 결벽증적 태도를 가진 남편은 빚을 금기시했다. 게다가 노라의 아버지는 병으로 위중한 상태였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남편에게도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노라는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리고 남편에게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한다. 남은 일은 남편에게 받는 생활비를 아끼고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몰래 빚을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억척스러운 노라를 남편 헬메르는 사랑스럽긴 하지만 낭비벽이 있는 여자로 오해한다.

 

아버지와 남편에게서 ‘인형’으로 대우받지만 노라의 숨겨진 비밀은 그녀가 남자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남편은 은행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노라의 힘들었던 이중생활도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노라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은행직원이 비리로 해고 위기에 몰리자 차용증을 빌미로 노라를 협박한다. 결국 노라의 비밀을 알게 되자 남편 헬메르는 격분하고 노라는 자신의 행동이 남편에게 옹호되기는커녕 부당하게 매도당하는 현실에 절망한다. 그녀는 비로소 남편과의 관계는 물론 사회 속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그녀는 무엇이 법이고 정의인가를 다시 묻는다. <인형의 집>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대목에서 노라는 헬메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내가 당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죠. 법도 내가 생각했던 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법이 옳다는 생각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여자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배려를 해줄 어떤 권리도 없고,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한 일을 할 권리도 없나요? 난 이런 법을 믿을 수 없어요.”(열린책들)

 

곧 노라의 항변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법을 상대로 한 항변이다. 노라는 그 법에 동의할 수 없고 따라서 순응할 수 없다. 노라의 이런 태도를 헬메르는 어린아이 같다며 비웃는다. 사회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자 노라는 이렇게 대꾸한다. “난 세상과 나 가운데 누가 옳은지 확인하겠어요.”(열린책들) 여기서 ‘세상’은 ‘사회’라고도 옮겨진다. “나는 사회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밝힐 거예요.”(민음사) 노라의 가출은 이 결심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인형의 집>이 여전히 읽히고 공연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남성 중심의 세상(사회)과 노라의 대결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1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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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순천의 김승옥 문학관 방문을 계기로 <무진기행>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적었다.



주간경향(18. 11 . 19)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김승옥은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62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승옥은 20대 중반이 되기 전에 대표작 <무진기행>을 포함한 문제작들을 발표하고 한국문학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1960년대 문학의 상징으로서 그의 성취는 무엇일까. 이번 가을에 <무진기행>의 무대이면서 작가의 고향 순천을 찾으면서 다시금 던지게 된 물음이었다(작가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전남 순천에서 성장한다).

김승옥 문학의 대명사는 <무진기행>이다. 다섯 권짜리 전집도 나와 있지만 한 편만 남긴다면 문학사가나 독자들의 선택은 단연 <무진기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환대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같은 시기에 쓴 작품으로 <차나 한 잔> 같은 단편이 뛰어나다면 <무진기행>은 진부한 소설이라고 스스로 평가절하한다. 작가가 인용하기도 한 앙드레 지드의 말대로 작품에는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 그리고 신의 몫이 존재한다면 <무진기행>에서 작가의 몫은 크지 않았다는 뜻이 될까. 그는 진부한 단편소설을 썼을 뿐이지만 독자와 신은 그 작품을 문학사적 걸작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여기서 ‘신의 몫’은 역사, 구체적으로는 한국현대사로 바꿔 읽어도 좋겠다.

한국의 1960년대는 4·19혁명과 5·16쿠데타와 함께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급진적인 근대화가 진행되는데 도시화와 산업화는 그 근대화의 두 얼굴이다. 이러한 ‘근대 혁명’을 통해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 하지만 그 혁명적 변화가 단기간에 이루어졌기에 전근대와 근대의 공존과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무진기행>에서 무진(순천)과 서울은 시골과 도시의 대명사로서 전근대와 근대의 공간을 대표한다. 그리고 소설의 서사는 서울에서 출세한 주인공 윤희중이 바람을 쐰다는 명목으로 고향 무진을 방문했다가 되돌아오는 여정을 따라간다.

<무진기행>에 대한 많은 독후감은 윤희중이 무진에서 겪은 일들과 음악교사 하인숙과의 만남 등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한국 사회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재현한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 작품의 성취는 귀향과 이향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나 제약회사 상무까지 된 주인공은 자신을 전무로 승진시키려는 아내의 계획에 따라 잠시 무진으로 내려오며 이사회 참석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전보를 받자마자 급히 상경한다. 무진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려주는 음악교사를 만나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과거나 고향은 그의 현실과 장소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판단에 무진의 명물이라는 안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여정은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압축하며 이는 사회학의 용어를 빌리면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에 대응한다. 그와 함께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고향을 상실하며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무진기행>의 결말이 그러한데, 이 부끄러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무진기행>은 이 진부함을 너무도 정확하게 그려냈다.

 

18.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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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11-1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아침 생방송 음악프로에서
진행자가 무슨 얘기 끝에 중고교 때
감동적으로 읽은 책들을 보내보라고
하더군요. 즉시 컴 켜고 사연난에
생각나는 대로 목록을 올렸지요^^
잠시 뒤 진행자가 제가 보낸 내용을
읽었습니다. 어쪔 자기랑 똑 같다고..
그러면서 한 마디.˝근데 김승옥이
빠졌다...˝ 대학 졸업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김승옥을 알게됐습니다.
그 서울 1964년 겨울을 비롯해서...
로쟈님 해석이 새롭네요.
조만간 무진기행 다시 볼 거예요^^*

로쟈 2018-11-15 00:44   좋아요 0 | URL
네, 즐독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