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적합한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719134035&section=04). 번역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입에 오르내린 오래전 책인데, 마루야마 마사오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를 다루면서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곱씹어보고 있다. 필자는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프레시안(09. 07. 19) 낯섦의 체험…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공동으로 쓴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병상에 있던 마루야마를 가토가 찾아갔고, 그 둘이 번역의 문제를 놓고 대화한 내용을 가토가 정리해서 나온 책이다. 이 대화가 일본근대사상대계(1988~1992, 이와나미쇼텐 펴냄) 중 <번역의 사상>(1991)을 편집하던 과정에 있었다고 하니 1990년께쯤 될 것 같았다(번역서에는 대화의 시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것을 글로 정리한 가토가 1919년생이라니 당시 70살이 다 되었을 듯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약력을 보니 <일본문학사서설>이라는 대작을 남기기도 한 유명한 전방위 비평가이자 작가란다. 그런 사람이 일일이 찾아가서 질문을 하고 그 대화의 내용을 글로 정리했던 상대방 마루야마는 어떤 사람일까?

평소 일본 문화에 밝은 편이 못 되는 나는 그의 약력을 보고서야 내 처의 장서 중에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식한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일본 정치학계뿐만 아니라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가(그는 1996년에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출간을 못보고 타계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논문 실적보다도 못하게 쳐주는 번역이라는 주제에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들였을까?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런 궁금증들을 품었고, 책장을 덮으면서 어렴풋한 짐작이 또렷한 확신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적어도 일본의 근대는 번역이 곧 학문이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메이지 시대와 일본의 번역주의 

이 책에서 문제 삼는 일본 역사의 시기는 주로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이다. 지은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번역주의라고 요약한다. 이 번역주의의 성립과 내용, 그 공과를 따져보는 것이 두 노학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나눈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번역주의는 19세기 초에 일본 해안에 서양의 배들이 출몰하지만 서양에 대한 정보는 없던 상황에서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의 발발과 중국의 패전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서양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립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인 중화의 몰락과 이에 연이어지는 서양의 쇄도, 아시아의 몰락, 그리고 그에 따른 서양에 대한 추종. 여기까지는 많이 듣던 이야긴데, 다른 아시아와 일본이 사정이 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이들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공교롭게도 서양이 일본을 침략할 시점에서 서양 쪽에 보불전쟁, 남북전쟁, 크림전쟁 등이 벌어져 아시아 침략이 지체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대응이 굉장히 재빨랐다는 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서도 여전히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응이 느렸으나 일본은 몇 차례 서양과 벌인 전투와 중국의 패전을 통해 초반의 쇄국 정책(존왕양이론)에서 재빨리 개국으로 돌아섰고, 그 시기가 서양의 여러 전쟁 시기와 맞물려 운 좋게 근대화를 위한 시간도 확보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위기도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막부 시절부터 각 번(藩)에서 앞다퉈 유학생을 서양으로 보내 서양의 정보를 흡수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런 일본의 발 빠른 대응에는 전사인 무사가 지배 계급이었던 점이 중요하게 작동했다고 본다. 전쟁터에서 전쟁을 수행하듯이 일본의 지배 계급은 서양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당시의 상황을 대부분 군사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군사작전 하듯이 서구화를 진행시켰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메이지 시대의 세계 정세와 일본 정부의 계급 구조로만 번역주의가 내 놓은 성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짧은 시간 내에 상당한 수준의 번역의 질과 양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이전 시대인 에도 시대(1603~1867)의 학문적 성숙이 번역과 맞물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평가다.

예컨대 에도 시대의 오규 소라이(1666~1728) 같은 학자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서 일본의 학문적 근간을 이루던 중국의 유학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취했다고 한다. 중국식 발음을 가급적 원음대로 읽고 그것을 체화시키려 했던 조선과는 달리 음으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는 일본식 한문 독법을 사용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했던 것으로 들었는데, 그 원조가 오규 소라이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낯섦'의 체험으로서 번역의 문제가 발생한다.

추상어를 수입하는 번역
나도 서양 고전 번역을 업으로 알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지만 번역은, 특히 고전 번역은 번역을 하는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그 유명한 '이데아'가 있다. 이 말은 보통 '형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문제는 이 '이데아'가 플라톤 시대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일반 용어이기도 했다는 데 있다. 일반 용어로 '이데아'는 '얼굴', '용모', '보임새' 등의 뜻이 있다.

플라톤은 이 일상어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의미를 길어낸다. 개별적인 사물들이 하나로 묶이는 그 사물 자체, 예컨대 얼굴색과 성별과 나이가 다 다른 사람들을 묶는 사람 그 자체를 '이데아'라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플라톤의 철학은 대화편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을 취한 글에 담겨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철학 용어와 철학적인 사고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 울고 웃기고 분노하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일상의 일과 언어가 들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데아가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사람 자체를 표현하고 좋은 것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다 형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문맥에 따라서 달리 번역해야 하나? 물론 현재의 선택은 문맥에 맞는 번역이다. 그리고 주석을 달게 된다. '이 말이 여기서는 얼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희랍어로는 형상이라고 번역되는 말과 같은 말이다. 플라톤은 이런 일상어를 통해서….' 이렇게 해 놓으면 이해는 되겠지만, 플라톤이 희랍어를 사용하는 언어 대중에게 희랍어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이 느꼈을 짜릿함, 일상적인 감각이 추상적인 세계로 비약하는 상승의 느낌은 강 건너 불구경이 되고 만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바로 이 이데아를 예로 들면서 언어에 대한 감각적 이해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추상적인 의미로 도입된 번역어들이 개념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말을 한다. 이후 피히테는 이런 논의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찬탄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만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피히테의 말을 통해서 현재 우리말이 갖는 처지를 살펴볼 수는 있다.

예컨대 우리말에 '좋다'라는 말은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에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good'을 보면 '도덕적 선'이나 '상품'의 뜻으로 추상화되어 사용된다. 희랍어도 마찬가지여서 희랍어의 'agathos'는 일상적인 '좋다'라는 말에서 '도덕적 좋음' 즉 '선(善)'의 뜻으로 발전하여, 심지어 '좋음의 형상(또는 '선의 이데아')'이라는 표현에도 등장한다.

우리말은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에서 추상적 수준으로 발전해야 할 때, 한문에 치이고 영어에 밀리고 각종 외래어에 자리를 내줘 여전히 일상어의 수준에서만 통용된다. 아직도 우리는 몸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컨디션'이라는 말로 간편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우리말을 골라 쓰지 못하고 있다. 말이 그저 우리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말은 우리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생각 자체가 되고, 생각을 길러내는 창고가 된다는 점에서 고민은 깊어진다.

번역, 낯섦의 체험
그렇다고 번역을 하지 않고 문화 교류를 거부하며 순수한 우리말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런 고립된 문화관이 성립할 수도 없으려니와 문화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고립되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체적인 문화는 낯섦의 체험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두 저자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설명이 더 붙어야 한다. 낯선 것을 낯선 줄 알아야 낯섦의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류에 동화되려고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비주류와 주변적인 것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낯섦의 체험은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 일본 근대를 준비한 오규 소라이의 탁월함이 있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고 하는 조선 유학의 정통성이 갖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오렌지를 오륀쥐라고 발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류추종의 의식을 벗어나야 문화의 주체성이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일본은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에 대한 충격으로 개화를 서둘렀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번역국을 설치해가며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형성해나갔지만, 우리는 중국의 것을 편리하게 가져다 볼 수 있는 한문 식자층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번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듯하다.

일본은 중국보다 개화가 빨랐기 때문에든 또 어떤 이유에서든(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중국과는 독자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문화유산의 토대 위에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번역은 하겠다고 맘먹으면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와 여건이 있어야 한다. 이런 토대와 여건이 없고서는 낯섦의 체험도 체화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번역이 해석이 되는 지점도 여기다.

재미있는 사례를 이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중국은 형이상학이 발달한 나라고, 도리(道理)의 사상이 그 형이상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원리의 탐구가 중요하지 역사는 부차적인 것이라, 유교에서 독서의 순서도 경(經), 자(子), 사(史), 집(集)의 순서로 역사가 세 번째로 온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은 성현의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처지라 경(經)도 물론 중시하지만 그런 경전이 성립한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시되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해 중국은 이(理)를 중시하고 일본은 기(氣)를 중시하여 중국은 변하지 않는 것을, 일본은 변화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19세기 서양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진화론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차이를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옌푸(嚴復)가 1898년에 진화론의 사상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책을 <천연론(天演論)>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진화론을 소개했다. 중국인들은 '하늘이 변한다('천연'의 뜻이 그런 듯하다)'란 사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氣)를 중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일본의 사상가들은 자연을 유기적인 것이 아닌 무기적인 것으로 파악한 뉴턴 역학의 자연관에 더 혁명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의리와 도리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살아남은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란 뜻으로 받아들여 약자의 입장에 서서 해석했고, 일본인들은 강자가 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번역을 갖지 못했다. 조선에 진화론을 소개한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사절단으로 가서 경응의숙(慶應義塾)을 다니며 독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진화론을 나중에 한국에 수입하였다. 여러 이유가 더 있겠지만 개화 사상가의 선두에 있던 유길준은 이렇게 일본의 번역을 통해 일본이 해석한 강자가 살아남아야 하는 제국주의 논리의 진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 번역은 번역 주체를 다시 번역하기도 한다. 본래 철학은 희랍에서 성립하여 그 뜻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었다. 그 말을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가 어원을 잘 살려 '희철학(希哲學)', 즉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란 뜻으로 옮겼다. 이 말이 오늘날 줄어 철학이 되었는데, 본래 동양에는 '철학'이란 학문 분류는 없었다.

물론 서양에서도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철학이 분명한 분과학문은 아니었지만, 서양의 근대를 거쳐 동양에 번역되어 수입된 철학은 동양의 학을 거꾸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자도 도학자도 동양철학자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번역된 말이 서양의 문물을 등에 업고 번역하는 자를 규정하고 말았다. 개화한 지 100년이 넘었어도 아직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살려야 하고,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으나 딱히 우리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우리가 다시 또 번역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낯선 것을 낯선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면 그 낯선 것이 침투해 우리를 우리에게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김주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정암학당 연구원) 

09. 07. 20.


댓글(6) 먼댓글(1)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9-07-20 11:25 
    낯섦의 체험 - 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by 로쟈
 
 
펠릭스 2009-07-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로쟈 2009-07-22 22:34   좋아요 0 | URL
그건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습니다...

열매 2009-07-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선생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의 학문의 방법으로서의 번역에 대한 선도적 문제제기를 제외한다면, 그 이후 이런 번역문제 관련한 담론 역시 일본에서 수입, 유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적하는 점 역시 하나같이 똑같은지, 꼭 잘못된 석,박사논문을 베낀 석사논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전자도서관에서 '번역'관련해 논문을 검색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문제의식마저 수입하는 시대가 된 것일까요?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 아닌 확신이 듭니다.

로쟈 2009-07-22 22:34   좋아요 0 | URL
일반적인 수입과는 사정이 좀 다른 거 같습니다. 번역 담론 이전에 막대한 번역어 유입이 먼저 있었으니까요...

Sati 2009-07-22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번역 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죠...

로쟈 2009-07-22 22:32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번역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로 관심을 모았던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에 나오는 지적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번역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한국의 인문서 번역 현실과 그 적들’, 창비주간논평, 2007. 12. 4). 뼈아픈 지적이고 고민을 담은 주장이긴 하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 우리의 척박한 번역문화가 아니었던가. 다만 그간에 부족했던 것은 이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였고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였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제안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노작이다. 20여 년 동안 번역을 해온 전문번역가가 번역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깨달음을 생생하게 정리한 결과물이라고 책에 대한 소개를 대신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가치는 단지 번역의 방법론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의 표현으론 ‘문화사적 맥락’에서의 의의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저자의 고백을 확장해서 미리 말하자면, 독자로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새삼 한국어에 눈뜰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일차적인 의의다. 더 나아가 번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의 특징이 있다는 걸 이 책은 알려준다. 그것이 이차적인 의의다. 이것은 번역작업, 혹은 번역행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의와도 연관됨 직하다. 

번역의 딜레마 - '들이밀까, 길들일까' 

이러한 의의를 좀 더 살피기 전에, 먼저 필자가 잘 정리해놓은 번역의 딜레마에 대해서 짚어보는 것이 좋겠다. 어떤 딜레마인가? ‘들이밀까, 아니면 길들일까’의 딜레마이다. 직역과 의역 사이의 딜레마를 저자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데, 알다시피, 출발어(원어)에 충실한 번역을 직역이라 하고, 도착어(번역어)에 충실한 번역을 의역이라 한다. 가령, “a political hot potato”란 표현을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라고 옮기는 것이 직역이고, “정치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는 식으로 옮겨주는 것이 의역이다. 지금에야 ‘뜨거운 감자’란 표현이 좀 익숙해져서 “시장개방 문제가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와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처음엔 상당히 낯설었을 것이다. ‘시장 개방문제’가 ‘뜨거운 감자’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좀 생소하더라도 원어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이 ‘들이밀기’다. 번역에서 독자 편의 가독성이나 이해가능성보다는 원어에 대한 충실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에게 충실한  번역이 직역이라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 충실하다는 건 더 많이 배려한다는 뜻이다. 물론 놓여 있는 맥락이 서로 다른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충실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경구는 그런 곤경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어느 한쪽에 충실하자면 다른 쪽에는 충실하기 어려운 번역가의 딜레마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으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부정한 미녀(Belles Infidéles)’가 있다. 주로 의역을 가리키는데, 아름답지만 원문이나 저자에게는 충실하지 않다는 뜻을 함축한다. 반대로 원문이나 저자에게 충실하긴 하나 독자가 읽기에는 딱딱하고 어색한 직역투의 번역에 대해서는 '정숙한 추녀'라는 말을 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번역학에서는 ‘자국화(domestication)’과 ‘이국화(foreignization)’란 전문용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길들이기’와 ‘들이밀기’라고 옮긴 것에서 번역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미리 간취해볼 수 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직역과 의역이 모두 일장일단을 가지며 무엇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저자는 일단 의역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왜인가? 그건 우리가 그간에 너무 ‘들이대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길들이는 쪽으로 가보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기도 하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사실 ‘길들이기’는 영미권에서 다른 언어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소개할 때 으레 해오던 것이다. 그런 전통이 너무 강해서 번역학자나 이론가들이 그런 ‘길들이기’가 함축하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가능하면 원문의 표현이나 구조를 살려주는 ‘들이밀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 영역본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쓴 작가의 서문을 영어권 관례에 따라 누락시켰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소설작품에 서문을 잘 붙이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고 번역본의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길들이기’다.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개항 이후에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는 원문 중심의 딱딱한 직역투가 주로 쓰였는데,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일본어로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각국의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들이밀까, 길들일까’의 문제는 단순히 번역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사회적·문화적 맥락은 물론이고 자국어와 자국문화에 대한 자신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요컨대, 번역에서 ‘길들이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가 그렇게 해도 좋을 만한 문화적 수준에 도달해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번역이란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

저자가 전해주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길들이기’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초창기 영어사전에서는 풀이어에 외래어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며 가급적이면 기존의 어휘를 동원하려고 했다. 예컨대, 지금은 한국어로 통용되는 ‘발코니(balcony)’와 ‘치즈(cheese)’를 당시엔 ‘툇마루’와 ‘소젖메주’라고 옮겼다. 여기서 ‘cheese’를 ‘소젖메주’로 옮기는 것이 ‘길들이기’이고, 다시 ‘치즈’로 옮기는 것이 ‘들이밀기’라면, 우리의 번역문화사는 ‘길들이기’에서 ‘들이밀기’ 쪽으로 흘러갔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어쩌면 서구어와 서구문화에 대한 모방과 동경의 풍조 속에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차츰 엷어져간 세태와도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오렌지’라는 한국어를 영어의 ‘orange’와 똑같이 ‘어륀지’로 읽어야 한다는 발상까지 ‘들이밀며’ 한쪽에서는 영어 발음을 위해 혀까지 수술하는 세태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직역(들이밀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만, ‘직역’이 보다 바람직한 번역 방법론이라고 고집하는 직역주의는 반성의 대상이 될 만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30쪽)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대로 그런 상식을 배제하는 것이 ‘직역주의’라면 말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번역은 저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 하는 것”(234쪽)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독자는 물론 ‘한국어 독자’를 말하는 것이니, 독자를 위한 번역이란 보다 알기 쉬운 한국어 단어와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는 영일사전을 베끼다시피 한 우리의 영한사전보다는 북한의 영조사전이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가령 'sabre-toothed tiger'를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의 풀이어 ‘劍齒虎’를 그대로 한국어로 읽어서 ‘검치호’라고 풀어주지만, 영조사전은 ‘칼이범’이라고 옮겼다. “No mill, no meal.”이라는 영어 속담을 영일사전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는 먹을 자격이 없다”라고 옮기고, 영한사전도 이와 비슷하게 옮겼지만 영조사전은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고 기존의 속담을 이용하여 번역했다. 북한의 영조사전은 ‘주체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때론 억지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런 북한의 태도를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남한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비교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학대하는 듯한 직역투의 문장에서 원문과 외국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면 과장일까?  

물론 이런 사대주의적 태도는 중화주의에 물들어 세종의 한글 창제를 극력으로 만류했던 당시 대신들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므로 ‘뿌리’가 깊다. 그렇게 중국을 숭배하다가 일제 때는 일본에 고개를 숙이고, 해방 이후엔 ‘코쟁이’들의 말과 문화에 사족을 못쓴 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지금도 미국식 문화, 미국식 학문은 당연한 모델처럼 받아들여지며, 같은 말이라도 가급적이면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유행이다. ‘조리법’ 대신에 ‘레시피’라고 하듯이 말이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서로 섞이고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편중됐고 일방적이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은 우리 멋대로 창조적인 번역을 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다운 한국어의 사용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란 저자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역자가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어의 특징을 이모저모 짚어주고 있는 대목들이다. 특히 저자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의 특징을 어떻게 잘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한국어의 다양한 활용가능성을 실감하게 해주어 인상에 남는다.  

예를 들자면 “He took the trouble to see me, though he was very busy.”란 문장을 어떻게 옮길까? “굉장히 바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와주었다.” 정도가 아닐까. 저자는 그것 대신에 “굉장히 바쁜데도 일부러 와주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더 한국어답다고 말한다. “Even if I fail, I won't give up.”의 경우도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보다는 “실패할망정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옮겨주는 것이 더 맵시 있고 윤기 있다. 즉, 접속사가 발달한 영어 문장을 그대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옮기기보다는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 표현으로 옮겨주자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부정한 미녀’의 사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에 가깝지 않을까.   

번역 방법론에 대한 얘기를 주로 늘어놓았지만, 간단한 사례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이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한국어의 특징이나 아름다움, 유용성 등을 직접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발견은 저자의 오랜 번역 경험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끼리는 잘 몰라도 외국인과 같이 서면 한국인다운 특징이 바로 눈에 띄는 것처럼, 우리말도 다른 언어와 나란히 놓일 때 도드라진다. 명사중심의 언어인 영어에 맞춰 동사중심 언어인 한국어에 맞지 않게도 명사 위주의 번역문을 만드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다며 검역주권까지 내놓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외국인을 위한 번역, 남들 보기 좋으라는 번역이 아닌 이상, 번역에서도 ‘들이미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다운 한국어로 옮기면 더없이 좋지 아니할까?  

사족을 덧붙이자면, 책은 쉽게 씌어져 있으므로 중고등학생도 읽어봄 직하다. 물론 번역가들뿐만 아니라 번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 특히 잘 안 읽히는 번역서를 붙들고 읽으면서 그동안 불만을 쌓아두었던 독자들은 필독해 볼 만하다.  

09. 07. 05.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arla 2009-07-0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사 중심인 남의 말들을 우리 말다운 동사 위주로 옮기면 뭔가 책잡힐 일을 했다는 느낌을 늘 지울 수가 없답니다. 명사 위주로 줄줄 나열하면 책은 안 잡히겠지, 이런 간교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 문제는 문제지요.

그나저나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나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라는 표현이, 참으로 와 닿네요. 시원하게 정리해주신 서평이라고 느낍니다. :D

로쟈 2009-07-05 23:00   좋아요 0 | URL
인문 이론서는 그런 '면피성' 번역이 주종이죠. 원작/원전에 대한 '충실성'만 앞세우는 태도가 '어륀지주의'와 뭐가 다른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위버멘쉬'처럼 그냥 음역한 걸 '번역'으로 내놓기도 하고요...

2009-07-0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7-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는 로쟈님 글귀가 마음속에 콱 박히네요.
근데 인문 사회계열의 책들은 독자들이 원문 해석능력이 계신분이 많으므로 번역자들이 나름 공을 들여 번역지만 제가 좋아하는 장르 소설은 일어 중역이라든가 날림 번역이 많아 어떤때는 정말 책을 던져버고 싶을 정도지요.하지만 원문 독해실력은 없고 번역이나 소개조차 안된 책들이 대부분이니 번역이 좀 안 좋아도 그냥 출판해 해주시면 감지덕지 합니다 ^^;;;

로쟈 2009-07-06 12:38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의 경우엔 독자클럽 같은 데서 오역도 지적하고 작품 번역도 요구한다던데, 그게 아닌가 보죠? 아니라면 이제라도 그렇게 '실력행사'를 해야합니다.^^

종이한장 2009-07-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관한 서평이라 주제넘게 한말씀 드리자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는 문장은 "독자에게 (좀) 더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라고 바꿔 쓰는 것이 옳은 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보다"는 "이것보다 저게 더 낫다"에서처럼 조사로 쓰입니다. 그런데, 영어의 "more"를 직역(?)한 탓인지 "(좀) 더", "더욱"이 들어갈 자리에 "보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죠.

로쟈 2009-07-10 18:29   좋아요 0 | URL
책으로 묶게 되면 교정하겠습니다. 보통은 편집자들이 수정해주는데, 이번엔 그냥 넘어갔네요.^^;
 

단테 <제정론>(경세원, 2009)의 새 번역서가 출간됐다. 역자인 성염 교수의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작년에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참조해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책이 <제정론>(철학과현실사, 1997)인데, 이번에 좀더 두툼하게 보완된 책이 출간되었으니 새롭게 독서욕이 생긴다. 자고로 이런 욕심은 할일이 많을 때 더 어깃장을 부린다. 언제나 해방될 수 있으려는지...      


최근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는 성염 전 서강대 교수는 “서양고전 번역은 정부의 지원이나 독자들의 관심 여부를 떠나 학자 자신의 책임의식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경향신문(09. 06. 24) “서양고전 번역은 문화적 대화 우리 학문 살찌우는 밑걸음”

알레기에리 단테(1265~1321)는 <신곡>을 쓴 대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 정치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했다.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하던 당시 고국 피렌체의 정치에 깊이 관여했고 이탈리아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외교 교섭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황제권을 옹호하다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되기도 했다.   

이 같은 단테의 정치철학을 집약해놓은 책이 <제정론>이다. 이 책은 중세 정치철학의 가장 첨예한 논제인 교황과 황제의 정치적 권한을 ‘두 궁극 목적 이론’으로 해결함으로써 정교분리론을 사변적으로 확립한 중요한 정치철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단테는 황제의 속권(俗權)이 교황의 교권(敎權)에 통제받는다는 논리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현세적 행복과 사후의 초자연적 행복을 인간의 두 궁극 목적으로 설정하고 각각을 주관하는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동등하게 설정함으로써 사실상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켰어요.”

<제정론>(경세원)을 번역·주해한 성염 전 서강대 교수(67)는 지난 21일 “출간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된 <제정론>은 유럽 사회가 ‘세속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라면서 “인간을 단순히 신앙인으로만 보는 ‘단극성’에 대해 신앙인이자 시민으로 보는 ‘양극성’을 주창한 저서”라고 밝혔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입각해 인간의 자연적 차원을 정립했음에도 속권을 교권에 귀속시킨 반면 단테는 “인류의 현세적 궁극 목적을 주관하는 황제와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주관하는 교황을 설정함으로써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종속된다는 이론을 타파했다”는 것이다.

2003~2007년 주교황청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성 전 교수는 국내에 드문 라틴문학 및 중세철학 전문가다. 40세때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게 고전”이라는 생각에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교황립 살레시안대에서 라틴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라틴어 첫걸음>(경세원)과 <고전 라틴어>(바오로딸) 등 라틴어 학습서를 내놓았고 라틴어 원전을 비롯한 번역서만 100여권에 이른다.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에 머물고 있는 성 전 교수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일은 교부철학 최고의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라틴어 원전 번역 작업이다. 2004년 4년여의 작업 끝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작 <신국론> 원전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그는 얼마 전 또 다른 대작 <삼위일체론>의 번역을 끝냈다. 지금은 초기 <대화록>을 번역 중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는 현대에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신국론>은 인간 실존의 핵심인 사랑이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인 사랑으로 드러나 인류사의 두 축을 구성한다고 보는 역사철학서로, 결국 개인 구원이나 안식보다는 역사나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60종 가운데 중요한 10종 정도는 노망기가 오기 전까지 번역해보자는 생각에 아예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웃었다.

한국서양고전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성 전 교수는 “대학에서 철학과도 없애는 판에 서양고전학과를 누가 만들려고 하겠냐”면서 “가톨릭 신자가 40만명밖에 안되는 일본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체계적으로 번역하는 등 문화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번역은 문화적인 대화입니다. 서구 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저서들을 우리말로 번역해낼 때 동서양 교류뿐만 아니라 우리의 학문적 이론과 문화를 수립하는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으로 번역하고 있어요. 이런 책들을 한 번 번역하면 수십 년을 가는 만큼 지원이 있든 없든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김진우기자) 

09. 06. 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교수신문에서 며칠 전에 읽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이번주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꼭지인데, 철학이 생활세계와의 '반성적 평형상태'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철학(서)의 번역과 사회적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로 분류해놓는다. 기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이란 구절은 하버마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필자가 하버마스 전공자인데다가 최근에 번역서도 출간했으니 이유가 없지는 않다. 하버마스의 신간인 <분열된 서구>(나남, 2009)는 작년인가 영역본을 구하려고 애썼던 책이기도 해서 반갑다...    

 

교수신문(09. 06. 08) ‘반성적 평형’의 상태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철학, 어디로 휴가 갔나 

요즘 우리나라의 독서 시장에서는 대단한 고전이 아닌 철학 번역서의 경우 1천부 이상을 팔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인데, 언론에 매우 호의적인 서평이 실린 경우라도,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철학의 인기가 형편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상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학령인구 대비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 아닌가. 그 많은 대학생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의 가장 큰 몫은 다름 아닌 우리 철학자들이 져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지금, 학문 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철학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반성적 평형’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철학은 그것이 우리 생활세계의 삶의 경험이나 문화적 인식의 합리적 재구성 같은 데서 출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우리의 철학적 이론들을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해 그것들이 바로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경험과 문화적 인식의 올곧고 참된 합리적 정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철학은 단지 시대하고만 불화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지반이어야 할 삶 그 자체에 대해 겉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그저 동서양 외국들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수입했을 따름이다. 퇴계의 철학조차 우리에게는 예컨대 현재의 미국보다도 더 먼 외국이라고 보아야 할 옛 조선의 철학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의 철학 언어는 온통 번역어, 그것도 주로 제대로 통일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일본식 번역어다. 예컨대 ‘a priori’를 전혀 뜻이 다른 ‘선천적’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고는 사람들보고 이해하란다. ‘선험적’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지만, 이 말은 이미 다른 개념의 譯語로 굳어져 사용된다.
물론 이 말도 번역하고자 하는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의 뜻을 적절하게 전달해 주지 못하고 있다. ‘변증술’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의 철학적 언어들은 생활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멀리 휴가를 가 있는’ 언어들일 뿐이다. 그나마 마음 놓고 권할 수 있는 번역서조차 많지도 않다.

철학적 문제들도 대부분 우리의 문제들이 아니다. 윤리학은 도덕의 문제를 다루면서 ‘의무론’과 ‘결과론’을 들먹이는데, 도덕을 무슨 ‘삼강오륜’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 문제 틀을 너무 낯설어 한다. ‘진리’의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해 놓고 철학적 인식론을 소개하면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인식론이 다루는 진리는 학생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철학자들은 지금껏 철학에 대한 어떤 영웅주의적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보면 우리의 철학 언어들은 우리의 생활세계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종의 ‘외계어’일 뿐이고, 우리가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딘가 번지를 잘못 찾은 문제들이다. 그래서 단순히 심심찮게 시도되곤 하는 ‘철학의 대중화’ 노력 같은 것으로 극복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관건은 우리나라의 철학이 우리의 생활세계적 문화에 대해 연속적이면서도 반성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창조적 긴장의 관계, 말하자면 ‘참여적 비판’의 관계를 어떻게 하루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장은주 서평위원 영산대·철학) 

09. 06. 12.


댓글(2) 먼댓글(1)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6-12 11:24 
    ‘“반성적 평형’의 상태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철학, 어디로 휴가 갔나” — via 로쟈
 
 
- 2009-06-1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어떻게 보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니까 읽지 않는 것 아닐까요? 더불어 한국과 GDP가 비슷한 국가들에서 과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들이 얼마나 팔리는지도 궁금합니다.

제 생각엔 왜 이 대단한 책을 읽지 않을까이런 글들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앞선 기술이 시장에서 안 먹힐까, 왜 이 베토벤 7번 교향곡이 대중적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과 같은 게 아닐까요? 더 뛰어난 책으로 승부하면 될 일이라는 시각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또 저런 글을 쓰는 분 중에 정작 자신이 제대로 쓰거나 번역한 책이 있는 분도 흔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는 뭐하고 시간보내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많은 대학생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하다면 그 많은 교수들이 뭐 쓰는지도 그만큼 의문스러워야 될텐데.

로자님, 절대 offensive한 의도로 쓴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인문학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반성적 평형'에 힘을 보태지 못하는 글이나 쓰면서 시간 보낼 바엔 본인이 직접 뭔가 하고 나서 결과는 세상에 맡기는 게 지적인 자세가 아닌가 하는거죠.

로쟈 2009-06-17 08:20   좋아요 0 | URL
인문학계나 학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순 없겠죠. 한데, 이건 당분간 해결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강단 인문학의 경우 대중과의 소통보다는 자리 보전이 더 시급한 형국이라서요(대중의 관심이 아니라 연구비 지원으로 먹고 사니까요)...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는 얼마전에 출간된 <고전의 미래>(길, 2009)의 부제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이자 고전학자인 살바토레 세티스. 200쪽 남짓하는 분량이 너무 짧아서 관심에서 제쳐놓고 있었는데, 책을 번역한 김운찬 교수의 소개글이 있기에 일단 스크랩해놓는다. 고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도 들어가 있는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시길.    

교수신문(09. 05. 25) 古典은 우리 안에 있는 他者 … 고유 개념 정립 필요 

중학교 시절 ‘고전경시대회’라는 것이 있었다. 몇몇 친구와 함께 어쭙잖게 학교 대표로 선발됐고 선생님께서는 두툼한 책 몇 권을 읽으라고 나누어 주셨는데, 처음 몇 장을 넘기다가 재미없고 장황하고 지루해서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내팽개친 기억이 난다. 그때 이후로 고전은 나에게 지루하다는 이미지와 연결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인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덤벼든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도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살바토레 세티스(Salvatore Settis, 1941~)의 짤막한 저술 『고전의 미래』를 번역하면서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한 어떤 명쾌한 해결책을 은근히 기대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는 전문가들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전의 총체적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고전이 우리의 현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조망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논의를 뒤따르다 보면 고전이 너무 많은 것을 가리키고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그는 ‘고전’의 의미가 방대하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따옴표 안에 넣어 사용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고전이라는 말이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사용된 사례들과 의미들에 대한 설명도 고전의 의미를 확장시킬 뿐 개념의 단순화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고전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것은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예술, 사상, 제도 등 모든 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 그렇게 포괄적인 고전의 개념을 정의하려면 클라시쿠스(classicus)라는 용어의 어원과 원래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고대 로마의 시민들 중에서 최고 부자 납세자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최고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을 지칭했다고 한다. 이후의 용법에서 약간씩 상이한 함축 의미들이 덧붙여졌지만, 고전의 속성이 그러한 가치를 토대로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아니했다. 무엇이든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고유의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갖고 있으며, 그 가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의 일정한 시기마다 반복되는 재탄생 과정을 통해 증명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티스는 ‘복귀’와 ‘재탄생’의 역사들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과거의 사실로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이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거나 또는 활용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띠고 새로운 의미로 충만해질 수 있다. 세티스가 인용하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들은 모두 고전이 마치 불사조처럼 죽었다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가 그렇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그렇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고전은 영원히 살아 있다.

세티스가 강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고전의 문화적 상대성 관념이다. 그러니까 서양 문화 이외의 다른 문화권들에도 나름대로 고유의 고전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지배적인 서양 문화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고전이라 하면 그리스 로마의 고대를 먼저 머릿속에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문화의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산발적인 언급에 머무르고 있지만, 중국이나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예들을 인용하고 상호 비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많다. 그리고 각 문화권 고유의 고전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외부 관점이 아닌 내부적이고 토착적인 의미에서의 고전 개념을 정립할 필요도 있다. 서양 문화의 패러다임은 분명 훌륭하고 멋진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지만, 서양의 고전 개념이 다른 문화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고전이란 바로 우리의 내부에 있는 ‘他者’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질화됐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서양의 고전 문화는 “고대에 이미 다른 문화들과의 접촉에 의해 강하게 혼혈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은 동질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고전을 되살린다는 것은 바로 이질적인 것에서 동질적인 것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티스의 말에 의하면 “고전을 회상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다른 것들, 즉 다른 문화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걸음이 될 수 있다.”

요즘처럼 서로 다른 문화들 사이의 충돌과 교류, 뒤섞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다문화에 대한 논의와 대비책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공존의 삶을 위해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고전이 시간의 차원에서 공간의 차원으로 확장되고,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윤리적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가치로서의 고전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화의 수사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고전의 의미와 역할을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세티스는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부터 시작해 중세와 르네상스,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시대를 넘나들고,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며, 건축과 예술에서 문학, 제도, 사상,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그의 논지를 따라가기 위해 관련 문헌을 찾아보고 부지런히 인터넷을 뒤졌다. 하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보기에는 여전히 용어 선택이나 맥락의 이해에서 부족해 보일지 모른다. 번역의 길에도 고전처럼 끝이 없는 모양이다.(김운찬 대구가톨릭대·이태리어) 

09. 05. 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