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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해서 씻고 한숨 돌린 후에 책상머리에 앉으면 보통 10시 전후이다. 이때부터 다시 원고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할일들을 해야 하는 게 로쟈의 '이중생활'이다. 반나절의 시간은 더 주어져야 뭐든 제대로 할 듯싶은데, 사정은 여의치가 않아서 시늉하는 것만으로도 곯어떨어지기 일쑤다(이런 걸 '저질 체력'이라고 부르더만). 서재일은 그런 와중에 부리는 거드름이요 체면 유지다. 식후에 꼭 챙겨마시는 믹스 커피처럼, 건강에 별로 좋지는 않지만 로쟈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물론 중독성도 있는 것이고). 오늘의 페이퍼 거리로 고른 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 '서평문화'에 실린 한 서평이다.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를 다루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해넣는다(책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22611 참조). 사실 이 서평을 고른 건 오늘 루디네스코의 <광포한 시대의 철학>(영역판, 2008; 불어판, 2005)을 손에 넣은지라 '루디네스코'란 이름이 나름대로 의미있게 다가온 때문이기도 하다. 서평에 병기된 외국어는 글자가 깨져 있기에 대부분 삭제했다.   

서평문화(2009년 겨울) 정상과 도착 사이의 오랜 공모와 변전의 역사   

『프랑스 정신분석의 역사』전 2권, 제1권: 1885-1939, 제 2권: 1925-1985, Seuil, 1986와 라캉의 전기, 『자크 라캉, 한 인생의 스케치, 한 사유체계의 역사』Seuil, 1993; 국역본:『자크 라캉』, 양영란(*양녕자) 역, 새물결, 2000로 성가를 얻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분석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라캉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중심에 위치하려고 하며, 더 나아가 세계 사상가들의 관계에 균형적인 관점을 취하려 애쓴다.  

 

그래서 그는 라캉의 18번째 세미나(1971), 『동류의 것이 아닐 담론에 대해 』(Seuil, 2006)에 대한 서평(『르 몽드』 2008년 1월 18일)을 쓰면서 라캉이 “여기에서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적시함으로써 일군의 라캉주의자들을 술렁이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2007년에 낸 저서는 독자적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알린 또 하나의 성과이다. 그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로 되어 있는데, 원제를 직역하면 『우리 자신의 어두컴컴한 부분』(Albin Michel)이다. 그리고 ‘도착자들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즉 이 책은 도착증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살핀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파악한 그 역사의 일반적 성격은 인류의 '어두컴컴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보기에 두 개의 역사가 있다. 밝은 역사와 어두운 역사. 어두운 역사인 도착자들의 역사는 그 어둠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이해될 수 없고, 밝은 역사인 인류사에 비추어져 그 의미가 해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인류사는 어두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줄기를 정상인들의 역사로 만든다. 정상인들이 도착자들을 분별케 한다면, 도착자들 때문에 인류의 ‘정상성'이 존재한다. 그 둘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도착은 문자 그대로 도착이고, 그 정상인들은 정말 정상적인가? 때로 도착은 발생했다기보다는 발명되었을지도 모르며, 도착을 통해 정상을 유달리 강조하는 문명은 정상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도착 그 자체가 아니라 도착과 정상의 관계라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표점이다. 그리고 이 구도에 의해 ‘도착'이 정신분석적 의미로부터 문명사적 의미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도착'은 변태적 성행위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인간 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그 관계의 일반적 성격을 ‘어두컴컴한 부분'이라고 제목은 말하고 있는데, 그 규정은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킨다. 즉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비정상성이 그것이다. 어두컴컴하다는 성질이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다.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도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한편으론 자본축적의 경제에 맞서 탕진의 일반 경제학을 세운 바타이유의 『저주받은 몫』(Editions du Minuit, 1949; 국역본: 『저주의 몫』, 조한경 역, 문학동네, 2001)을 연상케 하고(책의 제목은 분명 바타이유로부터 암시를 얻은 게 틀림없다.), 다른 한편 성스러움과 폭력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힌 지라르의 작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루디네스코의 작업은 바타이유의 그것이 대항-실천적인 성격을 가진 데 비해 상관성을 유비하는 객관적 관찰의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지라르의 그것처럼 종말론적이지 않다.  

이 책의 궁극적인 관심은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보편적 성격이 아니며,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도 아니고, 심지어 그것의 원인이나 결과도 아니라,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인데, 그 과정은 예측불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요한 심화의 방향으로 가는가 하면, 돌연한 자기배반적 선회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그 과정은 순환적인 형식으로 회오리를 그리면서 전자電子의 이탈과도 같은 돌연변이의 계기를 통해 응용의 층위를 이동해가는 과정이며 그런 점에서 진화론적이다. 바로 이것이 제목이 말하지 않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책의 두 번째 표점에 해당한다.

그 변화는 다섯 차례의 단계를 거쳐서 오늘에 이른다. 중세에 도착은 정상성의 극단적인 추구 속에서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성스러움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비천함도 함께 또렷해진다. 그리고 비천함은 성스러움의 영원성, 혹은 그것을 더욱 성스럽게 하기 위한 방법적 타락으로 기능한다. ‘욥'의 고난 이후, 신비주의자들의 자기 학대, 그리고 제 몸에 온갖 피부병을 기른 성녀 리드비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러한 방법적 타락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타락이 본연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순수한 인간적 행위로서의 질 드 레의 엽기적 범죄 행각이 그것이다. 질 드 레의 도착을 세계는 거부하여 그를 처형했다가 9년 후 다시 거두어 "자백과 회개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로 탈바꿈시킨다. 이럼으로써 한 순간 위기에 처한 성스러움과 타락의 협력관계는 인공적으로 봉합되어 나가는 듯하지만, 그러나 봉합이 이루어진 순간은 동시에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된다.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이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진화해 가는 18세기에 자연법칙은 신의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자연에 속한 자(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사드가 묘사하고 권장한 도착적 행위들은 신의 가르침에 의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된 행위 외의 모든 것으로서, 후자를 대체할 새로운 법칙의 항목들로 제시된다. 이제 정상과 도착의 질서에 전도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몸을 경유함으로써 신에게 대항하였지만 인간의 몸을 빠져나감으로써 의미의 총체적인 부재로서, 일종의 과잉된 현존, 구역질나는 잉여가 된다.  

따라서 이 도착적 행위의 법칙화 시도는 실천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실패의 결과는 인류의 무대에 의미심장한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도 도착증의 공론화. 즉, “미치광이도 범죄자도 아니며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도 않은" 존재가 현실 한 복판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인정. 그럼으로써 사드적인 것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자신의 정화를 위해 배척해버린 모든 추악함의 집결지로 지목될 수도, 혹은 정반대로 그 문명이 억압한 어떤 다른 생의 가장 극적인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사드적인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모독으로서 존재하겠지만, 전자의 경우,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신의 질서를 흉내내는 가운데 발명한 방법적 타락으로서 기능할 터이고, 후자의 경우엔 마조히즘에 대해 들뢰즈가 엿보았던 것처럼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할 강력한 준거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아마도 저자가 보기엔 전자의 길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세 단계, 즉 19세기 부르주아의 성장, 20세기의 파시즘, 그리고 오늘날의 생명주권주의 biocratie(이는 개념적으로 푸코의 생명관리공학 biopolitique과 유사한 듯이 보인다)를 위한 다양한 시도 및 제도화는 인류의 현재적 진행을 이상화하는 한편, 도착적인 것을 현재의 상황에 규범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기능적 현상 혹은 대상들로 바꾸어, 이상적 사회의 자원들로 활용 재활용하는 작업의 진화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인류는 저 중세의 신 중심사회가 자동적으로 가동해 온 자기성화장치를 신의 몫으로부터 인간의 몫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였고, 그 성공의 길은 무한히 뻗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눈길이 찬탄 혹은 경악에만 바쳐져 있는 건 아니다. 도착적인 것의 공론화는 또 다른 효과를 갖는다. 즉 방금 살펴 본 과정이 정상과 도착을 구별하고, 도착적인 것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정상성 내에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기제의 내적 구조를 성찰하는 기회가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 성찰은 “암울한 사색가들"의 존재에 의해 지탱되는데, 이들은 도착을 활용하는 정상적 사회 자체가 실은 '증오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동되는 무서운 도착적인 사회임을 끊임없이 적발하고 경계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되풀이하는 경고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투명함과 감시를 예찬하고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소멸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다."(228쪽) 

그러니 인류사에서 정상과 도착이 항상 공모하고만 있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인류는 또한 그러한 공모를 괴롭게 고민하고 정상의 폭이 열리는 데 도착이 여하히 기여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이 부분은 루디네스코의 저작에서는 이론적으로 검토되고 있지 않지만, 예시적인 방식으로 다양히 제시되어 있다. 즉 도착은 정상성의 도구가 아니라, 그것의 생생한 가능태인 것이다.) 종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저서가 독자에게 최종적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자. 한마디로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프랑스어 독해 수준의 범용함은 일단 논외로 하자(어쨌든 간신히나마 읽을 수는 있게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우선 정신분석과 철학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번역자의 정보가 너무 가난해서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의 저자를 엘리자베트 드 퐁트네로 만들고 푸코를 그 책 서문을 써 준 사람으로 돌리는가 하면, 데리다를 “동물행동학자, 인지주의자, 행태주의자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게다가 해독이 까다로운 부분들은 빈번히 번역에서 제외하고, 아무도 그 까닭을 짐작 못할 번역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각주의 상당 부분을 누락하거나, 때론 본문에 포함시키기도 한 것은, 번역의 윤리를 새삼 되묻게 한다.  

원저에 없는 그림들을 삽입한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에 의해 용인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문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변태'라는 역어를 책 제목에 사용한 것이며, 장 제목을 제멋대로 의역하고, 원저에 없는 절들을 분할해 그럴 듯한 제목들을 달아 놓은 까닭은 또한 무엇인지? 원서가 가진 매력이 아니었더라면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원서와 문장 하나하나를 대조해가는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정과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09. 02. 04. 

P.S.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책은 구입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다. 번역본의 경우 보통 원서와 같이 읽는데(특히 철학서이나 이론서일 경우) <악의 쾌락>은 아직 영역본이 나오지 않았다(그럴 경우 대개는 독서를 미뤄둔다). 서평을 읽다 보니 나도 왜 제목에 '변태'란 말이 들어갔는지 의문이다. '도착'이란 말이 일반 독자들에게 생경하다고 판단했을까? 하지만 서평자가 지적하고 있는 자의적인 누락 따위야말로 '변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페이퍼의 제목은 그런 생각에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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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5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보니 정말 번역서의 실태가 - 특히 인문서의 경우 - 그다지 안 좋은가 보군요. 혹시 국내에 전문 번역비평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까?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그런 사이튼 저도 모르겠는데요.^^ 대신 관련학회가 두 곳이 있고 학회지도 나옵니다...

2009-02-06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9-02-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안봤는데 원본과 대조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참고로 이희원 박사의 <무감각은 범죄다>는 대단한 이론적 기획이고 용기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대상성 개념을 기반으로 라이히와 바타이유를 통해 인간의 성을 미학적 테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제 관심분야라 며칠이 걸려 정독했거든요. ^^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갖고는 있는 책인데, 아직 읽을 짬을 못내고 있어요.^^;

2009-02-05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9-02-0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중 다행"으로 이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네요..--v
그런데 서평을 읽어보니 내용이 참 흥미로운데 이런 좋은 책이 안좋은 번역이라니 안타까운일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광기와 도착 혹은 비이성과 이성의 구도속에서 펼쳐지는 현대프랑스사상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내용물을 가진 책인것 같은데 말이지요.

로쟈 2009-02-06 23:40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는 사실 고질적인 문제인데,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네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포스트를 올린 김에 <시학>의 주된 분석대상인 그리스 비극 전집에 관한 서평도 챙겨놓는다. 지난 가을에 천병희 교수의 전집 가운데 두 권이 출간됐고, 서평은 이에 관한 것이다(출간 소식은 '소포클레스 비극 결정판'(http://blog.aladin.co.kr/mramor/2358339)이란 페이퍼에서 전한 바 있다). 천교수의 <오이디푸스왕> 번역에 대해 한두 마디 적을 일이 있어서 옮겨놓는 걸 미뤄두었는데, 책이 또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일단은 서평만이라도 자리를 마련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1. 12) 그리스비극 전집, 완간을 앞두다  

천병희 선생이 옮긴 희랍비극 전집 중 첫 두 권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나라엔 희랍비극 전집이 없었다. 현대까지 전해진 희랍비극 전체 33편 중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18편뿐으로, 사실 이것도 모두 천병희 선생이 옮긴 것이다. 단국대학교출판부에서 나왔던 그 번역들을 고치고, 나머지 15편을 새로 옮겨 더한 것이 이번 번역이다. 이번에 국내에 새로 소개된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3편,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2편으로, 내년 초에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까지 나오면 희랍비극 전집이 완결되는 것이다. 그쪽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우울하던 요즘 분위기를 일신할 만한 쾌거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 선물을 찬찬히 살펴보자. 이 글에선 희랍비극의 ‘대표’격인 <오이디푸스 왕>만 보겠다. 이 작품은 이번에 새로 옮긴 것은 아니고 이전 번역을 조금 고친 것이다. 옮긴이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어색한 표현을 줄이고 가독성을 높인 것이 눈에 띈다. 한데 번역사업 지침에 자주 등장하는 이 ‘가독성’이란 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지금부터 2천5백여 년 전 지구 거의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의 글을 옮기는데, 그것이 술술 읽히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 아닌가? 중요한 내용을 다 보존하고서도 매끄럽게 만든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테베 탈출, Les Exiles de Thebes>, 테오발드 샤르트랑(Theobald Chartran) 作, 1871.

‘정확성’에서 아쉬움 남긴 번역
희랍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내 이오카스테를 향해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여”(단국대판, 950행)라고 부른다. 사실 이것도 약간 부드럽게 한 것으로,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아내 이오카스테의 가장 사랑스런 머리여’가 될 것이다. 한데 이번 번역에서는 이 구절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오카스테여”가 되었다. ‘머리’가 사라지고 대신 원문에 없는 ‘세상에서’가 새로 붙은 것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이전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문제되는 것 중 하나가 존대법이다. 나는 서양말에 원래 존대법이 없으니 번역에서도 존대법이 너무 두드러지게 쓰지는 말자는 쪽이고, 옮긴이도 이전 번역에서 그 원칙을 대체로 지키는 듯했다. 그런데 새 번역에서는 그것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옛날에 어린 오이디푸스를 구해줬던 노인이 그를 찾아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극존대가 새로 도입되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노인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극존대법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 분께서는 그대를 내 손에서 선물로 받으셨사옵니다.”(1022행) 이 역시 내게는 원문에 충실한 이전 번역(“내 손에서 받으셨습니다”)이 나아 보인다. 

이번 새 번역에서는 대체로 문장들이 이전보다 짧아졌다. 너무 단어 대 단어로 옮기다보니 문장이 늘어지는 걸 피하자는 의도일 텐데, 때때로 이런 노력 때문에 ‘시’가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비극 작품은 전체가 운문이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나 다 시라 할 수 있지만, 특히 합창단의 노래 부분이 더욱 그렇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혈통을 알아내기 직전, 합창단은 자기들의 왕이 혹시 신의 아들이 아닐까 노래한다. “내 아들이여, 대체 누가 …… 그대를 낳았는가?”(1097~1101행) 그런데 이 구절에는 원래 반복법이 쓰였다. 단국대판에는 “누가, 내 아들이여, …… 누가 …… 그대를 낳았는가?”라고 해서 원뜻을 약간 살려놓았고, 희랍어 원문은 ‘누가 그대를, 누가 그대를’로 되어 있다.   

의미 있는 국내 첫 원전 완역
요약하자면 상당히 뻣뻣한 희랍어 원문을 약간 누그러뜨린 게 지난번 번역이었고, 새 번역에서는 그게 더 부드럽게 고쳐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가독성’을 위해 ‘정확성’을 희생한다고 할 때, 그 한계가 이전 번역본(단국대판)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개선된 점도 없지 않다. 서양말들은 보통 종속문을 뒤에 자꾸 붙여가는 꼴을 취하는데, 우리말로 옮길 때는 그것들을 앞으로 옮겨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다가 때로 문장 뜻을 엉뚱한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번 번역에서는 이전에 잘못 옮겨졌던 종속문을 원래 자리로 옮겨 바로 잡은 것도 있었다. 또 하나 칭찬할 것은 편집과 책의 물성이다. 글자 간격을 좁히고 행 배치를 효율적으로 해서 쪽수가 적어졌고, 종이를 가벼운 걸 써서 책 무게가 의외로 가볍다. 독자와 환경을 많이 배려한 셈이다. 

세부적으로 흠을 좀 잡았지만, 전체를 보자면 한량없이 기쁘고 옮긴이가 존경스럽다. 이제 드디어 우리도 희랍비극 전집을 갖게 되었다. 서양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손닿는 곳에 두고서 수시로 읽고 확인할 큰 보물이다. 정말 큰일을 해내신 천병희 선생에게 문화훈장이라도 드렸으면 싶다.(강대진/ 본교 문예창작학과 강사) 

09.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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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9-01-2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책을 읽었었는데...이렇게 다시 나와주니 반갑네요^^

로쟈 2009-01-27 23:19   좋아요 0 | URL
좀 저렴한 판본으로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신간이지만 '로쟈의 낚시'가 아니라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하고픈 책이 있다. 도올 김용옥의 <논어 한글역주>(통나무, 2008). 한겨레의 서평을 읽고 출간 사실을 알았는데, 전3권 가운데 알라딘에는 아직 1권만이 떠 있다. 기자로도 방송인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지만 도올의 본령은 아무래도 동양 고전학이고 그간에 자신의 역량을 너무 허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자신의 '본업'으로 복귀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중국 고전 13경을 완역하는 첫 작업으로 <논어>의 역주를 출간한 것인데, 이후의 후속 작업도 기대가 된다. 저자로서도 <도올 논어>를 두고 벌어졌던 학문적 시비와 세간의 비아냥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전학에서 '역주'란 진검승부가 아니던가!).  

한겨레(09. 01. 03) 도올이 안내하는 논어 읽기의 오르가슴 

도올 김용옥(61) 전 세명대 석좌교수가 한자문명권의 최고 고전인 <논어>를 번역하고 주석한 <논어 한글 역주>(전 3권)를 펴냈다. 권당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완역판이다. 1982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래 줄곧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 번역의 범례를 세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야 그 약속의 일단을 실천한 셈이 됐다. “한 갑자를 돌고 난 내 인생을 회고해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나의 학문세계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서삼경을 포함한 중국 고경 13경 전체를 번역하고 주석하는 작업이었다고 그는 이 책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 첫 작업이 <논어> 역주인 셈이다.

지은이는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논어>의 세계사적·문명사적 위치와 의미를 찾는 긴 서문을 통해 ‘인류문명’을 ‘전관’하고 있다. 이 문명사적 조망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뿌리로 삼는 서구 문명을 상대화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이라는 세계 4대 문명이 범아시아 대륙에서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그리스·로마 문명은 그 문명권 바깥에서 일어난 역외의 문명이다. 고대문명 전체의 시야에서 보면 ‘원류 속의 말류’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그 문명이 오늘날 지배문명이 된 것은 ‘연역적 사유’의 발견에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근대 서구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며, 과학기술을 흥성시킨 것은 이 그리스 문명의 사유 방식에 기댄 성과였다. 지은이는 서구의 지배를 가능케 한 이 세 위업 가운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아시아가 어느 정도 따라잡았으며,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 자연과학 분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보편타당한 최종적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진리’ 이상의 어떤 새로운 진리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여기서 <논어>라는 서구 문명 바깥의 사유를 새로이 탐구할 필요성이 나타난다. 

종교문명사적 차원에서도 <논어>의 자리는 의미심장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대 문명 초기에 등장한 다신교적 신앙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여 일신교 신앙으로 나아갔고, 이어 인더스·갠지스 문명을 통해 일신교 자체의 극복인 불교를 낳았다. 불교가 보여준 신 없는 종교 체계는 중국 문명에서 그대로 재현됐는데, 그것이 유교 문명이다. 공자는 신을 배제한 인간 중심의 사유, “인문학적 윤리학”의 건설자였다. 그런 점에서 “고대 문명 세계에서 가장 콘템포러리한(현대적인) 문명”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논어>를 탐구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 사유의 새 지평을 탐색하는 일이 된다.   

지은이는 공자의 생애에 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공자의 삶 자체를 추적하는 것은 공자가 살았던 구체적 삶을 알지 못하고 <논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공자의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책이 바로 <논어>라는 사실이다. “공자는 오직 <논어> 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 이상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55살 때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천하주유’를 한 뒤 고국에 돌아왔다. <논어>는 그가 귀환한 68살 때부터 73살 때까지 말년의 생각을 뼈대로 삼고 있다. 원숙기의 사상이 담겨 있는 셈인데, 그 사상이 수미일관한 체계 속에 추상적으로 기술돼 있지 않고 상황적 텍스트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이 경전의 특징이다. “‘논어’의 ‘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사람들과 대화한 말, 그리고 제자들끼리 토론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접문한(가까이 가 들은) 말이다. ‘논’은 ‘집이논찬’이란 뜻으로, 그 말들을 편찬했다는 뜻이다.”

이어 <논어> 해석의 역사를 살핀 ‘논어해석사강’과 신주의 틀을 세운 주자의 ‘논어집주서설’ 번역문, 그리고 지은이 자신의 번역론을 본문 앞에 배치했다. 본문에서 지은이는 ‘학이 편’에서 마지막 ‘요왈 편’까지 20편을 차례로 번역하고 고주와 신주 등 동서고금의 주석문들을 가능한 한 폭넓게 참조한 뒤 지은이 자신의 시각으로 새 주석을 단다. 가령,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자로 편’의 해당 구절을 지은이는 이렇게 번역한다. “자로가 말하였다.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하려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을 먼저 할 것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역시나 했더니만, 선생님도 참 아둔하기 그지없으시구려. 왜 하필 이름을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말이 바른 논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생한 현대 구어체로 이루어진 번역이다.

<논어>를 읽고 깨닫는 즐거움에 대해 정자가 이런 말을 했음을 지은이는 상기시킨다. “논어를 읽으매, (…)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이 책은 이 희열로 가는 긴 여행이다.(고명섭 기자) 

09. 01. 03.  

P.S. 동양 고전에 관해서라면 나 자신이 초입자여서 '수준'을 말하기 어렵다. 어림짐작으론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과 남회근의 <논어강의>(씨앗을뿌리는사람, 2002)가 국내에 소개된 중국어권 저작으로선 명망이 높은 책인 듯싶다. 나로선 도올의 <논어 한글역주>를 견주어볼 만한 기준점이다.   

 

국내 저자의 책으론 이기동의 <논어강설>(성균관대출판부, 2005), 배병삼의 <한글세대가 본 논어>(문학동네, 2002)가 얼른 떠오르는 책이다. 물론 고전적인 주석으로 치자면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한마디씩 걸치고 지나가야 하는 주희의 <논어집주>를 빼놓기 어렵겠다. 성백효 역주본(전통문화연구회, 2006)에 이어서 박헌순본(한길사, 2008)도 출간돼 있다...

   

한편, <논어> 읽기에 관해 예전에 쓴 칼럼은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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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1-0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학자는 아니지만 이수태 씨의 <논어의 발견>과 <새번역 논어> 역시 '논어읽기'에 참고하면 좋은 책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일독하고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만 주변 지인들의 추천이 압도적이더군요. 저의 추천은 그 분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전적인 '신뢰'에 근거할 따름입니다..

로쟈 2009-01-04 23:12   좋아요 0 | URL
오래전 책이어서 눈에 잘 안 띄었나 봅니다. 도서관에 갈 때 한번 들춰봐야겠네요...
 

'한겨레'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번역서) 리스트(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8763.html)를 보면 10권 가운데 두 권이 같은 번역자의 작품이다. 디어드리 베어의 <융 -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열린책들)과 코맥 매카시의 <로드>(문학동네)가 모두 번역가 정영목씨의 손을 거쳤다. 그런 점에서도 '올해의 번역자'를 꼽자면 단연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매일경제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216809) 씨네21의 인터뷰도 찾아서 스크랩해놓는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의 한 꼭지인데, 한 번역가의 '서재'로 가는 길잡이로서 더없이 친절하고 유익하다. 

씨네21(08. 11. 28) [김혜리가 만난 사람] 번역가 정영목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는 7과 1/2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이 등장한다. 천장이 유독 낮은 이 방은 알고 보면, 타인의 몸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비밀 통로다. 번역가의 작업실을 상상하는데 퍼뜩 그 괴상한 방이 떠올랐다. 출판 번역가의 작업실이란 말하자면 독자의 방과 저자의 서재 사이 층계참에 포복한 셈이어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일쑤다. 역자의 작업은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본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번역가 정영목의 작업실은 일산이다. 보통 회사원들이 직장에 도착할 즈음 집을 나서는 그는 15분을 걸어 친구의 연구소 한쪽에 자리잡은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커피와 인내심이 식지 않도록 주의하며 영어로 쓰인 책을 한줄 한줄 모국어로 옮긴다.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출판 번역가로 입문한 그가 옮긴 책은 줄잡아 100여권. <의뢰인> <펠리칸 브리프> 등 존 그리샴의 스릴러가 초창기 그의 작업이고 알랭 드 보통의 저서 중 다수가 정영목의 손을 거쳤다. 노벨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연작은 적당한 포르투갈어 역자를 만나지 못해 그가 중역한 경우다. 화제작 <로드> <서재 결혼시키기> <책도둑>이 그의 번역으로 소개됐고 비소설로는 모차르트, 붓다, 간디, 융의 전기와 <지젝이 만난 레닌>, 조지프 캠벨의 <신의 가면III-서양신화> 등이 있으니, 웬만한 애서가라면 책꽂이에서 정영목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터다.



기나긴 임종의 기록에 가까운 암담한 내용에도 국내에서 16만부 가까이 팔린 소설 <로드>의 역자 후기에서 정영목은 스스로를 “친절하지 않은 번역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거는 편집자들의 신뢰는, 번역에는‘친절’보다 중한 미덕이 있음을 방증한다. 정영목과 세권의 책을 낸 <문학동네> 이현자 팀장은, 문학성이 깊고 번역이 까다로운 소설의 최고 적임자로 그를 꼽으며 “그저 한 문장을 잘 옮기는 것과 작품 전체의 온전한 이해가 뒷받침된 균형 잡힌 번역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도서출판 강 대표인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로알드 달의 단편집 <맛>을 정영목의 새로운 번역으로 읽었던 소감을 “이야기만 같을 뿐 구간(舊刊)과 완전히 다른 소설이었다.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번역가의 대학 동아리 후배이기도 한 정홍수 평론가에 따르면 청년 정영목은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정리해주는 조용하고 현명한 형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그의 자취방을 찾아갔다가 책상 왼쪽에 원서, 오른쪽에 원고지를 두고 곧바로 펜을 달리는 광경에 감탄했던 일도 정 대표가 전하는 추억이다.



하지만 지인과 동료들이 말하는 성취를 본인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영목은 밥벌이를 위해 번역을 했고 본인의 노동이 성실하기만 희망할 뿐이라고 반복한다. 옮긴이에게 주어지는 한뼘의 공간인 역자후기에서 그의 글이 고집하는 자세도 극도의 겸양이다. 부커상 수상작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The Sea) 후기는 “부커상이 영국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문학상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리샴의 소설에 견해를 보탤 때는 “저자가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번역자도 편승한 우스운 꼴이지만”이라고 유보조항부터 단다. 그런 그가 챙기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지금 여기서’이 책을 읽는 이유와 의미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주의가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쟁투를 그린 <그레이트 게임>에서, 독자들이 영국인 저자를 과도하게 동일시할까봐 조심스레 경계한 후기는 좋은 예다.

번역은 독해보다 천만배 무겁다. 외국어로 의미를 어림잡는 행위와 그것을 모국어 문장으로 확정하는 결단 사이에는 통과해야 할 엄격한 법정이 존재한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훌륭하게 정리했다. “번역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독서라면 그 삶을 흡수하여 소화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것은 그 삶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몸뚱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번역사 산책> 쓰지 유미 저,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 세상이 번역을 ‘먹물의 막장’이라 불러도 “그럴지도 모르지” 주억거리며 묵묵히 일해온 사람, 인터뷰 내내 번역 예찬이라고는 “어찌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라는 단 한마디가 전부였던 사람과 헤어지며 나는 그가 번역가의 묵직한 의자에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태원에서 성장기를 보내셨다고요. 언뜻 듣기엔 번역가에게 어울리는 고향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웃음)
=지금의 이태원은 몰라도 제가 어려서 살던 해방촌은 그렇지 않았어요. 기지촌이라 미국인들을 더러 보긴 하지만 접촉은 없고 그렇다고 “기브 미 쪼꼬렛”할 시대는 지났고.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고 부대 정문 앞에서 아가씨들이 미군 병사를 기다리는 부박한 곳이었죠.

-번역이라는 작업에는 원전의 뒤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일면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책상에 홀로 앉아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일의 성격과 본인의 기질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느끼세요?
=지금까지 해왔다는 건 제가 뭐라 생각하든 성격과 맞는 것 아닐까요? 설령 맞지 않았어도 맞추었다는 뜻이고요. 굳이 조직생활을 기피했거나 중뿔나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고 뛰쳐나온 경우는 아니에요. 졸업 직후 문예진흥원에 들어가 1년 남짓 다녔죠. 문예지 원고료 지원 업무였는데 조사하고 접수하고 영수증 챙기는 일을 했어요.

-‘문예’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이 선택에 영향을 줬나요?
=(잠시 생각한다)저희 세대의 진로 고민은 지금 세대와 달랐을 거예요. 제 경우에는 직장을 선택할 때 우선 고려한 것이 최소한의 시간만 일을 하고 칼퇴근을 해서 나머지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가였어요.

-느낌에 그 ‘다른 일’이 취미는 아닌 것 같은데요. 80년에 대학(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셨는데 혹시 정치적인 이유로 도망 다니는 처지의 친구를 도우셨다거나….
=그맘때야 친구 절반은 도망 다니고 있었죠. (웃음)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따로 있었다고만 말하죠. 그러다 영문학과 대학원 간다는 핑계로 직장을 나왔어요. 그 대학원은 몇년 전에야 겨우 졸업했지만. (웃음) 직장을 나온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학원 강의와 과외, 번역 같은 일을 했지요. 하지만 가르치러 왔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일이 싫어져서 과외는 그만두고 수입은 시원치 않지만 번역만 하게 됐어요. 번역은 1991년부터 시작했는데 ‘부업의식’의 여파는 꽤 오래갔어요.

-남들 눈에는 영문과와 대학원을 차근차근 나와 번역가가 된 직선코스인데 내막은 그렇지 않군요. 번역이 생업이라는 자의식은 대략 언제 때쯤에 왔나요?
=아마 <마르크스 평전>을 옮긴 즈음(2001)이었나봐요. 중요하다고 여겼던 일이 끝나고 계속 흔들리는 상태에서 내 일이 뭔지 정신 차리고 생각해봤어요. 그 나이에 고시를 보는 친구, 유학을 떠나는 친구도 있었는데, 저는 사람이 못나서 하던 일을 관성적으로 하게 된 거죠. 그즈음 번역할 책을 제가 고를 수 있는 위치도 됐고요.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가란 이방의 언어와 문화에 반한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요.
=상상하셨던 번역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 아래 세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윗세대가 외국문화에 대한 매혹을 번역가가 된 동기로 꼽는다면 전 거짓말이라고 의심할 것 같아요. 저희 세대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고 의문을 제기한 세대거든요. 영문과더러 제국주의학과라는 농담도 오가는 상황에서는 서구 문화에 대한 매혹이 있다 해도 뒤틀려서 표현됐겠죠.

부업의식을 떨치기까지의 긴 시간

-<매일경제>와 인터뷰하시면서 경제학이나 법학이 아닌 영문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라고 답하셨던데요. 거꾸로 법학이나 경제학을 할 경우 예상한 결과는 뭔가요?
=어린 나이에 법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겠습니까? 법학이나 경제학이 싫었다기보다 그 전공은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바의 상징이었죠. 반발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집안 어른들이 기대하는 삶을 도저히 살 수 없을 듯한 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문대를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정 그러면 영문과를 가라고 하셨어요. 일종의 타협점이었던 것이죠.

-학창 시절 독서를 많이 한 편입니까?
=많이 읽은 친구들에 비하면 턱도 없죠. 즐겨 읽긴 했는데 어머니가 학업과 무관한 책 보는 걸 말리셨어요. 그래서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다림이 컸죠. 그런데 80년 3월에 입학을 해보니 공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본래 늦되는 편이라 학생운동에 동참하는 데에 갈등이 있어요. 공부 좀 해보려고 했는데 방해받는 게 싫었고, 고교 시절 교련 과목이 싫었듯 대열에 서기 싫은 저항감이 있었죠. 그러다 81년에 경제학과 4학년생이 도서관에서 투신했어요. 공부만 하던 선배였다고 했어요. 이게 뭔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판단과 행동을 가속한 사건이었죠.

-말씀을 듣다보니 한 시절을 박탈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저는 절대 박탈당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누가 강요했던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에 즐거웠어요. ‘화양연화’라 불러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에도 외국어 사회과학 원전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법합니다.
=일본어는 선배들에게 남들은 사흘 배우면 읽는다고 구박 받으며 한자로 대충 때려잡는 법을 배웠어요. <자본론>을 그때 영문판으로 구해서 봤어요. 셰익스피어보다 사회과학서적을 먼저 본 경우죠. <성문종합영어> 다음의 제 영어교과서는 그쪽으로 넘어간 것 같네요. (웃음)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처음 출판 번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번역자들의 상황이 기억나세요? ‘번역계’라는 것이 있었는지 세대구분은 있었는지.
=안정효, 이윤기 선생님 외에 특별히 번역가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어요. 번역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만 해서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나요? (웃음) 단, 소설을 쓰려고 하거나 다른 일을 도모하는 중간 단계에 번역을 하는 전통은 길었죠. 합리화지만, 제가 말씀드린 부업의식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죠. 한 사람이 매달려 할 정상적인 직업으로 번역을 나도 남도 인정하지 않은 긴 세월이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안정효, 이윤기 선생님이 중요한 역할을 하셨고 또 IMF 이후 번역을 지망하는 분들이 급속히 늘어났어요. 실직자가 많아지니 번역은 좌우지간 혼자 먹고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출발부터 번역을 업으로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죠. 새로운 세대를 보면 내게는 애초에 없는 자세가 있구나 생각합니다. 제게 번역은 첫사랑 같은 느낌이 전혀 없고 어쩌다보니 같이 살고 있는 상대에 가까우니까요. (웃음)

-번역 작업의 일반적 순서가 궁금합니다. 일단 책을 통독하고 일을 맡을지 결정하시겠죠?
=과거에는 책을 선정하는 일도 맡는 번역자가 더러 있었고 지금도 기획을 겸하는 훌륭한 번역가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요즘은 주로 출판사가 에이전시를 통해 책을 선정합니다. 책을 받으면 빠르게 읽으면서 할 만한지 살피고 답을 드립니다. 그리고 번역을 시작하죠. 전 둔한 편이라 읽어서는 감이 안 오고 손으로 옮겨봐야 알겠더라고요. 보통은 절반가량 진도가 나가면 궤도에 오릅니다.

-궤도에 오른다 하면?
=배우로 치면 대사가 입에 붙는 거죠. 저자의 문체가 내 몸에 붙어 대충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오죠. 처음에는 불분명했던 대목이 뒤쪽을 마저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되는 경우도 많아요. 아, 이 사람은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구나 깨닫는 거죠. 그렇게 한 차례 번역하고 처음부터 다시 보며 습득한 스타일대로 다듬어요. 그러니까 앞쪽 절반을 퇴고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제 경우는 초고 만드는 시간과 다듬는 시간이 얼추 비슷해요. 이렇게 다듬어 보낸 다음 나중에 역자교정을 편집자와 의견을 나누면서 보고 옮긴이의 글을 마지막으로 씁니다. 동시에 두권 정도 진행해요. 종일 같은 책만 붙들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말귀를 알아듣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워

-번역을 논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외국어도 잘 알아야 하지만 모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던데요.
=소설은 번역의 결과 자체가 소설로서 읽혀야 하죠. 그런 의미에선 모국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냐는 거죠. 예를 들어 글솜씨가 있으면 되느냐, 문장구조가 정확하고 비문만 없으면 되느냐. 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우리말을 구사하는 법은 국어실력뿐 아니라 번역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거든요. 번역자는 저자의 스타일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우리말을 잘 쓰느냐보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겼느냐입니다.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란 전제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극단적 예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서문을 보면 14세기 말 독일의 한 수도사에 의해 라틴어로 쓰인 작품의 17세기 라틴어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이탈리아어로 옮겼노라 써 있잖아요. (웃음)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할 때는 어떤 문체가 합당한 것인지 굉장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잖아요?
=불가능이라… 원작과 번역은 다른 거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악몽이 되는 것이고요. 말장난이나 운을 갖고 벌이는 유희를 그대로 번역하기는 힘들어요. 나아가 오리지널 텍스트가 뭐냐는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걸작이 있을 때 작품의 의미가 고정돼 있다면 많은 학자들이 논의할 필요도 없겠죠.

-문외한 입장에서도 번역은 딜레마 덩어리로 보여요. 단어를 정확히 옮기는 게 옳으냐 아니면 사상을 옮기는 게 옳으냐, 운문을 운문으로만 옮겨야 하느냐 산문으로 옮겨야 하느냐, 독자와 동시대 문체로 써야 하느냐, 원전과 동시대의 책으로 읽혀야 하느냐 등등. 매번 작업할 때마다 그런 문제를 고민하시나요?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로 풀면 얘기가 복잡해집니다. 번역자의 선택이 가능한지도 별개 문제입니다. 제가 “자, 오늘부터는 의역을 해볼까?” 하고 의역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좌중 웃음) 광고라면 메시지 전달이 중요하지만 문학 텍스트는 오역이 아닌 이상 번역자의 기질과 성향,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 결정적인 것 같아요. 제 경우 굳이 어느 쪽이냐를 묻는다면 직역쪽에 가깝죠. 독자의 편의를 염려하는 것은 편집자 소관이고 역자는 저자가 어떻게 말한 것인지를 충실히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죠.

-근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죠. 번역에서는 말귀를 알아듣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저자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깊어야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른바 ‘초를 치는’번역은 싫어해요. 번역은 설명이 아니잖아요? 원문 풀어쓰기(paraphrasing)도 아니고요.

‘번역투’가 나쁘다는데 장말 나쁜가?

-번역문이 술술 읽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반대쪽에는 번역문은 원문쪽으로 끌어당겨서 쓴 이질성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저보고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번역스러운 번역쪽을 택하겠죠. ‘번역투’가 나쁘다는 것이 통념인데, 왜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거든요. 번역인데 번역투가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가만보면 몇몇 분열적인 직종이 있어요. 번역은 번역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칭찬받고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호평받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은 겁니다. (좌중 웃음) 옛날엔 실물과 똑같다는 것이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달라졌잖아요. 저는 번역의 매끄러움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번역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사실 주된 비난의 대상은 한글 문장을 번역투로 쓰는 경우죠. 번역서가 악영향을 끼쳤다고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하지만요. 우리가 읽는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라면 자연스런 사태이기도 하겠죠.
=번역의 영향이 없진 않죠. 하지만 A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영어로 읽어도 독특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작가란 모름지기 그런 독특한 목소리가 없으면 작가가 아니잖아요? 비문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고 저자의 문투를 무화하는 방향은 제 방침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보존하느냐를 고민하는 쪽이죠. 물론 번역자 중에는 (글이) 이런 꼴은 못 본다고 생각해 다듬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입장의 차이죠.

-서평이나 신문의 책 기사에서 번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거칠다고 지적하느라 언급하는 예가 많지만 매끄럽다는 칭찬도 있죠. 기자가 원서도 읽었을 가능성은 희박한데 무엇을 기준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하는지 여러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일단 대부분 원문과 대조없이 평한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죠. 기사에서 번역을 논하는 의도는 사실 본격적으로 번역을 평가한다기보다 이 책은 기본이 안돼 있다는 평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방법 아닐까요?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니까. 축구 경기를 보면서 기본기가 안돼 있다고 해설하듯이 말이죠.

-번역자로서 마지막 방법이 영어 원문을 그대로 쓰고 주석을 다는 것일 텐데요. 역주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주석을 싫어하는 건 편집자들이죠. 책이 어려워 보인다고 학술서도 아닌데 그래야 하냐고 묻기도 하는데, 전 번역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봐요. 영어의 말장난도 어떤 역자들은 비슷한 우리말 농담으로 치환도 하지만 일단 전 그런 재주가 없고요.

-왜요. <책도둑>에서 “A로 시작하는 말”을 “ㅅ이나 ㅆ으로 시작되는 말”로 옮기셨잖아요? (웃음)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옮길 때, 제복이라 치고 입었는데 결과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표현을 “제각각복을 입었다”라고 옮겼어요. 그때는 뭐 약간 제 상태가 좋아서 해본 건데(웃음), 만약 그런 농담이 자주 나왔다면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렇게 옮기지 않았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재치가 없어요.

<로드> 성공, 한국 독자의 수용력에 놀라

-의뢰를 많이 받는 번역가이십니다. 수락 여부를 좌우하는 조건이 뭔가요?
=처음 읽었을 때 독자 입장에서 제가 느끼는 호감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나 인문사회과학서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 무엇이건 제가 어느 한 부분을 건드려주는 책이길 바라죠. 그런 동기가 없으면 몇달의 작업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좀 이해해주세요. (웃음)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낸 <미메시스>라는 번역 무크지가 있었습니다. 99년에 “올해의 좋은 번역서 가운데 선생님이 옮긴 <신의 가면III: 서양신화>가 있던데요. 개인적으로 성취감을 크게 느끼는 번역서는 무엇입니까?
=번역의 완성도에 대한 만족과 성취감이 일치하진 않아요. 일단 <마르크스 평전>이 떠오르네요. <지젝이 만난 레닌>도 작업은 힘들었지만 보람있었어요. 존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이 있는 골목>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마치 어려서 읽은 한국의 민중소설, 그것도 아주 잘 쓴 작품을 보는 것 같았어요. 현실을 끌어안는 품이 푸근한데 그 위에 예술적 깊이와 온기도 대단해서 각별했습니다.



-제약 조건 없이 선택할 수 있다면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나요?
=호치민, 레닌, 마르크스, 마오쩌둥 평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오쩌둥은 좀 생각이 달라졌지만 이 나이에도 설레는 남은 로망으로는 프로이트가 있었는데 그의 평전 번역에 곧 착수할 것 같습니다. 피터 게이가 썼으니 책은 좋을 것 같습니다. 한때 베토벤 평전을 옮기고 싶어 안달을 하고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하느라 공을 들였는데 막상 설득에 성공하고 나니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계약을 했더군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가 전기를 해보고 싶은데 기회가 많이 돌아오지 않네요.

-주로 인물에 관한 책이군요.
=중요한 인물의 저작을 옮기기엔 제 능력이 미흡한 것 같고, 평전이 제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난이도로 치면 소설이 최고죠. 어찌보면 인문사회과학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소설 번역은 결과 자체가 완성품이 돼야 하니까요. 예컨대 <지젝이 만난 레닌>의 경우 쉽지 않은 번역이었지만 지젝은 기본적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려는 사람이거든요. 반면 소설 <로드>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꼭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어요. 독자가 알아듣는지 여부에 딱히 관심이 없달까.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이죠. 내게 설명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옮기는 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일을 애써 알아듣고 번역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죠.

-<로드>는 암울하고 무거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16만부가량 판매됐다고 들었어요. 올해의 작은 사건이랄까.
=저도 의외였어요. 정보가 없는 상태로 번역하겠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간결함이 주는 매력과 알 수 없는 힘에 끌렸어요. 이게 뭘까, 더 알고 싶었어요. 책이 성공한 뒤 제 친구가 내린 해석을 옮기면 <로드>는 누구나 대입하기 쉬운 절망을 그렸기 때문에 잘된 거라더군요. 우리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저 같은 사람에겐 큰 힘이 되죠. 일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신장되고 자유가 커지니까요. 사실 <로드>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대가는 그거예요.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전에서 꼭 맞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나요?
=번역을 배우는 학생들 말이 사전에 나온 1번의 뜻으로 번역하면 안된대요. 실력이 없어 보이니까. (웃음) 그렇지만 저는 1번이 제일 중요한 뜻인데 그걸 피해가면 어떻하냐고 하죠. 단어의 의미는 문맥이 규정하죠. 사전에 나온 풀이가 문맥에 들어맞지 않으면 그때부터 고민에 들어가는 거죠. 사실 작가가 일일이 사전을 들춰보며 원문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사전이 몇권이라도 소용없는 부분이 있어요.

영화자막 번역은 악몽이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보니 편집위원들이 문학의 고전은 세대마다 새로 번역돼야 한다고 표명하셨어요. 번역은 원작보다 수명이 짧다는 것이 상식인데요.
=그 문제도 단순하지 않아요. 그분들은 그렇게 선언했지만, 원작은 가만히 있는데 번역은 왜 시대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간단한 건 아니죠.

-번역문에 쓴 단어가 예스러워져서 동시대 독자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있겠죠?
=저는 현재 흔히 쓰지 않는 단어도 뜻과 느낌이 맞다면 쓸 수 있다고 보는 쪽이죠. 쓰지 말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독자들은 사전을 찾아보면 안되나요? 어휘 선택도 일종의 검열이라고 생각해요.

-불필요한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원문이 젠체하며 외래어를 쓰는 문체라면 번역도 그래야겠죠. 실제로 출판 관행이 저자들의 문장은 토씨 하나 고쳐도 난리가 나니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번역문은 편집자가 윤문하기도 해요. 저로서 기분 좋은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당의를 입힌 매끈한 번역이 선호됐지만, 지금은 원작의 문체를 어떻게 정확히 드러내느냐에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에요. <로드>도 그런 불친절한 문체를 살려서 출간하기 쉽지 않죠.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한 문단이 몇쪽에 이르는- 역시 독특한 문체를 출판사에서 받아들여줬고요. <책도둑>도 흔치 않은 구성과 문체라 초반 진입을 못한 독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번역이 뭐 이래?”거든요. 그래서 편집자에게 고마워요. 좋은 편집자와의 만남이 번역가에겐 중요합니다.

-본인이 번역한 책 중에 개정해서 번역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눈을 크게 뜨며) 다죠, 다. 저한테 한정없이 잡고 있으라면 한책을 갖고 끝도 없이 고칠걸요? 오역은 당연히 바로잡지만 그래서 역자교정 이후에는 일부러 책을 안 보려고 해요. 그걸 어떻게…. 가끔 제 번역을 인용한 글을 읽으면 낯 뜨거워 못 읽겠어요.

-영화를 볼 때도 자막 번역에 대해 민감하십니까?
=미디어 번역을 전공하는 친구들 말을 들으니 가로 번역은 몇자 이내, 세로 번역은 몇자 이내로 해야 하다보니 원뜻과 무관한 번역을 하는 분도 있대요. 물론 그분의 스타일이겠지만. 저는 영화를 잘 모르지만 어떤 영화는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디 앨런 영화자막을 만드는데 잣수 제한이 있다면 몹시 괴로울 거예요. 그분 영화야 스펙터클이 있길 하나 그야말로 말 갖고 하는 건데 대사를 잃으면 영화의 큰 부분을 잃는 셈이잖아요.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웃음) 딱 한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책을 번역하면서 한꺼번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자막을 번역했는데 악몽이었어요. 자막 번역의 고충을 알았죠.

음식과 옷 묘사하기 가장 힘들어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관념적인 명제보다 시시콜콜한 묘사가 옮기기 더 어렵지 않나요? 역서 중 책장의 역사를 다룬 <서가에 꽂힌 책>을 읽었는데, 중세의 사슬 달린 책장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문장들을 읽으며 옮기는 이가 괴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묘사의 번역이 의외로 굉장히 힘들어요. 일단 이미지를 제 머릿속에 확실히 잡아야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동시에 문체도 살려야 하거든요. 제일 싫어하는 내용이 음식과 옷이에요. 먹어보거나 눈으로 봤어야죠. 특히 여자 옷은. 번역뿐 아니라 작가들도 묘사력을 보면 재능을 가늠할 수 있어요. 묘사를 못하는 사람은 영어 자체가 꼬여서 이미지를 설득 못하거든요. 주장하는 문장이 훨씬 쉽죠.



-한 문화권에는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등가물을 찾을 수 없는 단어가 맞을 텐데요. 관직명도 그렇고요.
=<번역어 성립 사정>이라는 일본에서 나온 책이 있어요. 민주주의, 연애 등 10개의 단어를 갖고 처음에 서양어로부터 어떻게 일본어로 번역됐느냐를 따진 책이죠. 예를 들어 경제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해서 쓰게 됐는지 알 수 있죠.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쓴 라틴어가 영어로 흘러드는 과정에 관한 책도 있어서 한때 이 두권의 책을 엮어 번역해볼까 하는 구상도 있었어요. 일본 책이 먼저 나와서 무산됐지만.

-선생님이 두권 이상 번역한 책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존 그리샴, 알랭 드 보통, 주제 사라마구, 타리크 알리 등이 있는데요. 어떤 작가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존 그리샴은 정의감이 중요한 장점이죠. 그 정의감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다른 문제지만요. 주제 사라마구는 노동자 출신다운 강단과 세상을 보는 각도가 있는데, 낯선 그의 스타일이 실은 구술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해요. 타리크 알리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은 깊지만 의욕만큼 성취한 작가는 아직 아닌 듯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글쓰려는 주제 안으로 독자를 포섭하는 능력이 있죠. 무거운 책과 가벼운 책을 번갈아 내는 느낌입니다. 신경질적인 면도 있지만 무게도 실을 줄 아는 저자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 중에서는 <불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현재 <일>(Work)이라는 책을 쓰고 있대요.

-다양한 작가의 책을 작업했는데 옮긴이가 같아 나타나는 문체의 일관성이 전혀 없을까요?
=누군가 그런 말을 제게 해준다면 최악의 평가일 겁니다.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과 쇼팽을 똑같이 연주했다는 말과 같은 거니까. 물론 불가피한 공통점이 있고 저의 무엇이 저자와 변증법적으로 작용해서 번역이 나오는 것이겠지만요. 훌륭한 배우의 경우 어떤 역을 연기했을 때 “이게 그 사람이었어?” 하고 놀랄 때가 있잖아요?

-배우의 경우 육체성을 떼놓을 수 없으니 약간 다르겠죠. 가끔은 독자로서 동의하기 힘든 내용을 번역하기도 할 텐데요.
=제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최근 나온 <그레이트 게임>이 그런 예인데, 저자 피터 홉커크가 영국인의 시선으로 아프가니스탄인을 폭도로 간주한다거나 하는 대목이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한국의 독자들이 ‘폭도’라는 말의 다양한 함의를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해서 아니까 굳이 각주를 달지 않고 역자후기에만 언급했습니다.

번역은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

-선생님은 유학도 간 적이 없고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시지도 않는데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면 비결을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언어에는 끈적한 속성이 있고 해당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영어든 한국어든 어떤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두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 핵심이라고 본다면 영어를 잘하는 것과 한국어를 잘하는 것이 같은 의미일 수 있죠.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건 좋은데 그걸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물건을 사고팔려는 건지, 철학을 하려는 건지, 연애를 하려는 건지. 그런 요소가 있으니 제가 번역을 하고 있겠죠? 외국 거주 경험이 없고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면 번역을 못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겠죠.

-자동 번역기계가 등장했을 때는 감회가 어떠셨나요?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란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게재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자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지젝, 레닌을 만나다>의 후기에 번역 준비과정에서 과거에 나온 책들을 보면서 20여년 전 금서를 타자기로 번역했던 익명, 가명의 번역자들에게 감탄했다고 쓰셨던데요.
=과거의 책들을 찾아본 까닭은 일단 틀리고 싶지 않았고, 앞서 옮긴 이들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작업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번역이 좋아서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도록 만든 원동력에 눈길이 갔어요. 저야 먹고살려고 번역한 거지만 그들에게 번역은 틀려서는 안되는 절박한 문제였던 거죠. 오류 여부를 떠나 본인의 번역이 당시 논쟁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행동을 결정하는 큰 변수가 된다는 데서 나오는 서늘한 기(氣)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 그 사람들만이 소유한 기운이었고 지금의 저한테는 없는 부분이라 부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번역이란 지금 말씀하신 정치적 절박함이건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건 문학에 대한 동경이건 아마추어적 열정이 중대한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번역을 비전문적 영역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고요.
=패러독스인데, 20년 전 레닌을 번역한 사람들은 당연히 아마추어였을 텐데 그들만큼 프로가 되겠다고 의식한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레닌 이론의 핵심이 직업혁명가론이잖아요. (웃음) 아마 새로운 세대들은 아마추어적 정열을 바탕으로 프로페셔널 번역가가 되겠죠?

-혹시 반대 방향의 번역, 한글을 영문으로 옮기는 작업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여러 설이 있지만 모국어가 도착어(번역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번역이 아트(art, 예술)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래프트(craft, 장인의 기술)는 되는 것 같아요. 즉 결과로 나오는 언어를 세공해야 한다는 뜻인데, 세공은 모국어가 아니면 힘들 것 같아요.

追伸: 나이와 함께 체력이 쇠하고 집중의 지속이 짧아졌다고 정영목은 말했다. 이어“그래서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책이 점점 더 필요해집니다”라고 덧붙였다. 거꾸로 젊은 번역자들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덤벼들어야 할 책이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느슨해지려는 몸과 마음의 탄력을 추슬러주는 정영목의 도락은 등산과 클래식 공연 관람. 얼마 전에는 그가 사는 도시의 음악당에서 최다 관람 관객 2위로 뽑혀 부상을 받기도 했다고. 표값이 아닌 방문횟수를 합산한 덕분일 거라면서도 흐뭇한 기색이 비친다. 번역자의 가슴에는 원작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락시켰던 말의 부스러기가 쌓일 테지만, 연주자는 공연으로 작품을 끝없이 재해석할 수 있다. 연주자와 연주를 향한 그의 사랑에는 혹시 그런 특권을 향한 천진한 동경이 포함돼 있는 게 아닐까.

08.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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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2-2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일 오후 좋은 글을 로쟈님 덕분에 읽었네요. 정영목씨는 어린이책들도 번역하셔서 조카에게 망설임 없이 권하곤 했죠..

로쟈 2008-12-21 13:59   좋아요 0 | URL
저도 인터뷰기사 덕에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이 있는 골목>을 알게 됐어요. 어린이책에 대해선 좀 무관심해서 모르고...^^;

쉽싸리 2008-12-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몇 권 사야 겠습니다.
이 분 이름으로 검색해서 살펴보니 단 한 권도 제 수중엔 없군요.늘 소유욕만 난발,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뭐가 좋을까요? ^^

로쟈 2008-12-21 18:20   좋아요 0 | URL
보통의 책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울 듯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했습니다.기자가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하고 질문한다는 느낌이 드네요.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평전을 번역한다니 기대가 되는군요.게이의 슈니츨러 연구서를 읽은 기억이 있거든요.

로쟈 2008-12-21 18:20   좋아요 0 | URL
리뷰어가 이름을 걸 만하지요. 피터 게이의 책은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Kir 2008-12-22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이 분이 번역한 책을 꽤 가지고 있는 편인데, 좋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반반이었어요. 그래서 선호하는 역자로 꼽기는 어쩐지 애매했는데, 이 기사를 보고나니 선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버렸네요^^ 언제나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땅의 수많은 번역자분들의 노고에 새삼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로쟈 2008-12-23 00:09   좋아요 0 | URL
본인 스스로도 고칠 게 많다고 하는데, 점점 좋아지고 있는 케이스죠. 이제까지의 번역보다 앞으로의 번역에 더 기대를 걸게 합니다...
 

교수신문에서 '번역을 말한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에 출간된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창비, 2008)에 대해서 역자인 김범 연구사가 번역 자체보다는 책의 의의에 대해서 평하고 있다(책은 올해의 번역서 후보로 꼽을 만하다). 예전의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2423535)에 보탠다. 

교수신문(08. 12. 11) 동아시아 지평에서 ‘柳馨遠(유형원)’ 조명 … 지나치게 차가운 ‘객체’의 시각

자연과 사회의 현상들을 나타내는 수많은 대칭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兩價的(양가적)이다. 모든 연구에서 객관적 시각과 접근은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덕목이지만, 그것은 그 표현이 의미하듯이 주체가 아닌 객체의 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런 관점은 감정적 편향이나 선입관에 휘말리지 않고 엄밀한 실증성과 합리성을 추구해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칠 경우 건조하고 차가운 탐색에 그쳐 그 대상을 넓고 풍부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질 수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학자의 한 분인 故 제임스 B. 팔레 교수의 주저인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 1,2』는 조선후기사, 특히 실학을 중심으로 한 사상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적 성과다. 지금부터 12년 전 출간됐을 때 이 책은 국내외 연구자들의 커다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저자의 학문적 위상과 그런 저자가 20여 년 넘게 연구하고 집필한 필생의 역작이라는 사실, 웬만한 사전과 맞먹는 1천 3백 쪽에 가까운 압도적인 분량, 그리고 인간의 주요한 생활의 범주에서 문화를 제외한 정치·경제·사회의 거의 모든 양상을 포괄한 그 폭넓은 내용은 그런 현상의 주요한 요인이 됐다.

모두 6부 26장의 방대한 구성에서 저자는 신분·토지·군사·정치·경제 등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제도를 포괄하면서 그 연원과 당시의 상태, 문제점 등을 유형원의 사상과 면밀히 비교했다. 저자는 그런 제도들의 문제점에 처방한 유형원의 경세론을 상세히 검토하면서, 그것을 고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당시 또는 전후의 여러 개혁안과 대비함으로써 그 독창성과 현실성과 한계를, 그러니까 그것의 정확한 역사적 위치를 比定(비정)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저자는 토지제도, 농업 생산, 상업과 무역의 규모, 화폐의 유통 상황 등 다양한 주제를 중국사와 일본사는 물론 서양사와 폭넓게 비교함으로써 그런 사안들에서 당시 조선이 도달했던 역사적 발전 단계를 파악했다.

즉 저자는 유형원의 사상과 조선후기의 상황을 다양하고 객관적인 비교 척도를 사용해 분석함으로써 그동안 다소 주관적인 관점에서 그 사상의 독창성이나 당시의 다양한 발전상을 주목하고 높이 평가한 국내의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는 유형원이 추구한 궁극적인 개혁의 목표가 경직된 근본주의적 태도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고대 중국의 제도를 복원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와 그를 계승한 일련의 학자와 그들의 사상적 성격을 근대지향적인 ‘실학’으로 파악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논리에 치중해 재구성한 역사상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저자의 결론은 그동안 구축된 국내 학계의 통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이런 핵심적 결론 외에도 특히 노비제 사회, 경영형 부농, 양반 및 훈구와 사림의 성격 등 다양한 주제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커다란 논란을 불러왔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측면은 이런 저자의 견해가 그 개인만의 시각이 아니라 해외 한국학계의 주류적인 경향을 종합해
대변한 것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강점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비교의 관점이다. 그 결과 이 연구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우선 각 주제에 대한 유형원의 경세론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그 전모를 밝혔으며, 그것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특히 토지·교육·노비제도에서 일정한 내부적 모순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군사제도·신분제도(종모법)·호포 부과 등과 관련해서 유형원과 송시열·김육·유계·이건명·이이명·박문수 등 당시 조정 신하들의 견해를 대비하면서 전혀 교류는 없었지만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으며, 어떤 사안에서는 오히려 조정 신하들의 해결 방안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저자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교적 경세론을 해석하는 태도를 극복”하려는 목표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른바 실학자들이 지혜를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한 것이었다. 이런 그의 연구는 그동안 유형원의 사상을 개별적 주제에 치중해 살펴봄으로써 독립적인 특징을 밝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전모를 조망하는 데는 일정한 문제점을 가졌던 국내의 연구를 수정,보완했다는데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완전히 상반된 부류로 생각되던 유형원과 조정 신하들의 논의를 비교함으로써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나아가 해결책의 현실성과 효용성을 가늠한 부분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방대한 연구는 중요한 한계도 갖고 있는데, 그것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비교의 기준과 관점을 적용한데서 발원했다고 판단된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언명이나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으로의 회귀를 근본 목표로 삼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尙古性(상고성)은 인간과 역사의 보편적인 특징의 하나다. 그러므로 유형원의 사상이 고대 중국의 제도를 복원하려는 기본적인 목표 아래 구축됐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을 어떤 본원적인 한계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런 측면에 치중하기보다는 그런 원형을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절충하고 개선한 부분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욱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아울러 비슷한 맥락에서 저자는 한 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말대로 “유형원의 사상은 조선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그 시대와 관련된 제약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개인과 현실의 이런 膠着(교착)과 거기서 발생하는 제약들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하나의 전제다. 그러나 저자는 진보나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설정한 뒤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그 사상은 철저하지 못하거나 논리적으로 상충된다고 비판했는데(특히 양반과 노비의 신분과 관련된 교육·토지·군사제도), 그렇게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철저한 개혁안은 오히려 그 급진성만큼이나 비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 또한 매우 복잡한 현실과 제도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고민한 끝에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좀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보통 서너 줄에서 길게는 열 줄에 이르는 지독한 만연체와 몇 번씩 중첩되는 관형구로 이루어진 문체와 무관하지 않은 결과겠지만, 이 방대한 저서에서 어떤 부분(특히 제6부)은 좀 더 압축적으로 서술했다면 더욱 입체적이고 탄력적인 연구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끝으로, 이 저서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11세기 이후 고려와 조선은 노비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를 넘은 노비제 사회였다고 규정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조선 사회의 성격에 관련된 이런 논의는 이 책의 본격적이며 핵심적인 주제라기보다는 신분 문제에 대한 유형원의 사상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다소 선언적인 규정으로 판단된다. 또한 그 단어가 주는 이질감을 접어두면, 양반과 노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므로 그것은 양반의 지배력이 그만큼 강고한 사회였다는 논리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이 책을 옮기면서 객관적 기준과 수사적 표현이라는 문제를 많이 생각했다. 길고 먼 시간과 공간의 격절을 뛰어넘어 이렇게 치밀하고 방대한 연구를 진행한 저자의 학문적 열정과 성과는 분명히 경의를 보낼 만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전체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건조하고 차가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크다고 볼 수 없는 대상을 ‘크다’고 표현하는 것은 왜곡이며 과장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지 않다’거나 ‘작다’거나 ‘왜소하다’고 지칭하는 것은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을 반드시 사랑하거나 긍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건조하고 차가운 ‘객체’의 시각과 수사 또한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 적절치는 않을 것이다.(김범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0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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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국사학'계는 역사학을 애국심 고취의 시녀로 떨어뜨리는 짓 그만하고 이런 학자들의 저서를 정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사실 실학은 지나치게 그 근대성이 과장되었기 때문에 이런 냉정한 평가를 통해 식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리고 우리나라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실제로 제임스 팔레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그의 학설만 대충 추려서 비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2-14 21:49   좋아요 0 | URL
겸사겸사 국사학계가 이들 해외 한국학에 견주어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하더라고요. 혹시 아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17   좋아요 0 | URL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삼인 에 나온 미국과 한국의 한국학 전공자들의 논문을 읽어 보세요.거기에 논문 쓴 카터 에커트와 마이클 로빈슨이 팔레 제자에요.

로쟈 2008-12-15 00:22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한데 궁금한 건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한국학자들의 업적이 무엇인지 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36   좋아요 0 | URL
내재적 발전론자 중 팔레나 에커트가 대결하려고 했던 경제사학자는 조기준입니다.일본의 내재적 발전론자인 가지무라 히데키도 조기준 학설을 연구했지요.한국학의 하버드 학파인 에드워드 와그너와 함께 연구한 송준호는 비교적 해외에도 알려져 있습니다.<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에 논문을 쓴 마이클 신은 코넬 대학에 있다가 올해 국내대학에 왔다고 하던데요.

로쟈 2008-12-15 00:43   좋아요 0 | URL
조기준 선생(1917-2001)에 대한 소개가 이렇군요. "1942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상학부를 졸업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년 독일 베를린대학교 객원교수, 1956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1957년 한국경제사학회 회장, 1959·1975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학장, 1970~82년 국사편찬위원, 1982~91년 한양대학교 대우교수, 1985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한국 경제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14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레의 제자 중 20대들에게도 알려진 한홍구 씨는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반론할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2-14 21:50   좋아요 0 | URL
한교수도 팔레 문하인가요? 잭슨스쿨에 유학했던 모양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레가 워싱턴 대학 교수라서 거기에 유학 갔어요.<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라는 책에 보면 추모의 글에 팔레의 학자로서의 면모가 잘 나와 있어요.

로쟈 2008-12-15 00:23   좋아요 0 | URL
워싱턴대학의 잭슨스쿨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거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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