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원신문에 실은 원서서평을 옮겨놓는다. 아직 번역서가 출간되지 않은 책을 대상으로 하기에 원서서평인데, 수잔 스튜어트의 <갈망에 대하여>(1993)는 조만간 소개될 것으로 안다. 짧은 서평이라 주된 내용만 간추렸다.

 

  

 

동국대학원신문(14. 05. 12) 욕망의 구조는 이야기에 어떻게 새겨지는가

 

언어를 통해서 경험을 서술할 때, 즉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모든 이야기의 밑자락에는 물론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한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는 욕망의 구조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수밖에 없다. 수잔 스튜어트의 <갈망에 대하여(On Longing)>의 발상도 그것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욕망을 떠안는가, 혹은 욕망의 구조는 이야기에 어떻게 새겨지는가. 욕망의 구조란 무엇인가. 욕망은 그 대상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대상과의 거리를 벌려놓는다. 기호적 차원에서 욕망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을 기입하며, 이 간극이 바로 상징계가 발생하는 공간이다.

 

저자에 따르면, ‘동경’ 혹은 ‘욕망’까지 포괄하는 ‘갈망’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갈망은 ‘간절한 욕망’을 뜻한다. 이 갈망은 시제상으로 기원(과거)과 종말(미래)을 향한다. 기표와 기의, 혹은 물질성과 의미의 관계가 탄생하는 지점과 초월되는 지점이 갈망의 서사가 닿고자 하는 곳이다. 둘째, 갈망은 ‘임신한 여성이 품는 공상적인 열망’도 가리킨다. 임신은 자연과 문화의 문턱이다. 세포분열이라는 생물학적 리얼리티와 상징계라는 문화적 리얼리티가 마주하는 장소다. 임신이라는 문턱은 자연/본능의 과잉으로 특징지어지며 동시에 그것은 문화/상징계의 전제조건이다. 임산부의 갈망은 생물학적 영속성을 향한 갈망이며, 이 갈망은 어머니의 욕망에 의해 ‘갈망의 자국’으로 아이의 무의식에 기입된다. 갈망의 세 번째 의미는 ‘소유물 혹은 부속물’이다. 이야기의 힘이란 유의미한 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유의미한 타자를 생산하고 탄생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런 대상으로서 소유물은 전체를 대신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윤곽을 변형시키는 부속물이다. 가정의 실내장식이 내면의 자아를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갈망들은 어떻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가. 저자는 미니어처와 거인, 그리고 기념품과 수집품, 네 가지를 이야기의 주된 대상으로 다룬다. 이야기의 대상이라는 것은 달리 욕망의 대상이라는 뜻도 된다. 미니어처가 부르주아적 주체의 내적 시간과 공간의 은유라면, 거인은 국가의 추상적 권위나 집단적, 공적 삶의 은유이다. 미니어처가 ‘개인적인 것’의 발명과 관계있다면, 거인은 ‘집단적인 것’의 발명과 관계가 있다.

 

한편 기념품은 사건이나 경험을 지시하는 환유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미니 에펠탑은 에펠탑의 물질적 견본으로서 에펠탑 방문이라는 경험을 대신한다. 기념품에 얽힌 이야기는 물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건 소유자의 이야기이다. 기념품은 과거를 보존하는 동시에 현재를 폄하한다. 현재는 기념품이 가리키는 과거의 친밀하고 직접적인 경험에 견주어 낯설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념품이 우리의 관심을 과거로 되돌려놓으며 과거에 정통성을 부여한다면, 수집품의 경우에는 거꾸로 과거가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된다. 수집품은 역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분류법에 따른다. 이런 수집의 원형은 노아의 방주다. 방주는 향수의 세계가 아니라 기대의 세계다. 기념품의 핵심이 기억이라면 수집품의 핵심은 망각이다. 기념품과 수집품의 목적이 이렇듯 다르기에, 저자에 따르면 스크랩북은 기념품에 속한다. 욕망의 이야기가 그 욕망의 대상에 의해 유형화될 수 있다면, <갈망에 대하여>는 그 욕망의 유형학의 훌륭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14.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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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란 책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다. 대개 이런 경우 국내에서도 발 빠르게 소개될 터라 조금 기다려보면 되겠는데(글항아리에서 올 10월쯤 나올 예정이라 한다), 미리 어떤 책인지 일러주는 기사가 있어서 발췌해놓는다. 지난주 시사IN의 특집기사('21세기 자본론, 세계 경제학계를 흔들다')의 일부다(전문은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72 참조).

 

 

시사IN(14. 05. 03) 자본주의 ‘복고’ 선언?

프랑스 작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19세기 초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 중 하나인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탐욕에 눈먼 인간 군상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야심찬 20대 법학도인 라스티냐크가 정체불명의 사내 보트랭으로부터 출세에 대한 설교를 듣는 장면이 있다. 보트랭은 공부나 재능, 노력 따위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라스티냐크에게 역설한다. “네가 30세에 판사가 되면 연봉 1200프랑이야. 잘해서 검사가 돼도 연봉 5000프랑이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더러운 짓까지 서슴지 않으면 50세엔 파리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겠지. 그래봤자 연봉은 5만 프랑 정도다.”

보트랭이 잘생긴 라스티냐크에게 권하는 ‘출세 전략’은 지참금 100만 프랑을 가져올 상속녀와 결혼하라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투자수익률은 한 해 5%쯤으로 추정된다. 100만 프랑 규모의 ‘자본’이면 주식·채권·부동산 등에 투자해서 연간 5만 프랑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결혼만 잘하면 열심히 노력해 검사로 출세한 다음 받는 연봉(5000프랑)의 10배(5만 프랑)를 20대에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파리 최고 수준의 50대 변호사와 비슷한 소득이기도 하다.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Twenty- First Century)>의 저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 대목에서 19세기 초의 프랑스가, 스스로 일하기보다 상속받아야 잘살 수 있는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였다는 사실을 읽어낸다. 21세기 초의 현대 자본주의가 19세기로 복귀할 조짐이 농후하다는 것이 피케티의 견해다.

201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21세기 자본론>이 지난 3월 미국에서 영역본으로 출간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뉴욕 타임스> <뉴요커> 등 진보 성향 언론은 물론 <파이낸셜 타임스> <포브스> <포천> 등 시장주의 노선의 매체들까지 연일 관련 기사와 인터뷰를 쏟아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 마틴 울프 <파이낸셜 타임스> 수석 논설위원,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 등 세계적 석학 역시 이 책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피케티는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경제성장까지 지체된다는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던 미국 사회에 제대로 된 의제를 던진 것이다.

<21세기 자본론>이라는 제목은 당연히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흉내 낸 것이다. 피케티는 프랑스 사회당을 지지했던 좌파 경제학자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다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이윤율(이윤/자본)’이 떨어진다고 주장(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했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벌어들이기 위해 자본을 투자한다. 이윤율이 계속 떨어진다면 자본 측은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투자하지 않고 경제성장 역시 중단될 것이다. 이렇게 체제의 동력이 사라지면서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 ‘자본주의 종언’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예언이다.

 

그러나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에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은 완전히 틀렸다”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생산성 상승 및 인구 증가(인구가 늘어나면 이에 따른 각종 상품에 대한 수요 역시 늘어나면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일정한 성장률을 계속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700~2012년의 300년 동안 세계경제 성장 중 절반 정도가 인구 증가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피케티 역시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체제라고 믿는다. 경제성장론 부문에서 세계적 대가인 쿠즈네츠나 칼도 등은 경제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평등이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케티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불평등 경향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계에서는 1945~ 1975년의 30여 년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높은 경제성장과 불평등의 완화를 동시에 성취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이 30년이 오히려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

 

폴 크루그먼은 <21세기 자본론>에 대한 <뉴욕 타임스> ‘북 리뷰’에서 ‘피케티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는 앞으로 부와 불평등에 대해 더 이상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우리 사회가 단지 19세기 수준의 소득 불평등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습 자본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체제에서는 재능 있는 개인이 아니라 족벌 왕조가 경제 시스템의 사령부를 통제하게 된다.”

 


피케티는 최근 <뉴레프트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미래에 대해 특별히 낙관적이지 않다. 과거에서 배운 교훈에 따르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불평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서 배운 것을 통해 자본주의를 더욱 평화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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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정리하다가 두어 주 전 교수신문에 실린 출판면 기사를 읽었다. '2014년 학술서 무엇이 준비되고 있나'(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8818). 각 출판사에서 올해 준비중인 학술서 목록을 훑어보다가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올 책 두 권에 눈길이 갔다.

현실문화연구가 내놓을 책들로는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등이 쓴 『인민이란 무엇인가』가 주목된다. 언어적, 개념적 차원의 인민의 의미에서부터 인민주권과 집회의 자유에 대한 논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함의와 프랑스 내에서의 맥락 등, 다양한 층위의 논의를 통해 인민이란 말을 되짚고 있다. 근대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도발적인 제목에 담아낸 『변태적 섹슈얼리티의 탄생』(차민정)도 그 내용이 궁금증을 돋군다. 이외 페리 앤더슨의 기념비적 비교역사학서인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는 출간 40주년 기념판으로 나올 예정. 절판된 소나무판과 까치판에 수록되지 않았던 ‘아시아적 생산양식’(540매 분량)을 처음 번역해 실었다. 또한 중세와 절대주의 시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화려한 도판들을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불어판의 번역으로 보이고(아직 영어본은 나오지 않은 듯싶다), 짐작에는 지젝과 바디우, 랑시에르 등이 공저자로 참여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과 비슷한 성격과 규모의 책이지 않을까 싶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원래 불어판으로 나왔고 영어로는 원제를 그대로 따서 <민주주의, 어떤 상태인가?>로 번역됐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은 물론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를 참고할 수 있다. 여하튼 바디우와 부르디외, 버틀러, 랑시에르 등이 참여한 <인민이란 무엇인가>도 기다려봄 직하다.

 

 

분량으로 기대를 갖게 하는 책은 페리 앤더슨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다. 기사대로 40주년 기념판이 번역돼 나온다는 것인데, 예전 까치판을 갖고 있지만 추가되는 분량에 욕심이 난다(소나무판 제목은 <절대주의 국가의 역사>다). 영어 개정판도 구해볼까 싶다. 앤더슨은 여전히 활발하게 책을 펴내고 있는데,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기념판과 같이 낸 책으로는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창비, 1991)도 있다. 이 역시 번역서는 절판된 지 오래 됐다. 개정된 내용이 있다면 다시 소개됨직하다.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는 "유럽 절대주의 국가의 성격과 전개과정을 비교사적으로 개관한" 책으로 스페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웨덴, 폴란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동서유럽 국가들의 절대주의 시대를 다룬다. 이 가운데 스웨덴, 폴란드, 오스트리아에 대한 기술은 국내에 상대적으로 덜 소개된 듯한데, 이번에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갈증을 해소해줄 책이 출간됐다. 독문학자 임종대 교수가 펴낸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전3권, 유로, 2014)다.

 

 

조금 시야를 좁혀서 합스부르크가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은 나온 적이 있다. 제목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흥망과 성쇠>(공주대출판부, 2012)다. 오스트리아, 특히 수도 빈은 문화사적으로나 지성사적으로 의미가 큰데, 이와 관련해서는 스티븐 툴민 등의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필로소픽, 2013)이 요긴한 책. 윌리엄 존스턴의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글항아리, 2008)도 관련서이지만 절판됐다(사실 번역도 좋지 않았다)...

 

14. 05. 05.

 

 

P.S. 흠, 합스부르크 왕가와 빈(비엔나)에 관한 책까지 포함하면 목록이 더 길어질 수 있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 2014)도 빼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얼마전에 개봉됐던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밑바탕이 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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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북리뷰 기사들을 둘러보다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식도 눈에 띈다. 내달 15일에 출간되며(짐작에 한국어본도 빨리 나오지 않을까 싶다) <색채가 없는 다사키츠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가 제목이란다(일어본은 알라딘에서도 예약판매 중이다). 관련기사는 이렇다.

 

'1Q84'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제목이 15일 공개됐다. 일본 문예춘추사는 이날 "무라카미 신작의 제목은 '색채가 없는 다사키츠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 (色彩を持たない 多崎つくると、彼の巡?の年)'"라며 "내달 15일 일본 전국 서점에서 발매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세계적인 밀리언셀러였던 '1Q84'에 이어 3년만에 나온 신작 장편소설이다. 제목길이만 무려 20자로 앞서 전작 '세계의 끝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世界の終りとハ?ドボイルド?ワンダ?ランド)'의 기록을 제쳤다. 작가 무라카미는 출판사 사이트에 게시한 작가의 말에서 "전작 '1Q84'가 이른바 롤러코스터적인 이야기였다면 신작은 조금 다른 걸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며 이번 신작을 설명했다. 이어 "그것이 과연 어떤것이었는지 써보기전에는 몰랐다"고 덧붙였다. 무라카미의 신작은 내달 15일 일본 전국 서점에서 발매될 예정이다.(뉴스1)

 

개인적으로는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강의도 계획돼 있어서 하루키 소설들을 좀 읽어야 하는데, 신작도 번역본이 나오면 읽어볼 참이다.

 

 

 

하루키에 관한 참고문헌으로는 <상실의 시대>와 <1Q84> 등의 영어판 번역자이기도 한 제이 루빈의 <하루키 문학은 언어의 음악이다>(문학사상사, 2003)부터 시작해서 <하루키를 읽는 법>(문학사상사, 2006), 그리고 고모리 요이치의 <무라카미 하루키론>(고려대출판부, 2007) 등을 들 수 있다.

 

 

전반적인 소개로는 히라노 요시노부의 <하루키, 하루키>(아르볼. 2012), <1Q84> 읽기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1Q84를 말한다>(미래지식, 2009)와 <무라카미 하루키 1Q84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예문, 2009)가 나와 있다. 3년만의 신작을 통해서도 다시금 건재하다는 걸, 살아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까. 내달이면 알 수 있겠다...

 

13. 0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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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에서 열린 벤야민 심포지엄에 들렀다 귀가하는 길에 집어든 주말판 경향신문에서 목수정 작가의 '해외 책' 란을 읽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81935545&code=900308). 국내엔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이 번역돼 있는 사회학자 팽숑 부부의 신작 <돈, 양심도 법도 없는>(2012)을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울 뿐더러 필독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언젠가 언급한 바로우파키스의 <글로벌 미노타우로스>(2013)와 함께 번역되면 좋겠다...

 

 

며칠 전 포브스는 지난해 세계 최고 거부들 리스트를 발표했다. 10억달러 이상을 소유한 갑부들의 수는 27년 전 리스트가 발표되기 시작한 이래 최고치였다. 1426명. 지난해에 비해 200명이 늘었다. 이 1426명의 거부들은 5조4000억달러를 소유하고 있다. 27년 전 거부 숫자는 140명이었고 이들이 소유한 재산은 2950억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세계 인구의 20%는 여전히 하루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간다. 분명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간다. 지구촌 거의 모든 곳에서.

 

 

<부자들의 대통령>의 저자이자 부자 전문연구자로 유명한 사회학자 커플인 모니카 팽송과 미셸 팽송은 “과연 돈이 언제부터 이렇게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는가”를 새 책 <돈, 양심도 법도 없는>(L‘argent sans foi ni loi·2012)에서 묻고 답한다. 돈은 분명 인간사회를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물물교환 대신, 그리고 조개껍데기 대신 생겨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돈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저자는 돈이 언제부터 유용한 도구의 위치를 넘어 한줌도 안되는 인간들이 나머지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가 돼 버렸는지를 쉽고 명확한 언어로 설명한다.

 

(...)

프랑스에서의 최근 상황 악화는 부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혜택을 베풀며 계급전쟁을 지배계급의 완전한 승리로 이끈 사르코지의 영향이 크다. 덕분에 프랑스 부자들이 스위스 계좌에 예치하고 있는 자산은 800억유로에 이르는 반면 이틀에 한 번 이상 단백질이 포함된 식사를 할 수 없는 프랑스 아이들의 숫자는 8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

 

불행하게도 상황은 지구촌 어디나 비슷하고,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해법도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금융 천국 스위스에서 기업 간부들이 고액 연봉을 나눠 갖는 것에 제동을 거는 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것처럼. 우선 도구여야 할 돈이 도끼가 되어 우리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을 저자들은 요구한다. 대화로 풀어낸 가벼운 책 속에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타락한 돈의 민낯이 담겨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주눅들었던 마음이 왠지 상쾌해진다.

13.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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