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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1월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러시아 TV에서 보고 적은 감상이 주된 내용이다. 해서, 지난번 정리해서 다시 올린 <사마리아> 읽기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젯밤(21일)에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보았다. 지난주 <사마리아>에 이은 것으로, 같은 채널(REN TV)에서는 다음주에 <해안선>을 방영한다. 이 김기덕 시리즈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한국에서도 안 보거나 못 본 영화들을 모스크바에서 보고 있다(*<봄여름가을겨울>은 2004년 러시아의 한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3편의 후보작에는 그의 <빈집>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해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그러니까 김기덕은 더 이상 한국 영화계의 비주류가 아니다, 는 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최신작 <시간>을 국내 극장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하니까 그는 '비주류'가 맞다, 아직은) <봄여름가을겨을 그리고 봄>은, 내가 보기에, 이 ‘잘나가는 김기덕’의 자기 점검용 영화, 혹은 ‘숨 고르기’용 영화이다. 하도 정신 없이 영화들을 찍어댔기 때문에, 감독 본인도 자신이 도대체 무얼 찍고 있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을 법하다(더불어, 내가 영화를 왜 찍는 거지?).

해서, 그가 내린 결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는 것인데, 그게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가 된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일단, 사계(四季)를 담아야 했던 이 영화는 제작기간이 무려 1년이나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평소 3개월이면 하나씩 해치우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잔혹한 장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그는 살인장면을 삽입할 수도 있었다). ‘잔혹하지 않은 김기덕 영화’라는 게 모순형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김기덕의 불교영화?(더 리얼하게는 ‘절간[절깐]영화’?) 설마?!

지난 봄에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러시아의 영화비평가 세르게이 아나슈킨에 따르면, “그런 영화를 김기덕에게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상식적’인 판단인데, 거기에 진실이 있다. 즉,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A Film by Kim Ki Duk)’가 아니라, ‘김기덕에 대한 영화(A Film on Kim Ki Duk)’이다! 오죽하면,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김기덕 자신이 직접 출연했을까!(물론 속사정은 안성기를 캐스팅하려던 일이 불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니, 아무리 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라피에서 ‘예외적’이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외되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이 영화를 빼더라도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구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은 김기덕의 영화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 태도, 자세, 결의 등을 아무리 나열해 봐야, 그건 컨텍스트로서, 영화 ‘이전’이며 영화 ‘바깥’일 따름이다(그러니 일급의 비평가라면, 혹은 눈치 있는 비평가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일부 조심스런/성급한 비평가들의 진단처럼 김기덕의 ‘변화’를 예고하는 영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그는 <사마리아>와 <빈집> 등을 통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기덕 자신도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라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인바, <나쁜 남자>나 <해안선>에서 <봄여름가을겨울>도 ‘이행’하는 건 (영화)논리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런 게 가능한 경우는 돈 받고 영화를 찍어주는 ‘직업’ 감독들이다). 사실, <해안선>인가는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간에 겹쳐 찍었을 법한데, 그것이 암시해주는 바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역시나 그의 영화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거듭 말해서 (김기덕이 나오는) 이 영화를 (김기덕이 나오지 않는) 다른 영화들과 연관지어서 ‘진지하게’ 이해/해석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기대에 걸맞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무얼 찍은 것일까? 사계의 순환을 인생의 사계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의 ‘업보’를 순환적인 삶의 근거논리로서 제시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그러니, 등에 돌멩이를 맨 물고기나 개구리/뱀과 허리에 맷돌을 둘러매고 ‘업보’를 씻기 위해 고행에 나선 김기덕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관객이 감동을 받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모든 건 (정신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후적/소급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 봄여름가을 장면이란 겨울 장면을 찍기 위한 도구이고 핑계였을 따름이다(우리는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젊은 날의 방황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 겨울장면은 무엇이었나? 여름날에 병을 고치기 위해 물위의 절간을 찾아온 한 여자에 빠져 욕정이 이끄는 대로 스승의 곁을 떠났던 20대의 ‘기덕’(네 명의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을 그냥 ‘기덕’이라고 하자. 이름이 있었던가?)은 10년이 지난 가을날 바람난 아내를 살해한 살인자가 돼 다시 물위의 절간을 찾는다(스승은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라고 반문한다). 스승은 그의 뒤를 쫓아온 형사들에게 말미를 얻어서 그가 참회의 문구들을 절간의 나무 바닥에 다 새기도록 하고, 그 일이 끝나자 그는 잡혀간다. 그리고, 겨울. 아마도 10여 년의 형기를 살고 난 40대의 기덕은 다시 절간을 찾고 스스로 소신(燒身) 봉양한 스승의 사리를 수습한다. 그리고는 교본을 발견해서는 무술을 연마한다(한국의 전통적인 ‘절간영화’에는 없는 내용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러던 차에 얼굴을 천으로 가린 한 아낙이 어린아이를 절간에 맡기러 왔다가 되돌아가던 길에 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서 죽는다. 자신의 ‘업보’를 확인한 기덕은 맷돌을 단 줄을 허리춤에 매고 불상을 손에 들고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고행을 감행한다(이 장면과 겹쳐지는 건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장신구를 끌고서 폭포를 오르는 로버트 드니로인데,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배경음악으로는 (엔리오 모리코네 대신에)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깔리고.

화면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민요이지만, '정선아리랑'은 사실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가령 <서편제>에 쓰인 '진도아리랑'과 비교해 보아도 '정선아리랑'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한데, 왜 안 어울리는가? '정선아리랑'은 (자식 못 낳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민요인데 반해서 화면은 여인네를 죽게 한 사내/스님의 업보 씻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에 더 어울리는 건 '남자는 강해야 한다' 같은 <황비홍>의 주제가이다. 어차피 안 맞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 김기덕이 몸으로 때우는 영화이다. 맷돌을 끌고 산을 오르는 그의 ‘용맹정진’에 논리적인 해명/설명을 다는 건 부질없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가 영화를 찍어온 방식이고 앞으로 찍어갈 방식이다. 해서,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정신은 ‘불교 정신’이나 (변형된) ‘기독교 정신’ 따위가 아니라 ‘무대뽀 정신’이다. 그게 전부이다. 죽이든 밥이든 난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찍을 것입니다, 라는 결의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그에게 영화는 ‘업보’, 혹은 ‘업보 씻기’인가?).

그건 ‘말’로 될 일이 아니어서 그는 ‘몸’으로 때운다(사실, 겨울 장면에 등장한 김기덕은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절간을 배경으로 가지고 온 이유의 하나는 대사가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지 않는가. 이 테마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고안/각색해본다고 생각해보라. 적절한 대사를 쓰기도 힘들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로서 이 영화가 김기덕에게 갖는 의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우화’, 즉 알레고리이며, 이 알레고리가 김기덕이 챙긴 몫이다. 그럼 관객은? 관객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업보로 김기덕의 자기점검용 체력단련과 정신수양에 동참해야 하는가? 의외로 ‘소심한’ 김기덕이 이런 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해서 (폭력 장면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판타지적인 배경이다. (지난번에 <사마리아>를 말하면서 지적한바 있지만)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알레고리가 불가불 배제/희생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는 ‘물위의 절’이라는 가상의 회화적인 공간을 가져온다(알려진 바이지만 한국에 그런 절은 있어본 적이 없으며, ‘주상지’란 연못에 세워진 이 절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현재는 철거되었거나 철거될 예정인 걸로 안다, 그리고 벌써 철거되었다). 아마도 외국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어필하는 것도 이 배경공간이 갖는 수려한 이미지일 것이다(거기에 뭔가 심오한 듯한 불교철학과 뜻은 모르지만 애절한 듯한 주제가가 덧붙여지고, 등등).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감독 자신에 대한 우화적 알맹이(=속사정)가 ‘관광상품’으로 포장된 영화이며(실제로 세트장은 한동안 관광명소 역할을 했다고), 현학적으로 말하면, 알레고리적 이그조티시즘(Allegorical Exoticism)의 영화이다(이 영화는 ‘불교’와 무관하며 ‘한국’과 무관하다). 김기덕이 알레고리를 챙겼다면, 관객이 챙기는 건 이그조티시즘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볼 것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 한가지만 빼놓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끈 장면이 있는바, 그건 겨울에 한 아이를 데리고 엄마인 듯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처리에 대해서 러시아의 비평가도 궁금해 하던데, (한국인이지만) 사실 내가 그보다 더 아는 것도 없다. 아니, 관음보살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있는 아나슈킨과 비교해 본다면, 내가 더 무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영화를 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이 여자가 나병환자여서 당연히 얼굴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아이를 절간에 맡기려 한다고).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붙일 수 있는 논리적인 설명은 그것뿐이다. (아랍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며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이를 맡기러 온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는 건 따라서 부족한 설명이다. 또 ‘기덕’과 무슨 관련이 있는 여인이어서 얼굴을 가렸을 거라는 한 관객의 설명도 근거가 없다. 여인은 아이를 놓고 불상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떠나는데, 그 울음은 한스러움의 울음이다. 내 짐작에 그 한스러움은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갖는 한스러움이다(그는 ‘스님’에게 잘 부탁 드린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한국인의 억척스런 모정을 고려해본다면 그녀가 아이를 떼놓으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일 것이다. 해서, 그녀의 업젝션(abjection)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인바, 그건 그녀가 몹쓸 병에 걸린 경우를 고려할 때 이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무슨 업보 때문인지 아이를 두고 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스님(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 이어지는 마지막 봄 장면에서 그녀의 아이는 동자승 시절의 기덕을 연기했던 배우가 다시 연기하는바(인연의 사슬?), 거꾸로 되짚으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것이 된다. 여기서 은근히 암시되는 것은 (부친살해가 아닌) ‘모친 살해’의 모티브이다(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취인 불명>에서도 비천한 모성, 혹은 모친 살해의 모티브가 다루어졌을 법하다).

조금 넘겨짚어서 말하자면, 김기덕 영화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친 살해’(=비천한 모성)이며, 여성에 대한 그의 공격성은 그것과 연관되는 것이지 않나 싶다(이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과 견주어볼 만하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에 대해서만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이다(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몇 마디 늘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읽기’를 자극하는 ‘대상 a’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절간의 세계는 여성/모성 부재의 세계가 되었는바, 그것은 스승-제자의 세계이면서 남성들만의 단성(單性)적인 세계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아’로 버려지며, 그를 거두어 키우는 건 스승(=아버지)이고, 그는 스승의 대를 이어서 또 다른 고아를 제자(=아들)로 키워낸다. 그게 그들의 업(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작년에 나온 가장 남성중심적(혹은 남근주의적) 영화를 꼽으라면 <봄여름가을겨울>을 꼽아야 할 것이다(이 영화와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여성중심적’ 영화를 비교해 보라). 이와 비교한다면, ‘최악의 남성영화’로 잔뜩 욕을 먹은 <나쁜 남자>는 차라리 ‘심약한’ 남성주의 영화라고 해야 옳다. 그 영화에서 한기(조재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대생을 윤락가에 넘기면서 ‘나쁜 남자’를 자임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 욕망의 대상(‘대상 a’로서의 여성)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열적/히스테리적 주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형편이 돼서 이 여성을 숭배하며 모든 걸 갖다 바치는(백만 송이의 장미?) 행위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이 동일한 태도의 이면에서 ‘여성주의’를 발견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한 여자를 숭배하거나 학대하는 남자는 ‘동일한 남자’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의 ‘패악’은 그러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이고 가면일 뿐이다. 결국 <나쁜 남자>에서 패배하는 건 여대생이 아니라 한기 자신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는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이기도 하다.

여자는남자의미래다

사실 올해 나온 또 다른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이 영화 또한 최악의 反여성주의적 영화로 꼽히는 모양인데, 왜 맨날 (담대한 남성들은 놔두고) ‘가련한 남성’들만 얻어맞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여성 관객 일반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엘리트’ 여성주의 비평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그런데, 배용준의 근육질 몸매에 환호하고, 디카프리오의 미소에 숨 넘어간다는 관객들도 (일부 비평가를 포함한) 여성 관객 일반 아닌가? 아마도 내가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여자들도 남자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올해의 남성영화니 여성영화니 하는 걸 선정하는 건 그저 그들의 알리바이 정도라고 해두자(참고로, <낮은 목소리>의 여성감독 변영주가 만든 <밀애>는 전혀 ‘여성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여간에, 전혀 잔혹하지 않으면서 ‘담대한’ 남성주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에서는 두 여자가 소리 없이 죽어나간다. 하나는 30대의 기덕이 죽인 아내(여름 장면에 등장했던 그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그가 ‘간접적으로’ 죽이게 되는 한 여인이다. 아내의 죽음/살인은 스승이 보는 신문쪼가리의 기사를 통해서 전해질 뿐 영화 속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얼굴 없는 죽음’이다). 스승은 자신이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하는 제자에게 “그런 줄 몰랐더냐?”(이건 그 자신도 젊은 날에 겪어보았다는 얘기다)라고 다그치고 죄업을 씻는 방도를 일러준다. 아내를 죽인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겨울 장면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 또한 정말로 찍소리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이 또한 ‘얼굴 없는 죽음’이다). 그 죄업을 씻기 위해서 기덕은 맷돌을 끌고 산을 탄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러니까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은 이 두 남자(결국 같은 남자)의 글자 새기기와 산 타기이다. 거기에 비하면, 두 여자의 죽음은 일도 아니다! 이 어찌 담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의 죄업을 씻은 기덕은 마지막 봄 장면에서 평정한 마음으로 동승(童僧)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바, 스님 기덕은 화가, 즉 예술가이고 (알레고리적으로) 영화감독이다. 모든 죄업은 그가 그러한 평정과 예술가로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과정이었을 뿐이다. 여인네의 유혹/죽음은 그 한 코스에 불과했던 셈. 그리고, 이러한 자기 알레고리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은 단성생식(單性生殖)에의 판타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그의 업보는 스승-제자, 곧 남성-남성의 관계를 반복하기 위한 핑계거리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스승-제자 관계가 이 영화적 세계의 본질이고 ‘진리’이다. 그것만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고정불변하는 진상(眞相)이며, (여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속세의 환상(幻相)일 따름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러한 결말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섬뜩한(uncanny)’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이러한 절간의 세계보다는 나처럼 속세를 더 사랑한다면 말이다…



P.S. 지난 11월 12일자 <이즈베스찌야>지에 실린 김기덕 인터뷰를 여기에 정리해서 옮긴다. 인터뷰한 통신원(기자)는 키릴 알료힌이다. 사전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독학-영화감독 김기덕은 분기마다 영화를 찍어서 개인적으로 국제시장에 영화를 공급하는데, 이번 가을에 두 차례 모스크바에 올 예정이었다(한국영화제 개막식과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빈집> 시사회 때). 하지만, 그의 빡빡한 작업 스케줄 때문에 그의 방문은 취소되었다.(*표시를 한 건 나의 군말이다.)

빈집

이즈베스찌야: <빈집>은 2004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당신의 네 번째 영화이다(*짐작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집>과 <해안선> 혹은 <나쁜 남자>인 듯하다). 당신은 영화를 무척 많이 찍는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김기덕: 특별한 비밀은 없다. 나는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작업할 따름이다. 한 영화를 끝내면 나는 곧장 다음 영화로 들어간다. 이건 샐러리맨들이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구상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달려든다. 그게 ‘영화감독이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즈베스찌야: <빈집>의 주인공은 파리의 아가씨 아멜리를 닮았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김기덕: 아직 <아멜리>를 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영화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진 않는다. 영화의 거리[꺼리]들은 생활에서 얻은 것들이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빈집>을 관객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될까(*따라하게 될까) 두렵지는 않는가?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한번 맛보기 위해서 여러 집들에 잠입하는 걸로 시작한다(*나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바, 거기에 준해서 옮겼다).

김기덕: 나는 아직 나의 주인공들을 닮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한 미국 여자가 빈집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게 살더라는 얘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빈집>을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2년간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다. 유럽 영화, 혹은 프랑스 영화가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는가?

김기덕: 카메라를 잡기 전에 내가 본 프랑스 영화는 다해서 세 편이다. 때문에, 내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가진 생각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즈베스찌야: 비평가들은 해마다 당신이 최고작을 찍었다고 말하곤 한다. 처음엔 <나쁜 남자>에 대해서 그런 평을 쓰더니, 그 다음엔 <봄여름…>에 대해서, 지금은 <빈집>에 대해서 그렇다고들 한다. 당신 생각에는 어느 작품이 최고작인가?

영화-악어 (1996)의 장면들

김기덕: 나의 영화들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로 닮았다. 그들은 전부 내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나에게 특별한 선호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악어>를 지목하겠다(김기덕의 데뷔작으로 익사자들의 시신을 찾아주고서 유족들에게 돈을 받아 챙기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 이즈베스찌야).(*이런 주석으로 봐서 <악어>는 아직 러시아에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특이하게도.)

이즈베스찌야: 당신의 성공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김기덕: 나는 물론 해외에서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 영화를 보지 않는다. 설사 본다고들 하더라도 너무도 이해들을 못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추한 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러시아언론과의 인터뷰 사진.



이즈베스찌야: 러시아에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블록버스터들이다(*얼마 전에 <쉬리>가 또 TV에서 방영됐다. 1년에 최소한 네댓 번은 나오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몇몇 감독들이 실제로 서양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 관객은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몇몇 감독들은) 미국 영화를 모방한다(*사실 강우석이나 강제규 감독의 영화보다는 김기덕의 영화가 흥미롭다).

이즈베스찌야: 예전에 당신은 세계화 반대론자였다. 지금 당신은 세계시민이 되어 각종 영화제들을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화를 판다. (세계화 반대론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은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그렇다. 나는 예전부터 세계화에 반대해왔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계문화는 발전할 수 있고 다양해질 수 있다(*참고로, <복수는 나의 힘>에서 보듯이 당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냐는 다른 인터뷰에서의 질문에 박찬욱은 어떤 면들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감독의 견해는 ‘상식적’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이 러시아에서 뭔가를 찍을 거라고들 말한다. 소문일 뿐인가?

김기덕: 나는 자주 유럽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장애물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저예산으로 작업한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에서도 한번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당장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현재의 지명도라면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영화 <활>(2005)의 러시아판 포스터.



P.S.2. 거기까지이다. 기사로는 3단짜리 인터뷰이지만,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분량은 소략하다. 오늘 산 책의 하나는 <‘자신들’ 속의 ‘타자들’: 세계화와 현대 영화에서의 문화간 융합>이란 제목의 신간 영화비평서인데(허름한 모양새에 비해서는 비싼 책이다. 116쪽에 6,000원쯤이니까), 6편의 평론 중에서 제일 첫머리에 실린 것은 세르게이 아나슈킨의 김기덕론이다. 제목은 '김기덕: 추방자들의 복수'.

‘추방자’(=추방된 자)란 뜻의 러시아어 ‘이즈고이’는 ‘추방자’ 혹은 ‘천민’을 뜻하는 영어 ‘파리아(pariah)’의 번역어로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즈고이’란 말은 ‘호모 사체르’(아감벤)에 대응하는 말이면서 ‘서얼’(고종석)이라 옮겨질 수도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낙오자란 의미에서) ‘떨거지’라고 옮겨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계급적인’ 배경을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견지할 때, 김기덕의 영화는 <악어>나 <수취인 불명>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작’이 된다(<나쁜 남자>도 부분적으론 그런 함의를 갖는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완전히 제거/거세돼 있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계급적 배경이다(해서, 남근주의적인 이 영화에서의 ‘남근’은 말 그대로 ‘결여의 기표’이자 순수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허울뿐인 ‘문간’처럼). 그런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문제작’이 되기엔 많이 모자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주류적 코드를 상징하는 ‘대종상’이 주어진 것은 역설적이지만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대종상은 김기덕의 ‘뛰어난’ 영화나 ‘문제적인’ 영화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더불어, 대종상은 ‘관광/홍보 영화’를 편애한다).

하지만, 그런 ‘추방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신작인 <빈집>은 그가 자신의 ‘본령’으로 되돌아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사가 좀 부자연스럽다는 평(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며 모두 본 룸메이트의 평이다)에도 불구하고 반갑다(*이 영화를 나중에 본 감상은 따로 올려놓은 바 있다) . 그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미학이 아닌 사회학/정치학의 자리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죄다 반면교사(反面敎師)거리들이지만, 한국 영화계에는 미학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추락한 감독들이 여럿 된다. 화엄경을 들먹이다가 고꾸라진 감독을 비롯해서. 거꾸로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이나 돈 되는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걸 오래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홍상수처럼 속물적인 걸 내내 붙들고 있거나. 한편으로, 똑같이 판타지를 다루지만, 김기덕을 한참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이 있지만(그는 김기덕과 달리 디테일에 강하다), 그는 김기덕만큼 다작(多作)이 아니기에 그의 영화를 기다리다가는 목이 빠지겠다. 그러니 김기덕식의 다작에도 장점은 있는 것이다.

06.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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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중순에 '사마리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다. 물론 러시아 TV에서 방영된 <사마리아>를 보고 느낀 소감을 주로 적은 것이었다. 당시엔 잡담들까지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만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뤽 베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영화의 ‘거장’으로 확실하게 대우 받고 있는 사람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이다. <도그빌>의 제작노트가 올해 처음 나온 영화비평총서의 하나로 <독일의 가을>을 찍은 독일 감독 클루게의 책과 함께 지난 여름에 나오기도 했고, STS 채널에서는 지난주까지 ‘봉까르바이’에 이어서 이번주부터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방영한다. 거꾸로 봉까르바이(왕가위)는 현재 홍콩영화, 혹은 중국어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이고,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김기덕이다.

나는 김기덕의 최신작인 <빈집>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 외에도 몇 편을 보지 않았지만(내가 본 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나쁜 남자> 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보지 않은 건 <수취인 불명>,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이다, 는 건 그때 얘기이고, 나는 거명된 영화들을 모두 보았다) 일요일 밤에 본 <사마리아>는 일종의 ‘누빔점’으로서, 그의 영화들을 소급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는 영화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마무리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국내외의 과대/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사람의 ‘영화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따라서 나의 주된/한정된 관심은 그의 영화 ‘텍스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판타지, 혹은 트라우마(외상)란 무엇일까에 쏠린다.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와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다. 그건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홍상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실의 디테일(혹은 그가 ‘표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김기덕만큼 디테일을 과소평가하는 감독도 드물다(그 점이 나로 하여금 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영화들을 저예산으로, 속성으로 찍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많은 예산과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김기덕은 블록버스터나 ‘세밀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 우리가 꿈(=판타지)을 꿀 때 사소한 디테일들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다만, 몇 가지 상징만이 중요하게 사용될 따름이며, 그것들의 의미작용만이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플롯과 몇 가지 상징, 그것이 김기덕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재료의 전부이다. 11일회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사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원조교제’의 디테일이 다 생략돼 있다. ‘더럽다’는 대사는 자주 나오지만, 정작 더러운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그런 디테일은 감독의 판타지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타지를 구하기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다. 대신에 몇 가지 자극적인 상징(이 상징의 가시적 등가물은 ‘피’이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희생’을 보상/은폐하고자 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소위 과격한 장면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여자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카바하기 위해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희생된 디테일과 대체된 상징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전자의 편에 서 있지만(나는 디테일을 편애한다, 해서 영화에서의 판타지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후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걸 봤기 때문에, 디테일한 대사들은 놓쳤지만, 사실 그런 디테일 정도는 김기덕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대범한 사람이니까(그는 해병대 출신이 아닌가?!).



먼저, 줄거리. 여진과 재영이라는 두 여고생이 있다. 여진은 망을 보고 재영은 몸을 판다(걔네들 말로 ‘발랑 까진 것들’이다). 소위 원조교제인데, 명분은 유럽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란다. 그러다가 재영은 단속 나온 경찰들을 피하려고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고(1부), 여진은 그런 재영을 ‘위로’하기 위해 유업(遺業)을 이어서 다시 몸을 판다. 아니, 이번엔 아저씨들을 ‘산다.’ 돈을 지불/환불해주는 건 여진이니까. 그런데, 그런 행각을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가 뒤쫓게 되고, 그는 딸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에게 복수를 하는바 끝내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2부). 아버지는 여진을 데리고 죽은 아내/엄마의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친다. 그리고 아직 소나타를 서툴게 모는 여진을 홀로 남겨놓은 채 그는 동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된다(3부). 이 1, 2, 3부의 타이틀은 각각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이다.



그럼, <사마리아>는 “딸의 원조교제를 목격한 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표면적인 플롯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영화는 너무 싱겁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답지도 않다(그런 복수라면, 오히려 박찬욱에게 더 어울리는 테마 아닌가?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표면적인 줄거리를 좀더 세심하게/삐딱하게 읽는 것이다. 즉, (1)여진과 재영의 ‘원조교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2)‘딸(여진)과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가? (3)‘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 다시 해명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영화는 재영의 바수밀다 얘기로 시작된다. 인도의 창녀인데, 같이 잔 남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나 어쨌다나. 그러니까 바수밀다는 기독교의 ‘성녀’인 셈이다. 창녀이면서 성녀(혹은 보살, 아님 부처?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이르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다 창녀이거나 성녀이며, 그건 그의 기본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판타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성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텅 빈)‘실재’를 가질 수 없는데, 그는 언제나 못 미치거나 넘어서기 때문이다.

라캉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비유로 든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있지만, 정확히 거북이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과소평가하거나(창녀) 과대평가한다(성녀). 그러니까,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창녀와 성녀는 서로의 이면일 뿐이며, 대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바수밀다냐 사마리아냐”가 아니라, “바수밀다나 사마리아나”이다. <사마리아>의 1, 2부는 그래서 잉여적이면서 불가피한 반복이며, 판타지의 경제 안에 있다. 재영은 아저씨들한테 돈을 받고 섹스를 했지만, 여진은 돈을 (되갚아)주면서 섹스를 한다. 둘을 합산하면 등가교환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가교환으로서의 “성관계란 없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동시 오르가즘이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관계이다.



해서 원조교제라는 한국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 <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신화, 혹은 판타지이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 ‘아빠’이다(당연한 일이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영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고, 여진이 친구를 대신에서 원조교제에 나선다는 설정은 이 문제적인 아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한, 무대화/장면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때 아버지는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이다. 먼저, 아빠이면서 엄마. 부녀가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아빠는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고서 ‘어수룩한 김기덕이 또 한 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40대 중반의 강력반 형사인 아빠가 앞치마를 입고 밥을 차리고 또 그걸 벗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건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 영화를 다 보고 뒤집어서 생각하니까 ‘의도적인’ 설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두른 ‘앞치마’는 그가 집안에서 ‘엄마’를 대신하고 있다는 기호인 셈.

그리고 딸이면서 아내. 역시 같은 첫 장면에서 아침을 차린 아빠는 여진을 깨우기 위해서 헤드폰을 머리에 끼워주고 달콤한 음악을 들려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건 남편이 연인으로서의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아빠에게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가정에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이 각각 아버지와 딸로서의 제자리를 찾으면서 끝난다. 그러한 자리 찾기에 대응하는 것이 '판타지에서 현실로'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인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여진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가 딸을 바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미행하면서, 같이 잔 ‘아저씨들’한테만 분노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딸을 제지하지 않는가? 딸이 충격을 받을까봐서? 그런데, 여진의 원조교제는 죽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애꿎은’ 아저씨들 또한 여진의 연락을 받고서 그녀의 바수밀다 판타지(=재영 판타지) 혹은 바수밀다행, 즉 ‘보살행’에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제정신이 좀 아닌) 여진이 아버지에게 발각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정을 아빠가 몰랐다고 해도, 딸이 수첩에 적힌 아저씨들 모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까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딸을 아끼는 아빠의 ‘상식적인’ 행동인가?(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마도 보다 적절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게서 딸이자 연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한 욕망이 금지된 욕망이자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그 금지된 욕망이 너무도 쉽게 구현된 현실이었다. 그가 당혹과 매혹을 동시에 느낄 법한 것은 판타지와 현실의 그러한 일치, 혹은 근접조우이다. 그는 여진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판타지를 대리적으로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아저씨들(혹은 자기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에게 새겨진 ‘법’(상징적 질서)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게 아빠의 두 얼굴이다. 자상하면서도 아주 잔혹한.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아빠’ 또한 다른 딸들에 대해서는 아저씨들이 여진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시선을 던졌을 거리고 얘기했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금지된 욕망, 금지된 향락에 대한 자기징벌인 셈. 그가 딸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의 주체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것은 이 욕망/향락의 주체를 제거함으로써이다. 화장실에서 그가 죽인 아저씨는 자신의 분신, 곧 자기 자신이었던 셈. 더불어 그를 대신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또 다른 아버지/아저씨를 상기해보자. 요컨대, 그가 ‘아버지’로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즉 ‘아빠’에서 ‘아버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죽음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이다. 모든 판타지의 끝은 죽음인 것(혹은 판타지에 의해서 유예되는 것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2부이다.

3부 소나타는 ‘현실’의 장면이다. 부녀가 먼저 찾는 것은 아내/엄마의 무덤이다. 그들이 서로 대행해왔던 엄마/아내는 죽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는 아빠는 싫다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한다(이게 중요하다!). 이제껏 그는 딸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금지해본 적이 없을 듯한데(즉, 그는 ‘부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역할모델로 찾은 것이 친구인 재영이다), 이번만큼은 고집대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강요에 뒤이어서야 강가에 세워둔 차에서 잠깐 잠이 든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매장하는 꿈을 꾼다(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설정이다). 즉, 그녀에겐 더 이상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닌 (억압적인) ‘아버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녀에겐 ‘죄의식’이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은 아빠의 연인(=판타지)이 아닌 딸(=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빠가 헤드폰을 끼워주던 ‘연인’으로서의 여진은 죽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진의 꿈은 2부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죽게 하거나 죽임으로써 판타지로서 벗어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이 꿈의 주체는 아버지여도 무방하다. 그는 ‘연인’으로서의 딸을 죽임으로써 ‘딸’로서의 딸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 딸은 어떤 딸인가? 바수밀다나 사마리아 같은 신화적 판타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아니라, ‘초급 운전자’로서 자기 앞가림도 아직 제대로 잘 못하는 10대 소녀이고, 적당히 어수룩하면서 폼잡으며 멋부리는 고딩이다. 한마디로 (약간 귀여운) 멍텅구리(nothing)이다.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법’이 개입돼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실정법으로서 살인자인 아버지를 잡아가는 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운전하는 법’으로 가시화된 ‘아버지의-이름’이란 법이다(두 법은 같은 방향의 길을 간다). 이러한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딸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잠식하고 있던 판타지(상상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다.



나는 영화 <사마리아>를 얘기하면서, ‘바수밀다’나 ‘사마리아’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감독 자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설마 싶지만, 그건 자신의 속임수에 그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재영이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며 돈을 모은다는 말을 ‘진담’으로 믿는 수준의 속임수이며 핑계이다. ‘유럽’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유럽이라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차폐막 삼아서 가리고자 했던 건 아마도 죽음충동일 것이다. 아마도 재영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이 소녀가 ‘더러운’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 밝은 면만 보는 이유이리라). 그러니까 단속에 쫓겼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의 원조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영의 죽음은 이 소녀에게 자신도 금지된 쾌락, 보살행에 나설 핑계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러한 비행(非行)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제지해 줄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이다(수렁에서 건진 내 딸!). 그러니까 여진이 기대하는 대타자의 시선은 죽은 재영의 시선이 아니라 (엄마가 아닌)‘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버지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영화는 그 시선의 욕망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부녀의 자기 자리 찾기에 대한 것이다...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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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5-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죽이네요. 최곱니다!

로쟈 2006-05-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외로운 발바닥 2006-05-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방송을 통해 중간중간 보아서 거의 다 보긴 했는데, 그냥 원조교제에 관한 이상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역시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

로쟈 2006-05-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뜻'까지는 아니고, 그냥 '의미가 없지 않은' 정도입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영화일 수도 있구요...

kleinsusun 2006-08-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김기덕 기사를 보고, 김기덕에 대한 다른 기사들을 찾아 보다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어요. <사마리아>를 보고 뭔가 위악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냈다는 김기덕의 e-mail은 아무리 봐도.... ㅠㅠ

로쟈 2006-08-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은 그 자신이 본래 자학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구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쓰레기이면 쓰레기만도 못한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리안 감독의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비디오로 빌려다 보고 오늘 반납했다. 지난주에 빌렸으니까 며칠 연체했다. 그건 내가 풀타임으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띄엄띄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났던 것처럼 나는 영화를 띄엄띄엄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그건, 영화속 에니스의 대사처럼, 내가 마음놓고 영화를 볼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해서, 나는 카우보이처럼 건성건성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다음 기회로 넘기면서).

역시나 영화는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감상과 함께 내게 남겨진 건 (아마도)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과 20년간 서로를 그리워한 두 남자의 과묵하고 절제된 감정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그러한 절제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여 나는 영화를 본 후에 찾아본 몇 가지 리뷰들 가운데 한 편 정도를 옮겨오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몽롱하게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에서 궁극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리안은 이야기를 범우주적인 로맨스로 만들어낸다. 하긴 <타이타닉> 이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쓰는데,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평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바로 그런 점이 내겐 좀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고작 사랑 이야기'인가, 라는 푸념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마찬가지이다(나는 <타이타닉>을 아직도 보지 않았다).

몇 개 읽어보지 않은 영화평들 가운데,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씨네21(06. 03. 15)에 게재됐던 김소영 교수의 '가족을 지키려는 카우보이의 다짐, <브로크백 마운틴>'이다(이 칼럼을 고른 건 '고작 사랑 이야기' 범주를 약간은 벗어난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하고 있어서이다).

-1963년 여름 그들은 양치기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간다.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길렌홀)이다. 8월에도 산은 춥기만 하고, 먹을 것은 콩 통조림뿐이지만, 돌보아야 할 양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양치기인 이들은 피 끓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중인지라 양치는 일보다 다른 데 관심이 많다. 과묵하다기보다는 말을 요령있게 못하는 에니스와 촉촉하고 정감어린 시선을 가진 잭은 양을 잡아먹어볼까 하는 궁리도 나누고 그러다 사냥을 해(여전히 큰 동물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영화 관람이나) 상당한 양의 육포를 말리기도 한다. 와중에 에니스는 성장기 자신의 가족사의 고통을 잭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다 게이 카우보이 무비로 알려진 것처럼 둘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의 허심탄회한 섹스 후일담은 모두 난 원래 퀴어가 아니거든! 이다. 그렇게 육체의 고백과는 다른 언어적 고백을 털어놓고 나서도 이들은 남자친구로서의 가까움만이 아니라 게이로서의 성적 친밀성을 나눈다. 그 뒤로도 20년간이나. 와중에 하늘 아래 낮고 융성하게 깔린 와이오밍(실제로는 캐나다 로키)의 흰 구름과 푸른 산, 녹색 풀 그리고 은회색의 양떼들은 미니멀한 그러나 존재적 무게감을 가지고 프레임을 채울 듯이 비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만들곤 하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사랑 때문에 어떤 비극성에 갇혀버리게 되는 인물을 숏의 프레임 안에서 다시 건축물로 구성된 프레임으로 가두고는 그 뒤쪽으로 구름이 흐르게 한다.

-에니스는 같은 성, 동성간의 사랑 때문에 사회적 터부가 만들어놓은 운명에 갇히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생의 다른 흐름을 느끼고 타게 되는 인물이다.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잭과 헤어진 뒤 길을 걸어가다 배를 움켜쥐고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양쪽으로 기둥이 막아서 있고, 프레임은 다시 협소하게 재프레이밍한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와 시선을 보내자, 에니스가 뭘 보냐며 소리를 지른다. 프레이밍에 갇힌 사회화된 운명의 잔혹성이 의미화되는 이미지다. 동시에 주저앉은 에니스의 머리 위로 낮게 깔려 있는 저 들판의 구름 그리고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기울어진 나무는, 그럼에도 어떤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내포한 관계를 선명하게 예시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산에서 막 내려온 에니스가 두려워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프레임 안에 각인된다. 징후적이고 예시적이며 여러 감각을 건드리는 완벽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 장면과 대위점을 이루는 것이 마지막 숏이다. 자신의 딸(아내의 이름을 따라 알마 주니어다)이 결혼을 알리고 다녀간 뒤 에니스는 알마 주니어가 블루진 재킷을 두고 갔음을 발견한다. 건네주려고 하나 딸은 빌려 타고온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떠나가버린 뒤다. 에니스는 옷장을 열어 딸의 옷을 넣으면서 자신과 잭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담은 블루진과 셔츠 그리고 브로크백의 이미지가 담긴 엽서를 본다. 그리고 청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예의 그 말을 뱉는다기보다는 삼켜버리는 어투로 “내가 맹세한 것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그가 옷장을 급히 닫기 때문에 마치 갑자기 브로크백 마운틴 엽서쪽으로 줌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착시 효과다. 옷장 문이 닫히고 난 뒤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밭이 보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풀들이 흔들리고 있다. 전반, 흘러가는 구름에 대한 제한된 응답이다.

-영화는 대부분 워낙 미세하게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구하게 설명을 붙이자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에니스의 옷장 속에 보관되는 세벌의 옷, 잭, 딸 주니어 그리고 자신의 옷이 이 영화에서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의미의 친족관계를 이루는 연쇄들이다. 그리고 이 연쇄가 때로는 족쇄가 되고 혹은 자유와 사랑, 웃음이 되어 이들의 생애에 굴곡과 흠집을 만들어낸다. 에니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잭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딸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이 분열된 사랑과 책임감이 잭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상처내긴 하지만 영화의 초반 에니스에 의해 그의 성장기가 이야기됨으로써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잭이 알마 주니어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은 그의 언어가 그나마 부분적이나마 소통적 언어로 기능한다. 에니스는 아내 알마에게만 아니라 이혼 뒤 잠시 상냥한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팻시에게도 말이전혀 안 통하는 고집불통처럼 군다. 특히 이미 딸 둘을 둔 뒤라 아내 알마가 조심하자고 잠자리에서 말하는데도, 내 아이를 갖기 싫으면 떠나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말이 아니라 폭언이다. 또 참고 참던 알마가 이혼한 뒤 에니스에게 낚시하러 며칠씩 외출하고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송어 한 마리 들고 온 적이 없다며 ‘퀴어 케이스’를 추궁하자, 자신과 잭의 관계를 모르면서 떠들지 말라고 주먹질 일보직전이다.

-착하기 그지없는 웨이트리스 팻시가 울면서 “에니스 델 마, 난 정말 당신을 이해 못해!”라고 털어놓자 “괜찮아. 뭐”라고 말을 흘리는 장면은 팻시의 반응 숏이 암시하는 것처럼 ‘차라리 목석도 너보다는 나을 거야’(실제 대사는 다르다)다. 영화에서는 잭이 좀더 분명한 동성애 커플 관계를 요구하는 것 같으나, 결혼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이성애 관계가 불가능한 사람은 에니스다. 그러한 에니스를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의 교훈은 절대 동성애 커플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9살인 에니스의 손을 잡고 가 황망하게 버려져 있는 게이의 주검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급격하게 처리된다. 또 잭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경과를 잭의 아내 로린에게 들으면서 에니스는 로린의 교통사고라는 설명과는 달리 잭이 남자들에게 맞아 죽는 끔찍한 린치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미묘한 톤에 견주어서 생각해보면 이 플래시백이나 자의적 구성으로 보이는 판타즘 장면은 과격하고 충격적이다. 이와 비견되는 것이 영화의 편집 방식이다. 역시 두번의 파격적 몽타주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에니스가 알마에게 애널 섹스를 시도하고 알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뒤 잭이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다가 떨어지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연결은 자명하긴 하지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수려한 과묵함이라는 스타일과 세팅 속에서 강한 성적 충격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에니스의 이혼 소식을 듣고 이후 함께 살 것이라는 기대로 열몇 시간을 차를 몰아 달려온 잭을 에니스가 딸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돌려보내고 나서 일어난다. 잭은 멕시코로 가 성매매 거리에서 게이를 발견하고, 함께 골목으로 사라진다. 바로 거기에 연이어 나오는 장면이 잭 가족이 함께 먹을 홀리데이용 칠면조가 서빙되는 것이다. 앞서 부부간의 애널 섹스와 퀴어 로데오의 연쇄 그리고 게이간의 성매매와 가족 파티용 칠면조의 연결, 잭이 당한 교통사고를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 범죄, 린치로 치환시키는 판타즘 장면들은 스타일적으로는 과묵한 이 영화의 깊은 성적 불안과 한 인간과 그 주변을 비극에 이르게 하는 소란한 오인과 오판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위의 부분들을 영화에서 다소 예외적인 장면으로 장치화해 그 충격들을 일정하게 거둬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게이 커플 관계, 반려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잭보다 그 선택을 끝까지 거부하는 에니스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의 동성 파트너가 있으나, 딸들의 양육비를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 적어도 큰딸이 결혼할 때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 에니스의 모습은 (게이지만) 그나마 책임감있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이 영화는 커플로, 반려로 살 수 없어 불행했던 게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이 더이상 부서지지 않도록 애쓰는 영화이기도 하다.(*사랑 이야기'에만 주목한 평자들이 주의하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칼럼을 옮겨온 것이기도 하고.) 딸 알마 주니어가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하자, 에니스는 엄마와의 가족관계를 지키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영화는 물론 관계의 비지속성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지만, 또 망가진 것을 다듬어 어떻게 생존시킬 것인가에 대한 (일부 해체되었으나 여전한) 가족드라마이기도 하다. 가족과 관련해선 리안의 전작 <결혼 피로연>과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크리스 베리가 한국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과 미국 게이영화들의 비교를 통해 지적했듯이, 동성애를 다루는 미국영화들이 너무 일찍 가족이 야기시키는 문제를 버렸다면, 리안은 버리고 떠나간 부분을 다시 정성스레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 시야가 향하는 곳이 이성애 부부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루하지는 않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이런저런 문제들에 사려깊고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으나 정감이나 열정 그리고 연륜은 좀 떨어지는 약간의 어중간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절제된 형식미의 이면이 이런 어중간함이 아닌가 싶다.)  배우로서의 에니스는 앞서 말했던 웨이트리스 팻시와 춤을 추면서 두손을 호주머니에 어중간하게 넣고 몸동작을 굼뜨고 어색하게 할 때 가능성이 많은 배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우보이와 상처받은 게이 역할을 잘 오가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문제는 영화 내내 수염을 기르건 약간의 주름을 그려넣건 간에 나이가 전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10대 후반에서 39살까지의 나이 먹음의 낌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올 법한 체념과 지혜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나이 먹지 않고 계속 청춘 게이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준 선물일까? 아니면 게이 하위문화로의 호소일까?

06.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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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06. 05. 10) '이-만-희 전작을 보고 싶다' 김은형 기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으로 재조명했던 고 이만희(1931~75) 감독의 전작전 ‘영화천재 이만희’가 12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효인) 고전영화관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거장 감독의 대표작들을 상영하는 회고전은 종종 열려왔지만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에서 상영됐던 10편을 포함한 총 22편이 상영된다. 엄밀히 말해 이번에 상영되는 22편이 이만희 감독의 ‘전작’은 아니다. 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한 이만희는 생전에 51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대표작 <만추>를 비롯해 이십여 편의 필름이 분실되거나 소실됐기 때문에 이번 상영작들이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부다.

상영금지된 지 37년만에 지난해 발견된 ‘휴일’로 개막
데뷔작 ‘주마등’ 대표작 ‘만추’ 등 20여편은 필름 없어

1931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난 이만희는 한국 전쟁 뒤 연기자를 꿈꾸며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단역배우와 조감독 생활을 거쳐 61년 감독 데뷔를 했으며 62년 스릴러 영화인 <다이알 112를 돌려라>로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해 연출한 대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끌어올렸으며 볼 거리로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당시 한국 영화감독에게는 두통거리 숙제와도 같던 반공영화를 제작하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7인의 여포로>(1964)에서 북한군이 인간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됐으며 당국의 검열로 누더기가 된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 큰 상처를 입자 이번에는 “진짜 반공영화를 만들자”고 작심해 만든 <군번없는 용사>(1966)역시 북한군의 제복이 너무 멋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만희는 당대 감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모든 다른 종류의 영화들에서 자기의 작가적 인장을 새긴 인물”이라고 평한 부산국제영화제 이만희 회고전의 기획자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말대로 이만희 감독은 스릴러에서 전쟁 스펙터클, 문예영화, 웨스턴, 멜로드라마까지 종횡무진했다. 때로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때로는 리얼리즘 미학을 구사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일구어갔으며 편집 도중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삼포 가는 길>(1975)을 유작으로 남겼다.

이 가운데 아직 필름을 찾지 못한 <만추>(1966)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당시 한국영화로는 파격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었던 이 영화는 상업적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작가주의로 진입했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어둡고 절망적인 감독의 시선은 <휴일>(1968)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 영화는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라는 이유로 개봉이 무산됐다가 지난해 영상자료원 필름보관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완성된 지 37년만에 관객에게 처음 공개됐다.

<휴일>을 개막작으로 시작되는 전작전에는 <검은 머리>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의 계단> <쇠사슬을 끊어라> 등 지난해 부산에서 상영된 대표작 외에도 <여자가 고백할 때> <생명>등 잠깐 개봉했다가 몇십년 동안 창고 속에 보관되어온,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대거 상영된다. 또 이만희와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 백결, 촬영감독 이석기, 배우 백일섭, 양택조씨와 김경형, 김지운, 류승완, 정지우, 허진호 등 이만희 감독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현역 감독들이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1960년대를 위하여' 남동철 (05. 12. 23)

최근 CJ-CGV가 발표한 2005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자료를 보니 올해 극장관객수는 1억4천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올 상반기엔 관객수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지표가 나왔으나 하반기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호조를 보이면서 영화시장이 9년 연속 성장을 멈추지 않게 됐다고 이 자료는 덧붙였다. 산업의 흐름에 관심있는 관계자들이라면 이런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성장폭이 줄고 있다는 점을 우려할 수 있겠으나 크게 봐서 한국영화산업은 아직 괜찮아 보인다. 새삼스럽게 한국영화산업이 호황이라는 걸 강조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관심을 끈 것은 최근 30년간 최고라는 올해 극장관객수가 역대 관객수 기록에선 고작 7번째라는 사실이다. 1969, 1968, 1970, 1967, 1966, 1971년 관객수가 1억4천만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얘기다. 요즘 관객 가운데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가 196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때가 지금보다 호황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호 특집기사에서 <씨네21>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는 올해의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1968년작 <휴일>을 들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영화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결과다. 그들은 <휴일>을 볼 수 있음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름이 이만희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잊혀진 전통을 발견한 이 짜릿한 희열이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것일 이유는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서 관객과 옛 한국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혀주길 기대해본다.

관객수 통계와 <휴일>의 예로 확인하듯 1960년대 한국영화의 실체는 아직 드러난 것보다 알려져야 할 것이 더 많다. 군사정권 시절에 생긴 단절이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백이 안타까운 이유는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그들의 전통을 화려한 신화로 포장해 반복 재생산하는 걸 보노라면 한국영화가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기 할리우드를 무대로 삼은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제는 60년대 충무로에 관한 한국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씨네21>이 출판하는 김수용 감독의 회고록 <나의 사랑, 씨네마>을 읽으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문예영화를 연출한 이 노감독의 글은 대단히 영화적이다. 일례로 이만희 감독의 영결식을 묘사한 글을 보자. “나는 어린 유자녀들을 보니 목이 메어 조사를 읽을 수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마이크 앞에서 입을 뗄 때였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우르르 지하 다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20분 후 다시 마이크 앞에 섰지만 어쩐지 슬픔은 가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두루마리 조사를 움켜쥐고 즉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 씨네마>는 사료적 가치 못지않게 드라마로서 흥미진진하다.

1960년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이것은 호황의 절정을 맞은 한국영화가 기꺼이 맡아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여기엔 <씨네21>이 맡아야 할 몫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 씨네마>의 출간처럼). 피터 잭슨이 1933년 원작영화를 보고 감독의 꿈을 키워 지금의 <킹콩>을 만든 것 같은 일이 한국영화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에게 이만희의 <휴일>을 보여달라. 그러면 진짜 멋진 영화를 만들겠다, 고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고 있는 듯도 하다.

 

필름2.0(05. 09. 09) '잊혀진 거장 이만희의 영화에 대하여' 김영진 편집위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대대적인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연다. 이어 내년에는 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전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만희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조망이 막 시작되는 참이다. 이것이 왜 너무 뒤늦었는가, 하는 것은 이만희가 동시대의 감독들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누구나 찬탄과 질시를 불러일으켰던 창작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고 그후 한동안 망각에 묻혔다. 때로 명예의 월계관은 살아남은 이들의 전리품이 된다. 단절된 한국영화 역사의 연구에서 이만희는 저만치 밀려 있었다. 그 와중에 이만희에 대한 여러 영화인들의 회고는 거의 전설 수준으로 옮겨지곤 했다.

언젠가 이만희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반 은퇴 상태에 있는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만희와 함께한 현장 생활이 거의 경이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이만희는 군사정권 체제 하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고 자기 창작 생활을 거의 방기하듯이 했다. 그는 늘 술을 마셨고 현재 영화를 찍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다음 영화의 연출료를 받아 다 써버릴 만큼 애주가였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바로 이 술로 인한 간 기능의 악화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도 완성하지 않고 곧잘 영화를 찍은 그는 촬영 당일 아침이면 거의 난수표 수준의 암호 같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대사를 아무렇게나 갈겨쓴 콘티를 조감독에게 줬는데 거기에 적힌 소도구를 재빨리 동원하는 게 조감독의 가장 큰 임무였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찍었는데도 미스터리 스릴러영화를 잘 만들었던 이만희의 재능은 그것 자체로 미스터리였다는 것이다.

동세대의 감독들에게도 이만희는 연구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고 김기영 감독도 이만희의 영화에 대해서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수용 감독도 다른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경지에 가 있었던 감독이 이만희였다고 말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요절한 동료감독에 대한 예우일 수도 있지만 그 분들이 모두 동의했던 것은 이만희가 생전에 보여 준 것 이상의 것을 훨씬 더 보여 줄 수 있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영세한 산업 규모로 굴러가던 60년대와 군사정권의 통제가 엄혹했던 70년대에 만들었던 이만희의 영화는 그런데도 빛나는 성취를 티내고 있었다. 그의 영화 중에는 거의 태작이 없다. 빠른 속도로 되는 대로 찍어낸 그의 영화에 미치광이 같은 시정신이 늘 살아 있었다는 것은 수수께끼다. 임권택 감독도 평론가 정성일 씨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만희 감독이 살아 있었으면 자신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경쟁에 있는 자로서, 아, 저 사람에게 지면 안 되겠다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이 있다면 내게는 이만희 감독인 거요. 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면 내가 <증언>을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 감독은 나와 마찬가지로 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가 중간에 말썽이 많이 나고 해서 나머지를 임 감독이 좀 대신해줄 수 없냐고 해서 막장까지 갔는데, 남이 만들던 영화를 할 수는 없는 거요. 바보가 아니면. 그때 내가 속으로 생각을 해본 거요. 내가 만약 대신한다면 이만희 감독이 찍은 영화를 흔적 없이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니더라고.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이 감독만의 세계가 있는 거요. 거기에는. 내게는 한국영화에 특히 그 두 사람이야. 김기영 씨하고. 도저히 그 사람들의 스타일은 내가 흉내 내서 비슷하게 할 수가 없겠다는 거지. 독특한 자기 양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1973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인 구 영화진흥공사에서 직접 대규모 예산을 들여 제작한 국책 반공 전쟁영화였다. 영화진흥공사는 전쟁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이만희와 임권택에게 각각 <들국화는 피었는데>와 <증언>의 연출을 맡겼다. 사단 병력 규모의 군부대가 엑스트라로 동원되고 한 마을 전체가 세트로 지원된,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작이었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극우 논객으로 유명했던 소설가 선우휘가 각본을 썼지만 감독 이만희의 관심은 각본에 담긴 선전영화의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영화 초반 수십 분간 전개되는, 북한군의 탱크 위용을 보여 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탱크가 마을과 사람을 짓밟고 지나갈 때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의 남한군은 그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총이나 화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탱크에 맞서 남한군 병사들은 아예 수류탄을 지고 탱크에 뛰어드는 무모한 방법으로 목숨을 버린다. 그것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가공할 기계에 맞서는 인간의 힘겨운 투쟁을 그리면서 거의 무력감에 가까운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됐을 때 북한군의 잔학상과 그런 북한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랐던 정부 당국으로부터 전쟁의 스펙터클에서 비극적인 무력감을 표현한 이 영화가 눈밖에 난 것은 당연했다. 제작 직후 가진 시사회에서 정보 당국은 이 영화에 대해 전면 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화 곳곳에 반공과 애국을 역설하는 상투적인 연설 투의 대사가 수시로 깔리고 화면의 연결이 성긴 흔적이 역력하지만(심지어 밤 전투 장면을 낮에 찍어 이어붙여 놓기도 한다) 감독 이만희는 당시의 제작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했던 풍부한 제작 조건에서 작업하면서 찍은 이 전쟁 스펙터클의 초점을 반공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심이 아닌, 탱크에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쟁에 대한 훨씬 더 추상적인 두려움을 보여 준다.

정부가 지원하는 국책 홍보영화조차도 자기 배짱대로 찍어버린 이 강골의 영화감독은, 그러나 또한 매우 서정적인 감성을 지닌 창작자였다.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발견돼 9월 2일 상영됐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공개될 이만희의 <휴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영된 적 없는 작품으로, 이만희의 진면목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너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 처분을 당했다. 전옥숙이 기획하고 백결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신성일과 전지연이 주연한 이 영화는 일요일에 만나 데이트 하는 가난한 연인의 하루를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내용을 소개하면 매우 달콤한 영화인 듯싶지만 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허무한 정조를 띠며 전개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허옥은 무일푼 백수 청년으로 가진 것도 능력도 없으면서 턱없는 허풍으로 세상을 대하는 청년이다. 택시비도 없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 근처에 택시를 세워두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척하며 거스름돈은 택시 운전사에게 받으라고 사기를 치며 달아나는 대책 없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애인은 다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커피값이 없기 때문이다. 다방에서 만날 돈조차 없는 가난한 연인은 그렇게 일요일의 데이트를 시작한다. 나무들이 늘어선 비탈길을 나란히 걸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비루한 사랑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꽤 문학적 감성으로 치장된 이들의 대화는 결국 여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꺼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자는 임신을 했고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그 뱃속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자는 무기력한 남자를 비난하지만 결국 아이를 떼는 데 동의한다. 남자는 낙태 비용을 얻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여자는 바람이 몰아치는 남산 중턱 벤치에서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린다.

이렇게 펼쳐지는 <휴일> 도입부는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 암담한 분위기로 치닫는다. 허옥이 돈을 빌리러 간 친구들은 다 제멋대로다. 여자를 후리는 데만 골몰하는 놈,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술집에서 개똥 철학만 주워대고 있는 놈, 돈을 모아 현대식 아파트에 살며 목욕을 즐기며 으스대는 놈(그 당시에는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자기 확인 행위였던 모양이다)들을 만나 새삼 깨닫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폐허에 있다는 자각이다. 진부한 음악과 문학적 대사를 끼고 이만희는 이런 상황을 이미지로 다룬다. 술집에서 백수들과 ‘대학을 나오고도 사회에서 낙제한 것은 내 책임이 아냐’라는 따위의 시시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를 허옥이 찾아갔을 때 카메라는 그들이 벽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잡는다. 그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화면 바깥으로 움직여 나갔을 때도 잠시 그들 배경의 벽을 응시하듯 잡는다. 의미 없는 낙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는 그 벽에서 잠시 응시한 끝에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 얻어내는 감정은 모멸감이라는 것이다. 어떤 지향으로 묶일 수 없는 삶에 대한 모멸이 거기 스며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방황하고 여자는 기다린다. 남자가 담배를 빼어물고 부스럭거리며 성냥을 찾으면 여자가 핸드백에 남자를 위해 지니고 다니는 성냥갑을 꺼내준다. 그러나 남자는 결코 여자의 마음에 아무것도 점화해줄 수 없다. 산부인과에서 낙태할 차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의 꽉 움켜잡은 손을 포착한다. 간호사의 발걸음이 들리고 진료를 받을 것을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 끝에 내미는 손길은 남녀 주인공의 움켜쥔 손을 떼어놓는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이들의 결합은 그렇게 무력하다. 더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이후 영화 내내 포착되는 주인공의 방황 장면은 60년대 말의 서울의 아름답지만 동시에 흉물스러운 표정을 간직한 풍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의 우울한 일요일을 위하여, 우울한 사람들끼리, 내일을 위하여, 어제를 위하여, 여자를 바람 맞힌 그 남자를 위하여, 남자를 바람 맞힌 그 여자를 위하여.’ 따위의 김승옥 소설 풍의 대사들이 술집에서 나누는 건배의 술잔 위로 겹쳐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극한의 퇴폐와 무기력한 애상으로 치닫는다. 당시의 권력자와 그의 취향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이런 퇴폐적인 우울함을 좋아하지 않은 나머지 상영 금지 처분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런 시대적 맥락까지 더해서 이만희의 <휴일>은 보고 나면 뇌리에 서걱서걱하는 톱밥 소리가 들리는 듯한 감동을 준다. 영상자료원의 시사실에서, 그리고 곧 열릴 부산영화제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이만희 감독 영화의 진가를 한번 음미하시길 바란다.

 


씨네21(06. 05. 12)

허문영 평론가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는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말하기 힘든 감독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내가 한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이것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추>를 제외하고도 그의 영화 50편 가운데 우리는 반도 만나지 못했다. 이만희는 이제 막 말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맹렬하게 말해져야 할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예 행방조차 알 수 없거나(<만추> <시장> <7인의 여포로> 등등), 40년의 망각을 넘어 이제 막 도착했거나(<휴일>), 일부의 소리를 잃어버려 혹은 괴상한 계몽영화로 치부돼 창고에 처박혀 있었지만(<물레방아> <생명>), 그들을 한편씩 만날 때마다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1년이면 30여편에 출연하는 배우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2주에 한편을 촬영하며 그렇게 1년에 대여섯편을 찍어댄, 그러고서도 검열과 삭제와 금지의 지옥을 경유해야 하는 끔찍한 제작환경을 감안해 가산점을 줄 필요가 없다(이 가산점은 실은 정당한 것이지만). 이 천재가 모든 걸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며 지혜롭게 타협했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저주받을 만한 존재 조건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의미한 상처로 만들어낸다. 이만희의 영화는 그 모든 악조건과 저주와 상처를 끌어안고, 영화를 사랑한 한 사내가 영화라는 매체의 심장에 기어이 이르려는 순간들의 숨막히는 기록이다.

<생명>
<생명>

여기선 다만 <생명>(1969)에 관해 말하고 싶다. <생명>은, 그의 영화 가운데 단 한편만 보기를 권해야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영화의 첫머리에 이런 구호가 떠오른다. “삼천만 한몸 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 영화는 탄광 매몰과 광부 구출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북괴만행’과는 무관하다. 그 구호 다음에는 이것이 ‘기록영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므로 이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런 어이없는 자막이 들어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희라는 인물이 당대의 질서와 맹렬하게 대립한 자취 혹은 그로 인한 상처의 흔적으로 읽힌다. <생명>은 한몸 되어 분쇄하자고 말해놓고 한몸이 되지 않는다. 기록영화라고 말해놓고 기록하지 않는다(여기선 기록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리얼리스트의 계율이 중요하다). 이만희는 자기가 가장 무관심하고 가장 끌어안기 싫은 표지를 내세우고 그 안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갱도 붕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무너졌다”는 외침 하나로 처리된다. 곧이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몰려드는 기자들, 슬퍼하는 매몰 광부의 가족 등등 이런 영화가 기록해야 할 대상들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모든 걸 무성의하게 보일 만큼 간략히 처리한다. 이만희는 정말 기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 장면은 자꾸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무너진 갱도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사내(장민호)의 모습. 그는 갱도에 갇혀 반쯤 실신한 상태로 꿈을 꾼다. 포성과 총소리,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에서 깨면 좁은 갱도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울부짖음도 분노도 환호도 없다. 그저 광부는 갇혀 죽어가고 있고 그의 가냘픈 신음 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낸 간헐적인 환청과 함께 폐쇄공간을 채운다.

<생명>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이것이 거의 전부다(구출 과정도 매몰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묘사된다). <생명>은 오직 갇혀서 죽어가는 사내의 형상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냉혹한 대사. 신문기자(허장강)가 몰려든 사람들로 바빠진 다방 종업원에게 묻는다. “살아날 것 같은가요?” 종업원이 대답한다. “관심 없어요. 다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매몰 사건이 일어난 첫 장면에서 갱도 아래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던 카메라는, 광부가 구출된 뒤에 지상에서 갱도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저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미 무너져버린 그 갱도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걸까. 이 기괴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혹한 절망의 영화언어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렇게 엉성하고 절충적인 영화에서 이처럼 숭고한 영화적 순간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이만희의 모든 영화가 그런 순간을 또 어디엔가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다. 그의 영화를 자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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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바타이유에 관한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문득 켜놓은 TV에서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에 눈에 들어왔다. 대번에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1998)란 걸 알 수 있었는데, 신문의 프로그램란에서 확인하니까 맞다. 그의 영화다. 4월 22일(토) 밤 11시. <영원과 하루>.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11번째 영화이자 1998년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지난 2004년 11월에 개봉한 걸로 돼 있지만, 내가 본 건 그보다 훨씬 전 한 영화제에서였다(기억에는 동숭아트센터에서 봤다). 대부분의 시간을 졸면서!(나는 <율리시즈의 시선>도 영화관에서 볼 때는 반은 졸면서 봤다). <영원과 하루>에서도 인상적인 몇 장면이 있었지만 그걸 위한 132분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감독 타르코프스키와 겉보기에는 가장 유사한 영화적 스타일의 감독이지만, 그의 영화들을 나는 즐기는 편이 못된다(그의 영화들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영화'음악'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수면제 대용으로 보는 이들을 내가 기이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하는 것은 내게 앙겔로플로스의 영화가 수면제이기 때문이다. '예술 영화'임에는 분명한데, 자신의 인생 여정을 영화에 비유하기도 하는 이 거장의 어떤 면이 내게 친숙하지 않은 걸까라는 게, 좀 미안한 마음에서 내가 갖게 된 자기변호성 의문이다. 

이번에 EBS에서 방영된 <영원과 하루>를 잠시 보다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씨네21>에 실린 짐 호버만의 평에서 일말의 해답을 찾았다(예술 감상에서 동지를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이번주 <씨네21>에 난 영화소개 기사와 함께 2년전에 실렸던 호버만의 영화평을 같이 옮겨놓는다(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물론 나의 것이다).

씨네21(2006. 04. 20)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글로 풀어내는 일은 참으로 덧없게 느껴진다. 말이 덧붙여질수록 그의 영화적 세계는 점점 멀어진다.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옳은 태도는 입을 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그저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열한 번째 영화가 궁금한 독자들께서는 이 글이 영화 감상에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는 점을 미리 인지하시기 바란다.

-<영원과 하루>는 죽음을 앞둔 그리스의 늙은 시인, 알렉산더의 이야기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병원에서 보내는 대신 19세기의 시인, 솔로모스의 시어들을 찾아 나서는 데 보내기로 한다. 불멸의 시어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그는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고, 알바니아 난민 소년을 만나 시적인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영원한 진리를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결국 그는 진리란 그가 경험한 시간 속에 내재된 것임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노년에 접어든 음유 시인 앙겔로풀로스의 회고록 혹은 자화상이다. <안개 속의 풍경>의 어린 소년부터 그의 많은 영화들 속에 등장했던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남자가 이 영화에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된다. 알렉산더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여 생의 상처를 온몸에 새기고 이제 그 생의 끝에서 영원성을 갈망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영원성이 알렉산더의 예술세계 혹은 누군가의 시적세계에 잠재된 것이 아니라, 아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 난민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오는 시어, 버스에서 잠을 자는 혁명군 등에게서 빛처럼 퍼져나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앙겔로풀로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외부의 관념적인 영원성으로 퇴각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 속에 더욱 침투하여 불멸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뒤늦은 후회나 회환이 아니라, 영원이란 ‘이미 그곳에’ 늘 존재해왔음을 깨달은 노년의 쓸쓸한 성숙함이다(*이 영화가 지루한 것은 내가 아직 '노년'과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영원과 하루>에서도 익스트림 롱숏과 딥 포커스,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은 영화에 시간의 무게를 실어준다. 안개가 낀 회색빛 그리스의 풍경, 침묵으로 말하는 여백의 공간 역시 여전하다. 솔로모스의 시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들과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풍경들 속에서 과거와 현실과 미래는 만나고, 젊은 앙겔로풀로스와 노년의 앙겔로풀로스는 조우한다.(*그래도 이 대목이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이었다.) 그의 영화세계 속에서 역사는 그렇게 교차하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남다은 기자)

씨네21(2004. 12. 15)  "자아 도취의 향연" -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가장 미약한 작품 <영원과 하루>

-유럽 예술영화의 쇠망을 느끼게 하며 칸영화제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에 때를 맞춰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고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인 거장들의 최근작 두편이 선보였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하나의 선택>으로 보건대 유럽 예술영화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둔하기 짝이 없다.(*'거장'이란 말에 기죽지 않고 이렇게 말해주는 비평가가 국내에는 드물다. 가령, '국민감독' 임권택에 대해서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칸의 1998년 황금종려상 수상작, <영원과 하루>는 수년 동안 내가 앉아 버티며 시청한 대여섯개의 앙겔로풀로스 영화들 중 가장 미약한 작품이다. 시 구절과 제멋대로의 피아노 연주, 해변가 아이의 멋진 이미지, 그리고 병원에 입원할 준비를 하고 있는 유럽을 상징하는 알렉산더 역의 브루노 간츠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데 알렉산더는 진부한 배역에 맞게 위대한 작가이며 꽉 찬 중년에 시한부 질병을 앓고 있다. 그의 지병을 거대한 망상이라고 부르자. 앙겔로풀로스는 알렉산더가 하는 모든 일에 거의 세계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테니까.(*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는 그러한 '거창한' 나르시시즘이 없다.)

-작가는 깨끗하게 다듬어지고 우스꽝스럽게 조용한 레브라도 개를 딸에게 맡기려고 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날을 시작한다. 그리고 납치되어 부유한 남색자들로 가득 찬 버려진 모텔로 끌려온 알바니아 소년을 구하게 된다. 이제부터 무뚝뚝하고 지겹게도 찰리 채플린의 <키드>가 반복되지만 영화 내내 형사 콜롬보가 입었을 듯한 레인코트를 입고 등을 꾸부정하게 하고 있는 간츠의 배역은 너무 기력이 쇠약해 그저 상냥하게 자신의 꼬마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노인과 소년, 부자와 가난뱅이, 베푸는 이와 귀염둥이, 문명과 그 불만족의 이 상징적인 공생관계는 알바니아의 수용소가 소개되고 알렉산더가 자신의 영혼지기로 생각하는 유배된 19세기 그리스 시인에 대해 임종의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일종의 역사적 깊이를 얻게 된다. 하지만 내 참을성을 밀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영화감독의 지루하고 답답한 스타일이다. 연구의 대상이자 유머가 부재한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졸립게 하는 일련의 장면들과 거만한 줌의 사용들, 느려터진 화이트아웃들로 특징된다.(*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 효과는 거의 없지만 미장센은 어울리지도 않게 매혹적이다. 모든 집들은 건축 잡지의 사진들처럼 불이 밝혀져 있고 병원조차 잘 보존된 지방의 박물관 같은 느낌을 발산하며 도시의 시체 보관실도 유행하는 스테인리스스틸 느낌의 일류 식당처럼 느껴진다.

-<영원과 하루>는 드러내놓고 자기도취적이어서 알렉산더가 죽은 아내의 간지러운 러브레터들에 심취해있을 때조차 쉽게 이게 앙겔로풀로스가 자신에게 쓴 편지려니 싶어진다. 뭐가 더 터무니없을까? 알렉산더가 자기 개를 맡기기 위해 충실한 하인 아들의 가짜 민속결혼식에 방해가 되는 장면일까 아니면 길거리의 아이들이 죽은 동지의 어쭙잖은 소유물을 태우는 장면에서 오보에가 들려오고 카메라가 냉혹하게 움직일 때일까? 추상적 비표현주의자라고 불릴 만한 앙겔로풀로스에겐 인물들을 상상해내거나 배우들을 지도할 특정한 능력이 없다. <영원과 하루>에 좀더 위상있는 배우들이 나왔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뻣뻣하고 빈약하며 거만하고 한순간 그 자신의 효과에 취했다가 허위 철학에 눌려버린 완전히 예술영화판 <보이지 않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보이지 않는 위협>은 <스타워즈의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가리키는 게 아닌지? 한편, 주연을 맡은 배우 브루노 간츠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로 나왔던 배우이다.)

-앙겔로풀로스의 단점이 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율리시즈의 시선>은 그 어떤 웅장한 무관심을 받았다. 아니 적어도 2번가에 있는 거의 버려진 황량한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의 빈 극장에서는 보여줄 만한 그런 영화였다. 그걸 봤다면 누구나 앙겔로풀로스가 마지막 유럽 예술영화를 만들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링컨센터의 위상 속에서 개봉되어 평범한 머천트와 아이보리의 공격적인 광고에 힘입고 있는 <영원과 하루>는 그런 분위기의 기이한 요약에 더 가깝다.

-“나 왜 유배 속에 삶을 살아왔나?”, “왜 우린 사랑할 줄 모르고 있었나” 따위의 영원한 질문들을 뻔뻔스럽게 헤대며 앙겔로풀로스는 잉마르 베리만의 무거운 망토를 걸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도덕적 고통을 머리에 쓰고 미클로시 얀초의 형식주의를 사용하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비유적인 풍경을 찾다가 결국 바닷가에서 음치에다 뻣뻣하게 춤을 춰대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단원을 맞는다.(짐 호버만)(*감독 자신이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음을 알고 있을 때, 그의 영화는 지루해진다.)

 

참고로 지난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던 앙겔로플로스와의 인터뷰들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nkino(2004. 10. 15) "우리 시대 최고의 거장을 만나다"

-부산영화제와 한국을 처음 찾은 소감이 어떤가?
-테오 앙겔로플로스 |
솔직히 말하면 한국을 느낄 시간이 전혀 없었다. 호텔 방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웃음) 주변의 호텔은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호텔 방에서 바로 바다가 보인다는 것 정도다. 시간이 되면 부산 관광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스의 좌파적인 전통 속에서 영화를 시작한 것으로 안다. 젊은 시절의 역사 체험이 영화에 미친 영향은 어떠한가?
-내가 영화를 시작한 때는 그리스가 한창 군부 독재 중이던 1970년이었다. 나나 조국인 그리스에게나 어려운 시기였다. 그 전에는 좌파계 신문사에서 영화비평가로 활동했다. 군부 독재가 시작되면서 군인들이 도시를 점령했다. 군인들은 내가 일하던 신문사를 파괴하고, 아테네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첫 영화인 <범죄의 재구성>을 찍었다. 이 영화는 산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다. 어느 정도는 고대 그리스 비극과 신화에서 모티프를 따오긴 했지만, 결국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보통 외지인들이 그리스에서 떠올리는 이미지, 예를 들어 태양빛이 작열하는 유명한 섬들이나 관광지의 그런 이미지가 아닌, 그리스의 이면을 그려냈다. 남자들은 모두 다 외국으로 떠나고 나이든 여자들만 가득한 폐허가 된 그리스 마을. 결국 이 또한 당시 그리스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는 영화 검열이 엄격한 나라였다. 검열과 규제는 당신의 영화에서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나?
-당연히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범죄의 재구성>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내용이 없어서 큰 문제는 없었는데, 문제는 두 번째 영화인 <1936년의 나날>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영화가 프랑스에서 개봉되었을 때는 정치적인 이슈를 간접적이고 암묵적으로 이야기하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는 그리스 뿐 아니라 유럽 전체가 파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있었다. 이 영화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상영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 상영을 마쳤는데, 모인 사람들 누구도 영화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는 대학생 들 뿐 아니라 검열 당국에서 나온 형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담겨있는 당시 그리스 상황에 대한 은유와 상징들을 그들이 눈치챌까봐 두려웠던 거다.(웃음)

-세 번째 영화인 <유랑극단>은 정치적인 주제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지친 나머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를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가 혹시 개봉을 못한다고 해도, 일단 한 번 질러보자는 심사였다. 하지만 역시 사전 검열 문제 때문에 시나리오 없이 촬영을 진행해야만 했다. 혹시 문제가 생길까봐, 배우나 스탭, 제작자의 이름 모두를 크레딧에 올리지 않았다. 배우들도 촬영 당일이 되어야 자신들이 어떤 연기를 해야할 지 알게 되는 그런 도둑 촬영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의 영화 감독들 중 특별히 눈여겨 보는 감독이 있는가?
-사실 요즘에는 다른 사람들의 영화를 보기가 더 힘들어진다. 이렇게 영화제에 가도, 인터뷰에 각종 행사에 끌려다니다 보면 영화 한 편 보기가 힘들다. 타인들의 영화가 그리워지는 시점이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태국 감독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이 맘에 들었다. 그 외에는 아테네에서 본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작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러시아 영화 <귀환>, 그리고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등도 생각난다.

-당신은 그리스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감독이다.
-나는 그리스 국내에서 영화 작업을 하는 유일한 그리스 감독일 것이다. 물론 내게도 외국에서 일하자는 제안은 많이 오지만, 그리스에 남기로 결정하고 작업을 해왔다. 엘리아 카잔이나 존 카사베츠 같은 감독들은 그리스 출신이지만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고, 그리스에서 작업한 감독은 <희랍인 조르바>를 만든 마이클 카코야니스 정도가 있을 뿐이다. 현재 그리스 영화는 그리스 내부에서만 알려져 있다. 조금 더 그리스 영화가 해외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유일한' 그리스 감독이라는 게 좀 놀랍다.)

내친 김에 인터뷰 하나 더. 인터뷰어는 오마이뉴스 심은주 기자이다. 타이틀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만약에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영화는 아직 종말에 다다르지 않은 것이 되겠다.)

오마이뉴스(2004. 10. 13) "여기, 영화 감독을 꿈꾸는 영화 학도가 있나요?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개인적인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며 이 영화 거장은 말문을 열었다. 그리스 출신의 영화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작가주의 예술영화의 최고 경지에 이른 감독으로 유명하다. 역사적·정치적 문제를 서정적인 느낌의 화면에 담아내는 그의 솜씨는 이미 세계 3대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에서 인정 받아왔다.

-그런 그가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참가를 위해 처음으로 부산을 찾았다. 영화제 측이 감독과 관객들의 자유로운 토론의 장으로 처음 마련한 마스터클래스는 예매시작부터 매진을 기록할 만큼 관심이 높았다. 12일 오후 1시에 열린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마스터클래스는 어제 허우 샤오시엔에 이은 두 번째 시간.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한국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2시간 여 동안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은 문학과 법학 등을 공부했다. 굳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9살 때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영화 <더러운 얼굴의 천사(Angels with dirty face)>를 보고 놀란 이후로 영화가 내 삶 속에 들어왔다. 고교 졸업 후 영화학교에 들어갔는데, 특히 감독 일에 관심을 가졌었다. 당시 '영화가 날 필요로 하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고, 난 영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규모의 영화 한 편을 찍었다."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평을 하자면?

"그 질문에 대한 내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영화를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영화가 내겐 '여행'과 같다는 것이다. 단순한 작업이 아닌, 삶 그 자체다. 특히 시나리오나 사전 작업이 아닌, 촬영의 순간이 이런 기분을 더해준다. 난 촬영을 좋아한다."

-<안개 속의 풍경>은 흔히 희망에 대한 영화라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희망이란 무엇인가?
"희망을 정의할 순 없다. 하지만 희망은 심오하고 깊은 감정이라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안토니오니의 영화 <유랑>에서 인물들이 모두 자살을 택하자, 이를 본 관객들은 그 영화가 희망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안토니오니는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행위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이다. 나에게 희망은 영웅적인 절망이다."

-당신의 시선은 늘 발칸반도에 머무른다. 다른 곳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가?
"일본에 갔을 때 한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다.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았다.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울며 내게 달려들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라 소개한 그는, 내 영화 <유랑극단>을 보며 자신의, 자기 민족의 이야기 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내 생각엔 인간의 정신나간 행동을 발칸 지역을 배경으로 해서 보여줘도 한국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본다. 영화처럼 국제적인 것이 없다. 국수주의가 모든 이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당신의 영화는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회화적이다. 좋아하는 화가가 있다면? 
"난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기에 대신 영화 만드는 일을 한다. 실제 모든 회화의 역사는 내 영화와 연관이 있다. 꼬집어 특정 화가를 말할 순 없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피카소를, 달리의 그림을 보면 달리를 흡수한다. 잘 되든, 안 되든 회화 속의 색이나 이미지를 소화해서 영화에 반영하고자 하는 편이다.

-영화에서 당신은 클로즈업을 거의 안 쓴다. 왜 그런가?
"내 작품들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시테라섬으로의 여행> 이전엔 정치와 역사를 담아내는 데 몰두했고, 그 이후엔 역사는 배경에 두고 전면에 개인과 인간의 운명을 담아냈다. <유랑극단>이나 <알렉산더 대왕> 같은 영화들은 브레히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다. <시테라섬으로의 여행> 이후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정의와 브레히트의 연극의 정의를 함께 사용한다. 브레히트의 연극의 정의 가운데 '거리감'은 베르히만과 고다르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내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거라 생각하나?
"내 영화 중 하나인 <비키퍼>는 혁명으로 죽었으나 그래도 계속된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많은 이가 TV만 보며 정치와 역사적인 문제들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우린 꿈을 갖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야만 한다."

-당신 영화의 배우들은 연기가 훌륭하다. 특별히 지도하는 바가 있다면?
"배우들은 각자가 모두 다르다. 그런 만큼 '소통'이 중요하다. 이 때의 소통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의 교환을 통해 가능해야 한다. 단순한 방법이지만 스킨십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율리시즈의 시선>을 보면 생각한다. 도대체 당신에게 시선의 해방과 구속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율리시즈의 시선>에서 조셉슨은 시네마떼끄 관장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없어져 버린 시선을 수집하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나는 시선에 대해, '과연 나는 아직도 진실을 보고 있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처음 내가 카메라 화면을 보았을 때,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발견했듯 계속 그러고 싶단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을 담고 싶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마스터 클래스 시작과 끝에 플라톤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을 알려면 타인에게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 그는 관객없는 영화는 그저 필름이란 물질일 뿐이라며 감독의 시선이 타인의 시선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마지막에 자신이 준비한 시를 읽어주며 그에 대한 관객들의 사랑에 답례했다...

06.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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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er 2006-04-23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짐 호버만의 글은 제 친구가 번역하고 있는데요,
이 글을 보고 반가와서 링크해줬더니 잘 읽었다고 전해달라는군요.
말씀하신 대로 '보이지 않는 위협'은 '보이지 않는 위험'의 오타였다고 하네요. ^^
한편 호버만은 브루노 간츠를 제외한 전체 캐스트가 빈약했다고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는군요.
덩달아 저도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6-04-23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이미 읽으셨던 글일 텐데 잘 읽으셨다니 머쓱합니다...

푸른별 2006-04-2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난감함이 아주 명확하게 설명이 되는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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