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페이퍼를 쓰기도 한 존 쿳시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문학동네)가 다시 나왔다. 2001년에 나왔다가 절판되었던 책으로 제목이 가리키는 건 도스토에프스키다. 도스토에프스키에 대한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의탁하여 쓴 소설.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 강의에서 다루고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 리뷰를 다시 읽어본다(쿳시에 대해서는 <마이클 K>가 다시 나오면 몇작품을 강의에서 한꺼번에 읽고 싶다)...

남아공의 작가 쿳시가 난데없이 1869년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호출한다. 해외여행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을 통고받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론을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교묘한 문학론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소설의 뼈대다.

쿳시의 문학론은 일견 단순하다.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 배반하고 또 영혼을 팔아먹는 작자라는 것. 그 배반의 맛은 식초맛인가, 쓸개맛인가? ‘이제 그는 그것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쓸개즙 맛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대로 된 독법은 그 쓸개즙 맛을 얼마만큼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난 감상은 다소 씁쓸하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붓아들 파벨(1848-1900)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네차예프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1869년에 페테르부르크에 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스터(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작가 쿳시의 마스크이자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작가 쿳시는 아들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에 처한 한 작가가 그 비탄과 분노를 어떻게 떠밀어낼 것인가 하는 절박함이 이 소설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은 다소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은 끝이 없는 법이다‘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죽은 아이를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게 남겨져 있는 일은 다만 아들의 죽음을 수습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배신의 글쓰기이다. 그런데 죽음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서로의 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생성된다. 여기서 ‘내‘ 아들의 죽음은 그 구체성을 상실하는 대신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러시아라는 시공간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며 플롯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변적인 푸닥거리다. 그것은 여자들이 갖고 있는 굉장한 비밀로서의 울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내들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다.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아버지-작가란 무엇인가? 영혼을 단념한 존재들 아닌가! 소설은 그런 존재들이 가진 ‘고통의 무딘 부재‘에 대해 이빨 사이로 새는 듯한 문장들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씁쓸한 쓸개즙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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