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관련 일정은 두 가지가 더 있었다. 소세키 기념관을 출발해 소세키의 묘가 있는 조시가야 묘지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도쿄대 안에 있는 산시로 연못을 찾았지만, 여기서는 산시로 연못을 먼저 언급한다. 연못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시로>(1908)가 조시가야 묘지가 나오는 <마음>(1914)보다 먼저 발표되었기에. 소세키 자신이 조시가야 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1916년의 일이다.

<산시로>의 초반부에서 도쿄대 신입생인 시골뜨기 산시로는 동향의 선배 노노미야의 지하 연구실을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연못가로 가서 쭈그리고 앉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연못을 응시하던 산시로는 문득 눈을 들어 언덕 쪽의 두 여자를 보게 되는데 흰옷을 입은 여자와 부채를 든 여자다. ˝부채를 든 여자는 조금 앞으로 나와 있다. 흰옷을 입은 여자는 둑 끝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 산시로의 눈에는 두 사람이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여자가 언덕을 내려와 대화를 나누며 산시로의 앞을 지나간다. 산시로는 뭔가 움찔함을 느낀다. ˝두 여자가 산시로 앞을 지나갔다. 젊은 여자는 지금까지 향기를 맡고 있던 하얀 꽃을 산시로 앞에 떨어뜨리고 갔다. 산시로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멍해진 산시로는 그저 ‘모순이다‘라고 중얼거리는데 대체 무엇이 모순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고 소세키는 적는다. ˝시골 출신 청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왠지 모순된 것만 같았다.˝

하얀 꽃을 떨어뜨리고 간 여자가 여주인공인 미네코다. 미네코는 신여성이면서 근대성의 미스터리를 상징한다. 어수룩한 청년(일본의 근대) 산시로는 미네코의 수수께끼 같은 매력에 이끌리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도 감을 잡지 못하는 위인이다. 산시로는 작품 서두에서 일찌감치 ‘배짱이 없는 남자‘로 낙인이 찍힌 바 있다. 그런 처지에 미네코를 상대한다는 건 역부족이다. 결과적으로 산시로와 미네코의 연애는 연애도 아닌 연애 정도에서 일단락되고 미네코는 산시로도 노노미야도 아닌 제3의 남자와 결혼한다. 산시로는 ‘스트레이 십‘(길 잃은 양)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는 게 결미.

‘연애실패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일본 근대의 상황과 문제, 그리고 그 전망에 관한 개요를 작성한다. 아니,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소세키는 근대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근대화가 서구의 근대화와 견줄 만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산시로>의 초반부에서 러일전쟁 이후 일본도 날로 발전해나가지 않겠느냐고 산시로가 말하자 낯선 사내(나중에 히로타 선생으로 밝혀진다)는 ˝망하겠지˝라고 대꾸한다. 일본 근대에 대한 두 가지 전망이지만 소세키의 판단은 좀더 비관적인 쪽에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어수룩한 산시로보다는 식견 높은 히로타 선생의 견해가 소세키의 생각을 대변하는 걸로 보아야겠기에.

아무튼 <산시로>의 의의는 그렇다고 해두자. 요는 그 산시로 연못에 가보았다는 것. 일본도 수십년 만의 한파라는 걸(고작 영하 4도였으니 우리로선 믿기지 않지만) 웅변하듯이 연못에는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겨울평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도쿄인지라 얼음이 깔린 산시로 연못을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일 듯싶었다. 소세키 소설의 배경이 아니라면 특별히 찾을 일도 없었을 연못이지만 오늘은 얼음까지 깔린 모습이 더욱 인상 깊었다. 내가 기억할 산시로 연못은 다시 찾기 전까지는 오늘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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