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자투리 시간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읽었다. 4/5쯤 읽었는데, 번역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다. 어쨌거나 저자의 과감하고 열성적인 문제제기가 반가웠고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의 새삼스러움에 착잡했다. 번역 문제에 '감'이 없는 교수들이나 관료들께서 많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하지만, 젊은 인문학도들이 이 책을 읽는 건 말리고 싶다(우리의 '착잡한' 현실에 도전욕보다는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문득 번역 문제의 한 파트인 오역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써둔 게 생각이 나 여기에 옮겨둔다. 재작년 5월에 쓴 것인데,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우연한 계기가 읽다가 눈에 띈 오역들을 지적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자의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독자의 반응이었다.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일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하여 이 자리에서 '재탕'해둔다. 당시에도 적었지만,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에 대해서 (반)공개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신 역자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나의 의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은 (1)(공동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3년간에 걸친 단독번역이라는 것과 (2)(작품명 등의 혼동/혼란에 대해서) 편집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 (3)(그럼에도) 모든 오역에 대한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는 것, (4)(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재판을 낼 경우, 오역들이 수정될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 건의하겠다는 것, (5)(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지적을 바란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먼저, (1)에 대해서는 역자의 ‘고투’ 대해서 사의를 표한다. 아마도 눈치 빠르게 이 책의 판권을 입수한 출판사측에서(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지젝은 그 ‘난해성’과 무관하게 ‘상종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책이 앞으로 번역/소개될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의 역자를 번역의 적임자로 낙점했던 듯싶다. 소위 지젝 전문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런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2001년 하반기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다(그건 ‘번역이 그다지 나쁘진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으로선 비교적 쉽다는 ‘영화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이고(해서 어떤 경우에도 지젝의 책이 촘스키의 책처럼 팔리거나 읽히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에 대한 책이라 하더라도), 거의 ‘고공비행’ 수준의 이론적 담론을 제대로 포착해서 격추하기란, 즉 제대로 소화해서 번역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지젝을 읽는 즐거움은 그러한 난해한 이론/담론들의 ‘액츄얼리티’를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하여간에 비록 오역들을 지적하긴 했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라도 이 번역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부르디외 번역이 상식 이하라거나(그래도 부르디외 연구서를 낸다!) 크리스테바 전문가의 크리스테바 번역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그래도 크리스테바 연구서를 낸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충 ‘존경’받을 교수들이 굳이 번역이란 ‘고투’에 나선 데 대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물론 이런 경우 못 믿을 건 번역서들보다도 그 ‘놀라운’ 연구서들이지만).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공자’나 ‘전문가’란 타이틀의 ‘허명’에 대한 부수적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러한 오역들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속된/헛된 ‘분별’에 나서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저작권 보호법이 걸려 있기에, 한번 출간된 인문 번역서가 재번역/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다시 손써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역자들로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고전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이브하게 말해서, 엉터리 번역서들이 난무해도 된다(나는 이 책들의 오역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사회적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 ‘이론서’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국역본은 정말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았지만(그런 사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도 들 수 있다) 내차버린 경우이다(역자도 번역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둘째는 인문학 자체/전체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며 존중이다.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커녕, 짜증(‘고뇌’ 대신에)과 장벽(‘높이’ 대신에)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언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따금 이런 염치없는 오역서들을 통해서 젊은 대학생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경우 그들은 인문학을 포기하거나(“그 책 너무 어렵던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봐요.”) 무시하게 된다(“인문학? 맨날 괜히 밥 먹고 알지도 못할 소리나 해대는 거 아닌가요?”). 서로 짝패인 이 포기/무시가 이들의 탓인가?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지게 된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말로는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학의 배덕자들에게…

다시 <히치콕>의 경우. 내가 앞에서 얘기한 것은 오역의 일반론이지 이 책이 오물의 범벅이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명 이전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의 범주에는 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서 특별히 오역이 많은 것은 아니란 점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번역본(‘러시아어본’이나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류하자면,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물론 나쁜 번역의 경우에도 반면교사로서, 오역의 교보재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든, 아무리 ‘적임자’에다가 ‘경험자’라 하더라도 ‘영화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젝의 ‘영화책’을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철학 전공자, 심지어 정신분석 전공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작년 내한 강연 때의 번역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그 번역문들이 올 가을쯤에 어떤 모양새로 출간될지 나는 (벼르면서) 기다리고 있다(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물론 곧 쏟아져 나올 ‘지젝들’에 대해서도 나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요컨대, 지젝의 책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역을 한다는 것은 역자 개인의 ‘역량’에서만 비롯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건, 현단계 우리 인문학 수준, 조금 좁혀서 인문서 번역 수준의 문제이고(지젝을 번역할 만한 지적 토양과 ‘언어’가 아직 우리에겐 잘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 출판계의 총체적인 번역 여건과 (출판)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인문학계와 출판계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이미 ‘관행’이 되어 있으므로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고(북매거진 <텍스트>의 지적을 옮기자면, “(우리 학계는) 다른 지식인의 논문이나 외국 문헌을 베끼는 ‘표절’은 예사이고, 응당 책임져야 할 ‘번역’도 나 몰라라 하면서 숨겨둔 무공비급인양 ‘원전’을 활용한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힘써야 할 학회는 조폭처럼 치열하게 지역(나와바리)을 관리하고 소속원을 비판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비판자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 대해 침묵하는 ‘기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패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출판계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까?

<히치콕>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책이 재판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3,000부를 찍었다고 할 때, 역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번역 인세(대박이 안 날 만한 책들은 다 인세이다)는 17,800원(도서정가)*0.07%(인세)*3,000(부수)=3,738,000원이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실제로는 훨씬 적은 액수의 번역료를 받았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역자의 예상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대략 400만원 이하의 번역료를 보수로 받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에 이 책의 번역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수지’를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견적은 최소한 하루에 10시간씩 두 달 꼬박이다. 그것도 영화학과 근대철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예비학습’이 얼마간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물론 번역 중에라도 구할 수 있는 히치콕의 영화들은 다 구해서 보는 편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줄 것이다(물론 이 비용은 역자 부담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을 이 책에 전념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수가 한 달에 200만원이 안된다(대개의 인문서 번역 형편이 그렇다). 당신이라면 이 ‘자원봉사’ 수준의 번역을 하겠는가?

 

 

 



따라서, 3년에 걸쳐 <히치콕>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역자의 고백을 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이 번역은 “아내와 엄마로서, 선생이자 학생으로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는 옮긴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과 아빠로서, 선생이자 연구생으로서의 분열적인 삶을 정상인양 살아온” 나는 5년 전에 맡은 번역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게으름’으로만 치자면 내가 한 수 더 위이지만, 거듭 말해서, 그건 ‘게으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건’의 문제이다. 아주 실제적으로 말해서, <히치콕> 같은 경우 적어도 6개월간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될 경우에나 번역에 전념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물론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번역지원 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1년간 지원총액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에 머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하긴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는 대표적인 우리말 오역서의 하나이다!).

가령,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박사연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공모하는바, 채택될 경우 매월 200만원씩 1년간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지원에 대한 의무는 등재학술지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히치콕> 번역(400쪽)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논문’(30쪽)이 년간 과연 몇 편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논문을 쓰는 대신에) 누가 (바보같이!) 번역을 하는가? 번역이나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여건 때문에 ‘악순환’이 생기는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상징계의!) 무관심과 ‘부적절한’ 보수 때문에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며(책을 사보질 않는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그래서 책을 많이 찍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번역자에게 제대로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고. 해서 또 ‘저렴한’ 보수에 맞춘 때우기식 번역이 양산될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나?

내 생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여건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여건이 문제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아예 번역학과가 생기고, 번역가가 최고 유망직종이 되는 등)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지(그래서 번역자들이 다 외제차를 타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무관심을 딛고’ 여전히 고도(Godot)를 기다려 볼 수는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번역자들이 알아서(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듯이) ‘어려운 여건을 딛고’ 번역의 질을 좀 높이는 것이다(이런 걸 ‘살신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이로운’ 번역서들을 턱턱 내놓음으로써, 독자의 발길을 되돌림과 동시에 번역을 무시하던 이들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전에 번역자 조합을 만든다는 전제하에서) ‘번역자 조합’의 조합원 결의를 통해서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나 또한 번역을 했고, 또 하고 있으므로 그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번역자 인권과 제대로 된 보수를 보장받기 위해서. 번역자 시국선언과 양심선언이 뒤따르고, 한 번역자가 한강에 투신하는 등등…

어느 쪽이 더 리얼하고, 덜 리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가지가 상호 상승작용하는 것이다. 가령, 번역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가 TV에 방영되고, 거기에 연이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면서 번역자들을 위한 성금(지원금)이 물밀듯이 기탁되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기폭제가 번역자들의 ‘고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단계 부실 번역의 책임을 사회적 여건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번역자들의 책임 또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료 번역자들의 노고에 경의와 동정을 표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는 말끼리 서로 더 채찍질을 하는 것은 더 잘 달려보자는 뜻이지, 가긴 어딜 가냐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2)에 대해서. <히치콕>의 경우에 동일한 영화명이 다르게 번역된다든가 하는 실수는 역자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편집/교정 과정에서 다 체크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편집/교정자가 눈대중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건’의 탓이 크다. 편집/교정자들이 극빈층의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그들의 ‘직업적’ 매저키스트 성향은 사회심리학적 분석대상이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두 눈 부릅뜨고 책을 볼 만한 여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교정자들에게도 다른 방도는 없어 보인다. 눈 빠지게 일하면서 빨리 그들만의 조합을 만드는 수밖에.

 

 

 



가령, <히치콕>의 46쪽에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로 출시돼 있다는 은 전부 <스트레인저>로 옮겨지고 있는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열차 속의 이방인>으로 번역돼 있다(사실 이게 더 맘에 들지만). 이런 사례들 때문에, 나는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그건 알고보니 ‘분열적인’ 역자 한 명의 ‘오점’ 혹은 ‘얼룩’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역자가 이런 영화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번역과정에서는 그냥 원어로 놔두었었는데, 나중에 (자료조사 등을 한 다음) 알아서 처리해야 할 편집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역자가 불우한 여건 속에서 정신없이 번역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옮긴 것을 편집진에서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

사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잘된 번역에서라면, ‘즐거운’ 옥에 티에 불과하다), 번역이 꼬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를 무섭게 잠식해가는 계기가 된다.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요컨대 역자나 교정자가 독자만큼도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물론, 편집/교정자들이 박봉에 ‘고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수’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건 책임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 완벽하다고 내가 자신할 수 없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 그게 ‘자존심’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장 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3), (4)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안면도 없는 역자를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까 한편으론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바라건대, 개정판을 찍었으면 하지만(그러자면 역설적이게도 많이 읽혀야 한다!), 많이 팔린다는 ‘지젝’이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결자해지,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독해’는 계속될 것이다(*실제로 계속됐었다). 다만, 다른 사정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5)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물론 한두 장씩 읽으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 실감하고 있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한 독자의 반응. 그것은 (1)(오역에 대한 지적들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것, (2) (하지만 번역을 기피하는 풍조 속에서) 자칫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는 지나친 비판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박상익 교수도 이런 문제는 조용히/넌지시 처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짤막하게 나의 의견을 밝혔지만, 보다 상세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번역/오역을 ‘응시’하는 나의 자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1) 같은 번역자, 즉 동업자로서의 자리와 (2) 일반 독자로서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자리들에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공식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번역/오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분열적인가? 언젠가 밝혔지만, 나는 (별로 안 팔린 책이지만) 번역서를 낸 바 있고(러시아 소설이다), 또 현재 번역중인 책이 있으며(러시아 소설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여건도 좋아져야겠지만!)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인문서 번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서너 권 정도 검토중에 있다). 또 이전에 번역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한바 있으며(가다머와 리쾨르, 에코, 굿맨 등의 번역이었는데, 완역/출간되지는 않았다), 교정이나 잡스런 번역에도 적잖게 동원되었었다(바흐친, 로트만 등). 요컨대,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옆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나서보지 그러느냐”는 식의 간혹 ‘뒤로 듣는’ 비아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나는 뒷짐지고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에크리>(라캉)와 <피네간의 경야>(조이스),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르네 톰) 등의 ‘숭고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만 아니라면(그건 나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마치 박상륭의 <칠조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처럼. 대신에 ‘교정’해 볼 생각은 있다. 그럴 만한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떤 번역에도 도전해볼 의사를 갖고 있다(번역이란 언어를 통한 존재의 전이라는 ‘사건’이다. 그러한 ‘전이’에, ‘사건’에 어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번역자’의 입장에서라면, 가급적 ‘동료’의 ‘실수’ 등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는 것이 ‘의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다. 동료 의사의 실수를 의사들이 눈감아주고, 동료 변호사의 비리를 변호사들이 눈감아주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만한 일로 낯을 붉히는 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나도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번역자’가 아닌 ‘독자’의 자리로 오게 되면, 전혀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번역자는 같은 업종의 ‘공급자’로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만(간혹 불일치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 ‘공급자’인 번역자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물론 일치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독자로서 내가 읽는 책은, 누구한테 기증 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산 책이다(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에 나는 더러 수모도 당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 가서 주워온 돈이 아니다(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라)!

때문에, 내 돈 주고 산 책이 엉터리라거나 불성실하다면 그건 관용의 윤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공급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종의 ‘사기’니까. 내가 지젝을 샀는데(나는 지젝을 좋아한다!), 뜯어 읽어보니까 지젝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이 들어 있다면(그래서 ‘지젝’을 망쳐놓았다면) 관대한 당신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넘어가는가? 당신이 비싼 돈을 주고 이브닝 드레스를 샀는데, 알고 보니까 남대문 시장에서도 파는 ‘짜가’였다면, 그런데 반품도 안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넘어가는가? 있는 건 돈밖에 없으므로? 그냥 모르고 입고 다니는데, 그걸 굳이 ‘짜가’라고 옆에서 찔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못된 친구’와는 차라리 절교할지언정 그걸 만들어 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모르고 산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가?

해서 사정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주 단순하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 최종적인 책임은 번역자(피고용인)가 아닌 출판업자(고용주)에게 있다. 하지만, 역자 후기 등에 ‘사장님’에 대한 감사가 곧잘 언급되더라도,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함께 역자의 이름이 박힌다. 그건, 적어도 책의 만듦새는 출판사에서 책임지지만, 내용만큼은 역자가 책임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급자(번역자)-소비자(독자) 간에는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 거래에는 아주 기본적인 윤리가 개입한다. 제값을 치르고, 제값의 내용(읽을 거리)을 공급받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서로에게 제값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다(당신은 그냥 대충 이 정도 수준에서 읽고 떨어져라? 나도 어려운 책이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지 그래?).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비판은 그런 기만/모욕에 대한 대응이고, 응전이다.

오역에 대한 그간의 지적이 지나치게 신랄해서 간혹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의 반응 때문에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발단이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적인 차원’의 공격이라는 점이며(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또 그런 부실한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다니, 당신 바보 아니냐?”는 식의 어조는 내가 받은 ‘모욕’(이렇게 번역해도 바보들이 뭘 알겠어?)과 금전적 손실(수입만을 따지자면, 나는 빈곤층에 속하는 시간강사이다. 소위 '화이트 프롤레타리아'이다)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그래도 소심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이 생각을 하면 다시금 분노가 솟구친다. <킬 빌>을 다시 봐야겠다!). 고작 카페 한두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곳에 ‘의견’을 올리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 아닌가?

그로 인한 역효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역효과는 ‘인신공격’을 받은 번역자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적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부실 번역들을 계속 양산해내는 것이다(게으른 자들에게 축복을!).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나의 지적/비판의 정당성을 더 확증해 줄 것이기 때문에(“욕먹을 만하군!”)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거 같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 역효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잘못된 역자를 만난 몇 권의 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존심을 회복해서 더 좋은 번역서로 ‘컴백’한다면, 그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건 ‘역효과’가 아니라 ‘효과’이다.

나는 단지 (애서가로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책’에 대해서 근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오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제대로 된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혔다(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번역자도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건 번역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정상이다(독자의 입장에 서서 한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번역자 자신이 그 책을 가장 깊이 있게 읽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충 둘러대고, 틀어막고, 얼버무리고, 살짝 빼고 한 내용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번역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번역자로서는 수준 이하이고, 자격 미달이다(이런 번역자들에겐 ‘인신공격’도 부족하다).

거꾸로, 어느 정도의 수준과 자격을 갖춘 번역자에게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성의’이다(‘여건’이란 건 이 ‘성의’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뀐다거나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거나 고유명사 표기를 헷갈리게 한다거나 우리말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쓴다거나(통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는 따위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번역자들로서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이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쁜 번역서’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따라서, 한 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부실한 번역서들에 대해서까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예의를 갖출 생각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똘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태도이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참에 오역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결론은 독자에 대한 번역자의 예의란 것인데, 사실 거기에 덧붙여 ‘책에 대한 예의’ 또한 나로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기선 더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번역의 엉터리 책들은 도색잡지보다도 부도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고급 누드집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며, 그러해야 한다.



끝으로, 나쁜 번역서들만 판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 (드물긴 하지만) 좋은 번역서들에 대한 옹호도 곁들인다. 내가 직접 읽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나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책세상) 같은 건 좋은 번역서였다(후자는 내가 갖고 있던 영역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역자들은 모두, ‘관행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들이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들에서도 약간 미심쩍은 곳(동의하지 않는 곳)이나 오타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옥에 티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이들 번역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으며, 그들의 또 다른 번역서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그러한 역자들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06. 02. 12.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6-02-1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역투성이 번역본들이 "짜증"과 "장벽"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종종 '창조적 오역'으로 재생산되는 경우도 있지요..^^ 크리스테바 책을 오역투성이로 번역한 크리스테바전문자의 크리스테바 연구서들도 아마..이런 '창조적 오역'에 의한 결과물일지도 모를 일...^^;;
넘 미워만 해주지는 말자고요..^^
그런데 로쟈님이 번역하신 책을 한번 읽어보고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떤 책인지 좀 알려주세요... 읽어보고 싶네요^^

瑚璉 2006-02-1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하는 건데 출판사에서 어떤 책을 출간할 때는 하다못해 단순한 오자 교정이라도 담당할 수 있는 작은 그룹을 운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참가자에게는 인쇄본 1권 정도 증정.

비로그인 2006-02-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해결책을 보니깐. 거의 자조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이 팍팍 오는 군요.

 


로쟈 2006-02-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절판됐습니다. 새로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壺裏乾坤님/ 그것도 방안이겠습니다.
스메르쟈꼬프님/ '전의'도 읽으셔야 합니다.

paby 2006-02-16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문제가 아니라, 지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문제인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로쟈 2006-02-1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보다는 '과공비례'라는 게 제 소신입니다. 미심쩍은 대목에 대한 '이견'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자기견해를 밝힐 수도 있지만, (주관적으로) '분명한' 오역에 대해서는 그런 공손한 지적이 제가 보기엔 오히려 역겹습니다. 역자가 '제가 보기에는 이러이러한 뜻인 걸로 사료되옵니다'라고 번역하지 않은 인상...

외로운 발바닥 2006-03-0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 않은 글이었지만, 후딱 읽어버렸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번역과 오역에 대한 문제점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 압축적으로 번역에 관한 제반 문제가 총 망라되어 있네요. 파이트클럽 사진 밑에서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부분 정말 제맘에도 듭니다. 퍼가고 싶은데 언제부터인가 퍼짐이 안되서 부득이하게 복사로 퍼갑니다.

로쟈 2006-03-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의식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오늘자 한국일보에는 언제나처럼 '객원논설위원'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이 실렸는데(이 연재가 47회에 이른 만큼 이젠 책으로 묶어도 좋을 만한 분량이 되었다), 오늘은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시인 편으로 세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관동출판사, 1968)을 다루고 있다. 김현승 시인의 호는 '다형(茶兄)'이다. 생전에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이 글은 커피를 마시면서 쓴다).

고종석의 글은 "김현승의 시세계는 예술과 철학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다. 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철학적이라 규정하거나 한 철학자의 정신세계를 예술적이라 판정하는 것이 반드시 상찬일 수는 없다. 이성의 규칙과 감각의 규칙은 자주 맞버티기 마련이어서, 그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으려는 시도는 얼치기 예술이나 반편이 철학을 낳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미의 끝머리와 치지(致知)의 첫머리를 이어 거룩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사의 높다란 정신들이 늘 지향해온 이상이었다. 김현승은 그런 매듭 하나를 지었다."라는 문단으로 시작해서, "김현승이 목월보다 세 살 손위고 미당보다도 두 살 손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를 읽을 때, 독자들은 이 시인의, 특히 그 후기 작업의 첨예한 현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현승을 딱히 주지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우리 시단에 드문, 진정 지적인 시인이었다."란 문단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새삼 놀란 건 다형이 미당보다 두 살 위라는 사실. 깊이 따져본 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같은 연배나 후배 시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경건한 고독의 세계'는 언제나 '토속적 탐미주의의 세계'보다 나중에, 혹은 그런 세계를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어떤 경지가 아닐까란 선입견 때문인 듯하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그의 시 '가을의 기도'의 마지막 대목에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라고 시인이 '기도'할 때, '마른 나뭇가지'가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보다 나중에, 말하자면 '뜨거운 피'의 세계 이후에 나오는 것처럼. 

해서 등단도 다형이 1934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데뷔하였으므로 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한 미당보다 2년 앞서지만, 어쩐지 더 '나중'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떤 사건이 스토리상으론 먼저 나오지만, 플롯상으로 나중에 배치되어야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는 두 사람보다 연배가 좀 위이면서 미당과는 '생명파'로 같이 묶여서 불리던 청마 유치환(1908-1967)과 더불어 한국 현대시 정신사의 삼각형을 만든다면 그 한 꼭지점을 이룬다('바위'와 '구렁이'와 '까마귀').    

작년 11월에 시인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김현승 시전집>(민음사, 2005)이 출간되었지만, 이 고독한 '기독교 시인'은 시단과 평단의 주류적인 관심사 밖에 있었다(기억에 <김우창전집 3: 시인의 보석>의 표제가 김현승론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당이나 대여(김춘수)와는 달리 시의 '언어'보다는 시의 '이념'에 더 주안점을 두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기독교적인 성향의 시인들을 내켜하지 않은 터라 나도 지난 80년대 중반에 구할 수 있었던 김현승의 전집(시인사)을 제쳐두고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문학과비평사, 1989) 같은 시선집을 통해서 김현승과 대면했었다(아마도 군복무 시절이어쓴데, 그때 몇 자 적은 독후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는 곧 덮어두었다(시인의 '고독'에 동참하기에는 아직 젊었을 때니까).

이어서 언젠가 교육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였던 것 같은데, 김현승의 시세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고, 전남 광주 출신이었던 시인의 시비가 무등산에 세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동향의 후배 시인 황지우가 시비에 새겨진 시 '눈물'을 낭송하기도 했다(중학교 교과서엔가도 실려 있던 시. 박완서의 소설에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이지만, '시'로서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건 '연(鉛)' 같은 시인데, '납 연'자이므로 그냥 '납'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오래전에,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엮은 세계시선집 1권(한국현대시)으로 나온 <나는 내가 무겁다>(정우사, 1994)에 표제를 빌려준 시가 바로 '납'이었다. 그때 만난 이 시가 내게는 김현승의 대표작이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버렸나부다.

요즘은 중국산 꽃게, 대구, 복어, 병어 등에서 '친근하게' 발견되는 것이 납이지만, 시인에게 납은 '금'과 '은' 같이 되지 않는 시와 삶의 은유이다(나는 영혼에 대한 시들보다는 이 납에 대한 시들을 더 좋아한다). 하긴 예전보다 무거워진 나의 몸속에도 납덩어리가 몇 개쯤 들어앉아 있는지도 모를 일인바,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라는 시인의 하소연이 남의 것일 수만은 없다. 사실 보다 일반론적으로 해서,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들어올릴 수 없는 만큼,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라는 진술은 보편적 명제에 값한다. 그러니 시인의 고독은 딴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견고한 고독'에서 '절대 고독'에 이르는 김현승의 시적 여정에 새삼 눈길을 주어볼 만한 이유이다. 


06. 01. 2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일레스 2006-01-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신문을 항상 하루 늦게 보게 됩니다) 고종석씨 글을 읽고 김현승 시인 나이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서 또 로쟈님의 글을 읽게 되니 반갑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로쟈 2006-01-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생각을 하셨다니 반갑습니다.^^
 

이 글의 이전 제목은 '<나쁜 피>의 한 장면에 대한 생각'으로 1997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내 딴에는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미래의 글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적어둔 것이었다. 지난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알려진바, 영화 <아일랜드>(2005)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생명복제시대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글을 쓰는 데 아직은 '여유'가 있는 셈이다. 당분간은 20년전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입막음 해야겠다. 대신에 이미지 버전으로 업데이트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

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1986) 한 장면이다(*<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이 나머지 두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아방가르드의 다섯 노총각들>, 현대미학사, 1993)

06. 01. 2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6-01-2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6-01-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진행중인데요.^^

비로그인 2006-01-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우석 사태로 생명 복제가 현실과 멀어졌다는 건 사실과 다르지 않나요?

황우석이 사기친 건 줄기세포고 생명 복제에서는 분명한 연구 성과 (스너피)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로쟈 2006-01-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적었듯이, 제가 염두에 둔 건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아일랜드>에서 설정된 것과 같이 '본격화된' 생명복제 시대입니다(이 영화가 유독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했는데, 황우석 신드롬의 영향으로들 해석하더군요)...
 

 

지난 연말에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 에밀 시오랑(E. M. Cioran, 1911-1995)에 대한 글을 몇 마디 적고자 했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계속 미루어졌었다(밀린 일들이 어디 한둘이랴!).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책 <독설의 팡세>(문학동네, 2004, 원제는 '고뇌의 삼단논법' 정도)을 다른 책을 대출하기 위해서 부득이 오늘 반납해야 했다. 해서, 아쉬운 마음에 몇 가지 메모만을 남겨둔다(세번째 이미지는 <고뇌의 삼단논법> 불어본(1952)이고, 네번째는 <존재의 유혹> 영역본, 그리고 마지막은 손택의 에세이집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Styles of Radical Will)>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Cogito ergo Boom)"는 물론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비튼 것인데, 이 새로운 명제의 출처는 수잔 손택의 시오랑론 '반(反)자기 사고 - 찌오런에 관한 고찰'(<급진적 의지의 스타일>(현대미학사, 2004)에 수록돼 있다)이다. 지나가는 김에 덧붙이자면, 국역본에서 '시오랑'이 루마니아 원음에 따라 '찌오런'이라고 표기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원음주의'의 환상에 대해서는 자주 지적한 바 있다). 루마니아 태생이긴 하지만, 20대에 파리로 건너와 그가 평생을 산 곳은 프랑스 파리이며 이후에 대부분의 에세이도 루마니아어가 아닌 새로 배운 '불어'로 썼기 때문이다('외국어'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 시오랑 자신이 비통해 했지만). 게다가 다른 번역본들과의 일관성 문제도 있다. 참고로 러시아어본들에서는 '시오란' 혹은 '쵸란'이라고 표기한다.

 

손택의 에세이는 영역본 <존재에의 유혹> 서문으로 씌어졌는데, 1960년대 중반에 나온 이 글이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시오랑론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내가 쓰고자 했던 글의 제목이, 시오랑의 세계를 잘 요약해준다고 판단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가 근대철학의 개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면, 시오랑이 미덥잖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코기토의 불철저성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잘못은 너무 참을 만하다는 것이다."(<독설의 팡세>, 39쪽) 사유를 철저하게 극단에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존재'를 통과하여 의당 '폭발'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가령, 칸트의 비판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아포리아들을 하루만 물고 늘어져보아도 머리가 지끈지끈거릴 것이다. 세계는 유한한가, 혹은 무한한가에 대해서 우리는 무얼 사유할 수 있는가? 아이가 아이였을 때 흔히들 묻곤 하는 '왜 나는 나이고 너가 아닌가?'란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대답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가? 어떤 원리로부터 연역되는 가능한 철학적 귀결들을 그냥/마냥 참아낼 수 있는가?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철학의 참을 만함'을 더이상 참지 못할 때, 우리는 '폭발'한다.

 

Emil Mihai (Michel) Cioran

 

때문에, 시오랑의 아포리즘들은 어떤 사유의 응집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폭발의 잔재로서 읽혀야 한다. 즉, 그의 아포리즘들이 지시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종말로서의 폭발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 철학자, 에세이스트'라는 백과사전의 정의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말하자면, '시오랑, 혹은 폐허의 철학자'로 이름붙일 수 있을까? 마치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2002)에서 폐허의 한가운데 놓였던 피아니스트 스필만을 떠올리게 한다. 혹은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1979/2001)의 한 장면. 하긴 그는 하루하루를 묵시록적 예언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매일 최후의 심판이 내일이라고 약속해주는 나의 광기. 그 자비심이 없다면 나는 한 나절이라도 견딜 수 있을까?"(45쪽)   

 

 

시오랑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내 기억에 1990년대 초반쯤 계간 <작가세계> 특집을 통해서였다. 나는 대번에 그의 아포리즘들에 끌렸고, 곧이어 출간된 <절망의 맨끝에서>(에디터, 1994; 강, 1997), <내 생일날의 고독>(에디터, 1994) 등도 반가운 마음에 사서 읽었다. 한데, 시오랑론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한국어 번역본들은 대부분 제목의 선정에서부터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불어본들을 읽고 쓸 수는 없지 않은가? 90년대 후반 이후로 영역본들이 많이 나와 있길래 작년말에 도서관에 대거 주문을 넣은 것 정도가 나의 성의 표시이다. 3권의 러시아어본도 갖고 있는데, 모음집이어서 작품수로는 7-8권 가량이다. 대부분이 아포리즘집 형태인 만큼 시오랑의 책들은 두껍지 않다).

 

가령, <독설의 팡세>도 비록 그런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손 치더라도 원제와는 동떨어진 것이며, <내 생일날의 고독>은 원제가 '태어남의 잘못(=불편)'에 대하여'이고,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이땅, 1992) 혹은 <동구로 띄우는 편지>(이땅, 1990)의 원제는 <역사와 유토피아>이다. <노랑이 눈을 아프게 쏘아대는 이유>(산수야, 1995)의 원제가 <고백과 저주>라는 걸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니 수면제 대용이 아니라면(실제로 시오랑은 거의 평생을 불면증에 시달렸다) 국역본들을 읽고 제대로 된 시오랑론을 쓴다는 건 치기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아직 시오랑에 대한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 빚을 다 탕감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변명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를 가지고 모두 입막음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진 또다른 빚은 '눈물의 일반이론'에 관한 것인데, 예전에 같은 제목으로 역시나 '변명'에 해당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거의 10년쯤 전의 일이다. 부분적으로 따라가본다.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나는 의사가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가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불안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내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어린것은 온갖 것을 보고 듣는다. 그 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키라를 사랑한다. 내 어린 키라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애 역시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내게 내가 잘 잤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언제나 잘 잔다고 말해준다. 나는 무얼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神은 내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결함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다. 神이 아니다. 나는 神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춤을 추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이다."(니진스키, <고백>) 

 

∴ ∴ ∴


 

 

"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였다. 못이 꽝꽝 박히고 짐마차에 실렸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가 끝나는 데까지밖엔 전송하지 않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은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추어서지도 않았다. 비가 그의 맨머리를 적셨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했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기어나오고 무슨 책인지 커다란 것이 한 권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 ∴ ∴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두 러시아인 댄서/작가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울음이 우리 생의 첫 발성(언어)이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동받는다.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우리가 이 근원의 장소를 찾아가고 이 원초적 정념에 호소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고무받는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1984)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정이 파탄나자 트래비스는 자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근원의 장소로서 '파리'(프랑스의 파리가 아니라 텍사스의 파리이다)를 찾아 사진 한 장을 들고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헤맨다. 그의 그런 행위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질적인 어떤 공간이 '파리 Paris/텍사스 Texas'로 분절된다. 이 분절은 성(聖)/속(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이고 구제론적인 것이다. 이 고질적인 의미론/구제론은 아주 인간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그리 돼먹은 듯하다.

∴ ∴ ∴

 

"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이것은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그리고는 진부하면서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그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의 말: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 ∴ ∴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시오랑은 해체de-composition라고 부른다. 이 해체가 그의 글쓰기 양식을 규정한다.)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solidarity)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예상태이다. 핑계로 무덤을 세웠다면 거의 마을묘지 수준이 되겠다. 다만, 시오랑에 기대어 말하자면,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정직하다는 표시이고, 무언가에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사기의 표시이다."(37쪽) 그러니 나의 우유부단이 죄악이 될 수는 없겠다. 바로 앞에서 시오랑의 철학도 시절 일화를 소개했는데, 출처를 따진다면 바로 <독설의 팡세>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다른 역자의 번역이기에 전문 인용해보겠다(내용은 비교해 보시길).

 

경험부족으로 철학에 취미를 갖게 되었던 나이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 어떤 주제를 선택할 것인가? 나는 진부하면서도 동시에 특이한 주제를 원했다. 그것을 찾았다고 믿었을 때 나는 서둘러 스승에게 알렸다. "눈물에 대한 일반이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군. 그러나 참고문헌을 찾기 곤란할 텐데." "상관없습니다. 역사의 권위가 뒷받침해줄 것입니다." 나는 무례하고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조급한 스승이 내게 경멸의 시선을 던졌을 때, 나는 내 안에서 그의 제자를 죽이기로 결심했다.(51-2쪽)

 

 

비록 계획했던 '눈물의 일반이론'은 아직 못 쓰고 있지만, 나는 전공관련으로 논문을 쓸 때마다 시오랑의 일화를 되새기곤 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삶의 내적 요구에 부응하는 주제들에 대해서만 쓰겠다는 것(시오랑과 달리 나는 참고문헌도 열심히 찾는다!). 그건 책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란 주제의 시오랑론을 쓰는 것도 그러한 요구의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살아온 만큼 살아가기도 해야 한다는 것. 어쨌거나 (당분간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이건 또다른 요구이다. 이 둘 사이에서 내가 짜낼 수 있는 묘안은 이런 류의 페이퍼로 잠시 자리를 데우는/때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릿광대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으니까."(34쪽)

 

06. 01. 2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1-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계로 무덤을 세웠다면 거의 마을묘지 수준이 되겠다, 에서 한참 웃었네요.
저는 아마 국립묘지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묘비명에는 게으름이라는 단어에만 볼드 처리되어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6-01-20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파님/ 이보 안드리치를 전공하시나요?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을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
 

유리 로트만(1992-1993)은 러시아 최대의 문화이론가이자 기호학자이며 문학연구가이다. 오래전 학원 시절에 작성한 글 하나를 그에 관한 '소개'의 글이 될 만하겠다 싶어서 여기에 옮겨온다. 혹 텍스트이론이나 문화기호학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소용이 닿았으면 싶다.

로트만의 저작으론 <예술텍스트의 구조>(고려원, 1991), <문화기호학의 이해>(민음사, 1993),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 1998)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국제적인 지명도에 비하면 소략한 편이다.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기본 개념들과 프로그램 등에 대한 소개는 송효섭의 <문화기호학>(아르케, 2000) 등을 참조할 수 있다(세번째 이미지는 러시아에서 나온 로트만 전집 중 마지막 권의 표지이고, 마지막 이미지는 강의중인 로트만. 그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대학에 오래 봉직했다. 아래 사진은 타르투대학의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1. 텍스트에서 텍스트-기계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30여년 간의 지적 여정을 통해 러시아의 대표적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기호텍스트/문화텍스트에 대한 방대한 양의 또다른 텍스트를 남겼다. 그의 텍스트들이 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기호텍스트(예술텍스트)[초기]와 문화텍스트[후기]의 의미생산 방식이다. 그에게서 물질계와 생명계의 모든 현상은 기호작용을 통해 언어[기호]로 번역되어 기호계로 편입된다. 그리고 이 기호계는 무엇보다도 의미의 생산과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구성되는 세계이다. 이 기호계에 편입되면서, 현상은 비로소 현상의 이름에 값하는 의미를 획득하며, 현실의 사태는 사태로서의 규모와 의의를 부여받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의미작용이다. 

의미작용이란 의미를 생산하는 작용이다. 여기에 어떤 텍스트가 주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하게 어떤 의미 잠재태, 의미 가능태를 지닌 존재의 현실태일 따름이다. 텍스트는 그저 사물로서 존재한다(로트만의 아들 미하일 로트만은 자신의 아버지를 칸트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기호학의 기본개념인 텍스트가 칸트 철학에서의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사진은 미하일 로트만). 즉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있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텅빈 기호로 자신의 존재를 변환시켜야 한다[=기호작용]. 그리고서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이름부르는 행위가 바로 ‘읽기’이며, 이 읽기를 통해 텍스트는 자신의 많은 가능태 중의 하나를 현실태로 만든다{=의미작용]. 이러한 일련의 과정, 그러니까 다수의 가능태가 하나의 현실태로 고정되는 가역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 바로 의미생산과정이며, 이것은 의미작용의 결과이다.

 

이때 이러한 과정 속에 놓이게 되는 대상이자 주체인 텍스트는 말의 정당한 의미에서 텍스트-기계가 된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생산되는 특수한 기계이다. 로트만의 기호학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기계이다로트만이 직접 ‘텍스트-기계’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텍스트-기계'는 그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다. 참고로, 텍스트-기계(textual machine)는 에코에게서 빌어온 개념이다). 그래서 그가 텍스트 기호학자라는 말은 이 텍스트-기계의 기계공학자라는 말과 등가적이 된다. 사실, 이러한 명칭은 그의 지적 경력에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2. 기호와 기호-기능       


기호는 기호작용의 결과로 생성된다. 기호는 기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품이며 원소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다소의 모호함을 내포하게 되는데, 바로 텅비어 있음이 기호의 기본적인 자질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기호는 다만 어떤 것이 되기 위한 가능성일 따름이고 준비상태일 따름이다. 그래서 기호는 기호-기능과 별다른 의미차이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U. 에코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호-기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에코가 퍼스(C. S. Peirce) 기호학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받아들이고 있는 한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 실용주의적인 사고란 것은 이름껍데기만 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고를 말한다.

 

이에 대한 로트만의 입장은 조금 차이를 보인다. 그는 텍스트의 자리를 텍스트-기계 이전의 단계에 물자체와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마련해둔 것처럼 기호의 자리를 기호-기능 이전의 단계에 마련해둔다. 에코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호는 본 얼굴이 없고 단지 마스크들만 있는 것이고, 로트만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그런 마스크들의 가족유사성을 보장해주는 어떤 얼굴(혹은 얼굴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미묘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효과를 낳는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에 대한 로트만의 구분은 이 효과에 속한다. 그것은 기호와 기호-기능의 구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3. 텍스트와 텍스트-기능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표현성, 경계성, 구조성에 의해 규정된다(<예술텍스트의 구조> 참조). 여기서 표현성이란 공간적인 고정화를 말하고, 경계성이란 비텍스트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걸 말하며, 구조성이란 특수하게 조직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한다. 이걸 뭉뚱그려서 표현성이라고 한다면, 언어학적 텍스트는 이 표현성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그런데 이 언어학적 텍스트만이 텍스트의 전부가 아니다. 로트만은 거기에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개념을 도입한다.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진리성이라는 사회적/문화적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가치론적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체계 속에서 텍스트는 종적 분화를 일으킨다 어떤 기호나 텍스트가 그것 자체로 가치담지적이라고 보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입장과 로트만의 입장 사이의 차이가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이 로트만의 텍스트론의 바탕을 이루면서 문화텍스트에 대한 그의 기호학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든다(참고로,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2005)에는 로트만 기호학에 대한 해설과 함께 바흐친과의 흥미로운 비교가 제시돼 있다).  

 

텍스트 = 언어학적 텍스트(표현성) +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진리성) 

 

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를 로트만은 텍스트-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텍스트-기능이 문제되는 지점은 텍스트가 문화적 가치체계의 변동 속에 놓이면서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단일성이 의심받게 되는 지점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의 표현성이 더 이상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될 때, 텍스트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비텍스트 그룹의 숨은 주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텍스트를 사칭하는 일이 발생한다. 텍스트와 비텍스트 간의 동력학은 이런 과정을 문화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견인해낸다. 그리고 이 동력학에 의해 로트만의 형식주의는 특이한 활력을 획득한다. 텍스트적인 하위약호들의 조직화(표현성)를 전제로 한다면(로트만은 '텍스트와 기능'이란 논문에서 마이너스 표현성까지 고려하여 원래는 텍스트를 8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은 네 가지 범주의 텍스트 유형을 만들어낸다.

          

 

     텍스트

    텍스트-기능

   텍스트Ⅰ

        +

         +

   텍스트Ⅱ

        +

         -

   텍스트Ⅲ

        -

         +

   텍스트Ⅳ

        -

         -

 

먼저 텍스트Ⅰ은 텍스트의 언어학적인 의미론적 통사론적 구조와 메타언어학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텍스트Ⅳ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로서 비텍스트, 즉 텍스트의 예비주자이다. 텍스트Ⅱ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더 이상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로트만이 들고 있는 것은 1830년대 러시아 시문학이다.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던 이 시기에 시(=텍스트)는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장르로 인식되지 않았고 따라서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 시기의 산문은 텍스트Ⅲ에 속하게 되는데, 새로운 산문 장르가 가치담지적이라는 당대의 믿음 때문에 1830년대 산문문학은 텍스트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네 가지 텍스트 유형은 당연히 고정적이거나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언어학적 텍스트는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기능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자리바꿈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가치들이 양립하고 있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동일한 텍스트일지라도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이나 문화적 선입견에 따라 서로 다른 텍스트 유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4. 피에르 메나르의 경우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보르헤스 전집2: 픽션들>, 민음사, 1994, 67-89쪽)는 나보코프와 동갑내기로서 형이상학적 주제(혹은 문학이론)를 서사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주목받는 호르헤 보르헤스(1899-1986)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메나르(허구적 인물)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일부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베껴썼음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다시 쓰기, 베껴쓰기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많이 이해되는 이 단편을 로트만의 텍스트/ 텍스트-기능 범주를 이용하여 다시 읽게 되면, 이 작품이 문학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문제 또한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언아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주장하는 서술자는 이어서 직접 한 대목을 비교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돈키호테> 제Ⅰ부 9장)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생각은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현실의 원천으로 생각한다. 메나르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지막 문구는 뻔뻔스럽게도 실용주의적이다. (...) 또한 문체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아주 명명백백하다. 메나르의 고어체-무엇보다도 외국어 문체적인-는 작위적인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따.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선구자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 메나르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테크닉을 통해 그때까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시대 교란과, 잘못된 원저자 설정의 테크닉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메나르의 텍스트 간의 언어학적 텍스트, 즉 표현성은 동일하다. 하지만 메나르가 3세기 후에 다시 (베껴)쓴 텍스트는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 이것을 텍스트 개념만 가지고 이해하려 하면 패러독스에 부딪치게 된다. A=A이면서 A≠A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률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기능 개념을 도입하여 읽게 되면, 세르반테스의 텍스트가 평범한데 비해서 메나르의 것은 놀랍다는 서술자의 주장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두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가치체계의 차이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두 텍스트는 가치론적으로는 서로 다른 텍스트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사이의 불일치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베겨)쓰기’가 아니라 ‘읽기’이다. 이 읽기는 텍스트를 재현하는 모방론적 읽기가 아니라 텍스트를 생산하는 생성론적 읽기이다.(이런 관점에서 [메나르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서술자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없고 텍스트-읽기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로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텍스트-읽기[현상]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텍스트[물자체]를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의 칸트주의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기호이론 체계에서 객관적 실재에 대한 요구는 중심적인 것이다. 그가 텍스트-기계의 의미생산에 관심을 두면서도, 동시에 기호활동의 목적이 일정한 내용[전언]의 전달에 있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요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그의 이러한 입장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강조하는 R. 바르트 기호학의 쾌락주의와 의미전달(communication)을 강조하는 U. 에코 기호학의 실용주의의 중간쯤에 자리하는 것이다. 이걸 규범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이 점은 “(로트만의) 예술텍스트 분석이 결국 예술어를 비예술어로 번역함으로써 예술텍스트의 어떤 일정한 의미, 명백한 의미를 알아내고 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바흐친과 달리 예술텍스트 구조분석에 로트만이 전적으로 시텍스트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흐친 또한 산문텍스트만 연구대상으로 사용하면서 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과연 이 두 이론체계를 평가할 수 있는 공약적인 준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칸트철학과 헤겔철학이라는 두 비공약적 전통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친의 경우 (신)칸트주의 입장과 헤겔주의의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페터 지마의 <문예미학>, 을유문화사, 1993 참조). 어쨌거나 예술텍스트의 번역가능성은 로트만 기호학의 기본 전제이다.(아래 사진은 아내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민츠 여사와 함께 한 만년의 로트만.) 

5. 로트만-기계와 한국 현대시 

한 이론의 이론으로서의 생산성을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이론의 번역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로트만-기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이론이 한국 문학, 특히 한국 현대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의 시텍스트 분석 개념과 방법이 우리 나라에 일부 소개된 바 있지만(유재천, '로트만의 시의 기호학', <현대시사상>(1991년 여름호) 등), 아직 실제적인 분석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어(교착어)와 러시아어(굴절어) 사이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시 장르 자체가 언어 기호의 가능성(특히 기표적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한 언어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정초된 시이론이나 분석방법이 다른 언어에 그대로 적용될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트만의 텍스트/텍스트-기능 범주는 언어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메타언어학적 범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적용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한국 현대시, 1980년대와 90년대의 몇몇 시인의 경우를 가지고 로트만 텍스트론의 적용가능성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대 초반은 ‘시의 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시인들이 활동했고 다량의 시들이 생산됐던 시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의 시대’의 대표주자들이 자신의 시를 의식적으로 반시 혹은 비시로서 규정하고자 했던 점이다. 이것은 80년 광주 경험 이후, 모든 현실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확인하고자 했던 젊은 시인들의 정치적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과 어법을 파괴와 해체와 두드러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시의 텍스트성(표현성)이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이상, 오히려 반텍스트성, 즉 텍스트에 대한 파괴와 해체가 시의 시다움을 보장해주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①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壁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家族들이

   埋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②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지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③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①은 이성복의 '그해 가을'(부분), ②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전문), ③은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부분)이다(보다 더 형태파괴적인 시들이 있지만(특히 황지우의 경우), 인용의 번거로움 때문에 여기서는 ‘모범적인’ 시들을 골랐다. 참고로 이들의 데뷔시집은 이성복, <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이다).

 

이 시들에서 표출되고 있는 환멸, 증오, 풍자, 연민 등의 정서는 이전 세대의 시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서정시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것도 시인가?”라는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좋은 시는 정서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하지만 이런 공격성(=전투성)이야말로 이 시대 시의 징표였다.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시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우리는 텍스트-기능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바, 이들은 기성의 가치와 체제에의 저항이야말로 시의 존재의의이며 기능이라고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시대의 문화적 컨텍스트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보다는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 즉 텍스트-기능을 보다 더 많이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후반(그리고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몇몇 시인들의 시에도 시/비시[텍스트/비텍스트]의 문제틀은 텍스트-기능과 관련하여 적용될 수 있다. 장정일, 유하, 기형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④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작은술/ 후추가루 ¼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 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⑤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⑥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④는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부분), ⑤는 유하의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부분), ⑥은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전문)이다(참고로 이들의 데뷔작은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유하, <무림일기>(1989),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 유고시집)이다. <무림일기>의 이미지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대신 띄운다).

 

④, ⑤에서 특징적인 것은 규범문화 속에서 비텍스트에 속하는 요리책과 무협지의 언어들이 시어로 편입되면서 텍스트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화에는 사회적 인준의 절차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바, ④를 표제시로 한 시집이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⑤의 연작시 또한 정통 문학지의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텍스트-됨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비시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시적인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 것인데, 비텍스트의 마이너스적 가치가 오히려 플러스적인 가치로 전화된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⑥은 시의 내용에서 그런 마이너스적인 가치가 시적인 질감을 얻게 된 경우이다. 비교적 전형적인 시텍스트의 형식과 어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비관적인 음조의 자기통찰은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때문에 평자에 따라서는 “시가 아니다”고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의 새로운 구석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인의 경우 90년대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시인들의 작업 배경에 바야흐로 소비 사회의 도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오래 음미하면서 읽어내는 시가 아니라 한번 읽고 재미보는 시들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문학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앞에서 열거한 세 시인의 경우는 기존 문단의 순수시(이건 고정관념이지만)와 새로 등장한 소비성 시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다(특히 ④와 ⑥은 베스트셀러 시집이었다). 이 점은 8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지식인-시인, 투사-시인들과 비교될 만한 것이다. 이후 90년대 중․후반에도 여전히 많은 시들이 씌어지고는 있지만 앞에서 열거한 80년대 초반, 후반 시인들의 시적 인식틀과 문제틀을 넘어설 만한 새로운 시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물론 이러한 진단은 '과거'의 것이다. 2000년대 이후에 새로운 시인들이 많이 등장했으므로. 소위 '다른 서정'의 '미래파'들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텍스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컨텍스트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어떤 시가 새로울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텍스트-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로트만 텍스트론의 관점을 한국 현대시에 적용하여 본 바, 시에 대한 거시적인 준거점의 확보에 그의 이론이 잘 원용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보다 말끔하고 정치한 분석은 다른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6. 재약호화와 텍스트-기능


로트만의 기호이론은 약호화(coding)와 재약호화(recoding; transcoding)를 구분하는 바('재약호화'는 '코드변환'으로도 번역된다), 이 또한 그만의 특징이 된다. 약호화, 즉 일차적인 약호화는 기호의 기표 체계와 기의 체계 사이의 등가적인 관계 형성이다. 이것은 달리 기호화라 말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기호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는 이에 비해 광범위한 의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맺음이다. 이것은 약호화의 정태적인 이항 모델과대비되는 동태적인 컨텍스트 모델을 구축한다. 여기서 이항 모델이 안정된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된다면, 컨텍스트 모델은 다의미성의 모태가 된다.

 

이 컨텍스트 모델에서 기표(표현층위)와 기의(내용층위)는 교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묶음[다발]에서 만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 기표와 기의 주자들은 댄스장에서 만난다. 이들에겐 어떤 정해진 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댄스 레퍼토리에 맞는 짝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이 댄스 레퍼토리가 바로 다양한 의미 컨텍스트이고 문화적 컨텍스트이다. 따라서 이 레퍼토리에 대한 고려 없이는 기호의 의미생산 메카니즘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어째서 그런 짝이 맺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 즉 이차적인 약호화란 것은 텍스트 구조 속에서, 그리고 문화적 장 속에서, 마치 댄스 레퍼토리에 따라 새로운 짝들이 맺어지듯이, 구축되는 새로운 관계쌍을 말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예술텍스트가 정형화된 형식 속에서도 다른 텍스트들보다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보다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먼저 텍스트 내적으로는, 운율적 층위에서, 어휘적 층위에서, 그리고 통사적 층위에서 예술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의 다양성이 한정된 구성소를 가지고서도 다양한 의미조합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또 텍스트 외적으로는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 중에 개입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텍스트를 주무르게 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는 그 손때만큼이나 확장되게 된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예를 들어보자.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김상미의 '아줌마'(<시와 시학>(1997년 봄호), 55-56쪽)란 시의 1연이다. 이 시에서 ‘아줌마’란 단어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항렬의 여자”라거나 “동년배 혹은 젊은 남의 부인을 높여 정답게 부르는 말”로서의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인 뜻만 가지고 시텍스트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오지 않는다. 이 시텍스트 속에서의 ‘아줌마’는 그동안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가(그래서 아줌마들끼리는 “은어”로 소통한다) 비로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한 이 시대 한국 주부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에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아줌마이다(이 시는 한국시사에서 ‘아줌마’란 제목을 가진 최초의 시이다). 말 그대로 아줌마들의 손때가 묻은 ‘아줌마’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 ‘아줌마’ 대신에 ‘아저씨’나 ‘아가씨’란 단어를 대입시켜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아저씨/아가씨가 생각하는 것은 아저씨/아가씨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이 결코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 만큼의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아줌마’의 경우 컨텍스트적 모델로서 재약호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기호는 텍스트-기호가 된다.

 

기호는 의미작용 과정에서 텍스트가 되려는 성향을 갖는다. 예술텍스트에서의 기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기호는 회화적인 이미지, 어떤 공간적인 이미지가 그렇듯이 단의적인 의미에 저항한다. 그걸 로트만은 의미(론적) 면적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때의 면적이란 것은 여러 묶음 체계가 교차하는 공간이고, 다의적인 의미가 현실화되는 공간이다(라흐만에 의하면, 로트만의 '텍스트-기호'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대화성’이나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개념과 등가적이다). 

 

이 공간은 복수적 약호화에 의해 그 규모가 유지된다. 가령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라고 할 때, 13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13이란 숫자에 교차하고 있는 많은 문화텍스트적 의미가 다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 의미의 테두리만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그걸 언어로 테두리 지으려고 할 때와 비슷한 사정이다.

 

문제는 특히 예술텍스트의 경우, 텍스트-기호의 가능성을 모두 허용하면서도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텍스트-기호 이전 단계에 기호의 자리를 인정해야 하는 필요성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로트만 기호이론체계에서 모든 개념은 두 단계로 이분화된다(그의 견고한 이분법!). 이차모델화가 그렇고, 재약호화가 그렇고 텍스트-기능이 그렇고 텍스트-기호가 그렇다. 이러한 형식적 이분화가 로트만 기호학의 균형감각을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특이한 것이 이런 이분화가 동태적인 모델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그의 기호학은 이상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7. 이제 시작인 결말


앞에서 대략 로트만 기호학의 특징적인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오해)의 몇 단락을 늘어놓았다. 문학/문화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기호학은 이미 20세기 후반의 한 지배적인 학적 패러다임이 되었고, 톰슨(E. M. Thompson)의 지적대로, 자연과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정보이론)과 인문(과)학에서의 기호학(=구조주의)은 통합적인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양대 지적 조류이다. 이 두 조류가 유행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과학-정향성(그리고 새로운 과학/통합과학)에의 요구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정초된 섀넌(C. E. Shannon)과 위너(N. Wiener)의 커뮤니케이션/정보 이론과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학제적 모델이 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는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또한 이러한 방법론사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트만의 동료 퍄티고르스키는 1960년대를 회고하면서, 모스크바-타르투학파는 인문학에 ‘정밀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은 ‘현대적인 (과)학자’를 자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자신들의 학적 태도에 특히 20세기 중반 비엔나 학단의 (논리)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스크바-타르투학파가 ‘2차 모델화 체계’를 기호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과학의 언어를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카르납(R. Carnap)을 따른 것이다(이때 철학은 언어분석이 된다). 이러한 대상 규정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카르납이 하이데거(M. Heideggar)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리)실증주의를 나치즘과 파시즘, 즉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이념(=논리)으로서 제시한 사실은 이 시기의 과학-정향성, 즉 합리주의에 대한 요구가 방법론적인 요청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요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로티(R. Rorty)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시사적이다. “영어권 철학에서 1930년대 이전에는 과학철학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1945년경에는 그것이 철학의 중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하이데거와 카르납 간의 논쟁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르납은 반나치즘의 정치적 태도와 정치적 자유주의 등을 자연과학의 위상과 연합시켰으며 라이헨바흐, 헴펠, 파이글 등과 더불어 과학의 본질 이해는 곧 나치즘의 비합리성 이해에 중요하다는 레토릭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즉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곧 나치즘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고 간주되었고, 확증의 논리 등을 탐구하는 과학철학은 철학의 중심 영역이자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실용주의와 과학과 기술', <과학사상>(1997년 봄호), 190쪽)

 

로트만 기호학의 과학-정향성 속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로트만이 자신의 문화유형론 속에 20세기 러시아 문화유형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이너스 정치참여로 볼 수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중반 소비예트 권력에 의해 중단된 러시아 형식주의의 학문적 유산과 과학적 정신을 암묵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문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신)칸트주의(neo-Kantian Formalist position)와 헤겔주의(Hegelian Idealism) 사이의 갈등의 한 양태이다. 이러한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한다면, “과학=실증주의=합리주의=형식주의=형식논리=(진리 유보적) 칸트주의 대(對) 이데올로기=역사주의=비합리주의=내용주의(사회학주의)=변증법=(진리 담보적) 헤겔주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밑그림을 가지고 로트만 기호학의 개념체계에서 텍스트/텍스트-기능 개념을 자세하게 분석해보는 것이 이 글의 구상이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의 미비로 말미암아 문장 대신에 몇 개의 단어만 나열되어 있는 형국이 되었다. 그나마 이런 형국에도 몇 가지 오해가 개입되어 있을 테지만, 다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점들이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워밍업은 끝난 것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기호학을 공부해볼 만한 시간이다.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06. 01. 16.

 

 

P.S. 참고로, 왼쪽은 영어권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로트만 연구서인 앤드류스(E. Andrews)의 'Conversations with Lotman'(토론토대학 출판부, 2003)이며, 오른쪽은 로트만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영역선집 'Universe of the Mind'의 신간본(인디애나대학 출판부, 2000). 이 영역본의 서문을 움베르토 에코가 썼으며, 책은 국역본 <문화기호학>의 대본이기도 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nnetworking 2007-12-3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을 읽고 있는 중이어서 위의 글을 찾게 되어 잘 읽었습니다(다른 글들도 그렇구요.)

아, 그런데 "7. 이제 시작인 결말" 부분에 정보이론과 기호학을 통합적 방법론이라고 이른 "톰슨(E. M. Thompson)"에 대해 조금만 더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의 관심의 하나는 정보이론과 기호학이 커뮤니케이션을 이론화하는 차원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느냐인데,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이 바로 그렇게! 평가된다는 점도 흥미롭고, 말씀하신 예의 "방법론사의 맥락"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톰슨씨가 그런 얘기를 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꼭 톰슨이 아니어도 방법론사의 맥락에 참고할 것이 있을지요...)

감사합니다!

로쟈 2007-12-30 16:52   좋아요 0 | URL
기억엔 대학원시절에 쓴 발표문이고 '톰슨'은 그때 읽은 한 논문의 필자입니다. 출처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냥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에 관한 영어권 입문서/연구서를 한권 읽어보시고 참고문헌을 좀 훑어보시면 맥락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unnetworking 2007-12-3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도움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하는 저로서는) 계속 공부해볼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듯 합니다. 정보이론 등의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기호학 등의 인문과학을 충돌시켜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