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책과 생각' 꼭지를 옮겨놓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대해 강의하는 겸 오랜만에 작품과 관련서들을 읽고 적었다. 번역본은 황현산 선생의 번역본 외에도, 김현, 김화영 선생의 번역본들을 참고했다. 기억에 가장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 전성자 교수의 번역본이었던 것 같다. 같이 읽어볼 만한 참고도서는 많은데, 가장 유익한 건 절판되긴 했지만 오이겐 드레버만의 <장미와 이카루스의 비밀>(지식산업사)이다. 최근에 나온 야스토미 아유미의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민들레)는 일본에서의 <어린왕자>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제공한다. 그밖에 크리스토프 킬리앙의 <어린왕자 백과사전>(평단)은 <어린왕자>의 독자들에겐 기본서. 생텍쥐페리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나 아내와 친구의 회고록 등도 번역돼 있다...



한겨레(18. 08. 17) 당신은 여전히 ‘어린 왕자’를 읽나요?


전 세계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프랑스문학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100여 종이 넘는 번역본이 출간된 우리에게도 사정은 같다. 생텍쥐페리 자신이 직접 그린 삽화로도 유명한 <어린 왕자>를 읽지 않은 독자가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친숙하다. 하지만 그런 친숙함이 곧바로 <어린 왕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읽는 동화, 아니 동화 아닌 동화이지만, 과연 어린이라면 <어린 왕자>를 아무런 해설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랜만에 <어린 왕자>를 손에 들면서 궁금했다. 최근 타계한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은 번역가로서 보들레르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 번역에 가장 큰 공을 들였지만 <어린 왕자> 번역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비록 짧은 분량의 작품이긴 하지만 네 번이나 고쳐서 책을 낼 만큼 정성을 들이고 또 욕심을 낸 번역본이기도 하다. 그 번역본에 붙인 해설에서 선생은 이 해설이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고 어린이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어린이들은 보아뱀의 겉모습을 보고 그 속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사실 이런 해설이 필요없다”는 것도 이유다.



<어린 왕자>의 해설은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 그림을 보고서 모자를 그린 걸로만 생각하는 ‘우둔한 어른’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어린 왕자>의 독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작 이 작품의 화자로서 사막에 불시착하여 우연히 어린왕자를 만난 조종사 ‘나'도 어린왕자와는 달리 양이 들어가 있는 상자를 꿰뚫어보지 못한다. 그는 자조적으로 “어쩌면 나도 얼마큼은 어른들처럼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미심쩍어 한다. 그렇지만 이 ‘얼마큼은 어른', 한때 어린이였지만 지금은 더이상 어린이가 아닌 이들이 <어린 왕자>의 이상적 독자가 아닐까. 작가 생텍쥐페리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는 더이상 어린이가 아니어서 어린시절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어린왕자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어린왕자의 친구가 된다.

 

아버지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난 생텍쥐페리에게는 특히 그러했지만 어린이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다. 어머니는 사랑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구한다. 어느날 어린왕자의 별에 씨앗으로 날아온 꽃나무는 그런 어머니를 닮았다. 꽃은 아침마다 꼼꼼한 화장을 하고서야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방금 일어난 척하며 어린왕자에게 식사 시중을 요구한다. 바람이 끔찍하다면서 바람막이도 요구하고 거짓말을 꾸미다가 들통나면 억지 기침을 함으로써 어린왕자를 괴롭힌다. 향기와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꽃의 심술궂은 허영은 어린왕자를 불행하게 만든다. 어린왕자가 자기 별을 떠나게 된 이유다.



지구에 와서야 어린왕자는 자기 별의 꽃이 장미라는 걸 알게 되며 한 정원에 그와 같은 장미꽃이 5천 송이나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 자신이 유일하다고 했던 꽃이 상심할까 염려해서다. 이때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나타나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다.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는 것은 물론 바람막이까지 씌어주었기에 그의 장미는 여느 장미와 다른 유일한 장미이며, 그는 그의 장미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린왕자는 별을 떠난 지 일년 만에 다시 그의 별로 돌아간다. “난 꽃을 사랑하기엔 너무 어렸어”라는 게 조종사에게 토로하는 말이지만 그의 별을 떠난 지 고작 일년밖에 되지 않은 걸 고려하면 그 깨달음은 작가 생텍쥐페리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친구를 갖고 싶어서 자기 별을 떠난 어린왕자가 다시금 그의 별로 돌아간 것을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 황현산 선생은 “이 번역은 때때로 ‘엄숙하게' 말할 줄 아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적었다. 때때로 엄숙하게 말하더라도 어린이는 어린이다.


18.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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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대해서 말하는 건 중언부언이지만 한여름 독서의 최대 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주에는 사정이 나아질는지, 당장 오늘밤은 어찌해야 할는지 자다말고 일어나서 몇 자 적는다. 잠깐 잠들기 전에 읽은 책은 요즘 강의하는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문학동네)이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놀라운 제목이라고 경탄만 하고 바로 읽지는 않았는데, 막상 읽으니 아무래도 제목이 오역 같다.

독어 원제는 ‘Luftkrieg und Literatur‘(1999)인데, ‘문학‘이야 오역의 여지가 없고 문제는 ‘공중전‘이다. ‘Luftkrieg‘를 검색하면 ‘군사 항공전, 공중전‘이라고 나오는데, 국어사전에서 항공전과 공중전은 ˝항공기끼리 공중에서 벌이는 전투˝를 뜻한다. 하지만 제발트가 이 단어로 뜻하는 건 항공기를 통한 폭격을 가리키는 ‘공습‘이다. 짐작에 독어의 ‘Luftkrieg‘는 우리말 ‘공중전‘보다 의미역이 넓어서 공중전과 공습까지도 포함하지만, 한국어 공중전에는 공습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한국어 ‘공중전‘에 잘 대응하는 것은 영어의 ‘dogfight‘다).

2차세계대전 말기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말하면서 ˝독일 민간인 60만 명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나는 ‘공중전‘이란 말이 눈에 거슬린다(민간인 60만 명이 공중전에서 사망한다?). ‘공중폭격‘이나 ‘공습‘이라고 해야 맞다. 독어에 ‘공중폭격‘을 뜻하는 단어가 따로 있어서 역자가 구분해서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트의 이 책(강연)에서는 같은 뜻이다. 제발트가 문제삼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폭격이지 결코 공중전이 아니다.

번역본이 반양장본과 양장본으로 두 차례 나오면서 제목이 교정되지 않은 것은 특이하게 여겨진다. ‘공중전과 문학‘‘이라는 제목이 멋있게 여겨져서였을까? 하지만 나로선 ‘공중폭격과 문학‘이라는 의미가 가려지는 바람에 제발트에 대한 이해에 혼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불만스럽다는 뜻이다. 폭격은 공중전 같은 쌍방간의 전투가 아니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일방적인 폭탄 투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독일 도시가 초토화되었다. 제발트가 문제삼는 건 그 트라우마와 그에 대한 문학적 망각이다. 그리고 이는 제발트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한편 같은 책의 영어판 제목은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2003)이다. 직역하면 ‘파괴의 자연사에 관하여‘가 될 텐데 우리말 번역으로는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제발트 생전이라면 동의했을지 의구심이 든다(제발트는 영어판이 나오기 전인 2001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좀 풀어서 얘기하면 ˝폭격으로 인한 파괴를 자연스러운 것처럼 간주해온 역사를 비판한다˝는 뜻을 담아야 한다. ‘파괴의 자연사에 관하여‘는 아무래도 불충분하게 여겨진다. 사정은 ‘공중전과 문학‘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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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회복 2018-08-07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공중전과 문학』 담당 편집자입니다. 제발트의 저서들을 관심 있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나가다 리뷰로 남겨주신 의견 읽고, 번역어 선택의 무게에 대해 새삼 되새기며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의문에 공명하며 몇 자 남기고 싶어 올립니다.

먼저 <공중전>이라는 번역어를 납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편집 과정에서 <Luftkrieg>의 번역어로 <공중전>을 납득한 것은 해당 단어가 <전투기를 이용해 치르는 전쟁>이라는 의미를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발트가 본문에서 공중폭격/공중습격을 지시하는 단어로 <Luftangriff>를 사용하고 이와 별개로 (육지나 해상이 아닌 장소인) 공중에서 공격이 시작된 전투를 <Luftkrieg>로 지칭하는 만큼, 독자들에게 구별하여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의미를 넘어서긴 했지만 한국어판 독자로서 최선의 선택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참고로 <공중전과 문학> <알프레트 안더쉬론> <장 아메리론> <페터 바이스론>이 묶인 영역본 『파괴의 자연사에 관하여』(앤시아 벨 옮김)에서는 <Luftkrieg>와 <Luftangriff>가 각각 <air war>와 <air raid>로 구별되어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영역본 제목에 대해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의견을 덧붙이면, 인간의 역사가 총체적 파괴를 계기로 자연사(인간사회의 영락)로 다시 빠져들어갔던 순간을 다른 종의 눈으로 관찰하는 듯 기술하려 했던 제발트의 의도를 새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 2장 도입에서 제발트가 직접 쓴 구절이기도 하고요..

선생님 말씀 덕에 제목과 단어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긴 글을 적게 되었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로쟈 2018-08-07 22:52   좋아요 0 | URL
네, 댓글 감사합니다. 영어에서 air war는 항공작전이란 뜻도 같는데, 우리말 ‘공중전‘에는 그런 뜻이 없어요. 차라리 항공전이라고 했다면, 항공작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공중전은 말 그대로 공중에서의 전투를 뜻합니다. 공습이나 폭격의 의미를 구겨넣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네요.
 

한겨레에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를 4주에 한번씩 연재하게 되었다. 오늘 첫 회가 나갔는데(지면에는 축약 버전이 실렸다) 원전 번역으로 새로 나온 카잔차키스(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음미해보았다. 나대로의 해석은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마음산책)에서 다룬 바 있다.  



한겨레(18. 06. 15) ‘그리스인 조르바’는 럼주의 향을 풍긴다

 

그리스의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1946)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일찍이 번역가이자 소설가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소개되어 널리 읽혔고 수많은 번역본이 뒤를 이었다. 원작이 그리스어로 쓰인 걸 고려하면 대부분은 영어판에서 옮긴 중역본들이었다. 그리스학 전공자인 유재원 교수의 원전 번역본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래서이다. 원전 번역본과 중역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인 조르바>가 따로 있을까? 자연스레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흥미로운 건 영어권에 소개된 <그리스인 조르바>도 사정이 우리와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초에 프랑스어판(1947)을 저본으로 옮긴 중역본이 그간에 읽히다가 2014년에 가서야 그리스어에서 직접 긴 새 번역본이 나온다. 카잔차키스 전문가로 대표 평전까지 쓴 피터 빈이 번역자인데 그는 기존 번역본이 많은 누락과 오역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윤기판을 비롯해서 대다수 한국어판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오류였다. 몇 가지 예외가 새로 나온 번역본들인데, 김욱동판(민음사), 이종인판(연암서가)은 피터 빈의 새 영어판을 옮긴 것이고 이재형판(문예출판사)은 2015년에 나온 새 프랑스어판을 옮긴 것이며 유재원판(문학과지성사)은 그리스어판 번역이다.



지금까지는 이윤기판이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었지만 원전 번역과 새 중역본들이 그에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둘러싼 ‘번역 전쟁'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보면 어떨까. 소설의 결말에서 나(카잔차키스)가 스스로 자유롭기에 조르바에게 동행할 수 있다고 말하자 조르바는 아직 그렇지 않다고 대꾸한다. 매여 있는 줄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길어서 자유롭다고 생각할 뿐이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그 줄을 잘라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언젠가는 그 줄을 잘라낼 거라고 하자 조르바는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이윤기) 조르바의 말은 카잔차키스가 좋은 머리를 갖고 있기에 계산하다 보면 줄을 잘라낼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같은 대목을 원전 번역은 이렇게 옮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료품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이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유재원)

 

‘머리'와 ‘정신'의 차이가 대수롭지 않다면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과 '알뜰한 주부'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전자가 직설적이라면 후자는 반어적이기에 그렇다. 아무려나 카잔차키스 같은 먹물은 줄을 잘라내기 어려울 거라는 게 조르바의 장담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점이 조르바로서는 안타깝다.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이윤기)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유재원)

 

이 대목에서도 ‘멀건 카밀레 차'를 ‘맛있는 캐모마일 차'라고 하면 반어적으로 말하는 게 된다.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희석한 캐모마일 차'(김욱동)나 ‘이 맛도 저 맛도 없는 카밀레 차'(이재형)라고 옮겼다.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판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다. 캐모마일과 럼주의 대조만 확실하게 전달된다면 번역의 임무는 완수된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책상물림과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조르바라면 번역본의 사소한 차이들을 장부에다 적어놓을 것 같지도 않다. 조르바의 가르침에 충실하자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읽을 게 아니라 럼주를 마시며 읽어야 한다. 멀겋게 읽을 것인가 독하게 읽을 것인가. 번역본을 검토해본다고 나섰지만 좀상스러운 일 같아서 접어둔다.

18.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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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강의하고 귀가하는 길인데, 강의중에도 그리스어 원전 번역으로 새 <그리스인 조르바>(문학과지성사)가 나왔다고 공지했다. 유재원 교수의 번역인데(이미 예고돼 있었다) 원제인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이 부제로 붙었다. 이윤기 선생의 번역판을 비롯해서 그간에 나온 번역본이 모두 영어판(두 종이 있다)을 옮긴 것이기에 그리스어판 번역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바로 주문해놓았기에 주말에는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어로 여러 종이 번역되었으나, 그리스어에서 한국어로 직접 번역한 것은 이번 문학과지성사 판이 처음이다. 그동안 출간된 책들은 영어판을 중역한 것이거나,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를 거친 삼중 번역판이었다. 1946년 <그리스인 조르바>가 세상의 빛을 본 지 70여 년, 1975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지 40여 년 만에 최초로 중역이 아닌 그리스어-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번역자 유재원은 그리스학에 정통한 전문가로, 그리스 아테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그리스 협회 회장이다. 오랫동안 카잔차키스의 전 작품을 연구하고, 실제로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행적을 짚어 작품 속 공간까지 살펴온 번역자는, 평생 동안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숨결과 문화까지 담아 번역했다.˝

가장 많이 읽히는 건 이윤기판이지만 모두 근래에 나온 김욱동판, 이종인판과 함께 유재원판이 추가되어 <그리스인 조르바>도 번역의 전장이 되었다(이런저런 번역본을 포함하면 10종은 나와있는 듯싶다). 강의에서 읽어야 한다는 실제적인 요구 때문에라도 각 번역본의 장단점을 검토해보아야겠다. 누군가 대신해주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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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8회째를 맞은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개인적으로는 3년째 예심과 본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이번에도 번역 부분의 심사평을 맡아 적었다. 번역 부분은 올해 공동수상작이 나왔다. 심사평을 옮겨놓는다. 



번역 부문 심사평 "한국사회에서 갖는 현재적 의의에 중점 둬"


올해 번역 부문의 후보작들은 책의 의의나 번역자의 공력을 모두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두 권의 책이 자연스레 경합작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피터 프랭코판의 ‘실크로드 세계사’다. 두 책의 역자가 모두 전문번역가이고 두툼한 분량의 역사서라는 점이 공통적이었다. 번역상인만큼 역자의 번역 경력과 번역 수준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갔지만, 토론의 중점은 두 책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현재적 의의에 두어졌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1950년대에 집필되어 1964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현대사 분야의 고전이다. 저자는 유럽의 세속화 물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이 반지성주의의 바탕이 되었고, 이것이 20세기 중반에는 반공산주의 열풍(매카시즘)으로도 이어졌다고 본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확장하면 오늘날 트럼프 시대를 낳은 것도 미국의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다.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비단 미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미국식 복음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한국사회도 되돌아보게끔 한다.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라는 부제에 걸맞게 ‘실크로드 세계사’는 고대 종교의 탄생기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지역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그렇다고 특정 지역사의 재조명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사’를 표방하면서 저자는 세계사의 중심을 유럽(서방)에서 동방, 정확하게는 서방과 동방의 중간지점으로 옮겨놓는다. 중심을 그렇게 이동시킬 때 세계사의 전개과정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초점 이동과 각도 변경의 효과이며, 이를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과 시야도 대폭 확장된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실크로드 세계사’는 그 풍부한 내용과 함께 오늘을 사는 시민들의 교양서로서 매우 훌륭한 책이라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최종적으로 어떤 책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오갔지만, 두 권 모두 수상작으로 손색이 없기에 공동수상작으로 하자는 제안이 쉽게 동의를 얻었다. 두 역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17.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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