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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서 '2008년 학술출판 전망' 기사를 옮겨놓는다. 올해의 '수확'을 미리 훑어볼 수 있어서 유익하다. 이미 예고돼 있던 책들도 있고 처음 소식을 접하는 책들도 있다. 돌이켜보면 작년에 학술서나 이론번역서 출간이 '빈곤'했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데, 라인업을 보니 올해는 사정이 훨씬 나이질 수도 있겠다.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서 '행복한 고민'(어쩌면 고난!)에 빠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수신문(07. 12. 31) 실증적 역사·한국철학 계보·한국사회 방향 등 ‘기대주’

2008년 학술 출판의 동향을 전망하고자 총 31개 출판사의 출간예정 주요 도서 500여종의 목록을 받았다. 이미 계획되고 있는 책들만 조사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8년 출판되는 분량은 두 배 이상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서들을 중심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들이 집약되고 있다면, 해외서들은 새로운 학자들과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연구의 지평을 확장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의 출판지원 사업에 힘입어 출간계에 뜸했던 신진연구자들도 소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서와 해외서의 비중을 살펴보면, 국내서가 270여종으로 해외서 260여종에 비해 약간 앞섰다. 비등한 비율이지만, 해외 학자들의 유명세에 기대던 이전의 출판 경향에 빗대면 국내 학술서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인문서 중에는 국내로 시선을 맞춘 한국사 연구서들이 두드러진다. 특히 기존의 역사연구가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사건사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면, 이들은 문화적·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화여대 출판부가 준비하는 ‘이화한국학총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올해 소개되는 2차분은 이혜순 등이 『조선중기 예학사상의 사회적 수용과 일상문화의 변화』로, 김영미 등이 『고려시대의 일상문화』로, 이배용 등이 『일제시대의 일상문화』로 한국의 일상사를 연구했다.

이화여대출판부의 시리즈가 고대부터 일제까지를 집약했다면, 서울대출판부와 권태억 등은 근대 시기를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서울대출판부)로 준비하고 있다. 전우용은 서울이라는 공간을 철학적, 역사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기술하는 『서울이야기』(돌베개)로 문화사를 그려내고, 『청년의 역사』(이기훈, 역사비평사)도 출간된다.



조선시기 일상민중의 삶을 고스란히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지음)에 뒤이어 당대의 특정 풍속으로 시대를 들여다보는 저작들도 밀려올 예정이다. 전봉관이 『경성자살클럽』(살림), 이민주가 『조선의 패셔니스타』(살림)에 초점을 맞췄다면, 강명관은 조선시대 열녀(『열녀의 탄생』, 돌베개)에 내포된 역사적 의미와 모순 등을 설명한다.

실증(實證)을 표방하는 흐름에서 정치사회학적 역사연구서들로는 지난해에 시작된 역사비평사의 ‘20세기 한국사 시리즈’가 『전두환과 제5공화국』(정해구 지음), 『한국전쟁』(박명림 지음), 『식민지배정책사』(이승렬 지음) 등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관점에 도전하는 역사서도 나온다. 정일준은 『대한민국 만들기』(새물결)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넘어서는 건국사 서술을 시도해 주목된다.

한국철학·사회철학 세우기
철학계는 ‘서양철학 되풀이’라는 자성을 반영하듯 한국철학사와 사회철학 연구서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제이북스는 신남철의 『역사철학』의 재출간을 준비했다. 월북철학자로 국내에서 비교적 조망 받지 못해온 그는 서양철학을 수용하면서 ‘신체적 인식론’이라는 독특한 실천적 역사철학을 정립한 바 있다. 한국 철학사의 단절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이정우는 『소운 박홍규와 서양철학사』(그린비)로 한국철학계의 거두인 故박홍규의 사상을 탐색했다. 이밖에도 한국 철학계를 달궜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진경, 그린비)과 『한국철학에세이』(김교빈, 동녘), 『삶과 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녘)이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사회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김상봉과 홍윤기를 중심으로한 철학자앙가주망 네트워크는 잡지 <철학의 전선>(돌베개)을 창간, 철학이 상아탑의 공리공담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견인하고 주도하는 담론임을 선포하고, 1970~80년대 『창작과 비평』이나 1960년대 프랑스 『텔켈』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생존해 있는 우리 학자의 학문세계를 논하는 책들도 새롭게 다가온다. 생각의 나무에서 출간하는 『김우창 전집』(전20권)과 함께 한국학술협의회는 아카넷과 ‘석학 연속강좌 연구서’를 시리즈로 기획, 그 첫 권으로 『김재권과 물리주의』(하종호 외)를 내놓는다. ‘한국의 학자’라는 이름이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사회과학계는 2007년을 달궜던 한국사회 진단과 새로운 진로 모색이 흐름을 이어갈 전망이다. 먼저 서울대출판부가 출간할 『외환위기 10년, 한국사회 얼마나 달라졌나』(정운찬 외 지음), 『외환위기 10년, 한국 금융의 변화와 전망』(김광억 엮음)은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의 한국사회의 경제적 변화를 분석했다.

창비에서 출간예정인 『민주화 이후의 한국자본주의』(이병천 지음)는 87년 민주화 운동을, 후마니타스에서 나오는 『금융세계화, 자본주의 모델, 그리고 한국경제』(전창환 지음)는 세계화를 기점으로 한국사회의 경제적 변화를 천착한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는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비교연구로 접근했다.

한울에서 펴낸 ‘아시아 민주주의 비교연구 시리즈’는 2008년 1차분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적 독점’의 변형과정』(조희연·김동춘 엮음), 『민주화 이후 아시아 민주주의와 ‘정치적 독점’의 변형과정』(조희연 엮음)을 선보인다. 대안의 빈약함이 2007년을 마무리한 가운데 아르케는 ‘대안발전모델 시리즈’를 기획했다. 먼저 ‘생태사회학적 발전모델’을 모색(『생태·사회적 발전을 위하여』, 구도완 외 지음)하고, 귀감이 되는 해외 사례들(『생태·사회적 발전의 해외 현장을 찾아서』, 오용선 외 지음)을 찾는다.

오늘날 한국사회 지식인의 성찰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에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 마련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기획 시리즈는 후마니타스를 통해 『한국지식인의 초상』으로 나올 예정이다.

학진의 저술지원사업들 책으로
올해는 학진의 저술지원사업들이 구체적 성과를 쏟아낼 예정이다. 학진의 지원정책을 둘러싸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긴 하지만, 신진연구자들이 소개되고 있어 반갑다. 아카넷은 올해부터 학진의 박사논문출판지원사업 선정작을 ‘한국인문사회과학의 미래 시리즈’로 기획, 출판한다.

『가다머에서 변증법적 윤리와 해석학』(정연재 지음), 『호남지역 풍물굿의 잡색놀음 연구』(이영배 지음) 등 학문후속세대들의 사유와 함께 꼼꼼히 정리된 자료들도 도움될 만하다. 명저번역지원 사업의 경우 서양사는 나남에서, 동양사는 소명출판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박승찬 옮김), 헤겔의 『철학백과전서 강요 제2부 자연철학』(김성호 옮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김도형 역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번역, 묵직한 사상가들부터 최신이론까지
2008년 출간되는 번역서는 저명한 사상가들의 저작과 함께 새로운 학자들과 최신이론의 도입도 두드러진다. 생각의 나무는 영국의 지성사학자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지성사』를 처음으로 완역한다. 새물결은 현대사상가들을 조망하는 ‘What’s up 총서’를 기획,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고』(한보희 옮김),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현성환 옮김), 지오르지오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1』을 내놓는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자끄 라깡의 『에크리』(이종영 외 옮김), 『세미나 11』(맹정현 옮김)도 준비했다. 그린비는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역작으로 준비 중이다. 올 하반기 『기다림, 망각』(박준상 옮김), 『우정』(박규현 옮김)을 시작으로 블랑쇼 컬렉션을 만들 계획이다. 도서출판 길은 독일어본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강신준 옮김)을 번역해 5권으로 출간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함께 프랑스 철학계에서 ‘알튀세르의 후예’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비교적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던 자끄 랑시에르의 책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양창렬 옮김), 『불화』(진태원 옮김) 도 도서출판 길이 소개하며,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들』(김정한 외 옮김), 프레드릭 제임슨의 『미래의 고고학』(이경덕 옮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새 깃발 아래서』(서지원 옮김)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창비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의 보편주의』(김재오 옮김)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매진은 지난 달 출간해 화제를 모았던 스타즈터클 시리즈 『일』을 올해 『희망은 마지막까지 남는다』로 이어간다. 을유문화사의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스트라빈스키』(장준호 지음), 『뭉크』(수프리도 지음), 『프랭크 시네트라』(앤써니 써머스 외)를 준비했다.

이제이북스는 정암학당과 그리스 고전을 계속 번역해 출간한다. 플라톤 전집 중 올해 소개될 책들은 『에우티데모스』, 『메넥세노스』, 『고르기아스』 등 6권, 아리스토텔레스 선집은 『자연학』이다. 지난해까지 22종의 현대사상의 모험 시리즈를 내놓은 민음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사랑의 역사』 재번역, 김인환 옮김), 레이몬드 윌리엄스(『키워드』, 김성기 옮김), 미셀 푸코(『말과 사물』 재번역, 이규현 옮김), 자끄 데리다(『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의 책들로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도 동양경전류의 주해서들이 열풍을 이어가고, 『바쿠닌 평전』(하승우 지음, 이매진), 『뿌쉬킨 평전』(손유택, 소명출판), 『여운형 평전2』(역사비평사) 등의 묵직한 평전들도 눈에 띤다. 2008년 ‘주요학술서’는 이제 연구자들의 관심과 논쟁의 몫으로 남았다.(김혜진 기자)

 
08.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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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주 바타이유의 사진이 모리스 블랑쇼의 것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네요.^^

로쟈 2008-01-02 17:49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교수신문에서 착오를 일으켰네요.^^; 블랑쇼는 워낙에 은둔적이어서 사진이 별로 없을 텐데요...

람혼 2008-01-02 23:29   좋아요 0 | URL
네. 블랑쇼의 사진은 젊은 시절의 것을 제외하고는 아마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밖에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블랑쇼를 대상으로 하는 파파라치라니, '인문학적' 파파라치인지도...^^

로쟈 2008-01-03 11:20   좋아요 0 | URL
'블랑쇼'가 잘려나갔네요.^^. '모리스'만 남았습니다...

사량 2008-01-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박규현 씨... 레비나스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 번역을 생각하니 걱정만 앞섭니다.;; 부디 기우이길..ㅜㅜ

로쟈 2008-01-02 23:05   좋아요 0 | URL
역자 풀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아마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 같아요...

Ritournelle 2008-01-0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의 책 두 권 이외에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어요. 인터넷 교보문고에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어 곧 출간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1-02 23:05   좋아요 0 | URL
네, 인간사랑에서 나오더군요. 안 그래도 지난주에 복사한 책이라 번역본이 나오면 곧바로 읽어볼 참입니다...

드팀전 2008-01-0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책들이네요..잡지<철학의 전선>과 이름만 들어 유명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그리고 재작년에 한번 뵌 적이 있었던 강신준 교수의 <자본>이 기대가 됩니다.강 교수님 그 때 뭔가 작업이 있어서요 라고 했는데..그게 <자본> 재번역이었던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2007년에 나올 지 알았는데 늦어진 건지 ..

로쟈 2008-01-04 18:34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하는 타이틀이 몇 개 되는데, 사실 이 리스트의 서너 배는 나와줘야 할 텐데요.^^;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학술출판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 네댓 가지 경향을 짚어보고 있는데, 2007년만의 도드라진 트렌드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학술적으로 중요한 업적에 속하면서도 '2007년의 책'이라고 할 만한 건 드물지 않나 싶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기사는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24) 2007년 학술출판 트렌드 회고

학술출판이 학술 동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학술출판과 학술 동향이 조응하는 모습은 대략 3년 정도의 시간을 전체적으로 살필 때 비교적 온전하게 조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어떤 학술 도서가 각별히 주목을 끌거나 논쟁을 촉발시키는 경우는 전체 학술 도서나 분야에서 극히 일부다.

바꿔 말하면 주목이나 논쟁 촉발과 상관없이 어떤 학술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들도 적지 않다(이 글은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거나 일반 독자들에게도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졌거나, 논쟁과 상관있는 도서 위주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 또는 독서 범위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여러 한계들을 염두에 두고, 올 한 해(2006년 12월 이후 출간) 학술출판에서 주목할 만한 동향이나 개별 저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 근대성과 민족주의 등의 주제를 천착하는 책이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휴머니스트)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박선미 츠쿠바대 전임강사의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 정여울이 번역한 토론토대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등이 주목 받았고, 장문석 한양대 연구교수의 『민족주의 길들이기』(지식의 풍경)와 이용일이 옮긴 한스 울리히벨러의 『허구의 민족주의』(푸른역사) 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에서 『동아시아 영화의 근대성과 탈식민성』(이현하 외, 연세대학교출판부), 김려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1901-1945년의 한국영화사를 되짚다』(삼인), 김병희 서원대 교수(광고홍보학과), 신인섭 한림대 객원교수(언론정보학부)의 『한국 근대 광고 걸작선 100: 1876-1945』(커뮤니케이션북스) 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제로서의 매체와 방법으로서의 매체를 포괄하는 문화와 매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일종의 ‘문화적 전환’이 이 주제에서도 두드러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둘째, 현재 우리 사회, 경제, 정치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성격의 책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 시스템을 모색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박상훈·박찬표·최장집, 후마니타스)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특히 정당 정치 문제, 현실 민주주의의 과제 문제 등에서 정확한 쟁점을 제기해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길), 당대비평 편집위원회가 엮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웅진지식하우스) 등이 이 주제에서 주목할 만한 책들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주제에 관한 논쟁이나 연구는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새로운 체제 모델에 대한 모색이, 새 정권 출범과 함께 현실 정치권의 소용돌이와 맞물려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이념적 지형도의 재편과도 상관있기 때문에, 특히 2008년 한 해에 관련 학계가 더욱 바빠질 가능성이 높다.



셋째, 동아시아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다. 물론 동아시아를 주제 범위로 잡는다고 해도 책마다 색깔은 가지각색이다. 예컨대 강상규의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논형)이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연구 프로젝트 성과물인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 근대전환기 동아시아의 자기인식과 대외인식』(성균관대학교출판부) 같은 책이 있는가 하면, 송기호 서울대 교수(국사학과)의 『동아시아의 역사분쟁』(솔) 같은 책도 있으며, 일본 이와나미(岩波)에서 나온 『아시아 신세기』 8권을 번역한 책(한울)도 있다.

지금까지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의 상당 부분은 동아시아 공동체, 즉 일종의 지역적 실체 구성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사회과학적 담론이거나(시민운동 연계 차원에서부터 정부의 정책적 고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보인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 구축이라는(‘역사 전쟁’으로도 일컬어지는 갈등 요인을 안고 있으면서도) 일종의 문화 담론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실체성과 정체성 구축을 지향하는 목적 지향적 담론이었다.

그러나 목적이라는 큰 숲에 가려진 세부적인 나무들이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과)의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문학동네)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지향하기에 앞서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 걸친 동아시아의 계보학이 치밀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고전 번역서다. 이제이북스에서 펴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전 번역서들, 학진 학술명저번역총서로 한길사에서 펴낸 김창성 번역의 키케로 『국가론』, 성염 번역의 키케로 『법률론』,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사마광 『자치통감』(삼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아이네이스』와 『일리아스』(숲) 개역판, 김난주가 번역하고 김유천이 감수한 『겐지 이야기』(한길사), 김필수 외 3인이 옮긴 『관자』(소나무) 등이 올 한해 주목할 만한 고전 번역서였다.

마지막으로, 학술 번역에서는 두 책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길 출판사에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게오르그 짐멜 선집이다. 지금까지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근대세계관의 역사』,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등이 나온 이 선집 시리즈는, 우리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의 흐름에서 하나의 자양분으로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여성이 번역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루만의 후기 저작들이 단편적, 간헐적으로 번역 출간됐지만 그의 사회학 이론의 핵심을 담은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루만 연구 및 그에 바탕을 둔 이론적 모색을 위한 중요한 레퍼런스를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사회학 이외 분야에서 루만의 이론을 원용하거나 참고로 삼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에서나 학문적 성찰의 초점이 일종의 확장된 ‘나’에 대한 체계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에 있었다 하겠지만, 2007년을 돌이켜 보면 그러한 성찰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의 근대성, 우리의 민족주의, 우리의 오늘날 현실,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등이 학문적 성찰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가 결코 고립돼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학술서이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깝지만, 이옥순 외 6인이 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와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 책은, 세계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 온 학자들이 각자의 학문적 전문성을 폭넓은 대중과 유효적절하게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이해에서 다시 ‘우리’에 대한 성찰로 한 단계 高揚해 되돌아오는, 학문적 성찰의 되먹임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2008년에는 바로 그런 성찰이 더욱 넓고 깊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변명하자면 문화예술이나 과학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도서 동향에 관해서, 필자의 무지와 게으름 탓에 사실상 생략하고 말았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12. 29.

P.S. 얼핏 어림에도 기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건 강명관 교수의 저작들이다. 올해 한꺼번에 네 권의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동료 학자들의 경탄과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최근에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이 시사IN 선정 '올해의 책'에 꼽히기도 했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1),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소명출판, 2007)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의 학술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의 학자'로 기억해둘 만하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2. 24) [48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조선후기 문학에서 자생적인 근대문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연암이 그것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기존의 문학사를 부정하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돌파해야할 시점입니다.”

강명관 (48)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에서 철저하게 20세기적 기준인 ‘민족’과 ‘근대’로 수렴하는 한국문학사의 구성논리를 해체한다. 그가 씨름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후기 문학의 큰 봉우리로 꼽히는 박지원, 이덕무, 이옥, 이용휴 등의 비평론과 창작론들이다. 자생적 근대문학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돼온 이들의 문학이론들이 실은 양명학적 사유, 구체적으로 명대 중국 공안파 사유의 자장 안에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편다.

강 교수가 책의 서문에서 “일종의 모험”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로 그것은 도발적인 작업이었다. 책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태도, 개성의 강조 등 근대성의 코드로 해독돼온 이들 조선후기 문학가들의 사유가 실상 ‘우리 바깥’의 것을 토대로 구축돼왔음을 입증한다. 즉 우리가 떠받드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사유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을 내세우는 의고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17세기초 등장한 명대의 문예이론가들인 원종도, 원굉도, 원중도 등 공안파의 사유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암이론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연암의 문학사상과 공안파의 사상과의 유사성에 주목한 이론은 있었지만 그는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연암비평이 공안파의 논리를 절취하고 있음은 비밀이 아니다” 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책과 함께 펴낸 <농암잡지평석>,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안쪽과 바깥쪽> 역시 이 같은 궁리의 결과물들이다.

그가 이같은 문제의식을 품게 된 것은 1992년께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홍신유와 이언진의 문집에서 공안파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창작과 비평이 대부분 공안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관련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책으로 나오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강 교수의 책이 발표된 후 학계에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그의 작업들은 결과적으로 국문학사에까지 완고하게 영향을 끼쳐왔던 내재적 근대화론이 빚어낸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강 교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서구 부르주아적 근대를 더 이상 우리 근대의 모델로 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 근대성의 단초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돼왔던 조선후기의 소설들이 사실은 중세적 논리를 보급하는 매체로 쓰였음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도발’은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다.(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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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836). 주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아벨 강스의 인용문 번역과 관련하여 '로쟈'도 언급돼 있기에 눈길을 끈다.

컬처뉴스(07. 12. 28)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하나이다. 벤야민의 비평 대상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그래서 벤야민은 그에게 “주요 비평 분야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만한 몇 안 되는 사상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내 생각으로는 좀 거슬러 올라가면 롤랑 바르트, 보다 최근에는 움베르토 에코, 근래에는 슬라보예 지젝 정도가 이 정도 ‘급수’에 근접해 있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벤야민은 “저주 받은 작가” 군(群)에 속해 있었다.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지난 2005년까지 국내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벤야민의 책으로는 차봉희 교수가 편역한 『현대사회의 예술』(문학과지성사/1980), 이태동 교수가 옮긴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1987), 반성완 교수의 편역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1992), 그리고 박설호 교수가 옮긴 『베를린의 유년 시절』(솔/1992)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02년부터 벤야민을 괴롭히던 저주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2002년 이래로 적어도 5권의 벤야민 관련서가 국역되더니 2005년부터는 벤야민 자신이 직접 쓴 『모스크바 일기』(1926), 『일방통행로』(1928), 『파사젠베르크』(1927~40)가 국역됐고, 급기야는 『해시시에 관하여』(1927~34) 일부까지 소개됐다.

총 10권으로 출간이 예고된 ‘발터 벤야민 선집’은 이렇게 서서히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된 벤야민의 사유 전체를 일괄할 수 있도록 해줄 ‘사건’에 해당하는 기획물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이 선집의 완간과 더불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벤야민의 초기 주저 『독일 비애극의 원천』(1928)까지 우리에게 도착한다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한국어’로 얘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 사후 약 70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오빠’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비평가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했듯이, 우리는 독자로서의 우리 역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독자로서의 역할? 그건 어느 사상가를 범접하지 못할 스타로 대접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호칭은 ‘형’이나 ‘누나’가 아니라 ‘오빠’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벤야민에게 말을 걸기 위한 첫 번째 수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 그 이상의 수다는 다른 독자들에게 맡기고 그럼 이제부터 내 역할을 수행해 보도록 하겠다. 벤야민 선집 1차분에 수록된 수십 편의 논문과 아포리즘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들춰본 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논문은 벤야민의 논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선집에는 이 논문의 제2판(1936년)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이 논문은 총 세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동안 국내에는 제3판만이 소개됐다. 이 세 판본의 구구절절한 역사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를 참조하라).

그러나 특히 내가 이 논문을 먼저 들춰본 이유는 몇몇 지인들과 인터넷 카페/블로그에서 이 논문의 국내 번역본에 대해 한참 떠들어댔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골자는 기존 번역본들의 군데군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논문이 재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그때 당시 문제가 됐던 부분이 어떻게 번역됐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이 또한 여기에서 반복하기에는 구구절절 기나긴 얘기이니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은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님의 블로그를 참조하거나 다음카페 ‘비평고원’ 혹은 ‘발터 벤야민과 현대’의 관련 포스트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지인들과의 수다 중에 가장 많이 논란이 된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1939) 두 번째 단락에서 벤야민이 인용한 프랑스 영화감독 아벨 강스(Abel Gance, 1889~1981)의 말이었다. 그 구절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맨 앞의 문장을 한국어본과 일본어본 옮긴이들과는 달리 영어본, 이탈리아어본, 러시아어본 옮긴이들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로 옮겼다는 것. “영화화될 것”과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두 표현은 전혀 상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논란이 될 수밖에.

벤야민의 원문은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인데, 이 구절은 인용이어서 그런지 세 가지 판본이 모두 똑같다. 당시에는 독일어 동사 “werden filmen”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원문의 표현인 “feront du cinéma”에도 “영화를 찍을 것이다”와 “영화배우로 활동할 것이다”(즉, “영화화될 것이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 있었던 관계로,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 대 영어본-이탈리아어본-러시아본 옮긴이들의 기이한 대결 구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기존의 한국어본-일본어본과 똑같이 옮긴 새로운 판본을 읽다가, 문득 우리는 강스의 텍스트 자체를 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요컨대 우리는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만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확인했을 뿐, 벤야민이 말줄임표로 생략한 강스 텍스트의 ‘전후 맥락’은 전혀 읽지 않았던 셈이었다. 그래서 마침 프랑스에 유학 중인 지인에게 부탁해 벤야민이 인용한 강스의 텍스트, 「이미지의 시대가 왔다」(1927) 원문 전체를 받아봤고, 흥미로운 결론을 얻게 됐다. 먼저 벤야민의 강스 인용문 전후 맥락을 모두 옮기면 이렇다(굵게 칠한 부분은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으로서, 지면관계상 원문은 생략한다. 역시 관심 있는 분들은 내 개인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virilio73).

영화는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할 것이다. … 인간은 운율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빛을 가지고 시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오페라] 가수를 보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 기쁘도다. 「발퀴레의 기행(騎行)」도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를 찍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국은 같으면서도 더 광대해질 것이니까. 예술적 가치들의 엄청나고 격렬한 전복, 그 어떤 것보다 더 커다란 꿈들의 급작스럽고, 화려한 개화. … 진실로 이미지의 시대가 왔노라! 모든 전설들, 모든 신화와 모든 이야기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및 종교 자체들, 역사의 모든 위대한 형상들, 수 천 년 이래 대중들의 상상의 객관적 반영들, 이 모든 것들은 빛나는[빛을 통해 영화화되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영웅들은 우리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쇄도할 것이다. 모든 꿈 같은 삶과 모든 삶의 꿈이 [필름의] 감지띠 위로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아니 어쩌면 더 『오뒷세이아』를 그 감지띠에 인쇄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위고식의 농담만은 아니다.
 
이렇게 텍스트 전체를 보면 확실히 강스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으로서는 영화에 출연한다거나 영화화되기보다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어울릴 뿐만 아니라 각자의 “왕국”을 키울 가능성도 더 높을 테니. 게다가 서구 예술의 시조격인 호메로스마저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찍을 태세인데 말이다!

아마도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은 두 번째 인용 부분에서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 등이 영화화될 것이니 인용문 내의 대구(對句)를 살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역시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도 아니면(혹은 바로 이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전문가로서의 지식이 자충수가 된 격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최초 판본이라고 할 만한 제1판(1935년)에서 벤야민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인용 부분 앞에 “이러한 현상은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역사영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제2판과 제3판에서 삭제된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은 (비록 인용문 상에서이긴 하나) 확실히 뒤이어 언급되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등도 클레오파트라, 벤허,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처럼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모든 판본에서 강스의 말을 인용한 뒤에 이렇게도 말한다. “물론 그[강스]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궁금증. 왜 벤야민은 자신이 염두에 둔 “그런 뜻”이 아닌 강스의 말을 (스스로 밝히면서까지) 굳이 인용했을까? 그건 단순한 수사였을까, 아니면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매혹적인 표현이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벤야민의 고의적인 해석? 

여기에서 나의 결론, 혹은/그리고 가설 하나. 혹시 벤야민은 이 시기에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자신의 인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을 만큼? 아마도 벤야민은 자살 시도(1932년) 뒤의 침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얻은 말라리아(1934년)에서 완치되지 않았던 것을 수도 있으리라. 그도 아니면 메모를 잘못해놨을 수도 있다(벤야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메모광이었으며, 그의 미완의 대작 『파사젠베르크』 역시 일종의 메모모음집이다). 요컨대 벤야민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그 때문으로라도 ‘오빠’라고 불려야 할 만한?

(마지막으로) 아마도 언젠가는 벤야민 선집 2권의 부록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관련 노트들」에서 누락된 또 다른 노트들이 발견될 지도 모를 일이다. 『파사젠베르크』의 원고뭉치가 벤야민 사후 40여 년이 흐른 1981년 7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햇빛을 보게 됐듯이 말이다. 일단은 베를린예술아카데미가 2007년부터 매년 두 권씩 총 20권으로 발간할 계획을 밝힌 새로운 벤야민 전집을 기다려볼 일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29.

P.S. 참고로, 본문과 관련있는 페이퍼는 '벤야민을 좋아하세요?'(http://blog.aladin.co.kr/mramor/706506)와 '벤야민과 아벨 강스'(http://blog.aladin.co.kr/mramor/125758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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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벨 강스는 이렇게 말했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4 18:08 
    서점 두 곳에 들러 이주의 관심도서 두 권을 사들고 왔다. 둘다 이론서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윤영 교수가 엮은 <사유 속의영화>(문학과지성사, 2011)은 영화이론 선집이고, 호미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는 '네이션'에 관한 탈식민주의적 성찰들을 묶은 것이다.두 책을 모두 갖다놓은 서점이 없어서 한권씩 구하면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알라딘에는 <국민과 서사>가 아직도 입고돼 있지 않다).그중 <사유 속의 영화&g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책 제목에 '-에서 -까지'형이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그런 타이틀의 책은 좀처럼 손에 들지 않는다. 이것도 취향이라면 취향이니까 무슨 이유(논리)가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그런 취향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들춰보지 않은 책에(취향에 덧붙여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별로 주목하지 못한 점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서양철학사 개론서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 2004)가 있다(물론 이 취향 때문에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같은 양서들까지 '피해'를 보기도 한다). 다행스럽다고 한 것은 이 두툼한(789쪽) 고가(27000원)의 입문서가 오역의 범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extraneus/1598429, http://blog.aladin.co.kr/ironpen/1719353 참조).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한국 출판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개념없는 번역과 무성의한 편집의 '합작'이 두드러진 성과를 낳은 경우라 할 만한데, 재미있는 건 이 책이 지난 2004년 10월 출간과 함께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는 점('이달의 읽을 수 없는 책'이 아니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 들어가 선정의 변을 읽어봤다.

다른 역사책과 마찬가지로 서양철학사에도 하나의 뚜렷한 사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관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닐 때 비로소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다. 이 책이 다른 철학사와 구별되는 점은 서양철학의 생성과 발전, 진행을 명료하고 간략하게 다루었으면서도 그 전개의 방식에 있어서 매우 독자적인 입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발생의 동기와 전개의 필연적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과거의 흐름을 쉽게 이해시킬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여러 주요학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부각시키지만 어느 입장에 편중하지 않고 비판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철학적 문제와 부딪히도록 유도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최근의 사조를 철학사적 맥락에서 다룬 것은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이다.

보통 이달의 책 선정위원들의 추천을 받아 목록이 작성되는 것으로 아는데, 이 책을 (무책임하게) 추천한 선정위원은(필시 철학교수이겠다) 번역서를 들춰보지도 않았겠다. 덕분에 전국의 도서관에서 애꿎은 독자들이 '서양철학사'의 장벽 앞에서 걸음을 돌리며 좌절하지 않았을까. '철, 계', 철학은 유혹적이지만 한편으로 경계해 마땅하다. 더구나 오역서들이 난무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라면. '화제의 책'을 다룬 기사와 함께, '역자의 서재' 탐방기사까지 참고해본다. 많은 저역서를 갖고 있는 역자의 '학문' 자체에 회의를 갖게 하는 이런 번역서를 왜 굳이/버젓이 출간하는 것인지 미스터리하다(하긴 가장 최근에 나온 <해체주의와 그 이후>의 경우에도 별반 신뢰할 수 없다는 평을 나는 쓴 바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585043 참조).

 

강원일보(04. 10. 16) [화재의책]'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의 역사는 관념의 모험이다. 위대한 철학자는 위대한 관념을 창조하고 그 관념이 인간을 지배하고 세계를 지배하게 만든다. 철학의 역사는 관념의 싸움터이다. 여러 관념이 등장해 치열한 지적 경쟁을 벌리다가 승리한 관념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관념도 새로운 관념의 도전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의 방향을 선도하고 있는 이성 정의 평등 인권 자유와 같은 거대한 관념도 철학적 사유의 소산이다.

우리는 철학사를 공부함으로써 이러한 관념 모험에 쉽게 동참할 수 있다. 하지만 마땅한 철학사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 서양철학이 소개 된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말로 된 좋은 철학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가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2600년에 이른다. 이 책은 기원전 624년에서 546년까지 활동한 철학의 원조인 탈레스에서 시작, 아직도 살아있는 미국의 철학자 로티, 대륙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 철학 교수였던 새무얼 스텀프가 1966년에 출간한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를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 제임스 피저가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몇 장을 보완해 최근 새롭게 내놓은 것을 강원대 이광래(철학과)교수가 번역, 출간했다.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의 우리말 번역본이 절판돼 아쉽던 차에 새로운 모습으로 번역돼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더욱이 이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www.kpec.or.kr)가 선정한 10월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 철학사를 공부함으로써 서양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 인간 지식의 본성, 우주에 본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고, 철학자들의 생각이 서양 문화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물 중심의 서양철학사이다. 인물 중심의 서양철학사는 문제중심의 서양 철학사와 비교해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철학자 개인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로크 칸트 헤겔 밀 마르크스 니체 현대 철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로티가 전개한 지적 향연을 누릴 수 있다.

이광래교수는 이 책을 번역, 출간하며 “이 책은 20세기 철학과 그 후 현재 논의중인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다룸으로써 시간이 생명일 수 있는 철학사의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철학사를 현재 논의의 장으로까지 끌어들였다”고 적고 있다.(張奇永기자)

강원일보(05. 01. 31) [서재탐방]강원대 철학과 이광래교수

1980년대 세계 지식인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식인 세계에서도 사상적 화두는 프랑스 철학이었다. 프랑스 철학을 선도적으로 한국에 소개하고 연구해 온 강원대 철학과 이광래 교수(60)의 학문적 관심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변하고 있다. 그는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열정적으로 연구하면서 저서와 번역서를 여러권 출간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의 지적 관심은 프랑스 철학에서 동·서비교철학 특히 한·중·일의 동아시아 철학으로 이동했다.

요즘 그는 `습합사(習合史)로 본 일본사상사 연구'에 학문적 열정을 집중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이 지적 생산의 세계에서 모험적인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그의 연구실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오는 5월말 출간 예정인 `습합사로 본 일본 사상사 연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이 교수는 일본사상과 문화의 특성을 한마디로 외래문화·사상과의 습합문화(習合文化), 습합사상(習合思想)으로 요약한다. “습합이란 외국문화와 사상을 자기 고유의 사상과 융합시켜 제3의 것을 창조적으로 생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일본 사상의 핵심은 자신의 사상과 한국, 중국 사상과의 습합의 결과이기 때문에, 습합의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까지 일본 사상의 유형·방법·내용을 정리하면, 일본 사상의 전모가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프랑스 철학 전문가에서 동아시아 사상의 교류와 발전으로 학문적 관심과 연구를 전환한 것은 21세기에 대한 그의 전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장차 도래할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인에 의한 동아시아사상 연구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습합사로 본 일본사상사 연구'의 선행 연구 결과 이미 `우리사상 100년'(2002년), `한국의 서양사상 수용사'(2003년)를 출간했다. 2004년 대한민국 학술원은 `한국의 서양사상 수용사'를 우수도서로 선정했으며 미국 중국 일본에서 이 책이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1981년 이후 매년 저서 또는 역서를 1권 이상 출간해 왔다. 저서가 13권, 역서가 18권에 달한다. 1989년에 출간된 `미셀 푸코'와 1986년에 번역 출간된 `말과 사물'은 프랑스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교과서 역할을 했다. 2004년 출간한 서양철학사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는 정기간행물위원회가 선정한 우수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003년부터 강원대 중앙도서관장을 맡아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4개국의 7개 대학이 참가한 `동아시아 대학도서관 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오는 3월이 되면 강원대의 지적 보고인 중앙도서관이 100만 도서를 소장하게 된다. 그는 외국대학과의 자매결연에도 힘써왔다. 오는 5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대학 개교35주년 기념식에서는 지난 1988년 강원대와 자매결연 이후 대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잊지 않는다. “철학은 생각의 디자인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인생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세계가 보입니다. 미국 월가를 움직이는 CEO의 70% 이상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張奇永기자)

07. 11. 24.

P.S.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 대한 마지막 대목의 충고는 인상적이다. “철학은 생각의 디자인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인생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세계가 보입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철학은 '오역의 디자인'이 아니며 이런 철학사를 읽으며 볼 수 있는 세계란 암담한 세계일 따름이다. "미국 월가를 움직이는 CEO의 70% 이상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읽은 책이 이런 오역서가 아님도 분명하다.

기사중 "이 책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 철학 교수였던 새무얼 스텀프가 1966년에 출간한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를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 제임스 피저가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몇 장을 보완해 최근 새롭게 내놓은 것을 강원대 이광래(철학과)교수가 번역, 출간했다.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의 우리말 번역본이 절판돼 아쉽던 차에 새로운 모습으로 번역돼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란 대목에 대해 두 가지 '주석'을 덧붙인다(강조한 대목은 어이없다. '학, 계', 공부깨나 한다는 이들도 믿지 말지어다!).

먼저, 새무얼 스텀프의 책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Socrates to Sartre: a history of philosophy)>는 이광래 교수의 번역으로 <서양철학사>(종로서적, 1983)라고 소개되었다. 기자가 절판돼 아쉽다고 한 번역본이다. 제자인 제임스 피저가 몇 장을 추가해서 내놓은 개정판이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Socrates to Sartre and beyond : a history of philosophy)>이고,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7판이다. 그렇다면, 스텀프의 책은 국내에서 20년간 읽혀왔다는 것인데, 2004년에 나온 개정판이 그런 수준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건 놀랍고 기이한 일이다(철학사 교재로도 사용되었다니까 더더욱).

실상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란 제목을 가진 철학사 입문서는 하나가 더 있다. T. Z. 래빈 여사의 방송강의를 책으로 묶은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동녘, 1993)가 그것인데, 스텀프의 책처럼 통사는 아니고 플라톤, 데카르트, 흄, 헤겔, 마르크스, 사르트르 등 6명의 철학자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에서 -까지'란 타이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런 타이틀이 한때 유행이긴 했다) 구입해서 읽어봤을 만큼 잘 씌어지고 잘 읽히는 책이었다(나는 페이퍼백 원서도 구입했다). 이 책은 <방송강의철학사>(현대지성사, 1997)라고 다른 번역본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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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11-2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큰맘 먹고 사서 사전처럼 이용하고 있는 책인데요-_-

로쟈 2007-11-24 22:15   좋아요 0 | URL
돈이 아까울 만한 책입니다.--;

루루 2007-11-2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무슨"위원회"가 양서로 선정한 책은 저 같은 독자는 그냥 무턱대고 좋은 책인가보다 하고 믿는 편이지요..그런데 이런 사례를 보니깐 왠지 허탈하네요. 책을 쓰고 번역하고 하는 학자들이 과연 그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오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요..) 그러고보면, 고등학생들에게 가다머와 하버마스, 푸코를 필독이라고 추천하면서 들이미는 대학들도 한숨을 나오게 하기는 마찬가지네요.

로쟈 2007-11-25 00:08   좋아요 0 | URL
가다머와 하버마스, 푸코는 교수들도 안 읽는 책입니다(해당 전공자가 아니라면). <계몽의 변증법> 같은 책이 논술문제에서 언급될 때마다 저는 놀랍니다. 출제자는 읽은 것인가, 하고...

마늘빵 2007-11-25 00:37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하버마스, 푸코, 가다머 저는 대학 학부에서 거의 못들어봤습니다. 하버마스는 아렌트와 연관해서 살짝 언급하는 정도였고, 푸코는 성의 역사만 훑어 읽어봤고. 가다머는 대학원 와서 교수님 전공이 그쪽이라해서 이름만 알고 있습니다. -_- 교수들도 자기 전공과 관련해서나 읽지 안 읽을 겁니다. 푸코는 많이 대중화되서 좀 다르겠지만.

마늘빵 2007-11-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스텀프의 서양철학사가 대학 학부 시절 발제지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었지요. 선배들도 교수님도 그 책을 참고하라고 하셨었어요. 객관적이라고. 반면 기독교 학교였던지라 그랬는지 러셀의 철학사를 참고하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다른 대표적 철학사 책은 다 소장하고 있는데 - 다 읽은건 아니고 - 스텀프 것만 없어요. 한번 철학사 책들을 몽땅 구입할 때 그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모습이 바뀌었군요. 저 밑에 말은 참 인상적입니다.

로쟈 2007-11-25 00:0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로 지명도 있는 책인지는 몰랐는데요(예전 종로서적판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개정판의 번역이 더 나빠졌을리는 없을 텐데, 다들 읽을 만은 했다는 건가요? 흠...

마늘빵 2007-11-25 00:45   좋아요 0 | URL
네 종로서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검색해봤더니 맞네요. 최명관 선생님 번역한거. :)

스텀프의 책과 코플스톤의 철학사가 많이 도움이 됐었죠. 번역상의 문제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보면 보일지 모르겠는데 학부 시절엔 그런거 하나도 안보이고 따라가기 급급하니까요.

살청님은 어떤 점에서 러셀의 철학사가 안좋다고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안좋다는 이야기는 꽤 들었는데 왜 안좋은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제가 러셀의 철학사를 가지고는 있지만 필요할 때만 발췌해서 읽어본게 다 인지라 전체적으로 판단하긴 어렵고.

로쟈 2007-11-25 00:58   좋아요 0 | URL
서지에 혼동이 있는 거 같습니다. 종로서적판은 도서관 검색에서 모두 이광래 역으로 나오는데요. 최명관 등의 <서양철학사>는 렘프레히트의 것(을유문화사)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알라딘에는 세 사람 공역의 <서양철학사>가 스텀프와 렘프레히트 공저로 떠서 더 헷갈리는군요)...

마늘빵 2007-11-25 09:43   좋아요 0 | URL
아 이런. 램브레이트가 있었죠. -_- 헷갈리는군요. 램브레이트 것이 최명관 선생님 번역 맞는거 같습니다. 근데 스텀프의 번역본이 애초 문제가 많았는데 왜 그 책을 보라고 했었던건지 의문이... 아마도 교수님은 원서를 염두에 두고 그리 말씀하신게 아닌건가 생각됩니다. -_-

yoonta 2007-11-2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런건 있습니다. 철학책은 원래..영어로 봐야 더 잘 이해된다는. 한글로는 애매하고 불분명했던 구절이 영어나 원어로 보았을 때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있더라구요. 제가 한국어를 못해서 그런건지..어쨋든 그렇더군요. 특히 어려운 철학책일수록..

로쟈 2007-11-25 00:59   좋아요 0 | URL
분명 그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서..>의 경우엔 오타와 단순 오역이 다수 포함돼 있어서 그냥 그 자체로 무성의한 번역이란 인상을 주네요...

yoonta 2007-11-2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주에선가 문제의 책으로 공부한것도 책의 오역을 찾는게 목적이라기보다는 영어로 철학사를 공부하려는것이 주 목적이었겠죠. 그러다가보니 오역들이 보였던것일게고..한문장이해하는데도 한참 걸리는 철학책은(저같은 경우 특히 데리다^^;;) 필히 원어와 대조해서 봐야할겁니다. 데리다의 <입장들>을 얼마전 영어로 대조해서 다시 읽어봤는데..그제야 조금 감이 잡히더군요. 오역들도 조금 눈에 띄는것 같고..

로쟈 2007-11-25 01:08   좋아요 0 | URL
<입장들>도 재번역되어야 할 책이죠(영어본도 개정판이 나왔고). 저도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yoonta 2007-11-2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책으로 읽어내기도 힘든 표현을 데리다는 대담으로 즉 말로서 그자리에서 줄줄 쏟아 낸다는 건데..저런 내공은 어떻게 길러지는것인지..대략 난감-_- 데리다 자신도 그랬다더군요. 자신의 독자는 전세계적으로 대략 1000여명쯤이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다는데..뭐 그리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11-25 01:21   좋아요 0 | URL
상대적인 건 같은데요, <이론 이후 삶>을 읽어봐도 질문자들의 말이 데리다보다 더 어렵습니다. 제 경우엔 데리다보다 안 읽히는 철학자들이 너무 많은지라.^^;

yoonta 2007-11-25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이후의 삶>의 대담자들도 그렇군요..(털석;;) 이게 다 데리다나 들뢰즈같은 분들이 조장해 놓은 분위기라는..에혀..하긴 지젝도 한페이지 읽기도 힘들죠. 저로서는.

로쟈 2007-11-25 01:35   좋아요 0 | URL
개인차겠지만, 제 경우엔 들뢰즈가 데리다나 지젝보다 두 배는 읽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헤겔이나 라캉보다는 읽기 편한 게 아닐까요?^^

yoonta 2007-11-25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상기시키지 마세요. 로쟈님..ㅜ.ㅜ

로쟈 2007-11-25 09:18   좋아요 0 | URL
괴로운 기억이?^^;

자꾸때리다 2007-11-2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읽을 수 없는 책'이 아니라!

ㅋㅋ

그냥 차라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이달의 읽을 수 없는 책>을 선정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ㅋㅋㅋ

(그게 더 힘든 것?)

로쟈 2007-11-25 22:02   좋아요 0 | URL
더 의미있겠지만 고양의 목에 방울달기 같습니다...

살라흐앗딘 2007-11-2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휠쉬베르거의 책을 주로 읽다가 약간 버거워서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산게 스텀프의 책인데(둘 다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이런 기사를 보니 좀 심란하군요;; 원문 볼 능력은 안되고 ㅎㅎ 변명의 여지도 없다,라..-_-;;

로쟈 2007-11-25 22:04   좋아요 0 | URL
(본문에 링크해놓은) 오역을 지적하는 리뷰들을 검토해보신 다음에 판단하시길...

히드라 2007-11-2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에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오역/오자' 정오표를 보내고, 새로이 재번역을 할 것과 개정 후 공개적인 리콜을 요구하였습니다. 출판사측 이소영 인문 분야 팀장이 답변하길, "거래 서점에서 그 책들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하고, 새로이 개정판을 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리콜 부분에서는 명확히 언급을 하지 않았구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로쟈님, 좋은 글로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로쟈 2007-11-27 13:41   좋아요 0 | URL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서 다행입니다. 이런 선례가 쌓이면 좀더 다듬어진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수고야 열심히 읽고 지적해주신 분들이 하신 거지요.^^
 

계간 <세계의문학> 가을호는 전호에 이어서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란 기획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서점에서 훑어만 보고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담비에 리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6070). '패스트-리딩'만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워낙에 다들 바쁘잖은가. 또 리뷰라도 챙겨두면 좋지 아니한가.

담비(07. 09. 17) 세계의문학 가을호'포스트 이후의 포스트' 

‘세계의 문학’ 2007 가을호가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의 두 번째 순서에서 ‘대륙의 동쪽에서 전개된 포스트 이론’을 다루고 있다. 다섯 명의 필자가 러시아, 일본, 중국, 홍콩, 한국에서 일어나는 포스트 현상에 대해 논의를 펼쳤다. 변현태의 ‘포스트 소비에트 문예학과 바흐친의 유산’, 황호덕의 ‘무상無常의 시간과 구제救濟의 시간’, 서광덕의 ‘1990년대 이후 중국 사상계의 지형도’, 유영하의 ‘방법으로서의 홍콩’, 허윤진의 ‘헌책방의 문턱’이 그것이다.

변현태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한 공화국으로 러시아가 등장한 이후,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문예학의 향방을 추적한다. 그 향방은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되는데, 소련 이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문학적 유산을 상속받아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과, 서유럽 또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접점에서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버지-인문학자 대 그 가치를 일단 파괴하고 보자는 아들-니힐리스트의 대립, 슬라브주의 대 서구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둘의 긴장관계가 현금의 어떤 풍요로운 이론적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려낸다.

황호덕의 글은 어떤 의미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왜 이 일본 비평가가 쟁점이 되는가? 대동아전쟁을 비롯한 역사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태도의 근본을 요약해주는 것이 고바야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서 독립시켜, 주관의 회상을 통해 주어지는 ‘마음’의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이 ‘마음’ 속에서 탈가치적인 ‘죽은 자 일반의 무상함’을 객관적 역사 대신 떠올리는 데서 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해 역사에 면죄부를 주는 현금의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가능했다. 이런 비판적 논의를 배경으로 겐겐다이시소(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일본 지성계 최대 쟁점 중 하나인 ‘21세기의 매니페스토·탈패러사이트 내셔널리즘’을 통해 표현된 국민국가에 환원되지 않는 형태의 정치론 등을 살핀다.

서광덕의 글은 중국의 개혁 정책이 성공의 배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사상의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야기된 도시와 농촌, 지역간의 대립, 계층간의 분화, 제도의 부패 그리고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국 지성계의 다양한 입장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논자의 흥미로운 통찰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사상계가 매우 다양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지만, ‘모두 중화전통에 대한 회귀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대중매체가 고전 강독의 스타 만들기에 열중하는 것도 이런 회귀의 화두와 관련이 없지 않다. 논자가 우려하듯 이런 중화성 지향이 정치적 장체서 민족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인종주의를 초래하지 않을까? 이런 중화주의에서 예외는 왕후이 정도의 지식인이라고 논자는 말한다. 이런 중국의 모습에 대해 한 일본인 중국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두 방향을 모두 충분히 열어놓는 길, 가장 요원하게 보일지라도 최고의 공정성을 가져올 수 있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중국도 중국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보면 매우 계획적인 사회통제를 통해 가능한 이런 주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유영하의 글은 올해로 반환 10주년을 맞은 홍콩의 현주소를 찾는다. 1967년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좌파 주도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이래 영국은 홍콩의 탈중국화를 일관되게 추구했고, 결과적으로 ‘홍콩은 조국이 없다’는 점이 홍콩인들에게 입력됐다. 이제 홍콩인은 외국인과 비교하면 중국인이고, 대륙의 중국인과 비교하면 외국인이다. 이 글은 중국 반환 이후 지난 10년간 홍콩인들이 후식민주의 시대에 어떻게 외국과 중국 사이의, 또는 ‘식민자와 식민자 사이의’ 이중 소외로부터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는지 추적한다. 그것은 저우레이가 홍콩 후식민의 장래를 ‘이중불가능’으로 정리한 데서 나타난다. 홍콩은 영국 식민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듯이 중국 국적주의의 재림에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 분야에 있어서 중국보다 이미 선진적인 홍콩이 자기보다 뒤진 중국으로부터 온갖 정치적, 문화적 간섭을 받아야 하는 사태는 매우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로 폭발하거나 아니면 사회 전체의 퇴행과 무기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허윤진의 글은 주로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가며 한국 문학에서 1980년대와 오늘날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이 글의 특이한 점은 ‘우리’라는 화자 외에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라는 화자는 거기에 독자가 밀착할 때는 가장 강력한 보편적 언어를 쏟아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제한된 개인의 언어를 쏟아내는 특수성을 지닌다. 논자는 이 렌즈 속에서 독자들에게 1980년대 또는 그 유산과의 거리 가늠을 제안한다.(리뷰팀)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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