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강의차 읽은 게 계기가 돼 쑤퉁의 <쌀>(아고라, 2007)을 다뤘다. 얘깃거리가 많은 소설이지만, 제한된 분량에 맞추느라 오전 시간을 거의 잡아먹은 글이다. 쑤퉁의 작품은 여럿 소개돼 있으며 대부분 구입한 상태인데, 장편 중에서는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 2007)과 <뱀이 어떻게 날 수 있지>(문학동네, 2008) 등을 먼저 읽어보려고 한다. 한편, <쌀>은 <대홍기 쌀집>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는데(지나치게 선정적이란 이유로 7년간 상영 금지됐었다고), 어디서 구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겨레(13. 05. 11) 지옥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남는 법

 

세상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어지럽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를 묻는 게 먼저인지도 모른다. 중국 작가 쑤퉁의 소설 <쌀>(아고라·2007)의 주인공 우룽은 난세를 버텨내지 못하고 그냥 황천길로 떠나는 건 억울할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 살아 있는 것, 둘째, 사람답게 사는 것. 일단은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향 펑양수에 홍수가 나자 우룽은 석탄운송 열차에 몸을 싣고 낯선 도시로 온다. 사지(死地)가 된 고향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도시는 비정했고 사람들은 속악했다. 부두 건달패의 우두머리 아바오는 먹을 것을 구걸하는 우룽의 손을 발로 짓이기며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음식을 주겠다고 조롱한다. 고아인 우룽은 고향에서도 개보다 나을 게 없는 존재였지만 굶어죽지 않기 위해 건달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신이 정말 개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면도 있다. 쌀 냄새에 이끌려 와장가의 대홍기 쌀집에 찾아간 우룽은 거렁뱅이 취급을 받자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전부는 아니다. 그에겐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무보수로 일하게 된 쌀집 주인 펑 사장과 목욕탕에 가서 그의 등을 밀다가도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인데 왜 나만 항상 당신의 등을 밀어야 하는 거지?’라고 의문을 품는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차별과 모욕을 마치 장부에 기입하듯 가슴에 새겨두었다가 철저하게 복수한다.

 

 

쌀집의 큰딸 쯔윈이 실력가 뤼 대감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그 하수인인 아바오와 정을 통하는 걸 알게 된 우룽은 뤼 대감에게 밀고의 편지를 보내 아바오를 죽게 만든다. 쯔윈이 아바오의 아이인지 뤼 대감의 아이인지 불확실한 아이를 임신하자 펑 사장은 우룽을 일단 데릴사위로 삼았다 제거하려고 한다. 하지만 명줄이 쇠심줄 같은 우룽은 악착같이 살아남아, 아들을 낳고 뤼 대감 댁으로 들어간 쯔윈 대신에 그 동생 치윈과 결혼하여 대홍기 쌀집의 주인이 된다. 쌀자루를 들고나가 부두 조직의 우두머리까지 된 장년의 우룽은 뤼 대감도 암살하고 마침내 도시의 실력자가 돼 꿈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자신을 살인도 서슴지 않는 복수의 화신으로 만든 대가로 얻은 것이며, 성병으로 썩어가는 그의 육신처럼 무상하다.

 

모두가 복수를 벼르는 악인임에도 우룽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교훈 때문이지 싶다. 은전 두 닢을 준다고 하니까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청년의 손을 짓밟으며 우룽은 처음 도시에 왔을 때 아바오에게 당한 치욕을 상기한다. “복수심과 증오심이야말로 우리가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밑천”이라는 게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 청년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우룽의 교훈이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객차에 쌀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떠나는 우룽의 마지막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애초에 우룽의 꿈은 금의환향이다.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이 개가 아니라 어엿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는 것이다. 생니를 다 뽑고 이빨 전부를 금니로 해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쑤퉁의 <쌀>은 어엿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증오와 복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의 지옥도를 보여준다.

 

13.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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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43호)에 실은 리뷰도 옮겨놓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다' 특집인데, 내가 청탁받은 건 세 권의 인문서에 대한 검토였다. 제목에 모두 '인문학'이 들어가 있어서 '인문학 책'이라고 따로 작명을 했다(원래 쓰이는 말인지는 긴가민가). 불황 속에서도 읽히는 '인문학 책'의 매력과 아쉬움을 적었다. 그러고 보니 기획회의에는 상당히 오랜만에 글을 싣는다.

 

 

기획회의(13. 05. 05) '읽히는' 인문서의 시대

 

인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행히 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 ‘최근 인문학 분야 도서 중 어떤 책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짚어달라는 게 <기획회의> 편집자의 주문이기에. 인기 인문서의 원인 분석을 해달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향방에 대해서도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란 불길한 예감도 든다. 인문학 책이 왜 읽히고 있으며(더 정확하게는 왜 팔리고 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더듬다 보면,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으며 우리 곁의 인문서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점검해보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거창한 문제는 일단 덮어두기로 한다. 나로선 부족한 역량과 분량을 얼마든지 핑계로 댈 수 있다. 익숙한 게 믿는 구석이다. 그냥 앞가림만 하기로 하자.  

 

통칭하면 ‘인문 분야 도서’이고 ‘인문서’이지만, ‘인문학 책’이라고 특정하게 되면 제목에(적어도 부제에) ‘인문학’이란 말이 들어간 책을 별도로 가리킨다. 이게 ‘업계 용어’로 등재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거기에 준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책들인가. 가령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서도 <숲의 인문학>(글항아리) <홍루몽 인문학>(휘닉스) 같은 제목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으며 심지어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 <조선시대 어린이 인문학>(열린어린이) 같은 제목도 충격적이지 않다. ‘인문학’의 오지랖이 넓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해해줄 만하다. 인문서는 안 팔리는 책의 대명사이지만 특이하게도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란 말은 독자를 유인하는 매끈한 미끼로 간주된다. 인문서는 안 읽어도 ‘인문학’에는 끌린다? 무슨 이유일까? 세 권의 책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일단 주현성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에서부터 시작해보자. 2012년 10월에 출간돼 10만부 이상 판매됐다고 전해지는 책이다(그 정도면 인문서로서는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제목이 말해주듯 전형적인 ‘인문학 책’이다.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이 부제. 무엇이 비결일까. 저자는 인문교양 분야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경력의 출판기획자라고 소개되지만 이 책이 데뷔작이다. 기획자로서의 감각이 내용 구성에 배여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시작하는"이란 문구가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06년 대학 인문학의 위기 선언과 함께 시작된 대학 바깥의 역설적인 ‘인문학 붐’도 한 풀 꺾인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상황에서(서울대의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을 소개한 CEO 인문학> 같은 책도 몇 년 전에 나왔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금 시작하는"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나로선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는 ‘재정비’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인문학 붐과 함께 다수의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고, 스타급 인문학자들도 탄생했으며, 인문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시대의 영웅’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기술을 모두 줄 수 있다”는 말로 인문학 열풍을 더 부채질했다. 그 결과 대학 내 인문학의 위상과는 무관하게 인문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의 가치에 대해선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가 됐다. ‘인문학’은 대접 받는 유행어가 됐다. 그래서 형성된 게 ‘이건 뭐지?’라는 궁금증과 뭔가 알아야 한다는 부담이 아닌가 싶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전공자라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이지만 다수의 비전공자에게는 다르게 비쳤을 법하다. 그들에게 ‘인문학’이란 말은 판독해야 할 시대의 상형문자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문학, 역사, 철학 책들에 두루두루 눈길을 주어보지만 쌓이는 건 두서없는 지식이고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는 인문학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채로 나열돼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등장배경이다. 더불어 "처음 만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이어야 하는 이유라고도 말하고 싶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저자는 인문학과는 구면이지만, 그래도 아직 뭔지 잘 모르겠다는 독자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동안 많은 교양 입문서가 나왔지만 매우 산발적이거나 한 분야의 지식에만 치우쳐 있어, 인문 교양에 욕심을 내는 초심자들에게는 꽤 긴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필요한가.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바로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체계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이다. 요컨대 체계적인 실전용 가이드북이라고 할까. ‘최소한의 인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곧바로 인문서 독서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저자가 자임한 역할이다. 그런 취지에서 고른 영역이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등 여섯 가지라는 점은 이 책만의 특징이자 개성이다. ‘인문학의 핵심 여섯 분야’를 이렇게 꼽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은 독자의 필요와 눈높이에 맞는 기획과 콘텐츠를 통해서 인문서의 숨은 독자들을 끌어낸 공로를 십분 인정해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책의 독자들이 저자의 기대대로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소화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가장 어렵게 여겨질 ‘현대의 철학’ 장만 하더라도 저자는 비트겐슈타인뿐만 아니라 콰인, 크립키 등의 전문적인 분석철학자까지 다룬다.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인문 교양’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잡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비중을 고려하면 프로이트와 함께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상계’라는 개념에다 ‘Imagery’라고 잘못 병기한 걸로 보아(‘the imaginary’ 대신에) 저자 자신이 성급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나 의심도 든다. 소쉬르 언어학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인간 이성을 구조로 대치함으로써 구조주의를 이성에 뿌리를 둔 기존의 철학과 분명히 다른 탈근대(탈이성)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고 한 대목도 요령부득이다. 짐작엔 ‘주체’를 ‘이성’으로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분명 ‘흥미로운 지식의 향연’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독자가 가려서 즐겨야 한다는 조건은 붙는다. 물론 그렇게 가려서 즐길 만한 독자를 겨냥한 입문서가 아니라는 게 딜레마이긴 하지만.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북드라망) 역시 제목에 ‘인문학’이란 말이 들어간 ‘인문학 책’이다.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같이 들어가 있는 건 ‘고미숙’이란 이름이 이미 하나의 브랜드라는 걸 말해준다. ‘동의보감 삼종세트’의 마지막 권으로 나온 책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와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서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은 독자에게는 가벼운 ‘몸 풀기’로 여겨지는 ‘사회비평적 에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대학이 지난 ‘지적 구심력’이 이미 끝났다는 것. “리모델링과 시설투자에 올인하는 사이, 대학은 한낱 ‘취업전선’이 되어 버렸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이제 대학에는 지성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대학이 지성을 포기하자 새로운 지성의 광장이 열렸고 ‘대중지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떤 시대인가. “지식인이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지성의 주체’가 되는” 시대다. 저자는 바로 그런 시대를 주도한 대표적 인문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은 그런 저자의 활달한 문체와 문제의식을 여일하게 담고 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반복적이란 느낌도 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이 ‘아기를 업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라는 점에서도 그렇다(양기 덩어리인 아이에겐 음기가 필요하다는 것, 등은 서늘하다는 것, 아기를 업으면 엄마가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 가지 이유다). 인문학의 오지랖에 경탄할 밖에!

 

 

 

미국의 교육전문가 리 보틴스의 <부모 인문학>(유유)은 ‘교양 있는 아이로 키우는 2,500년 전통의 고전교육법’이 부제다. 고전 공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단단한 공부>나 <공부하는 삶>과 맥을 같이하고, 또한 이지성의 베스트셀러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와도 연결될 수 있는 책이다. ‘공장 교육’으로 전락한 오늘날 국가 주도의 공교육을 비판하면서 저자는 부모가 직접 자녀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고전 공부법’을 주창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은 다음 세대가 역사 속 위대한 고전과 대화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지 않는다”는 저자의 비판에 십분 공감하더라도 그의 전제까지 공유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다. 어떤 전제인가. 부모들이야말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저자는 “12년 동안 효과적인 학교 교육을 받고도 아이들 공부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정도로 기초 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묻는데, 우리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고전 공부에 관심이 많은 부모는 양질의 학습 자료만 있으면 공부법을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런 학습 자료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때문에 <부모 인문학>은 부모의 책임감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더라도 그 깨달음이 우리의 교육법을 바꾸게 해줄지는 미지수다.

 

어느 분야에서건 마찬가지겠지만 ‘읽히는’ 인문서도 비결과 한계를 갖는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틸까. 인문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가라앉지 않기 전에 새로운 출구를 뚫어줄 ‘인문학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아니 굳이 ‘인문학’이란 말을 제목에 붙이지 않아도 인문서가 읽히는 시대를 고대한다.

 

13.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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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29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강명관의 <침묵의 공장>(천년의상상, 2013)을 읽고 적은 것이다.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도 해법은 아쉬운 책이었다. 국문학 비판과 관련해서도 저자의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에서 더 나아간 것 같지 않다. 좀더 묵직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

 

 

 

시사IN(13. 05. 11) 인문학의 대학 탈출법

 

한문학자 강명관의 <침묵의 공장>을 읽으며 먼저 떠올린 건 지난 2010년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써 붙이고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이다. 자퇴의 변을 담은 <김예슬 선언>(느린걸음)에서 저자는 오늘날 대학이 ‘큰배움’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됐으며 더 이상 ‘배움도 물음도 없는 곳’이라고 비판했다. 대학에 대한 절망을 담은 이 당찬 ‘대학 포기 선언’에 공감과 냉소가 교차했지만 어느덧 ‘과거지사’가 됐다. 한국은 침묵에 익숙한 사회다.

 

강명관은 그런 침묵에 다시 묵직한 일성을 던진다. 그가 ‘침묵하는 공장’이란 말로 가리키는 건 ‘대학’이다. 대학은 소위 학문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 대학은 “한 개인의 사회적 서열을 매기는 곳이고, 차등화된 노동자를 배출하는 곳이 된 지 오래”라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이고 대학과 인문학 역시 이 트라이앵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국가가 연구비를 무기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대학의 인문학이 본연의 인문학일 수 있느냐고 그는 묻는다. 그것은 ‘관학(官學)’이 아니냐고 일갈한다. 

 

목소리는 사뭇 높지만 생경한 비판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방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문제 제기의 강도에 비하면 저자의 행동지침은 예상보다 과격하지 않다. 너무 점잖다 싶을 정도다. “가능한 한 학진(학술진흥재단)과 외부 기관을 우습게 알면서 그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한 낮추고, 등재지를 경멸하면서 최소한의 논문을 내고, 어떻게 하든지 대학의 행정적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권력과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탈출할 것!”이라는 게 그의 권유이기 때문이다. 과연 연구지원기관을 우습게 알고 국가관리 학술지를 경멸하는 것 정도로 자본과 국가, 테크놀로지로부터의 독립과 인문학 갱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냉소적인 거리를 독립으로 간주하는 것은 혹 인문학자의 ‘정신승리법’에 불과한 게 아닐까.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해법에 의문을 갖다 보니 “인문학의 유일한 생존로는 인문학자가 다시 수공업의 장인이 되는 데 있다.”라는 저자의 선언적 주장도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국사학과 국문학의 지배적인 연구 경향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저자는 국문학 연구가 서구 근대문학이라는 틀로 한문학을 재단하고 배제한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배제의 결과 “양적으로 풍부한, 그리고 국문문학에 훨씬 고급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한문학”이 여전히 ‘방외(方外)’에 있고, “한문학의 풍요로운 성취”는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하지만 한문학이란 무엇이던가.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가 물려받은 문학 유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문학은 지배층인 남성-사대부의 것”이고, “곧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위한 문학”이다. 저자는 전근대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생활의 교직이 특징적인 면모였으며 그렇게 창작과 감상, 작가와 독자가 일치했던 ‘행복한 시절’을 우리가 망실하게 됐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때 서로 일치했던 작가와 독자는 대부분 남성-사대부였을 것이다. ‘풍요로운 성취’와 ‘행복한 시절’에 대한 회고적 감상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다.

 

13.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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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오랜만에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03165522§ion=04 참조). 어린이날에 맞춰 고른 책이 <그림 형제 민담집: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현암사, 2012)이고, 같이 읽은 책이 오이겐 드레버만의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 읽기>(교양인, 2013)이었다. 드레버만의 네 편의 동화를 아주 자세히 읽어낸다. 국내 저자의 해설서로는 이혜정의 <그림형제 독일민담>(뮤진트리, 2010)가 있는데, 74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많은 작품을 다루는 대신에 아무래도 밀도는 약할 듯싶다. '어린이날 특집' 수다라고는 했지만, 어른이 돼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무의식을 다룬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기에 <그림 형제 민담집> 역시 '다시 읽기' 거리다.

 

 

 

프레시안(13. 05. 04) 아빠가 딸의 손목 자른 이유? 핏빛 동화는 현재진행형!

 

(...)

 

이권우 : 오늘 우리가 얘기할 책에는 그림 형제 '동화책'이 아니라 <그림 형제 민담집>이라는 제목이 붙었지요. 역자 김경연 선생님은 독문학 전공자 중에서도 특이하게 아동‧청소년 분야를 전공하셨습니다. 이번에 완전판으로 번역을 하셨는데, 부제에서부터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고 못을 박았지요. 아동만 읽는 것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이야기책이라는 점에서도 저는 아주 반갑게 읽어봤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읽은 이야기와 원본의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다들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김용언 : '옮긴이의 말'에 핵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16쪽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우리는 흔히 독일어의 '메르헨(Märchen)'을 동화로 옮기는데, 메르헨은 어원상 '이야기'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 형제의 메르헨은 작가를 알 수 없이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 즉 폴크스메르헨(Volksmärchen)을 수집하여 다듬어 낸 것이다."

왜 '동화'가 아닌 '민담'이라고 쓰는 게 맞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 형제의 이야기가 근대 독일 문학의 원류가 됐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게, 다른 작가는 차치하고서라도 E. T. A. 호프만의 소설을 읽고 나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호프만의 소설은 그림 형제 이야기에서 굉장히 많은 원형을 가져왔고, 그걸 좀 더 과장하고 괴기스럽게 변형한 버전이니까요. 게다가 어제 <그림 형제 민담집>을 읽은 다음 안데르센의 동화도 펼쳐 봤는데, 거의 비슷한 구도의 이야기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림 형제가 채집한 민담이 독일만의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집단적인 이야기였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현우 : 이번에 <그림 형제 민담집>을 읽으면서, 2012년이 그림 형제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초판본 출간 200주년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림 형제 민담집>은 1857년 최종판(7판)을 원본으로 하되, 최종판에 수록되지 않은 모든 이야기들까지 합해 완역본 개념으로 만들었더라고요. 동화에 특별한 관심이 없더라도, 이렇게 정본 역할을 할 만한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고요. 그 다음으로는 그림 형제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는데…(웃음) 흔히 아는 주요 작품들이 이 완역본에선 1/4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미처 몰랐던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어요.

세 번째로는 이야기 자체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아이들 용으로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고 심지어 가이드북이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권우 :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그림 형제 동화가 얼마나 순화된 버전이었는지 새삼스럽더라고요. 그 많은 중요한 내용들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바꾼 이유 역시 중요한 연구 대상 아닐까요. 어떤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림 형제의 원본을 훼손해서 들려줬을까 하는 지점들이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200편이 넘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끼리의 관련성이 보이지요. 그 모티브가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관찰하면, 융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림 형제로부터 보편적 무의식의 세계를 끄집어내고 싶어했던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전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죽 읽었는데요. 이현우 선생님도 앞서 얘기했다시피 가이드북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오이겐 드레버만 지음, 김태희 옮김, 교양인 펴냄)이 좋은 예지요.

 

먼저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저자는 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에요. 내용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림 형제 이야기 중 '재투성이 아셴푸텔', '장미 공주', '라푼첼', '영리한 엘제' 네 편을 분석하면서 여성 심리 체계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쳐요. 저자가 실제로 심리 상담을 진행한 예를 함께 얘기하는데, 민담과 현실의 예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결국 동화가 아닌 민담이란 말이 맞는 겁니다. 전래됐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의 동의를 얻었다는 뜻이므로, 그림 형제 이야기는 집단 무의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를 읽으면서 거꾸로 <그림 형제 민담집>의 위대함을 알게 됐다고 할까요.

 

이현우 : 저도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를 보면서 단 네 편만으로도 이토록 정밀하고 다양하게 분석해놓아서 좀 놀랐습니다. 대학원에서도, 특히 문학 전공자들에게 이런 민담이 좋은 분석 텍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각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모티브는 주로 가정의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됩니다.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매우 보편적인 요소인데, 이 이야기들을 분석하면서 자기분석 또한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죠. 전래 동화를 대하는 시각이나 태도 자체도 좀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권우 : 그림 형제 이야기가 다양한 인문적 사유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국내 저작으로는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신화에서 역사로>(주경철 지음, 산처럼 펴냄)도 추천합니다. 그럼 각자 흥미롭게 읽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얘기해볼까요.

 

 

살인 사건부터 남편과의 결별까지

김용언 :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이야기가 '노래하는 뼈다귀'입니다. 일반적인 동화 카테고리는 아니고, 일종의 도덕극이라고 해야 하나…. 질투심 많은 형이 동생을 물에 빠뜨려 죽인 다음 동생의 공로를 가로채지요. 하지만 몇 년 뒤 어떤 목동이 동생의 뼈다귀를 발견하자, 그 뼈가 형의 악행을 폭로하는 노래를 시작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읽기엔 끔찍한 내용입니다. 존속 살인에다가 유령이 나타서 보복하는 얘기니까요.

 

'노래하는 뼈다귀'를 읽고 딱 떠올랐던 게 에드거 앨런 포의 '고자질하는 심장(The Tell-Tale Heart)'였어요.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시체를 마루에 묻었는데, 경찰이 집 안에 들어오자 결국 시체의 심장 박동 소리에 시달리다 살인죄를 자백하고 맙니다. 이런 이야기의 원형이 '노래하는 뼈다귀'가 아니었나 싶은 겁니다. 재미있는 건 보통 아시아 쪽 전래동화에는 문자 그대로의 귀신이 등장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여기서는 신체의 일부가, '신체 없는 기관'이 전체로 기능하면서 보복한다는 차이점이 흥미로웠어요.

 

두 번째로는 '파란 등잔불'이라는 작품인데요. 어제 제가 <안데르센 동화집>(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빌헬름 페데르센 외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을 들춰봤을 때 '부시통'이라는 동화가 있었어요. '파란 등잔불'과 거의 유사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도 그 동화 읽으면서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 재독하면서는 끔찍하기까지 했어요. 그림 형제 버전에서는 병사가 몽유 상태의 공주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서 하녀로 부리며 학대하고, 안데르센 버전에서는 매일밤 몽유 상태의 공주의 뺨에 키스하지요. 큰 틀 자체는 영리한 병사가 못된 왕을 이긴다는 줄거리지만, 그 영리함을 무기로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를 성적으로 학대한다는 이 서브 내러티브가 제게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그림 형제 민담집>의 또 다른 이야기 '닳아빠진 구두'의 경우엔 자진해서 지하 세계로 내려가 남자들과 밤새도록, 구두가 닳아 없어질 만큼 춤을 추는 공주들이 나오는데요. 이럴 경우에도 결국 '영리한' 남자가 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쾌락을 추구한 공주들이 벌을 받게 됩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는 민담들은 정말 조심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이권우 :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가 바로 그런 여성의 착취 문제를 다뤄요. 특히 '영리한 엘제' 이야기를 분석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영리한 엘제'라고 불리면서 성장한 엘제가 한스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곡식을 베러 들판에 나갔다가 일은 안하고 잠을 자버리죠. 그걸 본 한스가 엘제 주변에 종을 단 그물을 씌워버리고요. 저자 오이겐 드레버만에 따르면, '영리한 엘제'는 아버지의 통제라는 심리적 압박 속에서 영리한 척 굴며 자란 여성이 또다시 아버지와 닮은 남성과 결혼하고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광인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심리적 파국의 드라마에요.

 

그림 형제 이야기에는 대부분 비약이 존재합니다. 어느 부분에 이르면 이야기가 탁탁 튀거든요. 그게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심리의 트라우마가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비약이나 도약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다른 민담과도 관련지어 살펴봐야지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립니다.

 

오이겐 드레버만은 그림 형제 이야기를 통해 분석한 여성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해답도 줘요. 성숙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이해와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많은 민담들이 결혼으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모험과 어려움을 겪고 나서 결혼에 이르는 주된 내러티브가, 심리적인 성숙을 위한 사랑의 반려자를 찾는 과정이라는 거지요.

 

이현우 : '영리한 엘제'의 마지막이 아주 재밌어요. 방울 달린 그물을 쓴 엘제가 "난 나일까, 아닐까?"라고 헛갈리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스에게 "안에 엘제 있어요?"라고 물어보자 한스는 시침 뚝 떼고 "엘제는 안에 있소"라고 답하죠. 그러자 엘제는 "오 하느님,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라며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여느 동화에는 이런 파격적인 결말이 없죠. 보통은 문제가 해결되면서 해피엔딩이 찾아오지만, 여기선 엘제가 떠나 버립니다. 이것 역시 동화의 관례라고 가정한다면 엘제의 떠남 역시 해피엔딩으로 읽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묘해지죠. 엘제가 부모나 남편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찾았구나, '영리한 엘제'라는 정체성에서 해방됨으로써 그 자유를 찾았다고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시각에서 봤을 때에도 아주 도발적인 결말입니다.

 

김용언 : 그 마지막 장면에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났습니다.(웃음) 자꾸 자신의 키가 줄었다 커졌다 하자 혼란에 빠진 앨리스가, "넌 누구냐?"라는 쐐기의 질문에 "글쎄요, 선생님. 지금 현재는 저도 모르겠군요. 오늘 아침 제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제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뭔가 여러 번 변했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그 장면이요. '나'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서 시작되는 혼란이 어린 시절과의 작별이라고 한다면, 저 역시 '영리한 엘제'가 해피엔딩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시는 부모님이나 남편의 믿음에 그대로 부응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니까요.

 

(...)

 

13.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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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24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부산에 내려가기 전에 급하게 써보낸 원고인데,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어크로스, 2013)를 다뤘다. 언젠가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 2009)도 다룬 적이 있기에 나로선 구면이다(<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 2010)는 읽지 않았지만 데뷔작인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텍스트, 2009)를 읽은지라 왠지 친숙하다). 20대 담론이 이슈가 되면서 호명된 논객/필자군(한윤형을 비롯해 노정태, 김현진, 김민하, 조연호, 박가분 등)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듯싶다.

 

 

 

주간경향(13. 05. 07) 잉여세대의 문제는 시대의 문제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자칭 ‘청년논객 한윤형의 잉여탐구생활’이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세대의 자화상과 세대의식, 사회적 열패감과 무기력을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의식과 사회비평을 두루 담았다. 저자는 “군대를 다소 늦게 다녀온 25살 청년이 31살이 되는 동안 사적인 공간과 담론의 영역에서 어떻게 분투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자평하면서 야심도 털어놓았다. “또래에게는 위안을 주고, 다른 세대에겐 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봐야 하는 책이 되면 좋겠다”는 야심이다. 어떤 위안을 건네고, 어떤 이해를 돕고자 하는가.

전체적인 골자는 세대 문제가 결국은 시대의 문제라는 점이다. 잉여세대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시대를 반영하는 어떤 세대의 문제’일 뿐이다. 특정 세대가 뒤집어쓸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2007)가 세대간 착취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지만, 한윤형이 보기에 “세대 담론은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담론이다. 게다가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건 ‘원래부터 88만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의 관심이 아니라 그런 빈곤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중간계급의 불안감이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 담론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쪽은 명문대생들이었다(루저들의 정서를 잘 표현한 노래 ‘싸구려 커피’를 부른 가수 장기하가 명문대 출신인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계급 불평등의 세대 전이’가 ‘88만원 세대 담론’의 성공 요인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심리 내지는 중간계급의 욕망과 결부돼 있는 세대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 문제와 직결된다. 저자가 간추린 바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서 자산을 축적했고, 그와 함께 정치적으로 보수화됐다. 기업 활동에 투자돼야 할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자연스레 기업 경쟁력은 떨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 노동시장에 신규로 진입한 젊은 세대의 임금을 낮추는 것이었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춘 것이 한국식 자본주의의 운용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중산층 자신의 자녀가 월급으론 독립을 꿈꿀 수 없는 사회다. 이 ‘멋진 신세계’에선 부모가 몇억원 보태주지 않으면 전셋집 하나 장만하기도 어려워 어지간한 청춘들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로 전락한다.

이러한 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멘토 담론은 아무리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어낸다 하더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 공허는 잉여세대를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386세대의 위선과도 맞닿아 있다. 가령 교육문제를 보더라도 386세대에게선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자기 아이를 외국이나 대안학교에 보내는 일이 양립 가능하다. 우파가 자식을 미국으로 보낼 때 소위 좌파는 독일이나 핀란드로 보내는 것 정도의 차이다. ‘결국 다 똑같다’는 냉소는 그래서 나온다.

물론 냉소가 우리를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창의성을 말살하는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 오히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일은 아닐까라는 저자의 반문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제안은 진보담론이나 개혁정책이 실효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한국 사회의 제도와 문화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에 대한 매우 세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학생의 85%가 비정규직이 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동류의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건 계급간 연대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 문제다. ‘루저’와 ‘잉여’를 양산해내는 사회체제와 경제구조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가능할까?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우리’를 발견하고 눈짓을 교환할 때 균열은 시작된다.

 

13.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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