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필요에서 인류학 관련서들을 읽고 있는데, 가령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읽는다고 하면 그리 머쓱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획 아이템'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하지만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1) 같으면 어떨까. 강의와 원고에 치여 지내느라 진득하게 붙들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된 책인데, 장정일의 서평을 읽으며 한번 더 눈길을 주어본다. 김정일 사망으로 어수선한 남북관계를 고려하면(그는 죽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수호천사 노릇을 하는군), 다시금 '규율권력'과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사유에 차분히 귀를 열어도 좋겠다(이건 강의록이니까). 물론 바쁘신 분들은 아래 서평만 일독하셔도 된다... 

 

 

 

시사IN(11.12. 24) 당신은 왜 새벽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나?

 

1970년에 발표된 강용준의 중편소설 <광인일기>의 말미에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도덕 사디즘의 창시자’로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배운 작가는 광복 뒤에도 일본 서적을 입수해서 읽었고, 그런 경로를 통해 푸코를 실시간으로 접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푸코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인 ‘규율 권력’을 ‘도덕 사디즘’으로 번안한 것이다. 저 용어가 일본을 경유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푸코의 규율 권력은 ‘일망감시(판옵티콘)’ 체계와 짝을 지워 설명하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일망감시 체계란 감시자(간수)가 피감시자(죄수)의 밖에 있는 게 아니라 피감시자의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형국을 일컫는다. 위·간·허파처럼 감시자가 피감시자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상태란 예컨대, 자동차 운전자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정차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고 서 있는 일과 같다. 교통질서라는 명분의 도덕 확립을 통해 이와 같은 일망감시 체계가 완성되고 나면 권력은, 경찰의 수와 CCTV 설치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일망감시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내부에 감시자를 모신 우리는, 권력이 다루기 좋은 균질한 시민이 된다.

 

강제나 무력이 아니라 피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규율을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근대적 권력의 특징에, 푸코는 규율 권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와 같은 규율 권력을 통해, 아무도 보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고 있는 운전자들은 모범 시민으로 훈육된다. 하지만 그처럼 규범을 잘 체화한 시민들이, 푸코를 읽은 바 있는 한 눈썰미 있는 소설가의 눈에는, 갈 데 없는 도덕 사디즘의 희생자로 보였던 것이다.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문학평론과 문화 이론에 수시로 인용되던 1990년대부터다. 그는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과 연계되면서, 대표적인 해체주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스의 수덕주의(修德主義)에서 현대의 최종 해결책을 찾은 그를 해체주의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론이 중심·위계·기원을 의심하고 전복하는 두 사조와 흡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가 애용한 ‘계보학적 방법론’이 그랬다. 그의 계보학은 권력과 한 몸인 지식 권력이 옹호하는 기원과 단일성(전체성·통일성)에 저항하면서, 지식 권력이 배제하거나 무시했던 주변 현상에 주목한다. 학술원에 의해 부적격 처리된 ‘뒷담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온 계보학은 신성한 기원과 역사의 단일성에 균열을 냈다.

 

 

계보학의 위력은 푸코가 차례대로 행했던 광기·정신병원·감옥·성·비정상인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로 입증됐다. 푸코는 기존 인문학이나 역사가 다루지 않았던 위와 같은 연구를 통해, 권력이란 왕과 같은 개인 인격체나 그가 불시에 행사할 수 있는 비축된 폭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성(정상인)과 광기(비정상인)를 구획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미시적이고 편재적인 지식 효과라는 것을 밝혔다. 지식을 권력의 합목적성에 딸린 시녀로 보는 이런 생각은 지식을 신의 선물이자 인간의 위대성으로 여겨온 서구 지성사의 면면한 흐름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며, 서양의 근세를 만든 계몽주의 역사관(앎을 통해, 무지로부터 깨어남!)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에서 <데리다와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펴냄, 1991년)을 쓴 마단 사럽은 푸코의 계보학을 일종의 역사 투쟁이고 지식 비판이라고 평한다.

 

어렵고 낯선 온갖 사상과 철학은 매스컴과 시간이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한번 녹기 시작한 것은 어느덧 사라지기 마련이다. 규율 권력·일망감시·계보학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일반 상식으로 헌납한 푸코는(수능시험에도 나온다!), 한동안 ‘노틀’ 취급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대처리즘(Thatcherism)의 나라에서 쏘아올린 신호탄에 따라 ‘푸코 르네상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귀환한 배경은 이렇다. 첫째, 1984년에 푸코가 죽기 전에 했던 몇 년간의 강의록이 2003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둘째, 푸코가 말년에 제시한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1990대 초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해명하는 데 요긴했다.

 

왕의 귀환에 결정적 구실을 한 책이 바로, 이만큼 장황했던 서두를 필요로 했던 <안전, 영토, 인구>이다. 이 책의 모태가 된 것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강의이다. 푸코는 대학에 미리 제출한 강의 제목을 ‘안전, 영토, 인구’로 했으나, 넷째 주 강의에서는 이 제목보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초점을 명료히 했다. 역사 이성 밖에서 늘 기존 역사 이성과 대결했던 푸코는 이 책에서도, 권력 담지자로서의 국가나 국가 권력에 의해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한다.


‘죽이기’ 대신 ‘죽게 내버려두기’

우리나라 사전에서 ‘통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지역이나 주민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18세기에 발견된 통치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푸코가 가리키는 그것은 정치경제학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동시에 뜻한다. 이전의 권력이 ‘죽게 하거나(적극적), 살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었다면 18세기에 생겨난 새로운 권력은, ‘살게 하고(적극적), 죽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다. 18세기 이전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은 전자의 권력이 칼에서 나오고, 후자의 통치성이 경제에서 나오는 만큼 큰 차이가 있다.

 

2005년, 고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18세기부터 도시들은 시장을 위해 권력의 상징인 성벽을 허물었다. 푸코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이미 18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오늘날 세계인이 목숨을 거는 ‘자기계발의 주체’도 그때부터 생겨났다. 이 책에서 푸코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주권자의 힘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이 개념화했던 일망감시 이론을 비판한다. 거기에 반해 통치성 개념에는 정치적 힘을 지닌 여하한 주권자도 없다고 정의된다. 만약 당신이 한 새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면, 그것은 고작 금지(일망감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다. 일망감시는 한층 보강된 형국으로 통치성 속에 봉합됐다.(장정일_소설가)

 

11.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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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그렇다. 데버러 로드의 <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알마, 2011). 원제는 <지식의 추구(In Pursuit of Knowledge)>(2006). 저자는 스탠퍼드 법과대학 교수로 오늘날 대학의 임무와 지식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성찰의 도마에 올려놓는다. 엊그제 구입한 책인데, 마침 자세한 서평기사가 올라왔기에 챙겨놓는다. 미국 대학의 실상에 대한 폭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향신문(11. 12. 24) 미국 대학은 세계 최고라는 신화…그 허구를 벗긴다

 

적어도 겉에서 보자면, 오늘날 미국의 대학들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다. 전 하버드대 총장인 데릭 복은 “연구조사의 역량, 전문교육의 질, 교육프로그램 혁신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자평한다. 런던타임스에 게재된 조사결과에 따르자면, 세계 최상위 10개 대학 중 7개가 미국 대학이다. 75년 전 미국에서 학사 학위 보유자는 25명 중 1명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의 만족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총체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90%에 가까운 교수들이 만족한다고 답변”했으며,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교수라는 직업을 택하겠다고 밝힌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80%”에 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데버러 로드(60)는 그 모든 현상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보기엔 오히려 모든 것이 그와 반대다. 일단 “대학 소비자들”로 불리는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이다.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지식의 추구라는 본래적 가치”는 가차없이 무너졌으며, 경쟁과 성장의 바이러스가 대학사회를 파고들면서 “대학들 사이의 순위 경쟁이 극에 달해 갖가지 부정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전시행정”을 펼치면서 “명성을 끌어올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을뿐더러, 교수들조차도 이러한 대학 문화를 내면화하면서 “개인적 명성을 쌓는 일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대학교수로 25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저자가 오늘날 미국 대학들의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 책이다. 이를테면 대학과 교수 집단에 대한 내부자의 고발인 셈이다. 저자는 “고발이라기보다 성찰”이라고 표현하면서 신중하고 온건한 문체를 구사하지만, 행간에 숨은 비판의 칼날은 예리하다. 게다가 그의 논지는 ‘한국인 저자의 책’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만큼 미국의 대학구조를 수입·추종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이 빠져있는 현실과도 거의 오차 없이 겹친다.

 

저자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대학들 간의 순위 매기기다. 그것은 유럽의 문화와 아주 다른 “미국적 특징”이다. 저자에 따르자면 “대학 순위를 발표하는 자료집의 연간 판매부수는 약 650만부”다. “무료로 배포되는 부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순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최고 행정가들의 주관적 소견,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명성, 예전의 순위 기록에 따른 후광효과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위에 따라 대학에 주어지는 이익 요소들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 행위들”이 빈번할뿐더러 “일부 기관은 사실을 날조”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정해진 순위는 결국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응시생의 수에 영향을 미치고 기관의 의사결정, 정부 지원에서의 우선 순위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순위 경쟁은 “성장주의”와 동행한다. 이제 “성장은 미국에서 대학행정의 기본 원칙”이다. “거대한 건물, 도서관 및 연구실 증축, 예산 확대, 홍보 캠페인의 확장 등”은 “대학의 힘이 커졌다는 환상”을 부여하고 “성취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거대한 제국주의적 건물 증축은 그 자체로 대학의 목적”이 된다. 그런 대결에서 밀려 서열이 낮아진 대학들은 “혁신보다는 모방에 열중하며, 스스로의 장점을 특화시켜 발전하기보다는 명성이 높은 대학을 따라하기”에 급급해진다.

거기에 “미국인이 학교에서 얻는 배움보다 지위에 더 가치를 두는 풍조”가 결합한다. 그것은 200년 전부터 이어져온 “미국의 문화”다. 고등교육을 족보나 혈통의 확보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얘기다. 저자는 “‘대학에 다닌다는 것에 미국만큼 중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나라는 없다”고 단언한다. “미국에서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과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런 관습에 물든 “고등교육 소비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최첨단 시설 등, 대학에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실린 만평을 사례로 든다. 여고생이 상담교사와 대학 진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갈 대학은) 라커룸이 넓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대학은 “구내식당의 메뉴 개선과 개인 운동 트레이너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유치하려는 대학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 간의 서열을 매기는 데 직결되며, 궁극적으로는 “대학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장학금 제도는 “점점 더 성적 중심으로 운영”된다. “장학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들에 대한 지원은 축소되고, 소득계층의 밑바닥에 속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교수생활을 해온 25년 동안 “대학 교육과 입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정부 지원은 크게 감소한 것”에 주목한다. 미국의 전체 예산에서 “고등교육에 할당되는 재정 비율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지만, 수업료는 두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 25%의 3분의 2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데 반해, 최저임금 생활자 25%의 집단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의 5분의 1만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연수입 20만달러가 넘는 가정의 자녀 중 약 40%가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입법자들은 그들만의 십자포화에 갇힌 채” 이 문제의 해결에 등한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는 대학교수들도 점점 더 “명성의 추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물론 “인지도를 향한 욕구는 학문적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긍정적이지 못한 부산물”만 잔뜩 쌓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저자는 “겉멋만 부린 문체, 난해한 주제, 과도한 인용과 참조”에 눈살을 찌푸린다. 이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교수들의 행태는 대학 콘퍼런스, 대담, 토론회 등과 같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교류와 모임”에서 드러나는데, “이목을 끌려고 애쓰는 그들의 행동은 마치 공작새의 구애의식과도 같다”고 조롱한다. “지적 깃털을 한껏 부풀려 과시”하면서 “최고 실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거나, 그 세계에 발을 디디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고민하면서 주변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지위와 명성을 향한 추구에는 “필수불가결하게 결핍”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구조적 필연이다. “신진 교수의 대다수를 공급하는 주요 대학에는 그들이 배출한 교수들이 들어설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다수의 신진 교수들은 “애초에 지원했던 곳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기관에 자리를 잡거나 겸임교수로 전락”한다. 그래서 “자기과시를 향한 집착은 종종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알력 싸움에서 승리자는 극히 드물고, 패배자는 사방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적) 자본이 자본을 낳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교수들이 명성과 지위를 향한 추구에 점점 더 매달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지식인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지만, 제대로 된 ‘공적 지식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지나친 실용주의” “과도한 자본의 지배”로 아우른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실용성은 20세기 초반부터 “필요한 것”으로 제기돼왔다. 예컨대 철강왕 카네기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물질적 부를 좇는 데 필요한 교육을 대학이 효과적으로 제공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 전역에 수천개의 도서관을 기부한 그조차도 “대학의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 대학의 목표는 여전히 “학생의 정신적, 윤리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제 대세는 바뀌었다. 저자는 “오늘날 대학은 실용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방향으로 변화”했으며, “전례없는 수준에서 대학의 자본화”가 이뤄졌다고 진단한다.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는 교수들은 이런 문제에 저항하기보다는 포섭돼 있다. 그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적인 영역의 일들에 영 무심하다. 그들은 다만 “지원비가 현저히 깎인다거나 의무사항이 늘어나는 등 자신의 이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때에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많은 대학에서 나타나는 이 “끈질긴 개인주의는 자기 영속화”하면서 “지적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책임감을 지닌 교수는 점점 줄어들고 대학에서의 양질의 교육도 붕괴”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사회를 비판의 시선으로 더듬은 저자는 “해결책은 원칙적으로는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그는 대학과 교수사회를 향해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주문한다. “대학기관과 교수협회, 재단 및 비영리 단체는 기존의 순위 체계를 개선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특히 교수들은 특정 지위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가 강조하는 요체는 “지식의 추구”라는 대학 본연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해야 “어느 정도의 방향 수정”이 가능해지며, 실용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대학 현실과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다는 고언이다. 저자는 현재 스탠퍼드대 법과대학 교수이며, 같은 대학 윤리센터의 소장으로 있다.

 

11. 12. 23.

 

 

P.S. 기사를 읽다 보니 생각나는 책은 강준만 교수의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인물과사상사, 2011)이다. 특이하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책인데(저자가 너무 다작이어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중앙일보만 예외적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중앙일보(11. 12. 03) 세계의 권력 모이는 미국 그 권력 좇는 아이비리그 학생들

 

세계 대학의 경쟁력 순위를 보면 상위권은 대개 미국 차지다. G2로 불리는 중국에서의 조사도 그렇다. 2011년 8월 중국 상하이교통대 발표를 보면 미국 대학 17곳이 ‘톱20’에 들어 있다. 미국 경쟁력의 근원은 대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아이비리그다. 국내 지식인 엘리트의 위선을 줄곧 비판해온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이번엔 아이리비그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저자는 아이비리그를 중심으로 미국 대학의 역사와 명암을 두루 재조명했다. 문헌과 언론보도를 골고루 섞어 인용·분석하는 ‘강준만식 글쓰기’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이비리그는 하버드·예일·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컬럼비아·브라운·다트머스·코넬대 등 미 동북부에 있는 여덟 개의 명문 사립대를 가리킨다. 조지아대에서 석사를, 위스콘신대에서 박사를 받은 저자는 올해 초부터 컬럼비아대에서 교환교수를 지내며 이 책을 구상했다. 아이비리그에 대한 동경이 심한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아이비리그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비리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선망과 숭배는 대단하다. 작은 지역으로 갈수록 더한데, 자식을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내면 축하 파티를 여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에 그 대학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집에 그 대학 깃발을 내걸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름만으로 ‘최고’를 상징하는 아이비리그. 스카이(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영문 이니셜)를 갈망하는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등록금 고민하는 대학생, 우리의 입시과외학원을 닮은 사설 컨설팅업체, 자녀 교육에 올인하며 헬리콥터처럼 아이를 곁을 맴돈다고 해서 붙인 ‘헬리콥터 부모’ 등도 우리 현실과 유사하다. 한국과 다른 게 있다면 미국의 평범한 서민층은 자식을 아이비리그에 보내려고 그리 심하게 애쓰지 않는데 비해 한국의 서민층은 ‘처절한 교육 투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일방적으로 미국 대학을 비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리는 배경에 주목한다. 영어는 물론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데 세계의 문제를 직접 다뤄본 당사자에게서 경험을 직접 전수받는 것이야말로 미국 대학의 강점이다. 국제사회의 뉴스 메이커들에게서 직접 얘기를 듣는 이점도 있다. 당장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살아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장점으로 꼽으면서, 저자는 이 같은 아이비리그의 매력을 ‘권력 감정’과 연관 지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각종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세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아이비리그는 세계 인력의 양성소로 자리매김된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공정성이다. 엘리트 권력 구조와 직결되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신입생 충원 관련 시비가 왕왕 벌어진다. 입학사정관 제도의 주관적 요소가 문제가 되는 것인데, 아이비리그에서 실시하면 무조건 다 좋다는 식으로 우리 대학들이 흉내내기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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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이 간 지난주 신간은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이다. 어제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이 아직 안 와서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소개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와 묶어서 다룬 기사다.

 

 

 

경향신문(11. 12. 17)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나누면 왜 행복해질까

 

‘기부’의 사전적 뜻을 보면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음’이다. 그런데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의 저자가 보기에 기부행위는 사전의 정의보다 복잡하다. “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 사이에 일어나는 기묘한 심리적 줄다리기, 가령 우월감과 열등감, 권리와 의무, 지배와 굴종, 승리와 패배 등의 요소들이 폭넓게 작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공직선거법은 선거구의 기관·단체나 시설에 기부하는 것을 제한한다. 표와 ‘교환’ 때문이 아니더라도 명예나 평판, 자기만족이나 행복을 위한 기부는 바람직할까. 4명의 철학자는 기부의 순수성과 본질에 관해 탐구했다.

 



저자는 마르셀 모스, 조르주 바타유, 장 폴 사르트르가 전개한 기부 이론을 비교·분석한다. 모스는 <증여론>으로 주로 번역된 <기부론>에서 모든 기부는 경제적 교환의 일종이며 따라서 모든 기부는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스가 근거로 내세운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포틀래치’ 의식이다. 출생과 사망, 성년식 때 벌어진 포틀래치는 성대한 축하연과 함께 모피나 사냥배 등을 선물하는 관습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같은 가치나 상회하는 가치의 답례를 해야 했다. 모스는 주거나 받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의 이유를 정령숭배에서 찾았다. 인디언들은 ‘소중한 것’에 기부자의 ‘하우(hau, 일종의 영)’, 즉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바타유는 <저주받은 몫>에서 상대방의 답례를 전제하고, 권력과 우월한 지위 등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써의 포틀래치를 거부했다. 하지만 바타유는 ‘순수한 기부행위’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기부행위의 전제는 더 까다롭다. 데리다는 “기부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기부행위를 인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기부행위로 인지하는 순간, 기부행위는 경제 개념과 연결되면서 교환행위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리다의 결론은 기부란 ‘순수 기부행위’와 ‘경제적 교환’이라는 두 개념의 모순적인 ‘병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바람직한 기부’의 대안을 사르트르에게서 찾았다. 사르트르는 애초 ‘주는 행위’를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를 ‘홀려’ ‘굴복시키는 행위’로 규정했다. 포틀래치는 ‘타인에 대한 속박’인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후 기부를 도덕정립의 핵심 개념으로 바꾸었다. 기부행위에 포함된 독성을 완화시키는 작업인데, 바로 기부자의 이름을 빼는 일이었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익명 기부’는 경제적 교환으로써의 기부행위와 순수한 기부행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대안이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익명 기부’에만 의존할 일일까. 모스는 <기부론>에서 사회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재산 일부를 추렴, 일종의 공제조합을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제시했다. 뉴기니 섬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쿨라’ 의식도 소개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3자에게 다시 선물을 주는 것이다. 섬 전체를 도는 선물의 대연쇄는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에 나오는 캐나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던의 실험은 ‘쿨라’와 비슷하다. 모르는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안부를 물었을 때 집주인이 답하면 50유로가 들어있는 봉투를 주는 실험이었다. 집집마다 내건 조건이 달랐다. 한 집은 자기를 위해 돈을 쓰고, 어떤 집은 다른 사람에게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튿날 조사하니, 남에게 돈을 쓴 사람의 기분이 더 좋았다고 한다. 책의 핵심 주장은 “단기적으로 볼 때 이기주의자가 훨씬 잘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타주의자가 훨씬 앞서간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뇌과학 등 여러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예컨대, 이타적 행동은 초콜릿을 먹거나 섹스 할 때 활성화되는 바로 뇌회로들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이타적 행위도 결국 교환행위나 이기심을 위한 행위 아닌가. 지하철 선로에 빠진 승객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행위를 결과나 이익을 고려한 경제적 행위로 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만명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지켜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신장이나 골수를 기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독일의 모금액만 6억7000만유로였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네트워크다. 온라인 에서 낯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흔하다. 저자는 “사냥한 들소의 고기나 지식의 열매를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공동체는 큰 비용을 들여 울타리를 두르는 공동체보다 모든 관점에서 뛰어나다”며 “미래의 무중력 경제에선 나눔정신과 이타심이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11.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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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역사분야의 관심도서는 조선사를 다룬 두 권의 책이다.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아침, 2011)와 김인호의 <조선의 9급 관원들>(너머북스, 2011). 함께 다룬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청와대가 디도스 금전거래를 은폐하도록 경찰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기사를 읽으면 이명박정부 또한 무슨 힘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일보(11. 12. 17) "부패한 조선 사대부" 하급관리들이 왕조 지탱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500년간 강력한 통치 체제를 유지했던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뒤따른다. 하나의 왕조를 5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단단한 사회 시스템과 인적 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근대화의 초석을 다져야 할 시기에 실기(失機)를 했다는 점에서는 거센 비판도 있다. 하지만 유교 이데올로기로 무장해 조선왕조를 500년 동안 독점적으로 장악한 선비 계층에 대한 평가는 놀랍게도 후한 편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통해 그 동안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기존의 선비에 대한 평가를 뛰어넘어 균형 잡힌 이해를 시도한다. 저자는 선비를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무장하고 경제력과 지식뿐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독점한 선비들이 지배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다.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백성들은 조선왕조 내내 가난하고 피폐했으며 왜란과 호란으로 국가의 존망이 흔들린 적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선비들은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며 "위정척사를 내세운 선비조차 조선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화의 문명을 간직한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안빈낙도의 청빈한 삶으로 그려지는 선비의 모습에 대해 저자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선비란 존재는 대부분 토지와 노비를 소유해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선비들이 노비와 전토를 소유한 재력가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5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점적 지배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렇다면 병약한 왕권과 부패한 사대부가 지배하고 있었던 조선왕조가 500년이란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역사고전연구소에 재직 중인 김인호 연구원이 '조선의 9급 관원들, 하찮으나 존엄한'을 통해 답한다. 저자는 관청과 궁궐에서 일했던 하급관원과 목자(말 기르는 관원), 조졸(조운선을 운행하는 관원), 염간(소금 굽는 관원), 오작인, 망나니 등 양반과 백성 사이에서 천시당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의 가장자리에서 나랏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역사서에 거창하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실핏줄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전문직 중 하나인 산원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땅의 면적과 수확량을 측정하고 정부 물품을 관리하는 실무자였다. 착호갑사는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호랑이를 잡는 전문 사냥꾼이자 직업 군인이었다. 호랑이 머리는 기우제에 사용됐고 가죽은 공물이자 돈벌이이기도 했다. 면포 30필이던 가죽 가격은 15세기에 80필로 뛰었고, 16세기 중엽에는 400필까지 치솟았다. 오작인은 시체를 검시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두 번의 검시는 필수이고 의심이 생기면 네 번까지 했다고 한다.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회자수' 즉, 사람을 끊는 기술자로 불렸다. 단칼에 목숨을 끊는 조건으로 사형수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가장 천시받았던 망나니들의 힘이었다.

저자는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는 이들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권력의 끝자락에서 때로는 수탈에 앞장서거나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며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비정규직 공무원인 이들은 사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나라 가장자리의 살림을 책임지며 조선왕조를 지탱했다"고 설명했다.(정민정기자)

 

11. 12. 18.

 

 

P.S. 조선 선비들에 관한 책으로는 이성무의 <선비평전>(글항아리, 2011), 백두현의 <조선시대 선비의 삶>(역락, 2011),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 등이 올해 나온 책이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올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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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지난달에 미처 챙기지 못한 기사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한국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다룬 두 권의 책을 다룬 기사다. 자본주의 비판서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서가 이주의 책들인 걸 고려하면 요즘의 한 트렌드가 보인다. 지주형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2011)과 문지영의 <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2011)도 그런 배경하에서 같이 읽어봄직하다.

 

한겨레(11. 11. 30) 한국판 신자유주의·자유주의의 두 얼굴

 

‘자유주의’가 새삼스럽게 화두다. 역사교과서를 두고서는 ‘자유주의’가 앞에 붙은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따져봐야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서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흘러오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특히 ‘서구로부터 이식된 것’이라는 피상적인 인식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적극적으로 풀이해내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때마침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개념의 ‘한국적 맥락’을 파헤친 책이 각각 나왔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지주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최근 써낸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펴냄)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추적해 정리한 책이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와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지배 블록 등으로 뒷받침되며, ‘금융화’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지은이는 이런 밑그림에다 ‘위기 관리의 과두적 지배’라는 한국적 맥락을 연결시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197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도했던 엘리트 관료들이 있었고, 이들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게 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의 지배적인 자본축적 전략이었던 ‘개발국가’ 모델이 그 생명력을 다해가는 과정에서, 소수의 관료가 주축이 되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979년 ‘경제안정화 시책’ 등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강경식 경제기획부 기획차관보,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김기환 경제기획원 장관 보좌역 등은 물가안정 및 시장개발을 중심에 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했다. 당시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된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민주화 뒤 ‘전문 관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서히 부활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한다. 강경식씨는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복귀했고, 김기환씨는 대외경제협력담당 특별대사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오늘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은이는 “한국 경제의 모습을 현재와 같이 만들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방해하는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들 소수 권위체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결정과 행위”라고 비판한다.

곧 개발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목에서 관료-재벌-초국적 자본으로 이뤄진 ‘과두 권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만을 내밀고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독과점 폐지와 민주주의의 확대”라고 강조한다. 현재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반대 집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문지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지배와 저항-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펴냄)은 자유주의의 한국적 맥락을 밝힌 책이다. 지은이는 그동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 이념’ 정도로만 치부했던 경향을 비판하며, 한국 자유주의에는 ‘지배와 저항’ 양면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배층의 공식적인 지배 이념이기도 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저항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개화기 때부터 근대국가 수립 등을 목표로 투쟁했던 지식인들의 주체적인 노력들 속에서 한국 자유주의의 흐름을 꿰어본 지은이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사유가 개인보다는 민족·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국가를 중시하고 안보의 가치에 민감한 것 등 서구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특징이 있다”고 정리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함께 복지·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나란히 설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흐름과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맞지 않는 이념’이 된다. “단순한 경제적 자유주의나 서구적 개인주의는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변질 내지는 퇴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저항적 자유주의를 반공주의에 기댄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로부터 분리시키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최원형 기자)

 

11. 12. 16.

 

P.S.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과 같은 글로벌정치경제(GPE) 시리즈로 나온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도 읽을 거리다.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한울, 2010)은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다루며,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시대의창, 2009)는 '절망으로 가는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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