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있어서 인사동에 나갔다가 아이에게 문구도 사줄 겸 반디앤루니스에 잠깐 들렀는데, 의외의 신간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이덕형 교수의 <이콘과 아방가르드>(생각의나무, 2008). 근간 예정이라는 건 알았지만 리뷰보다도 실물을 먼저 보게 될 줄은 몰랐다(사실 내가 찾아보려고 했던 책은 승계호 교수의 학문세계를 다룬 <서양철학과 주제학>(아카넷, 2008)이었지만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알라딘에도 그렇고).  

 

책 자체는 지난 2004년에 발표한 소설 <검은 사각형>(생각의나무, 2004)에 이미 예고돼 있었는데, 그 소설의 얼개가 출판사 사장인 주인공이 어느 겨울날 러시아 작가의 출판권 계약과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이콘과 아방가르드’의 원고수집을 위해 길을 떠나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등을 경유하며 각 도시에서 작가나 화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미학적 의미를 되새겨본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 그렇게 수합한 자료와 사색의 결과가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성균관대출판부, 2006)와 이번에 나온 <이콘과 아방가르드>로 갈무리된 것. 하므로, 아직 한권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세 권의 책이 하나의 삼부작처럼 읽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콘과 아방가르드>에 대한 출판사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을 쓴 성균관대학교 이덕형 교수(러시아어문학 전공)는 러시아 문학과 그리스도교 이콘을 20여 년이 넘게 연구한 학자이자 소설가로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이콘 전문 연구가이다. 그는 국내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한 후 소련 유학이 불가능했던 1980년대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가톨릭 예수회 수도사들의 정교 공동체인 파리 근교 뫼동의 생조르주에서 4년 동안 정교의 교리와 함께 이콘의 제작기법을 배웠다. 이때 그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정교 사상을 비로소 체감하게 됐고 나아가 그 뿌리가 되는 비잔틴 문화까지 탐구하게 됐다. 

저자는 이미 19세기 러시아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특유의 감성과 아름다운 문체에 담아 예술기행서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펴낸 바 있으며, 신간 <이콘과 아방가르드>의 모태가 된 소설 <검은 사각형>을 몇 해 전 출간하기도 했다. <검은 사각형>은 러시아 비잔틴 이콘의 흔적을 찾아 나선 구도적 여정을 글로 옮긴 것으로서 미학과 문학을 넘나들면서 초월에의 욕구를 예술(구체적으로는 러시아 이콘)이라는 틀에 담아 자신을 표현하고 성찰하는 한 존재의 지적 여정을 담아낸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주인공의 여정(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니스, 밀라노, 뫼동)은 <이콘과 아방가르드>에서 저자가 직접 수집하고 고른 200여 장이 넘는 생생한 이콘 도판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또한 2천 년 이콘의 역사를 읽어내기 위한 저자의 각고의 노력(러시아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수많은 국내외 참고도서들)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러시아 문화사와 문화시학을 다룬 저자의 첫번째 책은 <천년의 울림>(성균관대출판부, 2001)이었다. 묵직한 책이지만 전공 교재로도 많이 사용되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러시아문화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 책이다. 이어서 나온 책이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책세상, 2002)인데,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의 서론격인 책이다. '서론격'이라고 한 것은 저자가 이 주제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저작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다쥐보그의 손자들>(성균관대출판부, 2002)은 동슬라브 신화를 다룬 '소품'이다. 소품이라고 한 건 <천년의 울림>이 보여준 스케일에 견주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케일은 <이콘과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삼부작에 이르러 다시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물론 다른 언어로 된 이 분야의 관련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노고 덕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 미학과, 비잔티움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아방가르드의 이콘을 역사적으로 가로지르는 '초월적 성스러움'의 미학을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빛도 성스러움도 모자라는 세태인지라 서가에 꽂아두고 자주 쓰다듬어볼 만하다... 

09. 01. 03. 

P.S. 저자 인터뷰기사는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091751005&code=900308 참조. 이런 멘트가 눈에 띈다. “이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정신학이라고 불렸던 그리스 교부철학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 뤽 마리옹 등 현대철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걸 알게 됩니다. 초월자를 언어라는 테두리에 가둘 수 없으며 침묵과 관조, 이콘과 모자이크 같은 ‘빛의 예술’을 통해 존재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부정신학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와도 통하지요. 서유럽 교회의 예술이 모든 것을 소실점으로 모으는 원근법을 발명했다면 그리스 정교의 이콘 미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채택한 다초점과 나열의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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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4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북 2009-01-14 17: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입니다. 이덕형 교수님 신간이 나와서 검색해 보던 중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요, 글이 좋아서 저희 블로그에 스크랩하고 싶어서 댓글 남겨요. 허락해주신다면 담아가고 싶습니다. ^^

로쟈 2009-01-14 17:38   좋아요 0 | URL
독전감이어서 별 내용은 없는데요.^^;
 

이번주 시사IN에서 '우석훈의 경제프리즘'을 옮겨놓는다. 이유야 물론 책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분야로 치자면 출판경제학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이 책시장을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부른다. 흠, 그렇담 이 알라딘이란 공간 또한 전장(戰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로쟈는 '전선기자'쯤 되겠고. '전우들'에게 보내는 새해 메시지를 우석훈의 칼럼으로 대신한다. 요지는 이렇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시사IN(08. 12. 29) 책,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  

책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다. 최근의 진화이론을 다루는 생물학자들은 문화와 제도의 영역을 일종의 확장된 유전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접근은 약간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유전자 환원론이라서 생각만큼 학계에서 환영받고 있지는 못하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책은 사회적 기억과 함께 새로운 지식의 창작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매체 간의 소통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능을 가진 듯하다. 문화 영역에서도 책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사회학의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사실 책만큼 이데올로기와 가깝고, 또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물건도 별로 없다. 2008년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각각의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전파자이고, 이런 점에서 책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뜨겁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갔는가? 웃기지 마시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혹은 그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전쟁은 사람들이 경제적 생활을 하는 한, 멈추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출간된 책 중에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순수’―이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의 영역에 해당하는 책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한 권도 없다.

만약 한국의 책 중에서 정말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책이 딱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5000만 부쯤 팔린 이 <수학의 정석>은 최소한 한국에서 좌파든, 우파든, 생태주의자든, 여성주의자든, 아니면 극우파까지 모두 보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없는 책인지도 모른다. 물론 따져보면, 이 책에도 수학 이데올로기가 있고, 진학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학벌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기는 하다.

책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얼마나 극심한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영화와 비교해보자. 감독이 좌파 계열이든 아니든, 예를 들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같은 대형 국내 영화가 상영되면 전 매체가 이를 밀어주고 띄워준다. 물론 영화에도 예술영화와 B급 영화, 좌파 계열의 영화와 지독한 쇼비니즘 영화 혹은 마초 영화 같은 것들이 있지만,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이데올로기 없는 책은 없다

그러나 책의 경우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특히 신문 서평의 경우, 이른바 조·중·동에서 다루는 책과 한겨레·경향이 다루는 책은 거의 싸늘하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때는 조선일보 서평이 2000권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추정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볼 때,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 전쟁터의 최전선이 바로 이 출판문화 현장이다. 물론 그렇다면 흔히 생각하듯 이 이데올로기 전쟁이 사회과학 내에서 좌파와 우파 혹은 기타 서로 다른 사회에 대한 이론이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맞붙는 형국인가? 그렇게 고상한 방식으로 한국에서 논쟁이 진행되거나 사회적 논의가 전개되었다면, 지금 사회가 이 꼴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이념적 지평에서 한국의 출판계를 나눈다면, 한쪽에 역시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 서적이 들어갈 것이다. 물론 이 경제경영서의 정식 분류는 ‘재테크 책’ 정도가 맞겠지만,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물론 그 내부도 분류해보면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한 부류, 건설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것이 또 다른 부류이다. 뭔가 기술적인 분석을 한 것 같지만, 사실 ‘증권 투자해라’와 ‘땅 투기 해라’ 따위 아주 강력한 한국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 외에는 별 얘기가 없다.  

그리고 이런 재테크 서적과 쌍을 이루는 책이 바로 최근 한국 출판계의 큰 특징인 자기계발서이다. 물론 모든 자기계발서가 다 지독한 이데올로기 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은 거의 100%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을 강타했던 <마시멜로 이야기>나 <시크릿> 혹은 공병호의 자기계발서 시리즈들은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런 책들의 실제 메시지는, ‘모든 것은 네 탓이다’ 그리고 ‘사회에 절대로 반항하지 말라’ 같은 매우 단순한 코드를 담고 있다.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 열어
이러한 흐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들은 흔히 인터넷 서점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기준으로 인문학 혹은 사회학과 같은 분류 코드를 가진 책이다. 이런 책들은 많은 경우, 개인에게 무엇인가 할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돈이면 최고다’ 혹은 ‘우리나라 최고다’라는 말이 아닌 또 다른 것들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려 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문학 역시 이데올로기 성격이 강한데, 최근 한국의 문학들은 일본식 표현대로 사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

올해 국방부의 불온서적 사태에서 보았듯이, 책에 대한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특히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출간되는 많은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욱 많은 책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정치 탄압이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수년간 계속될 경제 위기 속에서 국민은 제일 먼저 지갑을 닫게 될 것인데, 불행히도 한국에서 도서 구입비를 별도 예산으로 소비 계획을 짜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 심각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결과가 사실은 다가올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고, 상황은 지금 매우 열악해 보인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회원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출판생협 형태나 사회적 기업 같은 제3부문의 방식을 고민하는데, 방법이 녹록지 않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이제 일반 시민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정부의 돈을 사용하기는 어렵다.(우석훈_경제학박사) 

09. 01. 01. 

P.S. 대개 그렇듯이 기사는 지난 월요일에 읽었다. 또 대개 그렇듯이 아침 전철 안에서였다. 책을 소재로 한 칼럼이기에 나름 '진지하게' 읽다가 몇 번 키득거렸는데, 우석훈의 독특한 스타일, 곧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만드는 건 일차적으로 반복이다. 당신은 무엇을 반복해서 읽으셨는지? 내가 읽은 건 이것이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물론'이란 부사의 과다한 노출에 주목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내 경우엔 '어쨌든'의 반복이 보다 유표적으로 여겨진다. 눈에 띈다는 말이다. 글쓰기 버릇이기도 할 텐데(하지만 이 버릇은 사고습관과도 연관이 있다), 어쨌든 경제학자 우석훈은 '어쨌든'이란 부사를 너무 자주 쓴다. 과소비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우석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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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1-01 21:15   좋아요 0 | URL
그것은 마치 로쟈님의 '해서, ...'와 같군요.^^

로쟈 2009-01-01 21:21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혹 그렇더라도 온라인과 오프라인 글쓰기는 좀 다릅니다.^^; 온라인에서는 일부러 반복해서 쓰기도 하거든요...
 

여느 때 같으면 목요일 아침이지만, 해가 바뀐 탓에 언론에도 여러 신년특집기사들이 게재된다. 하루  쉰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그런 기사들을 일람해보는 것이다(1년에 한번이다!). 일람까지는 아니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걸 읽어본다. '대전환의 시대'를 화두로 한 '세계 석학과의 대담' 시리즈인데, 이매뉴얼 월러스틴 편이 가장 먼저 실렸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0706.html). 작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어서 이젠 낯이 익다. 세계체제론자가 보는 변화의 향방을 '신년대담'으로 읽어/들어본다.  

한겨레(09. 01. 01) [세계 석학과의 대담] 자본주의 어디로 가나?  

지난해 전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는 1980년대 이후 진행된 투자금융 중심의 자본주의 발전모델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고삐풀린 시장과 자본의 폭주로 특징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해를 맞아 <한겨레>는 시장과 국가, 성장과 복지, 국제무역과 통화질서뿐 아니라 환경과 발전, 소득과 분배, 생산과 소비 등 기존 사회질서 곳곳에서 움트고 있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의 기운을 ‘대전환’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세우려 한다. 한겨레는 크게 2부에 걸쳐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전환의 물결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 예정이다.

우선 제1부에서는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진보적 외국 석학 5명의 진단과 분석을 차례로 싣는다. 첫 문을 여는 주인공은 ‘세계체제론’으로 잘 알려진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명예교수다. 이매뉴얼 교수와 한 대담은 지난달 17일(현지시각)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 연구실에서 이뤄졌으며, 서재정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78) 교수는 16세기 이후 전개된 자본주의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하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아프리카 식민체제 연구에 몰두하다가 1974년 <근대세계체제론> 1권을 시작으로, 1980년과 1989년 전3권의 대작을 내놓았다. 뉴욕주립대(SUNY) 빙햄턴대학 브로델연구소를 중심으로 ‘세계체제론 학파’라는 새로운 학문 흐름을 일궈냈다. 1976년부터 1999년 은퇴할 때까지 빙햄턴대학 교수를 지냈고, 2000년부터 예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세계체제론> 외에도 <역사적 자본주의>(1983), <미국파워의 쇠퇴>(2003), <유럽의 보편주의>(2006) 등이 있다.

서재정(48)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SAIS) 교수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정세의 전문가로 꼽힌다.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2학년 재학 중 가족 이민으로 미국에 정착한 뒤 시카고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시절 자유로운 독서와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관심이 자신을 물리학도에서 정치학도로 변신케 했다고 말한다. 정치학 석·박사 과정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에서 마쳤다. 2000년 코넬대 교수를 거쳐 2007년 7월 존스홉킨스대학으로 옮겼다. 주요 저서로는 <군사동맹에서 파워와 국가이익, 정체성<(Power, Interest and Identity in Military Alliances) (2007)이 있다.    

서재정 교수(이하 서)=요즘 누구나 ‘위기’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금융위기, 어떤 사람은 더 일반적인 경제위기를 얘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위기,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란 말도 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월러스틴 교수(이하 월)=우선 위기란 말을 너무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상승하던 경기곡선이 하강하는 상황을 위기로 해석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위기란 말을 쓰진 않는다. 1945년 이후 세계를 보면, 미국이 세계체제 속에서 확실한 헤게모니 국가였던 25년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세계경제도 역사상 최대의 팽창이 이루졌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는 7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경기순환 관점에서 보면 ‘콘트라티에프 B국면’(50~60년 주기의 경기순환에서 침체국면을 뜻함)에 들어섰다. 경기침체기의 전형적인 특징은 막대한 이윤을 얻던 독점기업의 지위가 다른 기업의 진입으로 흔들리고, 가장 이윤이 높던 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임금이 좀더 싼 곳으로 산업을 옮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을 금융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러 형태의 빚 메커니즘을 통한 투기이다. 또 나는 이것을 ‘실업의 수출’이라고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1970년대엔 유럽이, 1980년대엔 일본이, 그리고 1990년대 초엔 미국이 성공했다. 하지만 금융투기는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콘트라티에프 B국면의 막바지 단계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밝혀진 매도프의 폰지사기 사건은, 더이상 금융투기로는 이윤을 계속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완벽한 사례이다.  

서=현재 국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계경제가 경기순환의 하강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전보다 더욱 심각하게 의문시되는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 이래 약 30년 동안 쇠퇴를 거듭해왔다. 이후 미국의 여러 행정부들이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 과정을 역전시키려고 해왔다. 어떤 행정부는 인권외교나 일부 진보적인 조처들을 시도했고, 다른 행정부는 군사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펴거나 ‘스타워즈’ 같은 첨단 군사력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행정부도 이 과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월=지금 국제 상황은 미국도 돌이킬 수 없는 다극체제다. 아주 복잡하고 혼란스런 상황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른바 금융의 붕괴, 경기 불황에 빠져 있다.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이어질 것이다. 4~5년 안에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작동해온 방식이다. 헤게모니의 쇠락에도 새로운 것은 없다.

 

서=미국 헤게모니의 쇠락과 결합된 장기적인 경기침체는 정상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 자체로 어떻게 되나? 전체 세계체제가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할 정도인가?

월=우리는 정상적인 경기 하강국면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위기라는 점에서 앞으로 20~30년 안에 안정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지고 다른 종류의 세계체제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썼던 글들에서 수차례 설명한 얘기이지만, 자본이 부담해야 할 세가지 기본 비용은 인적 비용과 투입 비용, 과세 비용이다. 모든 자본가들은 꾸준하게 상승하는 이 세가지 비용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비용 부담이 너무 많은 데 반해 생산으로 얻을 수 있는 잉여가치는 너무 줄어든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가 균형 상태에서 과도하게 이탈해 일시적으로라도 다시 균형 상태로 회복될 수 없게 됐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분기점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체제보다 나은 체제나, 또는 더 나쁜 체제를 갖게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서=위기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70, 80, 90년대에도 아주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체제의 종말이나 자본주의 종말을 예견하는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계체제는 어려움을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70년대 세계경제는 석유 위기를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았고, 80, 90년대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이번 위기에서 그렇게 되기 어려운 이유는 뭐라고 보나?

월=이번은 아주 힘든 국면이다. 체제 붕괴를 1년이나 10년의 문제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체제 붕괴는 50~80년 걸리는 사안이다. 석유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는 미국이 깊이 개입했다. 미국이 그 위기를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973년 유가 인상을 밀어붙인 두 나라가 사우디와 이란이었는데, 이란의 샤 국왕은 석유수출국기구 가맹국 내에서 가장 친미적인 지도자였다. 유가 인상에 따라 뭉칫돈이 산유국으로 옮겨갔고, 그 돈은 다시 미국 은행에 예치됐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 정부와 소비자들이 위기를 벗어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 정부와 소비자 모두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다. 결국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중국 등 다른 국가들과 공생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는 미국이 전적으로 부채에 의존해 살아가는 믿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는데,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채란 언젠가는 되갚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노르웨이, 카타르 같은 나라들은 한편으로는 자국 상품을 계속 구매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러로 투자한 돈의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미국이 지탱하기를 바라는 미묘한 상황이 전개됐다. 결국에는 이들 나라들이 달러에서 서서히 손을 떼면서 달러는 붕괴하고 있다.   

서=세계경제가 경기순환의 관점에서 콘드라티예프 B국면에 놓여 있는 동시에 위기의 말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미 말기에 들어섰다고 한다면 지금의 경제위기는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가.

월=현재 상황은 지난 20~30년간 진행된 과정의 한 부분이다. 과거에도 이런 경기침체는 몇 차례 있었다. 독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선도 산업을 육성하는 게 지금까지 일반적인 위기 탈출 방식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식으로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5년쯤 뒤에 일시적인 회복을 보일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자본의 세가지 비용을 더 상승시킬 것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오래전 물리학에서는 한 곡선이 점근선(Asymptote)을 따라 올라가 정점의 70~80%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갑자기 붕괴를 시작한다는 분석이 있었다. 지금 세계경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현재 상황은 세가지 비용곡선의 70~80% 지점에 와 있고, 엄청나게 요동치고 있다.

서=미국의 오바마 새 행정부를 어떻게 보나? 오바마는 당신이 자본주의 체제 위기의 핵심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세가지 비용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전체 임금비용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일종의 전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또 오바마의 야심에 찬 재정지출 프로그램은 인프라와 신기술 투자를 통해 투입비용 상승에 제동을 걸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녹색기술에 대한 투자는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오바마는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치유할 뿐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월=세계무대에서 오바마가 가진 힘을 고려했을 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힘의 중심이 8~10곳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제한적이다. 최근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정상회의를 보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 각국 대표들을 초청하지 않은 채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 대부분 나라의 대표들이 2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다 모였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이번 리우정상회의를 통해 미주정상회의를 완전히 격하시켰다. 5년 전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다. 오바마는 세계인들의 맘에 들게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지도국가로 만들 수는 없다. 사람들은 미국이 지도국가가 아니라, 단지 기후변화와 같은 많은 사안에서 협력하는 국가의 하나가 되길 원한다. 오바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미국 내 문제에 머물 것이다. 국내 소요를 막기 위해 사회민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일이 대표적이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다리를 짓는 데 돈을 쓸 것이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시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내적이고 지역적인 일이다.  

서=우리는 아주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 브레턴우즈협정 이래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잡아 70년대 위기에서도 살아남았던 달러가 최근 뚜렷하게 약세다. 금융위기는 달러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었고, 어떤 이들은 세계통화로서 달러는 이미 붕괴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아무리 기술적으로 정교하더라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전장에서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미국의 헤게모니를 지탱해온 두 축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변화가 지정학적 역학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보는가?

월=세계 주요 패권국들은 각자가 충분할 정도의 파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타협을 통해 최상의 조합을 모색하려 할 것이다. 예컨대 ‘상하이협력기구’(SCO) 같은 조합이다. 또 러시아나 중국은 브라질과 중남미 국가들과 은밀하게 거래를 하며 주도권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도 이런 게임을 할 수 있다. 서로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과 동아시아, 유럽과 러시아 등이 가능한 조합이다.

서=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다양한 금융위기 극복방안이 나오고 있고, 국경간 자본거래에 대한 새로운 감독체계도 논의되고 있다. 이런 논의들은 자본주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쟁점은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역사적 체제다. 이에 대한 논의에서도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세계경제의 체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확대하고 국제기구의 감시 기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다른 쪽에선 힘을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상품화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야만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계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세계체제 대안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평등한 세상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여년 동안 벌어진 논쟁들은 ‘자코뱅’(전위주의)의 시각에서 전개됐다. 이 때문에 모든 게 국가지향적이었고, 또 누구에게나 결과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다 그랬다. 이제는 이런 자코뱅적 시각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두 갈래 전략을 강조하고 싶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덜 나쁜 악’을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해야 할 일을 10년, 20년 뒤로 미루기를 원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차악은 있게 마련이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건설하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서 끊임없이 토론하고 협상하고, 통합을 이뤄나가야 한다.(뉴헤이븐(예일대)/정리·사진 류재훈 특파원)   

팔순 앞둔 백발의 열정…‘근대세계체제론’ 5권까지 의욕

15년 만에 다시 만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는 팔순을 앞두고 백발이 더 늘긴 했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열변을 토할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월러스틴 교수는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위치한 예일대 연구실을 먼저 찾은 기자로부터 <한겨레>의 ‘대전환’ 신년기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얘기”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본주의는 이전의 다른 역사적 사회체제처럼 종말의 기로에 서 있으며, 앞으로 20~40년이 새로운 체제를 향한 전환기가 될 것”이라는 지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월러스틴 교수는 지난 1998년부터 3년간 한겨레에 실렸던 자신의 칼럼이 스캔된 한글파일들을 보여주며 한겨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그는 1998년 한겨레 연재와 함께 시작했던 매달 칼럼 쓰기를 바쁜 일정 중에도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월러스틴 교수는 해마다 겨울엔 3개월씩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데, 올해 체류기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연말부터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EHHSS)의 연구실에서 <근대세계체제론> 제4권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장기 19세기’를 다루게 될 제4권이 새해 초에 출간되면 1989년 제3권 출판 이후 20년 만에 이뤄지는 업적이다. 월러스틴 교수는 자신할 수는 없지만, 20세기를 다루게 될 제5권도 마무리짓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는 또 1985년 한국에서 출간된 <세계체제론>(정진영 편역·나남신서 13)을 보여주면서 절판됐겠지만 사본을 한 권 구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류재훈 특파원)  

☞ 월러스틴 교수의 ‘세계체제론’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의 원래 관심 분야는 미국 정치였다.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란 변수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한 뒤 아프리카 지역 연구에 뛰어들었고, 다시 근대 아프리카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유럽 세계경제’의 역사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대표작 <근대세계체제> 시리즈이다. ‘세계체제론’이라는 그의 독창적 분석틀이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월러스틴 교수에 따르면 사회과학은 ‘부분들의 총체’인 ‘체제’를 분석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체제란 두 가지 기준에 의해 개념화된다. 우선 그 안에서의 생활이 자기충족적이어야 하며, 발전의 동인이 내생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오직 ‘세계체제’뿐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지역사회나 주권국가가 아닌, 세계체제를 학문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세계체제의 여러 유형 중에서도 16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았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주변부-반주변부-핵심부’라는 지리적·위계적인 분업구조로 이뤄졌는데, 이 안에서 작동하는 주기적 파동과 장기적 추세가 체제를 팽창시킨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가 19세기 말 그 경계와 세력권을 전지구적 규모로 확장시킨 결과라는 게 월러스틴 교수의 분석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영속하는 체제가 아니며, 탄생·확장·종말이라는 생애주기를 갖는 ‘역사적 체제’라고 월러스틴 교수는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언젠가 다른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존재의 가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체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정비용이 지나치게 커져 그것을 평형상태에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월러스틴 교수는 △지리적 팽창의 완성에 따른 저임금 노동력 풀(pool)의 소진 △계급투쟁에 따른 체제불균형의 증대 △경제적 압박에 따른 정치적 정당화의 위기 등에서 찾는다.(이세영 기자) 

09. 01. 01.  

P.S. 기자의 마무리 정리멘트가 요점을 말 그대로 '정리'해주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영속하는 체제가 아니며, 탄생·확장·종말이라는 생애주기를 갖는 ‘역사적 체제’라고 월러스틴 교수는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언젠가 다른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존재의 가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의 전망대로라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새로운 호황 국면을 기대하는 것은 말기 암환자의 회생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신앙'에 가깝다(위기가 기회이다?). '삽질하는 신앙' 대신에 우리에겐 다른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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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1 15:44   좋아요 0 | URL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이 함께 소개되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종속이론가들은 모조리 그 영향력이 사라지고 왈라스틴의 세계체제론만 남았군요.근대세계체제론의 마무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노익장이 대단하군요.

로쟈 2009-01-01 21:08   좋아요 0 | URL
경제학에 과문해서 그런데, 저는 (자본주의의 중심부-주변부를 전제로 하는) 세계체제론이 종속이론도 포함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닌가요? 종속이론은 일방적인 수탈/착취관계로만 파악하는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2 15:54   좋아요 0 | URL
두 분야 모두 자본주의 이행논쟁 당시의 진영으로 보면 유통주의에 속해요.굳이 따지자면 종속이론은 트로츠키즘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요.그래서 국내에 소개된 종속이론 해설서 중 제일 잘 되었다는 유아사 다케오<제3세계의 경제구조>는 트로츠키를 많이 언급했고 트로츠키 싫어하는 스탈린 정통파?들은 종속이론을 트로츠키즘이라고 평가절하했지요.왈러스틴은 아날학파의 브로델을 더 많이 수용했지요.하지만 국제분업을 강조한다는 점에선 종속이론과 공통점이예요.

로쟈 2009-01-03 00: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어림짐작에 종속이론이 해방신학과 나란히 유행을 타다가 시들해진 듯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3 18:01   좋아요 0 | URL
종속이론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책중 가장 많이 팔린 <제3세계와 종속이론>(한길사)의 저자 염홍철 씨가 교수에서 정치인으로 그리고 대전시장으로 변신하면서 종속이론도 시들해진 것 같죠?

로쟈 2009-01-03 22:51   좋아요 0 | URL
같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3 23:56   좋아요 0 | URL
그 양반 정당을 많이 옮겨서 철새 정치인인데 이상하게 인터넷에다가 정당 이력을 안 밝히는
이들이 많아요.염홍철 씨도 마찬가지...민자당에서 어떻게 열린 우리당으로 갔는지...헷갈려요.

로쟈 2009-01-04 00:3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종속이론을 공부했는지도 헷갈리는데요...
 

이번주 시사IN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신병주의 <이지함 평전>(글항아리, 2008)을 다루었다. 곧 기축년 새해를 맞게 되기에('기축년'은 음력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을 찾은 것인데, 정작 <토정비결>은 토정의 직접적인 저작은 아니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인데 조선 중기 정치적 혼란기에 '비결'류의 책들이 여럿 나왔다고. <남사고비결>, <북창비결>이 <토정비결>과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유행한 '예언서'였다고 한다. 여하튼 나로선 토정비결을 보는 셈치고 읽은 책이다(책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인터넷 토정비결을 봤는데, 두 곳의 운세가 서로 달랐다.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시사IN(09. 01. 03) <토정비결>은 토정이 쓰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 새해를 맞는 만큼 어김없이 토정비결을 찾아보는 이들이 많을 듯싶다. 무슨 사자성어처럼 쓰이지만 ‘토정비결’은 ‘토정의 비결’이란 뜻이다. 흙으로 지은 정자를 가리키는 ‘토정(土亭)’은 알다시피 이지함(1517-1578)의 호이니 고유명사다. <토정비결>은 이지함판 <시크릿>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 <시크릿>이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려 한다면, <토정비결>은 자력구제가 가능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한 해의 운세를 일러준다. 흥미로운 건 이지함이 상식과는 다르게 <토정비결>의 저자가 아니라는 사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토정이란 이름을 빌려 썼을 거라는 얘기다. 그 이유로 저자는 이지함이 점술과 관상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친숙한 민중 지향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든다.   

사화(士禍)의 회오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처사(處士)의 삶을 살다 갔지만 이지함은 세상을 잊은 채 현실을 외면한 은둔거사가 아니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 ‘처사형 학자’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갖고서 민생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쓴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이지함 또한 천거를 받고 1573년에 포천현감에, 1578년에는 아산현감에 부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이상을 펴보고자 했다. 

그의 핵심적인 사회 경제사상은 무엇이었나?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포천현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그는 상․중․하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한다. 상책은 국왕이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고, 중책은 국왕을 보좌하는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청렴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하책은 땅과 바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농업이 본업이던 사회에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지함은 덕이 본(本)이고 재물이 말(末)이지만 본말은 상호보완적이며,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리(利)’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앞선 그의 적극적인 국부 증대책과 해상 통상론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며, 이것은 18세기 북학파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지함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사직했다.  

<주역>에 따르면 변혁에는 시기와 지위와 능력이 필요하지만, 저자는 이지함의 경우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찾지 못했고 현감이라는 지위도 이상을 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민중을 위한 ‘토정의 비결’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08. 12. 29. 

 

P.S. 원고를 쓰다가 찾아보니 이문구 선생의 소설 <토정 이지함>(랜덤하우스코리아, 2004)이 눈에 띄었다. 테마로 글을 쓴다면 읽어보고 싶다. 소설 토정비결 류 외에 김서윤의 <토정 이지함, 민중의 낙원을 꿈꾸다>(포럼, 2008)도 소설로 <이지함 평전>과 비슷한 면모를 다루고 있을 듯싶다. 사실 <이지함 평전>은 서두를 읽으면서 가졌던 기대치는 총족시켜주지 못한는 책이었다. 가령 저자가 그리고자 하는 이지함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국부의 증대와 민생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산업도 개발해야 한다는 신념과 유통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자들의 논리와도 유사성을 갖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지함을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나아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가이자 실천가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5쪽) 

이지함은 16세기의 개방적이고 다양한 학문 경향을 보여주는 핵심적 인물이며, 특히 적극적인 국부 증진책을 제시한 그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양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잘 알고 있으면서, 막상 우리 선조인 이지함이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그러한 사상을 제시했던 사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애덤 스미스보다 앞선 시기에 적극적인 국부론을 주장하고 실천한 학자 이지함,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지함은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15쪽)  

인용문만 놓고 보자면 이지함은 서양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 견줄 만한, 아니 그보다 앞선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이다. 하지만, 본론에서 이러한 주장에 대한 '입증'은 몇 가지 에피소드로 대체되고 있다. '북학 사상의 원조 이지함'에 대한 '본격 재조명'이라고 하기엔 미흡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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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법 개정안(개악법안)에 반대하는 MBC노조의 파업(전국언론노조의 파업으로 확산될 예정이라 한다) 때문에 지난 여름에 흘려보낸 책을 다시 책상맡에 갖다놓았다. <MBC, MB氏를 부탁해>(프레시안북, 2008). '집단지성, 공영방송을 말하다'가 부제이고, 말 그대로 '집단지성' 편저로 돼 있다. 이미 현 정권의 언론장악 시나리오가 "1단계는 <와이티엔> <아리랑> 등의 사장을 특보단 출신으로 낙하산 임명하는 것, 2단계가 한국방송 사장 교체, 그리고 마지막 3단계가 문화방송 민영화"라는 것은 공공연한 기밀이었는데, 그렇게 다 노출된 시나리오를 이처럼 대놓고 철면피하게 밀어불일 줄은 몰랐다. 이런 게 '공구리 정신'인가? 여차하다간 그 공구리에 같이 파묻힐지도 모르겠다(그러니 '부탁해'는 너무 얌전한 부탁이다!). 늦게라도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8. 09) 위기의 공영방송, 당신이 지켜줘!  

2008년 4월29일 <문화방송>(MBC) ‘피디(PD) 수첩’이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1편을 방영했고 그 며칠 뒤부터 촛불시위가 시작됐다. 이로써 ‘피디수첩’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면서 ‘68혁명’에 비견되고 브로드밴드(인터넷 광대역) 직접민주주의 실험의 선구로 칭송받는 역사적 사건인 촛불시위의 진원지가 됐다.  

하지만 아주 다른 시각도 있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조선일보> 7월7일치 ‘시론’에서 다우너 소와 아레사 빈슨의 죽음에 관한 피디수첩의 “모든 장면들은 허위로 드러났다”고 단정했다. 그는 이어 “그것은 무서울 만큼 교묘하게 계산된 공포와 선동의 메시지”였고 “사실과 주장, 진행자의 말실수와 오역 등이 적절하게 섞여 소름끼칠 만큼 잘 만들어진 거짓의 몽타주”였다고 다시 확언했다. “이러한 몽타주는 순진한 어린 학생들, 그 아이들을 먹여야 하는 가정주부들, 그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들을 선동”하였으며, 그 결과 “이성이 마비되었고, 분노가 치솟았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우리 사회는 또다시 갈가리 찢긴 가운데 정부와 국가가 위기에 직면하였다. 무엇보다도 진실이, 그리고 진정한 언론이 붕괴하려 하고 있다.”  

윤 교수 주장대로라면 촛불시위에 참가한 연 수백만 명의 시민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한 방송사의 무서울 만큼 계산된 공포와 거짓 선동에 놀아난, 다른 아무런 정보도 주체적 판단력도 없는 맹목의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정부 신뢰 추락과 국가 위기 사태도 이 용납 못할 방송사가 내보낸 저주받을 단 하나의 ‘거짓 몽타주’ 프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권의 횡포로부터 피디수첩을 지켜 달라고 호소한 피디들은 “자신의 잘못을 선동의 정치로 돌파하려는” 파렴치범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론이 무게를 갖는 것은 그게 바로 정부 뜻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김창룡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교수는 <MBC, MB氏를 부탁해>(프레시안북 펴냄)에서 이 시론을 인용하며 “현재 수사 중인”, 그리고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해 “검찰의 논고문도 이처럼 과격하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동적인 용어로 넘쳐나고 있다”며 “저널리즘의 윤리적 차원에서 풀어나가야 할 사안을 확대·과장한 이면에는 어떤 정치적인 노림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누가 정말 선동적이고 정치적인지를 묻고 있다. 그는 피디수첩 위법 논란과 관련된 주요 쟁점들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 다우너 소를 광우병 소로 단정해서 한쪽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몰아갔는가. 아레사 빈슨의 사인을 인간광우병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했는가. 피디수첩의 보도는 언론의 감시·견제 역할이라는 공적 권한을 넘어 의도적 왜곡 보도를 시도했는가. 그리하여 피디수첩은 과연 거짓의 몽타주인가. 이를 하나하나 검토한 김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추가협상까지의 과정, 장관고시의 성급함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이 모든 잘못을 ‘피디수첩’에 돌려 단죄하려 든 것은 윤 교수의 성급한 단견이 아닐까.” 한때 유행했던 빌 클린턴 어법을 약간 비틀어 김 교수의 속내를 표현한다면, “문제는 정부의 엉터리 협상과 처방이야, 바보들아!”쯤 될까.  

“조·중·동이 떠들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질의하고, 검찰이 수사하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심의 결정하는 기가 찬 공조체계”(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가 단죄하려는 것은 당연히 윤석민 교수가 아니라 그가 피디수첩에 덮어씌운 혐의들이다. 일방적이고 일사천리다. 공조체계가 노리는 것은 전면적 방송 장악이라는 게 이 책 필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지금 전 교수가 지적한 그 기가 찬 공조체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피디수첩, 엠비시, 공영방송만을 표적으로 삼는 게 아니다. 인터넷과 네티즌, 촛불집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탈법적인 저질 우중, 폭력배, 폭도로 싸잡아 매도한다. 광고 보이콧 운동을 펼치는 소비자들을 고발하고, 인터넷 카페를 문닫게 한다. 마치 자신들이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선한 약자인 양, 나머지를 좌파, 빨갱이, 반사회·반정부·반국가 집단으로 내몬다.”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을 정치와 언론 권력자들은 “‘10년 좌파세력의 저항’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그들은 존재 여부도 불분명한 좌파, 까놓고 말해 ‘빨갱이’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실책과 범죄행위를 모두 빨갱이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1950년대에나 통했던 매카시 수법을 다시 무대 위에 올려놓으려 하고 있다는 비판들이 많다. 상대를 다른 의견을 지닌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한 이런 전면적인 권력투쟁의 파괴적인 영향이 곧 해일처럼 밀려올지도 모른다.  

<MBC, MB氏를 부탁해>는 바로 이런 현실을 대중들에게 보고하고 그들을 공영방송의 외부자가 아닌 핵심 당사자로 인정하면서 그들이 미디어 공공성 지키기와 발전을 위해 직접 행동의 주체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공영방송 담론 대중화’ 기획, ‘엠비시에 관한 새로운 대중적 집단 글쓰기 실험’이다.  

따라서 외부의 적에 대한 항쟁만이 아니라 거리의 저널리스트들과 연대하라(김형진 미디어운동가), 거리의 민중성이 갖는 민족주의적 속성을 경계하라(민임동기 <미디어스> 기자), 시민민주주의와 결합하라(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엠비시 내부를 향한 주문들도 담고 있다. 그것은 절대로 MB氏에게 엠비시를 부탁해선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한승동 선임기자)   



■ 정부의 언론장악 이래서 안된다 
“상식이 좌파로 공격당하는 이 비상식적 환경을 두고 볼 수 없었다.” <MBC, MB氏를 부탁해>를 전규찬 교수와 함께 기획한 ‘문화관찰자’ 완군(29·사진)씨는 정권의 언론장악 기도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국가기관을 총동원해도 <한국방송> 사장 한 사람 날릴 전망조차 불투명해지지 않았느냐. 어떤 정권도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자충수다.” 왜 그렇게 볼까?  

“<한겨레>도 그렇지만 <문화방송>도 오너가 없는 회사다. 지난 10여년 방송인들이 콘텐츠를 생산할 때 간섭이나 외압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이 책 ‘닫는 글’에서 김현철 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지부 홍보국장이 얘기했듯이 그들은 자기 아이템에 대해 안팎으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들에겐 그게 상식이 돼 있다. 그런 그들을 이 정부가 의도하는 대로 ‘관리’할 수 있을까? 윗선은 가능할지 몰라도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실무 성원들에겐 절대 불가능하다. 아직 정권의 간섭이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아서 그렇지 만일 거기까지 가면 내부의 그들이 들고일어설 것이고 시민들이나 1인미디어 등 외부 지원세력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정권의 목표는 그들 내부문건을 통해서도 드러났듯 명확하다. “1단계는 <와이티엔> <아리랑> 등의 사장을 특보단 출신으로 낙하산 임명하는 것, 2단계가 한국방송 사장 교체, 그리고 마지막 3단계가 문화방송 민영화다.”  

책을 기획한 건 지난 6월 중순. 그러니까 책은 기획한 지 달포 만에 초고속으로 제작 완료했다. “촛불시위 이후 문화방송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크게 호전되면서 책 만들 궁리를 했고, 문화방송 노조 쪽과도 한번 해 보자는 사전 교감을 했다. 전규찬 선생과 필진 섭외를 함께 했는데, 이미 많이 알려진 전문가들은 될수록 빼고 젊은 활동가들 중심으로 짰다. 모두 25명이 참여했다. ‘집단지성’을 통해 문화방송을 권력의 정치적 계산에서 지켜내고 더 좋은 방송으로 만들자, 문화방송의 공영성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내자, 문화방송한테서 우리한테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자, 그런 게 기획의도다.”(한승동 선임기자)  



■ 공영방송 민영화 이래서 안된다 
공영방송의 민영화 담론, 무엇이 문제인가? 김동준(36·사진)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실장은 문답식으로 정리한다.  

1. 선진국과 비교해 공영방송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1공영 다민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미국, 영국, 일본은 1공영체제지만 한국의 방송환경과 공영방송 운영방식은 이들 세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프랑스는 공영방송이 넷이나 되고 네덜란드는 셋, 독일과 스웨덴·벨기에·덴마크·스페인·포르투갈은 각각 둘씩이다.”  

2. 공영방송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니 축소해야 한다.
“궤변이다. 현재 조·중·동의 신문시장 점유율은 70% 수준이지만 뉴스프레임 형성과 논조 주도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조·중·동의 시장장악이 95%를 넘어선다. 공영방송은 조·중·동이 그나마 최소한의 저널리즘 흉내라도 낼 수 있도록 압박하는 구실을 한다.”  

3. 민영화로 경영합리화를 이룰 수 있다.
“이윤 창출만을 추구하여 서비스 질의 하락을 초래한다. 보수세력이 케이티(KT) 민영화로 얻을 수 있다고 그토록 강조한 ‘국익’은 어디로 갔나? 케이티 수익의 50%는 외국에 유출되고 있고 사원은 6만여명에서 3만여명으로 축소해 무려 3만여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4. 민영화를 통해 여러 공급자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수용자 복지가 증진된다.
“오히려 프로그램 다양성이 훼손될 여지가 크다. 민영화가 콘텐츠 제작 주체의 증가나 다양화로 이어지기보다는 대중들과 광고주의 취향에 부합하는 상업적 프로그램만 양산한다. 드라마는 ‘불륜’ ‘삼각관계’라는 시청률 문법만 강조되는 쪽으로 획일화하고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연성화한 외주제작 정책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  

5. 공공부문을 축소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적 분위기다.
“신자유주의와 국제 금융자본에 굴복하는 거다. 민영화로 포항제철은 외국인이 전체 주식의 60% 안팎을 소유하게 됐고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정부지분을 인수한 자본 역시 외국 금융자본이며, 주요 공기업 민영화를 요구하고 있는 주체도 사실상 외국자본이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큰 신문사와 재벌,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외국 미디어자본이 장악하게 될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08.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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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30 17:13   좋아요 0 | URL
조중동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기는 많아요.촛불시위 때 조중동이 곧 망할 것 같았지만 이름없는 조중동 애독자들의 뒷심이 아직은 상당한 것 같아요.

로쟈 2008-12-31 01:21   좋아요 0 | URL
관성인지 무관심인지 그것도 아니면 (탁석산의 지적대로) 실용주의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애독'은 아닐 거라고 믿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