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북리뷰를 읽다가 좀 의아하게 생각한 건 <미친 등록금의 나라>(개마고원, 2011)를 다룬 지면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클라이드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문화과학사, 2011)와 함께 관심도서로 분류해놓은 터라 애써 찾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지방신문의 기사 정도다. 적어도 20대 대학생 독자들에겐 요즘 많이 읽히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만큼은 읽혀야 하지 않나란 생각이 든다.

‘등록금 1000만원, 교육비 2000만원 시대’.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그 대안책을 모색하고 특히 또 한국 교육문제에 난공불락 중 하나인 ‘등록금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경제력 수준이 대학등록금 액수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OECD 국가들의 경우, 대학등록금이 아예 없거나 우리의 반의 반값에도 못 미치는 등록금을 내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여기엔 체코나 뉴질랜드처럼 국민소득 기준으로 볼 때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학교육에 많은 투자와 지원을 할 수 있는 부자 나라여야 등록금을 싸게 매길 수 있으리란 선입견은 착각일 뿐이란 게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재 등록금 문제를 해결해 줄 비책인 양 적극 주장되고 있는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와 ‘기부금 입학제’에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 숨겨져 있다고도 주장한다.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면서 단지 대출학자금을 취업 후에 갚도록 하는 방안에 불과한데도 대단한 지원책인 양 호도되고 있다는 것. 이 책의 인세는 등록금 인하 촉구 활동에 쓰일 예정이다.(대전일보) 

11. 01. 24. 

P.S. 덧붙여, 대학등록금과 관련하여 대학의 적립금 문제를 다룬 기사도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1. 01. 24) 10兆 쌓아둔 대학들의 ‘재정 떼쓰기’

지난 21일 점심 무렵 부산 롯데호텔 3층 아트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세미나에 참석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올해도 등록금을 동결할 수밖에 없는 경제상황이다. 물가가 불안하고… 등록금 인상 자제를 부탁드린다.”며 대학총장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국민대 이성우 총장은 “수년째 동결하면 상당한 재정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장관과 이 총장의 견해 차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정부와 대학의 불만이 응축된 장면이다.

정부의 대학 등록금 동결 요구에 대학들이 재정압박이 심하다며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대학들이 쓰지 않고 쌓아둔 ‘적립금’이 2009년 말 기준으로 10조원을 넘어 논란이 될 전망이다. 특히 서울 주요 사립대의 경우 2년사이 최고 66%까지 ‘곳간’(적립금)을 불린 곳도 있다. 2009년 말 현재 적립금이 4000억원 이상인 곳은 이화여대(7389억원), 연세대(5113억원), 홍익대(4857억원) 등 3개교나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립대총장협의회가 지난해 10월 정부에 재정지원을 요구하는 ‘사립대학 육성을 위한 건의문’을 채택한 데 이어 계속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자, 적립금 용도에 대한 성격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들은 적립금을 대학의 중·장기 계획이나 대규모 투자사업 부분에 한해서만 쓰고 있다. 등록금 상승이 이뤄지지 않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인건비나 물가상승분 보전비용으로 적립금을 쓰려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교과부 한석수 대학지원관은 23일 “사립대 적립금 용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서 “현재도 당해연도 등록금을 받고 난 뒤 남은 재정은 기금이나 적립금으로 넘기는 게 관례인데 이를 당해연도에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적립금 주요 부분이 등록금 수입으로 채워지는 셈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학들이 ‘등록금 장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이날 교과부 대학정보공시센터(대학알리미)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등록금을 동결했던 2009년에도 서울 주요 사립대의 적립금이 증가하는 추세는 바뀌지 않았다. 2011년도 5.1%의 등록금 인상을 제시한 고려대는 2007년 1526억원이던 적립금이 2009년 2305억원으로 2년 새 51% 급증했다. 등록금 3.8% 인상안을 내놓은 경희대도 2007년 817억원에서 2009년 1362억원으로 66.7% 늘었다. 올해 등록금 동결을 결정한 연세대는 2007년 3471억원에서 2009년 5113억원으로 2년 새 47.2% 증가했다. 이화여대도 2007년 5115억원에서 2009년 7389억원으로 44.4%가 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적립금이 재단의 ‘몸집 불리기’에 사용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2009년 사립대 적립금 중 건축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3조 2001억원으로 전체의 46%를 차지했다. 반면 연구기금 적립금은 6381억원으로 9.2%에 불과했다. 전년대비 증가율도 2008년 27.4%에서 2009년 14.7%로 줄었다. 이에 대해 서울 A사립대 기획실 팀장은 “우리나라 대학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투자가 필요하다. 대규모 투자를 위해서 적립금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라며 “등록금 문제로만 적립금 사안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대학의 발전과 경쟁력 등의 관점에서도 적립금 문제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김동현·최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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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의 외교문서 '폭로'에 대한  미 정부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설립자 어산지는 영국에서 성폭행 런던의 독방에 갇혀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더불어 그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도). 위키리크스라는 '국적없는 언론'의 힘을 거꾸로 보여주는 사례 같다. 주한 미대사관에서 작성한 외교문서들도 공개된 문서 리스트에 포함돼 있어서 향후 어떤 '폭발'이 가능할지 예단할 수 없다. 세계언론사의 한 획을 긋는 게 아닌가 싶다. 위키리스크의 활동을 지지하는 칼럼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12. 11) [시론]위키리크스 사태와 언론의 자유 

지난 11월 말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자국 외교관들을 통해 수집한 외국 정부와 국제기구, 그리고 국제 주요 인사들에 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담은 미국 국무부의 외교전문 25만건을 폭로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인해 국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은 연일 위키리크스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면서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를 1917년에 제정된 간첩법(Espionage Act)을 적용해 처벌할 것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서버 제공업체 서비스 중단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위키리크스에 인터넷 서버를 제공해 왔던 아마존닷컴이 서버 제공을 중단하고, 스위스의 포스트 파이낸스 은행이 어산지의 은행계좌를 차단했다. 또 그동안 위키리크스와 아무 문제없이 거래를 해왔던 마스터 카드와 비자카드 그리고 온라인 결제업체인 페이팔(PayPal) 등이 위키리크스 지지자들의 기부금 결제를 중단하는 등 위키리크스에 대한 압력이 전방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러한 압력의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위키리크스의 이번 외교 전문 폭로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공공의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지지하는 언론사와 국가 비밀 누설로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비난하는 언론사로 양분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언론인 폭스뉴스(Fox News)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미국의 외교활동에 큰 상처를 입히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떨어뜨려 미국의 역할을 약화시켰다며 맹비난했다. 반면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미국 정부의 외교 목표들과 성공·타협·좌절 등을 그 어떤 자료보다도 잘 보여주고 있어 이번 폭로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며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처럼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된 가운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국가 안보와 국제사회에서 국가 위상의 중요성을 내세워 정부 기관이 행하는 언론 자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 효과(Chilling Effect)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번 외교 전문 폭로로 위키리크스는 그동안 인터넷 서버를 이용해 왔던 회사로부터 서비스 중단 통보를 받았고, 거래를 맺어왔던 은행과 기업들과도 관계를 청산해야만 했다. 이번에 위키리크스와 관계를 청산한 업체들은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나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관계 청산에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 기관의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고, 이는 전형적인 권력기관의 언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효과 중 하나다.

언론에 대한 명백한 탄압행위
많은 언론사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앞으로 언론매체의 인터넷 의존도가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번 위키리크스의 사태처럼 인터넷 서버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외부 압력에 의해 서비스를 갑자기 중단할 경우 언론사가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인터넷상에서 언론의 자유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탄압 행위다.

지난 1971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내부 고발자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sberg)’의 제보를 바탕으로 베트남전 1급 비밀문서인 일명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폭로한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대해 정부기관의 비리나 비행을 폭로한 행위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위키리크스가 이번에 폭로한 내용도 미국 외교관들이 비정상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수집한 비밀정보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최진봉 텍사스주립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한겨레(10. 12. 13) [김선주 칼럼] 국적없는 언론, 위키리크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이 2010년 10대 뉴스의 두 번째로 꼽은 것은 위키리크스의 ‘거침없는 폭로’이다. 폭로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을 지우면 위키리크스는 꿈의 언론이다. 2007년 폭로전문 사이트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위키리크스는 2008년엔 이코노미스트가 주는 뉴미디어상을 받았고, 2009년엔 국제앰네스티로부터 미디어상을 수상했다. 위키리크스는 새로운 미디어임이 분명하고 국적 없는 세계언론이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등등 세계 유수의 언론은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건을 받아서 2차적으로 가공해 보도하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저널리스트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닌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거기에 의거해서 보도하고 비판하고 논평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기사가 어떤 단체가 필요에 따라 공개한 정보에 의해서만 쓰여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라는 엄청난 의구심에 자주 휩싸인다. 돈과 권력과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나 빅브러더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그들은 저 높은 곳에 앉아서 기자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나 아닌지 항상 뒤꼭지와 발밑이 불안하고 써늘하다.

위키리크스가 아니면 교황이 추기경 시절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왜 반대하였는지,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무엇 때문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생체정보가 필요했는지, 미국 군인들이 아파치 헬기에서 어떻게 바그다드의 행인을 조준사격하면서 낄낄거렸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는 지금 성폭행 혐의로 런던의 감옥에 갇혀 있다. ‘세계 외교가의 9·11 사태’를 가져온 미국의 극비 문서 25만건 공개 뒤 인터폴은 세계 188개국에 어산지를 수배했다. 그가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특정한 집단을 파괴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세계의 빅브러더만 겨냥하고 있고 그 폭로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구명을 위해 그가 어떤 권력과도 어떤 거래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또 그러리라 믿는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자유, 선과 진실, 인류 보편의 가치가 유린당하면 남의 일이라도 자신의 일로 간주하고 간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임이고 언론인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저널리즘의 역사는 정보나 사실을 감추는 특정 기관이나 단체와 싸워 정보를 찾아내 공개한 역사이고 그로 인해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어산지의 주장은 옳다. 폭로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는 비판은 옳지 않다.

부당한 정보수집을 해 문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집단이 자국 국민이나 세계 여론을 향해 정당성과 필요성을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국가가 미친 짓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을 배척하지 않을 세계인의 양식이 필요할 뿐이다.

‘국경없는 의사회’나 ‘국경없는 기자들’처럼 국경없는 언론이 필요해진 세상이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인류 역사상 국가는 결코 도덕적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글로벌한 세상에서는 그래서 국적없는 언론이, 글로벌한 세계인의 양식, 혹은 집단지성의 도덕적인 힘이 개입해야만 한다. 무한경쟁의 세계시장경제체제 속에서는 글로벌한 기준이란 강자에게는 달콤하지만 약자에겐 횡액일 뿐이다. 어떤 나라든 어떤 빅브러더이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짓을 했을 때 그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더라도 사후에 압박하고 세계 혹은 해당 국가의 여론에 의해 더 좋은, 더 겸손하고 더 이상적인 정부로 갈 수 있도록 압박은 해야 한다. 위키리크스가 해놓은 국적없는 언론의 폭로는 그래서 가치가 있고 옹호되어야 한다

10. 12. 13.  

P.S. 위키리크스라는 한 가지 '대안' 이전 언론의 현실은 어떤 것이었나? '미디어 카르텔'과 '거짓말'이 판치고, '여론조작'으로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을 속이는 현실이었다. 반전을 위한 '폭로'의 행진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최시중 방통위원장과 방통위 인사들의 행태에 대한 실명비퍈으로 눈길을 끄는 <미디어 카르텔>(마티, 2010)에 대한 리류기사는 http://news.nate.com/view/20101213n226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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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3 15:16   좋아요 0 | URL
어샌지를 살해해야 한다던 새라 페일린이라는 cerebrum이 empty하신 nyun이 미국의 최고 스타덤에 있는 정치인이라지요? 그리고 그런 스타덤에 오른 큰 비결이 바로 그런 무뇌아적 발언들 덕분이고요...

로쟈 2010-12-14 16:05   좋아요 0 | URL
미국의 '힘'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12-16 17:32   좋아요 0 | URL
푸틴이 어샌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더군요.글쎄...푸틴이 언론자유를 논하다니 참 이상합니다.

로쟈 2010-12-16 23:42   좋아요 0 | URL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비난하던 미국식 민주주의는 뭐가 다르냐는 거겠죠. 어샌지를 비판한다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어제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책보세, 2010)이다. 책은 발행일이 12월 10일자인 1쇄였는데, 어느새 3쇄에 들어간다고 한다(오늘이 11일인데!). 서거와 맞물려 다시금 선생의 삶과 역정이 주목받는 듯하다. 일부의 냉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단연 '이주의 책'이라고 해야겠기에 서평기사와 칼럼을 옮겨놓는다. 그리고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서울신문(10. 12. 11) 권력 앞 독야청청했던 리영희의 삶과 글  

기자로서 펜을 빼앗겼지만, 그럴수록 진실을 토하는 사자후는 더욱 커져갔던 참언론인이었고, 강단 바깥으로 내쳐짐으로써 비로소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였다. 야만과 광기가 몰아치던 시대의 한 줄기 등불 역할을 했던 이였다. 불이면서 또한 얼음이었고, 엄혹한 시절 많은 이들의 전위면서 또한 후방이었던 이였다. 



무릇 평전이라는 것이 흔히 빠지는 오류가 ‘주례사식 찬사’다. 하지만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리영희 평전’(책보세 펴냄)은 이러한 것들과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리영희라는 인물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조금만 타협했다면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삶도 가능했겠지만 그는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차례나 내쫓기는 삶을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사적인 대변화의 시기,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한국사회의 미숙한 이성들에게 명징한 시대정신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펜을 앞세운 이성의 목소리는 물론 투쟁의 거리와 감옥도 그는 기꺼이 마주했다.

1989년 한국기자협회보에 남긴 그의 글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 새삼 홧홧거리게 만든다. ‘내게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신문지의 소식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내용,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이라면서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고 호되게 질타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부의 결정, 정책, 행동을 국가의 이름으로 대치해 놓고 그런 것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직결해 버리는 사고방식이 과연 애국심이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1970년 리영희 명예교수가 언론계를 향해 토해낸 사자후는 40년이 지난 지금의 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초강대국과 굴욕적인 외교 협상을 맺어도, 진실 찾기는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정부의 발표 중심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국익으로 생각하는 기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리영희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듯싶은 이미지로 비쳐지지만 기자 시절 동료들과 놀러 가서 배갈을 잔뜩 마시고 보트를 타려다 물에 빠지거나 코트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이야기며,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테러했던 생면부지의 의혈청년을 불러 저녁밥과 술을 사주며 의기를 칭찬했다는 일화 등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리영희의 정신을 일찌감치 몸으로 받아 실천한 후배 언론인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인물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려내는 평전 작업에 매진해 오고 있는 김삼웅이기에 명쾌하고 엄정한 펜끝은 절로 리영희를 닮았다.

지난 8월 27일. 1시간 30분에 걸쳐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가진 것을 포함해 모두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또한 자서전 ‘역정’, ‘대화’ 등 그의 십수권에 이르는 저서를 모두 아울렀고, 그동안 리영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남긴 짧고 긴 글을 모두 모아 정리했다. 김삼웅은 리영희의 81세 생일이자 병세가 완연했던 지난 2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을 찾아 책을 바쳤다.

김삼웅은 “평전을 쓰면서 솔직히 후회했다. 그의 청렬한 생애와 넓고 깊은 사유·지식의 세계를 가늠하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리영희에 대한 김삼웅의 존경심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필체는 이성을 가뜩 갖춘 ‘리영희체’다.(박록삼기자)  

경향신문(10. 12. 11) [책동네 산책]리영희처럼 읽고 생각하기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이 그에게 상투적으로 따라붙었던 수식어다. 정반대의 뉘앙스이지만 이런 수식어는 대체로 그가 쓰고 말한 것들에서 유래한다. 기자로서,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선생은 참 많은 글을 썼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이 남긴 글들만 생각하기 쉽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글을 쓰기 위해 그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읽고, 궁리했다는 사실은 잊기 쉽다는 것이다. 



선생은 환갑을 몇 년 앞둔 88년 <역정>(창비)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출간했는데 오래전 읽는 이 책에서 내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두 ‘읽기’에 대한 선생의 집념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던 시절 선생은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중이었다. 선생은 집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다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언제인가 징역을 살 때는 학창시절에 하다 만 프랑스어 공부도 할 겸 가족에게 <레 미제라블> 원서를 넣어달라고 해서 읽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내가 기자가 된 것은 그가 현직기자에서 물러난 지 30년 가까이 흐른 뒤이지만 ‘기자 리영희’가 남긴 전설은 여전히 언론계에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통일원 자료실’ 얘기일 것이다.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운 편은 아니지만 과거엔 기자 또는 학자라고 해도 북한 또는 공산권에서 나온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북한 관련 연구자가 통일원 자료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자기가 열람하는 자료마다 ‘리영희’란 사람이 앞서 열람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유심히 봤더니 거의 모든 자료의 열람카드에 리영희라는 이름이 써 있었다고 한다. <리영희 평전>(책보세)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자신이 그간 쓴 현대사 인물에 관한 10여권의 평전을 선생이 모두 꼼꼼히 읽고 잘못된 부분까지 지적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글을 쓰거나 말하기에 앞서 ‘팩트(fact)’부터 챙기는 선생의 습성을 보여준다. 선생의 평론집 <스핑크스의 코>(까치)에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바쁘다’란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96년에 쓴 글인데 젊은 여성들이 소비주의에 휘둘리는 세태를 꼬집는 내용이다. 선생은 그 해 겨울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가죽부츠가 크게 유행한다는 얘기를 매스컴에서 들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결혼식 참석차 명동에 나간 김에 가죽부츠의 인기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길 한쪽에 서서 지나가는 여성 20명의 구두를 살폈다고 했다. 그 결과 8명이 가죽장화를 신었더라면서 40%라는 수치를 도출한다. 이처럼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글에서조차 선생은 근거를 제시하고 싶어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선생의 글들은 차분한 분석적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웅변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시사평론집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오래됐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스핑크스의 코>처럼 십수년 전 나온 선생의 평론집은 지금 읽어도 시의성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우리가 선생에게서 ‘리영희처럼 쓰기’뿐 아니라 ‘리영희처럼 읽기’와 ‘리영희처럼 생각하기’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김재중 기자) 

10.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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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의 새해 예산안 날치기 처리로 정국이 경색돼 있는데,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연평도 포격 때문에 묻힌 감이 있는) '민간인 사찰'이 뇌관이 아닌가 싶다. 두 가지 사안을 연결시켜서 짚고 있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이상돈 교수의 시론이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필자는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반대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열혈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정권의 말로'는 이미 시작됐다... 

 

 경향신문(10. 12. 10) [시론]정권의 말로 예고하는 ‘민간인 사찰’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과 관련이 있는 국무총리실 내의 한 조직이 정권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을 은밀하게 사찰했다는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임명된 공기업 임원 등 구 여권 인사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 여러 명도 사찰 대상이었음이 거의 확인되어 있고, 박근혜 전 대표도 사찰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직계이지만 이상득 의원과 대립각을 세웠던 정두언 의원이 사찰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대목은 특히 곱씹어볼 만하다.

사찰 대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라 휴대폰을 상시적으로 도청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어 있어 사찰의 배후가 간단치 않으며, 사찰의 규모 또한 알려진 것보다 더 광범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사찰의 초점이 구 정권 인물에서 한나라당 의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부분은 현 집권세력이 여당 의원들의 이탈을 무엇보다 경계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간의 가정(假定)을 확인시켜 준다. 국회가 미디어법과 세종시 문제를 처리할 때 여당 내 반대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집권세력이 임기말의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 사찰이란 불법수단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 등과 관련해서 정권에 비판적이던 몇몇 한나라당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가 사찰 대상이었다는 의혹은 그런 점에서 납득이 간다.

대통령의 큰형과 관련 조직 윤곽
엊그제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당 단독으로 예산안과 문제 법안들을 통과시킨 데서 보듯이, 집권세력은 대화와 타협이란 정치를 포기한 지 오래다. 간혹 쓴소리를 했던 한나라당 의원들도 꼼짝 못하고 이런 폭거에 동참한 것을 보니 사찰이 갖고 있는 ‘위협적 효과(chilling effect)’를 알 수 있다. 박연차와 연루되었다고 보도된 의원들이 기소되어 곤욕을 치른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뜻을 알아서 새길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도 사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검찰이 수사를 덮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는 점에서 ‘민간인 사찰’은 닉슨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 간 워터게이트보다 훨씬 심각하다. 워터게이트는 일과성 사건이었지만 ‘민간인 사찰’은 정권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권 내 비선조직이 정권 반대세력과 여당 의원을 불법으로 사찰했다면 그 나라는 ‘독재국가’다. ‘독재정권’이 ‘국격’을 논하고 ‘G20’ 운운하고 있는 만화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지만 의석수가 부족한 야당은 탄핵은커녕 국정조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런 수모를 당한 여당 의원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서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검찰에 수사를 요청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은 돌부처처럼 얼어붙어 있으니, 측은한 생각이 들 뿐이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러고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를 하겠다는 집권세력과, 자신들은 비주류라서 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나라당 내의 일부 세력이다. 이런 난정(亂政)을 하고도 훗날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집권세력도 한심하고, 침묵으로 동조함으로써 침몰하고 있는 배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명정을 차버린 비주류도 한심하다. 하도 한심해서 이들이 혹시 영구집권을 할 묘책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여당의원까지 포함, 독재의 상황
이제 공은 ‘국민’에게 넘어왔다. ‘민간인 사찰’은 물론 ‘4대강’, 종편 배정 등 이 정권이 벌이고 있는 일은 목적과 내용은 물론 방법과 절차에서도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국회는 마비되어 있고, 검찰이나 감사원 등에도 믿을 구석이 없으니 불법을 바로잡을 장치가 완전히 망가져 있는 형국이다. 내년에는 선거가 없어서 민의를 밝힐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또 그 열매를 향유했던 우리 국민이 이러한 독재상황을 감수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1987년 6월혁명 때도 그러했고, 1960년 4월혁명 때도 그러했다. 그만큼 민심은 무서운 것이니, 집권세력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이상돈 |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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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지난주는 외부 일정이 가장 많은 주였는데(목요일 하루만 일정이 없었다), 국내외적으로도 사건/사고가 많았다. 화요일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대표적이다. 관련 칼럼을 뒤늦게 읽고서 오래만에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기록'으로서의 의미도 가질 수 있을 듯해서다.  

  

경향신문(10. 11. 27) [이택광의 왜?]“잃어버린 10년” 주장 우파들의 위기관리 

이례적인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동북아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남북관계’에 집착해서 비인도적인 북한의 만행에 초점을 맞춰 연일 지면을 장식하고 있지만, 상황은 이보다도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런 주장들을 경청해보면, 결론은 뻔하다. 모든 잘못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정당한 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지금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북아 정세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북한에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보수언론들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북한은 ‘원래’ 이런 집단이고 ‘본성’이 호전적인 전쟁광들이 아닌가. 그런데 연평도 포격을 놓고 새삼스럽게 북한 응징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이 발발했을 때, 외신들이 차분하게 남북 상황에 비추어 둘 다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혹시 모를 우발적인 실수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표 보수신문이라는 한 일간지는 “대한민국이 공격당했다”는 선정적인 제호를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우려하는 사회구성원과 주변국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런 행동은 역시나 주변국의 이해관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북한의 맹동주의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이처럼 남북의 권력집단은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리지만 사실은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두 북한 탓”이라는 도덕적 결론만을 되풀이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리는 정확하게 북한의 것과 같은 것이다. 민간인을 살상한 뒤에도 사과 한 마디 없이 오직 모든 것이 “남한 탓”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의 억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다. 평소 자유를 수호하고 인권을 중시한다는 한국의 보수언론들에서 똑 같은 논리를 되풀이해서 듣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 문제를 ‘국익’ 차원에서 풀어가는 것이지 선전선동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한국 사회의 기획에서 ‘상수’이지 ‘변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북한은 항시적 ‘위기’인 것이고, 따라서 국가위기관리의 차원에서 북한 문제를 풀어가는 합리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번 연평도 사건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이른바 우파들의 대북정책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햇볕정책을 “퍼주기”라고 비판하며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우파들의 노선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건이 터진 이후에 우파들이 보여준 태도나 행동은 실망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북한을 비난하는 선동적 발언이나 쏟아냈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항으로 대피했지만, 수용시설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이처럼 허술한 대처 상황을 보고 있으면 우파들이 목청을 높이는 “안보의식 해이”의 원인이 국민들 탓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연평도 사건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진단이 나올 수 있지만, 실제로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런 위기상황을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며 과거 정권의 정책을 ‘좌편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집권했으면 그 주장에 합당한 실력을 우파들은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에 대처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들도 똑같이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 빼고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뿐이다.(이택광_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경향신문(10. 11.27) [2030 콘서트]비둘기와 매의 시간

군인 두 명 전사와 민간인 두 명 사망이라는 참혹한 비극 앞에서 비둘기파와 매파가 싸운다. 매는 말한다. 햇볕정책이 김정일 정권에 핵을 쥐어주고 정권 붕괴를 지연시키면서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둘기는 말한다. 최근의 강경책이 북한 군부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하여 이런 일이 생겨났다고

양쪽 논리는 평행선이다. 매는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면 줄수록 북한의 도발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비둘기는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굴복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대적하면 대적할수록 북한의 도발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매는 문제점을 지적당하면 ‘그러므로 더 강경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비둘기도 문제점을 지적당하면 ‘그러므로 더욱 퍼줘야 한다’고 한다. 이 일관된 두 세계관은 주어진 모든 정보를 저 좋은 대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나 반목한다.

여기서 지워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다. 양쪽 모두 우리의 행동이 북한을 무리 없이 바꾸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유권자들이 북한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압록강까지 도달하는 것이나,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쌀을 건네주는 인륜적 행위에 사실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다만 한국 사회가 일구어낸 알량한 부가 어떤 무력에 의해 위협당하는 상황을 원치 않을 뿐이다. 그래서 비둘기와 매는 똑같이 유권자들에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상황을 관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리해야만 하니까. 그러므로 사건이 터지면, 그건 우리 사회가 상대편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서로 믿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갑론을박의 형식이 이렇다.

물론 찬찬히 따져보면 쌍방의 주장은 모두 오류다. 비둘기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항시적인 군사도발을 요하는 체제에서 이탈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햇볕정책 10년 동안 그런 변화는 조금 진행되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미국이 보조를 맞췄다면 훨씬 나았을 거란 가정도 있지만,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다. 오히려 햇볕정책이 지속됐더라도 북한에 3대 승계를 위한 어떤 도발이 필요했을 거란 예측이 더 의미있다.

매는 강경책이 북한 정권의 전투성을 거세하거나 그것이 거세된 다른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선 국지전, 전면전, 체제의 전면붕괴로 인한 혼란 등이 리스크로 발생한다. 매의 전략은 성공할 길이 있다 하더라도 아찔한 줄타기의 길이다. 그렇다고 비둘기가 의기양양해야 할 이유도 없다. 비둘기의 노력과정에서도 도발과 국지전에 대한 리스크는 존재하고, 그런 북한에 실망한 우리가 매파로 이동할 경우 문제는 고스란히 반복될 테니까. ‘적화통일’의 가능성은 매의 소심증으로 취급하더라도 그렇다.

오늘의 비둘기는 매를 공격하기 위해 매파 정권의 안보무능력을 열심히 질타한다. 비둘기나 매나 북한만 욕해선 답이 없으니 정부를 욕한다. 그런데 매와 비둘기가 이렇게 합창하면 정권이 다음 도발상황에서 ‘확전’의 가능성을 무릅쓴 보복전의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비둘기의 정부 비판은 자기파괴적이다. 비둘기도 매도 옳지 않지만, 우리에겐 둘 이외에 다른 방도도 없다. 쌍방 모두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북한을 직시하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리라. 하나의 시대가 어스름하게 저무는 시간, 비둘기와 매의 구별이 안 가는 시간, 비둘기와 매의 시간이 왔다.(한윤형_자유기고가) 

1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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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11-29 18:08   좋아요 0 | URL
한윤형씨의 양비론은 참으로 무책임하게 보이는 군요. 비둘기의 노력과정에서 일어나는 도발/국지전과 매파의 결과 일어날 수 있는 전면전을 동일시하는 그 사고구조가 참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택광 교수의 컬럼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인질범이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 그 인질범이 나쁜 놈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인질범에게서 인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수우파의 경우 아무 대책없이 인질범이 나쁜놈이고 잡아죽여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자꾸때리다 2010-11-29 18:52   좋아요 0 | URL
그냥 답이 없는 것 같아요. 햇볕정책이 북한을 바꿀 거라고 믿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똘아이는 마구 때려도 똘아이 짓하고 사탕발림을 해도 똘아이 짓하잖아요.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위치를 휘청이게 할 수 있는 변화 자체를 싫어하니까요.

lo초우ve 2010-11-29 22:26   좋아요 0 | URL
철사는 적당히 휘어졌을때 바로 잡으면 반듯하게 잡히지만,
완전히 접혀졌다가 다시 피려면 모진 망치질과 담금질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휘어졌다가 펴논 철사는 그 흔적이 남습니다.
과연 우리가 남북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정책하에 살아왔던 국민들은
정말 빠른시간내에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 지금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같은 민족끼리 어우러지지 못하는 그런 단점을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선을 긋고 아옹다옹 하던 그 국가들이
이제는 서로 통일이 되어 한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독과 동독이 그러하듯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통일이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베르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휴전선은 이제 없어져야 된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나는 전후 세대이지만
우리 선조의 역사를 보면 남북이 합쳐져 고구려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원래는 하나였는데, 지금은 휴전선이라는 선을 그어놓고 그렇게 살아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넘에 이데오르기 때문에 지금은 북한은 권좌에 있는 최고 통치권자와 남한은 현재 무능력한 정치인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통일을 못하고 있다고 생가합니다.
연평도 폭격을 가지고 우리가 이 일을 논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이견일뿐입니다.
그리고 정치권의 이기심과 자리지킴을 배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 국민들은
늘 이러한 토론에 을박양논을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1-30 08:10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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