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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155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두 권의 책,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관한 것이다. 타이틀은 "우리시대의 신과 종교, '문제는 사랑이다'"로 나갔다.

 

 

 

 

'스타’ 과학자와 철학자가 신에 대해 묻는다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닥에서부터 재고해보도록 요구하는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영국의 다윈주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슬로베니아의 라캉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가 그 두 권의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만들어진 신』이 약간 먼저 나왔지만 원저의 경우엔 『죽은 신을 위하여』(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쟁이(The Puppet and the Dwarf)’)가 지난 2003년에, 그리고 『만들어진 신』(원제는 ‘신이라는 망상(The God Delusion)’)은 2006년에 출간되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스타’ 과학자/철학자의 근접 조우는 그런 빌미로 마련된다.

그렇다고 해서 도킨스와 지젝이 직면 대면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중에 출간된 만큼 도킨스가 지젝을 참고할 만하지만 『만들어진 신』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도킨스가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에 혐오감을 보이며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론에 동조했던 걸 고려하면 반(反)영국적인 헤겔철학(독일)과 라캉정신분석(프랑스)을 이론적 거점으로 한 지젝의 ‘사변’을 도킨스가 인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모든 분야의 지식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드는 지젝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을 참조하지만 그가 보다 자주 거론하는 인물은 도킨스가 아니라 대니얼 데닛 같은 과학자이다(데닛은 도킨스의 책 『확장된 표현형』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거기에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제사(題詞)를 달고 있는 『만들어진 신』이 종교 일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를 특권화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예비적으로 알아두어야겠다(지젝의 책에서 제사 역할을 하는 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이다).



무언가의 부산물일 뿐인 종교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제안하는 『만들어진 신』은 전반부 대부분을 “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걸 입증하는 데 할애한다. “신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독실한 맹신자들에게는 반감어린 호기심을 유발하겠지만 일반 독자가 읽기에 보다 흥미로운 건 ‘종교의 뿌리’와 ‘도덕의 뿌리’ 등을 다룬 다른 장들이다. 다윈주의 과학자로서 도킨스가 갖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종교적인 욕구를 충동질한 자연선택의 압력들은 무엇이었을까?” 좀스러울 정도로 ‘경제성’을 따지는 다윈주의자가 보기에 종교는 너무 낭비적이고 너무 사치스럽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햇빛이 드는 숲속의 빈터에 앉아 있는 공작 수컷들처럼.”

그렇다면, “왜 신 중추를 성장시키는 유전적 성향을 지닌 조상들이 그렇지 않은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후손을 가진 것일까?” 말하자면 종교적인 본성의 유전적 이익이란 게 어떤 것일까를 따져보는 것인데, 도킨스나 다른 진화생물학자들이 보기에 그러한 성향은 직접적인 이익과 무관한 듯하다. 그것은 감기가 종교와 흡사한 양상으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이지만 우리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런 결론은 종교가 다른 무언가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는 달을 기준으로 날아가도록 진화한 나비의 본성이 촛불을 향해 뛰어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부산물이자 부작용이다. 요컨대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가 다른 무엇의 부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일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되는데, 아직은 ‘가설’들만이 제시돼 있는 수준이다. 도킨스의 가설은 소위 ‘잘 속는 아이’ 이론이다. 아이들은 앞선 세대의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습득할 필요가 있으며 자연선택은 아이의 뇌에 부모나 다른 어른이 어떤 말을 하든 믿는 경향을 심어놓았다(교회는 어릴 때부터 보내야 한다!). 그렇게 믿고 따르는 것이 보통은 생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이면은 노예처럼 속는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종교의 비합리성이 뇌에 들어 있는 특정한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랑에 빠지는 성향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사랑에 빠질 때 우리의 뇌에는 신경물질들이 활성화되면서 독특한 뇌 상태를 이루게 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소위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현상이 오랫동안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도록 배우자에게 충실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진화해왔다고 본다. 그리고, 역시나 비합리적인 종교는 원래 사랑에 빠지도록 뇌에 새겨진 비합리적 메커니즘의 부산물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종교라는 ‘두가지 열병’은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다르면서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한데 이러한 ‘부산물로서의 종교’는 원래의 진화적 본성(메커니즘)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사랑에는 빠지면서 종교에는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일까? 나방은 달을 향해 날아가는 본성은 유지하면서 한편으론 촛불로 달려드는 실수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비합리적 신앙 대신에 합리적 이성의 판단에 따르기까지는 혹 ‘진화적 시간’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사랑
사랑의 역설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을 다루고 있는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체스터턴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 세상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전능하다는 이유로 불완전할 수 있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신이 온전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신이 왕이 돼야 하는 동시에 반란자가 돼야 한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27쪽) 더불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자기를 배반할 것은 요구하는 신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28쪽) 지젝의 책 전체는 이 도착적 핵심에 대한 새로운 독해이자 헤겔적/라캉적 해석의 시도이다.

그리스도와 배반자 유다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교훈을 멜로드라마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이렇게 된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사명 혹은 자신의 직업이 그녀보다 중요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즉 당신은 나의 전부지만, 나는 당신 없이 살아갈 수 있고, 나의 사명 내지 직업을 위해 당신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34쪽)는 게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사랑의 근원적인 역설이다. 즉 사랑은 그것이 절대적이기에 언제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닌 부산물의 지위에 있어야 하며 과분한 은혜의 산물로 간주돼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혁명가 커플의 사랑, 혁명이 요구하면 언제고 기꺼이 상대방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일 거라고 지젝은 말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역설을 체현하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궁극적 타자가 신 자신인 한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동일성으로 환원시킨 것이 기독교의 획기적인 업적이다”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신 자신이 인간이요, ‘우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3쪽) 따라서 ‘타자성의 심연’은 기독교와 무관하며 진정한 일신교로서의 기독교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다(일신교의 배타적 폭력은 자신이 ‘거짓 신들’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신교의 가면을 쓴 다신교의 행태이다).



신 자신에 대해 죽는 기독교의 신
신이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 때문에 죽는 전형적인 무신론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God dies for Himself).”(27쪽)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남기고 신(그리스도)은 혼자서 죽는다. 기독교의 은밀한 도착적 핵심은 신을 신 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이러한 균열, 신 자체가 되는 이 균열에 놓인다. 이러한 균열의 장면을 우스갯소리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셋이 각자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로 사자 밥이 되었소!” “나는 그리스도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화형 당했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가 바로 예수요!”

이러한 마지막 역전의 순간에 ‘창조의 토대로서의 예외’, 곧 신은 “신 자신의 창조물 속으로 타락하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피조물 속으로 삽입된다. 이러한 진입의 순간은 기독교가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생의 신비이다.”(223쪽) 지젝이 기독교의 핵심으로 분리해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이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도킨스는 ‘종교의 뿌리’를 탐문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나방들은 촛불을 향해 날아들며, 그것은 우연 같지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번제(燔祭)의 제물로 바친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희생 행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그 도발적인 명칭을 대하면 도대체 어떻게 자연선택이 그것을 선호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인다.”(263쪽) 그것은 달빛에 대한 나방의 ‘망상’이었겠지만 ‘죽은 나방을 위하여’는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07.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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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부쩍 자주 거명되는 레즈비언 철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이론'과 '여성 없는 페미니즘'에 관한 소개글을 옮겨놓는다. 이미 입문서들은 소개돼 있는 만큼 그녀의 출세작 <젠더 트러블>이 번역되기를 이 참에 기대해본다. 필자인 조현준 연구원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한국학술정보, 2007)을 펴낸 버틀러 전공자이다(책은 아마도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일 것이다).

 

대학신문(07. 09. 10)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② 주디스 버틀러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수사학과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레즈비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스트이자 소위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버틀러의 철학사적 공헌은 페미니즘 담론의 고정관념으로 여겨졌던 ‘억압자 남성’, ‘피억압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양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버틀러의 퀴어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퀴어 이론’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십만 권 이상 팔렸고 인터넷 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fanzine)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격분하기 쉬운 말』, 『권력의 심리 양태』, 『젠더 허물기』, 『자신을 말하기』 등의 저작을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뿐 아니라 정치 철학과 윤리학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젠더 트러블』에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이는 크게 두 가지 논의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 제기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정치 주체가 없는 정치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예컨대,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이따금씩 화장과 여장을 즐기는 씨름신동 동구(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나 언제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성전환 수술비를 저금하는 여장남자 두눈박이(영화 「다세포소녀」)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전환 수술 후 소송을 통해 2002년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받은 하리수는 어떤가?



페미니즘이라는 성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 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두 번째는 욕망과 법 간에 발생하는 인과론의 전도다. 즉 근원적 욕망은 애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억압해야 할 어떤 대상을 가정하고 있던 규율권력과 지배담론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욕망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욕망을 만들었다는 ‘인과론의 전도’는 당연하다고 생각돼 온 기존 담론이 어떤 권력의 역학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됐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계보학’의 관점을 부각시켰다.

결국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본질적인 내적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닌, 다양하고 산포된 관점을 가진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가 된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젠더는 모방을 통해 원본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패러디’, 행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현하는 ‘수행성’, 재의미화의 가능성을 안고 반복되는 규범에의 ‘복종’, 자신 안에 타자를 품고 있는 ‘우울증’의 양식으로 발현된다. 이제 진정한 남성이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기존 규범 속에서 원본의 권위를 허물면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 언제나 재의미화된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일부로 합체한 우울증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점은, 근본적으로 결정된 ‘본질적인’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젠더의 표현물이라는 가면 뒤에 본질적인 젠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정체성은 외관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합이나 범주 없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이고 자신 안에 타자의 가능성을 노정하는 ‘퀴어 이론’의 출발점이다. 타인과 나의 구분과 경계에서 모든 차이가 나오고, 그 차이가 차별을 낳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정치주체를 심문하는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이 현실의 문화정치학과 접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성애와 동성애가 분명한 자기 정의를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언제나 규범 안의 패러디로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나와 타인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것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남성성이 여성성을, 이성애가 동성애를 억압하거나 천시할 근거가 없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뿐 아니라 인구의 십 퍼센트에도 못 미친다고 평가절하되는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이다.(조현준 연구원/ 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07. 09. 10.

P.S. 지젝의 버틀러 읽기와 비판은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의 5장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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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을 다시 집어들었다(앞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적겠다). 지젝에 관한 짤막한 글들을 쓰면서 그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돋았기 때문인데, 부분적으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세번째 읽기 정도 된다. 지젝의 생각과 어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책은 수월하게 읽힌다. 그런 수월성에 한몫하고 있는 건 물론 깔끔한 번역이다. 가끔씩 실족하지만 않았다면 모범이 될 만한 번역이었다. 조금 손을 봐서 개정판을 내는 건 어떨까 싶다(<삐딱하게 보기>도 그런 경우이다).

지젝 입문서들도 몇 권 나와 있지만 내 생각에 지젝 읽기의 첩경은 그의 저작 한 권을 꼼꼼하게 완독하는 것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번역서 한 권을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고시서적 읽듯이 완독한다면 나머지 책들을 읽어내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아 보인다(나름대로 '지젝이고 라캉대기' 시작할 수 있다). 지젝 읽기의 장벽이라면 그 한 권 읽어내기다.

 

 

 

 

그러한 읽기의 대상으로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을 제시하고 나름대로 운을 뗀 적은 있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803797, http://blog.aladin.co.kr/mramor/1262413, http://blog.aladin.co.kr/mramor/1010978 등의 페이퍼 참조) 지젝으로 입에 풀칠하는 처지가 아닌지라 매듭은 짓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내가 '짓지 못할' 또다른 매듭이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초판 1쇄이어서 나중에 첨부된 참고문헌이 빠져 있다. 복사한 원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번역본이나 원서나 페이지가 튿어져 나가는 등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은 건 부분부분만 참조했던 러시아어본이다(내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 책이다). 대략 그런 연장들을 들고서 지젝의 광맥을 캐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영어로 씌어진 이 처녀작의 서문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썼다. 하지만 이 서문은 당연히 본문보다 나중에 씌어진 것이며 읽는 순서도 그에 따르면 된다고 본다. 처음엔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면 되겠다. 이어지는 건 이후의 지젝의 책들에선 잘 보기 힘든 '감사의 말'이다. 지젝은 이렇게 적었다.

"필자는 파리 8대학의 세미나를 통해서 라캉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던 자크-알랭 밀레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라캉의 개념적인 장치를 이데올로기 분석의 도구로서 활용하도록 방향을 제시해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17쪽)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은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자리를 못 잡고 있다가 밀레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정신분석학 수련을 받게 된다(간단한 사연은 http://blog.aladin.co.kr/mramor/424267, http://blog.aladin.co.kr/mramor/677684 참조). 기억에 그가 불어로 쓴 최초의 단독 저작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헤겔이 지나간다>(1988)는 밀레의 지도하에 받은 그의 정신분석학 박사학위 논문이다(<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특이하게도 불어본이 없는 듯하다).

라클라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가 번역된 걸 계기로 쓴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고하시길. 지젝이 직접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은 라클라우/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인데(국역본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판권 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몰라도 절판된 국역본이 재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라클라우를 위해서나 지젝을 위해서나(그리고 물론 그들의 독자들을 위해서나).

안 그래도 어제 부분 복사한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온, 사이먼 크리칠리 등이 편집한 <라클라우: 비판적 독해>(2004)인데, '철학' '민주주의' '헤게모니'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4부는 비판적 독해들에 대한 라클라우의 답변이고 주디스 버틀러와의 서신대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지젝의 글은 포함돼 있지 않다). 덧붙여 말하면, 버틀러와 라클라우, 그리고 지젝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도서출판b의 근간 도서이다(올해는 나오는 것인가?). 세 사람의 '화끈한' 논전을 담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배경으로 읽어야 할 책으론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외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도 필수적이다. 지젝의 서론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책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하버마스의 책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에서 라캉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고작 다섯 차례 언급되는데, 그것도 항상 다른 이름들과 함께 등장한다."(19쪽)

지젝은 아예 다섯 차례 거명되고 있는 쪽수까지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징후적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라캉의 이론은 제 고유의 독립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은 항상 일련의 등가물들 속에서 제시된다. 자신의 진짜 논쟁대상인 푸코를 포함해 바타이유, 데리다 등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왜 유독 라캉과는 직접 대면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름이 하버마스의 책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결론: "따라서 우리의 첫 논제는 오늘날 지성사를 전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대논쟁인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이 이론적으로 더 심원한 논쟁인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젝이 보기에 '하버마스 vs 푸코'라는 이론적 대립은 '알튀세르 vs 라캉'이란 본원적인 대립에 비하면 가면이자 유사 대립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이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를 통해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립으로 전환된 것일까?" 지젝은 이 문제가 "네 가지 서로 다른 윤리적 입장과 네 가지 서로 다른 주체개념"의 문제와 연루된 것으로 본다.

"하버마스에겐 단절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윤리학, 보편적이고 투명한 상호 주관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있다. 따라서 그 이면에 있는 주체개념은 당연히 초월적 반성이라는 고루한 주체의 언어철학적 판본이다. 반면, 푸코와 함께 우리는 보편주의적 윤리학으로부터 돌아서서 일종의 윤리의 미학화에 도달하다.(...) 스스로를 계발하여 주체로서 창출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을 발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푸코는 주체성의 특수한 방식을 구성하는 주변적인 삶의 방식에 매혹되었던 것이다."(19쪽) 

마지막 문장에서 '주변적인 삶의 방식(marginal lifestyles)'은 '주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이해하는 게 편하다. "예를 들어 사도마조히즘적 세계, 동성애적 세계 등등"인데, 원문이 "the sadomasochistic homosexual universe, for example"이므로 그냥 "예컨대, 사도마조히즘적인 동성애적 세계"라고 하는 게 낫겠다(알려진 바대로 푸코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푸코의 대담집 <권력과 지식>(나남, 1991)이다(절판된 책이지만 오역 범벅이라고 하므로 아쉬울 건 전혀 없겠고 다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 것인지?).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건 물론 영어본(1984)이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들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20-21쪽)

 

 

 

 

푸코의 주체개념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고해볼 수 있는 책은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겠다. 그리고 <성의 역사>(나남)와 같은 그의 후기 저작들과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 같은 책들. 특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미셸 푸코, 혹은 주체의 이론가'(http://blog.aladin.co.kr/mramor/1120854)라고 옮겨놓은 리뷰를 참조하는 게 유익하다.

여하튼 그래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결구도는 '가짜'라는 것이다. 대신에 "진정한 단절을 도입하는 사람은 바로 알튀세르이다. 그가 분열-간극-오인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논제를 전개할 때, 바로 거기서 진정한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는 끝났다!"는 사고 자체가 이데올로기 중의 이데올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이다. 국내에서 지난 90년대 중반 알튀세르 '열풍'과 함께 <맑스를 위하여>(백의, 1997)라고 번역/소개된 책이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이다. 국내에서의 알튀세르 수용 또한 프랑스 현지에서의 경로를 밟은 것인지?

지젝의 지적대로,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런 소멸엔 뭔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론적인 패배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알튀세르의 이론엔 곧바로 잊혀져야만 하는, '억압되어야만' 하는 외상적인 중핵이 있는 듯하다."(20쪽) 하다 못해 알튀세르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론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아미앵에서의 주장>)를 지금은 도서관에서나 빌려서 읽어볼 수 있다. 이건 국내에 적지 않은 알튀세리앵들이 있었던 걸 고려하면 기이한 일이다. 혹은, 지젝이 인용하는 셜록 홈즈의 용어를 빌면 '기이한 사건(curious accident)'이다(홈즈의 국역본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번역되지 않았을까?). 

"알튀세르는 윤리적인 문제들에 관해 폭넓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폐지나 소외의 영웅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급진적인 윤리적 태도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구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주체의 폐지'는 'subjective destitution'의 번역이다. 다른 책들에서 주로 '주체의 궁핍'이라고 직역된 표현인데, 말 그대로 '텅 빈' 주체를 떠올리면 된다(아니 그 '비어 있음' 자체가 '주체'이다).

"핵심은 주체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오인으로서 산출해내는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폭로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오인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적인 활동의 조건으로서, 역사적인 과정의 작인이라는 역할을 떠맡는 조건으로서 일정한 착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말하자면 미셀 페쇠가 지적했듯이 반드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라는 식의 환영을 내포한다."(21-22쪽)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 implies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 (2쪽) 'interpellation'에 걸리는 관계사절을 빼면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이란 문장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내포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문제는 관계사절, 즉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의 번역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원인'을 주체소환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가 주체로 호명된다는) '호명이론'에서 어떻게 주체가 소환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소환의 주체는 당연 '이데올로기'이고 '이데올로기적 명분(ideological cause)'이 아닌가? 다시 옮기면,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과정" 정도가 되겠다.

해서 전체를 다시 옮기면,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라는 것 자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의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식의 환영을 내포하며 이것은  미셸 페쇠가 지적했듯이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미셸 페쇠(1938-1983)는 '호명이론의 가장 정교한 판본을 제시했던' 철학자로 '호명'되고 있는데(보통은 '담론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지젝이 염두에 둔 책은 <팔리스의 진실(Les vérités la Palice)>(1975)이고 이 책은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Language, Semantics and Ideology)>(1982)로 영역돼 있다(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듯하다). 

한데, 페쇠와 관련하여 국역본의 이어지는 대목은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다. 호명이론이 함축하는 단락에 대한 설명이다. ""당신이 프롤레타리인 이상 프롤레타리아로 호명되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없지 않은가?"라는 식의 단락인 것이다. 페쇠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농담을 남긴 막스 브라더스를 언급하며 마르크스를 보충한다. "당신을 보니 엠마누엘 라벨리가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내가 바로 엠마누엘 라벨리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22쪽)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the short circuit of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 Here, Pecheux is supplementing Marxism with the Marx Brothers, whose well-known joke goes: 'You remind me of Emanuel Ravelli.' 'But I am Emanuel Ravelli.' 'Then no wonder you look like him!'(3쪽) 

내가 보기에 역자는 '여기서(Here)'를 '다음과 같은'으로 잘못 옮겼다. 해서 막스 브라더스의 유명한 농담을 페쇠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돼버렸지만 페쇠의 책은 제법 '진지한', 막스 브라더스의 농담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이는 책이다(지젝이 아니라면 누가 이론서에 막스 브라더스를 끌어오겠는가?). 다만, 페쇠는 호명이론을 설명하며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이라고 말했을 뿐이고, 이게 지젝이 보기에는 "마르크스를 막스 브라더스로 보충하는" 듯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일이다.     

우리말로는 '마르크스'와 '막스 브라더스'라고 옮기지만 원어는 'Marx'와 'Marx Brothers'여서 그 희극적인/패러디적인 대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 형제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 가계이며 192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들이다(http://www.youtube.com/watch?v=ycZJZY5uPh0 같은 동영상 참조). 아버지의 이름이 원래 사이먼 매릭스(Simon Marrix)에서 샘 막스(Sam Marx)로 개명되면서 본의 아니게 '막스 브라더스'가 되었다고.

여하튼 요점은 알튀세르-페쇠에게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한 주체형성은 자기-소외의 과정을 함축하며 이것은 희극적인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알튀세르의 소외의 윤리학에 라캉의 분리의 윤리학을 대비시킨다. 하지만 라캉의 윤리학은 따로 다루어야겠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요컨대,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계속 진행될 수 있다.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이다...

07.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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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 한창 푸코가 유행하던 90년대 초반을 기억해보면, 정말로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연상으로,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나중에 우리가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의 '수용사'를 반추해보게 될 때,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단순히 '지젝이고 라캉대기'의 시기로 기억될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것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런 잡념들이 바로 저 '생각들'에 해당될 테지요.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로쟈 님의 저 제목('Marx and Marx Brothers')은 시사하고 암시하는 바가 더 크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지젝의 이론적 형상과 그 그림자가, '마르크스'보다는 '마르크스 브러더스'로, '히치콕'보다는 '채플린'으로, 그리고 어쩌면 '라캉'보다는 '알튀세르'라는 레테르로 더 기억되고 논의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은유'의 바람 한 자락 풀어놓게 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외형적으로 '퇴조하여 사라진' 듯이 보이는 '알튀세리앙'들의 계보가 어쩌면 현재 '스피노지스트'들의 모습 안에 '변형'된 형태로 '보전'돼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ㅡ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ㅡ이를 이론사적 혹은 이론수용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것이겠지만요(우리는ㅡ혹은 그들은ㅡ마르크스에 대한 '파생적/현대적' 대안으로서의 알튀세르로부터, 알튀세르의 '근원적/근대적' 보충으로서의 스피노자로, 이행해 간 것일까요?).
덧붙여, "진행중"이라는 '부제'는 언제나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알튀세르를 [다시] 읽자'라는 제목으로 페이퍼 하나 써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9-07 19:37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 람혼님의 알튀세르 페이퍼를 고대하게 되네요.^^

람혼 2007-09-08 01:41   좋아요 0 | URL
이런 주제의 페이퍼에는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지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식견을 갖고 계신 로쟈 님의 글임에야...^^

미지 2010-08-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늦었지만, 이제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께서 오랫동안 지젝을 붙잡아두신 덕에 제가 아주 훌륭한 지젝과 라캉 입문 경로로 진입하고 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대학신문에 게재한 글을 옮겨놓는다. '21세기의 사유들'이란 기획연재의 첫번째 꼭지로 나간 것인데, 주말에 '초읽기'에 몰리면서 쓴 글들 중의 하나이다. 기획의 취지는 이런 것이다. "사상과 현실이 유리되고 있는 시대에 그 관계를 다시 활발히 밀착시키고자 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시대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하지만 취지와 무관하게 나로선 '펑크'를 내지 않는다는 데 더 주안점을 둔 것이어서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어쨌든 민폐는 면했으니까). 물론 '고생한' 편집자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초고에서의 '-이다'형 어미들이 '-다'로 수정되면서 글은 좀더 스피디해졌다). 미안한 마음을 적어둔다.

대학신문(07. 09. 03)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

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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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9-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수가. 로쟈님의 정체를 이제야 알아버렸습니다.^^;; 왠지 신문 보고 로쟈님일것이란 생각이.(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9-03 21:52   좋아요 0 | URL
좀 늦으셨군요.^^

치타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말입니다;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수업 듣고 졸업하기 힘들겠네요ㅜㅡ

로쟈 2007-09-04 08:37   좋아요 0 | URL
저야 공식적으론 러시아문학만 강의하죠.^^;

marr 2007-09-0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벌꿀인줄 알고 먹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설탕섞은 물엿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유겠죠? 지젝의 글은 너무 달콤해서 분간이 어려워요.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 고민해봐야겠네요. 문득 알튀세가 생각나는군요.

로쟈 2007-09-04 08:36   좋아요 0 | URL
물엿 맞습니다.^^ 다만 저는 벌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eEe 2007-09-04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지젝이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어떤 맥락에서인가요?

로쟈 2007-09-04 23:4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러한 '반응'까지 고려한, 그러니까 농담이기도 하고 진담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출입문 현관에 스탈린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기도 합니다.^^

eEe 2007-09-0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치있는 분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상반기 베스트'로 미리 올려놓았지만 오늘까지도 손에 들고 있지 못한 책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가 국역본의 제목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최근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도 얼추 운이 맞는다. 해서 이 또한 겸사겸사 같이 읽으면 좋겠다(물론 지젝이 아무리 대중적인 철학자라 하더라도 도킨스와 나란한 가독성을 기대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내용을 더 잘 드러내주는 부제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이다. 영어본(The Puppet and the Dwarf)을 옮겼을 텐데, 알라딘에 떠 있는 원서는 독어본(Die Puppe und der Zwerg)이다(책을 아직 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독어본 판권을 구해서 영어본을 옮긴 것인가?). 아무려나 지난봄 김용옥의 문제제기로 화제가 되었던 기독교/종교 문제가 도킨스/지젝을 연결고리 삼아 자연스레 가을까지 이어질 모양이다. 이 참에 '나의 종교'는 안녕하신가, 한번쯤 돌이켜봄 직하다. 서두에서 밝힌 사정상 신간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없고 가장 먼저 뜬 언론 리뷰를 하나 대신 옮겨놓는다. 그다지 친절한 리뷰는 아니군(*해서 한겨레의 리뷰도 추가해놓는다)...

경향신문(07. 08. 11) 神과 인간, 유물론적 접근

오늘날 믿음은 “부인되거나 치환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부인이 갖는 거리가 종교를 문화로 치환하지만 문제는 냉소적 거리가 늘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한 거리가 은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이율배반과 마주하여 슬라보이 지젝은 다시 칸트의 질문을 반복한다. ‘믿음이란 가능한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이 문화라면, 그러나 이 문화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자신의 믿음을 전가하고 있다면 믿음은 문화의 가능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조건이 아닐까?

지젝에게 믿음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경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핍 없는 초월적 실체로서의 신이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믿지 않는다고 가정된 주체”인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결핍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 불가능한 경험이 오직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에서 보듯 지젝은 여기서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을 반복하고 있는데, 두 번 읽기로서의 반복은 정신분석학적 읽기의 주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반복적 읽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립구조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사이공간’이다. 유물론과 신학, 인간과 신의 사이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유물론도 신학도 아닌 “생성 중인 종교”, 인간도 신도 아닌 괴물로서의 예수이다. 자신의 고통이 의미없음을 고집하는 욥.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욥의 결핍이 아닌 신의 결핍이다. 초월적이고 예외적인 공간에 거주하던 실체로서의 신이 역사 속으로 타락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주체가 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타락이 구원과 같아질 때, 결코 다가설 수 없던 신이 이미 우리의 이웃일 때 유물론적 신학이 발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성 중인 기독교’는 사도 바울의 마치-아닌-듯한 태도(as if-not)로 반복된다.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키라’는 바울의 명령은 법과 초자아의 악순환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위반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초자아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 기제이기 때문이다. 위반하기 위해 금기를 필요로 하는, 구원을 위해 타락을 필요로 하는 법의 도착적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젝에게 유물론적 신학은 곧 정신분석학이 된다. 정신분석학 역시 타자의 내부적 결핍을 지시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의미없는 고통처럼 의미로 구성된 우주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 기표 속에 있지만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서의 주체는 그러나 기표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칸트의 추상적 보편성과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이 기표화할 수 없는 기원적 빈 공간의 포함 여부이다. 보편/특수의 대립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공간을 지젝은 특이성(singularity)이라 부르는데, 특이성을 포함한 보편성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그러나 특이성의 포함은 보편성의 내재적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보편성은 특수성 속으로 하강하여 특수한 요소들 속의 간극,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특이성이 된다.

기독교는 특이성으로서의 주체의 공간을 포함할 때 유대교의 추상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타자의 결핍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감추고 있는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도 신도 아닌 예수라는 특이성의 주체를 드러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배설물과도 같은 주체로서 예수는 신의 결핍, 체스터톤의 말대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신”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특수하고도 다양한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통합하는 일의성이 아니라 니체의 정오처럼 자신의 내재적 결핍을 보여주는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다. 다신교는 내재적 분열을 외재적 차이로 환원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불가능성을 다양성으로 치환함으로써 의미의 불가능성을 피해가는 방어기제이다.

일신교의 혁명은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말하는 유대교에서 시작된다. ‘뿌리없음’, 상징질서로부터의 절대적 분리를 보여주는 유대교는 그러나 메시아를 여전히 ‘미래에 오는 자’로 상정하여 그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연기한다. 기독교는 ‘이미 항상 와있는’ 메시아를 이야기함으로써 신을 상징질서 속으로 끌어내린다. ‘아직 오지 않음’과 ‘이미 항상 와있음’의 간극 속에서 사랑의 윤리학, 곧 정신분석학이 시작된다.(민승기|경희대 겸임교수·영문학)

»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한겨레(07. 08. 11) '신이 죽어버린 기독교’ 외설스러운 재해석

슬라보예 지젝은 옛 유고연방 출신의 철학자다. 슬로베니아 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최신 사상의 중심이자 태두가 지젝이다. 20세기 사상의 거목들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의 사상적 지위는 거의 독보적으로 빛난다. 국내에서도 그는 소수이지만 맹렬한 지적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그의 거의 모든 주요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그에게 쏠리는 관심의 강도를 보여준다.

지젝의 사상은 옛 유고연방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영근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이 발칸의 다민족국가는 소련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면서 급속한 ‘자유화’ 과정을 겪다가 민족주의의 광기 어린 폭발로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었다. 한때 ‘서구식 민주화’에 기대를 걸었던 지젝은 그 민주화의 결과가 아무런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멸적 재앙으로 귀결하는 것을 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도 삐딱하고 반주류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더욱 발본적이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국면으로 나아갔다. 특이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체제 반란적 사상운동을 이끌었던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에 대립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다. 지젝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정통 관념론을 이어받고 자크 라캉의 ‘정통적’ 정신분석학을 그 흐름에 접목해 매우 정통적인 방식으로 반역적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그는 헤겔과 라캉을 위시한 유럽 정통 사상을 입론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정통의 세례를 받은 그의 사상은 거의 외설스러울 정도로 반정통적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부제가 얼핏 보여주는 대로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해석체계를 전복하는 작업이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다시 말해 신이 없는 종교, 신이 죽어버린 종교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더욱 불온한 것은 그리스도를 20세기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요컨대, 예수를 종교상의 레닌으로, 유물론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젝의 기독교 해석의 관점을 지젝 자신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의 주장은, 내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젝은 이 논의를 펼치기에 앞서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풀어놓는다. 그가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폭력적·독재적 전횡을 중화시키거나 치유할 방법이 불교에 있다는 생각이 널러 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구에 이식돼 유통되는 ‘서양 불교’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서양 불교’의 원형인 ‘동양 불교’도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본의 사례가 결정적 근거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선을 결합했던 일본 선사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사상을 사례로 끌어들인다. “군국주의적 선지도자들은 선의 기본적 메시지를 순진한 군사적 충성, 곧 명령에 즉각 복종하고 자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즉각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목표는 ‘유신론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통 기독교의 원리를 뿌리부터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신의 죽음 위에 성립된 종교다. <신약성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최후에 외치는 말,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구절이 결정적이다. 지젝은 이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가 범할 수 잇는 궁극의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바로 믿음을 부인하는 죄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렇게 ‘신이 없다’는 확인에서 출발한 종교다.

이런 역설 혹은 도착은 예수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다의 배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유다의 배반을 사전에 몰랐을까? 몰랐을 리 없다. 지젝은 여기서 유다의 배반이 기독교의 성립에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진정한 구원자로 등극한다. 유다는 배반 행위를 통해 예수의 혁명사업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일종의 영웅이다. 왜 영웅인가. 유다는 영원히 예수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위해 배반을 저지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신하는 것이다.

지젝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렇게 은밀히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 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 그런 사랑의 배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립했다. 그 그리스도는 지젝이 보기에 혁명가다. ‘사랑의 과업’을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혁명가다. 그 혁명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인이다. 그 초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면 신이라는 관념에 입각해 구축된 기독교 제도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07. 08. 10.

P.S. '유물론적 신학'은 기억에 지젝의 타르코프스키론에서도 키워드였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blog.aladin.co.kr/mramor/714863, http://blog.aladin.co.kr/mramor/71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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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일, 매장에 아직 깔리지 않은 책을 직원을 통해 꺼내오도록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머릿말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그리고 역시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만, <만들어진 신>과 같이 읽으면 재밌겠다 싶어요. 제목들이 좀 그렇네요..만들어진 신도 그렇고.
이 글과 아랫글을 옮겨갑니다.

로쟈 2007-08-10 20:26   좋아요 0 | URL
빠르삼.^^

philocinema 2007-08-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에 "죽은 신을 위하여"까지 책상에 책은 쌓여 가는데,
시간이 허락될지가 걱정입니다. 그래도 목차는 훑어봐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로쟈 2007-08-12 01:1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책사랑 2007-08-1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만든 출판사입니다. 책제목을 어떻게 결정할까로 고민을 많이 했으며, "만들어진 신"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번역자 선생님과 "죽은 신을 위하여"로 하기로 했었습니다. 저희는 뭐 그리 책을 잘 팔지 못하는 출판사라서 어떤 시류에 잘 따라가지 못한 답니다. 저작권은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갖고 있어서 그쪽과 계약을 했고, 번역은 영어본으로 했습니다. 워낙 지젝이 독일어본과 영어본으로 자신의 책을 출간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영어본에 보면 역자 이름이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독일어본 역시 역자명이 없습니다.

로쟈 2007-08-12 1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젝의 경우 독어, 영어, 불어는 따로 역자가 필요할 거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목 때문에 지젝의 책이 더 팔리거나 덜 팔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소경 2007-09-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입된 그림 중 <백치>에서 바보공작이 거론한 문제의 한스홀바인 그림을 이제 보는 군요...

로쟈 2007-09-01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경악을 했던 그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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