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이 그간에 또 쌓였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책은 없지만, 나름대로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은 책들은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다루려고 한다. 먼저, 마젤란식의 세계 일주로부터 시작해본다.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를 다룬 로런스 버그린의 <세상의 끝을 넘어서>(해나무, 2006)가 첫번째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의 기록을 남긴 마젤란의 당시 항해 과정을 재구성한 책"으로 "처음에는 향료 제도를 찾아 떠났지만, 기상천외한 모험과 폭력, 이국에서의 향락과 섹스를 겪고 마젤란의 죽음을 거치며 결국 유령선의 몰골로 돌아온 것으로도 유명한 마젤란의 항해. 그 이야기의 앞뒤 사정을 역사적 문헌들을 참조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자작나무, 1996) 등을 읽지 않았기에 내가 읽은 마젤란은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세계위인전집'의 마젤란이다(따지고 보니까 1970년대에 읽은 셈이 된다!). 남들처럼 역마살이 있는 건 아니어서 마젤란의 항해와 '모험'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오디세이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초등학교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어리석고 앞을 내다볼 줄 몰랐으며 몽상가적 기질까지 있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마젤란에게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한 인간의 나약한 이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하니 여유/여건만 된다면 느긋하게 '항해'에 나서볼 만하다. '마젤란의 무덤'까지?(정과리의 이 비평집 제목은 아마도 비평집으로선 가장 튀는 제목일 것이다.) 

 

 

 

 

마젤란의 항해 여정이 내겐 시간 여행의 의미를 갖는다고 적었지만,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이란 부제를 가진 해리 하르투니언의 <역사의 요동>(휴머니스트, 2006)은 실제 '역사 속의 시간 여행'이겠다. '근대성'과 '일상'을 키워드로 한.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근대성과 일상에 대한 권위 있는 설명을 통해 하르투니언은 일본과 아시아에 대한 지식 생산의 정치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이론적 정교화와 열정과 비전에 있어 이 책은 귀감이 될 만하다."라는 레이 초우의 추천사 덕분이다. <원시적 열정>의 여성 중국문화학자 그 레이 초우 말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20세기 전반 유럽과 일본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상담론을 탐구한 흥미로운 이론서. 우리 지식 사회에 넓게 퍼져있는 일상의 지형도를 꼼꼼하게 인식하고 세밀하게 서술했다. 미국의 동아시아학, 특히 일본학의 대표적 학자인 지은이는 정보수집과 실증성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있던 지역학에 비판적 문화이론을 도입하고 철학, 역사학, 문학, 정치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학제 간 연구로서의 '새로운 지역학'을 모색한다.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룬 '일상'은 '새로운 지역학' 사유의 자연스러운 귀착점. 지역학에 고질적인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깨기 위해 '동시적 근대성'을 사유하고, '동시적 근대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개념인 '일상'에 주목한다." 이젠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듣던 얘기이다.

차이라면 "아직까지 국내에는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없는 크라카우어나 아르바토프를 비롯하여 하이데거에서 벤야민까지 다양한 일상담론의 서술"을 다룬다는 점. 하지만 "미국 내 동아시학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이라는 건 친절한, 하지만 불필요한 멘트이다. 책은 '근대적 일상'에 조금만 관심있는 독자라면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정도의 멘트여야 하지 않을까? 한편 눈길을 국내로 돌리면, <근대의 첫경험>(이화여대출판부, 2006) 등이 근대적 일상을 다루고 있는 책들로 나와 있다. 학술서의 성격들이 강해서 다양한 일상담론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세번째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하는 나의 영화들'이란 부제가 모든 걸 말해주는 <말의 색채>(미메시스, 2006)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 적어놓고 보니까 올해는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이 '전설적인 작가'의 10주기가 되는 해이다. 프랑스 여성작가로서 그만한 명성을 누린 작가가 많지 않을 듯한데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한 뒤라스의 영화에 대한 담담한 증언과 고백을 통해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는 책으로 보인다.

La couleur des mots : entretiens avec Dominique Noguez

소개에 따르면,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그의 영화-글쓰기를 뒤라스 본인의 솔직 담백한 증언들을 통해 살펴보"는바 "작가이자 뒤라스 연구가인 도미니크 노게즈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하고 있는 책에는 영화의 스틸 컷과 현장 사진들을 비롯한 영화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함께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의 작품들, 뒤라스와 관련된 각종 미디어 자료들까지 수록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조감하게 한다"고. 그러니 뒤라스의 독자들이라면(아주 많지는 않겠지만) 놓칠 수 없겠다. 유지나 교수의 번역인데, 내 기억엔 역자의 학위논문이 뒤라스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뒤라스가 관여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판을 얻은 것은 알랭 레네가 감독한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일 테지만(뒤라스의 각본이다), 그녀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준 영화는 1984년 공쿠르상 수상작 <연인>을 영화화한 장 자크 아노의 <연인>(1992)일 것이다(토니 륭과 제인 마치 주연). 전세계적인 화제를 불러모은 이 소설/영화는 알려진 바대로 뒤라스 자신의 연애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언젠가 롯데극장(?)에서 본 기억이 새롭다(황톳빛 인도차이나의 강물결과 함께).

뒤라스에 관한 나의 또다른 기억은 몇년 전 한 작은 시립도서관에 갔을 때 서가에 뒤라스의 소설들이 잔뜩 꽂혀 있었던 것. 몇 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연인>의 개봉 이후에 번역/소개된 책들이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절판된. 덧붙이자면, 그녀가 세상을 뜬 1996년에 나온 <이게 다예요>(문학동네)가 얼마 안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뒤라스이다. 고종석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 내용이 없어서 '고작 이게 다인가?'라고 혼자 툴툴댔던, 아주 얇은 책이다. 여하튼 그런저런 시간여행을 뒤라스와 함께 떠나볼 수 있겠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지난 8월말 정년을 맞아 퇴직한 독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김주연의 <독일비평사>(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독문학자로서의 마지막 업적은 아니겠지만(아니기를 바라지만), 30년 가까운 대학 교단생활을 정리하고 기념하는 의미는 있겠다. 책의 제목에서 내가 떠올린 건 당연 저자의 막역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문학비평가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문학과지성사, 전집판2001)이다. 두 비평사 사이에는 20년쯤의 간극이 놓여 있는데, 그래도 나란히 놓으면 우정의 끈은 이어지는 것이지 않나 싶다. 문지4인방 비평가들의 '새파란'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아래 사진에서 맨왼쪽이 김현, 그리고 맨오른쪽이 김주연이다.

<독일비평사>와 함께 (아마도) 정년을 기념하여 같이 나온 책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넘어서>(문이당, 2006)는 저자가 드물게 내는 에세이/시론(時論)집. 가장 최근에 나온 평론집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문학과지성사, 2005)의 경우에도 그가 아직 '현역' 비평가임을 두루 과시한 바 있으므로 '정년 이후의 문학비평'을 더 기대해볼 만하겠다.   

 

 

 

 

끝으로, 불가리아 산문 문학의 대가로 추앙받는다는 작가 요르단 욥코프의 1927년 작 <발칸의 전설>(문학과지성사, 2006)이 출간됐다. 저자에 관해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불가리스'로나 알려진 나라의 문학을 접해보는 드물고도 유익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발칸에 대해서라면 주로 영화감독 쿠스투리차의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나 이즈마엘 카다레의 알바니아를 떠올리게 되는데, 욥코프 덕분에 불가리아를 첨가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 같은 걸출한 지식인들이 불가리아출신이지만. 아래 사진은 불가리아의 최고봉이라는 릴라산.   

책은 "이념과 관습,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사랑을 노래하는 열 편의 짧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는데, "불가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스타라 플라니나(발칸 산맥)'에 흩어져 있던 전설과 민담을 채록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재탄생시킨 단편들"이라고 한다. 소개를 더 보태자면, "발칸의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연과 민족 영웅, 범부 등을 그린 이야기 속에, 15~19세기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00여 년에 걸쳐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를 배경으로 하며, 사라진 과거의 아름다움이 몽상적인 필치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작가 욥코프는 '(불가리아 국가가 형성된 이후 근 1300여년 동안)불가리아인에 영향을 준 100대 위인'에 뽑힐 만큼 불가리아인들이 사랑하고 존경해온 작가이다. 불가리아 출신 작가들 중 노벨 문학상 후보에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런 욥코프와의 발칸 기행에 한번 나서볼까? 집시들의 바이얼린 소리도 옆에 끼고서 말이다...  

06. 09. 15.

 

 

 

 

P.S.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에 덧붙이자면, 천병희 선생의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단국대출판부판(2002) 이후 4년만인데, 직역투의 문장들을 좀더 유려하게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더 맘에 들어하는 것은 달라진 표지이다(예전 번역본은 표지 때문에라도 구입하고 싶지 않았었다). 이젠 오뒷세우스의 여정도 뒤따라가볼 수 있는 준비는 갖춰진 셈. 거의 등떠미는 수준인데, 그렇다고 짐짝 같은 우리의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다... 아,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어이할 것이냐? 우리의 뼈도 못추리게 만드는 이 세이렌(사이렌)의 마녀들을 모두 어이할 것이냐?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이 물귀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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