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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재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지젝의 많은 책들이 그간에 오역으로 훼손돼 있다는 건 더이상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닌데,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된 개정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류의 책이 대학교재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까 당혹스럽다. 역자서문에는 "여러 가지로 쉽게 생각했다가 번역의 어려움을 경험한 책"이라고 돼 있는데, 그 '어려움'을 왜 애꿎은 독자들까지 나눠가져야 하는지? "이번 번역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종교에 대한 논의를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번역본으로는 그 '앎'에 동참할 수 없으니 유감이다. 

복사해둔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아 예전에 몇 자 써둔 걸 바탕으로 당장은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시작부터 나오는 코미디 같은 오역이 '뉴 에이지(New Age)'를 '뉴 에이즈'(13쪽)로 옮긴 것이다(색인에 있는 '뉴 에이지' 항에 이 쪽수가 빠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알랭 바두'로 옮겼다. 다 그럴 수 있지만, 무지가 아니라면 역자가 최소한 부주의하거나 불성실하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냥 넘어갈 만한 페이지가 거의 없지만, 두어 대목만 보도록 한다(원서를 찾는 대로 마저 지적하겠다). 71쪽에서,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깡은 외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은 익살스럽게 꼬여 있는 끌로델Claudel의 쿠폰텐Coufontaine의 3부작을 언급하고 있다.” 원문은 "In his seminar on transference, Lacan refers to Claudel"s Coufontaine trilogy, in which Oedipal parricide is given a comical twist."(43)이다.

이 대목에서의 클로델은 아마도 작가인 폴 클로델일 것이다(조각가 카미유 크로델의 동생). 먼저, ‘라깡’이나 ‘끌로델’로 표기하고 있는 이 국역본이 ‘꾸퐁뗀’이라고 하지 않고 ‘쿠폰텐’이라 표기한 것부터가 서툴다. 그런데 결정적인 건, ‘Oedipal parricide’를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으로 번역한 것. 우리말에 ‘어버이’는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를 뜻한다.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이라니?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부모를 다 죽였단 말인가? 그럼 그는 누구와 동침을 했단 말인가?!

아주 사소한 사례인 듯싶지만, 역자가 정신분석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드러내준다. 하긴 이 문장에서 꼬여 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문장 자체가 비문이다(‘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을 받는 ‘술어’가 없다).  다시 옮기면,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클로델의 <쿠퐁텐> 3부작을 언급하는바, 이 3부작에서 오이디푸스의 부친살해는 희극적으로 변형돼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스스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기성의 콜라 병들의 줄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65쪽) 원문은 “No wonder, then, that in the work of Andy Warhol,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 that found itself occupying the sublime Place of a work of art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40)이다.

정말 의아하면서 신기한 것은 우리말 문장이 안 된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오역의 대부분은 대상언어에 대한 무지에서가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다.) 여기서는 ‘아니었다’가 받는 주어가 빠져 있다. 그 주어가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이고,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가 술어이다.

컴퓨터 작업 중 엉겨서 문장의 일부가 누락되지 않은 거라면, 이런 식의 비문은 (비록 흔하다 할지라도) 몰상식/몰염치의 산물이다. 성의 없는 번역서가 독자에 대한 무슨 ‘시혜’라도 되는 양 착각하면 안된다. 다시 옮기면,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일상적인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다름 아닌 일렬로 늘어놓은 콜라병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번역은 놀랍다. 북한의 '김정일'을 지젝의 오기(아마도 'Kim Yong-il'로 표기한 듯)에 따라 '김영일'(59쪽)로 옮긴 것도 웃지 못할 코미디이다(색인에도 '김영일'이다). 김정일의 영어 표기는 'Kim Jong-il'(혹은 'Kim Jung-il')인데, 알다시피 'j'가 연자음일 경우 'y'와 호환된다. 지젝의 오기는 그래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리고 역자는 그걸 '충실하게' 옮긴 것이고. 역자가 지젝의 논의를 얼마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더불어 역자의 다른 역서들에 대한 신뢰마저 다 무너뜨린다).

이 책의 표지에는 "종교의 본질은 우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데 있다."고 적혀 있다. 번역이라는 우상도 마찬가지겠다. 번역 비판의 본질은 이런 우상과 같은 번역을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벗겨내는 데 있다(그런 점에서 번역 비판은 '종교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우리 주위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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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르넬르 2010-01-1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나중에 읽으려고 했는데, 영문판을 봐야겠군요...그보다 절판!!
 
레비나스
베른하르트 타우렉 지음, 변순용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 베른하트르 타우렉은 독일 대학의 교수인데, 이 책과 함께 니체, 푸코, 셰익스피어 입문서와과 철학 입문서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역자도 이에 착안하여 레비나스에 관한 '적절한 입문서'로서 이 '불어로 저술하는 철학자에 대한 독어로 된 입문서'를 옮기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고는 별로 빛이 나지 않는다. 역자의 말대로 "입문서라는 것은 입문서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번역마저 신뢰감을 주지 못할 경우에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연보에서부터 그가 태어난 나라 '리투아니아'를 독어식으로 '리타우엔(Litauen)'이라고 표기할 때(277쪽) 나는 이 번역서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데카르트적 명상>이라 옮겼을 때도 그러려니 했지만, 그마저도 <데카르트주의적 명상>과 혼용될 때는 좀 짜증스러웠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를 '플로틴(Plotin)'이라 옮길 때도 철학계에선 그렇게도 쓰나? 란 의구심을 가져지만, '로젠츠바이크'를 '로젠쯔바익(Rosenzweig)'으로 표기하는 특이한 취향을 지나서 (프랑스 시인도 아니고)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을 '쓸랑(Paul Celan)'(140쪽)이라고 옮길 때에는 당혹감을 넘어서 '낭패감'을 갖게 되었다(그나마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니 '데리다의 근본적인 반대리주의(反代理主義)'(128쪽)란 표현이 나오는 건('반표상주의'나 '반재현주의'가 아니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빌자면, 독자가 역자에게서 '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자 또한 독자에게는 '타자'라는 걸 확인하는 수밖에. 한데, 중요한 건 이 타자에 대한 '책임' 아닌가? 레비나스 철학 혹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 책임!

역자가 레비나스를 접하게 된 계기 또한 그 책임의 문제였다고 하는바, "그의 책임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책임"까지도 추궁한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그것은 "나의 모든 자유보다 선행하는 타자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14쪽) 그러니 이 책 <레비나스>에서만큼은 역자의 책임은 '무한'이겠지만, 나는 역자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애당초 별로 재미없는 책을 쓴 저자에게도 책임의 일부는 돌려져야 할 것이기에(이 책과 비교한다면, 콜린 데이비스의 또다른 '입문서'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다).   

원전이 독어본인지라 미심쩍은 대목들을 대조해볼 수가 없었지만, 영어 연구서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대목은 예외였다. <해체론과 실용주의>란 책에 실린 로티의 말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대목은 독어역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을 테니 중역이겠다).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가 하이데거의 존재보다 결코 도움된다고 보지 않는다 - 이 두 가지는 내게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189쪽) 

각주에 있는 원서의 쪽수를 찾아갔더니 이 대목은 "I don't find Levinas's Other any more useful than Heidegger's Being - both strike me as gawky, awkward, and unenlightening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41쪽)을 옮긴 것이다.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은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좌익으로서'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신실용주의자' 로티다운 의견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Other)'가 하이데거의 '존재(Being)'보다 뭐가 나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타자존재나 둘다 내게는 멍청하고 어색하며 몽매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자질구레하게 이런 대목들을 더 지적하는 것은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급하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전히 '계몽'이며, '타자의 독서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만은 확인해두도록 하자. 역자가 부록으로 실은 논문들(68쪽으로 번역 본문 분량의 1/3이 넘는다! 이 분량은 책값과 무관한가?)에 쏟아부은 정성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정확한 번역과 교정에 할애했더라면 책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이런 책과는 달리 혹은 이런 책의 저편에서' 신뢰할 만한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역자로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겠다. "그의 철학은 느껴야 한다. 그 느낌은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다."(15쪽)고 하니까. 해서 덧붙이자면, 레비나스 입문에 더 좋은 것은 이런 '입문서'들을 읽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책' 따위를 놓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라, 선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레비나스의 얼굴을 보면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조용히 묵상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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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6-02-1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읽으면서 답답했던 생각이 납니다.^^

로쟈 2006-02-19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입문서로는 부적합해 보입니다. 레비나스 이해의 관건이 되는 하이데거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

사량 2006-02-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파울 첼란의 경우, 이 사람이 훗날 파리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간주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하이데거 전문가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동녘, 2004)의 앞부분에는 "프랑스의 시인 폴 셀랑(Paul Celan)"이라는 무시무시한-_- 말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02-2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첼란이 불어로도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찾아보니까, 1951년에 프랑스로 귀화했군요. 한데, 프랑스어 시집은 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로 독어시집이고 루마니아어 시집이 한 권 있는 것 같네요.

김한솔 2021-12-3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는 서평이었습니다.
 
천개의 고원 - 사용자 가이드
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조현일 옮김 / 접힘펼침(enfold)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이미 품절된 책인지라(자체 품절?) 굳이 이런 자리에서 다룰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없지는 않지만,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라 일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리해둔다. 마수미(B. Massumi)는 <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이며, 당연히 영어권의 대표적인 들뢰지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가이드'의 원제는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92)이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가이드북인 셈이다. 가이드북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개성적이며 따라서 그닥 친절하지는 않다. 친절한 걸 원한다면 우리식 가이드북인 <노마디즘>(휴머니스트)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 가이드북의 대상은 <천 개의 고원>이 아니라 <천의 고원>이지만).

마수미의 책은 상당히 오래전에 복사해두었었는데, 이처럼 번역돼 나왔길래 반가웠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사실 반갑지 않았다. 역자의 전력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 된 번역서일 확률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해서, 미덥지 않은 마음에 도서관에 주문이나 해두었었는데, 얼마전에 대출가능해졌고 내가 첫 대출자였다(궁금함보다는 주문에 대한 '책임감'에 떠밀려 대출했다). 고급스런 장정의 하드카바이긴 하지만, 역시나 읽어보는 시간이 아까운 오역서. 한데, 이건 역자 자신이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많은 오역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243쪽)라고 태연하게 밝혀놓고 있는 터여서 지적하기도 쑥스럽다(보통은 '혹 있을지도 모르는 오역은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적는다). 아아, 역자의 말은 겸양이나 아이러니가 아니라 액면 그대로인 것이니!('오역의 희열'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번역을 감행하는 이유가 설명/이해되지 않는다.)

몇 걸음 뗄 것도 없이 첫 페이지부터 오역의 퍼레이드이다. 마수미의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국역본은 네 개의 장으로 재구성하면서 'Pleasures of Philosophy'란 제목의 서문을 '희열'이란 장으로 옮겨놓았다. 해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고스란히 빠져있으면서 오역의 '희열'을 유감없이 제공해주는 번역문들을 약간만 맛보기로 한다(어차피 이해못할 철학이라면 즐기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좋게 생각한다면, 번역에 대해서 툴툴대는 나의 태도는 제법 옹졸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음으로써 나의 그 옹졸함을 굳이 더 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서의 첫 페이지 세번째 문단이 국역본의 두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옮겨져 있다(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열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집니다. '철학'이 그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그저 일반적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출(bastard)로서의 철학입니다. 서출이 아닌 합법적 철학은 '전제군주의 그늘'에서 말하는 순수이성의 '관료주의'가 낳은 아들이며 제도(the state)의 역사적 복잡성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복잡성은 우리 정신의 내부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절대 제도(the State)를 생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건전한 논리'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된 안정적인 주체로서의 담론이며, 바위와 같이 견고한 담론이자, 백인우월주의적이며 '일반(universal)' 진리의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8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단정적인 서술이므로 밑줄긋기를 해볼 만한 대목처럼 읽히지만, 문제는 제멋대로의, 보다 정확히는 정반대로의 번역이라는 것. 원문은 이렇다: "Schizophrenia, like those 'suffering' from it, goes by many names. 'Philosophy' is one. Not just any philosophy. A bastard kind. Legitimate philosophy is the handiwork of 'bureaucrats' of pure reason who speak in 'the shadow of the despot' and are in historical complicity with the state. They invent 'a properly spiritual... absolute State that... effectively functions in the mind." Theirs is the discourse of sovereign judgment, of stable subjectivity legislated by 'good' sense, of rocklike identity, 'universal' truth, and (white male) justice. 'Thus the exercise of their thought is in conformity with the aims of the real State, with the dominant significations, and with the requirements of the established order."(1쪽)

처음 네 문장은 국역본의 번역도 오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라면, "분열증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행해진다. '철학'은 그 중 하나이다. 그건 여타의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아주 개 같은 철학이다." 정도로 옮기겠다. '개 같은 철학'(A bastard kind of philsophy)은 철학에서의 분열증, 혹은 분열증적인 철학이 갖는 이름이고 양상이다. 이 '잡종 개' 같은 철학과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 '합법적 철학'이고 '국가 철학'이다(State를 역자는 '제도'라고 옮겼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록 '제도권 철학' 정도라면 '국가 철학'과 의미가 통할 수는 있지만). 이 합법적 철학은 순수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역자는 'bureaucrats'을 '관료주의'라고 옮김으로써 이후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럴 경우 이후에 나오는 'they'가 무얼 받는 건지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개 같은 번역이 돼 버렸다). 

다섯번째 문장부터 다시 옮기면 이렇게 된다: "합법적인 철학이란 순수 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그늘' 속에서 말하며 역사적으로 국가 체제와는 공모관계에 있다.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걸맞게 우리의 마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절대 왕정(국가)을  발명해낸다.' 그들의 담론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양식'에 의해서 합법화되는 안정된 주체성의 담론이고, 바위같이 확고한 자기동일성, '보편적' 진리, 그리고 (백인 남성적) 정의의 담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를 실행한다는 것은 실제 국가의 목적들과 지배적인 대의들, 그리고 기존의 질서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합법적인 철학과 그로부터 분열증적으로 도주/탈주하고자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 같은 철학'은 정반대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오직 역자만이 알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류의 오역이 국역본에는 모든 페이지에 걸쳐 출몰하며, 나로선 이 '희열들'을 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맛만 보는 정도에서 다시 역자의 말로 넘어가는 이유이다.

"역자는 번역하는 다이어그램 기계입니다.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더라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개념의 전이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죠.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다발입니다."(242쪽) 한 대목만 지적했지만, 이 '종이다발'과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는 서로 무관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암시되었을 것이다. 쑥쓰러운 것은 이 또한 역자의 계획(손바닥) 안에 다 포함돼 있다는 것. 그러니 '기계 번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빨만 아픈 일이다.  

마지막 역주에서의 충고: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천 개의 고원>, <안티오이디푸스>, <이성의 논리> 그리고 <차이와 반복> 등의 번역본의 페이지번호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정본의 출간여부가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독자들은 우리말 번역본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영역본으로 돌려보내거나 불어원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덱스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번역본이 아닌 토종 철학자들의 저서로 돌아가는 방법을 적극 추천합니다."(244쪽)

역자가 <이성의 논리>라고 한 건 <의미의 논리>를 가리킨다. 역자가 언급하고 있는 국역본들이 비록 미흡한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역자가 논할 수준은 넘어선다(그러니 적반하장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충고는 적어도 이 마수미의 책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나는 독자들이 원본(영어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다(이 비문은 나의 것이 아니며 오타도 아니다. 역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역자가 풀서비스로 제공하는 희열에 어느 정도 몸을 푼 독자라면, 이제 '철학의 즐거움'은 다른 자리에서 맛보아야겠다. 이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다간 희열의 '괴물'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길('괴물monstrosity'은 마수미의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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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5-12-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괴물스러운 번역본이로군요!!

dasein-x 2005-12-30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두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짜증이 밀려들어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원서와 대조해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철학적 소양만 있다면 이 번역서의 오역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해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번역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로쟈님의 리뷰를 보기 전에, 서점에서 급하게 사들고 온 나자신의 성급함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autobalance 2006-01-02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천개의고원사용자가이드'를 번역했던 조현일입니다. 먼저 제가 번역한 글에 실망하셔서 몸둘바모르게 죄송하다는말씀을 드리고싶어요. 애초에 번역을 기획하는단계에선 여러분께 짜증을 드리기위해서 시작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어쨌건 오역이 많고 수정되지않은상태로 출판되어 공부하시는분들께 제가 큰죄를 저지른것같습니다. 건축대학원재학시 교과서로사용하던 책이라 너무 감명깊게읽었고 번역본이나오면 독자들이 제가 읽은것처럼 재밌게 읽었으면좋겠다는 짧은생각에 성급하게 추진되었던것같습니다. 애초에 전문가분들께 의뢰를드리고싶었지만 여러분들이 이런책은 번역해도 표도안난다며 거부하시길래 짧은실력에 직접덤빈것이 화를 자초한것같습니다. 로쟈님께서지적하신대로 번역본에 문제가많았거니와 감수를통해서도 제대로걸러지지못해 공부하시는분들께 혼란만가중시킨점 사죄드립니다. 단순히 제 능력이 모자라서입니다.진작에 로쟈님같은분께 번역을 의뢰했더라면 좋았을텐데..책을 출판하고나서 재정적손해도 컸지만 오역을충분히거르지못한 회한이 더크네요.하지만제가좋아했던책을 번역하는동안은 너무행복했습니다.무책임한발언일지몰라두요..주제넘는요구인지몰라도(수정본을다시내지못하더라도) 오역을수정하고싶은데,로쟈님,다자인엑스님,도와주세요.대강 오역부분이라도 지시해주시면 정말감사하겠습니다.사례를 할 용의도있습니다.오역을수정할 가치조차없다생각하시면 무시하셔도 좋구요.어쨌건로쟈님이 오역을언급해주셔서 정말감사합니다.

로쟈 2006-01-0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께서 친히 방문해주셨군요. 오역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신다니까 저로선 더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아마도 접힘과펼침에서 판권을 갖고 있는 듯하므로,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번듯한 개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가능하시면, 번역하신 3권의 책 모두). 국내에 들뢰지안들이 많기 때문에 적합한 역자나 교정자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충분한 비용만 투자하신다면). 앞으로는 좋은 책으로 대면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에 대하여 동문선 문예신서 255
J.힐리스 밀러 지음, 최은주 옮김 / 동문선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를 대출해왔다. 저자의 지명도를 봐서는 그냥 사서 읽어도 좋겠지만(힐리스 밀러는 폴 드 만, 해롤드 불름, 제프리 하트만과 함께 예일 '마피아'의 4인방을 구성했던 비평가이자 자크 데리다의 절친한 친구이다. 데리다가 폴 드만 보다도 더 오래 교우한) 출판사가 또 워낙에 못믿을 출판사인지라 (애꿎은)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놓았던 것이다(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동문선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악명이 높다고 한다. 인세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서. 아마도 동문선은 단일 출판사로는 프랑스어 저작에 대한 판권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출판사일 것이다).

대출해 오면서 나는 루틀리지에서 나온 원서도 절반쯤 복사를 했다. 원서(2002)는 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가 동문선에서 '행동하는 지성' 시리즈로 몇 권 나와 있다. <믿음에 대하여>, <종교에 대하여>, <영화에 대하여>, <인터넷상에서> 같은 책들이 같은 시리즈이다(<인터넷에 대하여On the Internet> 대신에 제목이 <인터넷상에서>가 된 것은 출판사나 역자나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책을 내는 건지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읽어본 한도 내에서 이 시리즈는 허무하다(<종교에 대하여>와 <인터넷상에서>는 다 읽지 않았지만).

지젝의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도 쓴바 있지만, <영화에 대하여>만 하더라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목도 모르는 역자가 옮겨놓았다(역자는 영화제목 <2001>을 순수하게 연도로 옮겨놓았다). 물론 이런 류의 '문화의 오역'은 무지의 소치로 떠넘길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문장의 오역'이다. 가령 <문학에 대하여>에서 '문학'(literature)'에 대한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의 (세번째) 정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대목.

"대체로 문학 산출은 이렇다; 글쓰기의 전신은 특별한 국가나 시기 혹은 대체로 전 세계에서 나왔다. 이제 훨씬 더 엄격한 점에서 글쓰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형식미나 감정적 효과에 기반에서 고려될 것이 요구된다."(14쪽)

이게 '문학'의 정의란다. 영문학 박사라는 역자가 어떻게 영어 사전의 정의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지 정말로 미스테리하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이런 걸 한국어라고 옮겨놓은 역자에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하나? 이런 걸 읽으면서 진도가 빠지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나는 몇 쪽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이게 얼마나 '저질스런' 번역인지는 원문과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Literary production as a whole; the body of writings produced in a particular country or period, or in the world in general. Now also in a more restricted sense, applied to writing which has claim to consideration on the grounds of beauty of form or emotional effect."(p.2)

역자는 'as a whole'이 뭔지도 'body'가 이 문맥에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restricted sense'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역자는 '의미'란 뜻의 'sense'를 여기서는 '(어떤) 점'이라고 옮겼는데, 다른 곳에서는 전부 '감각'이라고 옮겼다. 가령, '현대적 의미의 문학'을 '현대적 감각의 문학'이라고 옮기는 식이다. 역자의 그 '감각'을 좀 살리느라고 독자들은 애꿎게도 전혀 '의미없는' 문장들을 읽게 되었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문학적 생산(창작) 일반.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서, 혹은 세계 전역에서 산출된 글들의 총체. 현재는 보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을 가리킴."(약간 의역했다.)

대개의 동문선 번역서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역자 후기가 '당당히' 들어가 있는데,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문학비평가로서 제네바학파와, 후에 예일학파의 해체주의자들과 함께 이론을 펼쳐나갔던 밀러는 시적 언어와 수사에 관심을 두면서 '이해'한다는 정의에 대한 모든 인식력 있는 주장들을 해체하여, 세계를 반복하는 단어를 이해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독자는 의미의 미궁을 밝히려 하지만, 그 미궁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 실제로는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175-6쪽)

이 대목은 번역서 전체의 '증상'으로도 읽힌다. 놀랍게도 전체가 한 문장인데, 내가 보기엔 이것도 역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말을 옮겨온 말이다(그게 아니라면 '인식력 있는'이란 엉터리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여간에 독자는 이 번역서에서 '의미의 미궁'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그 때마다 '다른 어떤 것', 즉 말도 안되는, 무책임하고 황당한 번역어들이 튀어나와서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그러니 역자가 '게을러지는 순간마다 용기를 주셨던' 이들을 어찌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종말의식'에 동참하게 된다(이런 번역서는 언제 종말을 맞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매체가 인쇄된 책을 점진적으로 대체하듯이 문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이다."(14쪽)

이 또한 "Literature in that sense is now coming to an end, as new media gradually replace the printed book."(p. 2)의 번역인데, 여기서 'as'는 '-하듯이'가 아니라 '하게 됨에 따라'란 뜻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in that sense'가 번역에서 누락됐다. 저자 밀러는 근대 이후에 발생한 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한 이후에 바로 '그런 의미의 문학'이 현재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 이후에 이어지는 번역문들은 ('뜰'은 커녕) 내리 '잡초밭'이다. 이윤기 선생의 바람처럼 나도 번역자들에게는 되도록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삼가하고 싶지만, 이런 경우들에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이런 엉터리 번역서를 낸 데 대하여 저자에게 사죄할 일이며, 이런 쓰레기 같은 번역서를 내는 데 동원된 종이들과 잉크들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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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7-1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참을 수 없는 수준이네요. 그런데, 참을 수 없는 번역하는 분들도 다들 공부 많이 하셨던데....대체. 쩝.

로쟈 2005-07-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있어서만큼은 매트릭스 같은 세상입니다(그 공부란 게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래서 가끔을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합니다...

주니다 2005-07-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 앞에서 피켓들고 1인 시위라도 해야되는 것인지...이런 부실한 번역서를 내는 간큰 역자는 또 무슨 배짱인 것인지...어쨌건 양식(양심)의 문제인듯 합니다.

사량 2005-07-1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나오자마자 손에 쥐었는데... 스무 쪽 읽고 포기했습니다.--; 역시 번역에 문제가 있었네요.

로쟈 2005-07-1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돈주고 사셨다니 제가 다 속이 쓰리네요...

사량 2005-07-12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도. 사서 읽진 않았습니다. ^^

Capitalist 2006-01-2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이 아니고 그런 점 때문에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되는 글들이겠죠. 원래 사전이 옮기기 가장 어려운 법이잖아요.

로쟈 2006-08-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군요.^^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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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지젝거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최근에 급기야는 ‘지젝거리는’ 이들을 위한 교본까지 등장했으니,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가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삐딱하기 보기>(시각과 언어, 1995) 이후에 열댓 권이 넘는 지젝의 책들이 우리말로도 번역/소개되었으니 우리 또한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한편으론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 지젝의 지적 파워를 확인시켜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의 말들을 (도대체 알아먹지 못할) 지저귀는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가뜩이나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오해받는 지젝에 대한 반발과 미움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마이어스의 책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로서 그러한 오해와 미움을 단번에 불식시켜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한 입 크기로 적당히 썰어놓은 지젝의 아이디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다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결국엔 저자의 이러한 결론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지젝이 라캉으로 ‘되돌아가고’, 라캉이 프로이트로 ‘되돌아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젝에게 ‘되돌아갈’ 것이다.”(231쪽) 

 

이러한 여정의 안내자로서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지젝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 즉 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을 앞세운 이후에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그의 사상을 갈무리한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이 주제들을 다루는 각 장의 말미에 친절하게 요약돼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지젝에게서 과연 무엇이 새로운가는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지젝은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근대적 주체로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그가 말하는 주체(subject)는 ‘자기로의 철회’라는 극단적 상실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고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이 텅 빈 자리는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는바, 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주체’와 ‘주체화’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견주어 ‘주체론적 차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이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는 아무런 내용물도 갖지 않는 텅 빈 장소이자 공백이지만, 이 공백은 언제나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젝은 근대(모던) 주체철학의 계보를 계승한다.

 

하지만, 그의 주체철학은 탈근대(포스트모던)의 탈-주체철학 이후에, 그것을 비판/극복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도래 가능한 철학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이후, 즉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이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를 우리는 그가 다루는 다른 주제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지젝의 사상을 안내하는 여정의 끝에서 저자는 지젝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소급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기에 그는 현재 ‘유령’이다). 그러한 예언을 다만 미래의 것으로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1989/1991년 이후의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젝의 작업들은 그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헤겔'일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리고, 마이어스의 책은 이 ‘또 다른 헤겔’ 입문서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제대로 ‘지젝거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의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유령이라 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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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6-1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거리고 싶은데요, 지젝의 책을 읽어볼까 하는 단계입니다. 이 책으로 시작해도 될까요. 그의 삐딱하게 보기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읽어내는 '잉여쾌락'의 맥락을 짚어보고 싶어서요. 혹 먼저 추천해주실 만한 책 있나요?

로쟈 2005-06-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이 책이 제일 쉽습니다(몇 가지 오역/오타만 확인하시고 읽어보시길). 이어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정도를 읽으시면 될 텐데, 슬슬 만만찮아집니다. 물론 좀 익숙해지다보면, 지젝을 읽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얼마나 유익한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아시게 될 겁니다.^^

돌바람 2005-06-1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에는 지젝이랑 놀아야겠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고 밑줄그어대는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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