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칼럼은 중의 하나는 '아고라포비아'. 마침 엊그제인가 아고라를 주제로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 '최전선의 민주주의'를 읽은 터여서 같이 묶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세히 다룰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니(언제부턴가 서재에 글쓰기가 '차포 떼고 장기두기'처럼 돼버렸다. 시간이 부족하고 책이 옆에 없다. 일에 쪼들리는 탓이고 책은 여기저기 분산돼 있는 탓이다. 거기에 체력도 부실하니 기껏해야 '빅장'이나 부르는 것이 현재로선 나의 최선이다. 이러다 판이 끝날까 염려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모' 수준의 정리다. 먼저 칼럼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2 .12) [여적]아고라포비아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이란 독특한 문답법으로 폴리스 사람들과 토론을 벌여 진리 터득을 도왔다. 그 장소가 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이었다. 아테네 아고라의 경우 가로 700m, 세로 550m로 꽤 너른 공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민회, 재판, 사교, 상업 등 사회활동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린 곳도 아고라였다. 아고라는 여론형성과 의사소통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 나아가 소통 자체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아고라포비아(광장공포증)는 낯선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 등 공공장소에 혼자 있게 되면 심한 공포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증상이다. ‘포비아’에는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비행공포증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광장공포증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이유로 다중이 모인 상황에 노출되기를 두려워한다. 가령 지각을 자주 하는 신입 회사원이 모두 일에 열중한 사무실에 들어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때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것이다. 이게 심해지면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인터넷 토론방 ‘아고라’가 포털 다음의 초기화면에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 소식에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아고라포비아가 떠오른 건 공연한 연상작용 탓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고라는 지난해 광우병 촛불 정국에서 문자 그대로 인터넷 소통을 위한 광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족벌신문들에 대한 광고불매 운동에 공간을 제공했다. 이런 것들이 정권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게다가 현재 사이버모욕죄 입법 추진이 강행되고 있다. 미네르바 사건의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쯤되면 촛불 이후 경찰 조사로 이미 기가 꺾인 아고라가 ‘후퇴’를 결정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이 정권이 기존 법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모욕죄 신설에 매달리는 모습에는 아고라포비아의 증세가 역력하다. 그렇다면 이 증세를 치료할 방법은 없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언론 장악을 획책하는 정권에 제대로 된 아고라, 소통의 공간 조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병세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부터 일이 꼬였으니 아고라포비아의 치료는 애시당초 무망한 것이다.(김철웅 논설위원) 

09. 02. 12.  

P.S. 바우만의 글은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평사리, 2005)에 수록돼 있다. 책은 세계화 이후의 전망에 관한 저명한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의 글모음인데, 독어본을 옮긴 것이고 바우만의 글 또한 독어로 씌어진 것이어서 아쉽게도 원문과 대조해보진 못한다(따로 영어로도 발표했을 듯싶지만 출처를 알 길이 없다). 말미에 실린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담을 두어 달 전에 읽은 바로는 썩 좋은 번역은 아닌데 말이다('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였던 부르디외를 '프랑스 단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라고 소개한 대목은 역자의 상식을 의심하게 한다).    

 

참고로, 그라스와 부르디외의 대담 '자본주의를 길들이자!'는 1999년 12얼 5일에 독일 브레멘 라디오방송국에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대담의 독어판 요약은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에 실렸으며 영어판은 '더 네이션'(2000. 07. 03)지에 '아래로부터의 문학(A Literature From Below)'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2002년 3-4월호)지에는 '진보적인 복고(The 'Progressive' Restoration)'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두 판본이 서로 약간 다르며 국역본은 뉴레프트 리뷰 판본과 일치한다(영어, 불어, 독어본은 http://www.homme-moderne.org/societe/socio/bourdieu/entrevue/gras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럼 바우만의 글로 넘어가서, 그가 말하는 아고라란 무엇인가? 우선 바우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개념, 오이코스(oikos)와 에클레시아(ecclesia)를 소개한다. 각각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오는 말인데, 전자는 "온화하지만 때로는 드센 사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 즉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주 드물게 찾아가지만 우리의 모든 삶과 관계된 공공의 사안들이 규제되는 먼 곳에 놓인 영역"이다(번역이 좀 감질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하며 오이코스는 사적인 영역이고, 에클레시아는 공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세번째 영역이 바로 아고라다. "아고라는 완전히 사적인 것도 아니고 완적인 공적인 것도 아닌 공간이며, 동시에 일정한 정도로 양자의 일부를 포괄하고 있는 영역이다."(41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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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강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요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좀 특이한 점이라면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아우라, 2008)을 같이 읽었다는 것(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69587 참조). 책의 부제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라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 입문서이자 <시학>에 대한 대중적인 입문서로도 활용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취지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 책은 학술적인 연구서가 아니다. 이 책은 시나리오를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학> 입문서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개념을 분석하여 극적인 이야기 구조에 관한 그의 테크닉이 현대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17쪽)   

이 점이 국내에 이미 소개돼 있는 몇 권의 시나리오 작법 책들과의 변별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 왕> 분석에서 발견해내고 있는 이야기구조를 오늘날의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착안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왕>과 같은 연극을 면밀하게 살펴 극적인 스토리텔링에 관한 불변의 진리를 밝혀냈다. 나는 <록키>나 <아메리칸 뷰티>와 같은 좋은 영화들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힌 이야기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8쪽)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거든 먼저 <시학>을 면밀하게 읽어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시학>의 핵심으로 그가 지적하는 것은 '플롯'이고 플롯을 끌고 가는 '액션 아이디어'다. 무릇 "훌륭한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 일하고, 시원찮은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일한다"는 지적에서도 강조되는 것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행동(액션)이며, 이 행동이야말로 이야기의 '아이디어'다. 그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의 작업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잘 구축된 이야기는 하나의 '액션 아이디어'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의 단순한 '액션 아이디어'를 갖지고, 그 아이디어의 고유한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한 편의 온전한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것이다."(27쪽)   

이어지는 내용 자체는 평이하기 때문에(이 책 자체가 드라마틱한 구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책은 영화에 좀 안면이 있는 독자라면 두어 시간 이내로 독파할 수 있다. 해서 따로 요지를 간추릴 필요는 느끼지 않는데, 그럼에도 페이퍼를 올려두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모방론에 대해 한 가지 주석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다. 모방의 대상에 관한 주석이다.   

이번에 <시학>을 다시 읽으면서 교재로 사용한 것은 영문학자 이상섭 교수의 번역본 <시학>(문학과지성사, 2005)이다. 문고본으로 나온 이상섭본은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고, 한편으론 천병희 교수의 원전 번역 <시학>(문예출판사, 1999)은 수년 전 강의 때 한번 교재로 사용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자는 계산이었다.    

 

참고로, 국내에서 제일 처음 나온 <시학> 번역본은 손명현 교수의 박영사판(1960)이다. 최근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동서문화사, 2007)으로 다시 나왔기 때문에 아직도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다. 천병희 교수의 번역은 문예출판사판이 1972년에 처음 나온 듯싶고, 이후에 몇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옮긴이 서문에 별다른 언급이 없어서 번역상에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선집에 들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시학>에서도 <시학> 부분은 천교수의 번역이다. 그리고 국문학자인 김재홍 교수 번역의 <시학>(고려대출판부, 1998)도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이다.  

 

보다 전문적인 교양이 필요한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전공자인 이경식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고전주의>(서울대출판부, 1997) 같은 연구서나  레온 골든의 주석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예림기획, 2002), 그리고 이상섭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연구>(문학과지성사, 2002)를 참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연구/주석서들은 원문 번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다수의 영역본을 참고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몇 종은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내가 예전에 읽은 건 제임스 허튼(J. Hutton)의 노튼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1982)이었다. 얇고 저렴한 책이다.  

다시 모방의 문제로 돌아가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1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예술을 '모방'(미메시스)의 양식으로 규정한다. 그 유명한 정의는 이렇다(따로 언급이 없으면 인용문의 쪽수는 이상섭본의 것이다).  

"서시사와 비국과 희극과 디튀람보스, 그리고 대부분의 피리나 현금을 위한 음악은 하나로 뭉뚱그려볼 때 모두 모방의 여러 형태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방의 수단, 대상, 방식 등 세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15쪽)   

여기서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를 '모방'으로 옮기는 것이 딱 적절하지는 않다는 지적을 역자는 주석에 달아놓고 있다(올해 출간될 새 원전 번역은 짐작에 다른 번역어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음악 또한 모방의 한 형태로 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은 '재현'뿐만 아니라 '표현'의 의미도 갖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여하튼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통칭하여) 예술은 모방의 양식이며, 이 예술은 모방의 수단(무엇을 가지고 모방하느냐), 대상(무엇을 모방하느냐), 방식(어떻게 모방하느냐)에 따라 세분될 수 있다. 모방의 수단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장의 나머지 절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2장에서는 모방의 대상을 다룬다. 앞에서 '한 가지 주석'이 필요하다고 말한 대목이다.   

"모방 기술자(시인)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방하는데, 사람은 고상하거나 또는 저열하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사람의 성품 차이는 잘나든가 못난 정도에 따라 달라져서 그 두 부류로 나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보통보다 더 좋게 또는 더 나쁘게 또는 보통과 같게 모방하게 된다.(...) 희극은 사람들을 보통보다 못나게, 비극은 더 잘나게 나타낸다."(18-19쪽)  

이 대목은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서 읽을 때 그 차이를 확연하게 식별할 수 있다. 내가 나란히 펴놓고 있는 천병희본과 손명현본에서는 '잘난 사람'을 '선인', 그리고 '못난 사람'을 '악인'이라고 옮기고 있다. 두 번역본이 대동소이하므로 천병희본만 우선 옮기면 이렇다.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문예출판사, 2002, 31-33쪽)    

여기서 '선인'과 '악인'이란 번역은 좀 어색하다. 이건 다른 번역을 참조할 필요도 없이 천교수의 번역 내에서도 지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인과 악인을 판별하는 근거로 인간의 성격은 '덕'과 '부덕'에 의해 나누어진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각주에서 천교수는 덕과 부덕의 원어가 아레테(arete)와 카키아(kakia)이며 이것은 "원래 사물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어떤 도덕적인 가치 기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아레테와 카이아는 '잘하고 못함', '잘나고 못남'을 가리키는 범주이지 도덕적인 선악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는다(알다시피 이 그리스의 '잘남/못남'이란 범주가 기독교 도덕에 의해 '악/선'으로 뒤집혔다는 것이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15장에서 천교수는 "비극은 보통 이상의 인간의 모방이므로 우리는 훌륭한 초상화가들을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보통 이상의 인간=선인'이 된다. 우리가 '착한 사람' 혹은 '선량한 사람'을 '보통 이상의 인간'이란 뜻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등식은 부적절하며 좀 어색하다. 이 점은 손명현 교수의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짐작엔 천교수가 선행 번역을 참조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일러두기에서 역자는 "현대어 번역 중에서는 Bywater의 영역과 Gigon의 독역과 손명현의 국역을 참고했다"고 했다). 각주에서 문제를 제기하고서도 번역어는 그대로 갖다쓰고 있는 것이다(손명현 교수는 일역본도 참고했을 개연성이 높아서, '선인'과 '악인'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역본일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손명현본에서 이 대목은 이렇게 옮겨졌다: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행동하는 인간은 때에 따라 선인, 아니면 악인이다. 인간의 성품이 거의 언제나 이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덕과 부덕으로 그 성품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으로서 행동하는 인간은, 반드시 선인이든지, 악인이든지, 혹은 그 중간인 우리처럼 보통 사람이다.(...) 이렇듯 비극과 희극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희극은 보통 사람보다 못한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보통 사람보다 나은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동서문화사, 548쪽) 

그리고 천교수가 참고했다고 하는 바이워터의 대역본(1909)에는 이렇게 옮겨졌다: "The objects the imitator represents are actions, with a agents who are necessarily either good man or bad - the diversities of human character being nearly always derivative from this primary distinction, since the line between virtue and vice is one dividing the whole mankind. It follows therefore, that the agents represented must be either above our own level of goodness, or beneath it, or just such as we are (...) represent men either as better than in real life, or as worse, or as they are.(...) The difference it is that distinguishes Tragedy and Comedy also; the one would make its personages worse, and the other better, than the men of the present day." 

같은 대목에 대해서 바이워터와 함께 예전에 명성을 날렸다는 부처(Butcher)의 번역은 이렇다: "Since the objects of imitation are men in action, and these men must be either of a higher or a lower type (for moral character mainly answers to these divisions, goodness and badness being the distinguishing marks of moral differences), it follows that we must represent men either as better than in real life, or as worse, or as they are.(...) for Comedy aims at representing men as worse, Tragedy as better than in actual life." 

그리고 이상섭 교수가 사용했다는 주요 번역본 중의 하나인 엘지(Else)본은 이렇게 옮긴다: "Since those who imitate man in action, and these must necessarily be either worthwhile or worthless people (for definite characters tend pretty much to develop in men of action), it follows that they imitate men either better or worse than average (...)  Finally, the difference between tragedy and comedy coincides exactly with the master-difference: namely the one tends to imitate people better, the other one people worse, than the average."  

이 세 종류의 영역본만 보더라도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보통의 평균적인 사람(상태)보다 잘나고 못난 것을 그린다는 점이 비극과 희극의 차이로 제시된다. 설령 'good man or bad'이라 옮기더라도 여기서 'good man'은 '착한 놈'이라기보다는 '좋은 놈'의 뜻이다. 요컨대, 인간의 행동에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세 가지 유형은 좋은 놈, 나쁜 놈, 어중간한 놈 정도가 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23장의 제목은 국역본에서 '선한 주인공, 악한 주인공, 그리고 그 중간에 놓인 주인공'이라고 돼 있는데, 원저에서의 제목은 'The Good, the Bad, and the Intermediate Hero'이다. 이건 물론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 <석양의 무법자>(1966)의 원제 '좋은 놈, 나쁜 놈, 어리석은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을 패러디한 것이겠다(나는 다시 보지 못했는데, <석양의 무법자>는 일요일밤에 설연휴 특집으로 방영되었다고). 김지운 감독이 이 원제를 패러디하여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Weird)이란 제목을 붙였으니 이왕이면 그런 재미를 살려주는 게 좋겠다. 이 페이퍼의 제목은 그래서 '좋은 놈, 나쁜 놈, 어중간한 놈'이라고 붙였다. <시학>의 취지에 더 맞는 제목이라면 '잘난 놈, 못난 놈, 어중간한 놈'이 될 테지만.   

이미 무엇이 문제인가는 드러난 셈이지만, 이 'the Good'은 중의적이어서 '좋은 놈'도 되지만 '착한 놈' '잘난 놈'이란 뜻도 된다. 그리스어나 영어에서는 이러한 의미가 미분화돼 있는 듯싶은데, 이걸 한국어로 옮기자면 일면만을 부각시키게 되는 난점이 있다. <시학>의 1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 구현에서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이 도덕적으로 선량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상섭 교수가 'it must be good'을 '선량해야 한다'고 옮긴 대목에서도 이 '난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란 한정어가 붙긴 했지만, 같은 문단에서 "Even a woman may be good, and also a slave; though the woman may be said to be an inferior being, and the slave quite worthless"(Butcher)를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부류에 속하고 노예는 아주 못돼먹은 부류에 속하지만 좋은 여자, 좋은 노예가 있을 수도 있다."고 옮긴 것과는 잘 안 맞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량하다(be good)'를 '열등하다'나 '못돼먹다'의 상대어로 쓰고 있기에 그렇다. 일관성을 유지해주자면, 이 경우에도 '잘나다'란 뜻으로 옮겨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식 어법으로 '선량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났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듯싶어서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역자는 <시학>의 2장 서두의 인용을 "시인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며, 행동하는 인간은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다. 인간의 성격이 항상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모든 인간이 도덕과 부도덕에 따라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인 인간은 우리보다 더 선하거나, 또는 우리보다 선하지 않거나, 또는 우리와 같다."(163쪽)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 번역은 천병희본과 마찬가지로, 15장 후반부를 옮긴 "비극은 보통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하므로, 우리는 나름대로 훌륭한 초상화가를 보기로 삼을 수 있다."(174쪽)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섭본은 이 대목을 "비극은 우리 자신보다 잘난 사람들의 모방이므로 유능한 초상화가들의 예를 따라야 할 것이다."(54쪽)라고 옮긴다.

어떤 예인가? "훌륭한 초상화가는 어떤 사람의 형상을 재현할 때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되,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린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성미가 급한 사람이나 느린 사람, 또는 이와 유사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그릴 때, 그들을 그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되, 그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그려야 한다."(<스토리텔링의 비밀>, 174쪽)  

마이클 티어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문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례로 <록키>와 <아메리칸 뷰티> 등의 주인공을 든다. "록키는 건달세계에서 벗어나겠다며 이웃에게 허풍을 떨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비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 번햄은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남자지만 안젤라와 잠을 자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대부>에서 아주 탁월한 마피아의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도 기꺼이 가족을 보호하고 존중함으로써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고귀하게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이 세 인물은, 자신이 행한 극적 행동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통하여 비극적 드라마가 갖추어야 할 리얼리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174-5쪽)     

 

이 경우 '진지한 드라마'(serious drama)란 뜻의 비극은 잘난 인물의 모방이면서 어떤 인물의 잘난 면에 대한 모방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록키는 건달이고, 레스터 번햄은 무능력한 중년의 가장이며 마이클은 마피아 두목일 따름이지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 고귀하게 행동한다. 현대판 비극은 그런 고귀한 행동에 대한 모방이자 묘사이고 재현이다. 물론 이 행동의 모방은 잘 구축된 플롯에 의해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미 <시학>을 읽은 독자라면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 특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마치 원작소설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읽을 때의 느낌이랄까. 다만 개인적으로 두 가지 정도의 지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나는 <아메리칸 뷰티>의 모든 이야기를 묶어주는 '단일한 이야기'가 '하나밖에 모르는 마음'(one-track mind)으로 수렴된다는 점. 그리고 <엔젤 하트>에서 주인공(해리 엔젤)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플래시백이 그리스 비극에서의 코러스(합창) 역할을 대신한다는 점.   

 

저자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시학>은 영원불멸의 시나리오 쓰기에 관한 비결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원칙들을 가지고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분석해보고 그 원칙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살펴보라."(227쪽) 그리고 "내 생각에 <시학>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행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조건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수사학을 내뱉는 것이 아닌,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강력한 방법에 관한 것이다."(230쪽)  

한갓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드라마를 통해서 '삶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에 '노하우'가 있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전해주는 비밀이자 놀라움이다.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은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뮈토스; 플롯)의 비밀은 정녕 놀라운 것이다. 당신이 한 방 얻어맞은 듯이 잠시 멍해질 정도의 비밀이라고 해도 좋다(당신이 멍해지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한다면 상당히 많은 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시학> 등속의 책은 안 읽어도 되는 것이다). 공부는 그런 놀라움에서 또 시작된다... 

09.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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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27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영역판 중에서 전 펭귄의 영역판이 좋더군요.^^

로쟈 2009-01-27 10:10   좋아요 0 | URL
영역판을 비교까지 해본 건 아니고, 제 경우 노튼판은 대학 구내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책이었어요...

비로그인 2009-01-2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트를 보니 티어노의 책이 어떤 책인 잘 알겠군요. 이것으로 그 책 읽는 것을 대신해도 되겠네요. ^^

로쟈 2009-01-27 23:20   좋아요 0 | URL
네, 실전적인 책이어서 시나리오 습작생들에겐 요긴할 듯해요. 교양서로서는 <시학>의 보조교재 정도...

노이에자이트 2009-01-2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만들고 얼마 안 있어서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요.석양의 무법자에서는 리 반 클립이 더 기억에 남아요.텔리비전에서 열번도 더 했을 거예요.

로쟈 2009-01-28 22:17   좋아요 0 | URL
네, 자주 했죠.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극장에서 본 때문에 더 인상에 남습니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을 해야 한다고 조르는 아이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분위기 그저 그렇고 맛도 별로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온 뒤라, 게다가 속까지 더부룩하여 글을 쓸 만한 기분도 아니지만(이것이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인가!) 생각난 김에 메모 정도는 해놓는다. 예수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게리 윌스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를 지난달에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와 함께 구입해서 조금 읽어본 적이 있다(두 책의 영어본도 같이 구했지만, 지금 찾다가 포기한 탓에 번역본만 갖고 이 메모를 작성한다). 기억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을 읽으면서 참고하려던 것이었고,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을 포함해서 몇 권의 책을 그렇게 뒤적인 듯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원제는 그냥 'What Jesus Meant'이고 이건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의미한 것' 내지는 '예수가 말한 것'이라고 직역될 수 있겠지만, 국역본의 제목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서문보다 먼저 등장하는 '번역에 대하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몇 쪽 분량의 '일러두기'만을 읽었고 그걸로도 책값을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대한 독자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나와는 계산방식이 다르거나 더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읽지 않은 책이지만 성경과 예수에 대한 길잡이로 유익하지 않나 싶다.  

'번역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는 건 예수가 사용한 언어와 그 번역 문제다. 성경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자세히 알려고 한 적도 없지만) 초기의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가 완전 저잣거리의 언어여서 전혀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고. 박식한 고전주의자 니체가 이렇게 말해놓았을 정도다. "만약 하나님이 신약성서를 작성했다면, (하나님은) 분명 깜짝 놀랄 만큼 그리스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우아함에 굳이 시련을 부여하여 이처럼 타락한 언어 사용을 선택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은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때문이다. 그가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을 때 피정복 지역의 사람들이 정복자 및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공용 그리스어'였다. 일종의 혼합언어인 이것을 '코이네'라고 부르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을 더 참조하면 이렇다.  

BC 4세기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AD 6세기 중엽)까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및 헬레니즘 문명에 동화된 일부 아프리카와 근동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주로 아테네 방언에 바탕을 둔 코이네는 2세기까지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 방언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구약성서>(70인역 그리스어 성서)와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저서는 코이네를 사용하고 있다. 코이네는 근대 그리스어의 토대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미국인은 잘 못 알아듣는 그 '영어'가 일종의 '코이네'이다. 대부분의 혼합언어처럼 이 코이네는 섬세함이 부족하여 기초적인 단어들만 접속사도 없이 길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빌라도 같은 로마인이나 예수와 같은 아람어 설교자들고 그의 제자들이 함께 사용했던 이 기초적인 언어로 씌어졌다."  

'아람어'란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역시나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BC 7~6세기에 차츰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근동지방의 링구아 프랑카(국제혼성어)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의 언어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에즈라>는 아람어로 씌어 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유대 율법과 주해를 집대성한 책)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가 사용한 이 아람어가 히브리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못 들어본 말은 아니다.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배우들이 사용한 말이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고대 아람어'는 어떻게 재구해낸 것일까? 우리는 삼국시대의 한국어를 모르지 않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그래서 아람어의 그리스어(코이네) 번역이다. 그리고 그 점이 바울의 언어와 예수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특이한 그리스어라고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반면에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니체주의자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는 이 바울의 언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바울의 그리스어는 학파 또는 그 어떤 모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없으며, 그의 내적인 마음 상태에서 어색하지만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언어처럼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남겨진 시간>, 15쪽) 

강조한 대목은 오역이다. 어순을 약간 조정하여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예수의 언어처럼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맞다(원문은 "his Greek is not translated Aramaic (as are the sayings of Jesus)"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그 그리스어로 번역된 아람어로 어떻게 말했나?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What to me and to you, woman)?'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나오는 문장인데, 내가 갖고 있는 개역한글판으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나이까"이고 병기된 NIV판 영역으로는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이다. 우리말 번역보다는 영어 번역에서 차이가 더 도드라지는데,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와 비교하면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은 흡사 콩글리쉬 아닌가?  

게리 윌스는 여러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누가복음 2장 49절은 또 어떤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I must be at my father's)?"가 직역이고, 개역한글판과 영어판으로는 각각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와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로 옮겨졌다. 여기서도 "I must be at my father's?""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간의 차이를 음미해보는 것이 좋겠다. 윌스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의 무엇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주석자들이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이 이런 식으로 투박하고 모호하여 성서 번역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그리스어(코이네) 문장들을 정확하게 옮기기보다는 우아하게 옮기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대목의 우리말 번역은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의 투박함이 많이 제거돼 있다. 실상은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니었을까? "야야, 그게 니랑 나랑한테 뭐시간디?").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영어 번역들은 신약성서의 '결점들'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문법을 보강하고, 시제를 보다 일정하게 맞추었으며 반복어구를 잘라냈다." 그리하여 공손한 고어체로 이루어진 품위 있는 성서를 만들어냈다(흠, <바이블 키워드>와 <아시모프의 바이블>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이 '킹 제임스' 번역본이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진짜' 성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은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만약 새로운 번역이 원전의 효과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면 품위가 없어야 한다. 복음서의 언어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언어는 언어학적 세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칠게 다듬어진 위엄이다."(10쪽) 그래야지만 "하층민 남자로서 노동자 출신인 자신의 제자들과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윌스는 말한다.  

  

그런 성서를 사실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예수 또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대신 우리 곁에 있는 건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와 '추락하는 한국교회'다). 마치 '예수 메시아'란 뜻의 '예수 크리스토스'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고 음역함으로써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메시아'를 배제하고 유예시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닌지('메시아' 대신에 우리가 갖게 된 것이 반항적 록정신을 상실한 '거세당한 슈퍼스타'이다. '한국형 슈퍼스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서문은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몇 가지 행적만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Jesus Do)?" 운동의 허상을 폭로한다(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리하면 이렇다. 과연 사람들은 예수처럼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한다거나(마태8:22) 부모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마태8:22, 누가14:26) 혹은 자신들이 일궈낸 성공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는 교외의 부자 교회를 찾아가(혹은 소망교회를 찾아가) 헌금접시를 들고 있는 사람을 채찍으로 내리치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 2:16)라고 하거나 "강도들의 소굴"(마가11:17)이라고 고함칠 수 있을까? 

또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23:27)고 외치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 10:34)고 하거나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려고 왔다"(누가12:49)고 한다면, 그런 예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예수가 했던 바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축복과 은총을 받아서) 기름이 번지르한 윤택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왜 나입니까?'라고 반문하며 고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건 사실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마리아의 성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들 중에서, 마리아를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작품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한 게리 윌스의 말에, 나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그가 사례로 제시한 건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그림이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옮겨놓는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대경실색한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궁금히 여겼다."(누가1:29) NIV판으로는 "Mary was greatly troubled at his words and wondered what kind of greeting this might be." 인류의 역사가 그 수태로 인하여 좀 바뀌었다면 그 기원적 정념이 놀람이고 공포였다는 점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기쁨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래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나는, 성탄절을 보내며, 생각한다... 

08. 12. 25. 

 

P.S. 예전 같으면 눈길도 가지 않을 책들인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관심분야가 더 넓어졌다. '성경과 기독교'란 주제와 관련하여 더 읽어볼 만한 책은 바트 에르만(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 등의 책이다. 저자는 신약학의 권위자라고 하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 가운데서도 관심이 가는 타이틀이 많다.  

 

<예수>를 비롯해서 <신약>, <신의 문제> 등이 그런 타이틀이고 내년봄 출간 예정인 그의 최신작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러셀도 같은 제목의 책을 쓴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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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영화 개봉했을 당시 인터뷰에서 본 것 같아요.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가 아람어로 된 성경을 몇 십번 읽고서 연기했다고 하던걸요. (대단해라!)

로쟈 2008-12-25 23:5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아람어 성경의 성립연대가 언제였는지 알면 되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아무래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성서해석학자들의 중평입니다.그래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가 성서엔 혼재해 있다고 하죠.

로쟈 2008-12-25 23:59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책상맡에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분도출판사)란 책이 놓여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제가 그 책을 말하려고 했어요.광주의 한 가톨릭 서점에서 몇년전 할인판매할 때 분도 출판사 책을 많이 샀지요.개신교 신학자들 책도 내고 일반 인문사회과학 책도 좋은 게 많이 나오죠.

로쟈 2008-12-26 12:52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구하기 힘든 책이 돼버렸어요...--;

람혼 2008-12-2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의 '상상적 형상'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같은 제목을 패러디하여 "예수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로쟈 2008-12-26 12: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몇년 전에 당시 유대인인가 표준형 얼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지요(요즘 우락부락하고 입술 두툼한). '예수는 이날 태어나지 않았다'까지 포함해서 두루두루 시리즈가 될 법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8-1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그간 눈으로만 읽고 가다가 처음 글 남깁니다.
아람어와 코이네에 대한 글을 읽고 정찬의 소설집 <아늑한 길>에 실린 '아늑한 길'
을 펴보았습니다. 그곳에 아람어에 대한 내용이 꽤나 자세히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람어는 문자 없이 구전되기만 한 민중의 언어인 빨리어와도 비교할 만하지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아 정찬의 소설에도 나오는군요...

누런마음황구 2008-12-2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를 읽으려고 하다가, 좋은글 읽고 갑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그냥 일종의 책소개였습니다.^^;

neoscrum 2008-12-2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성경 왜곡의 역사>도 재미있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6490 성경의 원본을 찾는 신학자들이 보기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는 초기 성경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현재 쓰는 성경의 여러 오류들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8   좋아요 0 | URL
바로 제가 찾던 류의 책입니다.^^ 바트 어만(에르만)이 꽤나 저명한 학자군요. 바로 올려놓습니다...

anathema 2008-12-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ratton Ladewig, "An Examination of the Orthodoxy of the Variants in Light of Bart Ehrman`s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Th.M. thesis, Dallas Theological Seminary, 2000).

로쟈 2008-12-27 23:41   좋아요 0 | URL
학위논문까지 뒤져볼 정도의 관심은 아니구요, <성서 왜곡의 역사>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만 더 소개가 되면 좋겠네요...

anathema 2008-1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논문은 바트 어만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입니다.^^ 바트 어만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바트 어만의 주장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지요. 다른 사본학자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로쟈 2008-12-28 12:22   좋아요 0 | URL
Th.M. thesis이면 석사논문인가요? 아직 '사본학자'라고 부를 순 없겠고, 그가 권위 있는 새 책을 낸다면 읽어봐야겠네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의 에필로그 제목은 '경계 또는 토르나다'이다. '벤야민 전문가'로서의 관심과 역량을 내비치는 대목인데,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 <남겨진 시간>의 영역본(<The Time That Remains>),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의 대하여>(길, 2008) 등이다(성경의 구절들도 참조해야 한다). 벤야민의 글은 '역사철학테제'로 인용되고 있다('바울로'는 '바울'로 표기했다. 개신교에서만 '바울'이라고 표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출판된 대부분의 책들에서 '바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다).

아감벤은 먼저 제1테제에 등장하는 곱사등이 난쟁이를 상기시킨다. 벤야민은 "체스판 밑에 숨어서 터키풍 의상을 입은 기계인형을 조종하여 승리로 이끄는 난쟁이"의 이미지를 포우의 소설에서 차용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역사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는 작고 볼품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되는" 신학이 바로 그 '난쟁이'이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이 두려운 적수들과의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신학을 자기 편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제1테제의 주장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을 텍스트 자체에 적용한다. 결정적 이론투쟁이 전개되는 체스게임을 밑에서 조종하는 신학자?! 그렇다면 "저자가 테제의 텍스트 속에 매우 정교하게 숨겨둘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그 누구도 특별히 지목하지 못했던 이 난쟁이 신학자는 과연 누구인가?"(227쪽) 아감벤의 에필로그는 그러한 관심에 촉발되며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벤야민의 텍스트 속에 정교하게 숨어 있는 난쟁이 신학자는 바로 '바울'이다. 아감벤은 보다 구체적인 증거(흔적)들을 통해서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그 구체적인 '흔적'을 어떻게 찾는가?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실마리 삼아서다. 벤야민은 '파사쥬론' 즉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이 작업에서는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완전히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섹션 N의 한 주석). 벤야민에게서 이 인용은 방법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국역본은 'Epic Theater'를 '서사시극'이라고 옮겼는데, 혹 일어본에서는 그렇게 옮기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에서는 '오역'이다). "어느 텍스트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소속하는 컨텍스트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크라우스에 관한 에세이에서는 "인용은 언어를 이름으로, 언어를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어 문맥을 파괴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구제하고 벌한다."라고 적었다(국역본에는 '논고'라는 엉뚱한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 인용의 방법으로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따른다. 벤야민이 보기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는 식자공이 글자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처럼, 그 동작에 간격을 둘 수 있어야 한다."(그러한 간격두기가 낳는 효과가 연기에서는 '소격효과'이겠다.) 여기서 '간격을 두다'란 말은 영어의 'spacing', 독어의 'sperren'을 옮긴 것이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려고 할 때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대신에 각 철자들 간의 간격을 띄우는 것을 말한다. 즉 'sperren'이라고 하지 않고 's p e r r e n'이라고 표기하는 것. 이렇게 간격이 주어진 단어는 보통 두번 읽히게 된다. '스-페-르-렌, 스페렌'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들 자간의 간격이 주어진 단어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잉적으로 읽혀진다. 두번 읽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번의 독해는 인용의 중복기입적인 독해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228쪽)

'인용의 중복기입적 독해'는 'palimpsest of citation'을 옮긴 것인데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양피지에 지우고 다시 쓴 걸 말한다. 두 번 읽기가 인용의 거듭 쓴 양피지라는 것. 이제 이런 사전지식을 갖고서 아감벤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원고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남겨진 시간>의 표지에도 쓰인 수고의 제2테제이다.

끝에서 4행째부터 잘 보면 이렇게 씌어있다. "Dann ist uns wie jedem Geschlecht, das vor uns war, eine s c h w a c h e messianische Kraft mitgegeben."(때문에, 우리들에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약한 메시아적인 힘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국역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332쪽)라고 번역된 부분이다.

수고본에서 알 수 있지만 's c h w a c h e'(weak; 약한)란 단어의 자간이 띄워져 있다. 어떤 인용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메시아적 힘의 약함? 아감벤의 추정으로 "메시아적인 힘의 약함이 명료하게 이론화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텍스트에서이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가 그것이다. 바울은 간구한 끝에 주에게서 이런 계시(응답)를 얻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he gar dynamis en astheneia tele tai'이고, <남겨진 시간>의 역자는 "권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로 옮겼다. 영어로는 "power fulfills itself in weakness"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약함'에 있다고 하므로 바울은 흡족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리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의 강함이라."이고, 영어로는 "Therefore I take pleasure in infirmities, in reproaches, in necessities, in prosecutions, in distresses for the sake of the Messiah: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이다.

물론 벤야민 참조한 성경을 독어본이었을 텐데, 루터의 번역은 이렇다고 한다. 'denn mein Kraft ist in den schwachen Mechtig.' 즉 'kraft(힘)'과 '약함(schwache)'이 모두 출현하고 있고, 또 대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역사철학테제의 텍스트에서 바울 텍스트의 비밀스러운 존재야말로 자간을 비우는 것을 통하여 벤야민이 조심스럽게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230쪽) 그리고 이 발견을 아감벤은 자못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으로 기록한다.

벤야민에 대한 바울의 (가능한) 영향을 시사한 유일한 인물은 타우베스라고 한다(하지만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학 단편>을 로마서와 관련시키고 있을 따름이라고). 독일의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를 말하며, 그의 <바울의 정치신학>(2004; 독어본1993)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 생전의 마지막 공개강의를 묶은 것이다(영어본으로는 150여 쪽의 얇은 책인데,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 바울 관련서를 검색해봤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감벤은 강의의 서두에서 타우베스를 추모하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의 이 강의는 타우베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했던 강의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메시아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의 패러다임으로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14쪽) 참고로 아감벤의 강의는 1998년 10월 파리의 국제철학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벤야민의 제2테제에서의 바울 인용이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철학테제'는 벤야민의 최후의 저작 중 하나이며 그의 메시아적 역사관이 일종의 유언적인 요약이라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기계인형의 손을 비밀스럽게 이끄는 난쟁이 신학자"가 누구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미 답은 주어졌지만 아감벤은 몇 가지 '흔적'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제5테제에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진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지나간다."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제18테제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사를 엄청난 단축 속에 요약하고 있는 지금의 때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의 그 형상과 철저하게 일치된다."("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에서 '지금의 때(Jetztzeit)'에 대한 분석 등이 추가적인 사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결론만은 말하자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어휘는 모두가 순수하게 바울적인 것이다."그리하여 "바울의 편지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라는, 우리들의 전통에 있어서 메시아니즘의 최고의 두 텍스트가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근원적인 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며,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를 형성화고 있다는 공통된 사실로부터 우리드은 바로 오늘, 그 '독해가능성의 지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237쪽)

이 '지금'에 대한 분석은 보다 자세한 정리를 필요로 하지만 당장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 남겨진 시간이 너무 적다...

0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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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의 하나는 강유원 번역으로 새로 나온 <공산당 선언>(이론과실천, 2008)이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2006)도 읽은 터라 '내친 김'이란 생각도 들었고 이미 몇 종의 <공산당 선언>을 갖춰놓고 있는 만큼 '컬렉션'을 마저 채운다는 뜻도 있었다(이 <선언>과 함께, 여러 신간들을 들었다 놓고 고른 책은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1998)이었다. 오바마 탓일까?).  

집에 돌아와 맛보기로 내가 읽은 것은 부록 중의 하나인 '1882년 러시아어판 서문'이다. 이진우 번역의 <공산당 선언>(책세상, 2002)에도 포함돼 있는지라 비교해보기 위해 옥스포드판 영어본과 함께 한참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누구를 위한 책들인가?). 그나마 15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김태호 번역의 <공산주의 선언>(박종철출판사, 1998)이 눈에 띄기에 나란히 펼쳐놓았다(알다시피 <공산주의 선언>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의 대본이기도 하다). 그 정도 준비한 상태에서 '러시아어판 서문'(69-71쪽)을 읽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어 초판은 바쿠닌이 번역하여 1860년대 초에 <종>의 인쇄소에서 나왔다. 서양은 당시 <선언>의 러시아어판에서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파악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초판' 얘기가 나오는 것은 1882년판이 2판이기 때문이다. 바쿠닌(1814-1876) 번역의 초판이1860년대 초에 나왔다고 했지만 후주(102쪽)에 밝혀진 대로 러시아어 초판은 1869년에 출간됐다(엥겔스는 1888년 영어판 서문에서도 출간연도를 1863년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그때쯤으로 착각했던 듯하다. '1860년대 초'라는 말은 '1863년'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번역자도 바쿠닌이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1856-1918, 사진)였다. 초판에 결함이 많아서 1882년에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돼 있다(<공산주의 선언>, 129쪽). 그리고 초판을 낸 잡지 '<종(Kolokol)>의 인쇄소'에는 주석이 붙어 있는데,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살아있음을 외친다"를 구호로 내세운 혁명잡지. 헤르젠(Herzen)과 오가르요프(Ogarjow)가 발행. 1857년부터 1865년에는 런던에서 1865년부터 1867년에는 주네브에서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러시아에서 혁명운동 보급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102-3쪽)

인용문에서 두 러시아 망명 인텔리겐치야의 표기는 부정확하다. '게르첸'과 '오가료프'라고 해야 맞다(박종철출판사판은 '알렉산드르 게르쩬과 니꼴라이 오가르요프'라고 표기했다. '게르쩬'은 맞지만 '오가르요프'는 오기다). 사진은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 오른쪽)과 니콜라이 오가료프(1813-1877)의 모습(1861년).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를 참조할 수 있다(게르첸의 유명한 자서전 <과거와 사색>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무려나 러시아에서 나온 초판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으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서양'보다는 '서구'가 더 적합하겠다. '서유럽'을 가리키니까).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은 영어본의 표현으론 'literary curiosity'이다.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어, 러시아판도 있네!"). 그러던 것이 1880년대에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이젠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이어지는 건 그 이유다.

당시(1847년 12월)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직도 얼마나 제한된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는 각각의 나라들의 각각의 반정부 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라는 <선언>의 마지막 장이 극히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요컨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러시아와 미합중국. 당시는 러시아가 유럽의 전체 반동의 최후의 거대한 예비군을 이루고 있던 때였으며, 미합중국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여력을 이민을 통해 흡수하던 때였다. 두 나라는 유럽에 원료품을 공급하고 있었고, 동시에 유럽 공업제품들의 판매시장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당시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존 유럽질서의 기둥들이었다.

요는 <공산당 선언>이 씌어지던 시기만 하더라도 러시아와 미국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열외 지역이었으며(그러니 이 두 나라에서 <공산당 선언>은 남의 나라 얘기였을 테다) 원료 공급처이자 판매시장으로서 유럽의 질서(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달라졌다는 것. 먼저 미국의 경우.

오늘날에는 얼마나 다른가! 바로 유럽의 이민 때문에 북아메리카는 거대한 농업생산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의 경쟁은 유럽의 토지 소유 - 대토지 소유든 소토지 소유든 - 그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게다가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가지 사정이 아메리카 자체에 혁명적으로 반작용하고 있다. 정치체제 전체의 토대인 농업인들의 중소 규모 토지소유는 차츰 거대 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며, 공업지대들에서는 이와 동시에 처음으로 대량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자본들의 거짓말 같은 집중이 전개되고 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덕분에 미국에서 (1)대규모 농업생산과 (2)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인데,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란 대목은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 '빼앗다'란 동사는 보통 '누구에게서'란 간접목적어를 필요로 하는데, '공업자원들'을 누구에게서 빼앗는다는 말일까?

영어본에서는 "it enabled the United States to exploit its tremendous industrial resources with an energy and on a scale that must shortly break the industrial monopoly of Western Europe, and especially of England, existing up to now."로 번역되는 부분이고, 여기서 'exploit'는 '개발하다'는 뜻이다('노동력'을 목적어로 할 경우에는 '착취하다'로 번역하지만). 풍부한 노동력(이민자)을 갖게 되면서 방대한 규모의 자원 개발과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읽는 게 자연스럽겠다(<공산주의 선언>에서는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옮겼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또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 1848-1849년의 혁명 동안에는 유럽의 왕후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부르주아들도 이제 막 깨어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을 러시아의 간섭에서 찾았다. 차르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 러시아는 유럽의 혁명적 행동의 전위를 이루고 있다.

처음 <공산당 선언>이 나오던 184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였고, 그때의 러시아 황제(차르)는 니콜라이 2세였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1861년 농노해방을 단행한 알렉산드르 2세(사진)인데, 이 1882년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 직전인 1881년에 '인민의 의지' 당원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의 위협 때문에 한동안 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가치나에 칩거한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라는 대목은 그런 사정을 가리킨다. 러시아는 이제 유럽 혁명 대오의 전위다!

<공산당 선언>은 블가피하게 닥쳐오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의 해체를 선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러시아에서 급속히 꽃피는 자본주의로 인한 현기증과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에 대립하여, 토지의 태반이 농민들의 공동 보유임을 발견한다.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이렇다. 러시아의 혁명이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지금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두 문단이다. 이 결론부가 아마도 러시아판만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러시아의 향후 운명(혹은 진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의할 단어는 '오브시치나'(러시아식 농촌공동체, 곧 '농촌 코뮌'을 말한다. 발음은 '옵쉬나'). 강유원본에는 따로 주석이 붙어 있지 않은데, 김태호본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오브쉬치나'를 '오브시치나'로 수정해서 옮겨본다.

러시아 촌락 공동체를 흔히 미르라고 부르는데, 이 촌락 공동체를 토지 소유와 분배 형태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는 오브시치나라고 부른다. 촌락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자연적 결합이며, 가옥은 사유 재신이지만 경지는 공유되어 몇 년마다 성원 사이에 재분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 성원은 분배받은 경지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경작했다. 방목지 등은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은 이 촌락 공동체를 근거로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7쪽)

지향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해체와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다. 한데, 1880년대 러시아 사회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와 농민 공동체(오브시치나)의 공동소유가 공존하고 있었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였다.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키)은 직접적인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 비로소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이 쟁점에 대한 유익한 안내서가 베르쟈예프의 <러시아 지성사>(종로서적, 1980)이다. 러시아 지성사의 전개도 다루고 있지만 원제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Russian Communism)'(영역본)이다.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러시아 혁명의 기원과 의미'이고. 참고로, 예전에 같이 소개됐던 <러시아 사상사>(범조사, 1985재판)는 원제가 '러시아 이념'이다.

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Духовные основы русской революции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Русская идея

다시 반복하자면,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얻었던가?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렇지는 못하다. 마르크스는 이듬해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나며 엥겔스도 1895년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역사는 러시아 혁명의 시작과 끝까지도 목격하였다.1880년대에도 "심하게 붕괴된 형태"라고 했던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지금은 거의 와해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 선언>의 메시지는 어떻게 해독되고 실천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계급의 대립을 철폐함으로써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이다.(강유원, 역자후기, 159쪽)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획은 아직도 유효한가? 아직도 가능한가? <공산당 선언> 160주년을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08. 11. 08.

Первая программа Союза коммунистов. "Манифес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в контексте истории

P.S. 이미지는 작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 <선언> 160주년 기념판이다. 그리고 아래는 1848년에 나온 독일어판 <공산당 선언>과 1948년에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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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라는 잡지는 <낭만의 망명객>을 읽고서 알게 되었죠.그리고 그 책에 나온 게르첸과 오가료프,게르첸 부인의 삼각관계는 참...거시기하더군요.게르첸은 부인을 친구에게 뺏기고 그 슬픈 마음을 자서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일본에는 번역되어 있다네요.자서전 문학의 명저라는데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엄청나게 두툼하답니다.

로쟈 2008-11-08 16:44   좋아요 0 | URL
네, 꽤 두툼하죠. 저도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을 모셔두고만 있으니까요. 톰 스터파드의 드라마까지 해서 세트로 번역되면 좋을 텐데요. 저는 제 코가 석자라서 엄두를 못 내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를 버린 여자가 다른 남자 애기까지 임신하고...아...그 심정이 어땠을까요.그 무렵에 유럽의 1848년 혁명까지 실패했으니 그가 비관주의자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아요.

로쟈 2008-11-08 19: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농민 공동체에 대한 기대로 넘어가니까 아예 비관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