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지하철에서 읽은 오늘자 한겨레의 문화면은 영화 <괴물>과 <한반도>에 대한 김소영-정성일-허문영 3인방 평론가들의 대담을 싣고 있다. <한반도>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지난주에 <괴물>은 보았고 나로서도 하고픈 이야기의 가닥을 잡아가는 중이다(물론 비디오로 영화를 한번 더 본 다음에 무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영화판의 봉준호가 어쩌면 문학판의 김영하는 아닐까라는 것이다(우연히도 오늘 구내서점에서 손에 든 <작가세계> 가을호의 특집은 '김영하'이다). 즉, 내가 비교하고픈 것은 강우석과 봉준호가 아니라 김영하와 봉준호이다.

 

 

 

 

둘은 모두 이데올로기/정치/역사 시대에 대한 포스트정치적 포지션을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포지션이 그들의 유희정신을 지탱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대담에서 정성일이 일부 그런 지적을 하고 있다. 여건이 된다면 나는 이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이른바 '포스트정치 시대의 예술'의 행방에 대해서 두 사람은 각각 문학과 영화에서 가장 유력한 답안을 써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도 아래 대담은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기에 일독할 만하다. 단,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권하지 않겠다.

한겨레(06. 08. 18) ‘한반도’ 이어 ‘괴물’ 흥행 대박…정치영화 논쟁 점화

-<괴물>과 <한반도>, 제작비 100억원대의 ‘정치영화’ 두편이 동시에 나온 건 한국 영화사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두 영화의 정치적 어법과, 두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김소영 영상원 교수, 영화평론가 정성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허문영 셋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에서 셋은 <괴물>의 1천만명 관람을 놓고, 비극적 감정을 의도적·유희적으로 단절시켜온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어법이 이제 확실한 대중성을 확보했음을 입증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반면 <괴물>의 시선이 냉소적이냐 아니냐, 냉소적이라면 그걸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 오래도록 논란이 계속됐다. 대담 전문은 18일 발행되는 <씨네21> 567호에 실린다. (‘괴물’의 결말부분을 미리 알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성일=<괴물>을 두고 만들어지는 담론엔 의아한 구석이 있다. <괴물>이라는 영화를, 영화로만 가두려는 담론이 있고, 2006년 한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판본으로 읽으려는 담론이 있다. 또 대중이란 무엇일까라는 방식으로 좌표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도 있다. 민노당의 한 기획위원이 <괴물>에 관한 글을 썼는데 타이틀이 ‘괴물은 북한이다’였다. 이런 식으로 ‘괴물은 무엇이다’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괄호 안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제 <괴물>의 담론은 봉준호 감독을 떠나 사회 안에서 괴물을 누구에게 뒤집어 씌우는가의 문제로 전화한 듯하다.

김소영=보통 공포영화나 괴수영화에서는 타자성이라는 위치가 중요하다. 이 영화의 괴물에 타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모호하게 처리됐다. 미군의 독극물이 탄생시킨 괴물이라고 명확하게 시작은 하는데 그 다음부터 더 이상의 발전이나 확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괴물은 북한이다, 미국이다, 사회적 약자다 하는 식으로.



허문영=<괴물>과 <한반도>가 탈식민지 사회에 작동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두 영화는 다르다. <한반도>에서 국새를 찾는 이유는, 제국주의 질서로부터 국민국가의 주권을 완전한 형태로 만든다는 국가적 기획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한반도>를 기본적으로 우파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 국민국가를 완전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완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정을 하는 거다. 반면 국민국가의 하위 단위 계급인 집단, 지역, 가족, 개인 등이 완전히 배제된다. 영화는 인물의 사적인 동기를 전혀 배제한 채 오로지 견해로만 이뤄진다. 이처럼 국민국가 단위 아래 모든 층위의 단위를 무시한 영화는 거의 처음 본다. 그만큼 국민국가라는 단위에 대한 신뢰나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괴물>로 옮겨오면 똑같이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시선이 있음에도, 이 질서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지 설명이나 서사적 장치가 매우 모호하다.

정=<한반도>가 우파 이데올로기를 담보하고 있는 국민영화인 건 명백하다. <괴물>이 정치적인 영화이기는 하지만 좌파영화인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차라리 <한반도>가 냉전영화라면 <괴물>은 포스트 정치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괴물>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한국영화에 처음 도착한 포스트 폴리티컬 영화가 아닐까(*나는 이러한 지적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 점은 보다 세밀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의아한 건 이 명징하게 드러난 정치적한 영화를 왜 사람들은 가족영화로 덮어씌우고 싶어하는가다. 만일 가족에 관한 영화라면 강두의 딸 현서를 살리면 안 됐냐고 질문하고 싶다. 현서를 죽였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장르 영화의 관습을 거스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또 어떻게 모든 가족이 현서를 찾는 데만 매달릴 수 있나. 삼촌, 고모 모두 목숨 걸고 거기 매달릴 만한 모티브가 무엇인가. 국민주의만큼 납득할 수 없는 가족주의가 이 가족들을 사로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가지고 이 영화의 정치성을 덮어씌우고자 하는 걸 볼 때 포스트 정치영화의 불안한 미래가 느껴졌다.



허=이 영화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규정하는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영화 자체가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처음부터 현서가 죽는 설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오히려 가족영화로 남지 않기를 처음부터 계획했던 듯하다. 가족이 가족을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키는 와중에 사회적 연대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꼬마 세주를 구하는 장면, 그리고 세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장면에 있다고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명백한 설정이기 때문에 가족에서 출발한 영화가 빈민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은 충분히 평가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재미있는 건 <한반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반면 <괴물>에 대해서는 어떤 동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가지 질문하자면 <한반도>와 <괴물> 모두 완벽할 정도로 로맨스가 증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두 영화 모두 로맨스의 작은 스파크조차도 완전히 지우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본단위에 대한 출발점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다.

허=두 영화에 로맨스가 부재한 이유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공적인 견해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로맨스라는 사적영역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만명이라는 관객이 들었다는 건,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영화적 의제가 동시대인에게 시급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방증한다. 반면 <괴물>에는 로맨스를 개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상의 여백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봉 감독은 단편에서 장편까지 한번도 로맨스를 그린 적이 없다. 로맨스를 그리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로맨스는커녕 이 영화에서 가족들 간의 감정적, 정서적 연대는 충실하지도 않다. 가족애를 드러내는 순간 영화는 그 정서의 지속을 중단시킨다. 그것이 완전하거나 숭고하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봉준호에게선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라는, 대작영화을 만들면서도 끝내 대중적 코드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좋은 지적이다).

 

 

 



김=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그게 감독이 인지하는 대중적 코드로 등장하는 것같다. 슬픔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면서 재미를 유발하는 장치들 말이다. 다른 요소들이 틈입해서 파토스(정념)의 지속이 끊어질 때 사람들이 웃는 등의 엇박자식 리듬감이 실제로 대중적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닌가. 이건 박찬욱 감독의 코드이기도 하다.

정=2006년 여름 <괴물>의 대중적 호소력이 바로 이거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의 영화에 전위적 측면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팝’(pop)하다고 생각하다. 구태여 정의하자면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아방 팝 정도? 봉준호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만화적인 리듬과 팝한 감각이 있다. 또 이게 봉준호와 박찬욱을 잇는 선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 감독은 “오늘날 한국 관객들은 해피엔딩보다 비극을 즐기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방점은 비극의 호소력이 아니라 ‘비극을 즐긴다’는 거다. 비극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때 파토스가 없는 건 당연하다. 비극은 그저 구경거리가 되고, 미토스(이야기)가 밀쳐내는 정도에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축소인지 치환인지 대체인지는 토론해야 겠지만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뀔 때 대중적 감성이라는 건 급격한 퇴행이라고 생각한다.

허=여기서 두가지를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 한국 관객들이 비극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역대 흥행작의 대다수가 비극이다. 그 비극들은 <괴물>과 반대로 파토스의 과잉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식 비극은 팝한 거다. 봉준호와 박찬욱은 찍는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비웃음이 있다. 정치적 의제를 꺼내는 사람도 비웃고, 어떤 것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하는 끊임없는 조소가 있다. 또 그게 불러일으키는 유희적 요소도 있다. 그래서 2000년대에 비극적 대중 영화들을 즐기는 방식과 <괴물>을 즐기는 방식은 전혀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파토스의 과잉이 호소하는 대중적 요소가 있고 그것이 주류였으며 그게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를 300만~500만명대에 멈추게 하는 저지선이었다. 이제는 파토스 과잉뿐 아니라 파토스의 유희적 단절로 호소하는 방식도 그만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괴물>이 증명하고 있다.

김=엇박자나 비극적 엔딩이 흥행에 장애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로 보면 전부 플러스로 작용한 게 이 영화를 전환점으로 만드는 것 같다. 비극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건 김기영 감독의 특성이다. 호스티스인 딸은 울고 있는데 엄마는 몰래 돈 세고 있는 장면 등의 모멘트를 박찬욱이 거의 빌려갔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식 잃은 부모들 사이에 돈 얘기 나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보다는 인간적인 버전으로 봉 감독이 조롱과 비웃음을 유희할 수 있도록 영화에 넣는 것 같다. <괴물>이 대중영화의 새로운 분수령이라는 건 우리가 함께 도달한 결론인 것 같다. 대중적 감성의 재구성, 그게 전에는 300만~500만명이었다면 이제는 1천만명까지 가는 수준이 됐다.



정=<괴물>에 대해 허문영과 결정적으로 견해 다른 게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장면이다. 허문영은 연대를 얘기했는데, 나는 연대에 대한 봉준호의 비웃음으로 보인다. 통상적 연대라면 끝에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살아가야 하며, 에필로그는 없어야 한다. 강두가 밤에도 안자고 깨서 두리번거리는 에필로그는 1980년대라는 마법의 순간, 모두가 연대해서 싸웠던 그 마법을 깨버리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장면이 로케이션임에도 굳이 에필로그만 세트 촬영을 해서, 그곳을 시뮬라크라(복제물)화한다. 실제하는 세상으로부터 상상적인 시뮬라크라로 물러났을 때 무슨 의미인가. 그게 연대라면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왜 현서랑 같이 살지 않았나. 현서는 이 모두를 묶는 매듭인데 그걸 끊어놓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와 세상을 시뮬라크라화했을 때, 그 연대가 무슨 의미인가. 정치적 이성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실망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허=운동권 출신인 남일은 도바리의 천재이지만 그가 던진 화염병은 목표를 명중하지 못한다. 여기엔 저항운동을 상징하는 게 있다. 적으로부터 도망은 잘 치지만 정작 적을 맞추지는 못하는 것. 그러나 부수적인 기능은 한다. 현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세주를 구했다. 여기서 그나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감독은 묻는다. 바이러스나 괴물은 없지만 원인은 남아 있다. 그걸 유일하게 강두는 지켜본다. 그 옆에 밥먹는 아이가 있는데 혈연은 아니다. 이 설정에서 모든 것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럼 당신은 누구를 믿겠냐고 묻는 것이다.



김=그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낙관적인 해석이다. 이 영화에서 모성의 부재와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건 트라우마의 부재다. 세주는 괴물과 관련된 온갖 걸 다 보고 겪은 목격자이자 피해자인데 마지막에 보면 잘 먹고 잘 잔다. 모든 트라우마를 희석시키는 놀라운 결말이고 관객에게도 트라우마를 안 남긴다. 괴물이 살아날까, 독극물이 또 괴물을 만들어낼까 등등의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적으로 끝난다기보다는 트라우마를 없애면서 끝내는 결말이 아닌가. 내가 말한 허무함, 비관이란 건 영화가 이처럼 트라우마를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세주에게서 그것을 없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허=이 영화의 정치적 각성의 수준을 과장해선 안 된다. 그건 새로운 게 아니라는 거다. 21세기에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유될 만한 비관, 전망없음, 불안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의 특별한 비관적, 냉소적 시선을 읽는 건 이 영화의 정치적 사고를 지나치게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봉 감독은 미군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드는 순간부터 비관과 냉소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이 이 정도라는 거다. 그것이 뭘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없지만 깨어있는 행위를 영화는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해결 못하는 무력한 이 세상에서 봉준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정리 임범 김은형 기자)

06. 08. 18.

 

 

 

 

P.S. 참고로, 김영하(1968- )와 봉준호(1969- )는 대학 동문이다. 대학시절에 교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포스트정치'란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김영하의 회고담.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고 한다: "'우연히'였다. 학창 시절,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무협지에 빗댄 우스갯소리를 하이텔에 올렸고, 이것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이텔에 올린 글이 하이텔에 참여했떤 여러 사람들에게회자되고 이것을 본 출판업자가 장편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발표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협학생운동>(1992)이었다. 이후 '월간중앙' '뉴스메이커' 등에 당신의 정치현실을 빗댄 <거대한 뿌리> 등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글들을 쓰면서 이와는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자의식이 생겼다." 그 '다른 글'이 자신이 주문받아서 썼던 '정치소설' 이후의 소설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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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에 대해서 평하는 내용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얻어가요. 놀라운 영화랄까..;;

로쟈 2006-08-1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론가들의 지적대로 여백이 많은 영화인지라 백인백색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