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이 약한 팀이 전반은 포기하고 후반에 승부를 건다는 것처럼 요즘에 휴일이면 오전은 포기하고(아침을 먹고 다시 잔다) 오후에 승부를 건다. 승부랄 것도 없다. 밀린 일을 해치운다는 거니까. 밀린 독서까지는 카바하지 못해서 오늘도 패전에서 벗어나지 못할 상황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의책 두 권을 찾지 못해서(매주 10여 권씩 필요하다) 일 없이도 기운을 빼는 중이다.

그러다 어제 쓰다 만 페이퍼가 떠올라서 적는다. 문학동네 시인선 ‘티저 시집‘(이런 건 처음 아닌가?)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에서 읽은 대목을 옮겨 적으려 했었다. 가나다순에서 맨마지막에 실린(옛날 같으면 황지우 시인의 자리) 황유원의 ‘초자연적 3D 프린팅‘. 아마도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시일 텐데, 중요한 게 바로 그 길이다. 한국시에서 읽을 만한 장시(내지 서사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다는 게 황유원이 내게 갖는 의의다(시도가 당연히 없지 않았지만 재미가 적었다).

너무 길어서(?) 앞부분은 담에 읽기로 하고 말미만 읽었는데 시가 된다는 건 적당한 부력에 의해 언어들이 떠 있다는 뜻이다. 황유원은 일상적인 말과 흔한 표현에 그런 부력을 불어넣을 줄 안다.

네가 내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게
내가 네 혈관 속세 흐를 수 있게 해줄래?

(오죽하면 내가 이럴까)

그런다고 죽는 일은 없겠지만
목숨을 다해서, 라는 기분으로
그래봤자 우리가 어제의 인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 가능성 따윈, 아무래도 없다고 봐야겠지만
마침내 난 내 모든 걸 다 바쳤다! 라는 기분이 들 때쯤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잔뜩 들어찬 글자들로 붐비는 아침은 올 것이고

너는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너의 엄청난 힘이 내 위에서 쓰러지는 게 나는 좋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결말이 마음에 든다. 덧붙인 ‘시인의 말‘에서 예의 황유원은 ‘최대화‘를 말한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 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 모두를 가보기로 한다.˝

두 가지 길 어느 쪽이건 그는 최대화를 약속했다. 그의 두번째 시집을 꽤 고대하는 독자 명단에 내 이름도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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