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독일문학기행도 마지막 일정만을 남겨놓고 있다. 어젯밤에 함부르크에 도착했고 오늘 날이 밝으면 토마스 만의 고향이자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의 배경인 뤼벡을 다녀오는 게 마지막 일정이다. 내일은 오전에 함부르크미술관을 방문하고 오후 항공편으로 귀로에 오르게 된다.

괴테와 실러의 바이마르에서 북부 함부르크까지는 꽤 먼 거리로 어제 오후 6시간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두 차례 휴게소에서 정차한 것까지 포함해서다). 해가 떨어진 다음에 도착했기에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음에도 함부르크에 대해서는 일부 야경만 본 상태다.

바이마르에 함부르크로 향하면서 어제 오전에 들른 곳은 튀링엔 주의 대학도시 예나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인구 13만이 채 되지 않으며 이 가운데 2만 가량이 대학생인 도시다. 대학 캠퍼스가 따로 있는 건 아니어서 현대식 증축건물이 덧붙여진 대학도서관 건물옆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려 수분 걸어가자 여기저기 대학 건물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일행이 내부까지 들어가본 곳은 대학본관이자 인문학 강의동. 특별해보이지 않은 로비에 라이프니츠, 헤겔, 마르크스와 예나대학의 인연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에나대학은 1934년에 프리드리히 실러 예나대학으로 개명되었지만 통상 예나대학으로 불린다. 실러가 괴테의 추천으로 사강사로 강의한 인연을 고려한 개명이지만 예나대학이 실러보다 우선하여 떠올려주는 인물은 헤겔이다. 거기에 마르크스도 얹을 수 있는데 두 사람이 각각 박사학위를 받은 곳이 예나이므로 우리식으로는 대학동문이다.

1770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난 헤겔은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01년부터 1806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주저인 <정신현상학>을 집필해 1807년에 출간한다. 철학사가 ‘헤겔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개막이다. 특히 1806년에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예나로 진주하였고 이때 나폴레옹을 가리켜 헤겔이 했다는 혼잣말을 철학사는 기록한다.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 헤겔의 철학은 그 세계정신의 철학이다.

1818년 라인란트팔츠 주의 소도시 트리어 출생의 마르크스는 베를린대학에서 법학과에 다니다가 프로이센의 반동적인 분위기가 다소 덜한 예나대학으로 옮겨서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학위를 받은 뒤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신문이 강제폐간 당하자 프랑스로 거처를 옮기며 1883년 영국 런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추방자이자 망명가의 삶을 산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대학건물 로비에서 독일철학의 의의와 독일정신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강의하는 것으로 우리는 예나에서의 공식일정을 마쳤다. 뮌헨에 도착한 이후 바이마르까지 독일의 가을답지 않은 화창한 날씨였다면 예나부터는 다소 쌀쌀했고 오늘은 드디어 비 소식도 있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을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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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신문화의 중심지로 일컬어지는 바이마르가 어제의 방문지였다. 과거형으로 썼지만 이 글을 적고 있는 곳이 아직 바이마르의 호텔이다. 튀링엔 주(주도는 에어푸르트)의 중심도시 바이마르는 여느 독일 도시들처럼 규모가 크지 않다. 인구가 6만 8천 가량으로 7만이 되지 않으며 그제 방문한 베츨라보다 조금 큰 정도다(헤세의 고향 칼브의 세 배 정도군).

어제 아침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하여 바이마르에 도착한 때는 점심 무렵. 버스에서 하차하여 도심 쪽으로 걸어들어가 헤르더 광장의 한 식당에서 역시 맥주와 함께 점심을 먹고(현지식으로 식사를 할 때는 매 끼니 맥주를 곁들이고 있다. 독일이니까) 목적지로 향했다. 바이마르의 핵심 방문지는 국립극장에 세워져 있는 유명한 동상의 두 주인공 괴테와 실러의 집을 각각 방문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고전주의 시대를 만든 두 거장의 우정과 협력은 1794년에서 1805년까지 10여 년에 걸친다. <빌헬름 텔>(1804)의 완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실러가 이듬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괴테는 크게 슬퍼하며 자신의 반쪽을 잃었다고 적었다. 그만큼 실러가 괴테에게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미완성 상태에 있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파우스트> 등의 작품을 완성하도록 독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친구이자 조력자가 바로 실러였다. 물론 일찌감치 실러의 재능과 역량을 인정하여 바이마르로 초대한 사람이 괴테이고.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1832년 생을 마치므로 괴테는 프랑크푸르트 사람으로 태어나서 바이마르 사람으로 죽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괴테하우스는 괴테가 1782년에 얻은 집으로 궁전은 물론 아니지만 비교적 큰 저택이다. 괴테가 사용한 물건과 수집한 예술품, 광물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고 괴테가 가꾼 정원의 모습도 가늠해볼 수 있다. 오디오 해설을 이용할 수 있어서인지 따로 안내문들이 붙어 있지는 않았다. 다행히 기념품숍에서 영어판 안내서를 구할 수가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찬찬히 읽어볼 참이다.

비르템베르크 주 출신의 실러는 <도적떼>(1781)의 공연 성공 이후 극작가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영주 카를 오이겐의 반대에 부딛치자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1789년에 예나대학의 비정규 교수가 되지만 수강생이 적어 강의가 폐강되고는 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그럼에도 1799년 이후 <발렌슈타인> 3부작을 필두로 하여 <마리아 스튜아르트>(<메리 스튜어트>)<오를레앙의 처녀><메시나의 신부> 등 일련의 대표작을 써내며 이 여정의 대미가 <빌헬름 텔>이다. 바이마르의 실러하우스는 그가 1802년에 예나에 이주하여 생을 마친 곳이다.

괴테하우스와는 달리 실러하우스는 리모델링된 외관을 갖고 있었고 내부도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실러의 생애와 대표작을 차례대로 따라가보게끔 구성돼 있었고 임종한 실러의 모습을 담은 스케치가 마지막 방에 걸려 있었다. 실러하우스에서의 짧은 강의는 주로 괴테와 실러의 협업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와 <빌헬름 텔>의 주제 등에 할애했다. 실러하우스를 나오면서는 방문기념으로 로로로시리즈의 문고본 전기 <실러>를 구입했다(괴테하우스에서는 <괴테>를 구입했으니 공평하게).

괴테하우스와 실러하우스를 차례로 방문한 일행은 바이마르극장 앞 광장에 세워진 괴테와 실러의 동상을 찾아 단체사진을 찍고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다. 그러고는바이마르의 마지막 일정으로 괴테가 관장으로도 일했던 도서관으로 향했다. 유서 깊은 이 도서관의 정식이름은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이다. 바이마르의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의 기미상이 서 있는 민주광장 왼편 건물이었는데 입장 시간이 지나서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했다(안내 책자만 구입했다). 안나 아말리아와 아우구스트는 모자지간이다. 바이마르 공국을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모자다.

도서관에서 호텔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가 막간에 푸슈킨의 흉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놀랐다.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 동상이 왜 바이마르에 있는지는 검색해봐야 알겠지만 짐작에는 독일과 러시아가 동상을 서로 교환한 게 아닌가 싶다. 괴테의 동상이 러시아 어딘가에 세워지는 조건으로 말이다(괴테는 생년이 푸슈킨보다 정확히 50년 앞선다). 이런저런 서프라이즈도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해야겠다...

PS. 찾아보니 바이마르의 푸슈킨 동상은 1949년 푸슈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흉상의 외모는 실제와 좀 다른데 ‘독일화된 푸슈킨‘을 보여준다는 평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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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0-2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하나의 서프라이즈~
푸슈킨은 서울에도 있고 독일에도 있고
열일중.ㅎ

로쟈 2018-10-26 23:37   좋아요 0 | URL
네, 서프라이즈였어요.^^
 

어제의 일정은 온전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무대인 베츨라 방문에 할애되었다. 베츨라는 프랑크푸르트로부터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독일 기준으로는 작지만은 않은 도시다) 현재 인구는 5만 6천명 가량이라고 한다. 도시로서는 작지만 마을로서는 크다고 할까. 괴테 시대에는 제국법원이 위치하고 있었고(지금도 건물이 보존돼 있다) 괴테는 1772년 5월에 법률가로서의 실습(일종의 인턴)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당시에는 인구가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괴테와 로테(샤를로테 부프)와의 만남은 작품속에 잘 묘사돼 있다. 지인인 케스트너(소설에서는 알베르트)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낙심하면서 물러나게 되는데 괴테에게 어차피 가망성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같은 해 9월 10일에 괴테는 케스트너와 로테에게 각각 한 통씩의 편지를 남기고 베츨라를 떠난다. 이별의 편지를 읽으며 로테는 울었다고 전해지는데 케스트너와의 결혼 이후에 자식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는 뒷이야기를 알고 보면 오히려 다행한 결말이었다고도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실연의 경험에서 <베르테르>가 탄생한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베츨라를 떠난 괴테는 프랑크푸르트로 바로 귀향하지 않고 지인을 만나러 라인 강변의 코블렌츠에 들르는데 거기서 여성작가 소피 폰 라 로쉬의 딸 막시밀리아네를 만나 또 다른 사랑에 빠진다. 괴테 자신이 <시와 진실>에서 로테의 모델이 여러 여성이라고 토로한 바 있는데, 최소한 샤를로테 부프와 함께 막심밀리아네 폰 라 로쉬는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작품 속 로테의 검은 눈동자는 막시밀리아네의 눈동자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가 하면 베르테르의 모델 역시 괴테 자신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시 <시와 진실>에서 고백한 바에 따르면 베츨라의 동료였던 예루살렘의 자살이 결정적이었다(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으로 유명한 베르테르의 옷차림은 예루살렘이 즐겨 입었던 차림이다). 상관의 아내를 연모했던 예루살렘은 1772년 10월 30일 케스트너에게 빌린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괴테의 부탁으로 케스트너는 매우 상세한 보고서를 괴테에게 건네준다. 11월에 괴테는 베츨라를 다시 찾아 이 사건의 현장답사까지 했다. 그렇지만 괴테가 소설을 집필하는 것은 1774년 2월부터 3월까지의 4주간이었다. 집필 착수가 늦어진 건은 막시밀리아네와 관계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유복한 상인 브렌타노와 결혼한 뒤 신혼생활을 하던 프랑크푸르트를 완전히 떠난 뒤에야 괴테는 <베르테르>를 쓰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베르테르>에서 주인공 베르테르와 로테의 모델은 적어도 두 명씩을 지목할 수 있다. 베츨라에서 ‘베르테르 투어‘로 방문하게 되는 곳이 로테하우스와 예루살렘하우스인 것은 그런 면에서 타당하지만 사실 뭔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로테가 로테의 모델이고 예루살렘이 베르테르의 모델이지만 정작 로테와 예루살렘,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은가! 로테가 이별을 아쉬워 한 남자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상심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여자는 로테가 아니다. 그런 로테와 예루살렘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작품이 <베르테르>이고 그 주선자가 괴테다.

괴테와 예루살렘은 라이프치히대학의 동문이었지만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심지어 예루살렘은 괴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물평을 남겨놓고 있다. 베르테르에게 괴테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다면, 베르테르-괴테와 베르테르-예루살렘은 과연 매끈하게 통합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고 가믄 듯하지만 같지 않은 둘 사이에는 어떤 거리감이 있다. 그것이 괴테와 베르테르 사이의 거리다. 그렇기에 베르테르는 자살하지만 괴테는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고는 하나 자살하지 않는다. <베르테르>에서 독자의 전범은 베르테르인가, 괴테인가?

작품은 더 많은 분석과 해명거리를 갖고 있지만 짧은 방문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하여간에 로테하우스를 방문했고(1774년 판본의 <베르테르>를 기념으로 구입했다) 예루살렘하우스도 찾아가(오후 2-5시가 개방시간이어서 점심을 먹고 자유시간을 가진 후에 방문했다)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도 서 보았다. 베르테르(예루살렘)의 책상에는 군총과 함께 레싱의 희곡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 놓여져 있었다. 베츨라에서 보고자 했던 것들이다.

베츨라는 아직 중국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미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주말이어서 광장에는 맥주와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북적거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전시간에 로테하우스를 찾은 관람객은 우리 일행뿐이었고 오후에 예루살렘하우스를 찾았을 때는 우리의 뒤를 이어서 독일 관람객이 한 팀 대기하고 있었다. 헤세의 고향 칼브도 그랬지만 관광객이 넘쳐나는 여느 관광도시들과는 달라서 한가하고 편안했다. 베츨라를 떠나면서 이제 독일문학기행도 반고비를 넘어섰다. 이제 우리는 아침을 먹은 뒤에 괴테가 그랬듯이 프랑크푸르트에서(정확하게는 인근의 애쉬본에서) 바이마르로 이동한다. 3시간 반의 소요시간 동안 괴테의 시간은 1775년에서 1776년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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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10-2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스트너가 그 에밀과 탐정들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일까요?@@

로쟈 2018-10-21 13:18   좋아요 0 | URL
수많은 케스트너가 있는 것이죠.~
 

아침을 먹고서(한국은 주말 오후지만 독일은 아침시간이다) 이어서 여행기를 적는다. 어제 일정이 예정보다 늦게 끝나서 오늘은 30분 늦게 시작하게 되었고 덕분에 한 시간의 자유시간이 남았다. 일행이 산책을 나가거나 휴식을 취하는 틈에 바쁘게 어제의 행적을 적으려 한다. 아, 괴테하우스를 방문했다고 했지.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도시들 가운데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 한다. 패전 이후 미군의 관할하에 놓여 있어서 그렇다는데 독일 도시로서는 희소하게도 도심에 빌딩숲을 갖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상업과 교통의 요지이고 유럽 금융의 허브다.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75만의 도시다. 한강에 비하면 아담한 마인강을 끼고 있어서 정식 이름은 프랑프푸르트암마인이다. 그리고 괴테는 바로 이 프랑크푸르트에서 1749년에 태어났다.

괴테하우스는 괴테의 생가인데, 전기를 보니 1755년에 개축된 건물이고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내관이 비교적 잘 보존된 건물이다. 버스에서 내려 대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걸어들어가자 이내 친숙한 건물과 맞닥뜨릴 수 있었는데 사진으로 자주 본 탓인지 말 그대로 구면이었다. 대략 괴테 집안이 얼마나 부유했던가 말해주는 여러 방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괴테는 이 집에서 1775년까지 살았고 1775년 바이마르에 초빙된 이후 이듬해부터는 1832년 생을 마칠 때까지 바이마르를 정주지로 삼는다.

괴테하우스 방문을 계기로 새삼 알게 된 것은(자프란스키의 평전을 읽었다)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 괴테 역시도 법학을 전공하고 베츨라에서 실습을 거친 후 법학박사가 되었고 공직에서의 경력을 시작하기 전에 일년간 이탈리아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탈리아 여행기>까지 썼고 아들에게 읽어주고는 했다. 괴테하우스에는 그 흔적으로 이탈리아에 관한 그림과 스케치가 걸려 있었는데 그 영향이 없을 리 없다. 1786년 아들 괴테의 돌발적인 이탈리아 여행은 부전자전의 내력을 갖고 있었던 셈(내년 봄에는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의 여정을 일부 따라가볼 참이다).

아홉 명의 가정교사로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은 괴테는(아버지 요한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1765년 16살에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법학 공부를 위해서였는데 건강을 잃는 바람에 1768년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한다(결핵이나 위궤양이었을 것으로 추정). 1770년 다시 건강을 회복하자 이번에는 슈트라스부르크(현재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서 변호사 자격을 얻는다.

그러고는 1772년 봄 법률 실습을 위해 제국고등법원이 있는 베츨라로 떠난다.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라는 여성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미 약혼자가 있던 이 여성과 실연을 경험하고서 쓴 작품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게 <베르테르>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상식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데...(복잡한 사정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적기로 하고 오늘의 일정이 바로 베츨라를 방문하여 베르테르와 로테의 사랑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혹은 하룻동안 베르테르-괴테가 되어보는 것이다.)

괴테하우스에서 빠져나와서 찾은 곳은 프랑크푸르트의 시청과 광장,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는 대성당 등이다. 슈테델 미술관을 찾은 것은 요한 티쉬바인이 그린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로마 캄파냐의 괴테‘)를 보기 위해서였다(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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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브에서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왔다는 대목까지 적었는데 이후에 저녁을 먹기 전까지 슈투트가르트의 궁전과 광장을 둘러보았다. 슈투트가르트 도심에는 신궁전과 구궁전, 두 개의 궁전이 있고, 더불어 두 개의 광장이 있는데 구궁전 뒤편에 있는 광장이 실러광장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실러는 1759년생으로 괴테와는 10년 터울이다. 하지만 오랜 투병생활을 거쳐 1805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알려진 대로 독일문학의 고전주의(바이마르 고전주의)는 괴테와 실러가 만나서 우정을 나누고 협력했던 1794-1805년까지를 가리킨다(혹은 길게 잡으면 괴테가 이탈리아여행을 떠난 1786년부터 1805년까지로 보기도 한다). 바이마르에 가서 확인해볼 참이지만 실러가 갖는 위상과 의의를 알 수 있다.

긴밀한 우정과 흥미로운 협업 관계를 보여주지만 괴테와 실러는 출신배경이 상이하다. 괴테가 황제 직할의 자유시 프랑크푸르트의 상류 시민가문 출신인 반면에 실러는 뷔르템베르크 주의 마르바흐 출생으로 아버지는 하급 군의관이었다(뷔르템베르크는 바덴과 통합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가 된다. 슈투트가르트가 뷔르템베르크 주의 수도였다). 원래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영주 카를 오이겐의 명령에 따라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의관이 된다. 하지만 창작에 대한 뜻을 꺾지 않는다.

데뷔작 <도적떼>(1782년 초연)로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지만 오이겐 공은 그의 직무를 군의관에 한정하고 저술활동을 금지시킨다. 이에 실러는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소위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문학의 주제가 독일의 봉건적 질서에 대한 저항인 것은 자연스럽다. 괴테가 바이마르의 젊은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빙으로 바이마르에서 공직에 몸담게 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이를테면 권력과 문학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데 있어서 좋은 사례다.

실러의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서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떠올랐다(동상 자체도 1880년 모스크바에 세워진 푸슈킨 동상을 연상하게 한다). 실러의 <도적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도 영향을 미친 작품이어서 실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는 흥미로운 비교문학의 주제인데, ‘실러와 푸슈킨‘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학계의 동향에 대해서 둔감해진 탓도 있겠지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푸슈킨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서라면 나도 몇 마디 할 수 있는데 실러와 푸슈킨에 관해서는 백지다. 전제적 권력과의 불화와 그 비판이라는 주제에서라면 푸슈킨과 더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는 작가가 실러로 보이는데 푸슈킨이 그의 작품을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문학기행이 떠안겨주는 숙제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어제는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세 시간 거리. 도중에 타우누스 공원의 단풍을 구경하고 산정에 올라가 기분을 내기도 했다(나는 커피를 마셨지만 일행은 맥주를 마셨다). ‘서울‘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해외 한국식당에서 먹어본 식사 가운데 가장 좋았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여유롭게 프랑크푸르트에 입성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물론 괴테의 생가이자 기념관인 괴테하우스였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적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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