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대표 극작가이자 소설가 루이지 피란델로(1867-1936)의 마지막 소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1926)이 개정 번역판으로 다시 나왔다.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희곡선집이 번역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별로 읽히지 않는 작가다. 대표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이 간혹 무대에 오르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갑작스레 피란델로의 소설이 눈에 띈 건, 현대문학에서 분신 테마와 군중 테마에 요즘 관심을 두게 되어서다(문학에서 군중과 대중, 인민과 다중 등 집단성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표상되는지가 관심거리다). <아무도 아니>은 제목부터 이러한 테마에 딱 맞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당대의 환경 속에 내던져져 사물과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뿐만 아니라 스스로로부터도 소외된 채 불안에 떨며 분열증적 상황에 노출된 사람들의 존재모순성이 탁월하게 형상화되는 것을 본다. 난해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변적이고 장황한 부분들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는 피란델로가 부러 현학적인 말놀이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근대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삶 자체가 분열증적이고 불안정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분열증적 서사의 계보를 작성할 때 필히 자리를 표시해야 할 작품이다. 그 전후에 어떤 작품들을 배치할 수 있을지 좀더 고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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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문학의 대표작가들을 강의에서 두루 다루었지만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앙드레 말로다. 대표작들이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나오지 않아서인데 몇년 전에 나온 <정복자들>(민음사)에 이어서 이번에 <희망>(문학동네)이 출간되어 얼마간 해갈이 되는 모양새다. <인간의 조건>과 <왕도>도 새 번역본이 나오면 비로소 3-4강 정도의 강의를 꾸릴 수 있겠다. 사실 학부시절에 읽은 작품이 <인간의 조건>과 <왕도>였고 <희망>은 범우사판 번역본이 있었음에도 특별히 끌리진 않았던 작품이다. 이제 보니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1937년작.

˝앙드레 말로가 반反프랑코 전선에서 국제비행대 ‘에스카드리유 에스파냐‘를 조직하고 지휘하며 전쟁의 참상과 살육의 현장, 그 속에서 폐허가 된 인간의 마음을 목격하고 이를 바탕으로 썼다. 내전의 순간순간을 포착해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고스란히 전달하면서도 제목이 암시하듯 단순한 비관에 그치지 않고, 종교와 혁명이 결합된 암시 및 환기의 장치들을 통해 20세기 지구촌 문명 속에서 해체된 정신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의지와 종교의 정수에 대한 탐구를 담아낸 작품이다.˝

자연스레 비교되는 건 오웰의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다. 말로는 평전들도 소개돼 있는 만큼 <인간의 조건>만 더 출간된다면 내년쯤엔 강의에서 다루고 싶다. 그렇게 대기중인 또다른 작가들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인데, 사르트르의 <구토>(1938)와 보부아르의 <레망다랭>(1954) 등은 언제쯤 새로 번역본이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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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4-13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전 앙드레 말로 평전을 읽어봤습니다. 선생님 리뷰를 보니 그때 읽은 책이 생각나네요.ㅎㅎ

로쟈 2018-04-13 23:14   좋아요 2 | URL
네, 관련서가 많이 나와 있는 편이죠.~

오독 2018-04-14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로, <인간의 조건>(지만지)과 <구토>(하서출판사)는 한국어판 저작권을 각각 이 두 출판사가 가지고 있어서, 이 두 출판사가 새롭게 번역하지 않으면 새 번역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공저작권이 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로쟈 2018-04-1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76년몰이니 거의 생전에 만나보기 어렵겠네요.^^; 구토의 저작권이 하서에 있다니. 그 무성의한 판본에.--;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를 여름학기 강의에서 읽을 예정이다(강의에서 다루는 건 처음이다). 기억에는 두번쯤 읽은 책인데, 내가 읽은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독문학자 강두식, 전영애 교수의 번역본들이었다). 좋아하는 작품이라 세계문학전집판으로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구해놓기도 했다. 강의에서 막상 다루려니 어떤 번역본을 골라야 할지 고심이 된다. 선택지는 민음사판, 펭귄클래식판, 열린책들판이다(알라딘의 판매량순이다).

독일문학 강의를 지난해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이번 여름강의가 거의 마무리다. 토마스 만과 헤세를 반복해서 읽었고(카프카를 포함하여) 여름에는 브레히트와 하인리히 뵐, 권터 그라스, 그리고 제발트까지 (다시) 읽을 계획이다. 나대로는 10월중에(16-25일) 진행할 독일문학기행을 준비하는 의미도 있다. <말테의 수기>도 마찬가지인데(파리로 가야 했겠지만) 릴케의 자취를 일부 따라가보는 여정을 준비하면서 그의 시들과 함께 다시 읽어보려는 것이다. 일종의 기분 조율이랄까.

강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만 어제는 영어본도 주문하면서 준비 모드로 들어갔다. 책을 읽는 것과 강의에서 다루는 건 별개여서 이 작품을 둘러싼 여러 맥락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작품의 구성과 주제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필요하다. 나의 ‘청춘의 책‘ 가운데 하나인 <말테의 수기>를 그런 필요에 따라 다시 읽으려니 묘한 흥분도 느끼게 된다. 언젠가 파리에 가는 일이 생긴다면 ‘릴케의 파리‘ 혹은 ‘말테 브릭게의 파리‘ 덕분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 릴케가 단 한편의 시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이름이 <말테의 수기>와 함께 기억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0대의 나‘가 내게 귀띔해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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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손의 소설(로맨스) <일곱박공의 집>(1851)을 읽고서 책장에서 빼낸 책은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함>(1852)이다. <피에르>는 멜빌의 일곱번째 소설로 <모비딕>(1851)에 바로 이어지는 작품인데 이전작들과는 달리 해양소설이 아니라 가정소설이다. 일종의 업종변경을 시도한 작품인데 그 이행의 맥락을 <일곱박공의 집>을 읽고서야 그려볼 수 있었다. <일곱박공의 집>이 바로 호손의 가정소설이고 <모비딕>을 호손에게 헌정하기까지 한 멜빌이 그 영향하에 쓴 소설이 <피에르>였던 것. 그러니까 독자도 <모비딕>에서 <피에르>로 바로 건너갈 수 없고 <일곱박공의 집>을 경유해야 한다.

그런데 <주홍글자>(1850)에 뒤이어 발표된 작품으로 <주홍글자>의 음울한 결말과는 다르게 의도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일곱박공의 집>과는 달리(이러한 결말을 통해서 작중인물들뿐 아니라 작가 호손 자신도 청교도 조상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피에르>는 호손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 ‘모호함‘을 견지한다(더 철저하게 호손을 계승한다?!).

˝경험에 입각한 해양 이야기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고딕 소설과 로맨스의 관습에 대한 재해석 위에 프로이트를 앞서 간 개인의 심리 분석이 더해진 <피에르, 혹은 모호함>은 당시 독자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머니, 배다른 누이, 이상적인 여인, 연적과의 전통적인 관계 설정을 모두 흐트러트리고, 이들 관계에 비이상적인 친밀감과 성적 긴장감을 부여하여 모든 것을 소용돌이 안으로 끌어들이는 ‘피에르’의 광풍은 그의 운명이 그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함이었다.˝

모호한 가정소설이란 점에서 떠올리게 되는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성년>(1875)이다. <피에르>를 언제 강의에서 다룰지 모르겠지만(그 사이에 멜빌의 장편이 두어 편 더 나오길 기대한다) 두 작품에 대한 비교도 흥미로운 과제다. 서로를 읽었을 가능성은 희박한 두 작가이지만(희소하긴 하지만 멜빌과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연구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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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을 강의에서 읽었다. 작품의 지명도 때문에 강의에서 가장 많이 다룬 헤세의 작품이다. 아이러니한 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 강의에서 다룰 때마다 유감지수가 높아져서 이제는 심지어 ˝불쾌하고 어리석은 작품˝이라는 평까지 하게 된다(주로 전쟁에 대한 어리석은 의미부여가 불만의 원인이다).

<페터 카멘친트>(1904)에서 <유리알 유희>(1943)까지 그의 주요작 가운데 이제껏 일곱 편을 강의에서 다뤘다. 내게 미지의 헤세는 얼마남지 않은 셈인데 12권짜리 현대문학판 전집을 기준으로 하면, 에세이와 동화집을 제외한 세 편이 ‘내가 모르는 헤르만 헤세‘가 된다. 자전소설 <수레바퀴 아래서>(1906)와 <데미안> 사이에 놓인 작품들로 <게르트루트>(1910), <로스할데>(1914), <크눌프>(1915)가 그 세 편이다.

이 가운데 <게르트루트>는 중학생 때 <사랑의 삼중주>라는 제목의 번역판으로 읽은 적이 있다. 너무 오래전이라 어렴풋하게만 기억에 남아있다. <게르트루트>와 <로스할데>는 예술가소설로 분류되고(<유리알 유희> 계보다) <크눌프>는 이름을 붙이자면 방랑자소설에 든다. 그럼 또 대략 가늠은 되는군.

그렇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을 다시 읽는 것과 미지의 작품을 처음 읽는 건 기분이 다르다. 비록 <수레바퀴 아래서>를 처음 읽고서 받았던 감동이 다시 재연되기는 어려울 테지만(요즘 들어서 그의 작품세계가 새삼 너무 협소해 보인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 작가의 읽지 않은 작품이 남아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아직 펴보지 않은 카드가 세 장 남아 있는 것처럼.

번역본은 전집판 외에 몇 종이 더 나와있다. 전집판으로 읽으려고 하지만 다른 번역판들도 참조할 계획이다. 전집판은 서고에서 찾아와야 하지만 민음사판의 <크눌프>는 책장에 있다. 범우사판은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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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4-13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도 하나의 에피소드(전쟁이 프란츠 크로머와 동급)가 될만큼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나‘ 만 있는건지~
헤세에게 ‘나‘의 바깥은 없는건가요?

로쟈 2018-04-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야의 이리가 바깥의 최대치 같아요

로제트50 2018-04-1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마지막을 지킨 니논 헤세의
글을 보면 헤세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 같아요~~

로쟈 2018-04-13 23:15   좋아요 0 | URL
인생은 자기에게로 가는 여정이라는 게 헤세의 인생관이니 그에 충실했던 것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