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지난 9월의 마지막날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을 비디오로 빌려다 봤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는 지난 여름, '지나간 모든 여름'을 추억하며 개봉관에서 보고자 했었지만 '낭만'은 언제나 현실에 패배하기 마련이다. 내게 남은 낭만은 그나마 갓 들어온 신작 프로를 운좋게도 바로 빌려다 보는 일 정도이다. 그리고 며칠전에 김기덕의 <시간>에 관한 영화평 몇 개를 읽다가(<시간>은 <해변의 여인>에 이어서 빌려다 보았다) <시간>과 <해변의 여인>에 관한 김소영 교수의 영화평을 읽고 스크랩해놓았다. 그 영화평의 일부를 옮겨놓으면서 제목이 '해변의 여인'이 아닌 '해변의 페트라르카'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 이야기가 끼여들어서이다. 일단은 '씨네21'의 '전영객잔'에 게재된 영화평의 후반부를 읽어본다(언제나처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씨네21(06. 09. 13)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해변의 여인>

(...) '이미지와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중래가 주저리주저리 도형까지 그리며 설명하는 사악한 이미지와의 싸움은 사실 슬라보예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책의 첫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 중래가 털어놓는 아내와 자신의 친구와의 관계 묘사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남긴 영향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환상의 돌림병을 구성하는 이미지다.

 

 

 

중래는 제법 심각하게 이런 이미지와의 싸움을 털어놓고, 또 도형까지 그려 이미지의 구성을 그래픽하게 설명한다. 이와 엇비슷하게 그러나 문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것은 자신이 방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중래와 선희가 어떻게 방을 나갔을까? 자신을 넘어 나갔을까?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에 중래는 위의 이미지와의 싸움이라는 강박으로 대응한다. 중래가 자신의 트라우마처럼 제시하는 위의 환상의 돌림병은 그러나 문숙에 의해 결국은 의미 폄하를 당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 의미 훼손의 태도다. 이처럼 의미를 구성했다가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 영화가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은 일단 사용했다가도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적 기호 중 일단 한번 사용되기만 하면 그것이 결정적 의미화를 가져오게 되는 예 중 하나가 그 유명한 기침이다. 특히 여주인공의 기침은 불치병은 물론 거짓말, 불륜 등의 재앙을 예고한다. 문숙은 황사가 오고 있는 봄날, 기침을 하면서 등장하는데, 영화의 서두에서 문숙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중래와 창욱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문숙은 그 무관심, 그 무언급 중에서도 몇번 더 기침을 하고 , ‘이틀 뒤’ 나타났을 때 기침은 멈추어져 있다.

 

 

 

또, 중래는 ‘이틀 뒤’ 해변에서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데, 이런 의외의 의례를 뒷받침할 만한 설명은 거기 가면 그렇게 절을 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제공되지 않는다. 위의 기침이 통상적 기호라고 한다면 나무에 절하는 행위는 제의적 기호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둘 모두 은유나 환유로 가는 대신 표면 위에 정지한다.

이미지와의 싸움도 트라우마로 규정되는 대신 조롱거리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해변의 여인>을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한국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새로운 경지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극장전>보다 이 재미는 훨씬 더 명료해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신랄한 조소마저 조롱하는 되돌이과정은 영화감독의 환상의 돌림병처럼 보인다.(김소영)

이 영화평을 읽다가 나의 관심은 <해변의 여인>에서 <환상의 돌림병>으로 옮겨갔다(<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최근작들, 곧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을 포함한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해변의 여인'에서 '해변의 페트라르카'로의 이행은 그러한 관심의 전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 왜 '페트라르카'인가? 그건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의 서론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김소영 교수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라고 정리하고 있는 그 '서두' 말이다. 그 서두의 (의미상) 첫 문단을 국역본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남성 쇼비니스트가 보이는 질투의 전형적인 상황 속에 우리 자신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즉 갑자기 나는 내 파트너가 다른 남자와 섹스했음을 알게 된다. 좋아, 문제 없어. 나는 이성적이고, 관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지들이 나를 덮쳐오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벌이고 있을 구체적인 이미지들(왜 하필이면 그녀는 바로 그의 바로 그곳을 핥고 있어야 했는가? 어째서 그녀는 다리를 그렇게 쫙 벌리고 있어야 했는가?)이다. 그리고 나는 당황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떨고 있다. 내 평화는 영원히 달아나 버린다."(11쪽, 강조는 원문 그대로)

사실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1999)에서 톰 크루즈를 괴롭혔던 것도 언젠가 해군 장교에게 유혹당할 뻔했었다는 아내 니콜 키드먼의 고백이 낳은 '이미지들'이었다(이 경우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정사이지만 그가 상상해낸 정사의 이미지들은 일시적으로 일상적인 삶을 중단시킨다. 혹은 영화밖의 이 커플을 이혼하게 만든다?). <해변의 여인>에서 '질투에 빠진 남성 쇼비니스트'로서 이혼한 영화감독 중래가 싸우는 이미지들도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여인들이 다른 남자들과 가졌던/가졌을 정사의 이미지들이다. 그 또한 '환상의 돌림병' 환자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말의 출처가 바로 페트라르카이다.    

"이러한 환상들의 돌림병은 페트랄크(Petrarch)가 <나의 비밀>(My Secret)이란 작품에서 자신의 명료한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청각 미디어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문 자체가 비문이지만(원문에 따르면, '환상들의 돌림병'과 '명료한 이성/추론을 흐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은 동위어이고 동의어이다), 그보다 더 어리둥절한 것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대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를 '페트랄크'라고 표기한 것이다. 페트라르카의 영어식 이름이 'Francis Petrarch'이긴 하지만, 역자가 이런 정도의 인명을 제대로 표기해주지 못한 것은 부주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사실 번역은 곳곳에서 삐걱거린다).  

 

 

 

 

오랜만에 다시 잡은 번역본을 읽다가 '페트랄크'에서 혀를 차게 됐지만 뜻밖의 소득도 없지는 않은바, 페트라르카의 국역본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지난 2004년 시인의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 의 번역본 <칸초니에레>(민음사)가 출간되었던 것(작년에 거푸 또 다른 전공자가 옮긴 <칸초니에레>도 출간됐다). "페트라르카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시를 모은 시집이다." 변명삼아 말하자면, 이런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이다. 한데, 작년에 나온 <칸초니에레>(나남)는? 책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로쟈'도 '인간'임을 자인하는 수밖에.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칸초니에레'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시집'이라는 뜻을 가진 일반명사지만, 페트라르카의 시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총 366편의 작품이 실렸는데, 그중 317편이 소네트이고 이들 대부분이 평생 연인이었던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읊은 것이다. 초반부의 시에서 시인은 거절당한 사랑으로 인한 비탄, 정열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노래하였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상의 욕망을 천상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강조는 나의 것)

"페트라르카식 소네트의 완성형을 보여주며, 이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인들의 끊임없는 모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 시집 자체도 필독의 대상이지만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나의 비밀>(Secretum)이며, 'My Secret Book'이라고 영역본이 나와 있는 책이다(국내 도서관들을 검색해밨지만 단행본으로는 소장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얇은 책인데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의 가상의 대화를 담고 있는 책인데, 페트라르카식의 강렬한 고해성사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환상의 돌림병'으로 고통받는 자신에 대한. 그렇다면,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식 고해성사인가?(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



 

 

 

사실 "오늘날의 시청각 미디어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환상의 돌림병'의 가장 유력한 유포자는 '이미지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홍상수의 근작들은 그러한 영화의 메카니즘 자체에 대한 반어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조건적 기호)과 이미지(도상적 기호)에 포획된 현대인의 일상적 삶에 어떤 구원이 모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성찰.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 중래의 모습에서 조롱만을 읽는 건 그런 의미에서 공정하지 못하다. 농담을 진담처럼 건네는 게 홍상수의 주특기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서 그는 진담도 농담(조롱거리)으로 던지곤 하기 때문이다...

06. 10. 07-08.

 

 

 

 

P.S.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의 여인' 이미지는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1991) 맨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연상에 기대어 나는 <해변의 여인>이 장르와 무관하게 '홍상수식 바톤핑크'가 아닐까란 억측마저 해본다. "Are you in the pi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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