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레비나스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로서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시간상/분량상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들'은 언급하지 못했다. 따로 기회가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올해는 지난 1995년 성탄절에 세상을 뜬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말에 출간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과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세계의 문학>(2006년 봄호) 등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생애를 살았던 이 ‘최고의 윤리학자’의 삶과 철학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코우노)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모국어는 러시아어였으며,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히브리어 성경이었다고 한다. 이 히브리어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푸슈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러시아문학이 그의 유년기를 채운 정신의 수프였다.


프랑스로 건너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을 경유하여 현상학에 몰입하게 되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있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리고 1930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후에 현상학을 소개하면서 독창적인 자기 철학, 즉 ‘제1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전개하게 된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히브리어와 러시아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철학자였으며, 때문에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오래전 그의 생전에 그의 철학을 소개하는 글들을 처음 접하면서 나는 매혹된바 있는데(‘타자=무한자로서의 신’을 핵심으로 한 그의 종교론은 내가 유일하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종교론이다. 그에게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이제 그를 기념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비록 ‘거창한’ 기획들에 동참할 만한 역량은 갖고 있지 않지만 그에게 진 빚은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이 자리에서 나대로의 ‘입막음 의식’을 갖는 이유이다. 그 의식은 레비나스라는 ‘타자’가 나에게 강요하는 명령이자 거기에 답하는 나의 응답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출석부를 부르는 윤리 선생님 레비나스 앞에서 “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래서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독촉을 사전에 입막음하는. 이 자리에서 그 입막음은 레비나스의 철학적 여정, 혹은 ‘사랑의 지혜’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나의 손가락으로 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지혜라고? 그렇다. 사랑,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이 있기 이전에 ‘사랑의 지혜’ 혹은 ‘사랑하라’는 무한자의 명령이 있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어쩌면 철학은 아테네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사랑의 지혜’를 그 가능조건으로서 미리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족을 나치의 수용소에서 잃은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는 ‘존재의 망각’에 대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염려 이전에 ‘사랑의 상실’에 대한 근심이 우선적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하는 그런 사랑으로 세상은 넘쳐나는 듯도 한데, 어찌하여 사랑이 부족하며 사랑이 상실되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사랑의 정념은 넘쳐나되 ‘사랑의 지혜’, ‘사랑이라는 지혜’는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탐욕과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군림하는 자기중심성과 무사무욕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사상”(핑켈크로트)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지혜’란 레비나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즐겨 인용하는바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는 지혜이다. 어쩌면 용기이기도 한.    

 

 

나는 이러한 지혜로 가는 길에 굳이 우회의 여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철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의 지혜”(la philosophie: sagesse de l'amour au service de l'amour)라고. 이걸로 충분하지만, 이에 대한 주해가 필요하다면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를 읽어보시길. 레비나스 관련서들 가운데 아마도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도 따라가며 읽을 수 있을 거의 유일한 책이며 레비나스의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수준 높은 개관이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러한 개관을 통해서 레비나스에 대한 영감을 좀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게 ‘뭐, 그런 정도군!’이 아니라 ‘영감의 폭탄’이어서 자신의 존재가 주체할 만한 수준을 좀 넘어서까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한다면 보다 본격적으로 레비나스를 입에 담고 중얼거려볼 수 있겠다. 레비나스의 육성을 그대로 따라서 말이다. 우리말로 녹음된 레비나스의 육성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현대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의 한 꼭지인 ‘무한성의 윤리’에서 레비나스는 대담자인 리처드 커니의 질문들에 답하여 자기 철학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해준다(한두 군데 흠잡힐 만한 번역이지만 레비나스 관련 번역으로는 가장 우수하다).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사랑은 신과 인간의 사회이다. 하지만 인간이 더 행복한데, 신은 인간을 동료로 갖고 있는 반면 인간은 신을 동료로 갖고 있다”(273쪽)는 대목에 이르러 왠지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못난 놈들끼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운 법이다!).   


그리고 ‘필’을 받은 김에 필립 네모와의 대담을 담은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까지 내처 읽어볼 수도 있겠다(우리말 번역은 ‘외재성’을 ‘외모’라고 옮기는 식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대략 레비나스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열 개의 대담 꼭지들은 한 철학자의 철학적 생애를, 혹은 지혜의 생애를 자세히 되짚어준다. 그 끄트머리에서 레비나스가 던지는 말(혹은 벼락):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철학전통에서 자신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있음이 곧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158쪽) 즉,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쯤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것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 essendi)', 즉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기보존욕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타자의 현현으로서의 타인의 얼굴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한책임을 떠맡기면서, 우리로 하여금 ’대속적 주체‘로 다시 깨어나도록 발목을 잡는 그 얼굴은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의 얼굴이다. 아, 젠장, 나는 나대로 좀 살고 싶은데, 어쩌자고 내 앞에 있는 당신은 헐벗은 이방인이고 젊은 과부이며 배고픈 고아인가? 그런 물음을 무겁게 등에 짊어질 때 우리는 ’사랑의 지혜‘로 가는 도상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선적인 여정에 자신을 내맡기기엔 머리나 엉덩이가 너무 무거운 이들도 없지 않겠다. 이 분들을 위해서는 보다 우회적인, 현학적인 여정이 필요할 듯한데, 그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학자’ 레비나스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 또 다른 방향의 여정은 아직 다 개발되지 않은 코스의 여정이어서 언제 ‘사랑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저에 해당하는 <전체성과 무한>(1961)과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사건 저편에>(1974)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의 초기 철학을 입에 물게 해주는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와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인데, 1947년에 발표된 이 두 작품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레비나스 자신의 윤리학으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저작들을 읽어나가는 데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이 앞서 언급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과 함께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이다. 거기에 국내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김연숙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인간사랑, 2001)도 레비나스 해설서로 참고할 만하다.  

물론 이 책들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한 해설뿐만 아니라 레비나스의 철학 전반과 주저들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데이비스의 책은 개인적으로 경탄할 만큼, 분량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고 정교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다(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곳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한편으로 강영안 교수와 함께 국내에서 레비나스 철학에 가장 정통한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와 <일상의 모험>(민음사, 2005)에는 레비나스를 직접 다루거나 레비나스적 영감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으므로 읽어봄 직하다.

 


 

 

 

 

 

 

 

 

시야를 좀 넓히면, 레비나스와 영감을 주고받은 가장 중요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최초의 본격적인 레비나스론이기도 하다) ‘폭력과 형이상학’(1964)을 그의 <글쓰기와 차이>(동문선,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는 데리다의 비판을 고려하여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이 글 또한 레비나스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막바로 읽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우리에게 레비나스는 여전히 풍문이다). 해서,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성과 무한> 등의 주저들이 번역돼 나오는 것이겠다. 우리의 무거운 엉덩이만 믿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닐까?


자, 여기까지가 나의 응답이고 책임이다. 레비나스라는 타자에 대한 이 책임은 무한책임이기에 이건 고작 ‘입막음’에 불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언제나 중과부적이어서 겨우 틀어막은 틈새로 새어나오는 준엄한 무한자의 목소리를 나는 어찌할 수 없다. “너 어디에 있느냐?” 오, 신이시여, 제발!..

 

06. 03. 03 - 04.

 

P.S. 내가 보기에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은 주로 '타자'의 일상성에 걸려 있다(바디우와 지젝, 고진 등의 비판). 레비나스식의 '타인의 얼굴'에 대한 이들의 카운터 펀치는 (지젝이 언급한 것이지만) 영화 <페이스 오프>(1997)이다. 이에 대한 숙고는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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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PS에서 언급하신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할 만한 책좀 소개해 주세요..

로쟈 2006-03-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언젠가 읽은 지젝의 언급은 출처를 못 찾아서(!) 적어놓지 못했습니다. 고진의 언급은 <트랜스크리틱>에 있고(다른 데도 있을 듯하지만), 바디우의 비판은 <윤리학>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비판이고, <존재와 다르게> 정도로 가면 데리다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카바가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twoshot 2006-03-0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드립니다.
 

 

 

 

 

 

 

 

 

 

내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을 읽은 건 개역본이 나오기 80년대 후반이거나 90년대 초반이었던 듯한데, 그때 읽은 건 '호르헤' 수도사가 아직 '요르게' 수도사로 활약하던, 그러니까 개역본이 나오기 전 초판 번역이었다. 이후에 개역본도 무슨 사은품으로 받아서 갖게는 됐지만 아직 들춰보지는 못했다. 대신에 2001년 봄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를 읽었고, 작년 봄인가 언젠가는 (<장미의 이름> 개역본에 지대한 기여를 한)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를 대충 읽었다(책은 <장미의 이름>과 같이 읽어나가야 효과가 있다). 물론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 <장미의 이름>(1986)도 보았으니까 할 만큼은 한 셈.

 

 

거기에 내가 더 갖고 있는 것은 러시아어본 <장미의 이름>이다(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영화의 러시아판 포스터. 러시아어본으로는 두툼한 <푸코의 진자> 주석/해설서도 나와 있었으나 구입하지는 않았다). 중세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장미의 이름>을 보다 정밀하게 다시 읽어보았을 테지만, 내 관심과 여력은 현재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를 읽으면서 옮겨적은 대목들이 있기에 일단은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분류상 '밑줄긋기'에 들어가는 게 알맞지만, 이미지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그냥 '페이퍼'에 쓰기로 한다). 박식한 학자이면서 동시에 재주꾼 소설가인 에코의 '창작론' 강의 정도이겠다(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p.20) 작가는 해석자가 아니다. 그러나 해석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왜 썼고 어떻게 썼는가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다.(*이것이 '작가' 에코가 '창작노트'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는 근거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즉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 온다>인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시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시의 경우는 <언어를 붙잡으라, 그러면 주제가 뒤따라 온다>이다.(p.43).

 

-세계 창조의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약 조건을 만들어 심어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주변 세계가 제한 조건이 되어 준다. 이것은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따라서 전혀 비현실적인 세계, 가령 나귀가 하늘을 날고, 죽었다가도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나는 왕자가 나올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가능한 세계, 비현실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소설로 존재하려면 처음에 정의된 구조에 따라야 한다(우리는 먼저, 그 세계가 공주가 왕자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아니면 마녀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공주의 키스가 개구리, 혹은 아르마딜로 왕자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세계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적의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pp.44-45)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 인물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자율적인 생명을 지니는 것이고,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종의 망아(忘我) 상태에서 그 등장 인물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작중 인물은 자신의 현실인 소설 세계의 법률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화자는 자기가 내세운 갖가지 전제 조건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47)(*그러니까 작가는 그 '소설 세계의 법률', 혹은 '소설 세계의 법칙'에 대한 입법자로서의 권능을 갖는다. 그리고 작중 인물은 (입법자로서의 소설가가 아니라) 이 법률/법칙의 구속을 받는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소설이 아마추어 소설이다.)  

 

-소설의 경우 작품이 완성되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대화의 채널이 이루어진다. 집필 단계에는 두 가지의 대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와 이미 쓰여진 다른 텍스트와의 대화, 또 하나는 저자와 그 모범 독자와의 대화이다.(pp.71-72)

 

- 추리의 추상적인 모델은 바로 미궁이다. 미궁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이 '미궁'의 다른 말이, 플롯(plot), 곧 '음모'이겠다.) 

 

 

(1)하나는 그리스적 미궁, 즉 테세우스의 미궁이다. 이런 미궁에서는 들어간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미궁에 들어가면 중심에 이르게 되어 있고, 바로 이 중심에서 바로 출구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 중심에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궁이 나오는 소설에서는 독자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이때 공포는, 우리가 미궁에서 어디에 이를지 모른다는 점, 미노타우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고전적인 미궁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는, 미궁이라고 하는 데는 한 실타래,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미궁은,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는 미궁이다.

 

(2)그런가 하면 매너리스틱한 미궁도 있다. 이것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들은 자기 손 안에 일종의 나무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출구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필요하다. 이런 미궁은 시행 착오 과정의 모델 노릇을 한다.

 

 

(3)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물, 혹은 델레우제와 구아타리가 <리조메>(뿌리)라고 부른 것도 있다(*'리좀'이라고 더 잘 알려진 것). 리조메는 구조상, 한 줄기는 어떻게든 다른 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고, 출구도 없다. 이것은 잠재적 영속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추리의 공간의 리조메의 공간이다. 내 소설에 나오는 미궁은 일종의 매너리스틱한 미궁이다. 그러나 윌리엄이 경험하게 되는 미궁은 리조메의 구조를 지닌 미궁이다. 말하자면 구축될 수 있는 미궁이기는 하나 완벽하게 구축된 미궁은 아닌 것이다.(pp.80-83)

 

06.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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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또다른 꼭지이다(본론의 마지막 꼭지쯤 된다). 앙드레 지드와 윤동주에 관한 것인데, 나중에 지드론이나 윤동주론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언제?

우리에게 아직 남은 다른 얘기는 고리키의 문우였던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1869-1951)의 얘기이다. 그가 30세에 발표한 <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899)가 우리가 다루게 될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이다(작품은 <앙드레 지드 전집>(전5권, 미문출판사, 1969)에 수록돼 있다). 제목에서부터 프로메테우스를 명시하고 있으니까, 고리키의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관점에서 볼 때 방계-이야기였다면, 지드의 그것은 직계-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아니라 우화적 소설인 이 작품은 1890년대 파리의 한 다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우스(=죄스)는 부유한 은행가(!)로 등장하고, 프로메테우스(=프로메떼)는 무면허 성냥 제조 혐의로 구속된다. 이야기의 발단은 대부호인 제우스가 아무런 이유없이 한 사람(꼬클레스)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다모클레스)에게는 500프랑의 돈을 익명으로 부친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무상의 행위, 즉 아무런 동기나 이유를 갖지 않는 행위는 지드 문학의 중요한 테마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행위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것이라 말해진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신과 인간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기준이다. 백만장자인 제우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즉 무한한 재산을 갖고 있는 자만이 절대로 이해관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오. 인간은 할 수 없어요. 거기에서부터 나의 장난에 대한 사랑이 생겨났오.”(109쪽) 그의 바로 그러한 장난에 꼬클레스와 다모클레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연관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독수리(=수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 독수리는 그의 양심의 상징이다. 감옥에서 밤낮으로 뜯기면서 독수리는 살찌는 대신에 그는 점점 말라간다. 이윽고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대하여’란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게 되고, 저마다 자신의 독수리를 가져야 하며 독수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독수리(=양심)에 관한 강의를 들은 다모클레스는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500프랑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병이 들고 결국엔 죽고 만다. 다모클레스의 장례식에 뚱뚱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난 프로메테우스가 다모클레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독수리를 죽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독수리 요리를 맛있게 먹는 걸로 이야기는 마감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징벌/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지드판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양심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독수리이다. 지드에 의하면, 우리가 받는 양심의 고통은 신들의 장난(무상적 행위)에 기인한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러한 양심을 살찌우는 것은 자학적인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양심인 독수리를 죽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는 진정으로 해방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로메테우스는 애초부터 사슬에 결박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제우스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그저 양심의 가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란 것은 혹 그런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드에게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더 이상 영웅신화가 아니며 개벽신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mal) 신화이며, 우리가 유쾌한 기분으로 먹어치워야 할 신화이다. 프로메테우스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둡시다.”(116쪽) 자신을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로 자처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자들을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라면 조용히 입다물고 우리와 함께 맛있는 독수리 요리나 먹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래 사진은 독역본.

그런 의미에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해방, 즉 소멸을 예비하고 있다. 그는 영웅신화나 개벽신화로서의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해악을 19세기의 끄트머리에서 이미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20세기의 독일과 러시아의 프로메테우스들은 자신들이 결국엔 에피메테우스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는 삶은 프로메테우스 없는 삶, 즉 역설적으로 아무런 가르침이 없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영웅적인 행위에 대한 강박관념과 양심의 가책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된 삶이다.

이걸 무신론적 프로메테우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고리키의 사회주의적 프로메테우스와 대비하여 무정부(주의)적 프로메테우스라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둘 다 동시대의 인류에게 자유와 진실을 전해주고자 한 것이지만, 서로의 방식은 너무나도 대비된다. 우리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어디쯤에서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차면 넘친다는 지혜를 한 사람은 잠시 잊고 있는 듯하다(러시아는 프랑스에 비해 아직 젊은 나라였다!).

 

 

 


한편 이 무신론적 프로메테우스가 기독교 신학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우리는 한 젊은 시인의 ‘고백’과 만날 필요가 있다. 반갑게도 이 젊은 시인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는 바로 윤동주(1917-45)이다. 한국문학의 경우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직계-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매우 드문데, 그의 시 <간(肝)>(1941)은 예외적이면서도 아주 순도 높은 경우이다. 먼저 잘 알려진 시이지만, 시의 전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1.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2.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3.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4.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5.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6.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7. 너는 살찌고
8.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9. 거북이야!
10.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11.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12.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13.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먼저 이 시의 창작배경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윤동주는 자선시집에 실릴 19편 가운데 맨마지막인 <별 헤는 밤>을 1941년 11월 5일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에 썼다. 원래 그의 시집은 ‘병원’이란 제목이 붙여질 예정이었으나 <서시>를 쓴 이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뀐다. 그러나 그의 시고(詩稿)를 받아본 이양하 선생은 몇 편의 시가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더러 신변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충고하여 윤동주는 시집출판을 단념한다. 11월 29일자로 씌어진 그의 시 <간>은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빼앗긴 지성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1942년 1월 24일 <참회록>을 쓴다(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후인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윤동주의 시 가운데 “보기 드물게 대륙적인 기풍을 가지고 있[는]”(김흥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시는 전래의 토끼설화(귀토설화)와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접합한 것으로서 이 두 의미체계가 ‘간’을 접점으로 하여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이에 대한 몇몇 연구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A) 비록 궁지에 몰린 약자지만 슬기롭게 자기(肝)를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되어 묵묵히 인고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성은 바로 윤동주의 그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다 적극적/투쟁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인 저항방식에서 유발되는 자책감과 울분을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처럼 속죄양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윤동주의 내면의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토끼”와 “프로메테우스”는 윤동주의 저항 의식의 특징이 잘 반영된 자기-동일시의 표상인 것으로 해석된다.(김재홍)

(B) 화자(토끼로 형상화된 자신)는 “독수리”를 길렀으며, 자기 간을 뜯어먹도록 요구한다. 이때 “독수리”는 화자의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생명(간)을 쪼아내며 스스로에게 아픔을 주는 자아의 예리한 의식이다. 자신의 삶을 쪼아내는 자아의 의식활동이 치열한 아픔을 주지만, 그는 안식이 아니라 고통을 선택한다. 오히려 고통을 주는 반성적 의식이 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토끼설화의 맥락이 의미 깊게 되살아난다. 그는 어떤 초월적 희망도 인간을 구제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지금-여기(갈등의 현실세계)’에서의 고통스런 자기응시와 긴장을 선택한다. 이러한 의지는 고유한 의미에서 비극적인 인간상이며,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하게 된다.(김흥규)

(C) 그러면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윤동주 자신이다. 윤동주는 자기 동일성으로 이 프로메테우스를 택했다. 자기 희생적 인간,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에 대항하는 저항적 인간, 그는 이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 시에서) ‘간’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간을 말리고 그 간을 지켜 지배층 세계와 대응의 자세를 취하려는 토끼의 저항정신의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고통을 당하며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정신의 측면이다. 윤동주는 <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란 두 고전을 차용하여 저항과 희생이란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무리없이 해냈다.(박호영)

조금 무리해서 말하자면, (A)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죄양 의식을, (B)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스런 자기응시를, (C)는 저항과 희생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각각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연구들에서는 이 시 <간>의 3-4연(“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에서 제시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이 그리스 신화 속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형상이라는 것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도 셸리의 프로메테우스도 아니며,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바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이다.

단, 지드의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양심의 투사(投射)였던 독수리를 죽임으로써 일종의 카니발적 결말을 유도하는 것과는 달리, 프로메테우스-윤동주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예리한’ 자아의식과의 긴장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내면으로의 “끝없는 침잠”을 감내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윤동주다운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 <간>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한다.

먼저 이 시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2-4연)를 감싸고 있는 1연과 4연은 토끼설화의 결말부분이다. 이 설화에서의 간은 생명을 뜻한다. 그것은 용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토끼의 간이 요구된 것에서 바로 알 수 있다. ‘용궁’이나 ‘용왕’이라는 것은 우리 전래의 상상력 속에서 어떤 이상적 공간이다. 즉 지상의 현실과 대비되는 꿈의 공간이다. ‘거북이’(혹은 자라)의 유혹에 이끌려 그만 죽을 뻔했다가 겨우 자신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토끼는 이제 그러한 꿈의 허실을 깨닫게 된 토끼이다. 그것이 5연의 내용이다: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이러한 토끼의 결의는 당차 보이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씁쓸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고통스럽더라도 오직 지상의 삶만이 유일한 현실로서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그것은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의, 결국엔 그 고통을 길들인 프로메테우스의 현실이다. 자신의 유일한 삶, 유일한 생명(=간)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서는 우리가 타협하거나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가령, 윤동주의 경우에 시집출간이 좌절된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양심, 즉 예민한 자기의식을 가진 시인에게서 그러한 타협/희생은 자신의 간을 쪼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이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도 괴로워하지 않았던가!그런 시인의 의식을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프로메테우스가 지드의 프로메테우스를 따르고 있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럽다.

2연의 3행은 1연의 토끼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접합되는 지점이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은 본래 “코카서스 산정(山頂)에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처럼” 정도의 뜻이 토끼설화로 변형된 형태이다. 이 변형을 통해 ‘코카서스=용궁’, ‘프로메테우스=토끼’라는 두 가지 동일화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바톤은 이제 토끼에서 프로메테우스에게로 넘겨진다. 그리고 이 프로메테우스-시인은 4연에서, 자신이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에게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분명 저항적이면서 체념적/희생적이다. 가장 ‘남성적인 톤’의 시에서조차 “지극히 서정적[인] 인간”(이건청)으로서의 여린 모습을 다 가리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8행) 하여간에 시인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결코 도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도 “아픔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해내고 있는 이 시는 양심의 수난자로서의 윤동주의 정신의 궤적을 보여준다.”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의 주제에 또 다른 차원을 부여해주고 있는 마지막 6연이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여기서 “목에 맷돌을 달고”라는 표현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태복음, 18:6) 마광수는 이러한 표현을 예수의 이 산상설교 부분과 관련지어 해석하는데, 순진한 어린아이를 꾀어 죄에 빠뜨리는 자는 아예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게 낫다”는 설교의 내용과 비교하여 보면, 불을 모르던 인류는 ‘어린이’처럼 순진했으며 그 어린이에게 불을 가르쳐 준 자가 프로메테우스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으로부터의 이러한 인용(인유)을 통해 윤동주는 “불[을] 도적한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목에 맷돌을 달고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라는 다소 부정적인 기독교 신학의 이미지로 대치-변형함으로써 셸리의 경우에서처럼 ‘프로메테우스=사탄’이라는 형상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 가치전도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가 사탄(-)과 결합되면서 (-)적인 방향으로 점차 기울어간데 반해서, 즉 ‘프로메테우스-사탄’(-)적인 형상인데 반해서(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그런 관점에서 읽었다),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을 자기쪽으로 끌어옴으로써 ‘프로메테우스-사탄’(+)적인 형상을 새롭게 조형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그리스도는 부활과 권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대속자로서의 그리스도, 고난과 희생의 그리스도이다. 이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는 셸리의 프로메테우스-사탄이 가졌던 어떠한 반항적/능동적 영웅주의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더 많이 비극적이다.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도 상승/침잠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보여준다. 이것을 그림으로 비교해본다.

                          셸리적 프로메테우스-사탄     윤동주적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
가치의 전도                 + → -                                          - → +
운동의 방향                        ↑                                                  ↓
정념의 태도               능동적 영웅주의                        수동적 비관주의

프로메테우스는 일반적으로 ‘승화’를 뜻하는 문학적 상징이지만, 윤동주의 <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전락’이다. 그리고 고통의 승화가 아니라 고통의 연속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우리가 본 카니발적 결말과는 또 다른 결말이다.

지드가 독수리를 죽이는 행위를 통해 무신론적(무양심적)인 프로메테우스의 가능성,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해소/해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면, 윤동주는 이 한 편의 서정시 속에 다시금 기독교 신학을 끌어와서 프로메테우스의 반항정신을 최소화하고 희생정신(=양심)을 극대화함으로써 비영웅적인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를 창조하고 있다. 아니 프로메테우스의 소멸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침전하는 까닭에 그가 구원해야 할 인간들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그를 구원해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앙드레 지드와 윤동주, 모두에게서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프로메테우스를 찾을 수 없다. 하나는 먹어 치워서 없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침전하는 까닭에 다시 건져올릴 수가 없다. 남아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프로메떼’(지드)의 뼈다귀와 ‘푸로메디어쓰’(윤동주)의 발바닥뿐이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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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작년말에 나온 책 중에 정인돈의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동인, 2005)가 눈에 띄었다. 이때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1797-1851)가 아니라 저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그녀의 남편 P. B.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이다. 메리 셸리가 평생 천재시인이었던 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야했던 걸 생각해보면, '셸리'의 유명세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렇듯 역전돼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이 셸리의 서사시 중에 'Prometheus unbound'(1820)가 있는데, 오래전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은 과목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주제로 한 비교문학 강의이었고 그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의당 기말 페이퍼에서도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었고. 생각이 난 김에 그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란 글에서 한 대목 가져와 약간의 첨삭을 거쳐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뒷부분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대한 언급도 있다(각주는 모두 생략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는 아직 실물도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구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할 작정이다. 아쉬운 것은 셸리의 이 작품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혹 연구서에 '부록'으로라도 실려 있을까?). '밑 빠진 연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모양은 좀 덜 난다. 그럼 점에서, 얼마전 최부의 <표해록> 연구서와 역주서를 함께 낸 박원호 교수의 작업이 더 빛이 나며 의미가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신화소는 물론 ‘프로메테우스’라는 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의 반항적/박애적 행위(=불을 훔침)와 그에 따른 징벌/고통(=간을 쪼임)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이 신화의 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그는 불을 훔친 죄로 제우스의 벌을 발아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결박되어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이 가계의 이야기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은 ‘직계-이야기’로, 그밖에 몇몇 신화소나 모티브에 의해 ‘프로메테우스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은 ‘방계-이야기’로 우리는 부를 것이다. 생긴 구석들이 제각각인 이 방계-이야기들을 그래도 묶어주는 것은 일종의 가족유사성일 테다.

하여간에 발가락이라도 닮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들을 모두 긁어 모으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얼굴이라도 제법 닮은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만을 우리는 쫒아가게 될 것인데(*이 '이야기들'이 글의 다른 꼭지들이지만 여기서는 셸리 이야기만을 옮겨놓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건너뛰어서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혹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만나보기로 한다. 예의상 먼저 잠시 괴테를 접견한 이후에 말이다.

 

 

 

 

괴테(1749-1832)의 <프로메테우스>(1774)는 그가 25세 때 쓴 시로서 찬가(Hymnen)로 분류된다(내가 참조한 건 조창섭 편역, <시인의 노래: 독일 고전주의 문호들의 시와 삶>(서울대출판부, 1994)이다). 물론 제우스에 대한 찬가는 아니고 당연히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찬가이다. 이것은 본래 드라마로 창작하려던 것이었으나 드라마로는 단편에 머물렀고 시로서는 완성을 본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제우스에 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제우스신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감사할 만한 어떤 은혜도 신으로부터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댈 숭배하라고? 뭣 때문에?/ 그대 언젠가 무거운 짐진 자의/ 고통을 덜어준 일이 있었던가?/ 그대 언젠가 불안에 떨고 있는 자의/ 눈물을 훔쳐준 일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그는 ‘가련한 자’로 신들을 몰아치면서 도전적으로 말한다(<시와 진실>에서 괴테는 이 시는 ‘폭발의 도화약’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신의 땅과 오두막과 부뚜막(화덕)을 건드리지 말라고(“부뚜막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그대는 그리워하겠지.”).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과 도전의 정신으로 충만한 이 시는 그리하여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나와 꼭 같은 종족을/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되/ 나처럼/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리라!”

괴테의 이 시 또한 신화 일반의 전용이 그러하듯이 일단 당대성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그는 여기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가지고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질서와 몰락해 가는 기존 사회질서와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에게서 프로메테우스는 18세기의 시민적인 자의식의 상징이자 그때까지 종교적으로만 이해되어 온 창조의 개념을 세속화시키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들을 쓰러뜨려 버리는 프로메테우스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압제 정치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는 자의식으로 무장된 천재, 즉 자조자(Selbsthelfer)가 되는 것이다.”

질풍노도기에 통용된 자조자의 개념은 기존의 상황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사회변혁을 실현할 수단이나 자신이 감행하는 투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항자를 뜻했다고 하는데, 괴테는 거기에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적 형상을 ‘자조자’에 투사함으로써이다. 이 시에서의 ‘오두막’은 시민(과 민중)의 삶의 터전이며 독립과 자립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를 통해 “괴테는 왕권과 교권이 봉건 체제를 유지하는 보완적 관계에 있는 권력임을 폭로하고 낡은 상황을 변화시켜 새로운 질서를 관철시키는 것이 인간의 소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괴테의 프로메테우스 이해와 전용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이 가졌던 세계관의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프랑스 혁명(1789년)을 통해 곧 극적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바야흐로 장기 19세기 ‘부르주아의 시대’(홉스봄의 규정)가 열리게 되는 것이고,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현실에서의 그러한 급격한 사회변동과 가치의 전도를 정당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예언(fore-thought)의 목소리로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P. B.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1818-19) 또한 그러한 맥락의 연속선상에서 조명될 수 있다. 셸리의 이 극은 아이스킬로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가 악과 완고의 상징인 주피터(=제우스)에 의해 신에 대항한 죄로 바위에 묶이게 된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인 대지의 지지와 자연의 정령인 그의 애인 아시아의 사랑에 의해 버티고 있다. 주피터는 원초적인 힘인 데모고르곤(=운명,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전복되고, 프로메테우스는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어서 사랑의 주제가 뒤따른다. 왕좌, 제단, 감옥, 재판관석은 지나간 유물이 되고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해방’이다. 즉 셸리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그리고 해방, 그리고 새로운 인간/세계 창조의 비전이다. 당대의 현실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4막으로 된 이 서정 시극은 이 시의 서론에서 논의된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시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사회 개혁자로서의 시인 셸리의 열망과 모순들이 모두 나타난 신화극이며 정치 우화이다.”(정정호)

 

 


 

우리가 보기에, 이 셸리의 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제우스/프로메테우스 간의 가치전도를 또 다르게 변형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존 밀턴(1608-74)이 <실락원>(1667)에서 하나님을 압제자로 보고 사탄을 그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본 견해를 접목시킨다. 이럴 경우, 그리스의 신화(mythology)와 기독교의 신학(theology)이 접합되면서 보다 복잡하면서도 이중적인 성격의 프로메테우스 상이 조형된다. 아래의 표를 보라.


             그리스신화(헬레니즘)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
최고신    제우스/주피터                 하나님/그리스도
반항자    프로메테우스                  사탄/악마

그리스 신화(헬레니즘)의 제우스/주피터는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에서 하나님/그리스도에 대응하고7)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에 대응하지만 가치론적 위계에 있어서 이들은 결코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비록 <실락원>과 같은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가치전도가 있기는 하지만, 헤브라이즘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가치론적 위계는 헬레니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너무도 확고하며 견고한 것이다. 즉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 이행한 헬레니즘에서의 가치전도가 헤브라이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상반된 가치론적 형상을 가진 두 존재를 반항자라는 성격에만 초점을 맞추어 동일시하게 되면[프로메테우스(+)=사탄(-)], 거기에 긴장과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헬레니즘에서는 반신(半神)적 존재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했지만(제우스신은 여자인 판도라를 창조), 헤브라이즘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이때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동일시하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창조한 것이 되며, 이것은 헤브라이즘에서 중대한 신성모독이 된다.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셸리의 경우는 자신을 시(=상상력)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창조자로 자임하였을 수 있다. 4막에서 정령들이 이렇게 합창하는 대목처럼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인간세상에서/ 우리의 계획을 실현시킬 거야./ 그리고 우리의 작품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라 불릴 거야.”("We will take our plan/ From the new world of man/ And our work shall be called the Promethean."; 156-8행) 여기서 의미 깊은 것은 셸리를 비롯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새로운 인간’(혹은 ‘새로운 삶’)에의 비전이다. 이것이 ‘과도함’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시인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사회정치적 현실이라는 권력투쟁의 장으로부터 한 개인의 내면이라는 축소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이제 한 개인의 내면의 드라마가 된 것이다.

물론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부터도 이런 내면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에 인간이 갖는 동물성과 영혼의 갈등, 폭력과 설득력의 갈등, 그리고 힘과 지성의 대립 등이 내포되어 있는 걸로 보면서,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정반대되는 양면,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정신의 세계와 야수적 힘의 세계를 그린 상징극으로 그의 비극을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아주 많이 ‘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 카뮈는 희랍인들이 아무것도 극단화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반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희랍인들은 확실히, 과도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과도함을 묘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제자리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에 하나의 한계를 부여한다.” 이때 ‘과도함’이란 것은 내면의 드라마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면, 그 조건은 18세기 후반 이후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제값의 규모를 가지게 된다고 우리는 본다.

요컨대,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문제되는 것은 첫째, 그가 프로메테우스를 사탄과 동일시함으로써 또 한번의 가치전도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가져왔다는 것이고, 둘째,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을 한 개인(=시인)의 내적 드라마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적 드라마는 ‘정치 우화’적 성격을 겸하고 있다. 즉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정치적 희원이 적극적으로 시화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주피터를 전복시킨 데모고르곤이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칙, 제시하는 “부드러움, 미덕, 지혜와 인내”(4막 562행)는 ‘힘’과 ‘폭력’에 기반한 제우스의 구시대적 지배원칙과 대비되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인간에의 희원과 맞물린다.


 

 

 

 

거듭 말하자면, 시인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빚어내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셸리의 창조자로서의 시인의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결합한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문득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는가?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프로메테우적 인간(=시인)의 창조라는 것은 분명 헤브라이즘적 전통에서 보자면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고, 요망하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불길한 예감을 셸리와 같은 방을 썼던 그의 두 번째 아내 M. 셸리(1797-1851)는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프랑켄슈타인>(1818) 속에서 그려보이고 있다(이 책의 초판 서문은 남편 셸리가 썼다).



‘현대판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최초의 과학소설’의 주된 테마는 한 과학자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생명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자기 자신이 파멸당한다는 것이다. 젊고 야심 많은 과학자인 프랑켄슈타인은 인류에게 숭앙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집착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여 결국에는 조각난 신체부분들에 전기불꽃을 주입하여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아내마저 희생되고야 만다.

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끌어오고 있는 것은 한 영웅의 인간 창조와 그로 인한 주변의 평범한 인간들의 피해라는 신화소이다. 어쩌면 작가인 메리 셸리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아버지 고드윈이나 남편 셸리가 추구했던 당시의 급진적 이상주의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흔히 상상을 통한 인간정신의 고양이라든가, 상상을 통하여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소위 낭만주의 신화의 허구성을 그녀는 과감히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고드윈이나 셸리와의 가족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경험했던 여성의 관점으로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10대에 유부남 젊은 시인을 따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며,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를 두고 그 중 셋을 잃었던 메리 셸리는 천재 시인이었지만 오만한 남편에게서 지식인의 이면을 목격하고 이념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직접 체험했다. 그런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라는 헬레니즘 ‘영웅신화’의 이면을 밝혀내면서(프로메테우스=사탄), 그것의 폐해를 헤브라이즘적인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인간을 창조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생명의 불이 아니라 재앙의 불이 된다.

 

 

 

 

그리고 이 재앙의 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진짜 현대의 ‘프랑켄슈타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프로메테우스주의, 즉 그의 나치즘이고 그의 아리안주의이다. 그는 <나의 투쟁>(1925-27)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화, 즉 예술과 과학과 기술의 성과는 거의 예외없이 아리안족의 창조적 산물이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아리안족이야말로 고등 인류의 창시자이며,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원형이라는 추론은 지극히 정당하다. 아리안족은 인류의 프로메테우스이다. 그의 빛나는 이마에서 신성한 불꽃이 튀어 온 시대로 두루 퍼져 나갔으며, 침묵하는 비밀로 가득한 밤을 인식으로 환하게 밝히고, 그리하여 인간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하는 불을 거듭 새롭게 점화시켰다. 따라서 아리안족이 사라지게 된다면, 불과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칠흑 같은 어둠이 지상을 뒤덮을 것이며, 인간의 문명은 소실되고 세계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아리안족은 “빛을 가져오는 자”이며 그밖의 무의미한 종족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마니교와 그노시스파의 우주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싸움에서 밝음과 어둠의 이분법을 빌려와, 아리안족이라는 빛의 형상과 루시퍼라는 어둠의 형상을 대립시킨다. 히틀러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한 영웅(=아리안족)의 인간 창조라는 신화소를 가져오지만, 그러한 행위가 치러야 하는 고통스런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신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한 박테리아”(=유태인)들과 대적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인간 창조에 있다: “국가 사회주의를 단지 정치적 운동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의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이다.”



“순수한 양심”과 “보다 높은 명령”(한나 아렌트)에 따라 인종 청소와 살육을 주저없이 감행한 히틀러와 그의 나치즘(국가 사회주의)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런 식으로 악의 형이상학으로 전용/남용되며, ‘프로메테우스=사탄’적 형상의 극한을 보여주게 된다. 프로메테우스 시인 셸리가 자신의 가족과 주변 몇 사람을 고생시킨 데 반해, 프로메테우스 정치가 히틀러는 수백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프로메테우스는 반(反)영웅, 반(反)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종결되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 인류의 이익을 표면에 내세울 때, 우리는 언제나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러한 ‘전체(주의)’의 이념이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또 다른 폭력과 재앙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폭력과 재앙은 프로-메테우스(fore-thought)란 이름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적인 영웅은 모든 미래에 대해서 마치 자신의 손금처럼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이 예견하고 있는 운명에 따라 미리 앞당겨 판단하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불확실성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대화나 타협은 그에게서 불필요하다. 그런 대화나 타협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의 가치 배당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몫이 얼마나 떨어질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이것저것 견주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이 모자랄 수 있음을 승인할 때에만, 우리는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는 가운데 제 3의 길을 찾는 것이다.


 

 

 


‘과도함’이 없었던 그리스인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는 아직 그러한 화해의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화해는 오직 제우스의 몰락 이후에야 가능하다.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영웅에 의한 일종의 ‘개벽신화’로 탈바꿈한다(*작년말에 재출간된, 마르크스와 그의 시대에 관한 벽화적 전기소설 <프로메테우스>(들녘, 2005)를 쓴 러시아 작가 갈리나 세레브랴코바가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개벽'일까?).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바로 히틀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해서,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두 얼굴의 불이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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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비로그인 2009-02-1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뒤늦게 발견하고 담아갑니다.

로쟈 2009-02-12 09:3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보는 글이네요.^^

argos84 2019-01-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샘. 구로쪽에서도 강의 좀 개설해주세요.ㅠ
 

레비나스에 관한 글들을 띄우는 김에 러시아어본 레비나스도 잠깐 소개해둔다. 실상은 재작년 5월 모스크바 통신에 띄운 글에 포함돼 있는 내용인데, 당시 서점에서 새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2004)을 반가운 마음에 사들였던 추억을 담고 있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헌책방에서 구한 <레비나스 선집: 전체성과 무한>이고, 오른쪽이 신간이었던 <레비나스 선집: 어려운 자유>이다.

Э. Левинас 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Избранное.Тотальность и бесконечноеЛевинас Э. Избранное: Трудная свобода (сост. Левит С.Я.; пер. с фр. Вдовиной Г.В., Маньковской Н.Б., Ямпольской А.В.)

지난주(*2004년 5월)에 나온 신간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레비나스 선집>이었다. 역시 <크리스테바 선집>과 같은 ‘세상의 책’ 시리즈로 나온 최신간(이 시리즈에는 그밖에도 불트만, 아롱, 라크루아, 플레스너 등이 들어가 있다)인데, 로스펜출판사에서 내는 이 시리즈는 러시아와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열린사회연구소>에서 기획하는 ‘번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돈줄은 소로스 펀드이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펀드 매니저인 소로스는 헝가리 태생이고, (‘열린사회’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칼 포퍼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요컨대, 그는 ‘열린사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가끔 계란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그 ‘실천’의 방식이 ‘세상의 책’들을 번역/출간하는 데 있다는 점은 음미해 볼 만하다. 덧붙여, 소로스의 바람대로, 이번 미 대선에서 부시가 (제발) 낙선해서, ‘군사 민주주의’(촘스키) 국가인 미국도 어서 빨리 ‘열린사회’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물론 소로스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어쨌든 소로스 펀드의 도움으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의 제목은 ‘어려운 자유’이고, 전체 752쪽이다(1,500부 발행).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점 <이데아>의 주인장 말에 따르면(사실 그는 몇 년 전에 뭐가 나온 게 있다고만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번역된 레비나스의 책은 2000년에 나온 <전체성과 무한>이다(*나중에 헌책방에서 구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인 듯한데, 모두 4권의 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전체성과 무한>에는 5권이 번역돼 있다.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모두 아홉 작품이다).

그 4권이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nelogie de Husserl)>(1963),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발견하며(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1947/67), <어려운 자유(Difficile liberte)>(1963), 그리고, <타인의 휴머니즘(Humanisme de l’autre homme)>(1972)이다(번역서명은 강영안 교수의 표기를 따른다). 이 네 편의 번역 외에도 <글쓰기와 차이>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레비나스론 후반부가 번역돼 있고,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개념풀이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전체 번역은 두 사람이 했는데, 그 중 3편을 번역한 I. S. 보비나(Vovina) 여사가 레비나스 전문가로 보인다.

레비나스의 책으로 국내에 번역된 것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 정도일 텐데(소로스의 ‘번역’ 펀드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런 책들이 한꺼번에 번역되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앞으로 사정이 얼마나 나아질지는 의문이다(*원전 번역에 관해서라면, 아직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앞의 책 4권 가운데, 내가 본 영역본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 한 권뿐이었는데, 그쪽도 사정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지금은 거의 다 번역돼 있는 듯하다) . 물론 러시아에서의 인문서 번역 현황이 모두 레비나스 수준인 것은 아니다. 대형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보면, 클래식전집이라고 나온 걸 빼고, 외국철학자, 특히 현대철학자들의 책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네도 거장이 나오긴 틀렸구나!”라는 게 혼자 생각이었다. 물론, 사유의 거장들이 없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더 많은 번역서들이 나와야 한다는 당위의 가치는 유보될 수 없다. 적어도, 번역은 소통과 나눔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일’이다. 그것이 유익할 뿐만 아니라, 간혹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그 때문 아닌가?

어쨌든 부피만으로도 ‘숭고한’ <레비나스 선집>의 가격은 240루블이었다(9,600원). 얼마전 국내에서 새로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가 35,000원이던데, 할인가격을 고려하더라도 1/3이 안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번역의 질이다. 내가 러시아아어본의 <그라마톨로지>를 아무런 주저없이 집어든 것처럼, 외국의 한국학 전공자가 우리말 <그라마톨로지>를 집어들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해서 (1)더 많이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다가 (2)믿을 만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유사-프로메테우스들에 대한 주의가 요망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

06. 02. 13.

Эммануэль Левинас Время и другой. Гуманизм другого человека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Путь к Другому

P.S. 러시아어본들에서 레비나스의 생년은 구력에 따라 (1906년이 아니라) 1905년으로 기재돼 있다.(*'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몇 권 더 있다. 왼쪽이 <시간과 타자> 등을 묶은 선집이고, 오른쪽은 연구논문들까지 같이 묶은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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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2-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의 마지막 말씀 '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를 저도 되풀이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