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대목을 옮겨놓고 주석을 달도록 한다. 5장 '레닌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들어있는 대목인데, 오늘날 공과 사의 경계가 소멸돼 가고 기이하게 전도되는 현상을 문제삼고 있다. 사실 지젝의 모든 구절들이 이러한 '뜯어읽기'의 대상이 됨 직하하다. 그럴 만한 여유를 독자로서 갖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뜯어읽기의 대상은 국역본 104-6쪽, 영어본 207-8쪽이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독어본을 옮긴 국역본과 영어본은 같은 제하의 장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 인용하는 대목도 국역본에는 없는 문단이 영어본에 더 들어가 있다(반면에 영어본에 없는 내용이 국역본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용문의 문단은 국역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을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 완전한 이방인에게 더 쉽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이버공간의 채팅방과 정신분석 치료 같은 현상이 명맥히 이러한 패러독스에 속한다. 우리가 완전히 지인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이방인과 이야기하는 사실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가 말려든 열정의 '뒤얽힘'을 더 이상 휘저어놓지 않으리라 보장한다. 즉 이방인은 우리와 이웃한 타인이 아니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거대한 타자 그 자체'이며, 우리의 비밀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 따위를 주변 사람들보다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설적이지만 더 잘 털어놓는다. 사이버공간의 상의 채팅방이나 정신분석 치료가 기대는 것도 이러한 패러독스이다. 즉, 우리는 전혀 모르는 상대방에게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사적인 고백들로 채워진 개인 블로그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할 내용들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공간에서는 마음껏 늘어놓는다. 왜? 그렇게 하면 일이 괜히 복잡하게 꼬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비밀들을 담는 중립적인 그릇(수용체)으로서의 '대타자 자체(the big Other)'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된 유아론'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우리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 이방인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가 보장된 거리를 배경으로 할 때만 관계 자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은 예외적인 지위에 머물고 있는(완전한 이방인과, 다음날 각자의 길을 갈 것이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 그대로 열정적인 섹스로 밤을 보내는 것 같은) 이러한 것들이 점차 새로운 기준으로 되어 가고 있다."

'공유된 유아론'은 영어로 'shared solipsism'이다. 자기만의 내밀성을 낯선이들과 나눠갖는 경향성 정도를 뜻하겠다.  그게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가고 있다는 것. 즉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고백하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걸 넘어서서 아예 그러한 거리가 전제되어야 친밀한 관계(열정적인 섹스)를 맺는 것이 가능한 경지가 도래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원나잇스탠드'가 성관계의 '모델'이 되어간다? 국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어본에서 지젝이 덧붙인 내용은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 <정사(Intimacy)>(2001)이다. 무려 35분간의 정사 장면이 들어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이다(내용은 서로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일주일에 단 하루, 수요일마다 만나 섹스를 나누는 남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같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밀한 인생의 세밀한 부분이, 사람들이 사적으로 속삭이는 외설적인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책이나 웹사이트에서 접근 가능한 공적인 등장인물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점이다. 이를 약간 향수어린 보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스캔들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에 바로 스캔들이 있다."

우리의 경우 최근에 컴백설이 나돌고 있는 O양 비디오 사건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등장인물'의 영어 표현은 'persona'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스캔들은 더이상 아무런 스캔들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 흔히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유사 사건들은 가히 전세계적으로 분포돼 있다. 얼마전 관련기사를 참조하면 이렇다.

스포츠서울(06. 10. 23) 섹스비디오, 국내외 피해 사례는?

섹스 비디오 피해 사례는 국내·외를 통틀어 수 십여건에 달한다. 유명 스타 외의 연예인까지 포함한다면 그 사례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O양', 'B양', 'L양' 사건. 1999년에 유포된 'O양' 비디오는 유명 여자 탤런트와 한 일반인의 성관계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첫 섹스 비디오라는 희귀성 때문에 당시 이 비디오 테이프는 서울 종로3가 세운상가 일대에서 개당 100만 원에 밀매되기도 했다. 섹스 비디오가 무더기로 뿌려진 이후 피해 연예인은 연예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불과 1년 뒤. 가수 B양의 섹스 비디오가 대량 유통됐다. '제2의 O양 비디오'로 불린 B양 섹스 비디오는 가수 B양과 전 매니저 김모씨의 성관계 모습이 담겨있다. 특히 B양 동영상의 풀버전이 개인사이트에 게재되면서 섹스비디오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인기 절정의 가수였던 B양은 이 사건으로 방송일을 접어야했고 비디오 파문 이후 6년만에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했다. O양, B양 섹스비디오와 달리 탤런트 L양 비디오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이 비디오는 L양과 닮은 일본 여성의 목욕탕 몰래카메라 컷을 마치 L양인 것 처럼 조작, 유포됐다. 따라서 O양, B양 비디오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며 L양은 실체도 없는 비디오 때문에 심각한 명예 훼손을 당했다.

해외의 피해 사례도 부지기수. 그 가운데 패리스 힐튼과 콜린 파렐의 섹스비디오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힐튼은 옛 연인 닉 카터, 모델 제이슨 쇼와 찍은 섹스 테이프가 유출돼 곤욕을 치렀다. 이 비디오에는 힐튼의 적극적인 애정행각이 모두 포함돼 있다. 특히 힐튼의 첫 섹스 비디오 '파리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Paris)'은 DVD판으로 출시되고 있다. 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힐튼은 급기야 섹스 비디오를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파렐은 옛 연인 니콜 나래인과의 섹스 비디오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파렐의 전 애인 나래인이 지난해 7월 파렐과 함께 찍은 섹스테이프를 유포하려고 한 것. 파렐의 고소로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래인은 법원의 '공개 및 판매금지' 요청을 무시한 채 비디오를 유포했다. 결국 파렐의 섹스비디오는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렐은 섹스 비디오로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밝혔다.

섹스비디오는 피해자에게 정신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오점(汚點)을 남긴다. 특히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 한다는 망상에 빠지거나, 사람을 피해다니는 대인 기피증으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 때문이라도 톱스타 K군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는 피해는 없어야 하겠다.(*지젝이 아래에서 들고 있는 사례도 이러한 것들이다.)

"이는 처음에는 모델과 유명 영화인에게서 시작됐다. 클라우디아 시퍼가 두 남자의 성기를 동시에 열렬히 입으로 애무하는 (조작된) 비디오 클립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만약 인터넷상에서 미미 맥퍼슨(더 유명한 호주 모델 엘 맥퍼슨의 여동생. 사진)에 관한 자료를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친환경적 활동(고래 관찰 회사 운영), 비즈니스 우먼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인터뷰 사이트에 이르고, 그녀의 '점잖은' 사진들이 있는 사이트에 덧붙여, 자위하거나 연인과 성교하는 도둑맞은 비디오를 얻게 된다."

"그리고 카트린 미유의 최근 책은 어떠한가? 여기에서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 비평가는 차갑고 비감정적인 스타일로 창피함이나 죄책감도 없이, 그리고 결론적으로 격정적 일탈의 감정도 없이 자신의 화려한 성생활의 세밀한 부분을, 그녀가 큰 난교파티에 주기적으로 참가하고 거기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익명의 페니스들과 한번에 통하고 즐긴 것까지를 묘사한다."

 

 

 

 

국역본에서 '카트린 미유(Catherine Millet)'라고 표기된 이는 '카트린 밀레'를 가리킨다.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카트린 M의 성생활>(열린책들, 2001)이다(그녀의 미술관련서들도 국내에 번역돼 있다). 알라딘의 소개를 잠시 옮기면, "자신이 경험한 무수한 성경험을 거리낌없이 풀어놓은 논픽션이다. 놀라운 점은, 성에 대한 서술이 너무나 덤덤하다는 것이다. 섹스 상대의 숫자나, 섹스를 행한 장소, 가지각색의 섹스 스타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섹스와 오르가슴에 대해서 탈탈 털어 이야기하는데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 그저 '나의 섹스'를 치밀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러기에는 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허풍이라곤 조금도 없는 비쩍 마른 서술, '주정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 성행위 묘사, 자기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는 눈. 공개적으로 섹스 경험을 털어놓았다는 점은 그 다음에 놀랄 일이다. 일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성애 장면을 그려낸 솜씨에 경탄하게 된다..." 

아무튼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에서도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유명인사의 성생활 고백서이다. 카트린 밀레 이후에 그렇다면 어떤 스캔들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지젝이 예감하는 미래는 이런 모습이다.

"여기에 더이상 선험적인 경계는 없다.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몇몇 정치가들이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성적 교제에 대한 하드코어 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 혹은 (상적)능력을 확신시키기 위해 유통할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이상은 안되겠지, 라고 가정해볼 수 있는 '선험적인 경계'는 더이상 없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정치인들이 (처음에는 신중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섹스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유포시킬 가능성까지도 점쳐볼 수 있다. 이미 1912년에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의 본성이 변화했다고 적었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기술이 보다 더 적합해보이는 것은 공과 사의 구별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이다...

06. 11. 14-17.

P.S. 서둘러 끝내느라고 마지막 인용문단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먼저 '빅 브러더'는 물론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인물(독재자)인데, 같은 이름의 리얼 TV시리즈가 있다고. 올해 '시즌 7'까지 나왔고 내년에는 '시즌 8'로 들어간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할 수 있다(참가신청자들 가운데 시청자와 제작자들이 뽑은 배역들이 합숙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 같은 걸 하는 모양이다. 그런 게임의 과정이 TV채널을 통해서 전부 공개되는 방식).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은 영어로는 'the radical shift in the status of subjectivity'인데, 직역하면 '주체성의 지위에 있어서의 급격한 이동'쯤이고 의역하면 '주체성이 갖는 지위의 급격한 전도' 정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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