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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영화 <300>을 보면서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짐작이 헛되진 않았다. 내가 좀 뒤늦게 알게 되었을 뿐이다. <300>에 대하여 그가 쓴 영화평이 '진정한 헐리우드 좌파(The True Hollywood Left)'이고 우리말로도 초역된 걸 알게 되어 원문과 함께 옮겨놓는다. 원문의 출처는 라캉닷컴 http://www.lacan.com/zizhollywood.htm 이고,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스크랩방에서 옮겨온 번역문의 원출처는 진보넷의 한 블로그 http://blog.jinbo.net/chasm/?pid=44이다.

  

진정한 헐리우드 좌파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의 침공에 맞서 자신들을 희생한 300명 스파르타 군인의 무용담을 담은 영화 <300>(잭 스나이더 감독)은, 최근의 (미국과) 이라크-이란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최악의 자국중심 군사주의 영화로 비난받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할까? 오히려 <300>은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방어되어야만 하는 영화이다.

두 가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영화 스토리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영화는 강대국(페르시아)에게 침략 받는 가난한 약소국(그리스)의 이야기이다. 당시에 페르시아는 훨씬 더 발전한 국가였고, 더 발달된 무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코끼리나 거인들 그리고 거대한 불화살들은, 오늘날의 하이테크 무기의 고대적 판본은 아닌가? 스파르타의 마지막 생존자들과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가 수천 개의 화살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은, 오늘날 안전한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첨단 무기를 조종하는 테크노-군인에 의해 폭격당하는 사람들과 겹쳐지지 않는가? 오늘날 미군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군함 속에서 단지 미사일 발사 버튼만 누르고 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를 설득할 때, 그가 사용하는 말들은 확실히 광기어린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것과는 다르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였을 때 주어질 평화와 쾌락을 약속하면서, 레오니다스를 유혹한다. 레오니다스가 요구받는 것은 단지 무릎을 꿇고 페르시아의 위대함을 인정하라는 형식적 제스처일 뿐이다. 만약 스파르타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 전역에 지배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레이건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에서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니카라과 정권은 미국에 대해 “어이, 삼촌!”이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영화 속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다문화주의의 이상향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 곳에서는 다양한 인종들과 레즈비언, 게이, 불구자 등등을 포함한 모두가 난교orgy에 참여하지 않는가? 오히려 희생정신과 규율로 무장한 스파르타인들이, 미국의 침공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을 방어하고자 하는 탈레반과 훨씬 유사해보이지 않는가? (혹은 미국의 침공에 맞서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란 혁명 수호대의 엘리트 집단과 유사해보이지 않는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맞선 그리스 인들의 주된 무기는, 규율과 희생정신뿐이다.

알랭 바디우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민중적 규율이 필요하다. ···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오직 규율만 가지고 있다. 권력도, 돈도, 무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진 것은 규율, 즉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규율은 이미 조직의 한 형태이다.” 쾌락주의적 방임론hedonist permissivity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 좌파가 규율과 희생정신을 (재)평가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스파르타인들의 근본주의적 정체성조차 좀 더 모호하다. 영화 끝 무렵의 선동적 언어들은, 그리스인들의 과제를 “자유와 이성의 지배라는 밝은 미래를 위해 폭정과 신비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마치 기초적인 계몽주의적 기획처럼 (심지어는 공산주의적 뉘앙스를 가진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또한 영화의 시작부에 레오니다스가 부패한 제사장들의 메시지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제사장들은 신이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의 출정을 금지했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밝혀지듯이 신비한 황홀경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페르시아에 의해 매수된 상태였다. 마치 1959년에 달라이 라마에게 티벳을 떠나라고 말했던 티벳 제사장이, 나중에 CIA에 매수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듯이 말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군대식 규율(아이를 내다버리는 행위까지 포함하여)에 의해 지탱되는 명예와 자유, 이성 같은 개념들이 가지는 명백한 부조리성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부조리”는 단지 자유를 위한 댓가일 뿐이다. 영화에 나오듯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있는 힘겨운 투쟁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군대식 규율은 아테네인들의 “자유민주주의”와 단순히 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내적인 조건이자 기반을 이룬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는 오직 가혹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의) 안전한 거리를 둔 채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걸었을 때에만, 즉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천할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조국이 외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저항세력의 리더가 누군가에게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자고 제안할 때, “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네가 명예를 지키고자 한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이란 사실을 모르겠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루소에서 자코뱅에 이르는 근대의 평등주의적 급진파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새로운 스파르타로 상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 규율이라는 스파르타의 정신 속에는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 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제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해방의 정수(core)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300>의 형식적 측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몬트리올에 있는 한 창고에서 촬영되었고, 배경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의 인공적 성격이 “실제” 배우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종종 마치 만화 속 인물들이 그대로 현실에 나온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는 프랭크 밀러의 만화 <300>이 원작이다). 게다가 배경의 (디지털) 인공성은 일종의 폐쇄공포증적 분위기를 창출한다. 마치 이야기는 끝없이 열려진 공간인 “실제(real)”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닫혀진 세계” 속에서, 일종의 닫혀진 공간의 부조(浮彫)화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이는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비록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에서도 배경과 등장인물의 상당부분이 디지털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들이 주는 느낌은, 실제 배우와 디지털 배우 및 사물들(코끼리나 요다, Urkhs나 궁전 같은 것들)이 “실제의” 열려진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300>에서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인공적 배경 속에 던져진 “실제” 인물들이었고, 이러한 조합은 인공적 세계와 실제 인물들 간의 사이보그적 결합이라는 훨씬 더 괴상한 “폐쇄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직 <300>만이 “실제” 연기자들과 사물들과 디지털로 만들어진 배경을 조합하여 진정으로 새로운 자율적인 미학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근접했다. 

다양한 예술 장르를 혼합하는 것(하나의 예술이 다른 예술을 참조하는 것까지 포함하여)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열려진 창을 통해 바깥을 보는 여성을 그린 많은 호퍼Hopper의 초상화들은 확실히 영화의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 초상화들은 대응-샷counter-shot없는 샷을 보여준다). <300>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기법적으로 더 발달된 예술(디지털 영화)이 덜 발달된 예술(만화)을 참조했다는 데 있다(물론 이러한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컨대 워렌 비티의 <딕 트레이시>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시도를 한다). 

이로 인해 생산되는 효과는 “진정한 현실true reality”이 자신의 순수함을 잃고, 닫혀진 인공적 세계의 일부분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완벽히 형상화해낸 것이다. <300>이 시도한 두 예술 장르의 “합성synthesis”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맞지만, 동일한 이유 때문에 틀렸다. 물론 이 “합성”은 실패하고 어수선한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 속에는 당연히 뿌리 깊은 적대와 모순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표는, 바로 이러한 적대인 것이다. 

The True Hollywood Left

Zack Snyder's 300, the saga of the 300 Spartan soldiers who sacrificed themselves at Thermopilae in halting the invasion of Xerxes' Persian army, was attacked as the worst kind of patriotic militarism with clear allusions to the recent tensions with Iran and events in Iraq - are, however, things really so clear? The film should rather be thoroughly defended against these accusations.

There are two points to be made; the first concerns the story itself - it is the story a small and poor country (Greece) invaded by the army of a much larges state (Persia), at that point much more developed, and with a much more developed military technology - are the Persian elephants, giants and large fire arrows not the ancient version of high-tech arms? When the last surviving group of the Spartans and their king Leonidas are killed by the thousands of arrows, are they not in a way bombed to death by techno-soldiers operating sophisticated weapons from a safe distance, like today's US soldiers who push the rocket buttons from the warships safely away in the Persian Gulf? Furthermore, Xerxes's words when he attempts to convince Leonidas to accept the Persian domination, definitely do not sound as the words of a fanatic Muslim fundamentalist: he tries to seduce Leonidas into subjection by promising him peace and sensual pleasures if he rejoins the Persian global empire. All he asks from him is a formal gesture of kneeling down, of recognizing the Persian supremacy - if the Spartans do this, they will be given supreme authority over the entire Greece. Is this not the same as what President Reagan demanded from Nicaraguan Sandinista government? They should just say "Hey uncle!" to the US... And is Xerxes's court not depicted as a kind of multiculturalist different-lifestyles paradise? Everyone participates in orgies there, different races, lesbians and gays, cripples, etc.? Are, then, Spartans, with their discipline and spirit of sacrifice, not much closer to something like the Taliban defending Afghanistan against the US occupation (or, as a matter of fact, the elite unit of the Iranian Revolutionary Guard ready to sacrifice itself in the case of an American invasion? The Greeks main arm against this overwhelming military supremacy is discipline and the spirit of sacrifice - and, to quote Alain Badiou: "We need a popular discipline. I would even say /.../ that 'those who have nothing have only their discipline.' The poor, those with no financial or military means, those with no power - all they have is their discipline, their capacity to act together. This discipline is already a form of organization." In today's era of hedonist permissivity as the ruling ideology, the time is coming for the Left to (re)appropriate discipline and the spirit of sacrifice: there is nothing inherently "Fascist" about these values.

But even this fundamentalist identity of the Spartans is more ambiguous. A programmatic statement towards the end of the film defines the Greeks' agenda as "against the reign of mystique and tyranny, towards the bright future," further specified as the rule of freedom and reason - sounds like an elementary Enlightenment program, even with a Communist twist! Recall also that, at the film's beginning, Leonidas outrightly rejects the message of the corrupt "oracles" according to whom, gods forbid the military expedition to stop the Persians - as we learn later, the "oracles" who were allegedly receiving the divine message in an ecstatic trance were effectively paid by the Persians, like the Tibetan "oracle" who, in 1959, delivered to the Dalai-lama the message to leave Tibet and who was - as we learned today - on the payroll of the CIA!

But what about the apparent absurdity of the idea of dignity, freedom and Reason, sustained by extreme military discipline, including of the practice of discarding the weak children? This "absurdity" is simply the price of freedom - freedom is not free, as they put it in the film. Freedom is not something given, it is regained through a hard struggle in which one should be ready to risk everything. The Spartan ruthless military discipline is not simply the external opposite of the Athenian "liberal democracy," it is its inherent condition, it lays the foundation for it: the free subject of Reason can only emerge through a ruthless self-discipline. True freedom is not a freedom of choice made from a safe distance, like choosing between a strawberry cake or a chocolate cake; true freedom overlaps with necessity, one makes a truly free choice when one's choice puts at stake one's very existence - one does it because one simply "cannot do it otherwise." When one's country is under a foreign occupation and one is called by a resistance leader to join the fight against the occupiers, the reason given is not "you are free to choose," but: "Can't you see that this is the only thing you can do if you want to retain your dignity?" No wonder that all early modern egalitarian radicals, from Rousseau to Jacobins, admired Sparta and imagined the republican France as a new Sparta: there is an emancipatory core in the Spartan spirit of military discipline which survives even when we subtract all historical paraphernalia of Spartan class rule, ruthless exploitation of and terror over their slaves, etc.

Even more important is, perhaps, the film's formal aspect: the entire film was shot in a warehouse in Montreal, with the entire background and many persons and objects digitally constructed. The artificial character of the background seems to infect "real" actors themselves, who often appear as characters from comics rendered alive (the film is based on Frank Miller's graphic novel 300). Furthermore, the artificial (digital) nature of the background creates a claustrophobic atmosphere, as if the story does not take place in "real" reality with its endless open horizons, but in a "closed world," a kind of relief-world of closed space. Aesthetically, we are here steps ahead of the Star Wars and Lord of the Rings series: although, in these series also, many background objects and persons are digitally created, the impression is nonetheless the one of (real and) digital actors and objects (elephants, Yoda, Urkhs, palaces, etc.) placed into a "real" open world; in 300, on the contrary, all main characters are "real" actors put into an artifical background, the combination which produces a much more uncanny "closed" world of a "cyborg" mixture of real people integrated into an artificial world. It is only with 300 that the combination of "real" actors and objects and digital environment came close to create a truly new autonomous aesthetic space.

The practice of mixing different arts, of including in an art the reference to another art, has a long tradition, especially with regard to cinema; say, many Hopper's portraits of a woman behind an open window, looking outside, are clearly mediated by the experience of cinema (they offer a shot without its counter-shot). What makes 300 notable is that, in it (not for the first time, of course, but in a way which is artistically much more interesting than, say, that of Warren Beatty's Dick Tracy), a technically more developed art (digitalized cinema) refers to a less developed one (comics). The effect produced is that of "true reality" losing its innocence, appearing as part of a closed artificial universe, which is a perfect figuration of our socio-ideological predicament. Those critics who claimed that the "synthesis" of the two arts in 300 is a failed one are thus wrong for the very reason of being right: of course the "synthesis" fails, of course the universe we see on the careen is traversed by a profound antagonism and inconsistency, but it is this very antagonism which is an indication of truth.

07.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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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08-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자유를 위한 댓가...
헐리웃 영화에서 보여지는 미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정부의 입장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계급성으로 유지되는 스파르타(그들의 정신)가 좌파의 정수라... 이해가 안되요.
특정 계급끼리만의 평등, 극단적인 규율체제가 내면화 된 것을 '자기 규율'로 규정 짓고, 너무 쉽게 결론 지은 것 같은데요...
(너무 무식한 소리만 했나 :-) )

로쟈 2007-08-0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줄곧 주장해온 바를 다시 반복하고 있을 뿐인데요,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란 구절에서 알 수 있지만 파시즘적 규율과는 또 다른 규율이 가능하고 또 지지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입니다...

marr 2007-08-0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로쟈님 덕분에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읽게 되는군요.
특히 이렇게 한 곳에서 말입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지젝의 글은 아주 흥미롭군요.

yoonta 2007-08-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혁명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이해가 될려고 하는군요. 요컨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의 혁명도 기존 질서와의 "급격한" 단절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이네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오늘날의 혁명도 러시아혁명이나 문화혁명처럼 과격하고 급격하게 추진되어야만 가능할까요? 따라서 포스트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헤도니즘적 혁명론은 결국 자본주의의 자장내로 포섭되어버리고 마는 혁명론일까요? 그렇다면 과거의 급진적 혁명들(러시아혁명이나 문화혁명등)은 오늘날 하나같이 실패로 귀결될수밖에 없었을까요? 지젝이 이야기한 것처럼 보다 "근본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지젝의 혁명론은 뭐랄까 그답지 않게 좀 치밀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유보를 하게 되네요.

로쟈 2007-08-0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영화평을 가지고 지젝의 혁명론이 어떻다고 판단하는 건 성급한 게 아닐까요? 그는 그 사이에 아예 '혁명론' 시리즈를 내고 있으니까요. 레닌에 대한 책도 또 한권 편집했구요. 우선되어야 할 것은 그에 대한 치밀한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7-08-08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말씀대로 좀더 치밀한 읽기를 바탕으로한 평가가 이루어져야겠죠. 그런데 로쟈님은 지젝의 혁명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혁명론에 관해서는 저는 지젝보다는 고진이나 네그리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이는데 님은 고진이나 네그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로쟈 2007-08-08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혁명론은 제가 아직 윤곽도 다 못 그리고 있습니다. 얼추 가늠만 해볼 따름이구요. 고진의 어소시에이셔니즘도 한 가지 길이라고는 생각합니다. 네그리에 대해서는 책만 사들이고 정독하지 못해서 말하기 어렵지만 '다중주의'에 대해서 아직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는 지젝의 네그리 비판에 따릅니다...
 

오늘부터 제3회 맑스 코뮤날레가 개최된다(아마도 자료집이 곧 출간될 듯하다). 초청된 학자들 중에는 국제헤겔연맹 의장 안드레아스 아른트 교수도 들어 있다. 그 정도면 거물급 인사가 아닌가 싶은데 한겨레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길래 옮겨놓는다. 헤겔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지젝이 부추긴 것이기에 '로쟈의 지젝'으로 분류해놓고.

한겨레(07. 06. 28) “최근 영국·미국서 변증법 관심 되살아나”

28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리는 3회 맑스 코뮤날레에 발표자로 초청된 안드레아스 아른트(58·오른쪽 사진)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부 교수는 헤겔 변증법의 대가로 손꼽힌다. 1992년 이래, 전 세계 진보적인 헤겔(왼쪽 사진) 연구자 500여명이 참여한 국제헤겔연맹 의장을 맡아 왔다. 이 단체는 중도보수 성향의 국제헤겔회의와 함께, 세계 양대 헤겔학회로 꼽힌다. 그는 현실 개념을 파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의 의미를 재정립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저서 <칼 마르크스:그의 이론의 전체연관에 대한 연구>와 <변증법과 반성:이성개념의 재구성을 위한 연구>는 헤겔 변증법 철학과 변증법 일반에 대한 고전적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26일 고려대에서 만난 아른트 교수는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또 “‘노동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면서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경수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가 인터뷰를 도왔다.


-헤겔 철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헤겔 이론은 근대의 지반에서 나왔다. 근대를 역사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헤겔 철학의 새로움은 구조에 대한 기술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항상 같이 사유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새로움은 인권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추상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제도를 통해 확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는 빈말이 아니라 구조 즉 시스템으로서 확보해야 한다고 봤다. 헤겔 변증법은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데 그 어떤 방법론보다 탁월한 도구이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올바르게 보고 기술할 수 있다.

 

-동일성에 대해 차이의 우위를 강조하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헤겔 변증법을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들뢰즈는 근대적(모던)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모던은 계속 발전되어 나가고 또 항상 현재화되는 개념이다. 현재 흐름 속에서의 발전의 개념인데,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모던을 ‘발전이 종결된 하나의 단위’로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은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이 말하는) ‘차이’를 하나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고 총체성 안에서 고찰한다.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간과하고 있다. ‘동일성’에 대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며 ‘차이’와 대립시키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에서는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과, 이들과 철학적 영향을 주고 받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네그리 등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이론을 어떻게 보나?

=네그리는 대중의 자발성 이론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대중 조직화 등 실천 환경에 대한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세계화의 대안 이론이 될 수 없다. 대중에게 이미 자발성이 있고 제국이 있으며 항상 대항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나이브(순진)하다.

-논문 ‘시간의 경제’에서 ‘자유시간’을 누릴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으로 노동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경제에 중요하다.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가질 것인지, 우리가 가진 시간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구성해나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동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 ‘노동형식’이 자유시간 안에 침투해 들어왔다. 자유시간 조차도 노동이나 업적을 위해 쓰이는 휴식이 되었다. 또 여가나 소비 산업을 위해 휘둘리고 있다.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좋으면서 행복한 삶이 뭔지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생의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거기서 출발해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출발점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허구적 욕구를 재생산해 낸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용가치’에 근거한 요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다시 한번 미래 생을 꿈꾸고 사회적으로 배워야 하고 정치적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보혁명 시대에 유의미한 변혁적 도구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국가가 자본주의를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론>의 ‘1일 노동시간’장을 보면, 마르크스는 국가가 잔혹한 아동 노동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잔혹성을 누그러뜨리는 기능도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 비판적 운동도 중요하다. 고삐풀린 신자유주의 움직임을 제어해줄 수 있다. 유럽연합 등 모든 기관을 이런 식의 비판 운동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우 노조간 연대 조직이 유럽노동헌장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의 최소 노동조건을 만드는 운동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지배 철폐만을 외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적 대안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상품 생산과 분배, 소비를 어떻게 규정하고 계획적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독일 등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동향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변증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마르크스 변증법 이해를 다루는 문헌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토론도 활발하다. 이런 미국 쪽 움직임이 오히려 유럽 쪽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내가 맡은 대학 강좌를 보면, 최근 몇해 마르크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과목 수강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위축되지 않고 마르크스 사상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도그마(독단)에 빠질 가능성을 줄이는 긍정적 계기가 됐다.(글 강성만 기자)

07. 06. 28.

P.S. 갑작스런 '헤겔 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비토리오 회슬레 교수의 주저 <헤겔의 체계>(한길사, 2007)가 번역돼 나오기 시작했고, 헤겔 원저로는 오랜만에 <인륜성의 체계>(울력, 2007)가 우리말 번역본을 얻었다. 그리고 나종석 교수의 <차이와 연대>(길, 2007) 또한 최근에 나온 묵직한 연구서이다. '헤겔의 현재성' 정도는 허언이 아닌 듯싶다...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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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대학원신문(제152호)의 특집기사를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출처는 학술저널 담비이다. 편집자의 말은 아래에 옮겨져 있는데, 초점은 지젝이 이해하는 라캉과 맑스가 어떤 라캉이고 어떤 맑스인지를 살펴본다는 것이다. 자세한 정독은 다음으로 미뤄두지만, 이제 이 정도 주제에 대해서라면 국내에서 연구논문들이 쏟아져나올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시차적 관점>이 마저 소개된다면, 우리는 그의 주저들을 다 갖게 될 테니까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지젝을 읽는 일로도 한 해가 짧다니!

이번 호 <인문학술>에서는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들을 살펴본다. 지젝은 셸링과 칸트, 헤겔 등의 독일 철학에 바탕을 두고 라깡을 재해석하면서 이를 맑시즘과 결합해 정치, 사회, 문화 형식에 대입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지젝이 해석해 낸 라깡과 맑시즘을 지젝 이전의 다른 이론가들의 그것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본고의 이러한 논의를 통해 지젝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젝의 논의가 가지는 함의와 영향까지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경희대학원신문(07. 06. 21) 칸트에서 헤겔로 혹은 초자아를 넘어 사랑으로

시차(parallax)라는 간극

동일성과 차이의 ‘낯선’ 동거. 동일성으로서의 차이, 차이로서의 동일성. 동일성과 차이가 겹치는 곳. 동일성도 차이도 아닌 동일성-차이라는 괴물이 숨쉬는 공간에서 지젝은 철학사를 회집한다. 대립구조가 배제하고자했던 ‘낯선’ 괴물은 이미 구조 내부에 있는 ‘친밀한’ 이웃이었다. 낯설고도 친밀한 괴물-이웃.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이라고 답하는 오이디푸스는 이미 자신이 스핑크스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넷과 셋과 둘이 하나 속에 있는 혼합괴물. 차이는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인간과 괴물을 구별하는 외재적 차이가 아닌 인간내부의 균열. 오이디푸스의 시선 이전에 이미 오이디푸스 속에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스핑크스의 응시(gaze)가 있다. 봄과 보여짐이 ‘함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함께 있기 때문에 시선과 응시의 간극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다. 대립이나 모순으로 해소될 수 없는 내부적 분열. 바로 이것이 시차라는 간극이다.

차이의 철학은 시차라는 간극을 통해 동일성의 철학 한 가운데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다. 칸트의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의 간극은 정신분석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죽었어’(I am dead)의 서술어를 부정하면 ‘나는 죽지 않았어’(I am not dead)라는 부정판단이 되지만 서술될 수 없음을 긍정하게 되면 무한판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죽은것도 산 것도 아니야’(I am  undead) ‘나는 죽었어’라고 말하는 살아있는 나. 긍정과 부정이 시차적 간극으로 존재하는(동시에 발생하는) 공간에서 칸트는 뱀파이어가 된다. 그는 유령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판단은 결국 대립구조가 사유할 수 없는 ‘사이공간’, 대립항들의 내부적 균열을 초래하는 불가능한 공간을 불러낸다. 라깡은 이 재현불가능한 공간을 실재(Real)라 부른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라깡의 실재를 이미 선취함으로써 정신분석의 공간을 개시한다. 대칭이나 모순과는 달리 이율배반은 모두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인과론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와 ‘자유는 인과론을 넘어선다’의 이율배반은 둘 모두를 긍정함으로써 해소된다. 자유를 예외적인 공간으로 배제할 때 인과론적인 우주는 전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외성을 통한 전체 또는 보편성의 확립. 라깡의 남성적 우주.

반면 칸트는 ‘세계는 유한하다’와 ‘세계는 무한하다’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유한/무한이라는 대립구조로 사유될 수 없는 기원적 사이공간을 불러낸다. ‘세계는 (전체로)존재할 수 있는가?’ 전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예외적 공간이 거세될 때 또는 예외적 초월성이 전체 속으로 들어와 내부적 균열을 일으킬때 세계는 비전체(Not-All)가 된다. 라깡의 여성적 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예외를 통해 보편을 획득하는 남성의 우주와는 달리 여성의 우주는 보편/특수의 ‘사이공간’인 특이성들(singularities)의 집합이다. 실체화할 수 없는 빈공간인 코기토(cogito) 주체를 발견한 후 서둘러 그것을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 바꾸는 데카르트처럼 칸트 역시 비전체를 지시하는 여성적 우주 앞에서 머뭇거린다.



지젝이 보기에 헤겔은 칸트를 전복하거나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반복(또는 완성)할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칸트에 대한 충실성은 칸트의 결핍, 즉 칸트체계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으로 지시되는(이점에서 지젝은 데리다 역시 칸트의 한계내에 있다고 말한다) ‘대립물의 일치’를 끌어낸다.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와 ‘이미 발생하고 있다’의 차이가 지젝에게 칸트와 헤겔, 데리다와 라깡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시차적 간극이 갖는 타자성을 절대화시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물신화할 때 칸트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미 와있는 메시아에게 언제 올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처럼 불가능성은 절대적 타자성으로 승화된다. 타자의 절대성이 타자의 결핍을 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칸트의 예지계 역시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상계와 예지계의 ‘사이 공간’ 다시말해 초월적 대상을 현상계의 내부적 간극으로 읽어낼 때 칸트는 헤겔과 ‘함께’ 있다. 불가능한 초월성에서 초월성의 불가능성으로, 타자의 절대성에서 타자의 결핍으로, 칸트에서 헤겔로 이동할 때 정신분석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초자아에서 사랑으로
법은 비전체이다. 그것은 이미 기원적 폭력이라는 실재를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상징적 방어물이다. 데리다가 미국독립선언문에 대한 분석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법의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그래서 법 이전에 존재해야하는 ‘우리, 미국의 인민’은 단지 법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결과물일 뿐이다. 죄의식의 기원을 설명하려던 프로이트가 아들들이 이미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기원적 아버지 살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원) 팬터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살해는 규정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법의 기원, 실재로서의 폭력을 상징적 행위로 환원시키는 방어일 뿐이다.

법의 내재적 분열을 초자아 논의에 한정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초자아는 상징적 금기를 넘어서는 향유, 외재적인 법을 보충하는 비합리적이고 가혹한 명령이다. 그것은 법의 전체성을 망가뜨리는 얼룩이지만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법이기도 하다. 라깡이 칸트와 사드를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식인풍습이 없어요. 어제 남아있는 마지막 놈을 처치했거든요’라고 말하는 식인종처럼 칸트의 합리적인 법을 작동시키는, 그것을 강제적 명령으로 바꾸는 외설적 행위주체는 사드적인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그러나 위반이 초래하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옭아매는 법이다. 죄를 짓지 않을수록 죄의식이 증가하듯이 다양성의 담론을 통해 초자아는 오히려 자신의 단일성을 강화한다. 법의 결핍을 보여주어야 할 향유가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형태로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초자아적인 자본이 다양한 지식의 형태로 세계를 전체화하고 있는 지금 다양성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불가능한 윤리적 행위가 요구된다. 다양한 위반은 여전히 법과 위반의 초자아적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숨기고 있는 법의 불가능성, 불가능한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지젝은 바틀비적인 제스처를 위한다. 법과 위반의 악순환으로부터의 물러남.

아감벤은 명령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은총, 외부도 내부도 아닌 사이 공간에서 생겨나는 주권, 법의 중지와 법제정의 동시성을 주장함으로써 초자아적인 향유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사이공간,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아닌(non-non-Jew)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다시 사랑을 초자아로 설명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다. 냉소적 거리를 통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처럼 위반적 거리에 기초한 초자아를 중지시키기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의 문자적 동일시이다. 윤리적 행위는 위반의 예외적 장소를 제거함으로써 초자아의 매개없이 사랑의 법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말처럼 사랑은 예외적 지식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결핍, 지식을 비전체로 만드는 시차적 간극이다. 전체를 알지 못해 사랑하지만 전체의 지식 역시 결핍되어 있다.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만나는 곳에서 사랑이 발생한다. 유대교가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숨기고자 하는 신의 결핍을 드러낼 때 기독교는 ‘사랑’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모든 상징적 의미나 광채가 사라진 육체, 배설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와의 불가능한 동일시, 결핍된 신과의 만남이 사랑인 것이다.(민승기/ 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경희대학원신문(07. 06. 21)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알튀세르와 라깡의 조우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알튀세르에 대한 충실한 주석서인 『이론의 우회』에서 알튀세르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었다.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서로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다.”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이 어긋남의 극적인 예로써(*예로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들고 있다.

1968년 파리는 그의 지병인 우울증을 매개로 알튀세르를 스쳐지나갔고, 그의 뒤 늦은 개입이 바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미완성 연구노트였다. 알튀세르는 이 뜨거운 68년도의 거리를 가능하게 했던 이데올로기의 자율성과 주체의 자율성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지만 그 이론적 결과물은 구조기능주의의 혐의였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노트 속에서도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다시 한 번 어긋난다.

근본적인 논쟁을 ‘푸코 대 하버마스’가 아닌 ‘라깡 대 알튀세르’로 잡고 있는 그의 첫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참고했을 때, 지젝의 출발점은 바로 이 어긋남이다. 알튀세르의 무엇이 알튀세르를 이 어긋남 속에 감금하였는가? 지젝은 구조기능주의를 이유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성급히 거부하는 몸짓을 거부하고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서부터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시작한다. 이 지젝의 몸짓에서 알튀세르는 진정으로 라깡을 만나야만 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우발적 마주침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알튀세르와 라깡의 만남이 두 개의 회귀, 즉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프로이트로의 회귀’간의 만남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비경제결정론적인 사회구성체의 논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과 프로이트로의 회귀는 자아심리학의 헤게모니를 넘어서 무의식의 주체를 재확언·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두 회귀의 만남이라는 이론적 스캔들이 낳은 사생아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체라는 실체의 논리와 무의식 또는 주체성의 구성이라는 주체의 논리가 매개되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전체적인 기획 속에서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바로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정의의 변화, 즉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에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의 변화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알튀세르는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지만 ‘주체 없는 과정 또는 구조’에서 ‘주체 있는 과정 또는 구조’로의 변화 또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에서 ‘최종심금에서의 계급투쟁의 결정’으로의 변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즉 계급 또는 주체의 논리라는 빛 아래에서 읽혀져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지젝이 가지고 오는 개념들은 실재, 적대와 같은 개념들이다.



실재란 라깡의 개념으로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상징계의 한계, 또는 상징계의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또는 상징계가 비­전체임을 보여주는 한계 차원이다. 그리고 적대란 이 실재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한 가지 양태이다. 적대란 단순한 차이나 대립이 아니다. 좌우의 대립이라는 예를 통해서 왜 그런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파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기적인 총체로서 인식하며 사회의 분열을 외부적인 침입의 결과로서 생각한다. 그리고 우파는 자신을 이 유기적 총체의 수호자로 좌파를 가장 나쁘게는 이 외부의 침입자로 간주한다. 이에 비해서 좌파는 사회를 본래적으로 분열되고 갈등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좌우의 구별 또한 우파의 구별법과 다르다. 이 둘 간의 관계를 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둘이 차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전제를 만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음/양과 같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기적인 총체를 이루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이들의 차이가 측정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잴 수 있는 공통의 잣대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던 좌/우의 관계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서로를 구별하고 인식하고 정의하는 방식에서 조차도 달랐다. 즉 이 둘 사이에는 소통의 공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소통의 공백만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좌우의 관계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일관되고 정합적인 전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존재하며 이 공백으로 인해 사회는 유기적인 전체가 아님이 드러난다. 이 공백에 대한 이름이 바로 라깡의 실재이며, 이 공백에 의해 가로질러진 비관계적 관계―상식적인 의미에서의 관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관계인―가 바로 지젝이 말하는 적대이다.



계급적대의 중층결정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계급투쟁, 즉 계급적대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은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밤의 위엄이 아니듯이 계급투쟁 또는 계급적대란 정치의 로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급적대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정하듯이 실정적으로(positive)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 사회의 궁극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적대란 라깡의 실재처럼 오로지 중층결정을 통해서만 그리고 증상적인 형태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중층결정이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 형성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이다. 중층결정의 논리에 따르면 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 욕망의 중핵―라깡적 의미의 실재―을 결코 볼 수 없으며 오직 전치와 응축이라는 꿈 작업을 통해서 형성된 왜곡된 형태의 무의식적 욕망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계급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꿈이 무의식적 중핵과 연결된 낮의 찌꺼끼들을 배치하는, 즉 무의식적 중핵의 리비도를 전치하고 여러 다양한 꿈 사고들의 계열을 응축하듯이, 계급적대란 자신의 적대적 에너지를 다양한 사회갈등으로 전치하고 이 갈등들을 라클라우가 말한 등가의 연쇄로 응축하는 중층결정 속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정식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계급적대란 항상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 갈등이라든지 여성과 남성의 대립이라든지 또는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과 내국인의 갈등 등으로 중층결정된다. 즉 계급적대란 철저하게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 상이한 갈등 방식의 우연적이고 비일관적인 배치―즉 정세, 국면―를 설명해 주는 구조화 원리이자, 라깡적인 실재의 의미를 살려본다면 초월적 틈새 그 자체이다.

꿈이 탁월한 무의식의 형성물, 즉 증상이라면 이 계급적대는 증상의 형태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증상이란 억압된 것의 회귀이면서도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쾌락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즉 의식으로부터 배제되면서도 이 의식을 지탱하고 있는 실재의 한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젝은 이것을 사회에도 적용하고 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와 등가교환을 전제로 성립된 사회구성체이다. 그런데 이 사회구성체를 지탱하면서도 이 사회구성체의 전제에 위배되는 역설적인 존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다. 다만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는다는 부자유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품은 등가교환된다. 그러나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등가교환에서 제외되는 예외적인 상품이다. 그런데 이 예외, 즉 임금노동과 잉여가치가 없이는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이 예외를 떠맡고 있는 계급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이런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일관되고 정합적인 사회―즉 의식―를 위해서는 배제되거나 부인되어야만 할 증상인 셈이다. 그리고 계급적대로 인한 사회의 비일관성과 마찬가지 이야기이지만 증상에 의한 사회의 비일관성을 다시금 일관된 것으로 환상화하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계급적대란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들이며, 이것은 지젝이 벤야민의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지칭하고 있는 라깡적 의미에서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의 고집이고, 즉 반복강박으로서의 죽음의 충동인 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도 그랬지만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의식상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의식상의 각성으로 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데올로기가 근거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가 무너질 때 폐지된다. 이와 대당하는 지젝의 개념은 바로 ‘환상의 횡단’으로서의 행위이며, 라깡적 용어로 실재의 윤리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젝의 근래의 작업들이 탁월한 행위였던 레닌적인 몸짓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의식의 주체란 권력의 장소이자 저항 또는 전복의 장소로 정의되고, 이 논리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라는 헤겔적 모토 아래 역사적 유물론의 기획은 다음과 같이 선언된다. 즉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과정’은 ‘주체 있는 과정’이 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가 기획했던 역사적 유물론의 가능성의 윤곽이 잡힌다: “요컨대 절대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헤겔적 모토의 마르크시즘적 판본은 역사는 경제적 토대의 발전(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주체의 논리)으로도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지젝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또 다른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인 숀 호머의 지적대로 지젝은 교조적인 라깡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전통 마르크스주의자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한 번도, 그리고 심지어 알튀세르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를 모든 실정적 속성을 박탈당한 라깡의 주체로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레고리 엘리어트가 자신을 반-반 알튀세리앙이라고 지칭했던 호명법을 차용해 본다면, 지젝의 입장은 아마도 포스트-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젝이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을 부활시키면서 하는 질문은 이렇다. 만약 지금 당신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죽은 개들의 복수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알튀세르라는. 이들이 ‘이론은 실천이다. 즉 실천은 이론이다’와 같은 정치의 시간과 이론의 시간 간의 단락의 가능성을 사유 가능하게 한다면.(이병주/ 언론정보학부 강사)

07. 06. 23.

P.S. 생각이 난 김에 지젝이 공부하고 봉직한(봉직하고 있는?) 류블랴나대학의 사진을 옮겨놓는다.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며 사진상으로 보니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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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7-06-2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줄의 '슬라예보' 지젝...^^;; 유교연방이 모두 쪼개지면서 각 도시들이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 늘 헷갈리는데, '슬라예보'에서 연상되는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네요. 앞으로도 자그레브, 베오그라드와 계속 혼동할 듯합니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냐는 순전히 지젝 때문에 알게 됐네요.;;

로쟈 2007-06-2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편집자부터 헷갈리다니! 사랑님의 '유교연방'(유고연방)도 비슷한 경우인가요?^^
 

영화 <검은 집>에 대한 리뷰(http://blog.aladin.co.kr/mramor/1309219)를 옮겨놓고 보니까 문득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의 어느 대목에서 지젝이 하이스미스의 동명의 작품을 다루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로 읽는구만. 나는 나대로 읽겠다. <삐딱하게 보기>에서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라고 읽는다)의 책들이 나온 게 어느덧 재작년 겨울이었다. 책은 두 권쯤 사둔 것 같은데 아직 열어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물론 지젝의 얘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예전에 읽어둔 책의 서두는 http://blog.aladin.co.kr/mramor/803797 참조).

 

 

 

 

하이스미스의 <검은 집>은 <삐딱하게 보기>의 1장 중 '현실 속의 블랙 홀' 절에서 언급된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검은 집>은 환상 공간이 텅빈 표면, 즉 욕망의 투사를 위한 일종의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환상 공간이 갖는 생생한 내용들의 매혹적인 현존은 단지 이 텅빈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27쪽)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사건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데, 그곳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면 마을의 선술집에 모여서 마을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오래된 폐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는 향수어린 추억과 마을의 전설들을 되새기곤 한다. 이 신비로운 '검은 집'은 어떤 저주에 걸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그곳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라고(그 집에 유령이 나타난다든지, 침입자는 모두 죽이는 정신병자가 혼자 살고 있다든지 하는 소문이 퍼져 있다) 여겨졌지만, 동시에 이 '검은 집'은 그들 모두를 젊은 시절의 추억과 연결해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은 그들이 최초로 저지른 범죄, 그 중에서도 성적 경험과 관련된 장소였던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 마을에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는 젊은 엔지니어다. '검은 집'에 대한 전설을 모두 듣고난 그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내일 저녁 이 수수께끼에 싸인 집을 탐험해보겠다고 공표한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않했지만 암묵적으로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다음날 저녁 젊은 엔지니어는 뭔가 끔찍한 사건이, 최소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질 것은 기대하면서 그 집을 찾아간다. 잔뜩 긴장한 채 어둡고 낡은 폐가에 접근한 그는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서 방마다 모두 조사해보지만 마루 위에 있는 몇 개의 썩은 매트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곧바로 선술집으로 돌아온 그는 의기양양하게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들의 '검은 집'은 단지 낡고 더러운 폐가에 불과하며 신비스럽거나 매력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노라고. 그의 말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그 엔지니어가 떠나려고 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사납게 그를 공격한다. 불행하게도 젊은 엔지니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고 만다."(28쪽)

그렇다면, 어째서 이 마을 신참자의 행동이 사람들을 그토록 경악하게 만들었을까? 지젝에 따르면 그들의 적개감은 "현실과 환상 공간의 '다른 장면(other scene)' 간의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검은 집'이 금지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향수어린 욕망과 왜곡된 추억들을 투사할 수 있는 하나의 빈 공간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으로서의 '검은 집'을 그저 낡은 폐가에 불과하다고 폭로함으로써 그 젊은 침입자는 "그들의 환상 공간을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현실로 환원시켜버렸다. 결국 그는 현실환상 공간 사이의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접합할 수 있었던 장소를 그들에게서 박탈했던 것이다."('접합하다'는 'articulate'의 번역이다. 여기서는 '표현하다' 정도로 충분하다.)

마지막 문장에 붙은 각주에서 지젝은 이렇게 부연한다: "이러한 점에서 필 로빈슨의 <꿈의 구장>(1989)에서 야구장으로 변형된, 수확을 끝내 깨끗해진 옥수수밭의 역할은 '검은 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그것은 환상의 형상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청소라는 점이다."(47쪽)

 

"<꿈의 구장>에 관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돌 것은 그 순수하게 형식적인 측면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 밭을 네모나게 잘라내고 그것을 담장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벌써 유령들이 그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 뒤의 보통 옥수수는 기적과도 같이 유령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의 비밀을 보호하는 신비로운 덤불로 변형된다. 요컨대 평범함 마당이 '꿈의 구장'이 되는 것이다."(48쪽)

지젝은 이 각주에서만도 세 가지 이상의 사례를 더 드는데, 이 정도만으로도 '현실 속의 블랙홀'로서의 '환상 공간'이 곧 '꿈의 구장'이기도 하다는 점은 접수가능하다(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잖은가?). 여기까지 무리가 없다면 이제 중급 단계인 '환상의 윤리학'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루도록 하겠다...

07.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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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가기 대 반복하기'는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2006)의 결론이다. '되돌아가기'와 '반복하기'의 목적어로 걸려 있는 것은 '레닌'이다. 즉, 지젝이 대비시키고자 하는 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기'와 '레닌을 반복하기'의 차별성이고, '레닌을 반복하기'야말로 지젝 고유의/특유의 정치적 전략 혹은 프로그램을 집약해주는 표현이다.

 

 

 

 

비록 작년 여름에 출간된 책이지만, 그리고 때로 부당한 폄하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나는 <혁명이 다가온다>야말로 지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에서 '혁명'이 갖는 의미와 그 가능성을 질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익한 책이며(왜냐면 분량이 제일 만만하니까!) 특별히 10월 혁명 90주년이 되는 올해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87년 6월을 기념하는 일은 한 30년쯤 뒤로 미뤄두면 안될까?).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를 좀 훑어보면서 올 여름에 이 두권의 책을 정리해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거기에 밀린 숙제를 보태자면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와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것이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쓴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이 책을 손에 든 한 가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이 책이 생각만큼 널리, 그리고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이면에서 분량만큼 만만치는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읽히고 너무 쉽게 평가되고 너무 쉽게 제쳐놓여진다는 점(그래서 그들은 전진하고 있는가?). 지젝은 비의적인 저자가 아니기에 대단한 수수께끼나 퍼즐, 음모 등을 숨겨놓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책들은 굳이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읽으면 된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상으로는 그냥 읽어나가는 게 대놓고 수월하지만은 않다(수월하게 읽히는 가라타니와 비교해서도 그렇다). 번역이 낳는 예기치 않은 장애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지젝에 대한 오해의 일부는 그러한 장애에 기인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읽어 넘어가기', 혹은 '넘어/너머 읽기'이다. 일단은 '결론'부터 넘어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덕분에 시오랑에 관한 페이퍼가 당분간 미뤄지게 됐다). 혹 몇 분의 독자가 이 책을 좀더 재미있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국역본 외에 내가 참조한 건 영어본(2002)과 러시아어본(2003)이다. 이전에 적었지만 국역본은 독어본(2002)을 옮긴 것이며, 이 독어본은 러시아본과 일치한다. 하지만 영어본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영어본은 레닌의 1917년 문건 선집에 지젝인 붙인 후기로 구성돼 있고, 이 후기의 내용이 <혁명이 다가온다>와 대략 일치한다. 하지만 차이가 나는 대목들도 적지는 않다.

"소련의 전체 역사는 프로이트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로마의 이미지에는 현재가 고고학적 유물의 서로 다른 층위라는 겉모습으로 침전되어 있다. 마치 트로이의 일곱 층위(서로 다른 모델)처럼 새로운 층은 앞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덮고 있어 역사는 더 오래된 시기를 향한 회귀에서 점점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고고학자같이 된다."(265쪽)

프로이트는 생전에 로마를 여러 차례 방문한 것으로 돼 있는데(특히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많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 도시의 역사가 여러 겹의 고고학적 지층이 퇴적돼 있는 걸로 봤다는 것이고 지젝에 따르면 소련사가 바로 딱 그러한 이미지-모델과 비슷한다. 혹은 '또다른 모델(another model)'을 찾자면('서로 다른 모델'이 아니다) '트로이의 일곱 지층'에 비유될 수 있다('층위'보다는 '지층'이 낫겠다). '일곱 지층'이라고 돼 있지만 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해보면 전체로는 '아홉 개의 지층'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트로이에 해당하는 것만을 카운트한 듯하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집들이 건설되어 사람들이 살다가 마침내는 파괴되어 버린 아홉 기(紀)를 나타내는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제1~7기 트로이는 요새, 트로아스의 수도, 왕의 가족·신하·노예들이 살았던 왕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5기는 청동기시대 초기(BC 3000경~1900)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간 동안의 주민들이 에게 해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 헬라도스 문화기의 그리스 본토에 살던 주민들의 선조였을 것이며, 아나톨리아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이 제6·7기는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BC 1900경~1100)에 해당한다.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파괴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일리온은 제9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소련사는 어째서 이러한 도시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가?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 역사는 배제의, 인간의 비인간으로의, 역사의 회고적인 다시 쓰기와 동일한 축적이 아닌가?" 즉, 공식 이데올로기상으로 소련사는 지속적인 배제의 축적이요,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내모는 일의 축적이자, 거듭 역사 다시쓰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탈스탈린화'는 '복권', 즉 당의 과거 정치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반대의 과정이라고 신호되었다." '신호되었다'고 옮겨진 단어는 영어본에서는 '지시되었다(indicated)'로, 러시아어본에서는 '수반되었다'로 옮겨졌다.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탈스탈린화'가 정반대의 과정, 곧 점차적인 '복권'과 당의 과거 '오류들'에 대한 인정을 통해 표시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이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점차적인' 복권의 과정/순서이다.

"악마처럼 취급되던 볼셰비키 옛 지도자들의 점진적인 '복권'은 아마 소련의 '탈스탈린화'가 어느 정도(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민감한 지표로 기능할 수 있다." 해서 가장 먼저 복권된 사람들이 1937년에 총살당한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 지도자들이고 맨마지막으로, 그러니까 고르바초프 시기 공산주의 정권 붕괴 직전에 복권된 이가 부하린이었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1893-1937)는 소련군 최고사령관(1925-28)을 지낸 고위 장성이지만 1936년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을 순방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군내 트로츠키파 조직을 건설하고 독일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리고 저명한 볼셰비키 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은 혁명직후 <프라우다>지의 편집장을 지냈고 여러 권의 사회주의 경제이론서를 집필했다. 1921년 신경제정책(NEP)을 주도적으로 지지하면서 '우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역시나 1937년 트로츠키파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비밀리에 체포되어 이듬해에 처형당했다. 국내엔 <과도기 경제학>(백의, 1994) 등이 번역돼 있으며, 단행본 연구서로는 김남국의 <부하린: 혁명과 반혁명 사이>(문학과지성사, 1993)가 유일한 게 아닌가 싶다. 부하린의 복권은 1988년에 이루어졌다.

"이 최후의 복권은 자본주의로 돌아간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복권된 부하린은 1920년대 '부자가 되자!'라는 유명한 구호를 내걸고 노동자와 농민 간의 동맹을 주창했고 강제 집산화에 반대했다."  이 유명한 구호(슬로건)가 영어로는 "Enrich yourselves!"이다. 딱 "부자되세요!". 부하린의 복권과 함께, 그리고 '부자되세요!'란 구호의 부활과 함께 러시아는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가게 된 것.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절대 복권될 수 없는 인물,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반공주의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배제되는 한 사람, 레온 트로츠키, 혁명의 '떠돌아다니는 유대인', 진정한 반스탈린주의자, '일국 사회주의 건설'의 아이디어에 대립되는 '영구혁명'을 주창한 철천지원수가 있다."(266쪽)

 

 

 

'철천지원수'란 표현은 영어로는 'arch-enemy'이며 러시아어로는 '저주받은 적'('불구대천의 원수')이라고 옮겨져 있다. 1920년대 권력암투의 트로이카 '부하린(우파)-스탈린(중도파)-트로츠키(좌파)'에서 트로츠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복권될 수 없는 인물(포지션)로 남아 있는 것(*최근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3부작이 완간되었다 -07. 25.). 

 

 

 

 

"우리는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근원적(기초적) 억압과 무의식 속에서의 부차적 억압 사이의 구별과 위험을 무릅쓰고 나란히 다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물론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의 배제는 '근원적 억압'에 해당한다. "1990년 이전의 현존 사회주의에서뿐 아니라 1990년 이후의 현존 자본주의에서 심지어는 공산주의에 대해 향수를 가지는 경우도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트로츠키는 어떤 자리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아마 '트로츠키'라는 기표는 레닌주의의 유산에서 다시 찾을 가치가 있는 가장 적절한 호칭일 것이다."(266-7쪽)

분량상 레닌주의의 유산으로서의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07.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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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6-13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맛만 보다가 만 느낌입니다. 후편도 어서 써주시길 ^^

그런데 소련사가 로마의 지질학적 지층과 같은 여러 겹의 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비유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공식 이데올로기상으로 소련사는 지속적인 배제의 축적이요,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내모는 일의 축적이자, 거듭 역사 다시쓰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트로츠키와 같은 여러 당내인물들의 배제가 축적되어온 역사라는 것을 굳이 고고학적 지층과 연계시키는 이유는? 그냥 문학적 수사인 것인지..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요.

로쟈 2007-06-1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은 그냥 읽어보셔도 될 거 같은데요.^^

yoonta 2007-06-1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산다 하고 계속 뒤로 밀리게 되네요. 로쟈님 페이퍼때문이라도 어서 한권 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

2007-06-28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지젝의 레닌론이 많은 도움이 되실 거 같습니다. 주객분리론에 대해서도. 제 생각은 7월로 넘어가야 보탤 수 있을 거 같고요.^^;

노승영 2008-10-2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트로츠키 론(『Terrorism and Communism』 서문)을 번역하는 중에
프로이트의 로마 이미지를 검색해 보니 로쟈 님 블로그로 연결되더군요.
지젝이 레닌에게 써먹은 표현을 많이 차용하고 있어서 이 블로그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번역 비평 글이 있길래 마감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도 다 찾아 읽었습니다.
답례(?)로 제 번역을 올립니다.
혹시 출간 전 원고를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①⑧⑤⑤③①①①③@paran.com

소 비에트 연방의 전체 역사는 프로이트가 로마를 표현한 유명한 이미지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 역사는 여러 겹의 고고학적 지층이라는 형태로 저마다의 현재에 퇴적되어 있다. (또 다른 모델인) 트로이의 일곱 지층과 마찬가지로 새 지층이 이전 지층을 차례로 덮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앞선 시대를 향해 퇴행하며--고고학자가 깊숙이 더 깊숙이 땅을 파헤치며 새 지층을 발견하듯 나아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배제하고 인간을 비(非)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역사를 소급하여 다시 쓰는 행위가 누적된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복권’ 과정, 즉 당의 과거 정책에서 ‘오류’를 인정하는 정반대의 과정이 탈(脫)스탈린화의 신호탄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The entire history of the Soviet Union can be comprehended as homologous with Freud’s famous image of Rome, a city whose history is deposited in its present in the guise of the different layers of the archaeological remainders, each new level covering up the preceding one, like (another model) the seven layers of Troy, so that history, in its regression towards ever older epochs, proceeds like the archaeologist, discovering new layers by probing deeper and deeper into the ground. Was the (official ideological) history of the Soviet Union not the same accumulation of exclusions, of turning persons into non-persons, of the retroactive rewriting of history?Quite logically, ‘de-Stalinization’ was signalled by the opposite process of ‘rehabilitation’, of admitting ‘errors’ in the past policies of the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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