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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구판절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따라야 할 좋은 방법이 있나요?

포크너: 99퍼센트의 재능,99퍼센트의 훈련, 99퍼센트의 작업. 소설가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결코 만족하면 안 됩니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보다 더 나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예술가는 악마가 몰아대는 그런 피조물이지요. 악마가 왜 그를 선택했는지 그는 모릅니다. 소설가는 대개 너무 바빠서 왜 그런지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 438쪽

-그렇다면 작가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어떤 것일까요?

포크너: 예술과 환경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술은 어디에서 창조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제안받았던 가장 좋은 직업은 유곽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죠. 제 의견으론 그곳이 예술가가 작업을 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입니다. 그 일은 예술가에게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주어 두려움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지붕이 있고, 간단한 계산을 좀 하고 매달 한 번씩 지역 경찰서에 가서 돈 좀 집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지요.(...)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환경은 평화, 고독, 너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즐거움뿐입니다. 나쁜 환경이란 혈압이 올라가는 상황, 즉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상황이겠지요. 제 경험으로는, 제 직업에 필요한 것이 종이, 담배, 음식과 약간의 위스키뿐입니다. - 439쪽

-경제적인 자유를 말씀하셨는데, 작가에게는 경제적인 자유가 필요한가요?

포크너: 아니요, 작가는 경제적인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필과 약간의 종이입니다. 돈을 지원받아서 좋은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좋은 작가는 재단에 후원금을 신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쓰느라고 너무 바쁘지요. 그가 일류 작가가 아니라면 그는 시간이 없다거나 경제적인 자유가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속이지요. 좋은 예술은 도둑놈이나 밀주 양조자나 경마장의 마부로부터도 나올 수 있습니다. - 440쪽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의무를 지고 있나요?

포크너: 작가의 의무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 의무는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너무도 바빠서 독자들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누가 제 작품을 읽는지 궁금해할 시간도 없어요. 저나 다른 작가의 책에 대한 사람들 의견 같은 것엔 관심없답니다. 제 기준만이 중요하며, <성 앙투안의 유혹>이나 구약성경을 읽을 때 제가 느끼는 것을 제 책에서 느낄 수 있다면 기준이 만족된 것입니다. 그것들은 저를 기분 좋게 만듭니다. - 445쪽

-'이따금씩 돈을 조금'을 벌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포크너: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저는 거의 모든 일을 조금씩 할 수 있었습니다. 배를 조종한다거나 집에 페인트칠을 한다거나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 등이지요. 그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사는 것은 돈이 크게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던 것은 잠잘 곳, 약간의 음식, 담배와 위스키였습니다. 2-3일 동안 하면 거의 한 달 동안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성격상 저는 부랑자입니다. 돈 때문에 일을 하고 싶을 만큼 돈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너무도 할 일이 많다는 것이 수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매일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은 매일 여덟 시간 동안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여덟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일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455쪽

-비평가의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포크너: 예술가들은 비평가들이 하는 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서평을 읽겠지만 진정으로 글을 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서평을 읽을 시간이 없어요. 비평가의 기능은 예술가를 향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비평가 위의 계층입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는 예술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감복시킬 무엇인가를 쓰는 반면에, 예술가는 비평가들을 감탄시킬 무엇인가를 쓰기 때문입니다. - 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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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이현우의 <애도와 우울증: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은 소개하기 힘든 책이다. 보통 내가 글을 싣는 지면은 학술지도 아니고 대학원의 학보도 아니다. 그런데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라니! 두 사람이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임은 분명하지만, 김소월과 이상도 아니고 김수영과 김춘수도 아니다. 이 글의 끝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DJ DOC의 전 멤버 한 명이 예전의 멤버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촌극과 그 추이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불특정다수를 위한 '읽을거리'로 변용하는 데 더 오래 애를 먹었을 것이다.- 107쪽

지은이는 이 책의 1장 첫머리를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라는 글을 시작하면서, 특히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예술가의 상실 체험이 가장 큰 창작 동기가 된다고 말하다. 이때 그들의 예술 행위나 창작품은 상실에 대한 위안이거나 보상물이며, 예술가들은 그들의 유년 시절 체험이나 기질에 따라 각기 '애도형 유형'과 '우울증형 유형'으로 나뉜다. 지은이에 따르면 푸슈킨이 전자고, 레르몬토프는 후자다. - 107쪽

애도란 상실을 겪은 주체가 상실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전이시킨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애도란 옛 애인을 새 애인으로 대체시킨 경우로, 새 애인이 옛 애인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옛 애인의 형상을 차츰 철회한 끝에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경우다. 반면 우울증은 옛 애인을 끝내 잊지 못하고 헤어진 옛 애인을 나와의 동일시 속에서 보존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미운 사람은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버림받은, 못난 '나'이다. 대상과의 분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르시시즘과 자아 분열(혹은 자아 고문)에 빠진 우울증적 주체는 다른 대상으로 전이가 불가능하다.- 108쪽

이 책은 낭만주의를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두 정념적 범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푸슈킨에게 있어 근원적 상실의 대용품이었던 정치적 낭만주의의 좌절이 미학적 자율성으로 치달아가는 전환점을 포착하고 있다. - 108쪽

사족이다. 자신이 DJ DOC에서 퇴출당한 이유가 '박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옛 멤버를 고소한 전직 가수는,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장사(葬事)지내지 못했다. 저 사안의 명예훼손 여부를 떠나, 17년이 지나도록 박치라는 말을 스스로 웃어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 애도에 실패한 것이다. 고소장을 들고 경찰서 앞에서 인터뷰를 했던 그는, DJ DOC에서 퇴출당한 이래로 17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못했고 노래방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패한 애도는 우울증이 된다. -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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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독인 讀書讀人 - 독서는 인간을 어떻게 단련시키는가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1월
절판


최근 독서 기피 현상이 인터넷이나 소비문화 때문이라고들 하나, 그전부터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가령 흔히들 책과 함께 산다고 하는 나 같은 교수도 그렇다. 물론 교수의 연구실이나 집에는 책이 많으나, 그 대부분은 기증 받은 전공 분야의 교과서나 잡지다. 요컨대 직업적인 이유 외에 교수들은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 그런 교수에게 배우는 대학생 중에는 교과서조차 사지 않고 취직에 필요한 문제집 정도만 사는 경우가 많다. 초중고 학생들에게는 교과서 구입이 강요되므로 교과서라도 사고, 수험을 위해 참고서까지 사지만, 아마 대학처럼 자유롭게 한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조차 사지 않을지 모른다. 여하튼 초중고 학생들은 교과서 이외의 책은 읽지 못하거나 읽을 수가 없다. - 339-340쪽

그리고 대학에 들어오면 책읽기와 철저히 무관한 군대를 거쳐 오직 취직 공부에 몰두하기 때문에 취직을 위한 문제집 외에 역시 다른 책을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는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문이나 잡지를 포함하여 가구당 책값에 투자하는 비용이 한 달 1만원 정도로, 그런 교과서나 취직준비서나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가벼운 실용서 이외의 책을 살 수 없다. 그러니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340쪽

대학은 물론 초중고 시절에 고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책을 읽고 생각하며 토론하는 교육으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 국민이 책을 읽지 않는 습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책 읽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다양성과 민주성에 관련되는 문제다. 사고의 다양성과 민주성이 없는 곳에 독서 혐오의 문제는 끝없이 악순환한다. 사고의 다양성과 민주성을 부정하는 일부 언론도 교과서와 같은 절대적 권위의 괴물로 국민의 판단력을 획일적으로 몰아가는 원흉일지 모른다. 참된 교육을 받을 인권의 내용으로 국정 교과서 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책읽기를 하자는 주장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 341쪽

무책임하게 게바라 같은 혁명가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와 같은 독서가는 되라고 말하고 싶다. 나쁜 세상은 독서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진정한 혁명가는 진정한 독서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히틀러나 스탈린, 폴 포트나 박정희가 아닌, 톨스토이나 마르크스나 간디나 게바라나 모두 그렇다. 물론 그 반대는 아니다. 즉, 독서가가 혁명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독서가는 혁명가다. 적어도 진정한 독서가는 혁명적이다. 독서는 바르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그 변화 앞에 비판이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 비판 앞에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고능력이 있다. - 343-344쪽

독서는 생각하기 위한 것이다. 독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라면 독서가 필요하다. 그처럼 참된 독서를 하면 혁명가가 된다. 제대로 된 책들은 현실을 혁명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도 책을 읽다보면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알기 마련이고 책은 잘못을 고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게바라가 혁명과 독서를 함께한 것도 독서를 통해 혁명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였지 무슨 멋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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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정동호 지음 / 책세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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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이 진정한 해방이 되고 인간이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죽은 신이 남긴 그림자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허무주의를 극복할 것이다. 길은 옛 신에 근원을 둔 낡은 가치를 파기하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존재 의미를 회복하는 데 있다. 니체는 이 작업을 가치의 전도라고 불렀다. 이때의 새로운 가치는 본연의 가치, 즉 도덕 이전의 자연적 가치를 가리킨다. 앞으로는 이 대지, 이 자연이 모든 가치의 모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의 초월적 이념과 신앙, 그리고 도덕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니체는 루소의 말을 빌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게 되었다. - 18쪽

자연은 다양한 형태의 힘이 지배하는 힘의 세계다. 자연을 움직이는 것은 신도 신적 섭리도 아니다. 자연은 도덕적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자연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보다 많은 힘을 확보해 자기를 전개하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어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끝없이 분투한다. 힘에서 밀리는 순간 도태되기 때문이다. 힘에 대한 이 같은 지향이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이 힘에의 의지를 인간의 삶과 역사를 포함해 세계 내의 모든 운동을 추동하는 것은 물론 우주 운행을 주도하는 원리로까지 받아들였다. - 18쪽

힘에의 의지와 함께 니체의 우주 이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당시 자연과학에서 유력한 우주 모델로 수용되고 있던 것은 우주가 총량이 일정한 힘(에너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즉 공간은 유한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힘은 운동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힘의 운동에 끝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운동에서 산출되는 시간은 무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니체는 공간이 유한하고 시간이 무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끝없는 이합집산에 의한 순환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우주 운행의 원리로 제시하게 된 영원회귀 교설의 내용이다. - 18-19쪽

영원한 회귀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단순한 반복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단순 반복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여기서 인간은 극단의 권태와 공허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인간을 엄습하는 것이 허무주의, 또 다른 허무주의다. 이 허무주의는 우주적인 것으로서, 파괴력에서 신의 죽음 뒤에 오는 허무주의를 능가한다. 가치 전도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던 앞의 허무주의와 달리 여기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허무주의에 의해 파멸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가. 파멸로 끝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치유는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허무주의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니체는 영원한 회귀가 우리의 운명이라면 운명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거기에 세계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최고 긍정이 있다. 운명에 대한 사랑, 이것이 니체가 요구하는 '운명애'다. 이 경지에서 허무주의는 극복된다. - 19쪽

문제는 초월적 이념과 이상 속에서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진 오늘의 인간에게 신의 죽음을 받아들여 가치를 전도시키고 허무주의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니체는 그럴 힘이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지닌, 정직하며 강건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거듭난 인간이 바로 위버멘쉬다. 우리가 성취할 최고 유형의 인간이다. -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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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 - 호르헤 베르고글리오와의 대화
교황 프란치스코 외 지음, 이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절판


대담자: 사제 생활을 하시는 동안 많은 실업자들을 만나보셨을 겁니다. 어떤 경험이 있으십니까?

교황: 네 많이 만나봤지요.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가족들과 친구들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일하기를 원하고 자신이 땀 흘려 벌어먹고 살기를 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일이란 사람에게 존엄성을 갖게 해줍니다. 존엄성이란 남이 주는 것이 아니고, 세습되는 것도 아니며, 가정교육 또는 정규교육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존엄성이란 일을 통해서만 확보됩니다. 내가 스스로 벌어먹고, 내가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문제가 안 됩니다. 물론 많이 벌면 더 좋죠. 막대한 부를 소유할 수도 있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면 존엄성은 떨어지게 됩니다.- 53쪽

대담자: 그렇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교황: 실업자들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이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낍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관련 부처를 통해 기부의 문화가 아닌 노동의 문화를 장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2001년 아르헨티나가 겪은 것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는 비상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조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일자리 창출을 장려해나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앞으로도 계속 말씀드리겠지만 노동이야말로 존엄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입니다. - 55-56쪽

대담자: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노동이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 경우 여가라는 의미를 회복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교황: 그 순수한 뜻을 회복해야겠지요. 여가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빈둥거리며 무위도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포상으로서의 위상이지요. 노동 문화와 함께 포상으로서의 여가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하는 사람이 잠시 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즐기고, 독서하고,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개념이 일요 휴일제가 폐지되면서 퇴색하고 있습니다. 소비사회의 경쟁구도가 점점 더 심화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도 일을 하게 되었지요. 이런 경우 우리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노동이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상황 말입니다. 일이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건강한 여가와 연결되지 않으면 사실상 인간은 일의 노예가 됩니다. 이 경우는 더 이상 스스로의 존엄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 밀려 일하는 것이지요. 내가 왜 일을 하는지 그 목적이 왜곡되어버리는 겁니다. - 57-58쪽

대담자: 그렇지만 균형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반면 '진로를 벗어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교황: 맞는 말입니다. 교회는 항상 사회를 해결하는 비결이 노동이라고 지적해왔습니다. 일하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오늘날 많은 경우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최근 몇 십 년간 노동의 비인간화를 고발해왔습니다. 우리는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심각한 경쟁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이익을 내는 것이나 자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이 존재하는 겁니다.-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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