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딸아이의 방을 '진짜로' 만들어주기 위한 '공사'를 시작한 탓에 집안이 어수선하다. 서가들을 대부분 거실로 내오고 방에는 벽지를 다시 바르거나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하는 탓에 한동안은 준-전시상태로 지내야 할 듯하다. 그런 와중에 옛날 파일들도 정리하다가 언젠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번역문을 발견했다. J. M. 번스타인의 <예술의 운명(The Fate of Art)>(Polity Press, 1993)에서 하이데거를 다룬 장의 한 절이다(2장 8절). 기억에 부분적으로 발췌한 번역문인데 문장을 약간 다시 손보면서 가급적 병기된 원어들을 삭제했지만 번역문을 원문과 다시 대조하지는 않았다([ ]안의 말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던 것이다). 절제목이 '미적 소외'였던 탓에 '하이데거와 미적 소외'란 제목을 달아서 창고에 넣어둔다(아래 이미지는 다른 판본인데, 폴리티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까만색 장정이다).  

 

이 장 전체를 통해서 나는 예술과 미학의 담론이, 테크놀로지적 현전화의 지배에 대항하고 그러한 지배를 폭로(개시)하는 유리한 비판적 거점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해왔다. 이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예술작품에서의] 유한한 초월에 대한 억압으로서 역사 속에 자리한다. 이러한 거점과 역사를 하이데거의 에세이(「예술작품의 근원」)는 제공하고 있다. 「근원」에서 하이데거의 전략,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속을 다루는 그의 방식은 후기 에세이인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에서 이들의 관계를 표지화하는 방식, 즉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근원」에서 제기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미학적이지 않은 방식[비-미학적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 즉 (미적) ‘쾌감’의 안쪽에, 그리고 (이론적) 인식과 도덕(적 실천)의 바깥쪽에 울타리 지워지는 예술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하이데거는 미감적 지각이 ‘자신의 마땅한 제값’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는 테제를 세운다. 그리스 신전을 지적하면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또 다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예술이 (지배적이건 위축되었건 하여간에) 지금도 [그런 또다른 개념에 따른] 동일한 요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한 미학-외적 요구는 예술이 더 이상 단순히 미적인 것[미학]이라는 범주적 분류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수[동일시할 수] 없다는 자각 안에서, 그리고 그런 자각을 통해서 성립한다.

이 자각은 예술이 주류적인(진보적인) 문화, 즉 모든 창조를 생산으로, 현전화 작용을 [눈앞의] 현전으로(만) 축소시키는 지배적인 현전의 경제[단도리]와 병치되도록 내던져져 있다는 자각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논변은 그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데[그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리스 사원이 세계를 개시한다는 주장은 현대 세계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야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전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지만, “그 작품속에 들어서 있던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세계의 퇴거'와 '세계의 쇠퇴'는 어찌해볼 도리가가 없다.” 그리스 신전이 드러내주는 것은 한때 예술이 단순한 (심)미적 대상 이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호의 그림에도 이러한 ‘뭔가’가 더 있지 않는 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인식과 테크놀로지의 현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적인 것은 자신을 초과하는가?

 

 

 

 

휠덜린의 한 편의 자연시, 반 고호의 한 짝의 구두 그림, 하이데거가 들고 있는 이들 작품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고, 지지할 수 없으며,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개시에로 잡아끈다. 그것들은 우리를 거주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또다른 개시[세계의 열어젖힘]에로 유인한다. 이런 생각을 많이 듣던 소리로 옮겨볼까: 예술작품은 현재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어떤 현상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해가능성을 제공한다]라고. 그래서 예술은 그것이 상상적인 가능성들을 다루기 때문에 허구적이라고.

 

비록 하이데거의 테제가 처음엔 이런 식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근원」의 의도가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런 테제를 거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가능성’이란 조작적 개념은 현전을 (초월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현전화 작용]보다 먼저, 그리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현실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감적’ 인식을 (단순히) 취미로 축소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로)의 축소[환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 고호와 횔덜린의 작품에서 어떤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이 암시하는 바대로, 이들 작품들은 그저 ‘사물-존재’, 그러니까 미감적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예술은 한물갔지만 ‘작품-존재’적인 뭔가는 남아있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반 고호의 작품에 대해 그것이 “독특하게도 자신에 의해 열려진 영역 안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새로운 세계도 아니고 상상력의 영역도 아니라면, 그 영역은 환상 세계인가?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 또한 예술을 미적인 것[미학]과의 유착에서 구출하고자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미의식은 그 자신 자유롭게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미의식은, 즉 취미판단에 기초하여 예술작품들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우리의 자의식은 보다 더 기본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일단 어떤 예술작품의 요구에 붙들리게 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자유롭다고 느낄 수 없다.

 

여기서 가다머의 요점은 말하자면, 무사심성[무관심성]이 우리를 작품에 대한 경험이 그저 좋아하고 말고의 차원을 넘어서는[초월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예술작품의] 요구를 훨씬 강력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를 좇아서 그는 예술작품이 이미 시초부터 단순히 미적인 수용(혹은 거부)만을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의식, 즉 미의식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발원하는 직접적인[즉각적인] 진리 요구[주장]에 대해 언제나 이차적인 것이다.” 

취미 판단은 우리를 예술작품과의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론)적인 연계[동거]로부터 소외시킨다. 미적 소외의 경험은 작품 본래의 진리 요구와 그 요구에 대한 (심)미적 반응[수용]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청원과 거절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며, 작품의 유혹과 [그 유혹에] 자리할 수 없음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한 간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작품이 미학(의 테두리)를 초과하는 걸 경험한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정당한 가치평가는 그 간극 속에 놓이는 것이고 미적 소외의 경험(이 경험이 하이데거의 사유를 불러낸다) 속에 놓이는 것이라는 거다.

 

다시 한번 반 고호의 그림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를 잡아끌며 닦아세운다. 그러나 어떻게인가? 먼저 어떤 현상의 ‘진리’를 개시함으로써이다. 그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재-평가가 우리에게 그 작품에 대한 한 가지 해명으로서 유효한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 그림이나 시를 두고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해명이 보여주는 바에 상응하는 [진리] 요구를 감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그런 해명에 대해서 자연스럽지만 순진한 두 가지 비판적 반응이 있다. 첫째는, 마이어 사피로의 비판이다. 그는 그 해명을 다른 여러 가능한 성격부여에 대립하는 한 가지 재현적 성격부여로 다루면서, 하이데거의 해석에 당연한 시비에 건다. 그런 식의 비판[사피로의 비판]이 (비록) 부당하고 부적절하더라도, 그것은 재현(론)적이고 (심)미적인 고려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철저하게 주도하고 있는가, 그래서 미(학)적 담론의 지반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정말 잘 보여준다. 사피로의 비판은 본의 아니게도 중심의 지배, 즉 (심)미적 문화에 대한 진보적 문화의 헤게모니 앞에서 예술작품의 '어찌할 바 없음'을 드러내준다.    

 

하이데거의 해명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자연이 함께였고, 마치 하나였던, 그래서 제각기 따로 노는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던 과거 농촌 세계에 대한 순진한 낭만화로 비판하는 것은 보다 핵심에 근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동일한 비판이 <존재와 시간>에서 망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논의에 대해서도 가해질 수 있다. 이 두 경우에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뭔가 의고적인 접근방법이다. 도구(혹은 공간)에 대한 ‘사실적인’ 해명 대신에 하이데거는 우리를 이해와 실천의 이전 형태로 되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특정한 과거의 가능성의 재현을 도모하는 것처럼, 과거 농촌의 이데올로기를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수련발전 댐이나 로봇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망치나 시골 아낙의 구두와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질 수는 없다. 도구의 본질은 그때 이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사정이 그러하다면, 과거 도구 개념의 단순한 제시는 별로 의미가 없는 바,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가벼운 산책과 다를 바 없다. 「근원」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세계에 대한 이 두 개념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그 낙천적인 재현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사물들의 직접적인 둘레 속에 안주한다. 그것은 친숙하며 신뢰할 수 있고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 본성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구의 본성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겠다고 말할 때, 그는 명시적으로 이 두 해명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역사로부터 자유롭게 도구성을 숙고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존재와 시간󰡕에서의 그것, 그러니까 망치의 예와 아날로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가 세계를 탈은폐하는 그리스 사원과 [고호의] 그림을 대조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단지 그 시골 아낙이 알고 있는 바가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걸 알려줄 따름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형이상학적인 태도에 대한 하이데거의 자기비판과 모든 비역사적인 계시적 예술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한 해명이 그리스 사원과 대조되고 있는 결과, 도치된 형태로 [여기서도] 유효하다. 그리스 신전, 그리스 비극, 중세 성당, 그리고 <신곡>에 대해서도 이 작품들이 사물들에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드러남을 가지게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하이데거가 결코 충분히 해명하고 있지 않는 것이지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해서는 뭔가 그럴 듯하지 않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의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이데거는 탈은폐 같은 인식(론)적 체제와 동종적인 용어를 가지고 그 그림을 끌어들이는가? 반 고호의 그림은 어떻게 미학을 초과하는가?(즉 <존재와 시간>은 어떻게 형이상학을 초과하는가?) 비록 근대 예술작품에는 인식적 요구[진리 요구]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반 고호의 그림은 그리스 신전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그러한 요구 자체는 재현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작품은 여전히 생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물이며 하나의 작품이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예술작품의 요구는 과거의 (진리)개시의 가능성을 불러모으는 그 작품의 현존이고 물질적인 만들어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끄집어내고 싶은 것은 근대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의 성격이다. 그것은[그 요구는] 어떻게 자신을 주장하고 우리 생활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가? 한 가지 대답은 이미 제거되었다. 세계(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탈은폐를 통해서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좀 거리를 두고 볼 때, 그 작품이 세계의 탈은폐를 자신이 직접 전달할 수는[가져올 수는] 없지만 그 탈은폐를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까지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것은[근대 예술작품은] 자신만의 [세계]개시 가능성에의 (필연적인) 실패 속에 거주한다. 그래서 그것을 생산물이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창조됨은 작품(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세계와 대지를 뒤섞는다.

 

예술작품에 들러붙어 다니는 이념성, 허구성, 상상력은 그것의 내용들(농촌세계, 이상적인 미래 등등)의 기능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이고 그것의 예술작품됨이다. 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는 바로 예술 자체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들이다. 그들[근대 예술작품]의 세계 개시 실패,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개시하는 것, 그들의 인식(론)적 무능력, 진리문제로부터의 배제됨[소외] 등이 그래서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그들의 부정적 인식(능력)이다.

 

근대 예술작품들은, 천재의 작품들은 자신의 본질적인 불가능성[무능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되고 세계를 개시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를 자양분으로 삼아 번성한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다른 걸 할 수도 없다. 바로 거기가 [근대]예술이 서 있는 자리이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의 주변성을 특정한 주변성으로서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중심적인 것[주류적인 것]의 지배의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근대]예술작품은 예술의 힘과 잠재성에 대한 기억과 예감 속으로 (우리를) 잡아끈다. 이 잠재성은 그것이 현전의 실재성으로만 다루어지게 되면 그 작품의 진짜 의미, 기억과 예감의 작업을 숨기게 된다. 이 작업이 성취되면 현재적인 것은 특정한 현전으로 이동한다.

 

위대한 예술의 불가능성은 테크놀로지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예술의 운명이다. 만약 하이데거의 도식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적인 개시는 현전하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냄 없이 개시한다. 포이에시스에 대한 그것의 거부는 예술을 주변을 내보내고 그래서 예술은 그 근원[기원]으로부터 소외된다. 이것은 말끔하고 엘레강스한 정식화이지만, 틀렸다. 진리로부터의 예술의 소외는 하이데거가 공표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다른 문제이다.

 

 

반 고호의 그림이 떠맡아주리라고 하이데거가 기대했던 역할을 모더니스트 작품들만이 온전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데리다의 성취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예술이] 일단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일단 모더니티가 예술적 모더니즘 작품들을 통해서 그 반성적인 (자기)이해를 부여받은 이상, 하이데거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

 

06.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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