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06. 06. 23)의 북리뷰들을 읽다가 비교적 크게 다루어진 미셀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모티브북, 2006)에 대한 임종업 기자의 '책소개'를 옮겨온다. 리뷰는 역자와 마찬가지로 리뷰어 또한 '그리스도교도'라서 이 '불경스러운' 책을 소개하기 마뜩찮다는 식의 소심한 엄살로 시작한다(부분적으로 발췌한다). 리뷰의 타이틀은 '세상 구원할 자, 무신론자!'인데, 이 페이퍼의 제목은 그걸 풀어서 쓴 것이다. 

-신문방송에 금기가 있다. 종교, 또는 종교집단의 실태, 문제점 또는 비리는 알아도 침묵한다. 떼거지로 몰려와 개판을 치거나, 소리지르고 뒤엎으며 야단법석을 떨기 때문이다. <무신학의 탄생>은 금기에 도전한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한국의 종교는 언론보다도 힘이 세다!).

-지은이는 프랑스의 도발적인 고교 철학교사. 번역자는 그리스도교도다.(...) 나는 이 책의 서평 또는 소개기사를 쓰고 싶지 않다. 나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고 한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데,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내세를 부인하고 교회를 부인하는 내용의 책을 어찌 소개하는가.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에 떨어질 터인데…. 나에게 이 책을 떠넘긴 <18.0°> 책·지성팀 한 아무개 팀장이 지옥에 동행할 것이 분명해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또 출판담당 기자라는 밥벌이로서의 일이거니 정상참작이 되지 않겠는가.

 

 

 

 

-자! 철학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한 나무에 얼씬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 여자는 일을 저질렀고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됐다. 창세기는 여성과 육신을 증오하고, 원죄에 시달리며 회개하고,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속죄의 길을 찾으며 운명에 순종해야 하는 신앙을 낳았다. 인간은 저능아처럼 살다가 죽으라는 운명이었을까. 지혜를 택한 하와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사탄은 노예상태의 세상에 자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끌어와 형체가 없는 이데아의 도시를 조작해냈다. 하늘과 땅을 나누어 낙원을 꿈꾸고 땅을 업신여겼다. 내세의 희망,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겠다는 염원은 ‘지금 여기’에서의 절망을 낳았다. 그리고 말구유에 넋을 놓고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낳았다. 근데 예수 이야기는 날조다(*이 '날조'에 관한 책들도 드물진 않다). 이 땅에서 살았다는 증거가 없다. 관련 고문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이념적 조작물이다! 1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해방을 얘기하는 예언자, 구세주, 복음의 예고자로 넘쳤다.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한 행동과 굳은 의지만으로 시작한 투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즉 당시의 시대적 히스테리가 결집된 응축물이다.

 

 

 

 

-예수를 창조한 인물은 마가. 예수를 본 적도 없는 마가는 당시 분위기에 사로잡혀 거짓을 꾸며냈다. 옛 선조의 글쓰기 수법을 모방해 프로파간다의 수법을 쓰고 기만책도 서슴지 않았다. 신약의 몇몇 구절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가르침·격언>을 비교해 보라. 예컨대 플라톤도 한창 때인데도 처녀막을 유지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고 수태고지는 아폴로 신이 몸소 행차해서 담당했다. 플라톤 역시 죽은 뒤의 삶,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믿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인간세계에 돌아온 예수에 앞서 피타고라스도 그랬다. 다만 사흘과 207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경’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관련됐다. 하여 곳곳에 모순과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이 포함돼 있다. 로마제국을 대신하는 빌라도 총독이 과연 ‘작은 동네 깡패’와 대화를 했을까. 게다가 라틴말 총독과 아람말 예수가 통역도 없이. 십자가 형도 의심스럽다. 유대의 왕을 자처했을 뿐 로마권력에 도전한 적이 없는 예수를 매달 이유가 없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통상 십자가형 죄수의 시신은 그대로 두어 날짐승, 네발짐승 밥이 되게 했고 잔해는 공동묘혈에 던져졌다. 한마디로 복음서의 화자들은 한 사내의 과거보다 종교의 미래를 말한 것이다.

-바울, 그는 예수를 독점하여 제멋대로 옷을 입히고 갖가지 사상을 덧씌웠다. 달을 못 채우고 난 조산아, 왜소한데다 대머리인 바울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신경쇠약 환자로서 성기능 장애를 가진 자로 추정된다(*저자가 아주 화끈한 성격이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증오는 세상을 향한 증오로 바꿔갔다. 세상사람들에게 독신의 삶, 순결, 금욕을 강요한 것은 그 탓이다. 예수는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며 가난과 불행도 하늘의 뜻이라며 노예적인 순종을 가르쳤다. 교회는 탄생한 순간부터 당연히 폭군과 독재자의 편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회주의자 콘스탄티누스의 변절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는 소수에서 박해하는 다수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교황청은 세속의 권력과 결탁히 권력을 휘둘러왔다. 나찌와의 협력, 종교재판, 노예매매, 인디안 학살…. 르완다 성직자들의 후투족 씨말리기. 사랑하는 이웃외에는 모두 무생물이다. 가나안을 유대인에게 주기 위해 야훼는 총력전을 펼쳤다.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고, 모기와 등에를 군인으로 삼고, 역병과 궤양과 피부병을풀었다. 야훼의 가슴에는 전쟁의 훈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성직자들, 그들은 하느님의 말을 대신 한다며 뻔뻔하게 하느님의 몫을 요구한다. 세금도 없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피장파장. 지은이는 말한다. 신에 대한 거짓신화는 깨뜨려져야 한다. 유일신 교도들이 뒤죽박죽 헝클어놓은 이 세상을 구원할 자는 무신론자다! 때가 오면 육신은 더이상 더러운 것이 아니며, 쾌락추구는 죄 짓는 일이 아니며, 지적 판단은 오만이 아닐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상대방이 적이 아니라 상호 주체성을 완성해갈 동반자가 될 것이다. 또 낙원도 하늘나라에 있는 허구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뤄낼 수 있는 이상향이 될 것이다, 라고.

-부조리한 세상에 정의로운 신이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진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렇게 용감하고 신랄한 책 못 쓴다. 책은 신문보다 무모하다(*'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정확하게 유신론자들의 구호이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믿는다!' 책이 신문보다 무모한 것은 한편으론 신앙이 학적 문제, 곧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즉 '알면 안 믿는다!'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면서 구원론의 문제, 즉 '믿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라는 걸 간과한 탓이다. 인간은 빗자루라도 믿는 존재이다! 최근에 신자수가 감소했다고 개신교단에서 대책 마련에 부심한 걸 보면 신앙은 사회학적 문제이기도 하고).

06.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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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6-23 13:17   좋아요 0 | URL
와, 대단한데요. 오강남씨보다 과격하네요.

연우주 2006-06-23 13:23   좋아요 0 | URL
제가 달 댓글은 아니지만, 가을산님, 오강남씨는 그리 과격하지 않은데요. 그 책<예수는 없다-이 역시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예수는 없다"구요.>의 제목만 과격했을 뿐, 내용은 무척이나 원론적이잖아요.^^

로쟈 2006-06-23 13:25   좋아요 0 | URL
대신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산 2006-06-23 14:22   좋아요 0 | URL
역시 쓰면서부터 우려했던 대답이 달렸군요.... ^^a