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책&(425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잡은 건 '쓰레기'다. 최근 몇 년간 쓰레기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해주는 책들이 여럿 출간돼 주제로 삼았다. 인구 문제와 함께 시한폭탄으로 여겨지는데, 앞으로도 인류가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책&(13년 12월호) 쓰레기의 재구성

 

“궁금해요. 쓰레기가 엄청 많잖아요. 가장 걱정스러운 건 언젠가 이 쓰레기를 쌓아둘 곳이 없어질 게 분명하다는 점이죠.”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1989)에서 앤디 맥도웰이 의사에게 털어놓는 고민이다. 당시만 해도 관객들은 쓰레기 문제를 한 신경증 환자의 고민으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의 문제가 됐다. 문명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모두가 쓰레기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 일상적으로 배출해내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쓰레기가 우리 시대의 표지라면, 이제 더 쌓아둘 곳도 없어지기 전에 어떤 실천과 결단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는 건 의무다. 12월에는 이와 관련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책 몇 권을 살펴보자.

 

  


먼저 현황부터 파악해보자. 언론인이자 영화제작자 헤더 로저스의 <사라진 내일>(삼인, 2009)은 쓰레기의 발생에서 처리까지 그 흐름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주에서 지구를 볼 때 중국의 만리장성과 함께 눈에 띄는 문명의 흔적이 뉴욕 시 남서부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 '프레시킬스'라 한다. 세계 최대 소비국가인 만큼 배출하는 쓰레기양에 있어서도 미국은 단연 세계 최고다. 전체 세계 인구의 4퍼센트가 살고 있을 뿐이지만, 미국인은 지구 자원의 30퍼센트를 소비하고 전체 쓰레기의 30퍼센트를 생산한다. 미국인 1인당 하루에 2킬로그램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미국적 삶이 번영을 뜻한다면 쓰레기는 그 지표이자 이면이다. 쓰레기의 역사가 인류 역사만큼 유구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쓰레기는 근대 산업화의 새로운 발명품이다. 미국의 경우, 17세기와 18세기 이민자들은 너무 가난해서 공산품이란 걸 써보지 못했으며 일상에서 버릴 것도 없었다. 깨진 도자기나 음식물 찌꺼기 정도가 그들이 버릴 수 있는 쓰레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내용물이 비워지자마자 포장재는 곧장 쓰레기로 전락한다. 미국 제품의 약80퍼센트가 딱 한번 사용되고 버려지지만 재활용률은 미미하다. 대량 소비사회가 낳은 환경재앙이 코앞에 있다.


<사라진 내일>이 쓰레기 문제의 개관에 해당한다면, 퓰리처상 수상 경력의 언론인 에드워드 흄즈의 <102톤의 물음>(낮은산, 2013)은 최신판 종합보고서다. ‘쓰레기에 대한 모든 고찰’이란 부제에 걸맞게 쓰레기 문제의 모든 것을 다루고 실천적 제안까지 제시한다. 제목의 ‘102톤’이란 수치가 눈에 띄는데(원제는 ‘쓰레기학’이다) 미국인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만들어내는 쓰레기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실상의 일부일 뿐이다. 개인이 배출하는 쓰레기양이 그렇다는 것이고, 산업 쓰레기를 포함한 미국의 전체 쓰레기 배출량은 매년 100억 톤에 이른다. 이를 환산하면 미국인은 연 평균 35톤, 평생 2700톤의 쓰레기를 남기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에서 미국의 수출품 1위와 2위가 폐지와 고철이라는 점이다. “한때 세계 모든 나라를 위해 물건을 생산하던 미국이 중국의 쓰레기 분쇄압축기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폐기물 수출이 쓰레기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을 기준으로 하자면 우리는 ‘102톤의 유산’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날 방도는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자의 대안은 상식적이게도 ‘낭비 없는 삶’이다. 쓰레기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 즉 기후 변화와 석유 정점, 에너지 비용 상승 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자각과 함께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다. 원치 않는 물건들을 거부하고, 중고품을 사용하며, 생수 구매와 식료품 비닐봉지 사용을 중단하는 것 등이 그가 제안하는 구체적 실천방안이다.

 

 


한편 쓰레기의 역사를 일람해보는 것도 쓰레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줄 것이다. 역사학자 수전 트레이서의 <낭비와 욕망>(이후, 2010)은 마음에 안 들거나 쓰기 싫어졌다는 이유로 물건을 내버리는 일이 현대문명사회의 큰 특징이라고 지적하는데, 너덜너덜해지거나 망가지지 않은 옷이나 가구를 버리는 건 20세기 중반까지도 일반인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령 <알뜰한 미국 가정주부>란 책의 1835년판은 돼지 여물통을 자주 들여다보면서 기름 모으는 통에 들어가야 할 것이 돼지한테 가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런 태도를 낭비를 줄이기 위한 ‘오래된 지혜’로 삼을 수 있을까.

 

혹은 직접 쓰레기를 수집하는 체험을 해보는 것도 쓰레기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제프 패럴의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시대의창, 2013)는 대학교수직을 박차고 8개월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물건을 수집해 재활용한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범죄학자로서 그는 ‘소비와 낭비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큰 파괴행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그런 소비와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물건이 생산되고 소비되어 쓰레기로 버려지기까지 ‘물건의 일생’을 추적한 애니 레너드의 <물건 이야기>(김영사, 2011)도 필독해볼 만하다. 알면 사랑한다는 경구에 빗대자면, 알면 아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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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시민의 탄생>(민음사, 2013)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아 쓴 것인데, 묵직한 문제의식과 통찰을 유려한 문체로 실어나르고 있는 수작이다. 저자의 전작 <인민의 탄생>(민음사, 2012)과 정치학자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2013)와 겹쳐 읽으면 좋겠다(그런 생각으로 두 권을 찾았지만 끝내 아직 못 찾고 있다. 책을 구입하고도 못 읽는 신세라니!). 3부작의 마지막 권인 <현대 한국 사회의 탄생>도 출간을 고대한다.   

 

 

 

중앙일보(13. 12. 07) 문자와 동학, 근대 시민을 깨우다

 

한국에서 근대국가와 근대사회, 그리고 근대인은 언제 출현했는가.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가 화두로 삼은 물음이다. 서양의 근대가 뚜렷하고 분명한 모습을 띠고 있기에 그 기원과 진화 양상을 충분히 재구성해볼 수 있지만 한국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한국의 근대는 그 기원과 진화의 궤적이 모호하다. 한국 현대사회의 특질에 대한 분석에 몰두해온 사회학자로서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이 기원의 문제에 항상 갈증을 느껴왔다는 그가 결국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물론 근대의 기점과 성격에 관한 연구가 없지 않았다. 아니 한국사 연구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과문하지만 상식에 기대보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함께 비로소 서양식 근대가 이식됐다고 보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쪽에 있다. 반면 다른 쪽엔 18세기에 이미 토지 소유관계의 변화와 함께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텄다고 보는 자생적 근대화론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성격을 띠며, 자생적 근대화론에 따르면 일본의 지배는 우리의 자생적 근대화의 길을 차단하고 굴절시킨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그 외에 근대라는 역사적 범주가 서양사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한국사의 특수성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일반적 틀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근대 회의론도 있다.

입장은 다르지만 근대의 핵심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국민국가라는 정치체제의 결합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자본주의 근대로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일제의 강점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주된 쟁점이었다.

 

 

하지만 전작인 『인민의 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송 교수는 ‘공론장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한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관한 하버마스에 선구적 연구에 기대어 저자는 공론장의 분석을 아예 조선의 전반적 역사 변동과정을 설명하는 통시적 분석틀로 삼는다. 책의 부제가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지각 변동’으로 붙여진 이유다. 저자는 “조선의 역사 변동은 공론장 구조 변동의 역사”라고까지 말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은 한 시대가 저물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대가 다가오는 전환기였다. 이 전환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말안장 시대’(1860~94)다. 1860년대 전국 각지에서 봉건 질서와 지배층에 반기를 든 민란의 시대가 도래했고, 저자의 표현으로 문자해독력을 갖춘 ‘문해인민’(文解人民)은 주체의식과 존재론적 자각을 갖게 된 ‘자각인민’으로 진화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건 양반 공론장의 쇠퇴와 평민 공론장의 확대다.

19세기 전반기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을 지탱해온 지식과 권력의 선순환이 차단되고 차츰 서양의 위협과 직면하면서 더 이상 성리학적 천(天) 개념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문명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천 개념의 변용이 불가피했지만, 지배층이 내세운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동도서기(東道西器), 문명개화 등의 세 가지 태도는 여전히 ‘지배층의 천’만을 고려한 것 일뿐 ‘인민의 천’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인민의 천은 동학에서 새로운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데, 동학은 인민도 스스로 천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매우 파격적인 ‘종교 개혁’이었다. 이렇듯 지배층의 천과 인민의 천이 분리되면서 역사 또한 지배층의 역사와 인민의 역사로 분리되며, 이 두 역사는 1894년에 서로 충돌하면서 모두의 실패로 끝난다.

말안장 시대에 이어지는 시대가 갑오정권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근대 이행기이다. 공론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지식인 공론장이 형성되고, 평민 공론장이 세속적 평민 공론장으로 부활하며, 이 두 공론장이 서로 연대하고 공명한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제대로 추진됐다면 개인은 시민으로, 사회는 시민사회로 자연스레 이행해갈 수 있었을 터이지만, 불행히도 국권 침탈과 함께 그 과정은 중단됐다. 그 결과 시민의 탄생은 “식민 통치하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상상력의 공간, 문학의 영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시민의 탄생』은 자각인민이 근대적 개인을 거쳐 시민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근대적 개인과 시민을 구분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근대적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라면 저자는 개인과 사회가 근대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은 시민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 시각과 용어들이 ‘송호근판’ 한국 근대 기원론의 강점이다. 저자는 한편으로 공론장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한국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조망을 제시하며, 다른 한편으론 공론장의 구조 변동에 대응하여 인민이 어떠한 주체로 진화해가는가를 단계별로 기술한다. 전례 없는 시도이자,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안목과 이해를 획기적으로 넓혀주는 중요한 성과로 읽힌다.

 

13.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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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연재꼭지 '뉴 파워라이터'의 이번주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61841275&code=960205). 지지난주에 인터뷰를 했고 그게 기사화됐다. 사진은 경향신문 자료실에서 찍은 것이다.

 

 

경향신문(13. 12. 07) [뉴 파워라이터](8) 서평가 이현우

 

명함은 한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다. 그 점에서 이현우씨(45)의 명함은 특이하다. 앞면의 이름과 뒷면의 이름이 다르다. 지난달 27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그가 건넨 명함 뒷면에는 흰색 바탕을 배경으로 선명한 검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로쟈’.

 

이현우씨는 본명보다 필명이 더 먼저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첫 책인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나온 것은 2009년이지만, ‘로쟈’라는 이름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신간의 바다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읽어야 할 책들의 좌표를 알려주는 나침반 구실을 해왔다. 그의 필명이 20세기 초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아니라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지 오래다. 책동네에서 ‘로쟈’는 ‘서평가’의 대명사다.

 

- 현재 서평을 기고하는 매체는 몇 개나 되나.

“시사주간지 ‘시사인’, 한겨레,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서평지 ‘책&’에 정기적으로 쓰고 있고 기타 계간지 등에서 부정기적으로 청탁을 받아 글을 쓴다.”

 

- 어떤 경로로 서평가가 됐나.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알라딘 독자 서평을 쓴 게 시작이다. 그리고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 책 이야기를 썼다. 둘 다 2000년대 초반이다. 그 무렵 ‘텍스트’라는 이름의 북매거진에서 청탁이 왔다. 이런 활동들을 하고 있었는데 2007년 한 일간지에서 나를 포함해 인터넷 공간에서 신간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며 맥락까지 짚어주는 일군의 누리꾼들을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뒤 서평꾼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후 언론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여러 언론매체로부터 서평 청탁을 받았다. 말하자면 온라인에서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오프라인 서평을 쓰게 된 것이다.”

 

 

 

이현우씨의 학문적 기반은 러시아 문학이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2004년 러시아 시인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지적 관심은 문학만이 아니라 칸트, 마르크스, 레닌, 니체, 레비나스, 벤야민, 데리다, 라캉, 지젝 등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에게까지 뻗어 있다. 지젝 전문가로도 알려진 그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라는 지젝 입문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알라딘 서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이 ‘서평’ 블로그가 아니라 ‘인문학’ 블로그로 알려진 이유다. 이씨는 자신을 ‘문학 극대주의자’라고 말한다.

 

“역사나 철학과 함께 문학을 인문학의 한 분과학문으로 보는 것을 나는 문학 극소주의라고 부른다. 나는 문학 극대주의자다. 역사, 철학, 문학이 다 큰 의미에서 문학이라고 본다. 작가라면 전체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고 사회에 대한 책임도 있어야 한다. 문학이 삶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추구한다면, 작품 하나를 읽기 위해서도 모든 게 다 필요하다. 플롯이나 테크닉을 다루는 정도로는 안된다. 내 경우에는 현상학, 해석학, 정신분석학, 수용이론 등 문학이론을 공부하면서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됐다.”

 

- 서평은 비평과 어떻게 다른가.

“비평은 독자들이 같은 책을 두 번 읽게,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다. 서평은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비평은 어떤 책을 이미 읽은 독자를 상대로 한다. 서평은 읽지 않은 독자를 상대로 한다. 넓게 보면 서평은 비평에 포함된다. 그런데 요즘엔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적어 비평을 읽는 독자들이 실종됐다. 상대적으로 서평의 역할은 커졌다.”

 

- 서평의 기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서평은 어떤 책을 읽고 싶도록 하거나, 읽은 척하게 하거나, 안 읽어도 되도록 해준다.”

 

- 서평을 쓸 때 원칙은.

“내 주관을 적게 넣는다. 이건 지면 사정과 관련이 있다. 서평 분량이 원고지 9~10장이다. 책 내용을 정리하고 나면 주관적인 판단을 섞는다고 해봐야 한두 문장이다. 다른 필자들은 주관적 느낌을 내용보다 더 중심적으로 다루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독자들이 책 내용을 맛보게 하는 데 중심을 둔다. 개성이 없다거나 호오가 분명하지 않다거나 하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서평은 어떤 책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정보다. 비평은 다르다. 어떤 책을 비평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는 정보가 안된다.”

 

- 독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어느 정도라고 평가하나.

“우스개로 10부 나가는 데는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출판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면 서평이나 지면 책광고의 영향력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고를 때 서평을 참고하려는 독자들의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독자들이 정보를 얻는 출처가 분산됐을 뿐이다. ‘로쟈의 저공비행’ 방문자는 하루 2000명 정도 된다.”

 

- 적합한 서평 분량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길어야 원고지 20장이다. 그 이상은 무리다. 30장 이상은 비평이다. 서평의 경우 100자평도 독자들에게는 유익한 참고가 될 수 있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저이(로쟈)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닌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책을 얼마나 읽나.

“대학이나 도서관,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강의도 해야 하고 서평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책 읽을 시간이 많진 않다. 다만 강의하고 서평 쓰고 잠 자는 걸 빼면 책 검색, 책읽기, 서평 쓸 책을 고르는 일이 내 일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출판사에서 내게 보내는 책은 일주일에 20~30권인데, 내가 직접 사는 책이 또 그만큼 된다. 그러니 내가 사는 책과 받는 책을 합하면 연간 2000권쯤 될 것이다.”

 

 

 

- 서평가는 평생직업인가.

“한시적으로 하는 일이다. 60대 서평가는 이상하지 않나. 3년 복무라고 생각했는데 2007년부터 잡으면 이미 3년을 초과해 장기복무하는 셈이 됐다. 서평집 독자가 절반씩 줄어들고 있다. 지금까지 서평을 모은 책은 두 권(<책을 읽을 자유>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 냈는데, 네 권까지 내면 더는 못 낼 것 같다. 자연적으로 은퇴하게 될 것 같다.”

 

 

 

- 앞으로의 계획은.

“비평 쪽으로 가려 한다. 책을 자세히 읽고 음미하며 읽는 것 말이다. 서평이라는 글쓰기 형식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서평 독자들을 어느 정도 규모로 만든 뒤 이 독자들과 함께 더 깊이 읽는 독서문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 독자들이 5000~1만명 정도 유지된다면 좋겠다. 읽을 만한 책이 나왔을 때 1만명의 독자는 있는 사회를 보고 싶다는 뜻이다.”

 

13. 12. 06.

 

P.S. 지난 가을에는 성대신문과도 인터뷰를 가졌는데, 기자들의 파업으로 뒤늦게 기사화됐다(http://www.skkuw.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46). 아무래도 서평가로서 인터뷰한 것이라 중복되는 질문들이 있고 답변도 대동소이하다. 몇몇 오식을 교정하여 옮겨놓는다.

 

성대신문(13. 12. 03) 서평블로거 '로쟈' 이현우 인터뷰

 

당신은 일주일에 몇 권의 책을 읽는가?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질문 앞에 서평의 고수가 나타났다. △당대의 서평가 △인문학 전도사 △지젝 전도사로 불리며 서평계에서 필명 ‘로쟈’로 유명한 이현우다. 책 좀 읽는 네티즌 사이에서 그는 전설이라 불린다. 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는 매일 2500명이 넘는 사람이 들렀다가며, 총 방문자는 300만 명에 이른다. 블로그 뿐만 아니라 온라인 서점과 각종 일간지에서도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서평가로 평가한다. ‘인터넷 서평꾼’이라 불리는 그에게 참 친해지기 힘든 ‘독서’와 ‘인문학’에 대해 묻는다.

 

■ 언제부터 그렇게 온라인 서평계에서 유명해졌나

인터넷 공간에 서평류의 글을 올린 활동은 1999년부터 했다. 초기에는 ‘비평고원’이라는 카페에서 서평을 쓰다가 온라인 서점인 ‘알라딘의 서재’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알라딘에서 추천을 많이 받으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데 몇 개 써본 마이리뷰가 반응이 좋았다. 리뷰를 그렇게 많이 쓴 것은 아닌데 책에 대한 잡다한 지식을 자주 포스팅 한 게 영향이 큰 것 같다. 

 

블로그에 서평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3~2004년부터다. 그때 처음 블로그가 생겨 지금 사용되는 ‘온라인 개인서재’와 함께 ‘북 블로거’, ‘서평블로거’ 등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온라인 서평꾼’이라는 별명은 2007년 한겨례 신문에서 처음 사용한 것 같다. 특별히 나를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더 없어서 검색하면 나만 뜬다. (웃음) 

 

■ 블로그에 가봤더니 신간들을 몇 권씩 주제별로 묶어서 추천하더라. 

그것이 ‘인터넷 서평꾼’들의 역할이다. 주제별로 묶어 여러 책을 한 번에 추천한다. 책들 사이의 관계,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그려 가이드처럼 추천해 주는 것이다. 도서관 사서의 역할과 같다. 모든 책을 다 읽지는 못한다. 읽는 것도 있지만 책을 그냥 ‘본다’. 책을 ‘보는’ 걸로는  한국에서 랭킹 안에 들 수 있다. (웃음) 책에 대해 검색하고, 책을 만지고 훑어보는 것은 거의 업자수준으로 한다. 일주일에 거의 수십 권을 그렇게 스크린한다. 이걸 책의 면접을 본다고 말한다. 사람을 그냥 보는 거랑 사귀는 거랑 다르지 않나. 사람을 만나보고 더 깊게 알아가는 것은 좀 더 여러 번 만난 후다. 면접이 통과돼 시간 여유가 생기면 그때 그 책을 깊게 만난다.   

 

■ 도대체 책을 얼마나 읽는 건가. 

너무 많이 받는 질문이다. 48시간을 사는 게 아닌 이상 보통사람과 비슷하거나 더 적게 읽는다. 유별나게 독서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어릴 때부터 숫기가 없어서 사람 사귀는 것보다 책을 사귀었다. 초등학교 때 책과 강렬하게 만난 기억이 있다. 하루 이웃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 서재에 전집이 꽂혀있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 아마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이었을 것이다. 그런 광경을 그 때 처음 봤다. 서점에 가본 적도 없어서 책이 세트로 50권 모여 있다는 것이 굉장히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전집을 4~5번은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냥 책 안에 있는 이야기들이 좋아서 읽었다.

 

대학교 때는 책을 사서 넘버링하는 습관이 있었다. 연말에 300권대까지 간 것을 봐서 하루에 한 권 꼴로 산 건데 요새는 더 산다. (웃음) 출판사에서 보내는 책이랑 개인적으로 사는 걸 합치면 일주일에 30권 씩 일 년에 1500~2000권 정도 새 책이 생긴다. 보관 문제 때문에 조만간 이사를 한다. 저번 주에 산 책을 못 찾고 있다. 심각하다. 

 

 

 

■“인문학을 읽기 전에 로쟈에게 물어보라”고 하던데, 어쩌다 인문학 전도사가 되었나

인문학 전도사는 좀 과장된 표현인 것 같다. 과거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라는 블로그 운영자와 죽이 맞아 인문학 관련 글을 많이 썼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 관련 포스팅을 많이 해서 이름이 알려졌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했다. 최근에 나온 인문학 책들을 많이 소개했고, 그다음엔 관련 이론서나 번역서가 나오면 그것에 대한 리뷰나 코멘트를 많이 올렸다. 그때 고전번역에 대해 독한 코멘트를 많이 했는데 그게 네티즌에게 약간 어필을 했던 것 같다. ‘신뢰할 만한, 참고할 만한 블로거’로 인식되는 데 말이다. 신랄한 비판의 글 때문에 출판사들의 미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물론 이건 책에 좀 관심 있는 네티즌에 한정된 이야기다. 아마 날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웃음)

 

■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의 방한으로 해설서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 더 유명해졌다. 본지에서도 그를 다뤘는데 어쩌다 지젝의 전도사로 불리게 되었나

지젝의 오랜 독자였다. 96년 국내에 처음 소개됐는데 본격적으로 읽은 것은 2000년 정도부터다. 읽다가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아서 지젝의 모든 책을 섭렵했다. 이유를 물어본다면 현상에 대한 문제를 다시 정의하게 만드는 지젝의 철학이 맘에 들었다. 책을 읽고 나면 사회문제 저반의 현상이나 사태를 지젝의 눈을 통해서 다시 보게 된다. 세계에 대해 통찰하면서 다시 눈뜨게 되는 느낌이 든다. 초기 번역본들의 질이 좋지 않아서 번역서로는 이해가 잘 안 되더라. 그래서 오역에 대한 지적도 하고 번역도 직접 하면서 많이 떠들다 보니까 어쩌다 전도사가 됐다. 그러다 번역서를 넘어 그의 사상을 다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쓰게 됐다.

 

■ 요새 다들 인문학 시대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나는 인문학 자체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태도를 지닌다. 인문학의 주류는 서양 인문학이다. 서양에서 인문학은 최상위 계층을 위한 교양교육이었지 중산층이나 빈곤층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백년 전 우리는 10% 정도만이 책을 읽고 70%가 문맹이었다. 한국사회에서도 독서가 중산층과 빈곤층으로 확장된 것은 두 세대가 채 되지 않는다. 빈곤층을 위한 희망인문학이 가능해진 것도 최근에 와서다.

 

그럼에도 인문학은 또 다른 계급투쟁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1:99의 경쟁사회에 산다. 1명의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 시스템을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우리에겐 없어 보인다. 우리가 그 문제의식 자체를 아예 차단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우리는 대부분 99%의 입장이다. 이 99%가 배우는 인문학은 현재의 부당한 사회 시스템에 대해 저항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오히려 경쟁력이 될 것이다. 생존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가치 있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라면 말이다.

 

■언제까지 계속 서평을 쓸 것인가

서평은 어떠한 중대한 사회적 역할 같은 것이다. 지식사회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으로선 대체할 만한 인물이 매우 드물다. 십 년 동안 책을 검색하고 읽는 것을 누가 하겠나. 좋아서하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 일을 대신해줄 후임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교체가 될 것이다. 서평가는 절대 어렵지 않다. 책을 읽고 남들이 읽기에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면 서평가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책 읽기 싫어하는 성균인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이 질문은 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책을 안 읽으면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지가 자기의 선택이라고 착각한다. 책을 안 읽는 건 본인의 선택이라면서. 하지만 대개 책을 안 읽는 경우보다 ‘못’ 읽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을 착각하는 건 안쓰럽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입맛에 맞는 작가를 세 사람 정도 전집으로 읽어라. “나는 책과 인연이 없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작가는 읽어”라고 하면 나름 괜찮은 대학생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여도 되고 과학자, 철학자여도 된다. 그것조차 부담된다면 해설서나 서평집을 읽어라. 무슨 책을 읽을지 로드맵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일단 읽어라. 독서의 효용이나 즐거움에 대해서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독서가 안 맞는다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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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25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자음과모음, 2013)를 서평감으로 골라서 썼다. 바우만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읽고 음미할 만한 통찰과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번역과 편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쉽다(특히 앞부분의 번역이 좋지 않으며 부분적으로 본문과 인용문이 구별돼 있지 않은 편집도 독서를 방해한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의 모든 책'이다. 더 밀리기 전에 부지런히 읽어두어야겠다...

 

 

 

시사IN(13. 12. 07) 정부가 거짓말을 고안하는 이유

 

출간 종수가 한 가지 기준이 된다면 올해의 저자로 가장 유력한 이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2002년부터 국내에 소개된 단독 저서가 열다섯 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일곱 권이 올해 출간됐다. 직접적인 계기는 2012년 여름에 나온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낸 덕분으로 보이는데, 1925년생으로 아흔에 가까운 노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하게 저서를 펴내고 있어서 앞으로도 당분간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될 듯싶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쓴 바우만의 일기를 묶은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자음과모음)는 이 괄목할 만한 지식인 학자의 사색과 성찰의 깊이를 아주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라는 제목이 붙은 건 일상의 고백보다는 동시대의 이슈들에 대한 성찰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일기란 형식을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고백에 따르면 바우만은 ‘하루 복용량’과도 같이 매일매일 글을 쓰지 못하면 고통에 빠지는 글쓰기 중독자이기도 하지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슈들도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은퇴를 거부하지만 신체의 나이는 그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충분한 능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일기는 그런 욕구와 여건 사이의 타협책이다.

 


우리시대의 현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프랑스의 사례를 보자. 바우만에 따르면 21세기는 ‘밀레니엄 버그’라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거짓말과 함께 도래했다. 종말론적 상상이 판을 쳤지만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중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실제로 안정적인 직업과 수입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해졌다. 이런 불안과 혼란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가 2002년에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던 니콜라스 사르코지다. 그는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여 대중의 지지를 끌어냈다.


사르코지는 어떤 일을 했던가. 그는 사회적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알아냈다고 말하고 교외의 빈민구역(방리유)을 지목했다. 이 ‘악의 근원’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그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마치 작전과도 같은 정부의 조치가 미디어를 통해서 보도되면서 정부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사르코지는 2007년에 프랑스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됐고, 그의 후임 내무장관 역시 사르코지의 수법을 똑같이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안전하지 못한 사회와의 전쟁’이 두 번 반복되면서 국민들은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다. 사르코지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민의 눈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지만 한시적으로라도 그 관심을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에서 돌리게 할 수는 있었다. 그사이 또 다른 거짓말을 고안해내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부의 약속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무관심을 키움으로써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사회적 불안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극우 근본주의의 기반을 강화한 것도 사르코지의 성과다. 이와 유사한 일이 베를루스코니 정부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이명박 정부 시대의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아니 과거형으로만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우리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까. 그런 점에서 여전히 바우만에게서 배울 게 아직 많다. 다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의 일부 부정확한 번역이 그러한 배움에 장애가 돼 아쉽다.

 

13.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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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헤밍웨이의 걸작 <노인과 바다>를 읽은 소감을 적었다(분량상 일부밖에 다루지 못했다). <노인과 바다>를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란 시각에서 바라본 것은 조르주 바타유의 견해에 빚진 것으로 그는 '헤겔의 빛에 비춰본 헤밍웨이'(1952)란 작가론을 쓴 바 있다. 이에 대한 소개는 김윤식의 <비평가의 사계>(랜덤하우스, 2007)를 참고했다.

 

 

한겨레(13. 12. 02) 노인과 청새치의 존재 증명 투쟁

 

‘헤밍웨이가 쓴 최고의 이야기’로 꼽히는 <노인과 바다>는 알다시피 혼자 고기잡이를 나간 노인이 오랜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를 만나 다 뜯기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기와 함께 귀항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런 줄거리가 말해주는 건 별로 없다. 작품의 말미에서 거대한 꼬리와 하얀 등뼈만 남은 청새치를 두고 멋진 상어라고 감탄하는 관광객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도 자칭 ‘이상한 노인’을 따라나서 그가 무엇을 상대로 어떻게 사투를 벌였는지 직접 목격하는 게 최선이다.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산티아고 노인은 사십일까지는 동행하던 소년의 부모가 이른 대로 이젠 운수가 바닥이 난 것처럼 보인다. 전설적인 어부였는지 모르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 그는 늙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난다. 그는 85가 행운의 숫자라고 믿으며 다시금 출항한다. 그는 거대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먼바다에 가서 깊이 낚싯줄을 드리운다. 예상을 훌쩍 넘어선 대단한 놈이 미끼를 물고 사흘간의 쟁투가 벌어진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굉장한 물고기’와의 무모한 사투는 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랑하고 존경한다고까지 말하지만 노인은 상대인 청새치를 죽이려고 한다. 생계는 부차적이다. “나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 놈에게 보여주고 말겠어”라는 게 그의 결심이다. 즉, 그는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헤겔 식으로 말하면 누가 주인인지를 겨루는 ‘인정투쟁’이다. 생사를 건 이 투쟁에서 비켜나 패배를 자인하면 노예로 전락한다. 더불어 이 투쟁에선 과거의 증명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이며 매번 새롭게 자기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서로를 닮은 이상한 노인과 이상한 물고기의 자존심까지 건 쟁투가 갖는 의미다.

 

 

마침내 수면으로까지 올라온 거대한 청새치를 작살로 꽂아서 죽인 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난 지쳐 빠진 늙은이야. 하지만 내 형제인 저 물고기를 죽였고, 이제부터 고된 잡일을 해야만 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인정투쟁이 주인의 노동이라면 나머지 뒤치다꺼리는 노예의 노동이다. ‘고된 잡일’(문학동네)은 ‘노예의 일’(slave work)을 옮긴 것인데, 다른 번역본에서는 ‘궂은일’(시공사), ‘잡일’(열린책들), ‘노예처럼 더러운 노동’(민음사) 등으로 옮겼다. 청새치가 흘린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와의 싸움도 마찬가지로 뒤치다꺼리라고 해야 할까. 똑같은 사투처럼 보이지만 자기의 소유를 방어하기 위한 싸움과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은 종류가 다르다. 통상 바다는 생존투쟁의 공간이지만 노인에게는 인정투쟁의 공간이기도 했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게 노인의 신념이자 작품의 주제다. 노인과 대등하게 맞섰던 청새치는 죽음을 맞았지만 그 또한 패배하지 않았다. 상어들에게 계속 전리품이 뜯겨나가는 중에도 노인이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면 상어 놈들과 어떻게 싸웠을까를 생각하며 즐거워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둘은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우리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사는 노예일 수 없다는 걸 노인은 온몸의 고투로 보여준다.

 

13.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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